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데교회에 쓴 편지
성경: 요한계시록3:1-6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처럼 복된 날을 허락하셔서 주의 교회를 모이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주의 상에서 주의 열굴을 대면함으로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기쁨을 새롭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과 생명과 빛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고 주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믿음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복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은혜로 교회를 복주실려고 주의 교회를 모이게 하셨사오니 주님께서 영광 중에 친히 백성 중에 임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영광을 주의 백성 중에 드러내심으로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을 기뻐하는 생명의 빛 가운데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3장에 일곱 교회의 일곱 복을 말하는 것은 완전한 교회는 이러해야 하느니라 하는 교회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짐승의 권세 아래서 싸우고 있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그 싸움을 배경으로 해서 교회들을 권면함으로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어떻게 승리할 것인지, 그쪽에다가 강조를 두어서 설명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데교회를 보면은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열매는 마지막 상급을 주시는 의미에서 연결해서 한꺼번에 설명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분이 그들의 실상을 아시고 그들을 치료하시는 분이시지요. 귀가 있어서 말씀을 듣고 이기는자들에게는 자기를 나타내신 그분이 그 이름에 합당한 축복으로 복주고 계시기 때문에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교회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것처럼 칭찬의 말은 없습니다. 그러면 특별히 대단히 배교했는가? 그런 것은 아닌데도 칭찬에 따른 말은 없고 그들의 실상을 진찰하시고 책망하시는 말만 있습니다. 책망의 말씀을 보면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자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를 굳게하라. 네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을 있으나 죽은 자이다. 그러면 무엇이 살았고 무엇이 죽었다는 말인지, 일단은 이 본문의 문맥에서 살펴야 되겠고 그리고 다른 성경에서 도움을 받으면 조금 도움이 되겠습니다. 여기 보면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자다. 그런데 완전히 죽었으면은 깨울 필요도 없겠는데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죽었다는 말은 이 문맥에서는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런 의미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사데 교회는 큰 핍박을 배경으로 설명하지 않는데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로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당장에 윤리적으로 완전함, 그쪽으로 접근하기 쉽겠지마는 이 문맥은 그런 문맥은 아닙니다. 더 읽어 보십시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그러니까 처음 받았고 그들이 들었을 때 그것은 곧 그들이 살았다는 것이고,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그들이 처음 복음의 말씀을 받고 그것에서 떠나있는 것이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했노니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면은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희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고라.」 아마 이 말이 사데교회의 칭찬의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칭찬의 말은 다른데 같으면 앞으로 놓아야 되는데 뒤로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는 데 강조점이 아니라 희옷을 입지 않은 자를 책망하는데 강조가 있기 때문에 그는 칭찬은 없다는 쪽으로 하고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자 몇 명이 있다. 그러니까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은 옷을 더럽혔다는 말이 되겠지요.
