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인을 떼심 II

찬미예수님 2026. 1. 28. 21:01

제목: 인을 떼심 II

성경: 요한계시록 7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복주셔서 하나님 품안에 살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생명의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우리의 생명이오니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크신 사랑을 주의 백성들 중에 나타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온총을 새롭게 해주시옵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서 형제를 주의 몸으로 사랑하는 귀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7장을 펴십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제일 조심해야 될 것은 그 문장에서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만을 알려고 그래야되지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그 문장에서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전에는 어느 한 문장을 읽고도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거기서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을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니까 어떤 성경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든지 그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모든 성경과 일치할 것이다. 이런 개념을 갖고 접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위 존재론적인 철학에 토대한 것인데, 가령 나타난 양상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똑같다. 그러니까 어느 성경이든지 그 겉옷을 벗겨버리면은 그 알맹이는 똑같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이 성경과 저 성경은 아무런 차이가 없이 어느 성경을 읽든지 거기 나타난 형식만 벗겨버리는 내용은 똑같도록 우리가 성경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철학에서는 가능할련지, 철학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겠지마는 실은 그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문장이든지 그 배경과 문맥에 의해서 의미가 한정된 것이고, 가령 철학에서도 그렇습니다마는 어느 시대 어느 것을 이해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시대의 이해력에 맞아들어가는 것이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담아버리고 그런 것은 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도 실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까지 성경을 그런 식으로 풀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그 배경에서 그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가, 거기서 의미가 한정되고 특별히 하나님은 역사적인 하나님이셔서 그 역사에서 자기 백성과 어떻게 동거하고 동행하시는지,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을 주시는 것이지 그 역사를 초월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론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번 예를 들지마는 부자지간의 관계도 어떤 구체적인 관계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나는 너희 아버지다. 어떠어떠한 아버지다. 이렇게 자기를 표현했을 때는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이론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표현한 아버지가 표현한 대로 아들에게 아버지의 노릇을 해주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들은 표현된 대로 거기서 아버지를 받고 아버지를 받는 것이 아들의 지혜요 생명이 되는 것이어요. 거기서 그때 구체적으로 말하는 아버지를 빼버리고 도덕 교과서를 배우는 것처럼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하고 연구를 하면은 그때 구체적으로 나타낸 그 아버지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는 역사가 생명이지 역사를 떠나서 본질이 무엇이니 그런 것을 추구해서 새롭게 생명을 획득하고 그런 풀라톤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런 것을 조심하면 될 것입니다.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시작하느냐 하면은, 제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그전에 해석했던 것을 거의 참고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접근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전에 계시록을 풀 때 제가 생각하기로는 꾀 잘 풀었어요. 아마 제가 알고 있기로는 꾀나 잘된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계시록을 다시 풀면서 그전에는 어떻게 풀었는고 하고 전반적으로 참고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그전에 어느 분이 말하기를 계시록을 다시 한번 설교하면 어쩌냐? 그랬을 때 꼭 그럴 것이 무엇이냐. 내가 볼 때는 천년왕국을 바꾸었으니까 그것만 바꾸면 별로 손댈 것이 있겠냐고 했더니, 이번에 다시 보니까 새롭게 시작한 것이 아주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틀린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전 신학 이론이 전반적으로 담겨있어서 그전 신학적인 토대를 갖고 설교를 했다면 그건 굉장히 잘된 설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속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역사적인 문맥에서 푼다고 했을 때는 성경 본문에 없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가 있고, 또 계시록 사상과는 다른 그전 신학 사상도 많이 들어가 있어서 그전 신학으로는 잘된 설교일는지 몰라도 구속사로 보았을 때는 여러 가지 헛점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그전에도 그랬다고 지금도 하면은 다음에 보면 목사님의 설교가 틀렸을 것인데, 저도 이제까지 전자재품을 새 것을 안샀거든요. 조금 지나면 구형되니까 나중에 최신형을 살려고 안산 사람인데 그러면 여러분이 진리에 대해서도 그전에 그랬으니 이번에도 해봤자 좀 지나면 나중에 또 고칠 것이니까 어느 말을 믿겠느냐 하고 진리를 깨닫는 상대주의에 빠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그전 것을 분별한 것이고 구속사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틀려지지는 않을 것이어요. 물론 가다가 돌도 씹이고 뉘도 씹이고 해서 아이고 그런가, 우리 해석에는 완전함은 없습니다. 그런 점은 있겠지마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 것은 받으셔도 될 것입니다. 