제목: 용의 결박과 그리스도의 나라 Ⅱ
성경: 요한계시록 20:1-6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복주셔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이제는 공중에 권세잡은 자를 따라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지 않고 이제는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며 이제는 하나님 품안에 거하며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그 영광과 나라와 권세를 봉사할 수 있도록 복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이 생명의 복으로 주의 백성들을 더욱 온전케 하실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벗으시고 부활하신 이 권세의 날에 주의 백성들을 주의 상으로 불러 모으시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생명의 교제 안에서 우리를 기뻐하시오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시는 그 생명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곧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영광이오니 오늘도 예수의 얼굴에 비취는 영광의 빛으로 주의 백성들을 비추셔서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시고 하늘의 권세를 봉사하는 귀한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주의 축복을 넘치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20장1-10절까지를 읽고 6절까지 강론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소위 천년왕국이 역사적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의 여러 사상들을 비교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냥 본문을 차례대로 강조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1절입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저 잠그고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여기 1-3절까의 말씀이 10절까지의 말씀의 서론격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용이 잡혀서 일천년 동안 활동을 못하는데 그 천년이 차면은 다시 잠깐 놓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일천년 동안은 어떤 기간이고, 또 잠깐 놓였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왜 잠깐 놓이는가 하는 말들을 그 뒷 본문에서 받아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용이 잡히는 장면은 19장 끝에 두 짐승이 잡히는 것과 연결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팔 재앙에서는 특별히 일곱째 나팔이 불었을 때 그때가 12장부터인데 거기서는 이제 마지막 악의 정체들을 드러내고 있는데 하늘에서 용이 내어 쫓기고 그 용은 밤낮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했던 자인데 공중의 권세잡은 자였습니다. 그가 내어 쫓기니까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그의 종들을 불러 올리는데 바다에서 짐승을, 또 땅에서 거짓 선지자를 불려 올려서 그것들에게 권세를 주어서 모든 사람들로 그 짐승들을 경배하게 한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온산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하는 것이 일곱 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제 일곱 번째 나팔을 불면은 일곱 대접 재앙이 나오는데 이 대접 재앙에서 중요한 것은 이 대접 재앙이 마지막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에서는 바벨론이 망하고 그리고 17-21장까지는 이런 악한 세력들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그 나타남에다가 강조를 둔 것이 주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2-16장까지는 어떻게 악이 활동할 것인가, 그 악의 정체와 활동과 그 권세 쪽에다 강조를 두어서 666의 표를 받도록 하고 표를 받지 않으면 다 죽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악의 정체와 활동과 그 권세, 그런 것이 강조되었는데 이제 여기 17장부터는 그 권세 쪽에다 강조를 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나타남과 차례대로 나타남과 차례대로 박멸되리라. 그들의 악이 계속해서 일어나겠지마는 그들은 끝까지 박멸되리라. 하는 것이 17-21장까지의 주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17장에서 짐승을 말했을 때도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데 다섯 머리는 이미 망했고, 지금 하나가 있지마는 곧 망할 것이고 앞으로 일곱은 오지 안했지마는 곧 올 것인데 그것도 얼마 있지 안해서 끝날 것이다. 그런데 여덟 번째가 올 것이다. 일곱이면 끝나야 되는데 여덟 번째가 올 것이다. 이 여덟 번째가 마지막 원수가 되겠는데 그 여덟 번째가 와도 그 실상은 일곱과 비슷해서 그것도 망할 것이다. 그것이 17장에서 주는 이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악의 세력들의 순차적인 멸망을 선언하고 있는데 18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고 이제 19장에서는 두 짐승의 멸망을 그리고 20장에서는 용의 멸망을 그렇게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장의 용을 사로잡는 것만 역사의 초기로 돌려버리는 것은 계시록 전체적인 문맥에도 안맞고 안맞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해석자들이 20장 용의 결박을 역사의 초기로 돌려서 이것을 복음의 시대다. 교회 시대다. 이렇게 설명을 했던가 하는 것은 계시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 사상 때문에 계시록을 그렇게 해석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어요. 서로 문자주의다 영해다 하고. 왜 이렇게 문자주의로 풀어야 되느냐 하니까? 너희들은 문자주의다. 천년이 진짜 있겠느냐? 하고 서로 논쟁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계시록의 순서를 따라서는 바벨론과 두 짐승과 용이 한 셋트로 차례대로 망해야 되는 것이 바벨론과 두 짐승만 망하고 용만 역사의 초기로 돌려서 다시 설명하는 것은 계시록의 흐름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용의 잡힘을 역사의 초기로 돌래서 그것을 교회시대다. 