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런데 그 옷을 더럽혔다는 말은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인데, 그러면 어떤 것이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인가? 그 사람은 흰옷을 입은 사람인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4절을 보면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 있어 나와 함게 다니리니」 흰옷을 입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나와 함게 다닌다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옷을 더럽힌 사람은 나와 함께 다니지 안했다는 말과 같겠지요. 그리고 5절에서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생명의 약속을 거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문장 내에서 무엇이 행위가 온전한지, 어떤 것이 살았는지, 어떤 것이 죽었는지 그런 것을 설명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살았다 죽었다 이런 말은 특별히 에베소서 2장에도 있습니다마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서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 그런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았다. 거기서 죽었다, 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죽었다 살았다 하는 말은 존재적으로 생물의 힘이 강한가, 그런 것 보다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생명이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두움을 섬기는지, 그런 것을 따라서 살았다, 죽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포괄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은 사람들은 옷을 더럽힌 사람들이고 옷을 더럽힌 사람은 나와 함께 다니니, 함께 안다닌 사람이고. 나중에 보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한 것을 보니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그 아들의 이름을 시인한 것, 그런 사람들이 옷을 더럽힌 사람들, 죽은자들, 그렇게 이문장에서는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만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설명하는 방식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전체적인 배경은 짐승의 권세 아래서 어떻게 믿음을지키는가? 그것이 거짓 선지자로 들어와서 싸워야 될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짐승의 수종자들인 짐승의 정권이니까 로마 황제를 섬기도록 그렇게 유혹하고 그 일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앞장을 서고 그런 일에 있어서 어떻게 자기 생명을 빼앗기는 순교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낼 것인지, 그런 이야기를 주로 했었는데 여기 사대 교회는 그런 핍박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마는 계시록 전체가 그 짐승의 권세 아래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런 싸움을 배경으로 하고 말씀을 해야되겠다 그런 말입니다. 「흰옷」 그러면은 구약에서는 제사장의 세마포 흰옷, 이것이 흰옷이고, 이스라엘 성도에게 흰옷을 입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사장에게는 두 가지 의복이 있는데 하나는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는 그런 옷이 있고, 그리고 세마포 흰옷이 있는데 특별히 세마포 흰옷은 지성소가 열리면은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날에 그때 주로 입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거기서 희다하는 것은 거룩하다. 하나님과 함께한다. 하는 그런 것을 거기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받았으며 들었는지 생각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듣고 그런 일에 있어서 살았다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까 그 교회가 복음을 바르게 받았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겠습니다. 이 교회가 당하고 있는 구체적인 형편은 본문이 언급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알 수 없지마는 당시 이교 세계에서 짐승의 권세가 통치하는 로마 정권 밑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이름을 시인하는지에 있어서 주 예수의 이름을 시인하는지에 있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인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생명책에 흐리지 않고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 즉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가 그 이름을 시인하리라. 그렇고 내 이름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도 그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 하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신앙고백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인했는가, 겁나서. 그런 배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전반적으로 그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일에 주 예수의 이름을 시인하고, 특별히 흰옷 했기 때문에 거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런 일에 있어서 그 세대에 많이 찌들려 가지고 무엇인가 몹시 타락한 교회로 그렇게 사데 교회는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것은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에 사람들 앞에서 너희들이 내 이름을 부인하면은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네 이름을 부인할 것이요, 내 이름을 시인하면 나도 네 이름을 시인하리라.