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두아디라교회에 쓴 편지

찬미예수님 2025. 12. 20. 20:33

제목: 두아디라교회에 쓴 편지

성경: 요한계시록2:18-29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복주셔서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주의 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봉살 수 있도록 복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이 생명의 교제와 축복으로 주의 백성을 복주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부르시고 우리 중에 임하시며 주의 백성을 주의 상으로 초청하셔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생명으로 복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이 보이는 질서를 따라 먹고 마심으로 만족했던 우리 모든 어두움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과 한 몸을 이루는 귀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을 더욱 새롭게 해주시오며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봉사해서 교회가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러 나갈 수 있도록 주께서 복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 나이다. 아멘.

계시록 2장18-29절까지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23장에는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편지가 있고, 그들에게 잘한 것은 칭찬하시고 못한 것은 책망하시면서 이기는 자들에게는 이러이러한 상을 주리라는 약속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기 일곱 교회가 나와 있는데 우리는 이 일곱 교회를 아주 이상적인 교회를 말씀하시는가, 그렇게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은 2, 3장에서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되겠는가, 최상의 교회가 되겠는가? 그런 것을 가르칠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싸움을 주제로 해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진실되게 신앙을 지키고 싸워 나가겠는가? 그런 쪽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런 교회가 완전한 교회니라.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항상 그 문맥을 따라 해석을 해야되는데, 계시록은 로마 정권 밑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그들만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장차 적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이런 핍박이 더 강화될 것입니다. 이러면 마지막 시대의 싸움에도 교회가 결단코 신앙의 신실함을 변질시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봉사를 해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 나갈 것인가, 이런 싸움이 주제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의 편지도 이런 싸움을 주제로 해서 그렇게 권면합니다. 계시록을 강론하기 전에 제가 그런 염려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처럼 소수로 남아있고 이런 교회일수록 소위 기존의 집단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는 눈들이 예리합니다. 또 그런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실감도 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은 계시록 같은 성경을 강론하다 보면은 그것이 전부 기존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 같고 그래서 우리는 의롭고 그들은 몹시 잘못된 것 같고 그런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물론 신앙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사랑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대하는 모든 어두움을 대해서 그것을 거역하는 싸움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마는 우리들이 싸움 쪽에다 강조를 많이 두면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그런 저런 비리를 분별하고 공격함으로 자기는 대단한 개혁자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교회가 항상 조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실은 제가 여기서 말씀한 것보다 교회의 상황은 더 비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고약하게 한다고 그럽니다 마는 그래도 말을 조심해서 하는 편이고, 실제로 내부를 보았을 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불의를 알아야 되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 부족하면서도 불의부터 배워가지고 그런 불의를 공격함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착작에 빠지지 않기를 저는 대단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이제까지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 점을 얼만큼 조심하는가를 여러분이 아실 것 같으면은 계시록을 들을 때도 항상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에 마음을 쏟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빛을 받으므로 세상을 봉사할 수 있도록 항상 순서를 그렇게 정하시고 자기자신을 위해서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는 대단한 분별력이 있어서 싸움을 잘했지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렇게 말함으로 그들이 사랑을 회복하면은 감추인 만나를 주리라고 그렇게 약속을 했었습니다. 대단히 휼륭한 교회입니다. 진리의 투쟁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투쟁 자체로 빠져들어갔는지, 꼭 우리 보수파 비슷하지요. 그쪽으로 빠져들어갔는지 사랑을 잃었고, 만일에 너희들이 아무리 진리를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니까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 그렇게 경고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첫 사랑을 회복해서 이런 신실한 방식으로 주님을 봉사하면은 주님의 사랑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축복으로 내가 감추인 만나를 주겠다. 감추인 만나는 주님 자신의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 중에도 신실한 봉사를 잘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큰 환난을 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살필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지키면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책망이나 경고는 없었습니다. 비록 소수의 무리였지마는 하나님 앞에 사랑이 순결하고 정직한 봉사를 감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연약함을 격려하고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생명이 내어 놓고 봉사하고 있지마는 주님 오시면은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영원한 사망에 들어갈 것이고 그리고 주님을 신실히 섬긴 자들은 그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그런 방식으로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는 사단의 위, 즉 황제 숭배의 중심지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그런 핍박을 면하게 할려는 발람의 교훈이 있었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해서 우상의 상에 앉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 나라로 하면은 그런 것은 국민의례니까 괜찮다. 