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머나교회에 보낸 편지
성경: 요한계시록2:8-11
계시록2장8-11절까지를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이 계시록은 마지막 때 언약을 담은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성경이 전부가 언약이지마는 특별히 계시록도 언약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속히 오시리라. 또 제일 마지막에도 그 말슴을 반복하면서 이 말씀에 더하거나 덜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해서 언약을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언약이기 때문에 장차 속히 될 일을 기록해 주면서 이런 모든 큰 환난 중에도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교회로 환난 중에도 인내하고 이기도록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은 이기는 자들에게는 이러이러한 상을 주리라. 결론은 항상 이기는 자들에 대한 상으로 그렇게 끝나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전체도 싸움이 주제여서 이기도록 거듭거듭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에베소교회에 권면하신 말씀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매우 휼륭한 교회이고 더구나 진리를 분별하고 투쟁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그런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진리를 위해 투쟁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시행되지 않으면은 그런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에베소교회에 권면하셨습니다. 이제 오늘은 두 번째로 서머나교회에 편지하신 내용을 강론하겠습니다. 이 교회에 편지를 쓰신 분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그렇게 주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인자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먼저 축복을 말하면서 1장5절을 보면은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5절에 주님에 대한 칭호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은 전체적인 내용을 읽어보면 쉽게 분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편지를 쓰신 그 주님은 곧 자기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서머나교회에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빛을 주고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때문에 편지의 내용과 맞추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또 10절에는 「죽도록 충성해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 것과 여기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하는 주님의 모습과 그들에 대한 격려와 상급은 서로 일치할 것입니다. 설교를 쉽게 하기 위해서 먼저 가운데 그들이 당하는 환난을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충성할 것인지, 또 충성한 자의 상급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를 뒤로 돌려서 강론하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교회에 대한 칭찬이나 또 앞으로 그들을 권고하신 내용을 보면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그 교회의 상황인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칭찬을 보면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은 여기 보면은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부요한 자다 했을 때 궁핍과 부요가 대비되어 있어서 그들의 궁핍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궁핍을 환난 때문에 당한 궁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을 받았고 그 다음에 궁핍이 있고, 1, 2가 아니라 환난과 궁핍은 서로 설명하는 말이어서 그들은 환난 때문에 궁핍을 받았지마는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그렇게 주님께서 그들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여기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했을 때 성경에서 안다는 개념은 예수님은 저 하늘에 계시면서 전능한 지식으로 그냥 안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머리되신 주님게서 친히 교회에 임재해 계시고 그가 교회의 사자들을 붙드시고 교회를 성소 삼으셔서 함께 계시고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에 안다는 말은 이처럼 함께 연합한다는 개념으로 안다는 개념이지 그냥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대단한 위로와 칭찬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환난을 뒤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자칭 유대인이라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다.」 유대인들에게 의해서 큰 핍박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보면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러니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 유대인이 아니요 하는 것을 보니까 유대인은 사탄의 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회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 계시록에서는 장차 나타날 일을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구약의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떤 의미로 구약의 백성들은 사탄의 회지요. 왜냐하면 예수를 죽인 민족이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회라고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그러니까 유대인이면 사단의 회가 아니라 그 말이지요. 구약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회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는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마는 실은 유대인이 아니어서 사단의 회다. 사단이 머리고 사단을 섬기는 그런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서 핍박을 했는가, 하는 말은 여기서는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그 모델을 사용하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정황을 구성할 수가 있는 데 그것은 교회사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이 소아시아 교회들이 당하는 환난은 로마 황제를 주로 고백하고 복종해라. 로마 황제는 주인데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것이 로마의 국교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만 홀로 주님되시고 그 외에는 주가 없다고 모든 신들을 경배하지 않고 오직 그분만을 경배했기 때문에 대단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다른 모든 국가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오직 로마 신을 섬기도록, 로마 황제를 섬기도록 그렇게 해서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을 거절하니까 대단한 핍박을 받았지요. 