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하늘에 베푼 보좌

찬미예수님 2026. 1. 10. 22:22

제목: 하늘에 베푼 보좌

성경: 요한계시록 4-5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복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 품 안에 살게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하늘의 평강과 하늘의 영광을 누리며 봉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생명의 축복이 우리 안에 있는데도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 살지 못하고 보이는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순종치 못했던 모든 어리석은 죄들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사오매 우리들이 주님의 크신 사랑 앞에 이제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주님의 피로 맑갛게 씻기시옵고, 오늘도 주님의 영광의 얼굴을 뵈며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즐거워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이 더욱 새롭게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싱보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우리도 서로를 사랑해서 주의 몸을 이루는 귀한 한 몸된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온총을 더욱 새롭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4-5장까지를 읽고 시간에 맞추어 강론하겠습니다. 4장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이런 특별한 구절을 통해서 4장부터 새로운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계시록은 로마 정권밑에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그의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해서 어떤 방식으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 앞에 신실한 교회로 세워 나가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 보였든 환상은 인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 보였고, 그분이 일곱 교회에 다니시면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그렇게 묘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에 대해서 그들의 실상을 진단하시고 그들이 모든 싸움에 이겨서 종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생명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약속하고 격려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4장에 와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나서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니.그러면서 이제 하늘 보좌를 펼쳐 보이고 계십니다. 여기 이 후에 마땅히 될 일그러면은 우리들은 그냥 생각하기를 지금 일곱 교회에 대한 실상을 말씀하시고 나서, 그 다음 그 시간이후로, 그러니까 일곱 교회까지 지금 이런 문제까지 상관 없고 그 이후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 쉽겠습니다마는, 계시록에서 이 후로 하는 이런 말은 종말의 때를 지시하는 언어들이기 때문에 그냥 교회에 대한 환상을 보고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셨는데 말씀을 듣고난 그 다음부터, 그런 단순한 시간 구조로 이후로 될 일, 그런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리라. 그리고 하늘 문을 열고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주님께서 요한 사도를 하늘로 불러 올리셔서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시겠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 사도에게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는 것은 이전에 보았던 그런 방식과는 다릅니다. 아마 하늘이 보이고 하늘의 환상들을 보았던 사람은 에스겔 같은 사람이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리로 올라오라. 그렇게 해서 하늘 문이 열리고 그리로 올라가서 본 것은 아니었고, 그는 그발강 가에서 하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에게 하늘의 일을 보이시는 것은 그냥 기도를 많이 하면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을 보는가? 그런 의미로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친구라.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그 나라를 경영하시기 때문에 소돔 고므라의 멸망과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할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 요한 사도에게 하늘 문을 열고 그를 그리로 올라오게 해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신 것은 그는 교회의 대표로서 특권을 얻었든 것이고 교회의 대표에게 이런 것을 보이는 것은 요한 사도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요한 사도를 통해서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해서 주님 오시도록까지 교회가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알고 그 경영에 봉사토록 하기 위해서 이처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어떤 사람이 성령의 감동해서 하늘문이 열리고 무엇을 보았다고 하면은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없도록 사도들을 세웠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성령에 감동했다는 말은 여러분의 마음에 좋은 생각이 뜨오르고 마음이 뜻뜻해지고 하면은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단어 풀이를 하면 안되고, 여기 있는 내용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요한 사도에게 성령의 감동은 지금 무엇입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올라오라 하셨다. 그렇게 해서 장차 될 일을 보았다.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어요. 가령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성령에 감동해서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했을 때는 사도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의미로 성령의 감동이어요. 