그런 방식으로 해서 로마 황제를 숭배하도록 미혹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런데 대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보존하고 그런 간교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신앙을 보존할 것 같으면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감추인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것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 알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만나나 새 이름을 주님 자신에 대한 표상들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과 주님의 생명의 교제에 참여할 것을 그렇게 약속을 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리라고 하고 있지요. 비슷한 표상들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를 강론하겠습니다. 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눈이 불꿏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으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해석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 백성의 실상을 밝히고 또 그 백성을 경고하고 격려하고 상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뒤에 내용을 보면은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분이 누구신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비유를 여러번 들었지마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훈계할 때도 나는 누구다. 했으면은 그 다음에 훈계의 내용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과 경고도 비슷하게 될 것이어요. 처음에 성질을 내놓고 네 아버지 무섭다고 해놓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딴 말을 하고 있으면은 얘기가 어리둥절하겠지요. 그러니까 속으로는 예뻐도 성질을 내서 불렀으면은 네 아버지가 얼만큼 고약한줄 아느냐? 너 이런이런 짓거리 했지, 앞으로도 그러면 매맞을줄 알아라. 그쯤은 해야 그래도 아이쿠 우리 아버지 무섭다 전체가 연결이 되지.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주님이나 그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판단하시는가는 전부 연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환상에 대해서 직접 상징법을 해석할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익히 잘 알기 때문에 눈이 불꽃 같고 하면은 몰라도 그냥만 눈만 봐도 내 속이 찌끔찌끔하고 다 안 것 같지요. 그러다 보니까 발이 주석 빛난 주석같으니가 그런 발로 뚜벅뚜벅 찾아오면은 걸렸다 하면 죽을 것이어요. 아마 구약 같으면 하나님이 시내산에 불수레를 타고 강림하셨는데 아마 무시무시한 분이시지요. 가까이 가면 죽어요. 그러니까 이런 표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마는 그 내용들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표상들은 구약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물어보아도 이분이 좋냐 나쁘냐 물어보면은 무섭지요. 눈이 빛난 불꽃같고 무섭지요. 눈도 쳐다 보지 못하겠고, 그다음 발 밑을 보니까 발도 막 번쩍번쩍하고. 그런 분이 뚜벅뚜벅 오면은 이양반 만났다가는 큰일나겠지요. 그런데 구약이 그런 표상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다 알 수 있고 구약을 모르는 아이들도 이런 장면은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칭찬하시는데 네 사업과 그리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 이 교회는 칭찬하는 면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에베소 교회와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2장2절을 보면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보니까 그런 일에 궁적인 문제에 대단히 항목이 많지요. 그런데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했다고 했는데 그것과 비교되는 것은 이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했지요. 잘한 것은 에베소 교회와 비슷한데 잘못한 것은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거짓된 선지자들을 분별해서 쫓아냈는데 이들은 여선지 이세벨을 받아들였다. 그점이 잘못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비슷한 것은 버가모 교회하고 비슷한데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니골라당들, 그런 자들이 그들에게도 있다 그랬는데 여기서는 이세벨이 있다. 여선지자 이세벨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점에 있어서 버가모 교회하고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칭찬을 보면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이런 것이 무슨 말인가가는 잘 모르지마는 내용을 보았을 때는 사업과, 사업을 앞에 세웠어요. 그리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알고, 그러니까 대단히 번창하고 그리고 서로서로 화목하기도 하고 아주 대단히 활동적입니다. 더구나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하니까 대단히 부훙되고 소위 일취우러장하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망한 것을 보니까 지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했다. 그여는 내 종을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치 아니했다. 그 음행을 회개하지 안했다. 그렇게 이세벨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이세벨에 대해서는 구약을 아는 분들은 말만해도 척 아는 것이지요. 모르시는 분들은 설명을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안 읽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할 수 없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지난 시간에 발람은 설명을 했으니까 알 것이고, 이세벨도 유명한 악녀니까 대충은 알 것입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임금 중에 최고로 악한 아합 임금의 부인인데 자기 친정은 시돈입니다. 시돈 왕 옛 바알의 딸이어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아합 임금과 결혼을 했지요. 왜 이 아합 임금이 구원역사에서 제일로 악한 임금으로 묘사되느냐 하면은 북이스라엘을 일으킨 사람은 여로보암이고 그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사람은 아마 아합 임금이 될 것입니다. 다윗 임금이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지음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그렇게 확정했던 것처럼 이 아합이 나쁜 일로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건설했는데 거기다가 바알의 사당을 지어서 그 나라를 바알의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사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투쟁했던 것이 이 아합 때에요. 그때 이세벨이 힘을 얻어서 바알의 선지자들 400450명 아스다롯 해서 850명이지요. 많은 선지자들을 그 왕궁에 두고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죽였습니다. 한 백여명 남았는데 오무리란 사람이 50명씩 굴속에 숨겨서 겨우 남겼고 하옇튼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고발했을 때는 나만 남고 다 죽었습니다. 할만큼 여호와의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 악한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닫으셔서 비를 내리지 안했기 때문에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안했습니다. 그것이 구약 당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파괴된 실상이기 때문에 계시록에서도 3년 반 동안 하면은 어느 때를 모델로 하느냐 하면은 아합 임금 때, 그리고 그 부인 이세벨의 치하에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거든요. 그때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멸망시키겠다. 아합의 집은 내가 망하게 하겠다. 