교회시대는 하늘 보좌에서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이미 죽으자들도 그와 함께 통치한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 품안에 있고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있지 않느냐? 우리가 그런 나라와 제사장이 아니냐?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소위 무천년설인데 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했느냐 하면은 계시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 사상 때문에 계시록을 그렇게 해석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 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오직 예수 믿어야만이 구원이 있고 그 외에는 구원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준은 똑같아야 되는 것이지 틀려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상입니다. 아무리 역사에 많은 변동이 있어도 하늘에 실체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림자고 하늘에 있는 실체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풀라톤 우주론 철학 구조를 따라서 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변하지마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고 불변하다. 보이는 세계가 아무리 많은 변화가 있어도 이것은 그림자고 그 실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은 똑같은 예수를 증거하고 똑같은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소위 우리 정통파 신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면은 그냥 이단으로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 믿는 시대 말고 예수님 재림한 뒤로, 19장에 예수님의 재림 장면을 그들도 인정하거든요. 백마타고 오시는 분, 그것을 인정하는데, 재림 뒤로도 천년동안 편안히 살다가 예수님 눈으로 보고 또 구원을 받고, 그 다음 천년 다음에 또 심판이 있고, 이런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렇게 공격을 하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지 지금 이 시대외에 다음 기회에 구원을 받는 것은 성경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 것이 소위 무천년주의, 또 어떻게 보아서는 신학적인 근본 사상으로 보아서는 우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런 것들도 전부 그런 사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서가 무천년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사상의 토대는 똑같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모든 시대에 똑같은 기준으로 구원을 받고 구원의 본질도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지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안되다. 이것이 기본 사상이어요. 그래서 에덴에서부터 예수님 오시도록까지 똑같은 십계명을 주었는데 십계명이 나타난 방식은 다른가 몰라도 정신은 똑같은 것이다. 이렇게 풀었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고백서에요. 그런데 우리는 실은 제대로 하자면 그것을 정죄합니다. 그냥 틀렸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에는 그런 구원관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으면 개인들의 운명이 어디로 가는가? 구원은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은 보이는 세계를 벗어나서 저 높은 곳에 가야되고 변하는 세계를 벗어나서 변치 않는 세계에 가야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 철학이어요. 그러니까 보이는 세계는 의미가 없어요. 그림자이니까. 그러나 성경은 보이지 않은 저 위에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세계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성경의 구원입니다. 그럼 왜 보이지 않은 천국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역사의 마지막이어서 구약 때는 가나안 땅에 함께하는 그런 구원, 가나안 땅에서 함께하시는 축복의 구원, 그런 구원으로 함께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썪어질 가나안 땅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하늘의 성소를 열었기 때문에 이제는 신약의 교회를 위해서 하늘의 천국이 열린 것이지 구약 때는 천국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어려서는 아무리 착해도 돈 천원 주고, 커서는 아무리 말을 안들어도 한 몫을 때어서 주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와 컸을 때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똑같다. 자식은 똑같다. 아버지의 사랑은 공평해야 되는 것이다. 보이까 큰형님 주는 것하고 동생 주는 것이 다르고 나도 어렸을 때 주는 것과 커서 주었던 것이 달라요. 그러면 변한 것인가? 그 변하는 것이 아버지가 자식을 키워가는 축복이고 만일에 그것이 변하지 않으면은 우리는 영원히 갓난 아이로 있을 것이어요. 그 변하는 것이 성경이어요. 이전에는 모세를 통해서 너희들을 휘장 밖에 두고 종으로 사랑했지마는 이제는 부활하신 아들을 통해서 너희들을 내 품에 두었으니 너희들이 나를 예수를 믿고 내 품에 살아라. 절대로 먹고 마심의 종으로 살지를 말아라. 그렇게 성경은 약속하고 있는 것이지 개인이 죽으면 저 좋은 천국가는가, 그런데 강조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약에 천국이라는 것도 그냥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가 생명이 지배하는 시대로 바꾸어진다. 이 땅의 부활, 만물의 부활에다 강조를 두는 것이고 실은 저 좋은 천국은 성경의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저 좋은데를 열어 보이는가? 실제로 우리가 죽어가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변화되지 않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남아있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죽은자들이 헛되이 죽은 것 같으냐? 아니다. 그들이 땅에 있는 장막을 벗으면은 하늘에 있는 장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뵐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하늘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지 하늘을 보이는 자체가 목표점은 아니어요.
