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라오디게아교회에 쓴 편지

찬미예수님 2026. 1. 7. 22:59

제목: 라오디게아교회에 쓴 편지

성경: 요한계시록3:14-22

 

우리 중에 나타나셔서 영광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 비천한 죄인들도 우리 허물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품 안에 부르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부르셨사오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과 그 기쁨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케 해주시옵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생명이 더욱 새롭게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의 봉사 가운데서 주의 몸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도록 크신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3장14-22절까지를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우디게아 교회에 쓰신 편지를 강론하겠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일곱 교회에 대해서 편지하니까 모든 교회에 표준을 제시하기 위해서 일곱을 말하고 있는 것보다도 특별히 싸움을 주제로 해서 일곱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교훈하시는 것은 그 당시 짐승의 권세 아래서 싸우고 있는 교회를 권면하고 그런 관점에서 종말을 사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것인지, 그 이김에 대해서 강조를 두는 것이지 모든 윤리적인 완전함을 교훈할려고 하는 책이 아님을 유념하셔야 되겠습니다. 여기 라우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쓰신 이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충성되고 참된 증인다. 하는 말은 1장5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여기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아멘이시오 또 창조의 근본이신 이, 하는 말은 직접적인 언급은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창조의 근본 하는 것은 창조의 시작, 또는 창조의 시작, 다른 데서는 특별히 골로새서 같은 데서는 예수님을 창조의 근본 했을 때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그는 지음을 받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는데 그가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그렇게 골로새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아멘이시오 하는 것은 요한복음 같으면은 진실로 진실로 하면 그런 아멘이 되겠습니다마는 계시록에서는 그런 말 보다도 알파와 오메가요. 그런 의미로 아멘 했을 때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가 이분 안에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은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서 아멘이 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었고, 보내심을 입은 분으로서 아버지를 충성스럽게 증거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사실을 그는 자기 몸의 죽음에 이르는 충성된 증거를 통해서 그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그에게 지시하셨을 때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히 십자가를 지셨고, 그런 의미로 그는 충성된 증인으로 그렇게 증거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고 십자가에 죽는 그 죽음에 이르도록 아버지의 뜻을 충성스럽게 증거하시고 이행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멘이 되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는 알파와 오메가란 말로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여기 먼저 책망을 하고 계시는데 15-16절은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런 말보다도 어떤 비유적인 것을 들어서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잘못은 17절에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그것이 그들의 잘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설명하기는 차든지 어둡든지 하라. 15절과 16절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차지도 아니하고 어둡지도 아니하도다.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그렇게 되어라. 16절에도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찬가 더운가 하는 것은 거의 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전에는 차든지 더웁든지 이 말을 가지고 우리가 꽤나 많이 신경을 썼습니다.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을 보았을 때는 찬가 더운가 하는 것은 여기서 의미 부여는 하지 않고 한 마디로 말하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니까, 어떤 의미로 미지근합니까?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것이 미지근 합니다. 그러니까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여기서는 미지근하니까 토하여 내치리라. 차라리 차거나 뜨거우면은 토하여 내치지 않겠지요. 용도가 있으니까. 그것이 여기서는 강조점입니다. 그러니까 찬 것은 공의고 뜨거운 것은 사랑이고 해석할 것도 없고, 찬 것은 안믿는 것이고 뜨거운 것은 믿는 것이니까 앗사리 믿든지 말든지 해라. 그런 말도 아니고, 여기서는 그들의 환경에 비추어서 그들에게 아주 필요 없는 것, 미적지근해서 토해 내치는 것을 비유로 해서 너희들이 얼만큼 쓸모가 없는가, 한마디로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면 미지근한 것인데 우리 전라도 말로하면 미적지근한 것이지요. 이럴 때는 전라도 말리 훨씬 효과가 좋아요. 미적지근한 것은 진짜로 그런 것이어요. 그러니까 토하여 내치리라. 아무 쓸모가 없다. 