그리고 이제는 남은자를 위해서 구원하겠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은자의 구원 약속이 주어졌던 때가 아합과 그 부인 이세벨의 때에 있었던 일이어요. 그런데 이 본문을 보았을 때는 이세벨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구약 때 하나님의 교회를 미혹해서 우상에 참여토록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그런 모델들을 사용해서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어요. 여기 2, 3장에서는 교회 밖에 것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죄들을 지금 책망하고 있습니다. 대개 보수파들일수록 교회 안의 죄를 책망하면 분노하고 교회 밖에 죄를 책망하면 아주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이방인은 개고 이스라엘은 거룩하다 그러면은 이는 진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 하나님의 전이라 하지만 이는 창기의 집이다. 너희들은 바벨론에 항복해라. 예레미야가 그러니까 이는 매국노다. 그래서 가두는 것이어요. 우리 보수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함으로 자기를 세웠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그것이 조금 어려울 만큼 그것이 특징이어요. 그전 제가 재건교회에 있었을 때는 재건 교회 밖에 교회를 공격하면은 이건 대단한 재건의 용사입니다. 물론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재건 교회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바리새파라고. 자기들을 비방하니까. 그래도 비판을 받아도 싸기는 쌉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판보다도 내부는 훨씬 더 썩었거든요. 그러니까 재건교회가 잘못된다고 우리가 옳아지는 것은 아니어요. 또 재건 교회 밖에 사람들이 잘못된다고 그들이 옳아지는 것이 아니어요.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설명해야 되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 좀 나은 점이 있다 해서 그것이 전체로 자기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어요. 그런데 재건 교회는 신사참배 때 대단한 투쟁을 한 교회이기 때문에 신사참배한 교회들을 지금도 우숩게 알고 있고 대단히 의심하고 있지요. 더구나 그전에 신사참배 뿐 아니라 지금도 우상을 숭배하는 그런 흔적을 보면은 그냥 발견하고 공격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공격하면은 대단히 영안이 밝고 이 시대를 봉사하는 선지자처럼 높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재건교회 내부를 공격하면 못견딥니다. 그런데 지금 2, 3장에서는 교회 안의 죄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죄들을 지금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주님은 교회를 성소 삼으셔서 친히 임재해 계십니다. 그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붙들고 거닐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가 그 거룩함을 확보하고 이겨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진찰하고 교회를 격려하고 교회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어요. 교회 밖에 있는 실상을 2, 3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4-에서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들을 누군가? 특별히 12장 이하에서 그런 것을 자세히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일단은 2, 3장에서는 우리 자신의 죄들이 무엇인지, 그쪽에다가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이전에도 비유를 들었지만은 세상에 병균이 가득 돌아도 내가 병 안들면 나는 괜찮은 것이어요. 그러나 병균이 한 두 마리 있어도 내가 병들면 나는 죽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통계로 따져서 우리는 보수파고 우리 교회는 어쩌니 나는 괜찮으리. 그렇게 하지 말고 여기는 교회에 대해서 일반적인 권고를 하고 있지마는 자기는 누군지를 항상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겠다. 그런 말씀입니다. 제가 일부러 여러분들이 들으라로 여러분은 이런 죄가 없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촞아서 공격은 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의 그런 감독자나 채점자는 아닙니다. 또 여러분 자신들이 이런 저런 행동을 했을 때는 여러분 자신의 설명과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가 보는 관점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는 관점에서 제가 목사라고 해서 제가 성경을 조금 더 안다 해서 여러분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그냥 객관적인 방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그런 것은 여러분에게 설득력도 적을 것이고 또 지혜롭거나 겸손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양심이 뜨끔뜨끔 찔림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안해도 좋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러분 자신 안에 성령이 계시면은 내가 이 행동을 할 때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참으로 교회를 사랑해서 했는지는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면 알아야 될 것이고 그리고 모르면 모른 것이지 모른 사람을 가르칠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권고하는 것이지 전도용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고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설명하고 깨달아야 되니까 혹시 여러분 마음에 찔림이 있을지라도 오늘 목사님은 나 들으라고 공격하는갑다. 저에게 그런 것을 뒤집어 씌우면 안되겠지요. 그러면 뒤집어 씌울 필요도 없는 것이 목사도 알면 하나님이 얼만큼 좋아하시겠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잘 받으셔야 되겠지요. 사람이 보기에도 그러하겠거든 하나님이 보시면 어쩌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야 되지 목사님이 나 들으라고 찔러. 그러고 성질내면 안되겠지요. 그러니까 저는 이렇든 저렇든 여러분은 저에게 뒤집어 씌우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덮으면 안되어요. 왜냐하면 덮어도 하나님 앞에는 들어날 것이니까. 여기 말씀하신 분이 누구여요? 눈이 불꽃 같으신 분, 이 양반이 다 아시거든요. 지금 여러분이 덮어버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니까 지금 그런 것을 드러내 놓고 회개토록 하나님이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지 우리를 멸망시킬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전에는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그 행동을 돌이키라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여러분의 구원과 위로가 되어야 되지 여러분에게 슬품을 줄려는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으셔야 됩니다. 우리가 이보다 더 큰 죄 아래 있었을 때 원수로 있을 때 하나님을 대항하는 저주 가운데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거룩한 성소와 몸과 지체로 삼으셨는데 지금 범죄한 백성을 멸망시킬려고 하나님이 책망하시겠습니까? 그 멸망은 주님 오셔서 있을 일이고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오래 참고 권고하시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그런 시대이니까 여러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음성 앞에서 마음을 열으셔야 됩니다. 저는 혹시 주님의 마음을 닮지 못해서 여러분이 계속 --못하면 신경질나서 혹시 신경질적인 말이 나갈련지 모르지마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으시고 여러분을 거룩케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영광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책망한 부분을 보십시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했다.