지금 땅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죽음이 왕노릇하고 있지마는 생명이 왕노릇하는 새로운 세계로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 제일 끝에도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리고 위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하면은 누구는 아냐하면은 여호와증인은 이런 말을 쉽게 알아들어요. 그것은 우리하고 비슷하니까. 그런데 우리 보수파는 못알아들어요. 들어보니가 여기도 여호와증인 인갚다. 땅의 천년을 말하고 있거든요. 왜 우리 보수파 신자는 죽은 뒤로 천국가지 지금 땅에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통치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권능있는 세계를 열으실 것이다. 그때는 만물이 새롭게 될 것이다.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냥 죽어서 저 좋은데 가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제일로 전도할 때가 어디입니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믿고 갔냐, 안믿고 갔느냐? 아슬아슬하거든. 마지막 입장권을 끊어야 되니까. 그리고 살아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부르시고 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관리하고 주장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금 함께하는 시대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지 죽은 뒤로 우리 개인이 좋은데 가는가, 그런 아주 이기적인 그런 구원 이야기는 물론 성경에 있지마는 그것은 죽은 저편을 열어 보일려고 하는 것이지 그쪽이 목표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지금이 중요한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 신앙고백서는 구원은 똑같은 것이니까 19장이 예수님 재림이면은 천년동안 예수님 얼굴 보고 살다가 또 구원받고 하는 이야기는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고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은 역사의 발전이라는 의미가 없는 것이어요. 그러면은 구약 백성들은 대단히 억울할 것이어요. 그들은 우리처럼 안살았거든요.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어요. 우리는 메시야 오신 뒤로 하나님의 백성이어요. 그런데 그전 보수파는 원통할 것이 없습니다. 왜 나타난 것만 다르지 본질은 똑같으니까. 그래도 원통하지요. 왜 나타난 것이 그림자로 보이느냐 그러나 말이어요. 우리처럼 보여주고 믿게 했으면 좋을 것인데 우리처럼 상보를 착 열고 젖가락질 하라고 했으면 맛있는 것을 먹을 것인데 상보를 착 덮어버리고 알아맞추어 보아라고 하면은 어떻게 알겠느냐 그런 말이어요. 그러면 불공평이나 똑같지요. 실은 역사는 불공평이 역사에요. 변해야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봉사했던 것이 구원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 오신 뒤로 천하만민이 예수를 믿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처럼 이제 그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그 권세를 구체적으로 나타난 시대에 사는 것은 그들의 구원인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안했으면은 구약 백성들이 믿었든 소망은 의미가 없는 것이어요. 만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땅위에 그 권세를 드러내지 않으면은 우리가 믿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이어요. 예수님께서 왕이라고 하는데 무슨 왕이어요. 무슨 그양반이 왕이냐고. 왜 그렇지 안해요. 그러나 그분이 오셔서 천하만국을 통치하시면은 그때는 그분이 왕이십니다. 그런 것이 드러나지 않으면은 성경은 거짓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19장은 재림의 장면인데 20장은 재림 후에 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새로운 역사적인 초기로 돌려서 복음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아니다. 바벨론과 두 짐승과 용은 악의 세력들로 한 셋트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용의 멸망만 역사의 초기로 돌려서 다시 설명하는 것은 계시록 문맥에도 안맞고 실은 구원 역사적으로도 맞는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구원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시대마다 누리는 구원이 달라야 되어요. 제가 여러번 예를 들었지 안해요. 두 당사자가 사랑합니다. 컸으니가 변하지 않겠지요. 두 당사자가 사랑합니다. 그래도 약혼했을 때와 결혼했을 때의 사랑은 다릅니다. 왜 약혼한 사람이 결혼할려고 기다리겠습니까? 결혼해야만 약속했던 것이 목표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랬을 때 두 당사자 끼리 사랑한다는 마음은 똑같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들이 누리는 사랑의 질은, 사랑의 표현은 사랑의 양상은 약혼했을 때와 결혼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결혼을 할려는 것이어요. 그래서 둘이 사랑한 자체가 중요하지 결혼하든 약혼하든 무슨 상관이냐, 두 마음만 진실하면 된다. 요새 사람들 같지요. 그래 갖고 대충 살아요. 그리고 현대인들은 더 심히가지고 마음이 변해가지고도 결혼이란 제도에 매이기는 얼만큼 자기 자신에 충실하고 남을 인격으로 대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사랑할 때까지만 사랑하고 그 다음 계약이 끝나면 해마다 계약을 갱신하면 될 것이어요. 인제 계약결혼까지 나온 것이지요. 그것이 실존주의 철학이어요.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마음에 진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경영하시는지, 구체적인 삶의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은 불변하시니까 하나님은 언제든지 똑같으니까 우리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아브라함도 만났고 우리도 만나고 똑같은 하나님,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이 아니어요. 