이 신학적인 이론을 먼저 이야기한 이유가 오늘 해석할 7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7장에 보면은 인맞은 144,000인이 있고그 다음에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나타나고, 이런 두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런 무리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전에는 이 144,000을 그냥 구원받은 총 수, 이스라엘과 이방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총 수, 이스라엘은 문자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교회를 신약의 참다운 아브라함의 후손, 참다운 이스라엘,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은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전에는 그렇게 해석을 했는데 그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문제 때문에 이런 신학적인 이론을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약간 반복하면서 들어가겠습니다. 계시록은 당시 로마 정권 밑에서 핍박받는 교회를 격려하고 굳게 해서 로마 황제 숭배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오직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무릎 꿇는 그런 신앙의 격려를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이 주제입니다. 그 싸움도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싸움, 싸움이 주제에요. 여기서 다른 모든 것을 한거번에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싸움이 주제입니다. 그래서 지금 핍박받는 교회에 대해서 장차 그 나라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이 후에 될 일을 보이리라. 하면서 펼쳐 보이는 것이 지금 계시록이어요. 그런데 이 계시록에서 제일로 중요한 장면은 4장과 5장에 나타난 하늘의 사령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시고 완전한 친교를 주시는 분으로 4장에서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이제 이 하나님 나라는 새롭게 진행이 되는데 어린양이 천하만민을 피로 값주고 사셔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 분이 그나라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영해 내실 것이어요. 이것이 인을 떼는 것이라고 5장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지마는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친교 가운데 있고, 완전한 영광을 보고 있고, 그리고 이 교회에 주님은 모세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셔요. 그가 천하만민을 그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이제 이 백성을 통해서 만국을 그의 나라로 정복해 나가실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설립함으로 만방에 하나님 나라 빛이 비추었는데, 그때는 가나안 땅만 하나님 나라고 그 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좌에 취임하신 분, 죽기까지 하나님을 시인하시고 충성스러운 증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분, 이분이 만민을 피로 값주고 사셔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로마 정권 밑에서 세상이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 그리스도 안에 안식, 그런 나를 이룰 것이다. 그것이 지금 4, 5장에서 펼쳐 보이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경영입니다. 그러니까 인을 뗀다하는 말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을 떼고나면은 일곱 인이 있고 그 다음에 일곱 나팔이 있고, 일곱 대접이 있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일곱 인을 떼면은 마지막 여섯째 인이 역사의 종말이고 일곱째 인은 일곱 나팔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까지라도 여섯째 나팔을 불면은 실은 그것이 역사의 마지막이고 일곱째 나팔은 일곱 대접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 일곱째 대접이 역사의 마지막이 되겠지요. 이렇게 제일 마지막 인에다가는 일곱 나팔을 담고 있고, 마지막 나팔에다가는 일곱 대접을 담고 있고, 이렇게 해서 점층적으로 확대되면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어요. 전체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나팔이나 대접은 전부 인에 포함된 것이지, 인이 따로있고, 나팔 따로 있고, 대접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은 인을 떼시는 분, 그리고 그 인에가 나팔을 부는 천사들, 대접을 쏟는 천사들의 활동들이 전부 포함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을 뗀다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의 경영을 펼쳐 보이신다. 감추었던 것을 열어 보이신다. 펼쳐 보이신다. 그 분이 어린양이십니다. 그러면 인은 무엇이냐 했을 때, 인이 핵심인데 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실 때는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방과 싸우셨지요. 애굽에서는 바로의 군대와 싸우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둘러있는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셨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열국의 제국들과 싸우시고, 그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다니엘이 인자와 짐승의 싸움을 보았는데 그런 마지막 될 일들은 인봉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인을 여기서 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은 종말에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펼치신 분이라. 그렇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항상 재앙을 내리시는 일이었어요. 특별히 애굽에서 재앙을 내렸을 때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이나 상관없이 내렸지마는 나중에 조금 지나서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되고 모든 재앙은 애굽에만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탄 자가 있는데 그 흰말은 대장말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흰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가는 안나타나고 이기고 이기려고 하더라. 이김이 핵심이지 다른 말은 안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들은 이런저런 재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환상들은 스가랴서 환상들과 같다고 말슴을 드렸습니다. 스가랴서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에게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는지를 골자기에 말을 타고 계시는 환상을 통해서 나타내고 계시는데 그런 환상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흰말은 대장말이고 이김이 핵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깁니까? 많은 재앙들을 통해서 이깁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나 감람유는 해치 말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축복을 담고 있는 표상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호되고 그 모든 재앙들은 적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은 전체적인 성경과 맞아들어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말은 색깔이 묘해가지고 거기서는 색깔이 묘한 것처럼 재앙도 혼합되고 섞어진 것처럼 총체적인 재앙이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나타났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재앙을 내려서 역사를 경영하시는가? 