이것은 하나님이 임명한 선지자도 아니고 자칭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에요. 그런데 그 사람을 용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네 종들을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 음행을 회개치 안했다. 그렇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 종들을 가르쳐 행음하게 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했다. 행음과 우상을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지난 시간에 보았던 발람은 그도 거짓 선지자인데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것은 발람 선지자와 같지마는 행음하도록 했다. 14절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이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행음하게 하였다고 순서가 되어 있고, 여기 이세벨은 다르지요?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했다. 또 내가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 음행을 회개치 안했다. 이 여자의 행위는 우상 보다도 음행 쪽에 더 강조가 주어져 있습니다. 음행을 여러번 말하니까 이 사람은 음행에 쪽에가 더 강조가 되어 있고 발람은 우상 숭배를 똑같이 말하지만 우상 쪽에 더 강조가 놓아져 있지요. 이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라. 즉 로마 황제를 섬기는 사당이 있는 곳이어요. 그러니까 우상의 권세 쪽에 더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그런 도시는 아닙니다. 이 도시는 주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평야도 대단히 번창하고 그래서 여러 직업들이 많고, 직업들 마다 조합들이 있고, 동업 조합들마다 그 직업을 복주는 신들이 있어서 우상숭배가 성행했다. 그렇게 그 도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떠튼 여기는 황제의 위가 있는 식으로 우상의 권세 쪽에 강조를 둔 것이 아니고 음행했다. 음행 쪽에다 강조는 두는데 음행은 무엇과 관계가 관계가 있습니까?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행이 구체적으로 윤리적인 음행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상숭배을 음행으로 다른 말로 묘사하고 있는지, 그것은 확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반복된 같은 자리에 있는 말은 앞에 말을 뒤에서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상 숭배를 곧 음행으로 같이 묶어서 설명하는지, 우상 숭배가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음행도 번창했다고 설명하는지, 그것은 확증할 수가 없습니다.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자기 아버지의 첩을 데리고 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교회가 용납했도다. 한 것을 보니까 그 당시 대단한 음행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용납되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윤리적인 문제에다가 강조를 둔 것이 강조가 아니라 실은 세상의 권세와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짐승의 권세와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싸움 쪽에다 강조를 두었지 너희들이 윤리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했다. 그쪽에다 강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들의 음행이 무엇인지, 그쪽은 윤리적인 접근을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계시록의 전체적인 흐름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항하는 짐승의 권세에 대해서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자기 생사가 위험할지라도 자기 순수한 신앙을 고백할 것인가, 이쪽에다 강조를 두고 있지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니까 덩달아서 도적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했지 않으냐? 그쪽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음행문제는 우리가 강조하지 안해도 될 수 있다 그런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우상과 음행을 연결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분명히 윤리적인 상태를 연결하고 있지마는 계시록은 주제가 싸움이기 때문에 그 싸움을 우상숭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상 숭배를 어떻게 하면은 합법화시키겠는가, 그런 면에서 들어온 문제들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 쪽에다 강조를 두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이세벨의 방식은 어떤 방식이기 때문에 종들을 꾀어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는가, 그런 말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사탄의 위, 황제 숭배의 자리가 있는 그런 도시이기 때문에 황제 숭배를 안하면은 그들은 생명이 위협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숭배는 국민의례다. 그런 방식으로 해서 로마 황제가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런 말을 시인하고 거기다 경배를 하도록 요구했던 것이고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신사참배 때 구체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그런 황제 숭배가 강력한 것보다도 여러 동업 조합이 있고 그 조합마다 복주는 신이 있어요. 더구나 희랍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신들이 많지요. 어부들이 섬기는 바다 신도 있을 것이고 산에 올라가는 사람은 산신이 있을 것이고, 또 술장사하는 사람은 술신이 있을 것이고, 박카스가 술신이지. 동아제약 박카스가 술신의 이름입니다. 여러 신들이 있지요. 우리나라도 당골들이 굿하면 여러 신들이 있을 것이어요. 눈이 동티 났을 때는 비는 신이 있을 것이고, 어디 장사 잘되라고 부르는 신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고 여러 신들이 있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런 동업조합마다 자기 직업을 복주는 여러 신들이 있기 때문에 그 동업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자기 생존권이 위협받지요. 그런 상황에서 여기서 여자 이세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면 하필이면 남자가 아니고 여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더구나 구약의 이세벨은 아합의 부인이기 때문에 왕비입니다. 대단한 힘이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여자가 얼만큼 힘이 있는가, 그쪽은 강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세벨을 전부 다 유형이 비슷한 것으로 끌고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이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니까 교회에서 이세벨은 감독의 부인일 것이다. 그 사람은 감독도 아닌데 감독 노릇을 해서 우리 나라 상황과 조금 비슷하지요. 자기 남편이 대장이면은 아내도 대장이고, 남편이 검찰총장이면 아내도 검찰 총장이고, 또 교회에서도 남편이 목사면은 아내도 그렇고, 남편이 장로면은 아내도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 우리 나라 일이지요. 인제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은 말하자면은 그때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말하면은 교회에 있는 영적인 이세벨이 누구냐? 그 사람은 감독의 부인일 것이다. 감독의 부인이니까 선지자는 아닌데도 그런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미혹했을 것이 아니냐?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마는 그런 것은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유형을 따라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는 이세벨이 얼만큼 권세를 발휘했는가가 강조가 아니라 이세벨이 어떤 교훈으로 미혹했는가만 말하고 있지 이세벨의 권세 쪽에는 강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감독의 부인이니까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까지는 연결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섬겼는가? 