그러니까 항상 단어 풀이를 하지 말고 그 문장에 있는 말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교회의 대표로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셔서 속히 될 일을 그 교회에 보이실려고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고 요한을 통해서 일곱 사자에게 이처럼 보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기 직무를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올라가서 이런 일을 본 것이지 우리 개인들도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런 것을 보는가?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보도록 요한 사도를 통해서 교회에 편지하신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후에 될 일을 보인다고 하면서 장차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일을 펼쳐 보이시기 전에 그 일을 펼쳐 보이는 사령부를 먼저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4, 5장에 있는 하늘 보좌들은 다른 성경에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는지, 또 계시록에서는 이런 장면과 어떻게 상응하는지, 그런 것을 먼저 생각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먼저 계시록 자체부터 보면은 12장과 13장이 여기 45장과 서로 상응하는 곳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경영하시는지 하늘의 사령부를 열어 보이시고, 그 다음에 적군의 사령부를 열어 보이는 곳이 어디냐 하면, 1213장입니다. 그렇게 해서 4, 5장에는 하늘 보좌가 보이고, 그 보좌에 하나님을 수종드는 하나님의 어린양, 일곱 인을 떼시는 어린양,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그리고 12, 13장은 하늘에서 내어 쫓긴 용, 용의 부름을 받아서 바다와 땅으로부터 온 짐승, 이 짐승들이 어떻게 용에게 권세를 돌리는가, 이처럼 두 사령부가 나타나 있습니다. 12, 13장은 마지막 심판을 말하기 전에 왜 하나님께서 그런 세대를 심판하시는지, 마지막 교회를 핍박하는 배교들은 무엇인지, 그런 것을 설명하는 것이 12, 13장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서는 용의 사령부가 나타나 있고, 여기 14,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령부가 나타나 있는데, 그 사령관은 누구십니까? 실은 교회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그분, 그분이 하늘의 사령관이셔요. 그렇게 해서 먼저 하늘의 보좌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열어 보일 때도 다른 곳과 비교해 보셔야 되겠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런 하늘의 환상들을 보여주시는 경우들이 몇 군대 있습니다. 또 그런 환상들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보이셔서 자기 자신을 자기 종들에게 보이신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구원 역사에서 그 시대에 일치되는 그런 상황,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누구가 되시는지, 그런 것을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실려고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 나타내신 것이 아마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려고 시내산에 강림하셨고, 그분이 자기 집을 짓게 하시고는 그 집이 완성되니까 그 집으로 입주하셨습니다. 출애굽기 끝이지요. 연기가 가득하니까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셔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누굽니까? 그 하나님이 모세를 대면해 만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자기 백성을 성소 삼으셔서 함께 계실려고 시내산에 강림하셨는데 그분이 성소에 입주식을 가지셨지요. 그분은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우고 계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가까이 가면 죽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펼쳐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시록과 더 일치되는 곳은 어디냐 하면은 에스겔서입니다. 물론 스가랴서도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 장면이 더 비슷한 곳은 에스겔서 1장이어요. 그 두 곳은 계시록하고 상황이 거의 일치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도 짐승의 권세 아래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씨우는 교회를 말하고 있는 데, 이 짐승은 구약에서 어떻게 나타나있습니까? 다니엘서를 보면은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느브갓네살 임금이 꿈에 본 것은 아름다운 찬란한 금신상이었고 다니엘이 본 것은 네 짐승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임금이 본 것은 아주 굉장한 우상이었는데 머리는 금이고 그리고 가슴은 은이고 그리고 쭉 내려가서 제일 밑에 다리는 철이고 아주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보았을 때는 그것은 짐승이어서 곰도 되고 표범도 되고 그런 식으로 해서 한 짐승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에 종이 된 그런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땅 밖으로 내쳐지고 하나님의 성소는 불타지고 그리고 이방인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에 그것은 짐승의 권세에 하나님의 교회가 무너진 상황입니다. 그때 교회는 바벨론 궁전에서 큰 핍박을 당했지요. 평소보다 일곱배나 더 뜨거운 바벨론의 풀무불 가운데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렇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 같은 사람은 이방의 궁정에서 크게 출세했으면서도 이방의 힘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돌아갈 것입니다. 아무리 바벨론의 군대가 찬란해도 그들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런 정권은 아니고 짐승의 정권이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찢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니엘이 이방의 궁전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종말에 나타난 구원을 보고 봉사했던 그런 장면이어요.