구약 때는 하나님이 빽빽한 시내산 불 가운데 나타나셨고 가까이 오지 말아라. 나를 보면 죽으리라. 아직도 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죽음 가운데 가두어 놓고 만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고 이제는 이 아들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은 내 품으로 들어와라. 내 상에서 먹고 마셔라. 나와 함께 즐기자.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와 하나이니라. 그렇게 약속하신 것이어요. 그러니까 약혼했을 때는 서로 사랑해도 아직은 조심해야 되어요. 아무렇게나 먹으면 안좋은 것이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그 소리가 안들려요. 둘이 비빔밥 비벼먹으면 안들리는데 결혼 전에는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틀리다 그 말입니다. 나타난 것이 틀리면 내용도 트리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의 진실, 이것 갖고 따져요. 진실치 않은 것은 둘 다 거짓말이어요. 진실하기는 진실하되 그 진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약혼과 결혼이 다르다 그말입니다. 약혼은 진실 안해도 되고 결혼은 진실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약혼도 진실하고 결혼도 진실해야 되지마는 약혼과 결혼이 나타나는 사랑의 양상, 누리는 사랑이 다르다 그런 말이어요.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지요. 모세도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처럼 이 복된 시대를 누린 것이 아닙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들은 지금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주님을 믿고 투쟁하고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주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이기고 믿음을 배반치 않고 순결한 처녀처럼 주님을 따르면은 주님 오시면은 그 죽은자들이 다 나와서 자기 생명으로 헌신했던 자들이 다 살아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그렇게 복된 시대를 약속해 주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큰 사슬을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그런데 여기서 누구를 잡느냐 하면은 용을 잡았습니다. 용은 12장에 하늘에서 내오 쫓긴 용인데 이는 어떤 용이냐 하면은, 하늘에 있었는데 어떤 의미로 하늘에 있었느냐 하면은 밤낮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는 자로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가 참소하면 그의 참소가 통한다 그 말입니다. 참소해도 하나님이 네 말을 안들어 그러면 하늘에 거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 하늘에 있으면서 밤낮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해요. 왜 참소합니까? 그들이 죄로 얼룩져 있거든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온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어도 그들도 반복되는 피흘림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전부 죄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사단의 참소가 통하기 때문에 하늘은 사단의 권세의 자리에요. 그래서 하늘의 권세잡은 자, 모든 세상은 그의 권세 아래 있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까지라도 그런 의미로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어요. 그러나 이제 여자가 낳은 아들이 하늘로 올라갔고 이는 장차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자입니다. 그가 올라가니까 용은 하늘에서 자기 처소가 없기 때문에 내어 쫓겼고 이제는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핍박의 때인데 자기의 부하들을 시켜서 한다. 그는 두 짐승을 불러 일으켰고, 두 짐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신부로 삼아서 세상에 자기 영광을 증거한 것처럼 바벨론을 자기 신부로 삼아서 자기 등에 태우고 만국을 미혹을 한다. 그렇게 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을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느냐 하면은, 옛 뱀인데 아주 나이든 뱀입니다. 무슨 뱀이냐 하면은 에덴에 있었던 뱀이지요. 그러니까 옛 뱀인데 마귀요 사단이라.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옛 뱀이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또 이 옛 뱀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기 전까지는 뱀이 활동했던 것이지요. 뱀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기 전까지는 온 세상은 소위 뱀의 권세 아래 있어요. 언제부터 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후로부터. 죄값은 사망이라.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온 세상이 죽음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왜? 아담이 용의 말을 듣고 범죄했거든요. 그때부터 뱀이 온 세계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여자가 낳은 아이가 위로 올라가 내어 쫓기기까지. 그런데 내어 쫓겼어도 장차 그가 오셔서 철장으로 다스리기 전까지는 용이 마지막 발악을 해도 용이 온 세계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지배하니까. 그리스도가 지배하니가. 그래도 마지막 시대여서 자기 종들을 불려들여서 발작을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사로잡아서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아담 이래로 온 인류가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그 대적은 잠잠하게 될 것입니다. 일천년 동안 가두니까. 그러면 왜 하필 일천년인가? 이것 갖고도 문제가 많지요. 어떠튼 기간은 일천년 동안은 아니어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기간은 전혀 없다. 