차도 더워도 쓸모가 있지마는 미적지근한 물은 쓸모가 없지 않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의 내용을 보거나 또 여기 내용을 보면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는 온천이 있는 도시인데, 또 교통의 요지에 있어서 대단히 부요하고 그리고 그 좋은 목장지가 있어서 좋은 옷감도 나오고, 또 유명한 도시이기 때문에 의학도 발달해서 좋은 약도 많고, 그러니까 큰 지진이 나서 도시가 거의 황폐되었을 때도 중앙정부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복구할 만큰 그렇게 부자도시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상황에 맞추어서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가령 장사하는 사람에게 씨뿌리는 비유를 하면은 별로 실감이 안갑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장사꾼 비유를 들어야 훨씬 실감이 가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똑같은 말로 그들을 책망했을 때도 그들의 상황에 비추어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15,16절은 단순히 비유적인 설명이지 찬 것은 무엇이고 뜨거운 거은 무엇이고 설명할 그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온천 지역에 살면은 뜨거운 온천수는 몸에 좋을 것이고, 또 찬물은 먹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적지근하면, 여기는 뜨거운 것도 먹는 것이겠지요. 뜨겁든지 차든지 하면은 먹지마는 미적지근하면 토해냈으니까 뜨거운 것이 온천욕으로 좋다는 말은 아니지요. 여기서 그런 말도 아니구먼요. 하여튼 그런 온천 도시에서는 미적지근한 물은 별 효과가 없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한 모양인데 여기서는 뜨거운 물은 온천에 좋느니라. 그런 말보다도 미적지근하면 토하여 내치리라. 그런 말만 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그들의 환경을 염두에 두고 비유를 들고 있는데도 여기서는 온천욕의 효과, 그런 것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한 마디로 미적지근하니까 입에서 토해버리겠다. 먹기에 아주 거북하다 그런 말이지요. 그것만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남한하고 북한하고 전쟁한 경력까지 있으니까 이런 정반대로 대립시키면은 우리는 좌익 우익까지 대립시키면은 더 할말이 없겠지요. 그리고 또 보수파냐 자유주의파냐 그러면 할말이 없겠지요. 우리 보수파는 경건주의 열열하고 자유주의는 학은 많은데 신앙은 없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왜 보수파도 아니고 자유파도 아니고 중간파냐? 이러고 회색분자를 공격하는 식으로 해도 소용이 없다 그말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비유를 들고 하는 이야기이니까 해석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한 마디로 입맛없는 사람들이어요. 토해 내치겠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들의 죄는 무엇이냐 하면은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특별히 여기 일곱 편지를 그냥 구성상으로 보았을 때는 말씀하시는 인자가 있고, 칭찬이 있고, 책망이 있고 그리고 뭐 경고와 권고, 약속 이렇게 되어 있지마는 이것은 일반적인 틀이고, 특별히 라오디에게 교회를 보면은 책망이 여러번 반복되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쓰면은 이런 형식이 맞추어서 쓴 것보다도 대개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지마는 아마 특별히 책망을 많이 할 필요가 있는 교회는 책망부분을 여러번 반복하고 강조하겠지요. 그래서 라우디게아 교회는 비유를 들어서 한번 책망하고 그 다음 구체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그리고 회개를 권하고 하면은 거듭거듭 책망 부분이 많이 강조과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잘못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어느 정도 부자냐 하면은,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부자인데 너무너무 부자여서 아무런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부자,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말은 반복하는 말을 통해서 그들이 부를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하는 표현법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상은 정 꺼꿀로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만족하고 있지마는 그들의 가난한 것을 여러 말로 반복하고 있는데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누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런 다섯 가지 말로 반복해서 그들의 가난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여기서 금, 흰옷, 안약 한 것을 보니까 아마 그들의 도시 환경과 맞추어 보면은 좀 잘 이해가 되겠지요. 그들은 아주 부자고 또 좋은 옷감을 생산하는 그런 공장도 많고 또 거기는 유명한 의학교도 있으니까 아마 이렇게 설명하면은 잘 맞아들어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 이것은 전부 부요한 것과 관계되지요. 그 다음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 이것은 또 다른 항목이 되겠지요. 그것과 비교되는 것이 내가 너를 곤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면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한 것은 해결이 되겠지요. 흰 옷을 사서 입으면은 벌거벗은 것이 해결이 되겠고, 안약을 사서 바르면은 눈먼 것이 치료가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의 도시적인 상황과 그들의 자랑과 또 신앙의 항목들과 일치되니까 이런 비유를 들어서 그들을 가르쳐야 좋을 것입니다. 특별히 18절에 금을 사라했을 때, 금은 무슨 순결한 믿음이라는 둥, 흰옷은 성화라는 둥,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으니까 신령한 눈을 뜨게 한다는 둥, 해서 이것을 신앙의 항목으로 일일이 연결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연결하든 말든 상관은 없습니다마는 거기다 해석의 강조점을 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부자라 아무런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실은 그들은 벌거벗어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도 없고 옷은 벗고 눈은 멀어서 자기가 가난한 줄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런 것을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어요.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내게서 사가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실은 금도 많고 옷도 좋은 것이 많고 좋은 의약품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도시적인 배경에서는 그들이 부요한다 할지라도 주님께 있는 것으로 그들이 부요하냐, 했을 때는 주님께 있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충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노니하니까 이것은 실은 개인의 구원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보다도 교회에 대한 권면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도 꺼꿀로 해석해 가지고 봐라. 