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

찬미예수님 2025. 11. 29. 22:07

제목: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

성경: 요한계시록2:1-7

 

요한계시록 2장1-7절까지를 잃고 강론하겠습니다. 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에 써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왜 일곱만 뽑았는지는 우리가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마는 계시록의 특성이 그 일곱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일곱이란 교회를 통해서 교회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특별히 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에 될 일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시간의 단축을 가르킨다고 3절에서는 말합니다. 때가 가까움이니라. 그러나 이 시간의 촉박은 우리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재림의 날을 측정할 수 있는 시간표를 제시하기 위한 그런 시간의 촉박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촉박, 말하자면 주님의 재림의 날이 심히 가깝다. 마지막 날의 촉박을 말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은 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금 옛 시대에 있었고 지금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을만큼 시간의 간격이 멀지요. 그들에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기록했는데 만일에 이것이 예수님 재림의 날만을 측정할 수 있도록 그런 시간표들을 주었다면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고 그런 의미로 밤은 깊고 낮은 가깝고 또 때가 가깝다고 바울 사도께서 다른 데서 여러번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고 그러면서도 역사의 종점을 바라보는 그런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때가 가깝다 그런 의미로 해석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반드시 속히 될 일 하는 것은 계시록 전체는 언약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때가 가깝다. 반드시 속히 되리라. 만일에 이 말씀 외에 무엇을 더하면은 생명의 말씀에서 제해버릴 것이고 만일에 말씀에서 무엇을 감하면은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그를 감해버리라.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전체는 언약적인 언어로 사용하면은 마지막 때의 언약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이 주님 오시도록까지 교회를 그렇게 핍박하겠지마는 주님은 항상 교회에 임해 계시고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를 해할 어둠의 권세가 없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교회를 해하는 용과 짐승과 그 도성인 바벨론을 영원히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약속하면서 너희들이 이겨내라. 결단코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이겨내라. 그렇게 거듭거듭 반복합니다. 그래서 2-3장까지의 편지는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이기는 자는 이러 이러한 상을 주리라고 하면서 그들을 거듭거듭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에베소교회에 써보낸 편지를 강론하겠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은 대개 형식이 비슷합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대충은 비슷한데 먼저 말씀을 하시는 인자의 모습을 누구로 묘사하는가, 나는 누군데 그렇게 하고 그들 교회의 행위를 칭찬하고 또 잘못이 있으면 책망하고 그리고 잘못을 고치도록 권고하고, 만일에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은 경고가 따르겠고, 그들이 그것을 고치고 이겨내면은 생명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그런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여기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다. 이 사자는 누구냐 하면은 1장 제일 끝에를 보면은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이 사자를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1장1절을 보면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했으니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일곱 교회의 사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가? 그냥 로마서처럼 교회에 편지하고, 빌립보교회에 편지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사자에게 편지하는가? 하는 것은 1장1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구약의 상징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은 이제 모세를 따라서 다른 선지자들도 자기 백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이 계시를 주셨는데 이 계시를 시행하실 분은 아들이십니다. 이 아들은 천사보다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모세는 천사에게 받았지마는 이분은 천사보다 높기 때문에 그가 교회에 사자들에게 알려야 되겠는데, 누구를 통해서 알립니까? 천사들을 그 종 요한에게 보내고 요한이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면은 그 사자들이 교회를 가르칠 것입니다. 이런 구약의 선지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도 목사가 말하지 않으면은 교인들은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그런 말이 아니라, 바라, 하나님이 교회의 사자들에게 직접 편지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이제 장차 나타날 일, 속히 될 일, 묵시적인 언어로 예언적인 방식으로 선지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이미 언약의 책들이 기록됨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지금도 목사에게 하나님이 묘한 사신을 보내서 말하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내셨는데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가 역사를 펼쳐보일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사자들에게 이것을 알려서 교회로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행해서 세상을 이겨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요한에게 편지를 쓸려는데 천사들을 요한에게 보냈고, 요한이 편지를 쓰면은 이제 교회의 사자들이 