그런 두 팀으로 나누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일천년보다 길면 길까 짧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국을 통치하시는 메시야 나라, 그가 본래 왕이세요. 그의 나라가 건설되는데 그 나라가 잠깐 반짝하다가 지나갈 이유는 전혀 없어요. 보좌 우편에 취이하신 이 권세 있는 나라도 2천년을 가는데 모세 시대 종살이했던 그런 나라도 근 2천년을 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영광을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그런 나라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이야기는 저는 생각도 못하겠어요. 어떤 사람은 이것이 문자적으로 천년이라고 그러면 저 문자주의자. 그 문자로 풀면 되겠냐? 성경에 상징이 많은데, 그래도 상징이 많다 해서 꼭 천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어요. 천이면 문자주의고 천이 아니면 잘 풀고 그런 것이 아니어요.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문자대로 푸는 것이 기본 원리에요. 단지 문자대로 풀었을 때 문맥을 깨뜨리거나 성경 전체의 사상에 맞지 않을 때, 그때는 조절하는 것이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일단은 문자대로 받는 것이 기본 원리에요. 그랬을 때 왜 나는 이것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거의 잡느냐? 이것 갖고 나를 잡으면 안됩니다. 왜, 문자적으로 받았다 하면 욕먹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왜 제가 받느냐 하면은, 창세기 5장을 보면은 아담의 계보는 거의 천년을 살았지 안해요. 옛 세계가 근 천년을 살았어요. 천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고 죽었고 죽었다고 하지마는 아슬아슬하게 천년을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아마 구약을 모델로 했을 때는 천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어요. 그리고 만일에 천년보다 기냐 짧냐 그러면은 저는 천년보다 더 길다고 말하고 싶어요. 왜 그것은 영광스러운 메시야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에 있기 때문에 길면 길지 절대로 짧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렸던 자들이 잠깐 맛보기 보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그의 왕권은 영원하고 영원하다고 했을 때 구약 개념으로는 장구한 시대인데 그렇게 했을 때는 근 천년 쯤 가야 맞을 것이어요. 일천년 동안 결박해서 무저갱에 잠그고 그 외에 인봉해서 천년이 차기까지는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합니다. 그런데 천년이 차면은 잠깐 다시 놓인다 그말이지요. 그렇니까 메시야께서 오셔도 그때도 아직 악의 세력은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다. 그 뒤로도 또 있지마는 또 그것도 끝잘나리라. 바벨론도 망했습니다. 백마타고 오신 분에게 두 짐승도 잡혔습니다. 용도 잡혔습니다. 그러면 끝장인가? 천년이 차도록까지 다시는 그 짓거리를 못하도록 메시야 왕국이 건설되겠지마는, 그 뒤로도 잠깐 놓이겠지마는 그것고 그들이 권세를 발휘할려고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못에 들어갈려고 살아난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아라. 어떠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계속해서 악의 세력이 나타나겠지마는 그것은 끝장나고 끝장나고 끝장날 것이어요. 그러니가 염려하지 말아라. 그것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메시지에요. 그래서 잠깐 놓이겠지마는 그것도 죽을려고 살아난 것이니까 놀라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재림하셔서 영광스러운 나라를 건설해 놓고 그 나라가 망한줄 아느냐? 그것들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순식간에 망할 것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지금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이 차도록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인봉하는 것은 무슨 목표로 그렇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항상 계시록에서 주님의 승리는 그의 교회를 위한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원수를 소멸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마치 애굽을 왜 심판하십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에 심으실려고 애굽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원수에 대한 멸망은 그 목표가 있을 것이어요. 왜 천년동안 결박해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합니까?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할려고 천년동안 결박했다고 그랬지요. 그럼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 때는 어떤 때입니까? 그걸 4절이하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이것은 주로 반복법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보좌를 보았다. 거기 사람들이 앉았는데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그런 것을 무천년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보좌는 전부 하늘에 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았지 않냐? 어디 보좌가 땅에 있냐? 그것은 문장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보좌를 항상 위로 올려버리면 안되는 것이어요. 여기서 분명히 백마타고 오신 분이 내려와서 일판을 벌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저 하늘에 보좌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안맞는 것이어요. 여기서 첫째는 항상 서두적인 설명이지요. 먼저 말하기를 보좌들을 보았다. 거기 사람들이 앉았다. 어떤 의미로 앉았습니까? 심판하는 권세로 앉았더라. 그 다음에 그것을 받아서 설명하겠지요.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여기서도 그의 반복법입니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았다. 그들은 어떤 의미로 목베임을 받았습니까? 