아까도 말했지마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그를 대항하는 모든 적과 싸우시는 분으로 구약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다섯째 인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우리의 피를 신원해 주지 않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습니까? 물론 이 사람들은 원수 갚아달라는 말은 아니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원이 말하자면은 갚아지고, 그들의 모든 원통한 죽음이 변호되었을 때만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개인적인 원수를 갚아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적군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우리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을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이지 그냥 우리만 봐달라는 말이 아니어요. 그래서 여기서 말씀이 있기를 순교자의 무리가 차기까지는 기다려라. 하면서 흰옷을 주고 잠시 쉬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보좌 앞에서 편안히 안식할 것인데, 어느 때까지입니까?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입니다. 그러니까 핍박은 계속될 것이어요. 그런데 그들의 죽음은 반드시 갚아질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반드시 보상되지 그대로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쉬고 기다리지마는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고 그 기도에 응답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는데 거기 우주적인 격변이 일어나고 그리고 어린양이 강림하셔서 그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는 것이 여섯째 인이었습니다. 여섯째 인은 그러니까 재림의 상을 그렇게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인제 7장이 해석할 때 문제입니다마는 여기 여섯째 인을 떼었으면은 그 다음 일곱째 인은 8장에 나와요. 그러면은 7장은 무엇이냐 했을 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재림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이루어질 것이 7장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정통적인 해석은 그런 해석은 아닙니다. 6장까지 역사의 종말이 나타나고, 7장에 이제 일곱째 인을 떼시면은 그 일곱째 인에가 일곱 나팔이 들어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소위 중간 계시다.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왜 그렇게 종말이 아직까지 지체되는지, 왜 종말은 와야 되는지, 그 의미를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 일곱째 인에다가 일곱째 나팔을 넣어서 설명한다. 이것이 우리 보수파에서 하는 해석인데 그 해석이 맞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들이 어떤 마지막 결론을 도달하면은, 연속극도 그렇지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는 잠깐 쉬면서 그전에 중요한 일들을 한번 반복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을 내지 안해요. 설교할 때도 마지막 결론을 내릴 때는 이전에 설명했던 중요한 어떤 것들을 짚어가면서 마지막 결론을 내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일 뒤에 마지막 재림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는데 그 재림을 강조할 때까지라도 다시 이전에 것이 한번 반복되는 것처럼 그렇게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번 나팔이 불어지면은 다시 앞에 있었던 그런 재앙들이 반복되어요. 내 말을 통해서 있었든 재앙처럼 그런 재앙들이 반복되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점점 그 재앙의 강도가 깊어지지요. 그렇게 해서 마지막 일곱째 대접에서는 마지막 심판이 나타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새 컴퓨터 한 사람들도 그럴 것이어요. 그 무슨 프로그램을 잡고 그 중요한 장면을 딱 잡으면 거기서 자기가 보고자 한 것이 전반적으로 다 밝혀지겠지요. 처음에는 큰 것부터 열었다가 그 다음 마지막 자기가 작업하고자 하는 상을 열면은 그때는 자기가 원하는 정보가 다 나와야 되겠지요. 그래야 마지막 작업이 완료가 되겠지요. 그전에 있었든 작업들은 어떤 예비적인 작업처럼 나타날 것이어요. 그렇게 속에가 싸이고 싸인 것이 펼쳐지는 방식으로 해서 마지막 재앙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장차될 일인데 마지막 시대에다가 초점을 맞춘 것이 사실이어도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짐승의 권세와 싸우는 지금도 있는데 그것이 마지막에는 특별히 분명히 드러날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싸움이 주제여서 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교회는 무엇인지, 그런 것을 밝혀주고 있지마는 구체적으로 어떤 징조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런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싸웠을 때 적이 무엇이냐? 적의 정체는 무엇이고 적의 병기는 무엇이냐? 너희들의 사령관은 누구고 너희들은 어떻게 이길 것이냐? 여기다 강조를 두고 있어서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는 주지마는 아무리 로마 황제가 황제 중에 황제라고 할지라도 그가 누군지, 로마의 평화가 세상의 생명을 보장하는 것 같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분별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여기서 구체적인 상태를 보고 재림이 가깝구나, 멀구나 그런 것을 분별하라고 주어지는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계시록이 이런저런 묵시적인 환상으로 되어 있고 많은 재앙들이 따르니까 사람들이 이런저런 재앙만 나타나도 그 재앙을 종말의 징조와 막 맞추는 방식은 계시록에서는 직접적으로는 상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7장을 해석하겠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했던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해서 주님 재림하시면은 그를 대적했던 모든 원수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우주는 새롭게 조성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라고 계시록 끝에서는 말하는데 그것을 총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6장 여섯째 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제 7장을 보면은 아직 8장의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소위 7장에 사이 계시, 중간 계시가 있는데, 여기는 두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144,000에게 인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허다히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와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그들이 누군가에 대해서 장로가 설명하는 그런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는 이것을 두 가지 내용은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설명을 달리한다고 해석을 했었습니다. 