이것이 지금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그 도시 상황은 많은 동업 조합이 있다고 말씀들 드렸습니다. 만일에 그 도시가 황제의 위, 황제의 사당이 있는 도시같으면 섬기지 않으면은 죽을 것입니다. 큰 권세로 억압하니까.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마는 많은 동업조합이 있었고 동업조합마다 그 직업을 복주는 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은 그 번성한 도시에서 자기 생존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계시록 13장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은 매매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자기 생존권의 박탈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잘못된 것이 이 교회 상황을 보면은 대단히 힘이 있는 가운데서 잘못된 것입니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한 것을 보니까 대단히 휼륭한 일을 많이 해요. 굉장히 활기찹니다. 이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는 것을 보니까 대단히 부흥 번성하고 있습니다. 결단코 약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교회에 거짓된 선지자들이 들어왔을 때는 그들의 강함을 빙자해서 들어오지 약함을 빙자해서 들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략도 강함을 빙자해서 들어오겠지요. 그러면 이 강한 교회가 어떻게 하면은 그 왕성한 직업 사회에서 살아 남을 것인가 했을 때 방법은 뻔한 일이지요.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임금이신데 교회가 그렇게 쭈그러들면 되겠냐? 천당 가운데 천당가자. 세상은 악하다. 하고 그렇게 폐쇠적으로 낮아지면 되겠냐? 땅 끝까지 정복하라고 안했냐? 자기 힘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쪽에다가 초점을 맞추겠지요. 또 이렇게 힘이 있고 굉장한 교회이기 때문에 우상이 무엇이냐? 오직 예수님 주님이시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것이 고린도 교회에 방종한 자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한 마디로 대단히 번성한 교회이까 우리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진출해서 우리들이 사람을 만나야 되고 만일에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과 연합을 안할려면 이 세상을 떠나라고 그랬지 않느냐? 고린도 교회에 그런 교인들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교인들과 접촉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 우리가 소극적으로 움크러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전도하자. 그럴려면은 어떻게든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기독교적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돌려서 전도를 하자. 아마 그래야 이 대단히 번성하고 왕성한 교회에 맞아들어갈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우상의 상에 앉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 동업 조합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혹시 우상 숭배는 직접 피할련지 몰라도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낼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교회는 계속 번성해 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는 주님 앞에 순결한 사랑으로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은 자기들의 활동 폭이 제한을 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 그런 꾀를 부리는 줄은 눈이 불꽃 같은 분이 잘 아시겠지요. 그것이 사탄의 깊은 것이어요. 진리를 빙자해서, 영혼 구원을 빙자해서, 교회의 부흥을 빙자해서, 그런데도 문제는 그 사회에서 아무도 손해보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자기들의 좋은 쪽에다 끌어내서 적용하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예로 우리 나라 교회도 그런 것이 있기는 있어요. 제가 그분이 악하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분이 교회 행정가라 그런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어요. 지난 시간에 예를 들었지마는 우리 나라 교회는 전부 제사지낸 민족이 아닙니까? 조상을 모른다면 사람도 아니어요. 요새 뭐 김용욱 교수는 보니까 육두문자를 잘 쓰드구먼. 조상을 모르면은 사람이 아니지요. 너 조상 없이 어떻게 생겼냐? 하옇튼 조상을 안섬기면 천하의 무엇이어도 사람 취급을 안하니까 안되는 나라에요. 그래서 인제 추도식이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너희만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제사지낸다. 성경에 레위기를 보아라. 하나님 앞에 제사지내고, 단어가 똑같지요. 괜히 제사라는 말을 안써갖고 핍박을 받을 필요가 뭐가 있냐? 성경에 제사지내라고 했고 로마서도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우리도 제사지낸다. 성경 봐라. 그런데 안지낸다고 했는데 지낸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안싸워야 되겠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잘못된 신에게 제사하고 우리는 진짜 신에게 제사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신은 달라도 제사는 똑같으니까 그러고는 인제 추도식을 하는 것이어요. 그것도 인제 뻔한 짓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교회에 대단한 행정가십니다. 그러니까 이분의 아이디어는 이것이어요. 우리 나라는 3년 상을 해야 벗거든요. 그러니까 1년 동안은 하고, 하여튼 이분은 계속해서 하는 것을 줄여 불려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1년을 하면 2년도 하고 3년도 하고 계속해서 무슨 1년 하면 백년을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순수한 신앙으로 교회를 바꿀려는 것보다도 교회의 행정과 통치를 통해서 핍박을 면하고 사람들 마음도 편하게 하고 그것을 벗을려는 방법이어요. 제일로 교회 안에 잘못된 권위는 무엇이냐? 이방신은 교회에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제일로 기독교적인 이름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것이 제일로 교회를 무너뜨려요. 여러분들이 무슨 중을 무려워하겠어요. 그러나 목사는 조심하겠지요. 여러분들이 이방풍속은 교회 안에서 아무 힘도 없어요. 조금만 알아도 힘이 없어요. 그러나 교회가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이것은 하나님이 이것은 이렇게 하신다고 해서 교회를 굉장히 억압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잘못된 것은 알면서도 교회 안에 부도덕은 모르고 믿사오니 야단히 나버려요. 그것이 진리처럼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벽기도를 안하면, 새벽기도하는 그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어요. 좋지마는 교회가 새벽기도를 경건의 모델로 삼아가지고 새벽에 저 봉선동에서 여기까지 실어 날라요. 캄캄한 밤에. 서양 같으면 유괴당할 여자에요. 하옇튼 서양 같으면 10시 넘어서 여자들이 길에 얼쩡얼쩡하면 나 데려가십시오. 그말이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철야기도도 하고 그걸 남편이 반대하면 우리 남편 속에 마귀가 꽉 찼도다. 그리고 만일에 우리 남편이 안믿어서 그러면 하나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느뇨? 그러니까 와서 앉아있어요. 이렇게 되어 놓으니까 아주 갑갑하지요. 교회가 그것을 명령하니까 권위에 잡히는 것이어요. 교회가 명령하니까. 그리고 40일 작정기도하고 39일만 하면 무효에요. 한 날이 부족하니까. 교회가 딱 정해놓았거든요. 큰일이지요. 하여튼 어떤 단체도 돈냈다고 이름을 부른 단체가 없는데 교회에서는 헌금하면 이름을 불러줘요. 아멘하고, 이름 안불러준 교회는 돈있는 사람은 안와요. 돈 없는 사람은 혹시 올련지 모르겠어요. 돈 없는 사람도 안와요. 