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버가모교회에 쓴 편지

찬미예수님 2025. 12. 12. 16:40

제목: 버가모교회에 쓴 편지

성경: 계시록2:12-17

 

계시록 2장12-17절까지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투쟁을 잘했어도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그러면은 교회됨이 끝날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촛대를 옮기리라 하는 그런 경고는 무서운 경고가 되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책망한 것은 없고 그들은 주님이 걸었던 충성의 길을 따라서 죽기까지 충성했기 때문에 죽은자 가운데 일어나셔서 새로운 세계의 머리가 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도 그 영원한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칭찬을 했었습니다. 이제 버가모 교회는 그 내용은 서머나 교회와 비슷하겠습니다. 왜냐하면은 그들은 충성을 다한 그런 점에서는 좋았는데 그런 데도 그 교회 중에는 그런 충성을 변질시키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회개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거룩하라.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마는 충성을 온전히 하라. 그런 말도 되겠지요. 그러니까 비슷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도 편지를 쓰신 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그 좌우에 날선 검은 네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 했기 때문에 앞에 입에서 나온 좌의 날선 검, 그런 분을 지금 편지 쓰신 분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축복과 경고 부분에서 함께 해석함으로 설교를 쉽게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당한 처지는 네가 어디 있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그렇게 그들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 주님께서 아신다는 말은 전능자로서 모든 것을 다 살피고 안다, 그런 단순한 개념보다도 주께서 주님의 교회를 성전으로 삼으셔서 함께 계시고 또 교회를 몸과 그 지체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의 지체들이 당하는 고난은 곧 그의 고난이기 때문에 안다는 말은 그런 사랑스러운 언어로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했느냐 하면은 그들이 거하는 곳은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위,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이 사단의 보좌는 주석가들이 말하는대로 이 버가모에가 황제의 숭배의 중심 도시여서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는 황제 숭배를 거역하면은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계시록을 강론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바벨론, 다른 말로 하면은 로마지요. 로마를 구약에 바벨론이라는 언를 차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들을 격려해서 그 싸움을 이기게 하고 그 싸움은 장차 종말의 때에는 더 심하게 나타나겠지마는 그 때에도 주님을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의 싸움과 승리를 약속하심으로 교회로 이기게 하도록 권면하고 있는데 그때 교회가 당하고 있는 가장 큰 환난은 로마 황제 숭배였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로마 제국은 느브갓네살이 보았던 금신상의 마지막 정강이 철에 해당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바벨론이 금 머리이면은 메데 파사 헬라 그렇게 해서 로마 이런 정권으로 내려오는데 금속으로 되어 있고, 또 다니엘서 7장 부분에서는 그것을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싸우는 세상 권세들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하늘에 인자되신 분,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해서 전쟁하고 있는 나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계시록에서도 로말의 정체를 짐승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 거기서 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통치 정책을 이어받아서 모든 국가에 종교적인 자유를 주면서도 오직 로마 국가 신은 모든 사람들이 섬기도록 명령했고 그때 로마 황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신의 아들이다. 그것이 그들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황제 밑에 순종함으로 로마의 평화, 로마 제국 밑에 세계의 평화, 그것이 그들이 주창하는 것이지요. 그런 일에 대해서 기독교는 오직 부활하신 에수님만 주되시고 그 외에는 주가 없다고 황제 숭배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 국가로부터 살아날 방법이 없게되었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받은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버가모 지역에는 황제를 섬기는 중심지여서 황제를 섬기는 신당이 있는 모양이어요. 그러니까 황제 숭배의 열정이 더 대단할 것이고 그것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받는 핍박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거기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에도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여도다. 그것이 믿음을 굳게잡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안했습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했을 때 방금 설명한 것처럼 오직 예수님 주님이시오 그가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셔서 즉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머리가 되셔서 그가 땅의 모든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만 주님이라고 고백했고, 그 일 때문에 안디바가 죽었고 그러니 교회의 충성된 증인이 죽었을 때 그 교회도 함께 핍박을 받았을 것인데 교회가 흔들림이 없이 그런 것을 잘 이겨냈노라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일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그렇게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니골라당은 그 당시 교회에 나타난 당파일 것이고, 발람은 구약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동일선상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대로 발락은 모압의 임금입니다. 