물론 유대인들도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만 군대 가는 것이 면제가 되고 예루살렘에만 로마 국기를 꽃는 것이 면제가 될만큼 아주 강력하게 대항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로마 정권 밑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그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교회사에서는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화형시키면은 제일 먼저 장작을 갖다 나르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화형시키고 죽이면은 많은 국가적인 손해가 나지요. 에스더서를 보면은 하만이 모르드게와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을 죽이면은 국력이 충나니까 내가 그 사람들의 몫을 대충해야 되겠다. 그렇게 하고 죽일 권한을 얻어냈지 안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많은 세금도 내고 또 장작도 나르고 해서 제일 먼저 앞장을 섰다 그말이어요. 마침 예수님이 로마 정권에서 죽으셨을 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는 주가 없나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가 주라고 해서 로마 정권에 대항하는 사람이 아니냐. 왜 로마 정권에 대항하다가 우리가 핍박을 받을 것이냐. 그러니 한 사람이 죽고 온 민족이 사는 것이 났겠다.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주가 없다. 그렇게 거듭거듭 빌라도 앞에서 소리 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으신 뒤로 유대인들이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핍박을 했는데 아마 서머나 교회는 그런 핍박을 받은 것으로 교회사에서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그런데 이 교회에 대해서 이제 너희들이 그동안 환난을 받고 궁핍했으니까 좀 평안히 해주마,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얼만큼 고생하느냐? 내가 네 궁핍을 잘 안다. 너희들이 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위로를 해주셔야 될 것인데 오히려 이 교회에 대해서는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라. 그런 식으로 앞으로 받을 고난에 대해서 더 말씀하시면서 그 동안 너희들이 환난을 받고 궁핍을 받았지마는 그러나 앞으로 받을 환난에 대해서 두려워 하지 말고 이전처럼 죽도록 충성해라.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하는 것처럼 마귀가 핍박하는데 마귀도 그의 종들을 통해서 그렇게 핍박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인데 아마 옥사하겠지요. 그 일 때문에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염려하지 말아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근안 씨도 몇 년을 피하는 판에 이것 열흘 정도야 너무 간단하니가 괜찮을 것이어요. 고문을 받아도 열흘쯤 받은 것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니가 만일에 문자적으로 풀면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안되겠지요. 그러나 계시록 대부분의 숫자들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도 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물론 이 문맥에서는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너희들이 그 동안 환난을 받고 궁핍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고생할 것이다. 그러면 조금 갑갑하겠지요. 왜냐하면 고생을 많이 했으면은 앞으로 큰 환난을 받겠지마는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을 지킨 것처럼 앞으로도 지킬 것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곧 지나가게 해 주겠다. 그래야 위로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십일 동안 하는 말은 아마 그런 의미로 해석을 해야될 것이어요.
구약에서 십일을 사용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습니다. 가령 창세기 족보 같으면은 열 개의 족보가 있는데, 창세기 족보 이름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 족보의 마지막에 가면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십대, 열 그러면은 보통은 완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도 그런 수학을 철학적인 방식으로 썼는지는 모르지마는 구약에 보면은 그렇게 되어있다 그말이어요. 가령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열번이나 나를 배반했다고 했는데 세어보면 열번이 못됩니다. 그런데 왜 열번이나 배반했다고 그러는가? 너희들이 40년 동안 한번이라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 그런 말이겠지요. 그러니까 배반을 완성했다는 말이되겠습니다. 그런 말들이 몇군데 나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삭을 장가보낼려고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갔었지요. 그때 데리고 올려고 하니까 그의 오라비가 하는 말이 한번 가면 언제 또 오겠느냐? 요새 같으면 미국으로 시집가는 식이어요.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가 한참 소식이 없더니 어느 날 부자가 되어 돌아왔어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고향에서 아내를 구해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번도 소식이 없었거든요. 그러면 굉장히 섭섭하겠지요. 그러니 인제가면 언제 보리요. 했을 때 우리가 섭섭치 않게 잔치라도 해야되겠다 했을 때 적어도 열흘은 우리가 잔치하고 가야되지 않겠냐? 했을 때 아마 이런 의미를 잘 담을 것이어요. 그런데 짧은 순간일 것이어요. 생각 같아서는 몇 달 잔치하고 싶지마는 그래도 얼마동안 기뻐해야될 것이 아니냐? 그 다음에는 열흘쯤 하고 나면은 마음은 풀릴 것이고 간 뒤로 섭섭은 안하겠다. 아마 그런 말로 그때 열흘쯤은 우리가 잔치하고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런 의미가 될 것이어요. 핍박을 받고 있는데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면서 몇일 아니면 끝날 것이니까 참아보아라. 그러면은 십일이라는 의미가 없지요. 죽도록 충성하라는 사람은 죽도록 충성해야 되겠는데 너 몇일 아니면 곧 끝날 것이니까 조금만 참아보아라. 그러면은 십일이라는 말이 안맞겠지요. 그러니까 십일이라는 말은 핍박을 제대로 받는다는 의미가 한 가지 있을 것이어요. 그런데도 이 핍박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시간을 한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끝없는 핍박은 아닐 것이고 분명히 한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여기서 10일 동안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이럴 때 핍박을 피하지 말고 죽음으로 충성을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어기는 자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은 같은 말이 되겠지요. 여기서도 1장에서처럼 생명의 떡을 주어서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하겠다. 이런식으로 말하자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 하는 이야기는 면류관은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그러니까 이기고 받는 상급을 설명할려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면류관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생명의 승리, 자기 목숨을 주는 죽음을 통해서 충성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이 생명의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제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그렇게 해서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자를 갈랐을 때 이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을 드러내는 자들은 그런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리라. 