또 스가랴서도 이와 비슷한데, 스가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돌아온 뒤로도 이방인의 많은 방해가 있어서 성전을 잘 짓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골자기 속에 화석류 나무가 있고 거기 홍마를 탄자가 있고 그 뒤에 말 세 마리가 있습니다. 이 말들이 온 땅을 돌면서 두루두루 보니까 온 세상이 평안합니다. 죄를 안지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삼키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평안합니다. 그들의 승리를 노래부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망치를 잡은 네 공장들을 보내서 네 뿔을 뽑아버릴 것이어요. 네 뿔은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했던 내 강대한 제국이 되겠지요. 그들의 뿔을 떨쳐버리라.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시 측량해서 새롭게 지으리라. 고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골자기 속에 홍마 타신 이, 자기 백성의 실상을 살피기 위해서 온 땅을 두루 도는 분으로 그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도 그와 비슷합니다. 실은 짐승의 권세에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힐 때부터 이방의 종이 되었으니까 짐승의 권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였다. 그렇게 말이 되겠지마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냈을 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시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가 탄 짐승은 이제까지 탄 모든 짐승이 한거번에 혼합된 그런 모습이어요. 이제까지 역사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의 권세가 한 몸에서 구체화되고 구현되는 방식으로 짐승이 그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계시록이 싸우고 있는 교회는 그런 짐승이지 구약의 짐승이 아니어요. 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것은 바벨론에 무릎 꿇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실은 로마 정권에게 무릎 꿇지 안했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로마 정권은 구약에서는 철 다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이제까지 모든 권세가 혼합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과 지금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누군가 이것을 지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로 잘 상응하는 것은 에스겔서가 되겠는데, 에스겔 1장을 보면 에스겔이 하늘의 환상을 보았는데, 보니까 천사들이 북방에서 구름이 빽빽하고 거기 불이 번쩍번쩍하는데 거기 보니까 여기 계시록 4장에 있는 네 구룹들, 천사들, 그런 천사들이 쭉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얼굴만 동서남북으로 네 개 있고, 여기 보면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사람, 사자, 송아지, 독수리 이런 네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에스겔서도 보면은 구룹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구룹이 묘하게 날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개 밑에 보니까 땅에 바퀴까지 달려 있어요. 바퀴도 하나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퀴 속에 바퀴가 달려있어요. 아마 이런 것은 얘기들 장난감을 보아도 아무 쪽으로 가도 완전하게 구를 것이어요. 하옇튼 바퀴 속에 바퀴가 있는 데 어느 쪽으로 가든지 신속하게 움직이고 날아가고, 더구나 바퀴 주변에는 눈이 가득합니다. 묘하게 생겼지요. 그리고 바퀴 속에 하나님의 신이 계셔요. 그러면 왜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보이시는가? 또 이처럼 구룹이 있으면은 그 위에 수정같은 하늘이 있는데 무시무시합니다. 거기 보니까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1장을 보면은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속과 주위가 불같고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렸더니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룹들이 있고 그 위에 보좌가 있는데 거기 앉으신 이가 있고, 보좌의 모양은 남보석 같고 거기 앉으신 분으로부터 광채가 나는데 무지개 광채가 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다. 그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하고 비슷한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어요. 계시록 언어들은 전부 구약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에스겔에게 이런 하나님의 그룹과 하나님의 형상을 보였는가? 이 그룹은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인데 왜 보였는가?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바벨론 병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밟혔습니다. 그리고 성소는 불타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 궁전에 사로잡혀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서 에스겔서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더 강력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병거는 바벨론의 병거가 문제가 아니어요. 이 병거는 누가 병거냐 하면은 천사가 병거고, 그 바퀴는 눈이 가득하니까 모르는 것이 없어요. 우리가 발 밑에 눈이 달렸으면 아무 데나 가겠지요. 눈이 가득하다. 전지하다. 이런 말인데, 어느 곳이나 신속하게 가니까 이런 병거를 타신 분이면,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의 사령관이시면은 바벨론 군대는 게임이 안되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병거를 보이심으로 너희들이 낙심하지를 말아라.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심판했어도 바벨론 군대는 나를 이기지 못하니까 너희들이 나를 의지하고 세상을 이겨라. 그렇게 하면서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격려하고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소와 새로운 가나안 땅의 환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록에서도 그러니까 장차될 일을 보이리라. 이 장차 될 일은 구약 같으면 말세에 될 일이 되겠는데, 세상 끝날에 될 일이 되겠는데, 그런 일을 보이면서 먼저 하늘의 사령부를 에스겔적인 그런 환상을 통해서 보여준 이유들도 지금 로마 정권, 짐승의 정권, 신적인 권세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경배를 요구하는 이런 정권 밑에서 고난받고 있는 그의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땅에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가 사령관이요 내가 모든 역사를 펼친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해라. 그것을 보일려고 하늘의 사령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좌를 배풀었고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시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보좌는 주로 앉아계시는데 사도행전에는 서게시지요. 스데반이 죽었을 때 인자가 보좌에 서신 것으로 되어 있어요.