발람은 그 쪽 지방의 선지자이지요.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왔을 때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서 발람 선지자를 초청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발람 선지자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할려고 산 꼭데기에 올라가서 여기저기 가서 이스라엘 진을 바라보아도 너무 아름답고 저주할 곳이 없어요. 그래서 저주를 못하고 축복만 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발락이 화를 냈지요.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그 비싼 돈을 들여서 데려왔는데 꺼꿀로 축복하면 되겠느냐? 그러니까 발람 선지자가 가면서 비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공적으로는 하나님이 막으시고 그 입에 축복의 말씀을 담으시니까 축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진 중에 계시고 그리고 계시록의 표상대로 하면 네 구룹이 수종들고 있고, 천사들이 수종들고 있고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진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사술로도 저주할 수 없는 그런 강력하고 아름다운 진이었기 때문에 저주할 수가 없었어요. 가는 길에 이 임금에게 비책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들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들을 진노하실 것이다. 그래서 저주는 못했지마는 이제는 정책을 바꾸어서 그들을 위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베풀었겠지요. 광야 길에 얼만큼 노고가 많았겠어요. 또 모압가 암몬은 롯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혈통들이지요. 그러니까 실은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대대적인 환영 정책을 베풀고 그들의 신전에서 함께 먹고 마시도록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더렵혔습니다. 민수기를 보면은 그 유력한 통치자 중의 한 사람이 모압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지요. 아마 음행을 위해서 왔을 것입니다. 그때 비느하스 제사장이 장막까지 따라가서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비느하스는 그 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약속을 대대로 봉사할 수 있도록 제사장을 주겠다고 축복하셨지요. 그런 것을 여기서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교하는 방식은 다르지마는 창조로부터 주님 오시도록까지 어두움의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구약을 모델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고는 고전 10장에도 있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라. 어떻게 그들이 이런 저런 죄를 짓다가 멸망했느냐? 그러니 조심해라. 그러면서 특별히 우상 섬기는 문제를 교훈하셨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런 것은 자유고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를 잘못 활용해서 만일에 연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해버리면 자기는 강하다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형제를 넘어지게 하면은 그것은 교회에 큰 죄를 짓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면서 여기 이런 예들을 고전 10장에서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도 그렇고 버가모 교회도 그렇고 아마 비슷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은 그 당시는 그 사회 자체가 이교 사회이었기 때문에 우상 앞에 제물을 드려야 그 다음에 장사를 하고, 하여튼 고사부터 먼저 지내는 것이 이방 민족이니까 그런 가운데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그런 것이 전부 우상 앞에 축복을 받고 그런 것을 팔고 있는데 그런 것을 먹어야 되겠는가? 그런 일 때문에 교회가 이런저런 일을 겪었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런 것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을 때는 가령 그 단체에서 숭상하는 그런 이교의식에 참여하지 않으면은 그 당시 동업조합에서부터 자격이 박탈될 것이고 그러면 살 방법이 없을 것이어요. 더구나 그런 국가 종교로 확대되어서 그런 국가적인 압력으로 나타나면은 그것은 참으로 피할 길이 없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고린도 교회도 그런저런 문제로 교훈하고 있지마는 이 버가모 교회도 그런 일 때문에 이런 타협 정책에 유연한 것 같습니다. 니골라당 하는 것 보니까 강력한 파를 이룰 만큼 힘을 발휘하는 잘못된 무리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정체가 그냥 우상을 섬기도록 직접적으로 유혹하면은 그냥 알아버리겠는데 여기 보니까 안디바가 죽을 때도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안했습니다. 대단히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보니까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고 다른 당파를 지었는데 발람이 발락에게 은밀한 비책을 가르쳤든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발람도 분명히 자기 공적인 직무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했지마는 뒤에서는 자기 탐심을 따라서 임금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도록 했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는 하나님께서 발람도 죽이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버가모 교회에 들어온 정책이라 그말입니다. 그런 것은 로마 정책 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있는 그런 습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로 위협하고 만일에 우리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으면 살 방법이 없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짐승의 수 666의 표를 받으라.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하지 못한다. 그것이 짐승의 핍박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이어요. 왜냐하면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으로 활동하고 이 세상의 풍속은 전부 사탄을 봉사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로마 정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실감이 안가면은 우리 교회사에서도 큰 핍박이 있었으니까 우리 나라를 예로 들면은 조금 더 쉽게 알 수가 있지요. 