편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쓰신 분은 누구냐 하며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2장에 보면은 예수님께서 여러 모습으로 자기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대략은 1장10-에 있는 인자의 환상에서 다 가져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1장20절에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이제 고난받는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교회에 계시는가, 그것을 교회 사자들에게 알려서 그 소식을 들은 교회가 다시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세상을 이겨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여기 2장에서 편지를 쓰는 분은 거의 대개가 1장에 있는 것을 거의 인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했는데 왜 에베소 교회는 이런 모습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은 그 교회의 필요를 따라서 나타나신 모습을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기면은 내가 이런 상을 주지 않겠느냐? 이겨내라. 나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지 않느냐? 하니까 제일 끝에 있는 이기는 자에게는 이러이런 상을 주리라. 하는 것과 거의 상응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5절을 보면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은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잘못하면 이런 벌을 주겠고 이기면은 어떻게 합니까? 7절에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이런 말은 서로서로 설명하는 비슷비슷한 말이 되어야만 맞을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 하라고 아버지가 훈계했을 때는 야, 네 아버지가 지금 돈이 얼마 있다. 그리고 네 교육을 위해서 들어온 통장도 몇 개나 있다. 그러니까 공부 잘해라. 그러면은 아이가 힘을 얻을 것이어요. , 아버지가 지금은 나를 학원에는 안보내도 대학가면 이것은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내가 죽자 살자 하면 되겠구나.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안보낸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게 하면은 맞아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 한 번 더하기를 네가 공부만 잘하면은 약속하기를 내가 이것 뿐이냐? 또 유학도 보내주마. 그러면 유학보낸다는 말이나 대학 간다는 말은 비슷비슷한 말이지요. , 서울로 유학보낸 것보다 미국으로 보내면 더 좋을 것이니까. 그런 말로 비슷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석하는 방식이 될 것이어요. 심지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 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내 알통을 봐라. 내 체격을 보고. 얼만큼 힘이 쎄냐 했을 때도 아들이 생각할 때 우리 아버지 싸움 잘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가 노동을 해서라도 나를 공부시킬려는 갑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어요. 그렇겠지요. 그런데 아이가 누구에게 두둘겨 맞고 울고 있는데 봐라. 내가 권총을 차고 있지 않냐? 네 아버지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제일로 힘이 쎈갑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아이들 공부 잘하라고 하면서 권총을 보여주면은 우리 아버지가 혹시 강도할란가, 보십시오.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그 상황에 따라서 해석은 달라지겠지요. 그러니까 앞과 뒤를 연결해 보는 것이 해석을 위한 순리로운 방법이 될 것이어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막 신학적으로 정의해버리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지금 구체적으로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가 로마 정권으로부터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위로할려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니까 분명히 그 교회에 경고도 하고, 위로도 하고 약속을 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나타내야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시면은 그것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오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이요 곧 그것이 자기 백성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기를 알리면 자식이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이 교회에 자기를 어떤 모습으로 알리셨는가,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의 생명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어떤 의미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닌다고 말하는가? 이런 문제를 해석을 해야되겠지요. 물론 상징적인 책이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이런 저런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해석을 찾는 방법은 전체적인 문맥, 또 에베소교회의 서신에 대한 문맥, 그 문맥에 따라서 이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 것을 우리가 골라내야 될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보니까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 해석도 상당히 재미있는 해석은 됩니다. 그 당시 교회가 핍박을 받으니까 교인들이 많이 교회를 떠나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아라. 내 사자는 내가 붙들고 있지 않느냐? 내가 내 사자를 붙들고 있는데 너희들이 겁나서 도망치느냐? 그러면은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무슨 말입니까? 목사 다른 데로 가겠다는 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는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은 맞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교인들이 도망쳤다는 말은 하나도 없고 너무너무 싸움을 잘해서 그것은 잘했다고 칭찬하마. 그런데 말하자면 싸움에 지처서 도망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거기 교회의 사자가 핍박을 받아서 죽을뚱 살뚱 하니까 아이구 우리 목사도 저 꼴을 당하는데 우리는 가자. 그러지 말아라. 내가 내 사자를 붙들고 있느니까 그 사람 안죽을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출석하고 기도 열심히 해라. 이런 식으로 해석하겠다. 