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음으로 그렇게 됐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거의 반복적인 설명이어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목베임을 받았고 누구에게 고통을 당했습니까? 다른 말로 설명하기를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아니하고, 그러니까 그들이 죽었든지 살았든지 상관이 없지요. 그런데 계시록 13장을 보면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다 죽지요? 누구든지 죽어요. 매매하지를 못하게 해요. 그러니까 그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으려고 숨어서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순교자도 있고 순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더라. 이런 두 무리를 가르려는 것이 아니어요. 13장에서는 누구든지 다 죽더라.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반복적인 설명이어요. 다시 보십시다. 보좌를 보았다. 거기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그러면 누가 앉았는지 설명하겠지요.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받은 자들이더라. 그러면 아이구 죽은 사람만 가는가, 산 사람은 못가는가 하니까 그 다음에 산 사람을 설명하는 구조보다도 그러면 왜 그들은 목베임을 받았던가? 누구와 싸웠던가, 누구에게 예수를 하나님으로 증거했던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께서 신실히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한 증인으로 증거하고 죽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은 실은 같은 것이어요. 실은 그들은 짐승과 싸웠던 것이다. 짐승과 우상과 싸웠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산업을 다 빼앗길 때도 그들은 결단코 우상에게 경배하지 안했다. 그렇게 해서 목베임을 받은 것이 아니냐? 지금 순교의 무리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들이 살았다. 이 말을 가지고 에제산인가 뭔가 합니다마는 살았다는 말을 가지고 이것이 부활이라는 말이 아니냐? 그러니까 요한복음 5장을 보아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사망의 부활로 나오리라. 동시적인 부활을 말했는데 이것이 무슨 동시적인 부활이냐? 여기는 악인의 부활은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 부활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2장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죽어도 살겠고, 영적인 부활, 그 영적인 삶, 중생,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지 무슨 육체적인 부활이냐? 그렇게 무천년자들은 단어 풀이를 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리의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주제에요. 그러니까 싸움을 말할 때는 싸움 잘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어요. 여러분 6.25 그러면은 죽은 사람, 그러면 산 사람은 무엇합니까? 죽은 사람은 국립묘지에 묻히고 야단하는데 산 사람은 전쟁에도 안갔다오고 아무도 돌보지 않지 안해요. 부상이나 당했으면 모를까. 그러면은 산 사람들이 훈장은 다 받았을 것인데 그러면 왜 6.25하면 죽은 사람만 언급하는 것이어요. 그들은 죽음을 통해서 충성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그러니까 6.25가 제일로 높은 것이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가령 우리들이 전쟁이 났다고 하십시다. 그때 애국자가 누구냐? 총 잘 쏘는 사람이어요. 그때는 무슨 세금을 잘 냈느니, 교통질서를 잘 지켰느니 하는 것은 세지도 안해요. 그때는 누가 총을 잘 쏘고 포로를 몇 명 잡았냐? 이런 사람들만 상주고 훈장주고 한 것이 동아일보에 나지 그때도 뭐 후방에서 교통정리 잘하고 좌특통행 잘하고 세금 잘내고 나도 휼륭한 애국 시민이라고 그러고 붙어 보았자 안되는 것이어요. 왜 싸움이 주제이니까. 계시록은 싸움이 주제에요. 그러니까 누가 예수님 재림하시면 살아납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자로 부활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증거하였고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심으로 영광을 주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증거했고 아버지는 아들을 증거해서 자기의 증거를 완성시켰습니다. 만일에 아들이 부활하지 못했으면은 아버지도 영광을 받지를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들이 증거했고, 그는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증거했는데 하나님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히 증거하심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누가 그와 함께 앉았습니까? 바로 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짐승은 용의 권세를 구현하는 악한 권세입니다. 온 세상이 다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매매하지 못하고 굶어 죽습니다. 그래도 목베임을 받고 그에게 경배하지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충성스럽게 증거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른 것처럼 예수를 충성스럽게 증거한 사람들도 주님께서 살리셔서 그와 함께 보좌에 앉게하시고 통치케 하신다.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하리니 이는 첫째 부활이다. 여기서는 예수님과 함께 충성스럽게 죽은자들,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시인했든 것처럼 이제는 죽음으로 시인했든 자들을 예수께서 죽으셨지마는 살으셔서 보좌에서 통치하신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죽은 자들도 살아서 예수와 함께 통치한다.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은 아직 살지 못한다. 저는 이 앞에 설명을 아마 천년 왕국 때 아브라함은 아니고 우리 신약 교회가 부활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마는 요한 계시록은 신약 교회도 강조하지 안해요. 이긴자들이 살아난다고 여기다 강조하지 신약 교회가 부활하고 구약 교회는 하나님 백보좌 심판에서 살아난다. 