보좌에 앉았다그 말은 영광을 받는다. 승리했다. 일을 모두 끝내고 이겼다. 그런 장면들이고, 보좌에 서셨다는 것은 특별히 무슨 급한 일이 있든지 변호하든지 그런 일을 위해서는 그가 서서 이야기 하고 그런 장면이 될 것이어요. 싸움하고 있는데 장군이 왔다갔다 해야 되겠는데 보좌에 턱 앉아계신다는 말은 그런 의미로 승리는 완결되었고 그가 통치하신다. 그런 개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 보좌를 보면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보좌가 있고, 그리고 보좌 뒤에 또 24보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24장로들이 금면류관을 쓰고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 켠 것이 있고 그리고 그 앞에 수정같이 맑은 유리바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들이 둘러 있고, 5장을 보면은 장로들과 생물 사이에 어린 양이 있고, 또 그 보좌를 둘러 있는 수 많은 천군 천사들이 있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5장 제일 끝을 보면은 만물이 찬양하고, 성소를 우주적인 모습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이 이 보좌에서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이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고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분의 일을 시행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다윗의 사자 어린 양이 그 일을 하신다. 그분이 이기셨으니까 이 모든 것을 시행하신다. 그렇게 큰 찬양이 나오지요. 4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고, 5장에서는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이 나옵니다. 이 모든 찬양들은 하나님은 참으로 생명이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만물은 그가 지으셨고 장차 오셔서 만물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살펴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지 않는가? 하나님의 전 경륜을 찬양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굽니까 그분이 교회를 통해서 이 마지막 시대에도 역사를 경영하시는 것이어요. 그래서 하늘 보좌와 그가 하신 일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먼저 말하고 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 앉으신 이의 모양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여기서 보면은 앉으신 이의 모양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보좌 자체를 묘사하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앉으신 이의 모양을 어떻게 묘사하느냐 하면 백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보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해석할 때는 가장 쉬운 방법이 본문을 넓게 읽는 방법이고 그리고 다른 것과 비교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보석 감정사가 되어 가지고 보석의 특성을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 장미꽃은 정열 같은 사랑, 노랑 장미는 어떻고 꽃을 그렇게 사랑의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석도 루비는 불같은 사랑, 그러면 파란 루비는 무엇인고. 그래갖고 결혼할 때 보석 색깔을 가지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런 식으로 여기서 보석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어요. 그것을 성경 자체에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거기서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면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란한 보석으로 나타낸 적은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처럼 찬란한 보석은 제사장 가숨에 둘러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들, 그런 보석들은 찬란하게 되어 있지마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찬란한 보석으로 묘사한 적은 없어요. 주로 구약에서 이처럼 찬란한 보석은 에스겔서에 보좌가 남보석 같고 거기 하나가 그렇게 되어 있고 남어지는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우고 소멸하는 불이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보이면은 아주 빛난 주석 같고, 단쇠 같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같이 되어 있지요. 구약은 하나님의 모습을 거의 어떤 심판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지 완전하게 드러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요한 사도를 그리로 불렀습니다. 아마 이것은 바울 사도께서 내가 삼층천에 갔다 왔다. 하는 r것과 같을 것이어요. 이제까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렀을 때 이렇게 높이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어도 그는 시내산 꼭데기까지 올라가서 안식일에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보는 정도, 그것도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고 되었지요. 그러면 왜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환상을 보았는가? 땅의 성소는 불타졌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 중에 성소가 되셔서 바벨론에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땅의 성소는 불타졌어요. 그래서 하늘의 성소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도 요한 사도처럼 하늘 문을 열고 이리로 올라오라. 