그런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것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순리로운 해석은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 로마 정권 밑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의 상황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되겠지마는 전체적인 흐름에는 딱 맞는 것이 아니어요. 그 다음에 제가 그전에 설교를 들은 기억으로는 교회에 분쟁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창피한 이야기입니다마는 목사들이 이 구절을 잘 택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데 촛대를 옮기릴. 말하자면 다른데 가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은 에베소 교회는 말 안들으니까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땅은 황무지가 되고 교회가 없다. 그러니까 그 꼴을 안당할려면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는데 누가 감히 나를 손댈려고 하느냐? 봐라. 다윗이 사울을 절대로 손 안대고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도 마음이 상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교회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이런 해석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 정치는 교회가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지. 가령 아무리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도 여러분들이 반대하면은 하나님이 나를 보냈는데 나를 안받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 그것은 구약 교회 때는 신정정치라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해 계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판단을 교회가 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방식으로는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구약의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구약 선지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은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고 계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까 시작할 때 말씀했습니다마는 그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상급, 너희들이 만일에 잘못하면은 내가 너희들을 벌줄 것이고, 너희들이 이기면은 내가 너희들에게 상줄 것이다. 나는 누구냐 했을 때 그 경고와 상과 관계된 것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그분과 서로 맞아들어가야만 맞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음에 결론 부분에 가서 해석을 하면은 앞 부분이 해석이되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고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그렇게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가 땅 끝까지 확장되는 의미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지고 그 다음에 이방 선교를 주관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가 중심지었지마는 바울 사도가 3년 동안 수고했던 곳은 이 에베소교회입니다. 제일 오랜 시간동안 수고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또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 사도가 한 자리에서 강론을 했는데 그 소식이 온 아시아 지역에 퍼지도록, 소아시입니다. 우리 한국이나 일본 그런 지역이 아니고, 지금 터키가 있는 그런 소아시아 지방이어요. 거기 사람들이 다 말씀을 듣더라. 그렇게 해서 거기서 말씀의 사역이 굉장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을 교회로 삼으셨다는 표로 인을 치셨는데 우리들이 아는대로 사마리아 교회에 빌립이 전도했는데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가서 기도하니까 성령이 임하셨고, 또 고넬로 가정에 베드로가 가서 기도하니까 성령이 임하셨던 사실이 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사마리아 교회, 그 다음에 인들로 확장되는데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을 세웠는데 바울이 기도하니까 성령이 내린 것이 있는데 어디서 그랬느냐 하면은 에베소 교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의 초기 사역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면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확증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습니다마는 에베소 교회에 가니까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의 세례는 모르고 성령의 임하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했는데 그분이 주다. 그러면서 기도하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거기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요한의 증거를 따라서 이것 저것 하고 다녔어요. 그래도 바울이 가서 기도하니까 성령이 임하셨지요. 그러니까 에베소교회는 바울에게 이방 사역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치는 그런 사역이 에베소 교회에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한 도시를 중심해서 선교했는데 온 아시아지역이 말씀을 들었고 거기서 대단한 권능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지나만 가도 또 손수건만 갖다 얹어도 병이 낫고 하는 많은 표적들도 거기서 나타났었고, 그리고 모든 우상에 대한 서적을 불질러버린 것도 전부 에베소 교회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대단히 중요한 선교 거점 도시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요한 사도가 이 에베소를 중심해서 사역한 것으로 그렇게 교회사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20장을 보면은 바울 사도가 장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헌금을 가지고 갈 때에 오순절에 맞추어서 가느라고 길이 바빴습니다. 그때 바닷가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거기 있는 장로들을 불러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한 내용이 사도행전 20장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간 뒤로 흉악한 이리가 나타나서 양떼를 미혹할 것이다. 그러니가 내가 밤낮 3년동안 수고하고 가르쳤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일깨워서 너희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양떼를 잘 보살피도록 해라. 