모든 죽은자들이 살아나지 안해요. 그렇게 지금 나누고 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그런 말이 가능하지마는 여기서는 그런 말이 아니라 지금 너희들이 죽겠는가, 염려하지 말아라. 그들이 제단 아래서 언제까지 우리의 피를 신온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신교자들의 피가 차기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반드시 그들의 피를 갚을 것인데, 어떻게? 재림하셔서 용을 무저갱에 잠그고 그 졸짜들을 전부 불못에 던짐으로 그의 왕권을 구현했을 때 예수님께서 죽어서 제단 앞에서 호소했던 그들도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리라. 그렇게 승리자의 상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계시록 20장의 주제이지 여기는 신약 신자의 부활, 구약 신자의 부활 그런 것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자기 죽음을 통해서 충성스럽게 증거한 자들은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천년왕국 때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증거는 못했는데 믿기는 믿은 자는 어쩔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갈까요? 물론 백보좌 심판 때도 살아나니까 거기도 상급은 있겠지마는 계시록은 믿는 신자가 진다는 이야기는 꿈에도 생각않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들은 셩경을 우리의 경험으로 푸니까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작은자, 믿음이 큰자, 하는 이야기를 자기 양심에 그것은 옳다 하나님 말씀이다. 그래도 겁나니까 못해요. 그런 것을 믿음이 약한자, 그렇게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에요. 네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너를 부인하리라.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다요. 예수님 공로로 가니까 우리가 그럭저럭 살아도 예수의 피가 무시안당하니까 천국은 가야되지 이렇게 성경을 풀고 있는데 성경은 그런 구원관을 알고 있지를 안해요. 어느 아내가 세상이 두려워서 정조를 범한 아내가 있겠어요.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말하자면 우리 이조때만 같아도 그런 일이 없어요. 요새야 흔하겠지마는. 이조는 때는 그런 법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두고도 사람이 약해서, 이것이 정상적인 아닌가, 하나님, 나도 사람이라 밥먹고 살아야 되는데, 그리고 주님께서 살아계신 여러분들아 세상을 이겨라. 그러면 스트레스 싸인다. 목사님은 직장을 안갖고 설교만 하니까 쉽게 하지마는 우리는 눈치볼 일이 너무 많소. 그러고 푸는 것이어요.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말하고 있지 우리 개인의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사랑은 모든 악을 이기는 것이어요. 구약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면은 그들은 모든 이방 백성을 이깁니다.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권능을 주었으니까. 부활하신 아들은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어요. 죽음의 권세도 그가 밟았어요. 그가 위로 가시니까 용은 내어 쫓겼어요. 지금 용은 발자국은 있지마는 그의 시대는 아니어요. 그런데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것 때문에 바벨론이 들고 있는 화려한 금잔 때문에 그런 것이 속아서 마시면은 취하게 될 것이고 함께 망하게 될 것이다. 내 백성아, 함께 안망할려면 바벨론에서 도망나와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안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 우리가 밥먹고 살아야지요. 어떻게 그렇게 한다요. 천국에나 가고, 내 약함을 다 아시지 안해요. 하나님. 그러니까 이방종교는 자기 신을 두려워하지요. 내가 이런 일을 하다가 벌받으면 어쩔까, 우리 새끼들이 아프면 어쩔까, 덜덜 떱니다. 우리들은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많도다. 많이 많이 용서하도다. 하고는 제일로 맘대로 사는 것이 우리 보수파에요. 하나님은 자비하시니까.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어요.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겠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막나니 짓을 하면은 동네 아이들만도 못한 것이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려서는 아버지를 조심하는데 커서는 아, 보니까 자식 이긴 부모 없다더라.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은 그는 큰 자식이 아니지요. 모세 때는 모세의 증거를 거역한 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때는 두 세 명의 증인만 있어도 죽었어요.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증거했는데 그 증거를 무시하고 어떠튼 밥먹고 살아야되겠다. 그렇게 세상의 권세에 굴복해 놓고도 하나님이 내 왕이며 내가 구원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어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끊어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래도 살도록까지는 용서받고 대충 살아야 되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무시하는 것이어요. 여러분, 일반 전쟁 때도 전쟁하면 승리를 말하지 전쟁해도 탈영만 안하면 참호에 숨어서 오줌을 쌌더라도 그래도 탈영병은 아니겠구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권세있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이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제사장이어요. 