144,000명은 구원받은 총 수고,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이런 승리자들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은 본문이 그렇게 확실히 해석하는가? 물론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무슨 사실을 설명했을 때 한번은 이렇게 설명하고, 그 다음 것은 다음번에 이렇게 설명하고, 바꾸어서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도 신학적으로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그런가 했을 때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면 왜 그전에는 이것을, 똑같은 사실, 구원받은 사람을 처음에는 총 수로 계산하고 그 다음에는 흰옷 입은 승리자로 계산하고 두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그렇게 해석을 했는가, 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은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마는 그래도 그 부분을 들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신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어요. 그것은 계시록 20장 천년왕국을 풀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에베소서를 보면은 유대인과 이방인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성소가 되고 한 몸이 되었으니까 다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지요. 그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틀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문맥에서 이야기되는가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이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한 몸이 되었다 하면은 그 말은 맞지마는, 로마서는 보면은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안해요. 지금 유대인에게 복음이 증거되었을 때 이방인은 밖에 있었다. 그러나 그 이방인이 복음을 받으니까 유대인은 밖에 있다. 유대인에게 베푼 긍휼로 우리 이방인을 불러들인 것처럼 지금 이방인이 믿는 긍휼로 다시 유대인도 불러들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은 완악하게 되지마는 그렇게 해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로마서를 보니까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 역사를 보았을 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이 장자요 의미가 있었지마는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유대인이 필요가 없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데 로마서의 이야기는 누구든지 예수 믿으라는 말은 분명히 하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약속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종말이 되면은 유대인 전체가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에베소서와 로마서의 말이 틀리지요. 그러면 그 전에는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을 해버렸느냐 하면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온 이스라엘은 믿는 신자를 구약 언어로 표현해서 이스라엘이 아니냐? 그러니까 믿는 총 수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비시키는 구조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비시키면서 유대인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비없이 진짜와 가짜를 대비시켜서 믿는 자는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언어를 쓰고 있지를 안해요. 만일에 믿는 총 수가 구원을 받는다면 비밀도 아니지요. 유대인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유대인들이 복음을 버렸는데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로마서 9.10,11장이어요. 그런데 우리 정통파에서는 이것을 모든 믿는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이쪽으로 해석을 해버린 것이어요. 로마서 문맥과는 한참 떨어진 이야기지요.

그러면 왜 그런에는 그런 해석을 했느냐 하면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예수 오신 후로는 이제 유대인은 의미가 없다. 모든 믿는 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신학을 가지고 로마서를 풀어버린 것이어요. 그런데 로마서는 계시록과 비슷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는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아들이시다. 그는 권능을 행하신 아들이시다. 이 로마서도 보좌에 앉으신 이는 누구십니까? 다윗 지파의 사자이지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그분의 나라가 천하만민을 정복하는가? 민족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됩니다. 천하만민을 정복하는가? 이것이 로마서에요. 그래서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에베소서는 민족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어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고 한 몸이 되는가? 민족을 다루는 역사처럼 만민을 복종시킨다는 민족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성전이 되는가? 새로운 친교를 가지는가? 그러니까 문맥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경은 똑같은 사상을 말한다고 이해를 해가지고 로마서를 에베소서처럼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 유대인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11장은 유대인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신자를 이스라엘 언어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버린 것이어요. 그러니까 해석이 잘못되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계시록 20장도 그렇게 푸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을 보니까 예수님 재림하는 것이 19장인데 재림하고 난 뒤로 보니까 천년 동안 왕국이 이루어졌는데, 천년 뒤로 보니까 또 사탄이 배반하면은 또 무엇이 일어나고, 그러면은 천년동안 왕노릇한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주로 세대론들은 그걸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마는 그러니까 무슨 천년 동안 왕노릇하고 그 다음 또 재림한 뒤로 왕노릇한 뒤로도 또 천년 뒤에 반란이 일어나면은 또 무슨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심판을 하고, 이런 것이 있겠냐? 재림하면 끝이지. 