그의 교회를 부탁하면서 기도한 내용이 있는데 아마 그런 것들을 배경으로 하고 읽으시면은 좋겠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이 가장 확고하게 그리고 찬란하게 꽃피운 곳이 에베소 교회였는데 거기 보니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그들은 복음을 받은대로 그런 일에 있어서 충성을 다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하는 문제들은 어떤 의미로 수고했고 어떤 의미로 인내했는지 우리들은 잘 알 수 없지마는 어떠튼 그들이 행함에 있어서 확고하게 행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그들의 행동이 일사불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똑같아서 확고한 신념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에 그랬는지는 뒤에서 설명한 구절로 해석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들어낸 것과 또 네가 참고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마 그런 일에 있어서 그들이 행위가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했을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하는 자들을 시험하여하는 말들도 실은 비슷비슷한 말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은 에베소 교회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아주 중요한 거점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3년 동안 가르치니가 온 아시아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교회는 이런 일로 시험을 받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거기 보면은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거기서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자칭 사도가 그 교회를 미혹하러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흉악한 이리가 양떼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 보니까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해서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그들의 수고를 그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거짓된 사도들을 골라내버렸는지 여기서는 직접적인 방법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서신들을 보면 두 가지로 골라낼 수가 있을 것이어요. 갈라디아서를 보면은 바울이 말하기를 하늘의 천사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사도적 복음,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그 다음 다른데 보면은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거짓된 자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두 가지로 시험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그들은 참고 주님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더구나 로마 정권 밑에서 이런저런 많은 핍박이 있었을 때까지라도 그들은 주의 이름을 확고히 붙들고 수고를 많이 했노라고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적 교훈이 변질되면은 그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런 잘못된 교훈으로 들어오기 쉬운 것입니다. 만일에 교회가 잘못된 교훈을 받으면은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회라고 합당하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그들은 꾸준하게 투쟁했고 잘했노라고 그렇게 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예수님은 자기를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분으로 자기를 묘사했는데 만일에 그들이 회개치 않으면은 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니까 주님께서 떠나시겠다는 말과 같겠지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떠나느냐 하면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여기서 4절은 사랑으로 묘사했고, 5절은 그 말을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행위는 여기서는 같은 말이 되겠지요.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에게 약속하기 전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그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해놓고도 또 그들에 대한 칭찬을 끼워넣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짓된 자들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확고한 주님의 군병으로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듭거듭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니골라당부터 설명을 하고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그러니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하는 말이 니골라당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된 사도들, 거짓된 교리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면 니골라당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 계시록 2, 3장에 주님께서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그 다음에 14절에 보면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자들, 그들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세벨의 음행, 그 세 부류를 주님께서 미워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14, 15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네게 두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의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왁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그러니까 여기 14, 15절에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그런 것은 거의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의 음행을 따르는 자들이든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든지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든지, 이런 무리들이 무슨 특별한 말하자면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이름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4, 15절에서 그것을 한꺼번에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강조하는 점이 발람에다 교훈하면은 거짓 선지자 쪽에다 강조가 주어지겠지요. 