가령 우리가 대표적으로 당한 핍박은 신사참배가 되겠습니다. 더구나 일본이 자기 정체로 우리 나라까지 통일하고 그 힘을 가지고 동남아에 독재정권을 세울려고 하고 있으니까 대대적인 핍박을 가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나라도 유명한 공원에는 다 일본 신사, 절 같은 것을 지은 것이지요. 아마 광주 같으면 사직 공원에다 사당을 지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는 나지도 안했으니까 모르지만 장로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산이라든지 사직공원이라든지 그런데다 전부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인제 명절이 되면 그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은 우리 나라는 일본 신민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본 쪽을 향해서 두 번씩 절하고, 그 절도 깨끗하게 절한다고 세수대야에다 물 떠놓고 거기다가 들어가서 절했다고 그래요. 부정타면 안되니까. 어른들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제 여기다가 일본 국기도 걸어야 되겠지요. 조금만 신사 모양, 조그만한 것을 붙이고 그리고 낮이 되어서 사이렌을 불면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밤에 통행금지 사이렌을 부는 것도 모르지요. 싸이렌을 불면 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일본 사당은 전몰 군경을 안치하는 곳이 사당 아닙니까? 그리고 인제 자랑스러운 황국 신민으로서 뭐 내선일체가 되고 우리 같으면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맹세를 하는 것이지요. 세어보면 다섯 가지인가 되어요. 신사참배, 동방요배, 그 다음에 황국선서, 그 다음에 국돈가 뭐가 있어요. 재건 교회에 있을 때는 열심히 다섯 개를 외웠는데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은 제가 지금 어느 교파를 비방할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그들도 필요없는 핍박은 받을 필요가 없고 우리가 이방인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과 접촉하지 않고 살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타협할 것은 타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어요. 그런데 재건 교회는 어느 정도 고약했느냐 하면, 제가 있었던 교단을 흉본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떡을 먹는데 자기가 재건 교회 떡장사를 하는데 이 사람이 떡을 사서 먹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있거든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톱하고 묻습니다. 당신 어느 교회에 다니요. 그래서 영락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면 아하 그 우상 당에 다니는구먼. 떡 안팝니다. 빼앗어버리고. 왜냐하면떡파는 것도 죄라고, 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우상 섬긴 사람에게 팔아야. 그러고는 안팔아버린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열정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옇튼 그때 재건교인들은 밭에서 김매다가도 거기 남편 담배 꽁초가 떨어져 있으면은 피해갈 정도로 하옇튼 죄다 그러면 전부 끊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했으니까 해석은 잘못되었을련지 몰라도 그 정신은 대단했지요. 그런데 인제 그렇지 않은 교단이 있었어요. 어느 교단을 흉보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에도 나와 있는 것이니까 뒤에있는 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교신파입니다. 그파는 신사참배는 그들도 안하고 소위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남어지 네 개는 다 했어요. 우리들이 이조 때 임금님께 북향제배 안했냐? 그러니까 일본에 황제가 계시니까 그것이 무슨 죄냐? 그래서 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도 국가 없이 사냐? 그러니까 충성을 맹세하고 그런 것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있구나. 헌금할 때 전투기 헌금한 것이어요. 일본에 나갈려면 그 비행기가 있어야 하지 안해요. 그러니까 비행기 헌금하고 종도 다 떼어 바치고 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국가 없으면 어떻게 사냐? 국가가 살아야지. 그런 저런 명분을 세워 갖고 다 한 것이어요. 재건 교인들이 보았을 때는 이것은 순전히 감옥에서 순교자의 탈을 쓰고 나온 마귀 같지요. 겉으로는 신사참배를 승리했는데 남어지는 다 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살라져 버린 것이지요. 그리고는 상대를 안한 것입니다. 그래갖고 무식한 말로 고신파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있지요. 벳세다 바닷가에서 저주한 말이 있어요. 할머니들 모르는 봐라 여기 고라신아가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가지고도 상대를 안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인제 그런 교파에서는 예배당 쟁탈전이 많이 있었지마는 재건교회에서는 이 신사참배한 예배당은 마귀당이다. 하고 아에 불질러버린 것도 있어요. 그런데 어찌나 애국심이 투철했던지 불질러도 국가에서 안잡았습니다. 당신들이 일제 때 그렇게 수고를 많이 했냐? 하고 칭찬해버리고 감옥에 가지 안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예배당이 있어도 옆에다 학고방 짓고 예배했지 신사참배한 예배당에는 발도 안딧어버렸으니까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그들의 신앙의 열정은 대단했지요. 물론 해석이 다 맞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양심을 따라서 정직하게 움직였다는 말이지요. 그런 분들 중에 최덕기 선생이라는 분, 안이숙씨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에 나온 분이 있는데 재건교회에 남한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은 감옥에서 주일날 요강단지를 치울려고 해도 못치우게 했습니다. 이것은 내것이니까 주일날은 치우지 말아라. 그러니까 주일만 되면 오줌을 집어 쓰는 모양이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구약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옇튼 안식일 날은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강은 국가의 것이어도 내가 사용하고 있으니까 내 것을 치우면 안되어요. 그렇게 싸웠으니까 오즉이 싸웠겠느냐고요. 오새는 여호와증인들이 그만큼 쎄지요. 그래서 재건 교회 출신은 손 놓아버린 것이어요. 그래서 핍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인정은 받았지요.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니까 문제가 바꾸어집니다. 