이렇게 허물이 많해도 주님이 사랑해서 책망했으니 하고 우리를 정당화시켜서는 안되겠지요. 그런데 책망하는데 어떻게 책망하느냐 하면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망하여 징계하니 했을 때 책망과 징계는 같은 말이 될 것입니다. 신명기 언약을 따라 그들이 잘못하면은 가나안 땅의 모든 약속을 거두어 버리고 하는 구약과 같은 그런 직접적인 양상과 연결하는 문제보다도 신약 교회는 그렇게 지접적으로 하는가? 할 경우도 있고 안할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책망한다는 말과 징계한다는 말은 같은 말이 됩니다. 우리들은 그냥 무슨 잘못해서 몸에 무슨 질병이라고 생기고 사업이 망하면 징계지만 잘못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면 징계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실은 몹시 잘못되어 있지요. 실은 아들들이 크면은 아버지의 얼굴만 보고도 자기 마음에 큰 슬픔을 가진 것인데 어렸을 때는 살살 때려도 아이고 안아파 하고 나가 놀아버려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는데, 교인들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시키는 것, 성령의 소욕을 근심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 마음에 근심이 되어야 하겠는데, 여기서는 책망한다는 말과 징계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권하느냐 하면,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한 마디로 열심히 없다는 말이지요. 가령 장사꾼들 같으면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까지 종일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면 오는 손님도 귀찮겠지요. 있으니까.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도시적인 배경이 풍부한 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부요한줄 알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만족하게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줄을 몰라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얼만큼 가난한 줄을 보고 나에게 와서 사가라. 지금 본문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하다 그 말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주를 위해서 열심낼 것도 없어요. 주를 위해 살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부하여 만족하니까.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런 것은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물론 신약 교회를 두고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상황적으로 직접 적용해도 아무런 차이는 없습니다. 구원 역사적으로 같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은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해도 이것은 괜찮은 서신입니다. 실제적으로 이런 것은 모든 사람에게 거의 다 있는 것이어요. 가졌다. 하는 사람은 배고푼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배고푼줄 모르는 사람은 밥먹는데도 깔짝깔짝하지 않겠어요. 하옇튼 무엇인가 가졌다는 사람들은 부족함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얼만큼 부족한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안하게 살고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는 가난한 데도 자기 자신을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어요. 가령 가장 간단한 예로 우리가 건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건강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은 건강에 대해서 별로 주의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보았을 때는 저 사람 큰일났구나. 더구나 한방 의사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얼굴이 벌게 가지고 다니니까 옛날 사람 같으면 아이구 신수가 훤하지요.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얼굴이 붉으죽죽 하니 보기도 좋소. 하는데 한의사가 보니까 얼마 안있으면 중풍에 걸리겠구나. 그런데 이 사람은 사우나 가서 땀 빼고 편안하고 모르지요. 그래도 병든 사람은 의사가 말하지 안해도 죽자 살자 힘을 써요. 그러면 누가 오래 사느냐? 우리말에 고르랑 팔십이라고 그러지요. 조심하니까 오래 살아요.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버려요. 건강 문제만 보아도 그렇지 안해요. 이런 것은 도시적인 배경도 똑같습니다. 가령 요새 시험철이니까 여러분이 시험을 치러 서울에 가면은 서울 사람들은 요새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니까 괜찮지 옛날 같으면 신기한 사람들이 올라온 것이어요. 시골에서 공부 잘했는가 보네요. 이미 서울 산 사람이 공부 잘한 사람이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은 특수한 사람만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서울이 문화의 중심지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공부 잘느냐? 표준을 말을 써서 그러니 저러니 하니까 잘한 것 같아도 실은 아무 것도 몰라요. 그래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어요. 어디든지 그런 것은 다 있는 것입니다. 챙피한 말로 우리 목사들 비유를 들면은 목사는 다 공부 잘한 사람들이어요. 그러니까 전도사가 공부한 것처럼 죽자 살자 공부하지 안해요. 전도사가 목사될려면 시험에 들지 못하면 안되니까 죽자 살자합니다. 그러나 딱 통과되고 나면은 이미 자격증을 따놓으니까 여유가 생겨요. 그 다음 연수교욱, 재 교육이나 받아서 학위나 딸려면 모를까 자기 생사를 걸고 공부하지 안해요. 그러니까 목사되고 난 후로 실력이 느는 사람은 드물어요. 강도사 되도록까지만 일단은 늘어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안해요. 벼락공부할 때는 죽자 살자 공부하고 그 다음 월말고사까지는 여유가 있지 안해요.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실은 실력이 없는 것이어요. 그리고 시험 점수 딸려서 아둥바둥 했을 때 그것이 실은 실력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가졌다는 사람들은 그렇게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쯤되면은 전도사가 하는 설교는 받아 배끼도 안해요. 유명한 목사는 예의상 받아 적지요. 