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유대인들이 주 예수를 대적하는 그 배교 문맥 가운데서 너희들이 나를 시인해라. 나를 시인할 뿐만 아니라 내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면은 결단코 그 상급을 잃지 않으리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말하는 문맥에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런 말씀을 했었습니다. 이 교회는 그런 점에 있어서 세속과 타협하고 온전히 주님의 거룩함과 그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도 교회의 상황으로 이해를 해야되겠습니다. 특별히 발람의 교훈을 좇는다거나 이세벨이 활동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어요. 그러니까 특별한 악이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들이 매사에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고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그렇게 해야되겠는데 그 일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특별히 배교의 양상을 안나타나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은 갖고 있지마는 실상은 죽은자다. 너희들이 복음을 그렇게 받았는가? 복음이 그것인가? 그러니까 너희들이 일깨워서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그 말은 아직도 불씨가 있으니까 불씨라고 붙들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죽게 된 것, 그들이 완전하게 아직 완전하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시 일깨워야 되겠고 그리고 굳게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그 교회에 대한 권면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는 깊이 잘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은 이전보다 지식이 부요해지니까 더 익숙하게 되고 또 이런저런 것들이 갖추어지니까 굉장히 성숙한 것처럼 되어 있지마는 처음 우리가 복음을 받았을 때처럼 오직 주님만을 시인하고 매사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그렇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을 해야 되지요. 왜냐하면은 이런저런 신앙의 이론들이 무장되고 경험이 싸이면서 이제는 그런 것을 점점 합리화시켜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복음과 그 영광은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들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수가 없어요. 누가 판단합니까? 일곱 별과 그리고 일곱 영을 가지신 이, 그분이 판단합니다. 물론 인밀한 숨은 죄가 있으면은 불꽃같은 이가 감찰하시되 이렇게 설명하지마는 여기서는 죽었는가 살았는가를 강조하니까 생명이신 그분은 내가 너희들을 안다.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어도 내 손에 붙들려 있는지,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어도 일곱 영을 가지신 참다운 생명 안에 붙들려 있는지, 그들은 그분의 손에서 떠났다는 말이 되겠지요. 일곱 영 하는 것은 어떤 때는 완전한 지혜, 또는 완전한 능력, 완전한 생명, 그 문맥에 따라서 차이는 나겠습니다마는 계시록 여기서는 완전한 생명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말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드신 이가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말씀했지요. 거기서도 이기는 자들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님 손에 붙들린 것과 낙원의 생명과와 연결을 시켰습니다. 여기서는 말씀하시기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그분이 누구십니까? 일곱 영을 가지신 이, 그분이 누구십니까? 생명책에 기록하고 반드시 그 이름을 흐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은 일곱 영을 가지신 이, 그리고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신 이, 그분의 손에 붙들리고 그분의 영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주님과 동거하고 동행하고 매사에 생명이신 하나님을 시인해야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 본문에서 그들을 책망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충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드러난 죄는 말하기가 쉬워요. 그러나 그렇지 안했을 경우에 몇 점짜리를 죽었다고 하고 몇 점짜리를 살았다 하겠어요. 그것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부끼리는 통해요. 왜냐하면 백점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 안한다고 말해도 말을 못하거든요. 어째서 당신이 나를 백점으로 사랑안하요. 그런데 내가 이웃집 남자보다 못하든가, 그런면 부부끼리 말이 안되버리거든요. 왜냐하면 서로가 완전을 요구하니까 그건 부부끼리는 알 수 있지마는 부부가 아닌 사람은 모르지요. 이 본문도 말씀하시기를 귀있는 자를 들으리.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일로 이런 책망하는 본문들이 있을 때 어렵습니다.