그렇게 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여기 보면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면류관을 주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도록 하실 분은 누구신가?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그분이 곧 그렇게 하신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면은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을 자기 백성에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름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은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에 자기를 나타내시기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곧 서머나 교회에서 함께 핍박을 받고 함께 승리하고 함께 생명의 면류관을 쓰도록 하실 분이시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우리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그러면 그냥 존재론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창조의 처음부터 계신 분으로 이야기 하니까 우리들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그러면은 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소개했을 때 보면은 1장4절부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하나님에 대한 묘사지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역사 전 경륜을 카바하시는 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일곱 영」 했을 때는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생명, 완전한 능력, 그런 것을 일곱으로 묘사합니다. 주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 보면은 충성된 증인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그 다음에 1:17부터 보면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아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바로 이 주님에 대한 묘사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처음이요 나중이다」 17절 제일 끝에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여기서 처음이요 나중이니 해놓고 바로 설명하기를 곧 산자라. 이떻게 살았습니까? 전에 죽었다가 산자라. 그렇니 여기서 처음이요 나중이니 해서 특별히 나중을 받아서 설명하고 있는데 곧 산자라. 곧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런 말을 보았을 때 처음이요 나중이요 하는 말은 존재론적인 설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은 그냥 존재론적인 소위 본체론적인 말하자면 하나님 안에 그 본질이 무엇인가,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마는 실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마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구약의 성소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이셨고 그외에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항상 성소적인 언어를 사용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천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성소에 계시고 하나님이 모세나 아론을 통해서 백성을 만나시고 하나님이 누구를 시켜서 무슨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방식이어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도 보면은 분명히 아들은 아버지를 보신 그런 하나님이신대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나는 아버지를 대면해 보았다. 항상 구약의 언어로 보내심을 받은분,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은 구약처럼 휘장 밖에서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 품에서 하나님을 보았으니 그는 아버지의 지식과 아버지의 생명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완전한 친교 가운데 있어서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완전한 교제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 구약 언어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 아버지가 아들이 출생할 때 그 본질을 주시고 하는 것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구약 언어 개념이어요.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제 드러낸 것이지 구약에서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구약 때 여호와는 휘장 안에 계시고 종인 아론이나 모세를 통해서 백성을 만나십니다. 실은 모세까지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누리는 구원입니다. 종의 구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분은 아버지 품에 계신 분이시오. 아버지의 얼굴을 보신 분이시오, 아버지의 지식과 아버지의 생명의 능력이 다 아들에게 있습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출생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은 우리들도 아버지로부터 생출됩니다. 혈육이 아닙니다. 완전히 구약의 언어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장17,18절을 다시 보십시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했을 때 처음이요 나중이니 하는 말은 존재적으로 그는 태초부터 계셨고 마지막까지 계실 분이시다. 그런 말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 그 설명을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아깝 보았던 것처럼 1장5절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서머나교회에 대해서도 죽도록 충성해라. 그런데 그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머리라는 말입니다. 그는 창조의 처음에도 머리였고 창조의 마지막에도 머리입니다. 요한복음대로 하면은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지으셨다. 그런 의미로 그는 처음입니다. 그는 만물의 머리이십니다. 지음을 받지 않으시고 아버지로부터 먼저 나신분, 그분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 골로새서 1장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아니지마는 만물보다 먼저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는데 만물은 그가 지으셨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만물의 장자, 먼저 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구절 창세기 5장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는데, 아담은 자기의 형상대로 셋을 낳았습니다. 그런 의미로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조상이라 그말이지요.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인 것처럼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입니다. 