그러니까 계시록 20장은 예수님 재림뒤에 일어날 그런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을 말하는 것이다. 초림 때는 교회 시대 끝에는 반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림하면은 끝이지 무슨 또 반란이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천년왕국은 예수님 초림 때를 표현하는 문학적인 표현법이지 재림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을 했던 것이어요. 그래서 천년 왕국이 없다. 계시록의 20장의 천년왕국은 예수님 초림 때를 천년 왕국으로 표현한 것이지 재림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후천년설이고 그것이 우리 개혁파에 이제까지 정통적으로 힘있게 내려왔던 설이어요.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는 전천년설이라는 것이 상당히 힘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쇠약해졌습니다마는 저는 전천년설로 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림 후에 사건이다. 그러면 인제 문제가 발생하지요.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 믿음 외에는 구원이 없는데 예수 믿은 뒤로 우리처럼 이렇게 안보고도 믿는 시대가 아니고 예수님 재림하면은 그 얼굴을 보고 믿고, 얼굴을 보고 믿는데도 믿음이 없어가지고 또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다시 구원받을 기회가 있지 않느냐? 그래갖고 천년왕국자들을 막 공격을 하는 것이어요. 그전에는 그런 공격에 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믿는 것만 구원으로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놀라지 마십시오. 요새는 세대론자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마는 구약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은 이제까지 모든 신학은 전부 예수 믿어서입니다. 세대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안했는데도 나중에 보면 결국 그런 이야기를 해요. 전부 예수 믿어서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구약 때 오셨느냐? 오신 적이 없지요. 물로 존재론적으로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부터 계신 분이지마는 그가 자기 백성의 구주로 세상에 몸을 입고 오신 적이 있느냐? 없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속해서 구원을 받았지 예수 믿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어요. 그러면 인제 정통 학자들은 굉장히 반발합니다. ? 실체론자들이거든요. 나타난 양상은 틀려도 본질은 똑같아야 되니까 구약 때 모세에 속해서 구원을 받았어도 그 껍질을 까보면 거기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데, 김강호 목사 말을 듣고 보니까 이상하다. 예수 없이 구원을 받으면 그것이 세대론하고 다를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런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실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를 다룰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을 드렸지마는 똑같은 당사자가 약혼하고 결혼했어도 똑같이 사랑했어도 약혼했을 때와 결혼했을 때는 달라요. 그러면 이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약혼이냐 결혼이냐, 이것만 그와 상관된 사랑이지 그 사람이 누구냐? 그걸 연구해 보았자 아무리 이 사람이 지금 내 남편이어도 그전에는 남편 노릇을 안했거든요. 그렇지 안해요. 가령 똑같은 부자지간의 관계여도 커서는 친구처럼 대하지마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제일 무섭지 안해요. 그러면 어렸을 때는 어린 아이는 아버지를 어떻게 누리느냐? 무시무시한 아버지만 누려요. 오새는 아버지가 그렇지 않으니까 비유가 안맞을는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아버지가 제일로 겁나요. 그렇게 되어 있지 안해요. 요새는 어머니가 제일 겁난다고 그러든가. 왜냐하면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시니 얼굴ㅇ르 못보니까. 그래갖고는 묘한 말이 있드먼요. 너 엄마 같은 여자를 얻고 싶냐? 물으니까 그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어째 그러냐고 하니까 어머니가 자꾸 잔소리한다 그말이지요. 요새 아버지들은 무능한가 봐요. 그러면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똑같은 아버지에요. 그러나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누린다는 구체적인 생명은 어려서는 무시무시한 아버지고 커서는 친구 같은 아버지에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지, 부자지간의 본질을 따질려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어려서는 아무리 아들이어도 종처럼 살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살았지요.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마는 천사들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까? 휘장 밖에 있었고. 이방인하고 큰 차이가 없어요. 신약에 비교해 보았을 때는.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런 역사적인 구원을 말하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 안해요. 그러니까 구약 때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 뿐이고 이방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소위 구원 밖에 있었습니다. 구원의 땅은 가나안 땅이요 하나님의 성소에서 섬기는 것만 그들의 구원이어요. 그러나 지금은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우리는 성소에 있지 않고 하늘 성소에 있고 하나님 품 안에 있습니다. 그전에 구원과 전혀 질이 다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선언하는 복음이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모세에게 속한 종이 되지 말고 예수에게 속한 아들이 되어라. 그런데 우리 정통파는 그렇게 성경을 풀지 안했습니다. 진리는 영원불변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토대고 나중에는 계속 써졌지마는 토대는 구약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세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비참한 것이어요. 구약 때 보니까 잘먹고 잘살고 오래 살면 부자거든요. 복받았고. 신약 시대에도 그 복을 그대로 가져올려는 것이어요. 그래요. 어렸을 때는 고등학교 다니는 딸에게는 세배돈을 만원 주면 초등학생에게는 3천돈을 주거든요. 그러면 억울하지요. 그래도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어요. 커서는 그렇게 안해요. 그런데 다 커서도 아들이 보니까 아버지가 큰 아들만 자꾸 일만 시키고 막내아들은 그렇게 개막나닌데 돈만 주고 그러거든요. 사업에 실패하는 데. 그러니까 다 큰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는구나. 어려서는 내게 돈을 많이 주고 동생에게는 적게 주더니만 어느날 변했구나. 그래갖고 꼴아버리면 그러면 그건 자식도 아니지요. 그것은 어린 얘기로 돌아가면 돼요. 어렸을 때는 용돈 많이 주다가 적게 주면 아버지가 성질났구나. 그렇게 해석하면 맞아요. 그러나 커서는 그 해석이 아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진리는 불변하다. 껍질은 달라도 내용은 똑같다. 하니까 구약을 그대로 끌어들어와서 교회가 탐심의 미혹을 받아서 지금도 만사형통이 복인줄 알고 끌려 다니는 것이어요. 성경 해석이 몹시 잘못된 것이어요. 그러니까 구원은 역사적이어요.