이름을 불러주고 복을 많이 빌어주어야 오지 내 앉아 있어 보았자 받을 것이 없으면은 무엇하러 온답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오늘 투자를 해도 내일은 받는다고 하면 심청이처럼 바다에 빠져 죽기도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도 헌금 이름 안불러주면 그때는 불쌍스럽지 않으니까 좋을지 몰라도 지금 지내보면은 받을 복이 없어서 안올 것이어요. 이름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주어야 복이 오지요. 교회가 정해 놓으니까 권위가 있어요. 그만큼 잘못되어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 이 두아디라 교회도 그런 전략인 것 같아요. 교회는 대단히 사업을 잘합니다. 복음 사업을 잘해요. 사랑과 믿음이 신실합니다. 그리고 형제에 대해서 인내하고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섬김이 많습니다. 아주 이전보다 오늘이 번성한 것처럼 잘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이 그런 것을 잘 하고 있느냐? 온 도시가 우상으로 꽉 차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우상 섬기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도 피해는 하나도 보지 않고 잘하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이세벨 때문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을 다른 성경에서 영적인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된 자라. 간음하는 여인과같다. 그렇게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 음행은 특별한 항목으로 설명하지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이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온 이세벨의 역할일 것이어요. 특별히 여자가 그렇게 했으니까 여자를 모델로 삼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 이세벨이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땅끝까지 정복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예도 있지요. 교회 안에 남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안믿는 총각을 교회에 데리고 와요.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해서 한명이라도 영혼을 구원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성경은 그 것을 말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면 인제 어떻게 전도한답니까? 어떻게. 전도를 해야되지요. 그런데 그 총각이 결혼만 하면 우리 교회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좋지요. 그런데 결혼해 놓고 얼마 안 있으면 눈이 퍼래가지고 오기도 하고, 두둘겨 맛지요. 그런데 거기다 첫아들을 낳았다면은 축복이로다. 더구나 그 남자가 십일조만 잘내도 영혼을 구원했도다. 이런 식으로 해버리까 교회는 대단히 부흥되고 숫자는 많고 사랑이 풍성하고 좋지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 피해를 면할려고 하는 수작인지 안그러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한 것이면은 자기는 혹시 덮어씌우고 모를련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겠지요. 그 문제로 지금 책망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 그것은 대체적으로 들어난 예화들이고 다른 예화도 많이 있겠지요. 아마 제가 보았을 때 저도 힘이 조금 빠져있습니다. 왜 힘이 빠져있느냐? 눈높이 신앙을 합니다. 왜냐하면 요새는 하도 배교의 시대라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자 말자 나만 별난 것 같고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 것 같아서 그 말을 참아 못내요. 그러니까 제가 높이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라. 각자 자기를 설명할 것이 아니냐? 내가 뻔한 보는 방법이 있어도 보는 관점은 말을 못하고 그렇게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교훈을 다른 교회에서 하면은 그 교단에서 못배겨요. 더구나 우리가 가르치는 구속사로 그전 신학을 교정하면은 그것은 단박 우리는 이단이 되어요. 그런 교리적인 개혁은 안하더라고 우리가 믿는 양심껏만 교회에다 설명을 해도 못베겨내요. 지금 우리들이 구속사로 신앙의 형태를 바꾸었지마는 그전에 제가 그런 것을 잘 몰랐을 때 헌금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절기 지키는 것, 또 뭐요. 그런 것만 공격을 했었거든요. 왜 남편을 구원할려고 하지 않고 안믿는 남편의 돈을 살살 빼서 십일조하면은 복받는다고 그러냐? 왜 하나님 앞에 봉사한다고 하면서 부부간의 관계를 깨뜨리느냐? 그러니까 나를 욕하지요. 요새 안믿는 남편이 보통 많은 데 십일조 안내면 교회가 어떻게 선교하겠냐? 선교를 해서 영혼을 구원할려면 헌금이 들어와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하는 말은 들어오는대로 봉사하고 남편을 하나님 앞에 인도할지 남편의 돈을 살살 빼서 십일조하면은 아내의 사랑 때문에 남편의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 그런 성경은 없다. 인제 교회 수입에 장예가 되니까 저를 죽일놈 살일놈 하지요. 당연히 우리들이 여러분이 수박철에 수박을 사 먹을 때 저도 생각나고 가난한 교인도 생각이 나지요. 또 한참 가뭄에 농사가 잘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감사절기를 지킬 때는 하나님 앞에 헌금이 많이 나오는 것은 정상입니다. 여러분 보너스가 나올 때는 친구끼리 한떡을 내더라도 비싼 것으로 내지 않겠어요. 오늘 보너스 탔네. 그전에는 곰탕을 먹었는데 오늘은 무엇을 먹세.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감사절을 지키면은 헌금도 많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때를 헌금을 거두는 때로 알고 아예 집사님들 얼마 이상, 작정을 하고 구역별로 분빠이를 하고 그러지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어요. 저는 절기를 열번 딸기감사절기, 수박감사절기, 도마토감사절기 여러번을 지켜도 좋아요. 그건 당연한 감사 상식이거든요. 그러나 구약 성경의 권위를 인용해서 3대 절기는 지키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빈손들고 나오지 말라고 했다. 드린대로 복준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에 내라. 그런 식으로 구약의 권위를 인용해서 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 공격해도 이단이라고 쫓아내지 안해요. 제가 새벽시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어요. 왜 새벽기도를 경건의 표준으로 삼느냐 그말이어요. 왜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해서 표준으로 삼느냐? 각자 형편 따라 기도하는 것인데, 우리 나라 사람은 농경문화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요.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대단히 유익할 것이어요. 그건 여러분의 경험으로도 그럴 것이어요. 그것은 당연히 좋아요. 그러나 그런 것을 경건의 척도로 삼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지요. 그런 것만 반대해도 이단이고 쫓겨납니다. 그런데 저는 성질이 고약해서 쫓겨나고 인간이 못되어 먹어서. 다른 사람은 인간이 잘되어서 안쫓겨나는가 몰라요. 그러나 자기들도 나처럼 입만 열었다 하면 못살아 남아요. 그건 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은 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우리의 교단이 현실이 그렇게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은 마땅히 그 사람들이 너는 나쁜놈 하기 전에도 이것은 잘못되었지 않느냐? 고쳐야 되겠다. 그것이 교인 앞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반대고 노회에서 목사가 발언할 일이지 자기가 쫓겨나기 전까지는 괜찮도다 하고 입을 꼭 다물고 있고, 다른 사람은 실력이 없는데 우리 구속사 학파는 실력이 있도다. 앞으로 내 때가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으면은 그런 것이 참으로 그 교회를 사랑해서 그 교단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견디고 있는 것인지, 마음이 괴로워도 견디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핍박이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 가능한 일이니까. 저는 그래요. 항상 떠르라고 하지 안해요. 그러나 내가 말해야 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에요. 