구약 때는 찬란한 금 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냈지마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신 주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영광과 권능을 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주셨고 아들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는 이왕에는 약한자로서 세상에서 죽임을 받았지마는 그는 강하신 자로서 부활하셨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피흘리신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상에서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세력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팔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세력은 없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신인하고 충성스럽게 증거하심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충성스럽게 증거한 아들을 살리셔서 하늘 보좌에 앉히시사 이제는 공중의 권세잡은자, 사탄의 세력을 끝내셨습니다. 그가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그의 교회가 땅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 주님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증거하면은 하나님이 아들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권세를 주신 것처럼 그의 백성들도 그와 함께 살아나서 그와 함께 영광 중에 통치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이런 권세를 갖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충성스런 그런 제자도 없었지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러 끌려가셨을 때는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약한 모델을 삼아서 베드로도 세 번이나 부인했으니 우리 같은 것들이야 몇번이나 그런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나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장담하는가?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마는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 왜 지금은 따라올 수 없습니까? 목자장을 치면 양이 흩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죽으셔야 되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을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시면은 그는 살아나신 목자장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이신 목자장입니다. 이제는 내 뒤를 따르라.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다녔지마는 이제는 나를 따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처라. 주님은 이처럼 영원히 사랑하시는 목자장으로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 같은 사람도 기꺼이 십자가에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부활하사 살아계신 주님을 목자장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가 지금 세계를 통치해도 세상은 주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충성스럽게 아버지를 증거하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로 존귀하게 된 것처럼 주님을 증거한 그의 백성들도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왕노릇할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목베임을 받은 자들, 자기 이름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 산업을 빼앗긴 자들을 위로할 것이고 그들의 피를 갚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땅위에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본문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은 물론 약합니다. 교회를 지키는 성곽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는 성곽없는 촌락처럼 지키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부활하신 주님, 참으로 우리의 왕이시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분이 일곱 촛대 가운데 일곱 별을 붙드시고 거니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교회를 깨뜨릴 어둠의 세력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와 함께 목베임을 받으면은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 부활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때문에 굶으면은 예수 때문에 여러분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의 수고를 갚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교회가 이렇게 연약한 가운데 있지마는 주님은 강하십니다. 이전에 모세를 따랐던 백성들, 여호수아를 따랐든 백성들, 다윗을 따라서 전쟁했던 사람들도 뒤로 물러나 숨은 졸병들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대장은 앞서 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휘장 안으로 먼저 들어가셔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군대요 하늘에 속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어둠의 세력이 없습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던져지겠지마는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의 피가 헛되이 흘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셔서 그가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자기 이름을 위해서 목베임을 받은 자들을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게 하셔서 그가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들이 이 믿음을 지켜서 우리 안에 계시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영을 따라서, 우리들이 죽은지라도 우리 안에 계신 충성스러운 주님의 영을 따라서 우리들도 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승리하는 군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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