해서 하늘의 보좌를 친히 관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부르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보는 것은 구약 때는 항상 죄 때문에 가리운 방식입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우고 그리고 그 천사들까지라도 무시무시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발 밑이 남보석 처럼 수정처럼 맑아도 그건 두려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려운 모습은 아무 것도 나타나 있지를 안해요. 요한 사도가 두려웠다. 그런 말은 하나도 나타나 있지 않고 오히려 요한 사도는 여기 가서 울었지요. 하나님의 손에 인봉한 책이 있는데 그것을 뗄 자가 없지요. 이것을 누가 뗄꼬, 하고 울었지요. 누가 떼리라. 오히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집행하는지, 친히 보고 듣고 왔지 두려워 떨고 오고 그런 모습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모양이 백옥 같고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겠지요. 이 보석을 어느 정도 해석할지는 우리들은 잘 몰라요. 물론 다른 구절들을 해석해야 되니까 보석도 해석을 해야되겠지마는 그것을 잘 몰랐을 때까지라도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라. 에스겔서 1장은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계시록을 보아도 계시록 2111절을 보면은 하늘의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11절을 보면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백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18절을 보면은 그 성곽은 백옥으로 싸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그랬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성곽의 형상을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성전이 되셔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달리 성전이 필요가 없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니까 예루살렘 성벽이나 하나님의 보좌나 같은 말로 언급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완전한 영광을 드러낸 것으로만 이해하면은 그것은 가장 넓으면서도 확실한 의미를 가질 수가 있어요. 뭐 백옥은 거룩이니, 홍보석은 피를 말하니까 구속을 말하는 색이니, 거기까지 해석을 해야될련지, 물론 교리적으로는 차이가 없겠지마는 여기서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스러우신지, 그 문제가 지금 강조가 되어 있어요. 물론 어린양이 행하시는 일을 보았을 때는 어린양과 보좌는 같아야 되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을 설명할 수 있지마는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가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핵심이 아니라 그가 완전한 영광을 드려내셨다는 것이 4장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어요. 그런데 특별히 보좌에 무지개가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 무지개는 노아 홍수 심판이 끝난 뒤로 하나님이 무지개로 약속했지요. 내가 세상에 비를 내릴 때라도 무지개를 보고 나면은 내 마음이 풀려가지고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그랬을 때 무지개는 노아를 통해서 옛 세계가 정결케 되었을 때 옛 세계에 대한 생명의 약속이 무지개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면은 다시는 물을 통해서 구원 세계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무지개는 심판은 끝났다는 약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니까 보좌에 무지개가 둘러있고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그러니까 무지개나 녹보석은 같은 말이 되겠지요. 그런 경우도.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직접 언급한 것 보다도 하나님이 그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영광의 처소로 자기 종을 초대하고 있지 안해요. 그리고 그 보좌에서 하신 일은 어린야이 하신 일이 될 것이어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하나님께서 고난받고 있는 교회의 대표자를 그리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는데,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구약 방식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어요. 그리고 24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난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아계신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표들이어요. 그런데 보좌에 둘러 24장로들이 있다. 가장 보좌에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24장로들은 누구냐 하면은, 보좌가 있고, 보좌에 24장로가 있고,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흰옷과 금면류관을 쓰고, 이들의 신분을 설명하는 방식이 되겠습니다. 계시록에서 흰옷은 죄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고,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이어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24장로들인데 그들도 보좌에 앉았다. 그러면 24장로가 누군가? 크게 옳은 해석은 아마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을 해야될 것입니다. 하나는 24장로를 구약의 열두 족장, 신약의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교회의 완전한 구원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제까지 보통 해석하는 방식이어요. 