그리고 아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문서선교가 잘된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듣고 보니까 그럴 듯 한데 대놓고 적지 못하니까 책방가서 사다가 가만히 본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문서선교가 잘된다. 그런 말이 있을만큼 우리 나라는 체면 문화가 강하니까 그래요. 또 조금 비유를 들면은 우리 학교 선생님들 계시구먼. 무슨 말이냐 하면은 여러분들 학교 졸업하고 어른들 실력 느는 사람들 보았어요. 그러고도 자기는 이미 인생을 통달한 사람이어요. 그리고 얘기들 가르치는 데는 아주 눈이 밝아도 자기를 가르치는 데는 하나도 못가르치는 것이 어른이어요. 공부도 안할 뿐만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면서도 젊어서 어리석음이 얼만큼 심각한가를 알면은 지금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는데 젊어서는 그러지, 하고 고개를 꼬떡꼬떡하고 모든 지혜를 통달하고 지금 자기에게는 적용을 안해버려요. 그러니까 늙은 뒤로 후회하는 것이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이상한 것이 선생님은 한 과목을 가르치고 우리는 여러 과목을 배우는데 어째서 선생이 학생보다 가끔 실수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선생이 되어버리면 이미 알아버리는 것이어요. 대학교 가서도 똑같아요. 고등학교 때 한글로 썼던 것을 대학에 가면 한자로 쓰고 영어로 쓴 것 뿐이지 별로 안 것이 없어요. 그러고도 대단한 지식이나 있는 것처럼 하고 있지요. 신학교도 똑같아도. 학위를 딸 때는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학위를 따고 나면은 평생 가르쳐도 학위 딴 그것만 가르치지 더 이상 실력이 안늘어요. 왜그렇습니까? 이미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만족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실은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도 이전 것은 벗어나야만 그전의 어리석음을 알고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어요. 실제로 그렇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만 지혜롭고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어리석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런 것을 지혜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벗어난 것이어야 되어요. 사랑은 끝이 없거든요. 만족함이 없어요. 자기를 전체를 헌신하고도 그것은 부족해요. 그러니까 발전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거의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잘 적용할 수 있고, 더구나 현대 사회에 잘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어요. 지금은 지식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식을 공유합니다. 그전에는 성경 주석은 목사들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교인들도 어지간 하면 다 갖고 있습니다. 또 교회사적으로 유명한 책들은 다 읽어요. 그러니까 신앙에 있어서 현대인들은 칼빈도 판단할 수 있고 루터도 판단할 수 있고, 다 판단할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있지 안해요. 그러면 진짜로 자기가 신앙에 부요한가? 그런 것은 아니라 그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라우디게아 교회가 처한 상황이고 우리들 모든 사람에게 취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에게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 것처럼 항상 이 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됩니다. 그러니까 세대론자들은 라우디게아 교회는 말세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마지막 시대에다가 적용을 해버려요. 너무 현대인들에게 잘 맞거든요. 그전에는 인간이 부족한줄 알고 있지요. 어떠튼 보리고개 넘을러면 죽자 살자 일하는데 지금은 저축이라는 것이 별로 필요가 없어요. 냉장고도 큰 것을 삽디다마는 요새는 냉장고도 필요가 없지요. 쌀통도 필요가 없고. 쌀집에 가면 어저깨 찌은 쌀 새로 사면 되는 것이고, 왔다 갔다 구찮으니까 쌓아 놓고 살련지 모르지마는, 요새는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이것이 제일로 잘 맞다 그말입니다. 그점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되겠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 같으면 여러분이 성경을 제일 잘 아는줄 알겠지요. 우리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다른 교인들이 성경을 알면 깜짝 놀라고. 거기도 안갑드라. 아마 이렇게 하기 쉽겠지요. 누구든지 이것은 적용되는 상황이어요. 그래서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됩니다. 더구나 여기다가 원망까지 합치면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농부가 원망했지 안해요. 나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일했는데 나도 똑같이 일당을 주는가? 분노하니까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된 자가 있느니라. 마지막 해절넉에 와서 일한 사람은 감격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다가 원망까지 섞어지면 할 말이 없겠지요. 그만큼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회개하라. 무엇입니까? 열심을 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심을 낼 것인가?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는 이야기하고 있지요. 네가 얼만큰 가난하냐? 그러니까 네 도시 문화적인 것으로 부요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사거라. 하는 것이 한 가지 열심을 내라는 말이고, 그 다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회개하라면서 그 말을 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설명하는 말이 되겠지요. 직접적인 말은 네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사가라. 내게 있는 것은 네게 아무 것도 없지 않냐? 그것이 한 가지였고, 그 다음 한 가지는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 문을 열어라. 문을 열면은 서로 함께 먹고 마실 것이 아니냐? 여기서 우리들이 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사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구약에서도 이런 말이 있기 때문에 한군데 찾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이사야 55:1-보면은 너희 목마른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라고 하니까 실은 말로는 사라는 용어를 쓰지만 산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돈 없이 값없이 산답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리라. 