왜냐하면 발람이 선지자거든요. 이세벨 그러면은 아합의 부인인데 그가 교회를 핍박해서 엘리야가 나만 남았습니다 할 정도로 교회가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알의 종교를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핍박 쪽에다가 강조를 두고 그러면은 아마 이세벨 이쪽에 오겠지요. 그 다음 니골라당의 행위 했을 때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당자를 붙여 놓았으니까 한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 것을 알겠지마는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니골라라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중에 유다가 배반한 것처럼 이 사람이 한 당파를 만들어 가지고 이런 일 저런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은 확증되지 않은 것이어서 우리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언어들은 전부 구약의 언어들을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니골라의 이야기를 하자면은 다른 데서 찾아보아야 될 것인데 우리가 알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계시록 전체에서는 이 거짓된 무리들은 무엇입니까? 당시 로마 정권 밑에서 핍박을 받으니까 그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로마 정권이 주장한 것을 기독교 식으로 변질시켜서 교회에 받아들여서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계시록 13, 14장을 보면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다른 짐승이 경배할 수 있도록 양같이 생겼는데 뿔이 있는데 그는 거짓 선지자인데 그는 먼저 나온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그렇게 하더라. 해서 거짓된 종교를 묘사한 것처럼 아마 그 방법이외는 우리들이 이해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류들로 이해를 해야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가 당하고 있는 일들은 첫째는 거짓 사도들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이런 유혹들, 그 일에 대해서 일사불란하게 싸워서 그런 것을 잘 이겨냈습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니까 그런 핍박을 면하게 할려는 그런 어떤 섞인 교훈을 가지고 교회가 타락하는 그런 것도 있는데 그 일에 대해서 교회는 잘 싸우고 있다. 나도 그런 것을 미워하는데 너희들도 잘 싸우는구나. 그런 것을 거듭거듭 칭찬하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라. 만일에 회개치 아니하면은 내가 네게 임해서 촛대를 옮기리라. 그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7절을 보면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분명히 마지막 축복을 보면은 이것은 단순히 에베소교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에베소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를 염두에 두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보편적인 교회를 두고 확장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되겠습니다. 그래도 여기 작은 문맥에서는 에베소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를 두고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 문맥에서는 더 좋겠습니다. 여기 보니까 이기는 자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일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낙원에 있으면은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면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서 낙원으로 돌아가 보았자 그것은 옛날 이어요. 오새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가지고 그때 그날을 아시나요, 해가지고 무슨 찐빵도 옛날 찐빵, 순대도 옛날 순대를 좋다고 먹고 있는데 입맛따라 먹으니가 할말이 없겠지마는 말하자면 요새 먹는 것은 옛날 세종대왕도 못먹는 것을 먹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도 낙원은 생명나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 아래서 먹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니까 탁월한 생명이어도 그것은 역사의 시초에 주어진 생명의 교제여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생명에 비하면은 그것은 옛 생명이지 그것은 역사가 완성된 마지막 시대의 생명은 아닙니다. 단지 구약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제 생명강이 길가로 흐르고 생명나무가 길 가로 쭉 늘어져 있어서 열두 과실을 다달이 맺는도다. 구약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지 그것을 그대로 옛날의 생명나무의 과실을 다시 먹는가, 그렇게 미신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시작인 에덴을 모델로 해서 역사의 마지막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겠지요. 어떠튼 여기 보면은 낙원에 있으면은 생명나무 과실을 먹습니다. 낙원에서 쯫겨나면은 생명나무 과실을 못먹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처음 시작에서 낙원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창세기를 보면은 항상 족보로 시작되는데 누구누구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했을 때 장자 이야기에요. 장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앞에서는 여러 아들들을 한꺼번에 이야기합니다. 어느 조상이 이러이러한 아들들을 낳았는데 쭉 이야기를 하고 각자 이런 저런 복을 주었더라. 그 다음에 장자를 뽑아서 장자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다시 장자로 출발해요. 그러니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낳으신 것들이 있지요. 지으신 것들, 세상에 모든 거들을 다 지으셨어요.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대리자로 지으셨지요. 그리고 장자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천지창조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장자를 낳으셨는데 누구요? 아담을 지으셨다. 그러면서 2장에 아담 이야기부터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경영하는 역사는 무엇입니까? 에덴의 역사에요. 하나님이 에덴에 거하면서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고 생명의 교제를 나눕니다. 거기 하나님의 약속을 대항하는 사탄이 들어오면은 막아내야 됩니다. 그것이 지금 에덴의 일이어요. 