그런 해석의 근거는 계시록 2021장을 보면은 거기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면은 거룩한 성이 있는데 거기 문이 있지요. 문은 전부 열두 족장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사방으로 문이 있는데 셋씩 있지요. 그리고 그 기초돌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은 열두 사도와 열두 족장으로 대표되는 완전한 교회를 묘사하는 것이 되어요. 그것을 끌어 오면은 여기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쓴 자들, 흰옷과 면류관은 같겠지요. 계시록에서 흰옷은 이기는 자들이니까 이기는 자들이 면류관을 쓰니까 이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둘러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이 될 것이어요. 그런 것이 한 가지 해석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제 계시록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인데 계시록을 순차적으로 보았을 때 21장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 이것은 백보좌 심판 후에 만물이 새롭게 되고 그렇게 해서 역사가 완결되었을 때 장면이지 말하자면 천년왕국 이전의 장면들은 아니어요. 또 천년왕국 때 부활한 자들은 짐승에 표를 받지 않고 거기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 살아서 짐승과의 투쟁에다 강조를 두고 있지 모든 자들의 부활은 실은 백보좌 심판 뒤에다 두고 있어요. 천년 왕국이 끝나고 나면은 잠깐 사탄을 풀어주면은 큰 배교가 있고, 그 다음 크고 흰 보좌가 하늘에 있지요. 거기 앉은 이의 책이 있는데 심판의 책들이 있지요. 그때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까지 우리들이 세대론 때문에 그런 해석을 많이 조심하고 그냥 천년왕국을 -고 완전한 교회시대, 천년왕국이 끝나면은 하늘에 영원한 나라가 올 것이다. 바로 이 쪽으로 해석을 했지마는 그러나 구원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천년왕국을 교회시대로 할 필요가 없어요.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가 발전한 것처럼 신약에도 발전이 있습니다. 지금은 메사야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 메시야 영광은 만민이 그 분 앞에 복종하기 전에는 그 영광은 완전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어요. 주님 오시면은 만국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겠지요. 그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어요. 그의 통치가 철장의 권세로 온 우주에 미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나서 큰 배교가 나오면은 그때 큰 심판이 있고, 모든 원수를 정복시키고 나라를 아버지께 돌려드린다. 그때 백보좌 심판이 나타나면은 이제 하늘에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거기 완전한 교회, 창조의 처음부터 역사의 종말까지 완전한 백성이 함께 사는 전 우주적인 교회로 나타나겠지요. 그렇게 했을 때 여기서 보는 하늘의 보좌 24를 신구약의 완전한 교회로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24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분명히 승리는 했는데, 이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면류관을 썼으니까 승리한 자들이고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의 구원들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다른 한 가지 해석은 무엇인가? 항상 성경이 구약의 표상을 통해서 신약 교회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경배, 하나님의 완전한 성소, 그것은 다윗의 성소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성소는 이동식 천막이라 아직은 안식을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소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요동치 않는 금집을 짓고 거기 계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그 땅에 견고히 선 것이어요. 물론 그 성전이 불타진 뒤로는 에스겔 성전을 통해서 종말의 성전을 보여주고 있지마는 구약 자체의 가나안 땅의 성소는 다윗 성소가 완전한 성소입니다. 다윗 성소에서는 모든 예배 제도가 바꾸어졌어요. 모세를 통해서 섬겼던 그런 제도와는 다르게 이제 다윗 성소에서는 그 제사장 제도가 바뀌어졌습니다. 특별히 거기 보면은 제사장들이 24반열로 나뉘어서 봉사를 해요. 그들이 구약 교회의 대표자들이어요. 그렇게 했을 때 여기서는 성소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지금 4장의 강조점이고 그렇게 했을 때 구약 성경을 모델로 삼아서 신약 교회의 완전함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24를 신구약의 완전한 구원론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완전한 경배, 다윗 성소의 경배를 하늘 성소에다 맞추어서 참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완전한 경배를 받으신다.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해요. 물론 신학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니까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더 큰 문맥을 보아야 되겠습니다마는 저는 이것이 24장로가 말하자면 신구약의 구원받은 대표적인 총수 보다는 여기서는 신약 교회의 완전한 경배의 모습을 구약 예배 모범을 통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저는 그것을 취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구약에서도 보좌를 보면은 그 앞에 일곱 촛대가 있지요. 촉대 하나에 등잔이 일곱 개가 달렸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다윗 성전에 가면은 등잔이 열 개가 됩니다. 떡상도 열 개가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캄캄한데 계십니다. 