그전에 어떤 분은 지혜없이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마침 마태복음을 쭉 강론했던 모양이어요. 그런데 교회하고 사이에 여간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어려울 때 어디를 설교했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21인가 23인가 바리새인의 일곱 화가 있지 안해요. 마침 그쪽 본문을 설교할 때였어요. 그러니까 자기 눈에는 교회가 악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마는 자기가 아무리 본문을 바르게 말해도 듣는 사람들은 나 들어라고 저 말을 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마음이 열리지 안해가지고 대단히 여려웠습니다. 아무리 본문을 연속 강해했더라도 교회의 상황이 그러면은 그것을 조절하고 그렇게 해서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냥 순서대로 한다고 그렇게 했던 모양이어요. 그래서 참 일이 어렵게 되었어요. 더구나 젊은 사람들이 이런 책망의 본문을 읽으면은 노인들이 대단히 거역하고 잘 받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목사가 그렇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무엇이 있으면은 저건 나들으라고 그러는구고나. 하고 듣지를 안해요. 누가 듣습니까? 귀있는 자가 듣습니다. 살아있는 자가 더 살려고 들어요. 복음있는 자가 들어요. 그러니까 책망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잘한 사람들이 받고 그리고 책망을 받아야 될 사람들은 어떤 이유를 대든지 이 본문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귀가 막혀서 못들어요. 더구나 책망하는 본문은 설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당신 그런가 해도 자기는 다른 이유가 있으면은, 우리가 아이에게 책망할 때도 그렇지 안해요. 어른이 보았을 때 뻔한 것이 보여요. 그런데 제깐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럼 저는 억울하다고 씩씩할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물론 공적인 치리를 할 때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겠지마는 개인에 대한 문제가 적용될 때는 각각 자기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적용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들고 인생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설교했을 때는 그런 것을 감안하지마는 그렇지 못했을 때는 일방적으로 자기 관점에서 한가지 관점에서 적용해버리기 쉬워요. 제가 그전에 그랬습니다. 제가 청년 때 전도를 나갔는데 예배당 바로 밑에 사는 집사님이 샘을 파는 집사님이셔요. 이분이 새벽기도회에 안나오셔요. 그때는 새벽기도회에 안나오면 가짜신자인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책망을 대단히 했습니다. 그 샘파는 것도 요새처럼 기계로 파는 것이 아니고 곡괭이로 파고 들어가는 직업이어요. 그러니까 대단히 힘든 직업이지요. 그런데 제가 청년 때니까 오직 죽사오니 그것이 믿음이니까 하여튼 그가 피곤한 것은 육체적인 일이고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면 피곤이 싹 풀릴 것이어요. 그때는 그쪽만 보고 있으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완전히 가짜지요. 그래 갖고 대단히 밀어 붙였지요. 지금 생각하면은 내가 사람을 이해하고 설교했는지, 신앙의 자세는 내가 맞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을 생각하는 데는 청년 때는 대단히 떨어져요. 교회가 기능만 생각하면 청년들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더구나 연약에 빠진 사람들을 채운다고 했을 때는 많은 경륜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 자신을 돌아볼 때도 대단히 그런 어리석은 것이 많이 있었어요. 왜냐하면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말입니다. 의학은 한 가지 원칙이 있겠지마는 의학을 적용하는 의사는 대상에 따라서 많이 조절해야만 휼륭한 의사가 되는 것인데 저 자신도 그렇지 못했던 경우들이 있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가 그점을 조심할려고 그렇습니다. 물론 공적인 문제가 있었을 때는 상황이 다릅니다마는 개인을 대했을 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능하면 책망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적용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시면은 생명의 능력이 자기 안에 계시면은 자기 스스로 그런 것들을 알아요. 나는 잘못이 없어도 남의 잘못을 보고 자기 잘못을 알아 나가요. 그러니까 집에서 얘기들을 훈계할 때도 한 아이를 훈계하면 다른 얘기들도 알아듣지 안해요. 그런데 못된 애기만 나는 글안했으니까 하고 돌아다닐련지 몰라도 조금만 생각이 있는 아이라면 형님이 맞을 때 동생도 조용하지요. 미리미리 교육을 받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일일이 적용 안해도 일곱 영이 계신 분이 그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으면은 그가 참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것인지, 나를 사랑해서 자기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죽음을 정복해서 만유의 주가 되신 주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은 자기 자신들이 알 것입니다. 물론 저도 보는 관점이 있겠지요. 목사가 보는 관점이 없으면은 교인들을 지도할 수가 없을 것이어요. 부모들이 아무리 국민학교를 나와도 대학원 나온 아들을 잘 알아요. 그렇게 안하면 아비 노릇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이런저런 적용이 있기 때문에 귀있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각자 자기을 일깨우고 그렇게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 유익을 위한 것인지, 안그러면 주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복음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복음의 사랑과 능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계산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자기 자신들이 알 것 아니어요. 그리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어요. 저는 우리 동역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합니다. 제가 목사님들과 교제를 하면은. 