모든 것을 다 말하라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러나 말해야 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요. 그런데도 아무런 핍박을 안받아요. 물론 몇 명 쫓겨난 사람들도 있기는 있지요. 해보니까 안되지요. 그리고도 성경들은 잘 풀고 실력들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말은 못해요. 거기서 나온 사람은 거룩하고 안나온 사람은 가짜다.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요. 각자 형편이 틀리니까. 각자 위치들이 달라요. 각자 환경을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고 추중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획일화시킬 수는 분명히 없어요. 먼저 나온 사람은 거룩하고 안나온 사람은 가짜라 그런 말을 할려는 것이 아니어요. 문제는 불꽃 가은 눈으로 자기 심장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참으로 그 교단을 사랑해서 건질려고 지혜를 발휘할려고 사랑을 발휘할려고 말할 기회를 발휘할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핍박이 겁나서 아직은 핍박을 당할 때가 아니라서 그러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말이어요. 그러나 제가 원하는 바를 강력히 요구하지 못해요. 제가 요구하자 말자 김강호 목사가 우리를 정죄하드라. 싫어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제가 만일에 그분들로 말미암은 유익이 겁나서 이 말을 안하면은 저는 비겁한 사람이어요. 그러나 그분들의 낙심하지 않고 서 있으면 저는 사랑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이해타산을 따라서 하지 말라 그말이어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조절이 되겠지마는 자기 이해타산을 따라서는 조절을 하지 말라 그말이어요. 그것만 있어도 우리들이 행동할 방식을 알 수가 있을 것이어요. 우리는 욕을 먹지요. 형편 없지요. 그리고 우리가 가르친 교훈으로 유익을 본 사람들이 많지요. 유명한 실력가들이 될 것이니까. 제가 좀 높이는 낮춘다 그말은 제가 말하고 싶은 그 긍정적인 요소를 말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내가 최후의 선에서 말하고 기다린 것 뿐이다 그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래야 교제가 가능하니까. 그래야 내가 설명할 기회가 있으니까. 단지 그것이 정상적인냐. 나는 몰라요. 각자 환경이 있으니까. 나는 최하의 선에서 이야기한 것 뿐이어요.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설명을 해야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지금 이세벨의 작전이어요. 모든 대세는 다 우상숭배입니다. 대세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대세에서 어떻게 하면은 내가 피해를 보지 않고 그리고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인가, 했을 때 교리를 직접 바꾼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이 풍성합니다.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진리를 진리로 적용했을 것이 아니어요. 이쪽을 적용할지 저쪽을 적용할지, 상황을 가지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 교단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아서 적용해야 될 것인데 적용할 것은 적용하지 않고 적용하지 않을 면을 적용해서 사랑을 빙자해서 참고 있으면 그런 것이 옳은 것이냐 그런 말이어요. 약한 사람에게는 참아야 되겠지요. 강한 사람에게는 자기 고백을 해야되겠지요. 그런데 강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진리를 빙자해서 치면은 그런 것이 맞냐 그말이어요. 물론 그 말만 들어보면 맞겠지요. 그것이 맞냐 그말이지요. 김강호는 얼만큼 나빠서 건뜻하면 떠나고 그 교단은 얼만큼 사랑이 많해서 그 많은 비리를 빙자하고 견디냐 그말이어요. 알 수가 없어요. 너무 안타카운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안타카운 일이어요. 여러분들도 그런 점을 조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나는 제가 맞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현 위치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객관성을 주기 위해서 공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비방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속한 비방을 자기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단에 하고도 그 말을 나에게 할 수 있는가 하면은 그건 저에게 말 못하지요. 그리고 자기들이 나에게 비방한 것과 내가 그들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가고 참고 가르치고 것을 알면은 나에게 사랑이 있느니 마니 그런 말을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보고도 사랑이 있느니 마니 그런 말을 못할 것이어요. 우리 교회가 누구를 봉사할 여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어요. 사랑도 여러 가지가 아니겠어요. 돈이 있으면은 돈으로 사랑하고, 우리는 돈은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자기고 있는 진리는 있어도. 그것은 부지런히 가르치고 봉사할 수 있지 안해요. 그런데 우리보고 돈 안내놓은다고 사랑이 없다고, 우리한테 돈벌러 왔어요. 우리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을 길러냈어요. 그런데도 물에 빠진 삭람 건녀주니까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지요. 그러면 자기들은 얼마나 사랑이 있기에 또 나갑니까? 제일로 나쁜 사람이 사랑이 없다고 나간 사람이어요. 사랑은 주는 것이지 계산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랑이 없는 우리에게 자기가 사랑을 베풀고 있으면 되지 안해요. 그러니까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우리 자신들은 사랑이 풍성해야 되겠지마는 어떤 사건을 두고 비교했을 때는 객관성을 가져야 되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할 말을 해야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옳다고 해서 우리가 사랑이 풍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자기들이 보았을 때 우리를 공겨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건없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와 그런 사건이 있을 때 우리를 공격했을 때는 설명이 다르다 그말입니다. 누가 나보고 교만하다고 그러면 나는 절대 교만하지 않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냐? 그러면은 무릎을 꿇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평생에 할 일어어요. 그러나 어떤 건을 두고 교만했다고 하면 실은 내가 겸손하고 그 사람들이 교만한 것이어요. 그 사건에 대한 해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두고 내가 겸손하면 안맞아요. 어떤 건을 두고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있거든요. 그때는 건을 두고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겸손하냐, 그것을 적용하면 안되어요.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분별을 해야되겠지요. 이처럼 큰 명분을 세울수록 계획이 잘 통합니다. 교단을 위한다. 진리를 위한다. 이런 면분 때문에 간사한 꾀들이 들어와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꾀를 낸 사람은 안통해요. 뻔히 수가 보이니까. 그러나 교단을 위한다. 화목을 윈한다. 그런 큰 명분을 내세우면 통하는 것이어요. 그것이 이제까지 교회들이 타락한 방식들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위해 있어야 됩니다. 교회가 주님을 섬기도록 있어야 되는데 주님이 교회를 섬기도록 조절되어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단지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인내한 것은 좋습니다. 약한 것이 결단코 우리를 파괴시키지 못하니까. 그러나 강한자들과 타협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이론을 내는 것은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해야 되는 것이어요. 그것이 이세벨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 원칙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상황을 분별하십시오. 