너희는 귀를 귀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이런 말들을 보면은 그들이 우상을 위해서 모든 심혈을 쏟고 있거든요. 그러지 말고 내에게 와서 내 말을 들을려고 마음을 쏟아라. 그런 것이 값없이 돈 없이 내게 와서 먹을 양식을 사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사라는 말은 그런 비유적인 표현이지 직접 사고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그들의 도시적인 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열정을 기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한 것을 위해서는 열정을 기울리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열심을 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참으로 열심을 내고 사는 것인가? 했을 때 회개하라. 그러면서 문을 열면 함께 먹고 마시리라. 하는 여기서 그 다음에 답을 찾을 수 밖에 없겠습니다. 왜냐하면은 그들은 도시적인 문화의 풍성함으로 먹고 마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의 설명은 도시적인 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문을 열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친밀한 친교를 묘사하는 말이어요. 앞에 말고 대비시키면은 토해 내치리라. 그것과 반대되는 말이 될 것이고, 토해 내치지 않으면 유용한 것인데 어떻게 유용합니까? 함께 먹고 마시는 친밀한 친교관계로 살 것이 아니냐? 했으니 여기서 열심을 내는 것, 값주고 사는 것도 실은 여기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도시적인 부로 설명을 하든지, 주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그들의 부요함과 그들의 생명을 설명하고 있는지,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들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도시적인 부를 가지고 그들의 모든 생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신자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구약의 신자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명은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가나안 땅의 풍부함도 주님의 전에서 먹고 마시는 것, 그것과 연결되지 않는 먹고 마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미가 없고 생명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부도 주님 앞에 들어가서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주님 앞에 감사하고 먹고 마시는 이 생명의 교제 안에서 가나안 땅의 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없을 것 같으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백성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예물을 짓밟고 그러면서도 이방에 대해서 승리하고 가나안 땅의 모든 부를 가져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비록 세상에서 멸시와 천시를 받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면은 그는 지혜롭고 복된 자라고 그렇게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도시의 부로 그들의 부와 그들의 명성을 설명하지 말고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 안에서 그것을 설명해야만 그것이 토해 내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그런 삶을 살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방식은 다른 본문에서 끌어와야 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의미로는 거기까지 설명을 해야되겠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부입니다. 그들은 이 세사의 먹고 마심으로 자기를 설명하지 말고 주님의 몸이 되고 주님의 상에 앉아서 한 몸 한 영이 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 되어야 되고, 그것만 그들의 부요함이 되어야 되고, 그것만 그들의 지식과 눈밝음이 되어야 되지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여기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모든 신자들이 항상 주의를 해야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그리고 함께 생명의 교제로 살고 있는지, 그것에서 우리의 부와 영광을 설명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설명하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구약에 가나안 땅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부와 그들의 명성이 그들에게 가치가 있을련지 몰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나라에서는 주님과 한 생명으로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 안에서 그들의 생명을 설명하지 않으면은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이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될 교훈이 되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이렇게 회개하고 다시는 도시 문화의 부로 자기를 설명하지 않고 주님의 상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그런 것으로 자기 생을 설명하면은 그것이 이긴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나님 상에 함께 앉게 하겠다. 그렇게 말씀하면서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처럼 자기 자신을 설명하면서 자기처럼 그렇게 되게 하겠다고 그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좌에 함께 앉은 것, 이것도 다른 본문과는 다릅니다. 가령 철장의 권세로 깨뜨리도록 하겠다. 2장 끝에 두라디라 교회를 두고 한 말이지요. 철장의 권세, 보좌에 앉았다고 그려면은 권위를 의미합니다. 의자 하는 것이 본래 권위적입니다. 종은 그 앞에 서야되고 권위있는 자는 그 의자에 앉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자 개념이어요. 의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렇게 쓴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보좌가 그런 권위에 대한 말이 아니라 부요에 대한 말이 되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여기서는 가난하냐 부하냐? 