너희들은 감옥에만 있었지 교회를 지켰냐? 우리들은 양떼를 얼만큼 지켰냐? 그러고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갖고 어떤 사람이 인제 회개하라 설교하니까 고신파 주기철 목사님 알지요. 그분 아들들이 고신파에 있을 것이어요. 그런 사람들이 설교하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러드라고 그래요. 당신들은 다섯 개 중에 네 개는 범하고, 우리는 그보다 하나 더 범하고, 당신들은 네 개를 범하고 감옥에서 편히 쉬다가 나오고, 우리는 다섯 개 범하고 양떼를 지키느라고 핍박 많이 받고 그런데 무슨 당신들이 우리보고 회개하라고 그러냐? 쪽같은 것이 아니냐? 그것이 그것인데. 그래서 회개 안한다 그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성을 다하면서 회개하자고 그러면 아무도 목사 장로 그만 안두었어요. 신사참배하고. 그러니까 인제 할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제가 고신파를 비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사참배를 안한 것을 보면은 분명히 어떤 충성심이 있었고 했겠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충성심은 개인에 대한 정상 참작은 될련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합법한가 하는 이야기는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별해 주어야지 자기들의 해석을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다 보니까 괜찮거든요. 가령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날은 오리까지만 가거라. 그러면 오리 못미쳐서 한참 쉬었다 그 다음 또 오리를 가고 계속 그렇게 하면은 백리도 가겠지요. 한꺼번에 가지 말라는 것이지 그것을 하루 종일 그렇게 한 것이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저런 방식으로 확대시키면은 못할 것이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교회에 대해서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 말씀의 검으로 싸우리라. 하나님의 에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인간적인 지혜로 핍박을 면할려고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어요. 그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더럽힌 것입니다. 합법적인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교회도 회가 결정한 것입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니까 괜찮다. 국가 의례가 아니냐? 모든 국가에 어떤 예식이 없는 나라가 있냐? 해서 장로 교회가 결정하고 그 다음 정회하고 신사에 올라가서 참배하고 와서 속해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나라 교회가 죄은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안한 교인들은 모사들이 전부 일러 바친 것이어요. 그러니까 신사참배 때 목사치고 순수한 신앙을 지킨 사람은 별로 없고 왜, 재건교회에서 보았을 때는 고신파는 빼버리고 생각하니까. 있으면 전도사들이나 선생들이나 소위 교회를 책임지고 맡은 직무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숨어서 신앙을 지켰어도 공적으로 들어나게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전부 무릎을 꿇었다 그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교인들도 전부 자기를 따라 조절할 수 있게 해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 그말이어요. 그래서 핍박을 안받은 것이어요. 위장 간첩도 있는 것처럼 핍박도 적당히 받으면 교회에 더 해로워요. 제대로 받으면 교회에 본이 되겠지마는 어느 하나는 받고 나머지로 교회를 더렵혀버리면은 그것 때문에 속기가 쉬운 것이어요. 그런데 버가모 교회가 우리 나라 같으면 그런 비슷한 상황이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했겠지요. 그 어려울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꼭 일본 정부만 우리를 핍박한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세상은 실은 계시록의 언어대로 하면 애굽이요 소돔 고무라라고 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세상은 교회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단지 일제 때는 우리를 핍박하는 권세들이 총칼로 핍박하니까 대단한 핍박을 한 것 같고 남어지는 괜찮은 것 같지마는 실은 그렇지 안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제일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는 제사 때문에 그렇게 믿는 신자들이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상을 모른다 해가지고. 그런데 이 제사 문제도 신사참배했을 때는 제일 먼저 천주교가 찬성하도록 한 것이어요. 아에 로마 교황청에서 결정을 해서 보내서 천주교는 전부 신사참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나오는 그 신문에 보면 천주교 연구소에서 그런 말을 하지요. 이제 새로운 천년이 오니까 이전의 천년을 회개하고 지나가자. 회개한 종목이 무엇이냐 하니까 복음을 전할 때 교만해 가지고 기존의 종교를 무시해 가지고 천주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얼만큼 고생을 많이 했냐? 그것을 무시해 가지고 제사를 못지내도록 했다. 그것은 서양 문물의 우월성을 가지고 한 것이지 토착종교의 수고를 위로하지 못하고 그런 것을 거절한 것은 우리 교만이다. 그러니 못하게 한 것을 회개하자.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그들의 이론대로 하면 그 말은 맞습니다. 그들은 신약의 교회만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되고 천당에 은혜가 보존되지마는 구약의 조상들은 세례 받은 적이 없어요. 할례를 받았지마는 그러니까 천당이 예비 처소에 있다가 나중에 공로로 올라가면 몰라도 지금은 못올라가요.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들도 올라가게 해 줄려면 이 신약의 교회가 무엇인가 공급을 해주어야 되어요. 그래서 요새 신문에 보면 각 묘지들에서 천주교가 위령 미사를 지내지요. 그래서 어느 공원묘지에서는 어느 주교가 위령 미사를 지내요. 그러니까 종교 개혁 당시만 너희들이 헌금하면은 영혼이 올라간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리 자체가 그래요. 지금 사제단이 가지고 있는 은혜가 공급되기 전에는 구약 신자들도 천국은 못가. 예비 처소에 있어야 되지. 그러니까 지금 신약 교회가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되요. 그러니까 위령 미사를 지내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왜 교만이냐? 기독교 제사만 유일한 제사인줄 알고 자기들이 했는데 보니까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교도 무엇인가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너무 매도한 것이 잘못이다. 그래서 회개하자. 이렇게 돼 있어요. 