어느 정도 여사적이냐 하면은, 모세와 예수님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광야 백성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하고 달라요. 광야 백성은 나그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성전부터가 달라버려요. 그렇지 않겠어요. 신약 시대에도 예수님 지상 생애시의 제자들하고 부활하신 뒤의 제자들하고는 달라요. 상태가 다르니까 관계가 달라요. 그런 방식만큼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 재림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는 의미로는 새로운 시대가 왔지마는, 새로운 시대에서도 다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뒤로 그냥 모든 것은 끝장,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늘의 왕이 되셨는데 누가 복종합니까? 세상은 복종하지 않고 비웃고 있습니다. 교회까지라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 안해요. 그러면 그분의 왕권이 이렇게 완성되면은 그건 왕도 아니어요. 그가 오셔서 만민을 철장의 권세로 다스리고 모든 왕국의 영광은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나라가 완성이 되어요. 그리고 나서 그 완성된 나라를 아버지께 돌려드릴 것이어요. 그런 것이 천년왕국이다. 재림 뒤에 새로운 구원의 기회, 지금과 같은 믿음이 아니라 다른 믿음으로 그런 구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어떻게 펼쳐 가시는가, 그런 이야기에요. 여러분 똑같이 결혼한 뒤로도 그렇지 안해요. 어저깨하고 오늘이 다르고, 은혼식 금혼식이 다르지요. , 그러면은 어떤 사람이 결혼 10주년 되었다고 무엇을 사갖고 오니까 아, 이 사람아 우리가 결혼식 했는데 왜 똑같은 것을 반복하느냐고, 그렇게 하면은 10년을 산 의미가 없지요. 전혀 다른 것이 아니겠어요. 날은 똑같다. 안똑같아요. 똑같기도 하고 안똑같기도 해요. , 그전보다 더 풍성해져야 맞지, 사랑은 불변하니까 결혼식 때 사랑한다고 한 마디 하고 늙어 죽도록 아무 말도 안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달라져야 맞아요. 그러니까 재림 뒤에 구원론적인 새로운 구원의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통치의 양상이 달라뎌서 그런다 그말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이제 7장을 해석하는 문제들도 다시 생각해야 하겠다 그런 말입니다. 분명히 여기서 두 무리를 이야기 해요. 144,000인 이스라엘과 셀 수 없는 허다한 많은 무리들, 이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총 수를 수로 세고, 그 다음에는 그들의 행위로 세는가? 이런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어버렸을 때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마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로마서의 문맥을 따라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전부 복종시키는가? 그 나라를 복종시키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어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맞아요. 그런데다가 십사만 사천명에 대한 행위는 그들이 누군지 14장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어떻게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그 이마에 있고 어린양이 끄는 대로 신실하게 가는지, 그들의 행위는 또 다음에 설명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144,000명과 허다히 많은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완성이요 하나는 이방의 완성으로 그렇게 두 완성으로 푸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말입니다. 여기까지 이런저런 이론적인 이야기를 해서 조금 어려울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래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쉽게 풀릴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바다, 나무 하는 것은 사람의 삶의 터전이지요. 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천사가 와서 말하기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맞은 자를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을 하나로 언급해서 말하는 것은 백보좌 심판 뒤에 21장에서 그렇습니다. 거기서는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문에는 열두 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이 있고, 주춧돌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여기는 둘을 한 대상으로 묶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입니다. 144,000입니다. 여기서 인을 친다는 말은 누구의 소유다는 말입니다. 14장에 보니까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습니다. 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도 있지요. 그런니까 짐승의 표를 받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지, 이렇게 구분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인을 치는데 이런 환상들은 에스겔서 9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를 통해 예루살렘에 불을 쏟아 심판하시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자들이 있어요.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 때문에 애통하는 자들, 그런 자들 위에 인를 치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죽지 않고 삽니다. 바로 그런 상을 써서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치라고 했는데, 144,000명인데, 여기서 수를 쭉 세고 있는데, 이 족보를 보면 유다지파부터 시작하고 있지요. 유다, 루우벤 이렇게 시작하는데,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단지파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인제 성경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단지파에서 누가 나오냐? 적그리스도가 나온다. 그러니까 빠진 것이 아니냐? 더구나 단지파하고 우리 나라 단군하고 성씨가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단지파가 우리 나라로 왔는데, 무엇이 비슷하냐? 동지죽, 빨간 것 뿌리지 않냐? 그래갖고 유월절, 그래갖고, 이것 이런 천재들이 어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구약 성경은 우리 나라를 언급할 필요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주고 둘러있는 세계 권세를 쭉 설명하지 우리나라는 수도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인제 우리 나라가 동방이거든요. 