이것만 대비시키지 악한자들에 대해서 어떤 권위를 발휘하느냐,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이기는 자에게 철장의 권세를 준다 이것도 보좌에 앉은 것이지마는 그것은 악을 심판하는 의미로는 거기다 강조를 두고 있지마는 라우디게아 교회는 너는 부자라고 말하지만 실은 가난하지 않냐? 그러니까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네가 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이렇게 살면은 그것이 진정한 부자다. 그런 부자는 어떤 부자냐? 지금 그런 부요하게 살면은 보좌에 앉게 하는 그런 부를 주겠다. 나도 그런 부를 얻었지 않냐? 이것은 영광과 부요함에 대한 묘사지, 여기서는 권세에 대한 강조점은 아닙니다. 그것이 보좌에 함께 앉게하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굽니까?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그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지요.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는 참된 증인으로 아버지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영광스러운 나라를 위해서 그는 죽음에 이르도록 아버지를 시인하고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했습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창조의 근본이셔서 그가 이제까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 이십니다. 그분이 이 역사를 완성하시고 아멘으로 그리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나라는 그의 나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셨습니다. 그는 먹어도 하나님 때문에 굶어도 하나님 때문에 죽어도 하나님 때문에, 그는 모든 일을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서 내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은 어떻게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지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았던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산 적이 없습니다.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그는 죽는 십자가를 택했지, 자기 권세를 가지고 돌로 떡이 되게 해서 그렇게 영광을 나타내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질이어요. 자기 힘을 나타낼 것인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지, 세상 권세를 의지할 것인지, 여호와를 의지할 것인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질인데 이스라엘의 왕들은 세상의 권세를 의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안했지요. 전쟁에 이길 때마다 말의 발의 힘줄을 끊으므 말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린 목동이 달음질 했던 것도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는 결단코 세상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손 왕들은 솔로몬 때부터 그렇게 되지를 안했습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그들이 사모했던 이방의 권세에 팔려서 이방의 종이 되어버렸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매 아들을 보내서 그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삽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모든 생에 있어서 낮아지셨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먹고 하나님 때문에 말씀했지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멸시와 천시를 받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귀케 하셔서 모든 부와 영광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처럼 네가 나와 함께 먹고 마시겠는가? 나와 함께하는 생명으로 세상의 모든 부를 이기겠는가? 나와 함께하는 생명으로 이 모든 생명을 설명하겠는가, 그러면은 너는 진정 부요한 자요 하나님의 영광의 부를 소유토록 하겠다. 그렇게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권면하는 메시지에요. 우리의 모든 삶은 다양합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부자일 수 있고, 또 가난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생을 설명하면 안되고 여러분의 모든 생의 원동력, 활동력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님의 몸을 이루고 한 몸, 한 영으로 살아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하고 주님의 손으로 수고한 것처럼 봉사하고 그렇게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활동되어야만 그것이 참으로 토하여 내치지 않고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것이고, 지금 이처럼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예한다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점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를 당해도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이어요. 이처럼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영광스러운 것, 그런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런 주님과 사랑의 교제, 생명의 교제, 나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 그가 나를 사랑해서 몸을 주셔서 나로 그 몸이 되게 하시고, 그 영광을 누리게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이 나를 인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만족하다고 스스로 물러서고 이정도 되면 되었다고 그렇게 살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식어지지 않는 것이어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열심히 나는 것이어요. 무엇인가 비교하자 말자, 무엇인가 만족하자 말자 그것은 통하여 내치리라 한 것처럼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생을 지배해 주어야 되어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어요. 