참으로 생명의 능력을 나타냄이 부족한 것인지, 안그러면 생명의 능력은 나타내는 데 메너가 부족한 것인지, 그런 것은 구별을 해라. 우리는 아차 잘못하면 그 매너를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고, 매너가 서투르면은 신앙이 형편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전에 들으니까 누가 그래요. 어디가니까 신문지에다 사과를 썰어서 주더라고. 말하자면 손님을 무시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고? 그 말이 일반적으로는 맞지요. 그런데 혹시 그분의 출신이 그래서 평소 때 그렇게 했으면은 무시해서 그랬는지, 자기 습관이 그랬는지 잘 몰라요. 옛날 같으면 홍시가 나오면 임금님께 놀려면은 가만히 내다보면 그런다고 하지요. 여자가 홍시를 살살 핥은다고. 아차하면 터져버리까. 그런데 그것을 임금이 가다고 보았거든요. 불러서 감히 임금님 감에다가 혀를 대. 하고 곤장치면 안되겠지요. 그렇게 닦는 법이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들 같으면 어쩝니까? 항상 바빠다가 일하니까 속치마로 얼은 닦아버리든지, 안보면 얼른 혀바닥으로 닦아버리든지 그러면은 도시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보고는 우리 어머니 음식은 못먹겠다. 그럴 수 있겠지마는 그것은 생활습관이 그래서 그런 것이지 손님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어요. 옛날 같으면 쌀 씹어서 손자 먹이지 안해요. 요새 며느리가 보면 얘기 위험하다고 못맡길 것이어요. 그러면 그것은 자식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지 너 대충 먹으라고 입으로 씹어서 준 것이 아니어요. 옛날 습관이 그래서 그런 것이어요. 그런 것이 옛날 습관이 굳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무시해서 그런 것인지 분별을 해야겠지마는 물론 여러분들은 무엇이든지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생활을 처리해 주어야 되어요. 자기 좋은대로 하고 나는 마음껏 했으니까. 그런데 상대방은 대단히 불쾌했거든요. 그래 놓고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 그러면 안맞지요. 언어라는 것도 일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고 생활도 일반적인 틀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을 못갖추었으면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믿음으로 살면은 믿는 식구끼리니까 괜찮고 그래 갖고 마음 놓고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사역자는 그런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이나 되는 것처럼 보고 있으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은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어떠튼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생활까지라도 내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될 것인지,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으로 받고 주님의 영광으로 이해할 것인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 쪽에서 하면은 그것은 자기는 편한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대단히 스트레스 싸이게 하는 것이어요. 옛날에 어떤 분은 그러드라고요. 두 분이 함께 사는데 한분은 청소를 깨끗이 해요. 한분은 청소도 않고 솥가락을 닦으면 그 밥먹는 동구란데 거기만 닦는 분이어요. 다른 곳은 안닦고. 나중에 한참 지나서 둘이 스트레스 싸이는 데 한분은 그런다고 이야기를 해요. 다른 분은 거기만 닦으면 되지, 위생상. 그리고 청소한다고 밤만되면 이불들고 서 있느라고 내가 얼만큼 스트레스 싸인줄 아느냐? 그러니까 둘이 스트레스 싸이는데 누가 고쳐야 되겠어요. 물론 인제 한 사람이 너무 깔끔을 떨었는지 알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일반적으로 청소는 깨끗이 하고 그리고 위생상 있는 것이지, 다른 큰 뒤로도 스트레스 받았다고 하면은 안될 일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고쳐나가야 되어요. 왜 서로 같이 어울러 사니까. 나만 살면 괜찮지마는 내 식구 끼리는 괜찮지 마는 여러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깊이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복음을 가리워서는 안될 것이어요. 그런 점에 있어서 저는 메너를 고치라는 말이 아니라 범사에 주님과 동거하고 범사에 주님과 동행하고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지체를 봉사하는 데 있어서 주님의 생명의 능력, 주님의 손에 붙들림, 주님과 함께 동거함, 그런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 그런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라 그런 말입니다. 저는 더 이상은 말을 못해요. 우리 교회의 장점은 그런 것입니다. 제가 구체적인 적용을 않기 때문에 교인들도 자기 보는 관점이 있겠지마는 아이구 누구는 그러더라, 하고 밖으로는 안나가요.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처럼 풍성히 막 주머니를 털어서 안주니까 사랑이 있니 마니 하는가 몰라도 많은 허물을 덮고 서로를 이해하고 그리고 상대의 헛점을 짊어지고 그렇게 사는 일에 있어서는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 교회에는 휼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는 그렇게 해야되겠지마는 자신들은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주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셔야 되는 것이지 대충대충 살아서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일곱 영의 권세, 죽음을 이긴 권세, 세상을 이긴 권세, 그런 권세로 사는 것은 아니라 그런 말이지요. 그점은 깊이 생각하시라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도 각자 이해력이 다를 것이니까 저도 그쯤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았을 때 헛점이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각자는 하나님 앞에 그 점을 생각하셔야 되겠습니다.