거기서 인치는 자가 오는데 누구냐? 그래갖고 얼만큼 종교는 사람을 어리석게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왜 동방에서 인치는 자가 오는지, 그것을 성경에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동쪽은 해뜨는 쪽인데 하나님의 성소의 문이 있는 쪽이어요. 모든 은혜는 그 동쪽으로부터 와요. 그리고 북쪽은 재앙의 쪽이요, 빽빽한 구름이 오고 말하자면 끓는 가마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리고 그래요. 동쪽에서 온다고 했을 때는 소위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있어서 동쪽 그렇게 성소 구조에서는 언급을 해요. 이 동쪽에서 인치는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의 종들 위에 인을 치는데 144,000명이다. 수를 말하고 나서 그 다음 개별적으로 말하는데 유다지파를 머리로 루우벤, 그리고 수가 똑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단지파는 빠졌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이스라엘의 열둘은 무너지지 안해요. 그러니까 전부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지요. 구약 때는 레위지파가 여기저기 빠져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장자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지파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빠져있어요. 그리고도 열둘입니다. , 요셉이 둘입니다. 요셉이 장자로서 두 몫이 들어있으니까 에브라임과 므낫세, 그렇게 해서 열둘이 되는 것이어요. 그런데 이 단지파가 빠지는 족보는 구약에서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역대기 족보에서 빠져있습니다. 여러분이 역대기 족보를 1장부터 펴면은 하나님 천지 창조부터 나와요. 누가복음 족보처럼.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신 것이 처음 나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킨 뒤로 하나님께서 다윗 지파와 그 성소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불변하시는가, 그것을 말씀할려고 기록한 책이어요. 그래서 유다지파를 분명히 머리로 해서 기록합니다. 장자는 분명히 루우벤이지마는 혈통상 장자는 루우벤이지마는 장자권을 요셉에게 옮겨갔고 그리고 왕권은 유다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유다부터 셉니다. 거기 보면은 단지파가 빠져있어요. 그러니가 왜 여기 단지파가 빠져있는가는 단지파의 죄를 책망할 문제가 아니라 구약의 족보는, 역대기 족보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위한 족보거든요. 구약으로 하면 종말론적인 구원이어요. 바벨론의 구원이.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족보를 기록합니다. 이 족보는 종말에 구원을 완성할 족보들이어요. 그런데 수가 똑같지요. 에스겔서는 보면 새롭게 된 가나안 땅, 새롭게 된 성소, 새롭게 된 가나안 땅의 분배, 거기서 보면 모든 지파들이 똑같은 면적을 갖습니다. 나라니꼴로 받아버려요. 그런데 여호수아서를 보면 면적이 전부 다르지요. 그런데 에스겔서를 보면 똑같아요. 똑같다 그말은 인구 수가 같다는 말이겠지요. 에스겔서는 옛 성소는 무너지고 새로운 가나안 땅, 새로운 성소를 말했을 때는 거기서는 전부 똑같이 분배되어요. 그런데 계시록에서도 그런 종말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인맞은 숫자가 똑같습니다. 같으니까 면적도 똑같을 것이어요. 그래야 크고 작은 지파가 없이 구원이 완성되겠지요. 그래서 전부 일만 이천 씩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십이만이나 안하고 왜 일만 이천인지, 백이십만이 아니고 일만 이천인지 그것은 잘 모르지요. 구약 때 보면은 그들의 수를 세면 잘하면 한 지파에 8만명,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 되니까 그 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 잘은 모릅니다. 그전에 제가 해석할 것을 보니까 수철학을 해놓았어요. 12는 무엇이냐? 3*4. 분명히 땅 사방이니까 온 땅이고, 그러면 3이 남거든요. 3은 무엇이냐?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재주가 좋았어요. 그러니까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께서 온 땅을 통치하시니까 l2고 거기다 천은 무엇이냐? 천 수는 맞을 것이어요. 모세 제도의 지성소의 규모가 사방 정육면체에요. 그러니까 수학 개념으로 하면 완전수일 것이어요. 이 해석이 가능한 것은 나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의 구조를 보면 정육면체인데 일만 이천 스타디돈. 로마 식으로 그렇게 되어 있거든. 그러니까 가로 세로 높이가 똑같은 정육면체에요. 구약의 지성소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지성소가 그러기 때문에 다시는 등불이 필요가 없다. 어린양이 친히 등불이 되니까. 완전히 구약의 지성소의 구조를 가지고 내려온 예루살렘을 말하니까 그 십의 삼승 수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어요. 그래도 꼭 그렇게 해석을 해야되는가? 그런 근거를 확실히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떠튼 일만 이천으로 똑같은데, 왜 일만 이천이 기본이냐 하면은 그런 수학 철학보다는 실은 열두 족장이 구약의 핵심이거든요. 열둘로부터 출발되었어요. 그 열둘이 완성되면은 완성이어요. 그러니까 열둘에다가 지성소 수를 하면은 만이천이 될 것이고, 그것을 전부 합치면 십사만 사천이 될 것이고,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 온 이스라엘이 돌아오리라. 로마서 문맥과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핍박이 심할지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완전히 보호될 것이어요. 그 사람들을 인치기 전까지는 바람은 불지 못할 것이어요. 하나님께 속했으니까. 그렇게 여기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보니까 허다하게 많은 무리들이 올라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는 상관 없이 천하 모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리라. 그런 의미로 여기서는 해석을 해야되겠습니다. 인제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장자로 세우시고 가나안 땅에 자기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원수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하나님인가? 그리고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요구했습니다. 특별히 히스기아 당시는 앗수르 임금이 쳐들어와 가지고 조롱했지요. 어느 신이 내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 신이 있는가 나와 보라고 해라. 히스기아의 말이 여호와만 참신이고 남어지는 가짜라고 그러고 모든 신당을 헐러버리고 여호와만 믿으라고 그러는데 믿지 말아라. 그것 때문에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고발했지요. 하나님 이런 망령스러운 말을 보시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죽이셨지요. 