남하고 비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라우디게아 교회는 다른 도시보다 교통적인 위치가 좋고 또 그들의 생산시설도 좋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만족하고 있었지마는 실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도시문화의 부 때문에 생활의 안정 때문에 신앙도 완정된줄 알았지마는 실은 하나님 앞에 사랑의 능력으로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비참한 책망을 듣고 있는 것이지요. 또 세상에 가장 고치기 힘든 사람이 그런 사람이어요. 직접적인 잘못이 있으면 너무 부끄러워서 고치기 쉽습니다. 직접적인 잘못을 범해놓고도 거꿀로 하면은 그건 너무 어렵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도, 대개 도적놈이 아무 잘해도 방범대원이 호루라기 불면 도망쳐버리거든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 도적놈이 누가 후루라기 불어. 내가 도적질 안하는데. 그러면 그건 날강도지요. 일단은 도망치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실은 죄를 구체적으로 지은 사람이 고치기 쉽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성경 이론도 알고 특별한 죄도 안짓고, 그리고 교회 생활은 적당히 하고, 돈이 많으니까 사랑의 시험도 안받어요. 생활이 평안하니까 이런저런 시련도 없어요. 다 신앙이 있는 것 같지요. 어려우면은 교회에 못나올 수 있지요. 돈이 없으면 헌금도 못하고 주고 싶어도 못주어요. 그러면 사랑이 시험을 받겠는데 모든 것이 넉넉하니까 모든 것을 다 쓰지요. 그러니 누가 그것을 부족하다고 하겠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점을 우리들이 깊이 조심하셔야 됩니다. 지금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영광을 얻으신 주님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는 주의 몸이 되신 것을 기억하십시다.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로 그의 몸을 삼으셨습니까? 창조의 근본이신 이,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에 이르도록 참된 증인으로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의 권세를 끝내시고 하늘에 속한 영광과 부요한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시키는 아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아멘의 시대를 살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광이 완성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전의 것으로 자기 자신을 체점해서는 안됩니다. 이전의 것으로 낙심해서도 안되고 이전의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된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 오시도록까지 지금도 먹고 마심을 추구하고 그런 것으로 자랑하고 그런 것으로 교회를 미혹하는 이 악한 시대를 이겨내고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것을 주님의 몸이 된 것을 기억하고 주님의 몸과 그 지체로 살으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은 우리들의 생명을 더욱 존귀케 하실 것이고 주님이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우리들이 그 몸에 고난에 참여하고 세상의 모든 부를 포기하고도 주님의 사랑 때문에 수고한 그의 교회를 주님의 영광의 주님의 부요함에 참여시키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살던지 죽든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참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복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지금도 주님의 사랑의 줄에 끌려서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바 질서를 따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여유있게 살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끝이 없는 것이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주님만 존귀히 되게 하고 이처럼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 우리의 삶을 전체로 헌신하는 것만 진정한 부요함인데도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했던 모든 어두움들을 주여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스스로 만족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스스로 자만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더욱 주님을 소원하고 더욱 주님을 알기를 소원하고 더욱 헌신하기를 원해서 우리의 생명을 달음질하며 살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주관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생명의 복으로 주의 백성들을 더욱 복주시려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상으로 주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셔서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살과 피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생명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부요함을 설명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뿐이었사오니 만사에 우리에게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 살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주관해 주시옵고, 주님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도록까지 주님 오셔서 주님의 영광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까지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님의 사랑으로 주의 교회와 세상을 봉사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주의 백성을 보살펴 주시옵고, 주의 백성의 손의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허락하셔서 항상 주님의 생명의 봉사를 감당하는 귀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복주시며, 우리 어린 자녀들까지라도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우리의 생명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 존귀한 삶을 사는 귀한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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