죄 때문에 가지 백성을 직접 대면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성소를 열고 들어오면 죽습니다. 천사들만 거기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 백성들은 보지를 못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를 어디서 만나시느냐? 그 휘장 밖에 성소에서 자기 백성의 대표 제사장을 만나십니다. 거기다 등불을 켜고, 거기다 떡상을 두고, 거기다 향단을 두고 떡상에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는 그 떡상의 떡을 제사장이 먹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캄캄한데 계시는 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실 때 어디 계십니까? 일곱 등불 켠데서 만나십니다. 그러니까 성소의 하나님의 임재는 일곱 등불이어요. 하나님은 불이신데 죄 때문에 지성소에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지마는 자기 백성을 만나러 나오시면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 분처럼 그 일곱 등잔이 달린 촛대 거기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시고 그 빛을 통해서 자기 제사장이 하나님을 봉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는 보니까 그런 방식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휘장도 없고 일곱 등불 켠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기름을 통해서 켠 등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빛이 되겠지요. 모세가 켠 빛하고는 달라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 등불이다. 등불과 영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리고 그 앞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은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습니다. 구약 성소에서는 놋바다가 있지요. 거기다 물을 많이 떠놓고 들어갈 때마다 그 물로 씻어야 됩니다. 반복해서 씻어야 되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물이 있다고 했는데 하옇튼 유리 바다가 있고, 수정같이 맑은, 구약에서 수정같이 맑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고 백성들이 그 앞에서 만나면은 청옥같은 파란 하늘이 밑에 깔려요. 그것을 보면은 심히 두려운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완전한 거룩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유리 같다. 백옥같다. 보석같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췬다. 이것은 아주 투명하다. 완전한 정결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둘러서 네 생물이 있는데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드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모양이 사람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으데 네 생물이 각가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드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그러니까 완전히 눈으로 된 천사구먼요. 앞뒤에도 눈이 가득하고 날개에도 눈이 가득하고 눈이 없는 곳이 없구먼요. 일곱 등불만 일곱 영인 것이 아니라, 이 천사들까지라도 눈이 가득해요. 그런데 모양은 네 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이 네 가지 모양인지는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드는 천사에요. 하나님게서 만물을 그의 성소로 지으시고 하나님이 그 세계를 관리하도록 하늘에는 새를 지으시고 바다에는 고기를 지으시고 땅에는 짐승을 지으시고 이 모든 것을 관리하도록 사람을 지으셨지요. 그러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우주적인 역사를 경영하는 것을 이런 네 생물을 대표해서 네 생물이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드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생물은 눈이 가득하니까 에스겔처럼 바퀴에 눈이 가득하면은 싸우는데만 눈이 전념하겠지마는 여기 보면은 앞에도 눈 뒤에도 눈 날개에도 눈이 가득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데 능치 못함이 없어, 알지 못한 것이 없지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거룩을 세 번 반복합니다. 확실하다는 것은 두 번 반복할 수 있고, 세 번 반복할 수 있는데, 예레미야서를 보면 세 번 반복하는 것, 물론 이사야 6장에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완전하게 찬양하는 방식이어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그 생물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여기서는 전부 경배받는 것만 강조점이지요. 그리고 그 보좌에서 일하시는 것은 5장입니다. 여기 보면은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24장로들이 찬양합니다. 물론 5장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만물이 찬양하도록 확대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교회의 대표를 하늘 성소를 열으시고 그를 불러들여서 하늘에 사령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참으로 밖에서 땅밑에서 떨고 있는 백성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요한 사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어요. 그것이 교회의 비밀입니다. 교회가 비록 신성을 노래하는 로마 정권 밑에서 고난을 받고 있어도 교회는 그렇게 암담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분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요 그분이 교회에 계시기 때문에 보좌가 실은 교회에 있습니다. 