그것을 기독교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것은 아주 내놓고 그러니까 체계가 그러니까 그건 또 그런다 처요. 자기들의 이론 체계가 그러니까 그래도 정직한 것이 아닙니까? 단지 지금은 그것을 반대하면 중세 시대처럼 잡아 죽이지는 못해요. 그랬다가는 큰일나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흰두교나 회개하고도 전부 화해하러 다니지요. 종교는 하나가 아니냐? 그 대신 천주교만 인정하면 되어요. 그래서 인제 이교하고 싸우지를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하고 맞아요. 아주 맞습니다. 자기 것만 옳다는 것은 독단이어요. 그래서 서로 융합하면 좋을 것이어요. 그래야 종교 분쟁이 없어지고 세계 평화가 올 것입니다. 가장 고약한 분쟁이 종교 분쟁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적그리스도가 점점 가까이 온 것을 쉽게 알 수있지요. 그런데 인제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이론대로 하니까 알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정치 체계가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만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신교 문제입니다. 그러면은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는 선교사들은 제사를 반대해갖고 대단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신사참배 할 때 소위 신실한 선교사들은 철수해 버리고 이런저런 선교사들이 남아서 자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때부터 말하자면은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제사를 지내는데 기독교는 아무 것도 안해요. 이것은 어떻게 하면 핍박을 면하고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겠는가? 우리도 조상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조상을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제사 하나를 안지내갖고 조상을 무시한 것처럼 되어 가지고 전도의 길을 막아버리면 되겠느냐? 영혼을 구원해 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해갖고 만들어 낸 것이 추도식이어요. 그래서 저는 저는 백번 양보해서 이런 추도식은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가령 휼륭한 신앙인물은 우리가 모이면 그분의 이름도 기념하거든요. 바울을 기념하는 것처럼. 그런 신앙의 선배가 있지 않느냐? 차라리 그것은 내가 양보를 하고 이해가 가능하겠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그것을 원치 안해요. 그리고 누가 하냐? 안믿는 조상들에 대한 문제에요. 신앙 좋은 사람들이 추도식을 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약해서 두렵고 무엇인가 불안하고 찜찜하고 그리고 친척들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려는데 힘을 잃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통해서 자신도 위로를 받고 다른 사람의 핍박을 면할려고 하는 것이 추도식이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말을 하지요. 추도식에 제가 어떻게 설교를 할까요? 당신 할아버지는 안믿고 지옥에 갔으니까 당신들은 그것을 잘 경험삼아 잘 믿으라고, 죽은 뒤로는 기회가 없으니까 잘 믿으라고 그랬다가는 저는 뺨맞고 나올 것이어요. 그런데 제가 그전에 우리 아버지가 안믿었을 때의 이야기를 한번 했지요. 저희 아버지가 안믿는 때 그런 말씀을 하셔요. 너희 추도식할 때 차려놓고 노래 부르냐 안부르냐? 안믿는 사람들은 제사지내면서 노래 부르면 이상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는 안합니다. 그랬어요. 그러면 그러지, 너희 신자끼리 노래 부르고 싹 먹어버리느니 내가 노래 부르고 우리 친척하고 같이 먹지 무슨 말이냐. 똑같은 제사다 그말이지요. 그리고 또 저에게 한가지 물으셔요. 제가 조상들 사진을안걸어 논다 그런 말을 안했는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는데 너 깨벗은 사진 붙여놓으냐 안붙여 놓으냐? 예수님 사진있지요. 나는 없앤줄 알았는데. 그런면 그렇지. 만일에 죽은 사람을 기념을 안하려면 똑같은 일인데 왜 너희 것은 붙여놓고 내 것은 못붙이게 하느냐? 그말이지요.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그런 이론은 타당한 이론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인제 기독교가 그런 일을 하고 요새는 그것이 감사 헌금 제목이어요. 추도식 하면 감사헌금이 꾀 들어옵니다. 인제 그런 것을 눈물나게 해야되어요. 생시에 이런 음식을 좋아하셨는데 하고 감동이 되게 해야지 예수님 이야기 하면 눈물이 안나도 안믿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음식 이야기 하면 눈물이 찡나요. 이래야 조금 효과가 있는 것이어요. 그것을 다 하지 안해요. 고신파는 일부는 하고, 반고신파는 안한다고 신문 강고했으니까 안할 것이고. 그리고 합동 주류측은 거의다 할 것이고, 지금은 그것 안하면은 목사 나가라고 그래요. 그걸 누가 했느냐? 목사들이 다 끌어들인 것이어요. 자기 교인 보호하고 전도의 길을 연다고 해가지고. 소위 이방혼도 그렇지 안해요. 교회 처녀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어요. 인제 우리 교회는 큰일났습니다. 전부 딸만 낳으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딸 주신 것을 감사하거든요. 그 영혼이 멸시를 안받고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존경받고 클 수가 있어요. 다른 교회에 가면 말만 신자지 딸 낳으면 싫어해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마 그 영혼을 맡길려고 우리 교회에 맡길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인제 딸이 많으면은 총각의 수가 절대 부족한디 그러면 처녀 귀신되라는 말이냐? 어떠튼 시집가야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이방혼을 해서 현 총각들을 인도하자. 그것을 교회가 요새는 합법화 시켜요. 그리고 첫 아들까지 낳으면 축복이로다. 분명하지요. 그러니 무슨 할말이 있어요. 그것을 누가 하느냐? 말하자면은 한 당파를 이룬 것처럼 지도급에서 그런 일을 다 한것이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교회를 더럽힌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래요. 요새는 또 묘한 신이, 물론 우리가 이방 세계에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물론 모든 이방은 그 종교의 토대에 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방신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요. 지금도 안믿는 사람들은 이사갈 때 방향보고 날자 보고 하지마는 이제는 그런 것은 거의 힘을 잃었어요. 생활 습관은 남아있어도 그것이 자기 일을 해석하도록 힘을 발휘하지는 못해요. 그런데 어떠튼 우리는 그런 우상 토대 밑에서 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 살고 있는 것이 전부 우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지마는 남자 옷고름은 왼쪽 여자는 오른쪽, 그 옷입는 것도 달라요. 