이 상급을 보면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 흰옷을 입고 그렇게 다닐 것이다. 그들은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여기서 생명책에 있다 그말은 하나님 앞에 책이 펴졌을 때 거기에 생명의 책과 행위의 책이 펴진다고 계시록은 되어 있는데 그때 그런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내가 시인하겠다. 왜 그가 나와 함께 동행하고 나와 함께 동거해서 내 오른손에 붙들린 백성으로서 일곱 영이 함께 하는 백성으로서 생명의 능력을 더러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마지막 심판할 때 마지막 흰옷을 입고 주님 거룩한 처소에서 함께 동거하고 함께 동행하고 그렇게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아니하고 영광의 나라에 간다는 법은 없고 지금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오시는 주님의 나라에서 생명책에 기록되고 하나님 앞에 시인되고 그런 법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에 동행함으로 역사를 봉사하고 역사에 동행함으로 역사의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지 지금 몇점 땄다가 나중에 입학 때 되면 자동 카트라인이면 되고, 그런 법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에요. 지난 시간에도 예를 들었지마는 성경은 부부관계처럼 부자관계처럼 항상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너를 사랑하고, 이렇게 생명의 약속 가운데서 함께 경영하고 동행할 것인가, 여기서 칭찬하고 책망한 것이지 당신은 왜 몇범 밖에 못맞아. 몇점은 맞아야 될 것인데, 그런 식으로 아들이나 아내를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성경을 이처럼 언약으로 함께 동행하고 동거하고 역사를 경영하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절대적인 윤리 개념이 있어서 하나님은 백점이면은 그래도 셩화한 사람은 60점은 맞아야 되겠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지옥은 안가고 이런 개인의 운명론으로 성경을 설명해 버리까 이런 경고들이 안맞지요. 왜, 나는 믿으니까. 이것은 가짜만 적용되지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어요. 이 본문은 가짜냐 진짜냐 그렇게 구분하고 있지를 안해요. 네가 나와 함께 동행했는가? 네가 처음 분명히 복음의 말씀을 받았지 않느냐?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다시 한번 일깨워라. 그것을 굳게 잡아라. 복음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일곱 영을 가지신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세상을 이기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원수를 이기고 사랑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 재림하시면은 생명책이 펴지면은 그들의 이름이 거기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네 이름을 분명히 시인하리라. 그리고 흰옷을 입고 영원히 거룩한 지성소에서 나와 함게 다니니라. 그렇게 생명의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이 눈을 감고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일깨우실 것입니다. 주의 영이 여러분에게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들을 때마다 또 읽을 때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더 사랑하고 싶고 더 헌신하고 싶고 그리고 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싶고, 나 때문에 교회가 위로를 받고 싶고 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 될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달음질 하는데 있어서 그냥 천천히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쯤 그런 방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죽게 되기 전에 빨리 일깨우라고 거듭거듭 제촉하는 것이어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여러분이 항상 주님의 사랑과 능력 가운데서 새 생명의 능력을 위해서 주님과 함게 동거하고 동행함으로 주님 오셔서 마지막 심판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만물을 거룩케 할 때 참으로 거룩한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신약 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라오디게아교회에 쓴 편지 (0) | 2026.01.07 |
|---|---|
| 빌라델비아교회에 쓴 편지 (2) | 2026.01.02 |
| 두아디라교회에 쓴 편지 (1) | 2025.12.20 |
| 버가모교회에 쓴 편지 (2) | 2025.12.12 |
| 서머나교회에 보낸 편지 (0) | 2025.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