후손에게 준 것처럼 이제 예수님은 자기의 형상을 자기의 백성에게 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지은 사람은 땅에 있는 아담이니까 땅에 속한 형상을 주지마는 이제 새로운 아담은 위에서 오신 분이라 하늘이 형상을 자기 백성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묘사해서 아담이 먼저 난자로 머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런 언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로새서 1장에 있는 것처럼 아버지로부터 나셨습니다. 그는 지음을 받으신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는데 그는 만물의 창조를 위해서 나오셨고 그가 모든 만물을 자기를 위해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는데 무엇할려고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까? 이제는 새로운 머리가 되게 하실려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새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실려고, 그가 만물을 짓기 전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셔서 만물의 머리가 되었고 모든 만물은 그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그가 죽음으로부터 먼저 일어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데, 교회의 머리는 무엇할려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습니까? 만물의 머리가 되실려고, 그는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지어진 세계의 머리가 되실려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신 분이시다. 그렇게 골로새서 1장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1장5절에 있는 말씀도 그런 말씀이지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나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실려고. 그런 말이지요.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아무도 부활하지 못했는데 제일 먼저 깨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를 아들로 말미암아 해서 아들이 처음 창조의 머리인 것처럼 죽음의 세계를 새로운 영광의 세계로 인쳤을 때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 지었을 때 그 머리가 누굽니까? 교회의 머리가 되신 아들이시다. 이분이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신다. 그렇게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처럼 처음이요 나중이요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1:17부터 보면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여기서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게서 만물을 지으신 처음입니다. 그는 창조된 세계의 처음 머리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나중이십니다. 마지막 세계도 그가 머리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 영광을 얻으셨는가? 충성된 증인으로 그렇게 1장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마태복음대로 하면은 그에게 모든 세상 나라가 약속되었을 때까지라도 그는 자기 몸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기꺼히 십자가를 지도록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전에는 아담을 통해서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였지마는 이 아들을 통해서는 생명이 지배하는 세계를 일으키셨는데, 왜냐하면 첫 머리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순종했던 그런 순종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증거했습니다. 그는 죽으실 때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이처럼 큰 고난을 당하실 때까지라도 기꺼히 미쁘신 아버지께 그 영혼을 의탁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지배했던 옛 시대, 죄가 지배했던 옛시대, 죽을까 두려워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했던 옛 시대를 끝내시고 다시는 죽음이 손댈수 없는 생명의 세계를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하신 아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면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를 출현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 죽은 몸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함께 친구로 동행했습니다. 만일에 아브라함 같은 믿음이 아니고는 백세나 된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일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삭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구약 백성의 조상이 되었고, 그런 의미로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지어진 새 인류의 조상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순종하셨고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에서 죽음이 지배했던 율법의 시대, 옛 시대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이제는 죽음이 손댈 수 없는 생명의 나라를 아들을 머리로 해서 세우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는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특별히 그가 나중이 된 것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중의 머리요 나중의 머리이기 때문에 모든 세계는 그분에게 있습니다. 처음 창조된 세계가 그분 때문에 있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분의 손에 교회와 만물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됐습니까? 충성된 증인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셔서 그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지금 교회를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할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충성스러운 종으로 먼저 앞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을 보면은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마는 후에는 따라오리라. 그리고 마지막 부활하신 뒤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거듭거듭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네 허리에 띠를 띄우고 끌지라도 나를 따르라.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왜 베드로가 그렇게 따를 수 있습니까?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먼저 죽음의 길을 걸으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백성들도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왜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까?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구약 언어로 왕이 어떠하면은 백성이 그렇습니다. 