그러면 우리는 상관없지요. 그 사람들은 대단한 것이어요. 만일에 그 의식이 틀리면 큰일날 것이어요. 그런데 요새는 간장 종지기를 가운데 놓냐 어쩌냐, 요새 사람들은 대충 놓고, 절받으십시오. 하지 옛날 사람들처럼 그런 싸움은 거의 안할 것이어요. 그러니가 지금은 제사를 지내도 귀신의 권세가 옛날처럼 강하지를 못하다 그런 말이어요. 어떠튼 우리들이 이교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 문화가 전주 이교 토대에 있습니다. 그러면 토대를 전부 바꿀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말로는 이방 신으로 설명을 했어도 우리의 기후 조건과 여러 조건이 맞으니까 그런 문화가 어난 것이어요. 우리 삶의 토대에 맞게 되어 있는데 그런 것을 이방 신의 이름으로 해석해 버린 것 뿐이지 실은 우리가 이룬 문화는 우리 삶의 조건에 가장 맞으니까 그렇게 되었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생활 습관까지 전부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서양식으로 바꾸면 고상하고 한국식으로 바꾸면 저급하고 그러니까 우리들도 생일날 어디 가서 비후카슨가 몰라요. 하옇튼 소시랑 같은 것을 잡고 그리고 짝 하고 있으면 고상하게 먹고 오고, 집에서 탕에다 홀짝홀짝 먹으면 이것은 무엇인가 좀 천박한 것 같고, 이런 것은 있어서는 안되어요. 그런데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문화 사대주의에 빠져있어요. 그렇게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에 맞는 것이 제일 좋아요. 실은 겨울에는 이 양복이 춥습니다. 그 댓님으로 짝 매어서 당고쓰봉이지요. 일본식으로, 그렇게 해야 따뜻하지 이것은 추워요. 그런데 우리는 양복을 입으면 신사 같고 한복을 입으면 조금 요새 개량 한복은 무엇같다고요. 그렇게 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갖고 기독교인이니 마니 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우상숭배가안되면은 어떠튼 직접이든 간접이든 우상만 시인하는 방식이 아니면은 우리 삶의 토대에서 일어난 문화들은 그대로 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가 저는 우리 장례식 때 여기다 무엇을 쓰고 마포를 입는다고 해서 나는 그것 자체는 반대하지 안해요. 옛날에는 상복에 격이 있어요. 굴건도 그렇고 그런데 우리는 젊은 세대라서 그런지 그런 것에 별로 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주니까 쓰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쓰는 것은 없어요. 그러니가 우리 전통 장례식 법이 되어버린 것이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무엇을 더 반대하느냐? 우리 기독교는 희옷 입고 장례식 한다. ? 흰옷입고 부활하니까. 해갖고는 성도들 장례식에 가면 흰옷을 입고 따라옵니다. 그건 위험하게 봐요. 인제 새로운 기독교식이라는 무엇이 들어오거든요. 장례식에는 그런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어떤 의복을 입는가? 그런 것은 실은 우상만 직접으로 개입이 아니되면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이냐? 기독교가 잘못 도장을 찍어준 것이 신자들에게 제일 위험한 것이어요. 이방 종교는 기독교에 힘을 발휘하지 안해요. 만일 교회만 그것을 안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위험하지 안해요. 그런데 교회가 세상에 전도한다는 명분을 갖고 끌어 들여와 놓으니까 이제는 추도식 안하면 목사는 나가야 되어요. 어느 교인이 이 교회에 왔다가 이 교회는 추도식 안한다고 묘한 교회라고 그냥 나가버려요. 그렇게 된다 그말입니다. 심지어는 헌금하고 이름 안불러준다고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이 교회에 다녀보았자 축복이 없겠다. 전에 교회는 주일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축복했는데 축복이 없겠다고 나가버려요. 그걸 조그만 교회가 이름을 불러주면 안되는데 큰 교회가 이름을 불러주거든요. 수가 많은 대는 주보에다 이름을 박아버리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는 주보에 이름이 안나오면 이 교회는 축복이 없겠다고 나가버리지요. 누가 그럽니까? 유명한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그래요. 그만큰 교회가 받아들인 것이 위험하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요새 보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은 저는 혼인식 할 때 촛불 켜는 것, 직접 반대를 안합니다. 미리 켜놓았다거나, 하옇튼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초도 쌀 속에다 같이 썼다고 그러데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은 반대하지마는 그냥 멋있는 장식으로 했는갚다 그러면 나는 반대하지 안해요. 그런데 옛날에는 초가 제일로 귀한 조명이겠지요. 그러니까 왕실에도 제일로 큰 황촉이라고 켜고 있지마는 지금은 촛불켜고 있는 사람은 아침이면 코가 시컴할 것이어요. 형광들 켜야돼. 이런 것. 그런데 그것을 안하면 분위기가 안잡힌 것처럼 하고 그리고 생일날 되면 느닷없이 형광등을 끄고 촛불을 켜고 하고, 그래야 좋은줄 알고. 그리고 부활주일에는 전기불이 훤한데도 촛불을 켜갖고 공원에 가서 이렇고 있어요. 나는 잘 이해가 안가요. 그런데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하는 의식으로, 부활절에는 촛불예배, 이것 안하면은 예배 안한 것이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예배한 것은 시시하고 공원에서 모여서 해야되어요. 이렇게 해갖고는 교회에 이상한 것을 자꾸 끌어들입니다. 저는 어떤 의식을 걸정하지는 안해요. 그것이 만일 직접이나 간접적으로 우상을 시인하지만 안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문화적인 습성이 있고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하니까 그런 것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그를 확인해야 되고 다른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겠는가 생각을 해야되어요. 그런데 장례식이 제일 우상과 관계되지요. 장례식은 죽은 사람과 관계되니까. 생일은 산 사람과 관계되니까 전기불 꺼버리고 촛불 켜놓고 했든지 말든지 그것이 무슨 우상 숭배를 하는 것 아니고 분위기지요. 그런데 인제 죽은 사람을 위해서 했을 때는 무엇인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물어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하고 지식인들이 물어 보아요. 그것이 대단히 위험하지요. 요새는 우리 향하는 것은 이번에 장례식 때 어떤 분이 그러드라고요. 향 저쪽으로 치워두십시오. 그랬더니 아이쿠 목사님 레위기를 보십시오. 향연과 함께 기도가 올라간다고 했는데. 이양반이 옛날 신학교를 다닌 장의사에요. 그러니까 성경까지 인용해 가지고 그런데 묘하게 큰 아들은 젊은 분이라 그런데 나이가 엇비슷하겠는데 안믿는 분이라도 잘 통해요. 아 그러요. 그리고 치워버려요. 그리고는 믿는 분이 말해가지고 꽃가지고 오십시오. 그래서 나는 장식 할려고 가지고 오라고 하는줄 알고 아무 말도 안했는데 보니까 국화가 한 다발이 왔어요. 이 꽃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해요. 그래서 장남을 불러서 이야기를 했지요. 