그것이 구약에서 싸움이어요. 그런데 이제까지 세상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 왕권을 구현할려고 했어도 그 왕국이 큰 왕국이 아니어요. 그래서 그 작은 나라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단코 그 이스라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범죄하면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의 손에 맡기셨어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인치셨기 때문에 백성이 망한 적이 없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이전에 세우셨던 가나안 땅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으로 만국 중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때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교회도 심히 연약하고 쇄약합니다. 얼만큼 교회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오직 로마 황제 숭배하는 것만 그들의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단코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지 안했습니다.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그분만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런 믿음 안에서 자기 생명으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렇게 자기 생명을 헌신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의 교회를 보호하셨고 그리고 이제 그의 교회를 통해서 지금도 만국을 정복하셨고 r로마 정권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망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거역해서 교회를 대적하고 있지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은 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들을 복종시키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복종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까지 하나님은 역사를 보존하시고 운행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재앙이 많고 아무리 핍박이 많해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도록까지 그 백성으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을 주도록까지는 세상은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고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행되고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신 그 역사적인 경영을 보십시오. 지금도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고 돌아와 있습니다. 그것도 한 증조가 될 것이어요. 아직도 그들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삼으신 약속은 불변하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으로 구원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시킬 것입니다. 교회는 결단코 망하지 않습니다.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소유에요.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피도물도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오셔서 만국이 복종하도록까지 만민이 그의 나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도록까지 우리의 주되신 주님, 죽은자 가운데 먼저 일어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그분, 그분을 순종하시고 우리들도 죽음을 이긴 능력있는 백성으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있는 백성으로 우리들이 주님을 순종하고 주님을 봉사하는 그런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에게 크신 은혜르 베푸셔서 이제는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보좌에 취임하신 주님의 권세 있는 나라를 봉사하는 복을 주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도 이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생명의 선물을 우상 앞에 바치는 방식으로 어두움의 종으로 살았사오나 이제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생명을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영광을 받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속한 왕국을 건설하시고 이제는 만민을 주님 앞에 순종하는 생명의 나라를 건설했는데도 지금도 세상은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그들의 생명이며 세상의 영웅들이 그 모든 것을 공급하는 것처럼 지금도 세상은 이것을 향해서 전력질주하고 살아계신 주님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까지라도 이런 일에 미혹을 받아서 먹고 마심이 우리의 복이나 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에게 생명의 축복을 주셨사오니 우리가 세상에서 멸시와 천시를 받을지라도 세상에서 모욕을 받을지라도 우리들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께 속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신실히 봉사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복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생명의 축복으로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실려고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주 예수의 날에 우리를 주님의 상으로 불러 모으셔서 우리를 주님의 살과 피의 생명의 교제로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가 되었사옵고 한 영 한 몸이 되었사오니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님처럼 말씀하고 주님의 손으로 수고한 것처럼 수고해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민을 주께 복종시키는 구원의 일을 감당하는 능력있는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모든 것을 눈동차처럼 지키시며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생명의 나라를, 사랑의 나라를, 승리의 나라를 힘있게 봉사하는 백성들이 될 수 있도록 주의 백성에게 믿음을 온전케 해주시옵소, 주의 백성들의 삶을 더욱 풍성히 복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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