왕이 다윗이면은 백성도 다윗의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사용하는 방식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충성된 증인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세계가 그를 대항해서 특별히 유대인들이 앞장을 서서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주가 없나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했지마는 하나님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시인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영광을 주셨고 하나님의 모든 나라를 그에게 맡기셔서 이제 그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게 하셨고 하나님 보좌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직무를 통해서 이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거룩한 성소로 삼으시고 교회 사자들을 오른손에 붙드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거니르십니다. 환난을 받아서 궁핍한 그 교회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너희들이 궁핍하지마는 부요한 것처럼 만일에 너희들이 죽음으로 너희 충성을 드러낼 것 같으면은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을 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부요함과 영광을 거듭거듭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을 다해서 세상에서 멸시와 천시를 받았고 세상에서는 저주받은 자로 특별히 유대인에게는 저주받은 자로 멸시를 받았지마는 그는 참으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부요하신 분이셔서 생명의 면류관은 그의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것이 이 교회를 위로하시는 방식입니다. 물론 이 십일이라는 기간이 확대하면은 우리에게도 적용되겠지마는 구체적인 문맥은 그 교회가 당하는 구체적인 환난이 되겠습니다. 실제적으로 서머나교회는 이런 편지를 받은지 50년 뒤에는 우리가 잘 아는 폴리갑, 사도 요한의 제자지요. 그 폴리갑이 순교했다는 유명한 교회지요. 그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그들의 핍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입은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네가 얼마동안 핍박을 받으리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 아마 우리 선배들 같으면은 신사참배 문제로 얼만동안 핍박을 받을련지 몰라도 아마 핍박을 예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들을 했을 것이어요. 그래서 그런 신념을 가졌을 것입니다. 일본은 망한다고. 아마 그러니까 그렇게 이겨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이 본문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이 평화로운 시대에 종교적인 핍박을 받는다고 그면은 그런 국가는 이 세상에서 배겨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국가들까지라도 종교를 먼저 받아들인 이유는 그래야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것처럼 회칠할 수가 있기 때문에 종교 자유에 대해서 항상 먼저 언급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핍박을 받는다고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본문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가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처럼 창녀처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붉은 짐승을 탄 아름다운 여인처럼 금잔을 든 여인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고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추구하고 높이는 것을 여전히 교회도 추구하고 높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과 교회가 아무런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 문제 억지로 핍박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핍박을 필요가 없을 만큼 죽어있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광주 사태가 일어났다고 해서 새벽기도한 교회가 몇 교회나 있겠어요. 안하지요. 물론 게엄령이 내리면은 가도 못하겠지는 그러나 I. M. F 떠지니까 큰일났다고 새벽기도하지 안해요. 국가 잘되어야 한다고.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어요. 그래도 돈이 문제가 되면은 그렇게 심각합니다. 아마 제가 핍박을 받은 것도 다른 이런 저런 문제를 말하면 괜찮을려지 몰라도 직접 교회의 재정에 관계된 십일조, 무슨 신약 교회가 십일조 명령이 있느냐, 그려면 당장 핍박을 받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규칙, 성경을 봐라. 시험해 보라도 하지 안했느냐? 복을 준다고. 그런데 하나님의 성경을 무시한다고. 그것을 가지고는 어떻게 알았는지 열열해요. 지금은 오히려 그보다 더 열려서 신앙고백서 자체가 틀렸다고 공격하는데도 그 일은 잠잠해요. 그러나 자기 주머니가 문제가 되면은 이것은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를 않겠어요. 실제적으로 우리 부모들도 자식들이 믿음으로 살았으면은 그런 것 때문에 새벽기도한 부모는 적어도 우리 아들이 시험 점수가 잘 나와야 되겠다. 특별기도 기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기도회 기간이 끝나면은 기도하지 안해요. 그런 것만 전부 목표에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런 것은 상관없이 이제는 교회에 은과 금이 있으니 우리가 줄 것이다. 와라. 그말입니다. 그건 너무 안된 이야기들입니다. 요새 신문에 나는 유명한 인물들이 신자들이지요. 요새는 예수 안믿으면 문화인 측에 들지 못해요. 무슨 교회가 그런 일에 대해서 교회가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합니까? 붉은 짐승을 탄 여인처럼 세상의 권세를 다 업고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다 든 아름다운 잔을 들고 사람들을 취하게 하는 것이 교회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병낫고 만사형통하고 그러면 모를까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할수 없이 받으면 모를까 자원해서 받을 필요가 뭐있습니까? 핍박을 안받을수록 지혜로운 사람이고 복받은 사람이고 그러니 이것은 다 죽어 있으니까 핍박받고 말고 할 필요가 없어요. 참 안타카운 사실이어요. 우리 형제들이 군대에 가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니까 이것 무슨 여호와증인이 왔는가, 깜짝 놀란 것이지요. 여호와증인들은 그 일 때문에 아에 감옥으로 간 사람들이라, 국가의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것은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어떤 표상을 정해놓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방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든 독재정권들이 했던 방식입니다. 또 미국도 점점 극우로 돌아가니까 그 일을 할려고 그래요. 얼만 전까지만 해도 그 일로는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왜? 의사 표현방식이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길 가운데서 그런 일을 했으면 도로교통법으로 잡아가. 왜? 질서를 안지키니까. 어떤 표상을 정해놓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시험할 수가 없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 아니면 안돼요. 언제 라이온스에 무슨 일로 갔더니 거기도 국민의례 하드라고요. 내가 웃었습니다. 이것이 국가 단체냐? 그런데 얼마 전에는 조그만 사무실에도 박정의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안붙이면 절좋았을 것이어요. 대통령 사진 뗀 것이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인가, 개인 사무실에 대통령 사진 뗀 것은 얼마 안되어요. 그것이 무슨 국가 기관입니까? 면사무소는 붙여야될 것입니다. 거기는 국가 공기관이니까. 그러나 삼성재벌 사무실에 대통령 사진을 붙일 필요가 없어요. 거기는 차라리 이병철씨 사진을 붙이는 것이 옳을 것이어요. 