이것은 장례식장을 장식하는 것은 좋지마는 돌아가신 분이게 한송이씩 바치는 것은 안됩니다. 그런데 요새 유대인들 영화를 보면 돌갖다 바치드먼. 그러니까 무엇인가 놓아야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향은 동양식으로 냄새도 나서 덜 좋은데 국화는 한 송이 놓니까 오직 고상하요. 이것이 또 기독교 식입니다. 어떠튼 돌아가신 분에게 바치면 안되어요. 잊어버리라 그 말이 아니라 그분의 교훈을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좋지마는 무엇인가 바치므로 무엇을 표현하겠다는 것은 옳지 안해요. 상주들에게 무엇을 갖다 주어서 위로하십시오. 그러나 돌아가신 분에게 무엇을 바치겠다는 것은 옳지 안해요. 그런데 안믿는 큰 아들이 그러시느냐고, 국화꽃을 항아리에다 갖다가 여기다 꽃습니다. 그러드라고요.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짬짬한 모양이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는디. 우리 목사님도 그렇게 하지 안했는데. 큰일입니다. 또 한기지 문제는 우리 나라 전통적인 장례식은 전부 집에서 해요. 유명한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합니다. 천주교는 아에 교회에서 합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장례식 자체가 성찬처럼 성례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전통 의식은 좀 징그러운지 울목에다 놓고 병풍을 쳐요. 못보게. 그러지요. 그리고 객지에서 죽었다면 우리 같으면 얼른 엎어올 판인데 못들어게 하고 밖에다 거적 덮어놓고 있지요. 부정하니까 그 몇 년 지나야 들어오고. 우리 나라는 그런 문화권이어요. 그 상도 돌아가신 분은 울목에다 차려놓아요. 그 묘하지요. 그리고 아랫목은 후손들이 앉아서 놀고 잠자고 그러지요. 하옇튼 우리 나라는 돌아가시면 꺼꿀로 됩니다. 숱가락도 왼쪽에다 놓지요. 그때 왼손잡이가 되는 가보아요. 전부 꺼꿀로인데 제가 우상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지 알면요 웃깁니다. 하여튼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장례식을 합니다. 그러면 차라리 확대를 해요. 교인들도 하든지 안하면 다 안하든지 그러면 그런 의식이 없이 교인들이 자유롭게 하든지.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살살 등급을 두기 시작하면 잘못되어요. 그러니까 천주교의 묘지도 보면은 제일 꼭데기의 묘지는 제일 크데요. 그 앞에는 십자가도 크기도 하고, 밑에는 작고. 그런 식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말이지요.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무엇인가 교회가 인간의 이론을 성경에다 권위를 두어서 맞추어 놓으며은 그것은 교회가 대단히 피해를 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씀의 검으로 싸우리라. 한 것처럼 성경 자체를 가지고 분별해 주어야 되지 거기다 인간의 아이디어를 적용해서 말만 성경에다 맞추어서 옛 사상에다가 성경을 옷입혀 버리면 그것이 현대적으로 하면 발람의 교훈입니다. 교회를 그 이름으로 축복하면서도 교회를 그 이름으로 더럽히고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걸 대단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로마 정권 밑에서 그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속히 임해서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 입의 검은 다른 것보다도 말씀의 검이 되겠지요. 모든 예배는 모든 우리의 토대는 말씀의 토대 위에서 조절되어야지 인간의 아이디어를 거기다 더해가지고 것으로 해서는 그것은 자기들은 좋을련지 몰라도 주님께서 그것으로 싸우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무엇이냐 하면 그에게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으리라.이렇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어디다 감추었다는 말인고? 우리는 알 수 없지요. 그런데 계시록을 보면 전부 위에 속한 것을 주는 것, 마지막에 속한 것을 주는 것이 전부 상급으로 되어 있지요. 실은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감추었다는 말은 하늘에 감추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구약에서는 그렇게 감추인 적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하늘의 만나가 그쳤어요. 그는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마지막 때에 속한 상급을 주리라. 이런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것을 줄 것이어요. 하늘에 속한 것은 현재적으로 감추어있어요. 나타나지 안했으니까. 그런 의미로 감추인 만나를 주리라. 이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면은 이것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생명이어요. 성경은 말하기를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겸하지 못하리라. 만일에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이론으로 무장해 가지고 황제 숭배의 자리에 참여하면은 그렇게 해서 거기서 다시 교제하면은 주의 상에는 다시 앉지 못할 것이어요. 그런 의미로 에베소 교회에 내가 낙원의 생명나무 과실을 주리라. 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내가 만나를 주리라. 귀신의 상에서 교제하는 사람은 주의 상에 앉지를 못합니다. 네가 참으로 핍박을 받고 순수한 의미로 핍박을 받고 그렇게 할 것 같으면은, 그렇게 해서 생명을 빼앗기면은 내가 감추인 만나를 주겠다. 그리고 흰 돌에 새긴 이름이 있는데 받는 사람 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 구약에서는 돌에다 이름을 새긴 것은 제사장의 가숨에 에봇, 가슴에 흉패, 거기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어요. 그것을 매고 가면은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빛나요. 그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이어요. 그것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이어요. 아마 그런 것을 모델로 삼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흰 돌을 주는데 흰돌은 반순히 화강석 이런 돌이 아니라 아마 흰돌은 귀한 보석일 것인데 거기 새긴 이름이 있는데 받는 사람 밖에 알 사람이 없다. 계시록 전체는 종말의 약속들이어요. 하늘에 속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마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징표,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받는 사람만 알고 남어지는 모를 것이어요. 새 이름을 주겠다. 