저는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그것이 내 눈에 보일지라도 저는 그런 문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자에게 사랑을 말한들 꾸며낸 이야기 밖에 안돼요. 주님을 사랑하면은 무엇을 하라고 해도 못해요. 주님을 사랑하면은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이 일을 한다고 자기가 설명하기 전에는 그는 숨쉴 수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면은 그는 의미가 없는 일이어요. 그러니까 저는 꾸준히 복음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판단력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저 사람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비록 어릴지라도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서 그렇게 했으면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될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거기까지는 간여하고 싶지 안해요. 단지 약한 사람을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 전제가 될 수 있고 조절이 가능하지마는 강한 것을 위해서 내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은 적용이 몹시 잘못되었다 그말이지요. 그런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런 것이 이세벨의 작전들일 것이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기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자비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도 회개를 안합니다. 왜 회개를 안합니까? 만사형통하거든요. 무엇이 잘못되어야 될 것인데 부흥되고 잘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못되도록 하겠지요.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것이다. 우리말로 다리 몽둥이를 꺾어서 침상에다 던저버릴 것입니다. 병들게 하겠다 그말이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연합한 자들도 환난으로 갚을 것이고 그리고 그의 자식들을 내가 다 죽이겠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겠는가? 그 행위대로 갚겠다. 만사형통 하니까 형통치 않도록 해서 그들에게 브레이크를 걸겠다 그말이지요.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십자가를 지도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회개하지 안해요. 자기 반대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숨은 죄가 있겠지 그러고, 자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연단이 왔구나. 이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야지 하니까 회개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행위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권고합니다. 이 교훈 곧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남은자들, 그러니까 이런 꾀를 알지 못하고 순수한 자들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내가 너희보고 특별히 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것처럼 사업을 잘하고, 믿음의 사업이지요. 그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그렇게 수고를 잘해라. 그것이 얼만큼 아름다운 일이냐? 그러나 다른 꾀를 빙자해서 그렇게 확대할려고 하지 말아라. 네가 이 꾀만 따라가지 않으면은 너희들이 하는 것은 잘한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은 무슨 상을 줍니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에게 새벽 별을 주겠다. 그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마는 충성을 다하셔서 아버지로부터 그 나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도 핍박을 두려워하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이 믿음을 지키면은 혹시 그들이 동업조합으로부터 쫓겨나고 어려운 일을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 영광의 나라를 준 것처럼 내 영광의 나라를 주겠다. 이 영광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다스리는 영광입니다. 그는 비록 동업조합으로부터 쫓겨나고 우상의 세계에 밟힐련지 몰라도 주님께서 만국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도 내 권세에 참여해서 만국을지배하는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삼겠다. 결단코 비천하고 멸망의 백성이 아니라 지배다로서 권세를 주겠다. 그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자신을 새벽별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벽별은 아침에 온 하늘을 지배하는 광명한 별입니다. 22장에서 주님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별, 지팡이는 왕권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오셔서 만국을 새롭게 했을 때 광명한 새벽별로 주님 재림하셨을 때 그 영광의 왕권을 너희에게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이익을 위해서 다른 꾀를 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고 살면은 참으로 만국을 지배하는 권세, 주님 오셔서 광명한 새벽별로 어두움을 지배하는 그 영광의 나라의 권세를 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입은 성도 여러분들 먹고 마심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잃어버리고 살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 명예처럼 인격을 얼만큼 존귀케 합니까? 명예를 잃어버리고 사기도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주님 앞에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원리로 산다는 것은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단지 세상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약한자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여러 모습으로 여러분들을 변질시켜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의 지혜고 인내고 당연히 해야될 일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그런 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만일에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의 사랑 가운데 수고할 것 같으면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확인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 참으로 내 모든 것은 포기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주님을 높이겠는가, 이것만 여러분의 지혜가 될 것이고 여러분을 모든 어두움으로부터 건져낼 것입니다. 간교한 이세벨의 교훈으로부터 여러분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만일에 이처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그렇게 할 것 같으면은 주님께서 순수한 믿음으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셨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케 하시고 만국을 지배하는 권세의 자리에 올린 것처럼 주님도 오시면은 그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고난에 참여해서 생명을 포기한 우리들을 주님의 영광에 참여토록하시고 광명한 새벽별처럼 주님 오시는 세상에서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그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지혜 가운데서 모든 거짓됨을 잊어버리고 순수한 사랑 가운데서 여러분의 생명으로 헌신하는 믿음의 승리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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