그 사람이 세웠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전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전부 일제 때 사고를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핍박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믿는 학교도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맹세합니다. 하고 다 하는 것이지요. 물건 앞에. 그리고는 만일에 그런 일로 핍박을 받으면은 제주 없다는 식이지요. 그러니까 참 안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싸울지를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이런 핍박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핍박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교회는 주님이 충성스러운 증인으로 죽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은 충성된 자기 종을 통해서 다시는 죽음이 손댈 수 없는 영광스러운 권세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그분의 것입니다. 이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도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얻으셨고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데 모든 심판의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충성으로 영광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이제 교회도 그분의 길을 걷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열국을 줄 것이니 너도 싸워서 이겨라. 내가 열국 백성을 네 손에 맡겼으니 너도 죽여라. 그러면 구약의 충성이어요. 절대로 그들을 봐주지 말아라. 사울처럼 봐주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열국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그 권세를 대항해야 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때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권세에 자기 아들을 낮추심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애굽의 권세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세상의 권세에 버리심을 통해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그에 교회도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이방의 권세를 심판했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그런 권세를 누려야 되지마는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봉사합니까?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몸을 버린 것처럼 우리의 생명을 기꺼히 헌신함으로 우리의 생명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인증해야 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 하나님인 사실을 확증하셔야 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핍박을 안받는다고 할지라도 사는 자세는 생명을 결단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가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의 교회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그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받을 위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이요 나중이신 그분, 이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나셔서 나중에 머리가 되신 그분,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머리가 되신 그분, 그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어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그분의 몸과 지체로 부르심을 입었고 그분이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 왕을 봉사하는 권세있는 백성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교회를 손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죽음을 기꺼히 헌신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미혹할 방법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께서 만일에 죽고 부활하시지 못했으면은 우리들도 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우리 안에 계셔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만일에 죽음이 두려워서 주의 이름을 거절할 것 같으면은 그것은 영원한 둘째 사망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십시다. 충성하는 자에게 차라리 핍박이 될 것입니다. 육군 졸병에게 만약 사령부를 맡기면은 국가가 망하지 않겠어요. 충성스러운 종에게는 충성을 맹세시키고 그의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로마 경기장에 내세울 수가 있지마는 비겁하게 도망치는 사람을 거기 내세웠다가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핍박을 받지 않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라도 예수님이 서셨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핍박을 받고 나오면서 기뻐했습니다. 그전에는 우리들이 도망치는 비겁한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게하시는가, 얼만큼 감사했습니까? 신사참배시 우리의 선배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일본 헌병으로부터 작게 받으면은 기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으면은 슬퍼했습니다. 너는 주님이 얼만큼 충성스럽게 대했으면은 너는 그런 면류관을 받도록 중한 일을 맞기고 나는 얼만큼 졸병으로 알았으면은 이꼴을 당하도록 맡기겠는가 울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웃고 나오겠지요. 아이고 나는 살았구나. 그러니 이건 참으로 주님을 위한 교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시고 우리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신 그분, 그분은 죽음에까지 낮아지셨고 높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의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어서 창조된 세계가 그분의 손에 있고 부활의 세계도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이 참으로 생명의 주님이셔서 생명의 면류관을 그분의 것이요 그분이 그의 생명의 영광을 그의 백성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께 죽음으로 충성해서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그의 이름에 충성하는 교회를 이 복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오셔서 충성치 못한 사람들을 다 불못에 던질 때도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하신 그의 종들을 그와 함게 생명의 면류관을 쓰도록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가 환난을 받든지 그렇지 않든지 살든지 죽든지 범사에 단지 우리 몸에서 주님만 영광스럽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든 일에 낮아질지라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시를 받을지라도 오직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껫 충성해서 우리의 믿음의 걸음을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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