전부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한 소속, 하나님께 대한 소속, 낙원에 대한 소속, 전부 이런 것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정권 밑에서 쫓겨나지 않고 연합할려고 타협택을 통해서 하면은 그렇게 해서 우상의 상에 앉는 것을 조절하려고 하면은 그는 하나님의 상에 앉지를 못할 것이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지 못할 것이고 그가 그렇게 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존엄함을 얻어도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아마 시민권이 없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돌에 새긴 이름을 주는데 받는 사람만 알 것이다. 남어지는 주지 않겠다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돌에 새긴 이름을 준 것이나 감추인 만나를 주는 것이나 비슷비슷한 사상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특권으로 이해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소나귀가 오는데 그냥 걸어갈 사람은 없습니다. 가랑비만 와도 안나가요. 그런데 눈이 오면은 눈감고 살살 걸어다니다가 옷이 다 젖어도 모르지요. 왜냐하면은 모양만 보니까 멋인지 않습니까? 속은 다 똑같은 물인데. 그러니까 그런 것을 조금 조심하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별력이 신약 신자의 특권이어요. 그 분별력은 이런저런 지혜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합니다. 충성을 통해서 합니다. 참으로 주님만을 충성하기 위해서 지혜를 발휘해야되지 어떻게 하면 이 환경을 모면해 볼꼬, 어떻게 하면 내 행동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될 것인가 보다도, 어떻게 하면 이 환경을 모면해 볼꼬, 그런 방식으로 해서는 우리는 말씀의 분별력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혹 지금은 내가 분별력이 떨어질지라도 주님을 사랑해서 어떻게 하든지 내 행동을 통해서 저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그러면 그 사람은 지혜가 성장하겠지마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위치를 잃지 않고 그렇게 하고도 좋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주님을 위해서 한번도 욕을 먹기 싫고 그리고 때가 되면 주여, 저 영혼을 건지시옵소서. 하고 자기는 전도를 안해요. 그렇게 하면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생명력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종말에만 이름을 못받은 것이 아니라 종말에만 감추인 만나를 못먹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소속감과 생명의 능력이 상실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어요. 그런 것들을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마는 옛날 우리 선배들은 설날이다 그러면 아에 금식합니다. 3일 금식해요. 설 음식이 떨어지도록. 우상 제물이라고. 그리고 회개하라고 대문에 붙이고 다닙니다. 그러면 한마디로 조금 무식한 행동이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요새는 그러지 안해요. 상에만 안놓았으면은. 그리고 편해요. 그렇지요. 그 말도 맞아요. 그리고 인제 주일날은 대충 어디 가도 그런 날은 서울이고 어디고 다 모이지요. 우리 친척들이 모이는데. 그건 맞는 말이어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 주님 때문에 움직이고 새로운 백성 되게 할려고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은 체면 때문에 움직이고 옛 질서로 움직이는지 그걸 분별하라 그런 말입니다. 그걸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이 다 합당한 권리가 있으니까. 그러나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장을 감찰하시고 말씀의 검으로 싸우시는 그분, 그 말씀의 검은 예리해서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 말씀 앞에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어요. 그 눈에서도 피할방법이 없을 것이고, 우리의 중심을 아시니까. 목사는 그런 감독관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자유가 있습니다. 주일날도 그래요. 구약처럼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지금은 교회가 주님의 부활의 날에 새 생명으로 기뻐하지 특별히 어느 날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적 전통은 주일날 교회가 모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이 아이고 인제 자유롭다. 그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알아야 되어요. 그것이 참으로 주님의 교회의 건덕을 위한 것인지,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안그러면 체면 때문인지 그런 것을 보아야 되어요. 주일날 필요한 할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꼭 해야될 일인지 아닌지는 분별해야 되겠지요. 그런 것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되어요.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요. 사랑입니다. 충성입니다. 물론 가능한대로 화목해야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고 이런 아이디어를 발휘하면은 그런 것은 말로는 명분이 있을련지 몰라도 입의 검으로 싸우시는 주님 앞에서는 피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 목사가 교인들을 보면 그것이 안보인답니까? 속이 보이지요. 저분을 저렇게 사는구나. 여러분 자식 길러보면 다 알지요. 무슨 목사가 부모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분별력이 없으면 목사 못할 것이어요. 구체적인 사건은 모르지마는 저분이 어떻게 사는구나 알지요. 그러나 저는 감독관은 아닙니다. 제가 사는 일은 꾸준히 주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꾸준히 주님의 권능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 자신이 주님 때문에 생사를 걸어야지 저의 감독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그것이 교회에 피해를 끼치면은 개인의 죄는 그 다음 일이고 교회가 제재를 가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 자유에 맡겨요. 그러나 그 자유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한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체면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슬프게 하고 세상 사람과 친한 방식으로 되어서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들이 믿음으로 서 있는가를 다시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주일날 교회가 정규적으로 모이는 것,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의 신부처럼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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