하늘 성소를 열으시고 그를 부르셨어도 실은 자기 백성과 보좌는 간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보좌를 보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한 영광을 나타내셨고, 완전한 긍휼을 나타내셨습니다. 무지개가 녹보석처럼 나타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용서와 완전한 구원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 그런 표상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보면은 승리한 교회가 그리고 완전한 경배를 드리고 있고, 또 여기 보면은 하나님의 역사를 수종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그 역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요 그리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생명이 살아있다는 말이 아니라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을 완성하신 분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며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시는 그런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네 구룹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수종드는 것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순종하고 찬양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막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요한 사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왜 보여주셨습니까?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보좌를 보면은 바로 이분이 교회의 하나님이셔요. 이분이 교회에 임해 계셔요. 이것만 확실하면은 그들은 로마 정권 밑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은 로마 정권처럼 그런 강한 핍박은 받고 있지 않습니다. 신사참배처럼 그처럼 생명이 위협을 받는 그런 핍박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전술은 나타난 양상은 다른가 몰라도 핍박의 목표는 같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이방의 권세는 목표가 다 같은 것이어요. 어느 때는 전쟁하고 어느 때는 화해 정책을 씁니다. 핍박만할 뿐 아니라 붉은 짐승을 타고 금잔을 많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도 전부 거짓 선지자들의 역사에요. 정권을 통해서만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종교를 통해서도 부활하신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악한 역사의 정체에요. 우리들도 동일한 핍박을 받습니다. 주님 오셔서 그 역사를 완성하도록까지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보았을 때만 세상을 바르게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로마 정권이 황제 숭배를 요구하고 로마의 평화, 로마 정권 밑에서 온 세상이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 것이나 현대는 아메리카의 평와, 미국의 힘 밑에서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경제적으로 통합해서 평화할 것이다. 이 평화의 체제를 떠나서는 우리 생명이 보존될 수 없다. 어쟀든 이 세계 정부 밑에 들어가야 되겠다. 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군주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힘을 바라보아서도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작은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있어도 이방의 건세를 사모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비록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방의 영광과 권세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종말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집행하시는 분이요, 이분이 만물을 주장하신 분이기 때문에 교회를 그의 거룩한 백성과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님 품 안에 있습니다. 하늘에 영광의 보좌가 곧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우리들은 세상을 사모한다거나 세상에 무릎을 꾼다거나 그런 것이 없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바를 따라서는 먹고 마심이 생명이고 세상의 유력한 지도자가 아니면은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국가가 없이는 우리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그는 국가적인 군주가 아니라, 먹고 마심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피와 자신의 살을 생명으로 주셔서 한 몸 한 영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신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역사는 그분의 손에서 진행되는 것이어요. 주님 오셔서 만물이 찬양하도록까지 지금 승리하신 주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주님, 모든 만물이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만물의 대표로 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려고 부좌 주위에 그의 승리한 교회를 앉히신 것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만물이 주님을 찬양하고 만물이 그의 성소가 되도록까지 권세있는 주님을 순종하고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우리들이 살으셔야 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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