만일에 범죄하면은 하나님께서 에덴 밖으로 쫓아내면은 그는 생명나무 길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십니다. 만일에 너희들이 잘못하여 촛대를 옮기면은 약속대로 하면은 생명나무 과일을 못먹는다 그말이지요. 낙원에서 쫓겨나고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리라. 그 말이나 내가 네게서 내 촛대를 옮기리라 하는 말이나 같은 말이고 그분이 누굽니까? 일곱 촛대 사이에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시는 분,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서로 상호 연결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촛대를 옮기리라. 하는 말은 교회 안되게 하겠다는 말이지요. 낙원 밖으로 쫓겨나겠다.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경고나 약속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분은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금 촛대는 구약의 성소를 그냥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한 촛대에 일곱 금 등잔이 달렸고 그 앞에는 떡상이 있고 거기 제사장이 거하면서 하나님을 봉사합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가 있는 곳이어서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성소에세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아직 지성소에는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휘장을 열면은 죽기 때문에 거기는 막혀있어요. 하나님이 그의 제사장과 함게 있는 곳은 성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금상에 차려놓으면은 하나님이 잡수시는데 곧 그것을 제사장이 먹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구약에 나타나 있는 성소에요. 물론 이것이 다윗 성전에 가면 등대가 하나가 아니라 열 등대입니다. 굉장히 확장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표상을 사용해서 교회가 일곱인데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금 촛대로 이야기 해서 교회를 구약의 성소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소이기 때문에 주님은 거기 거하시는데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지요. 거기 거니는데 어떤 분으로 계십니까?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들고 거니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선지자를 대항하면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복받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때도 선지자를 보냈는데 그들이 듣지 않으면은 망한 것은 결국 선지자의 권면을 듣지 안했기 때문에 망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마지막 역사를 펼쳐 보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다윗 지파의 사자신데 그는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자기 몸이 죽음에 이르도록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증거했습니다. 곧 하나님을 증거한 것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인데 자기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종말의 왕이라고 그렇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증거하셨고 하나님은 그를 죽은자 가운데 살리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권세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나라를 자기 아들의 몸의 죽음에서 죽음을 끝내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하늘에 속한 그런 권세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제일 끝에도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권세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권세있는 분이신데 그냥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일을 시행하는 권세여서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로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분 장자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신데 그분이 곧 교회에 계신 분이십니다.

이제 교회의 종들은 누구의 손에 붙들린 종들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내가 음부의 권세를 이겼노라. 내가 죽었다가 살았노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곧 그분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교회 안에 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지 않을 것 같으면은 그런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통해서 교회에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의 말씀하심을 통해서 교회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이처럼 주의 말씀을 잘 들어야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주님은 결국 여러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처음 사랑인지 그런 것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다. 분명히 이 교회는 분명히 사도적 복음을 사수하는 일에 생사를 걸었고 사도적 복음을 사수하는 일에 일사불란했고 처음과 끝이 똑같아서 그들은 지치지 안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열정에 대해서 진실했고 바로 예수께서 주되신 일을 증거하는데 있어서도 그들은 탁월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니골라당의 행위 로마 정권과 결탁할려는 어떤 의도도 거부하고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런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때도 사랑이 없었는데 가짜가 했는데 인제 너희들이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너희들이 가짜가 아니냐? 가짜도 한때는 열심을 내지마는 밑천이 딸리니까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진짜냐, 가짜냐 그런 것을 채점해서 우리의 운명을 판단해 줄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나와 함게 동행하자. 언약의 동행에다 강조를 두는 것이지 너는 진짜냐 가짜냐, 그런 것을 골라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들이 부부싸움도 그렇지 않겠어요. 가짜니까 싸웁니까? 진짜니까 싸우지, 가짜며은 끝나버리지요. 그런데 요새 남편이 잘못하거든요. 그전에는 잘했어요. 하니까 아, 인제 당신 들통이 났구먼, 그전에 한 것이 전부 가짜구먼. 그러면 성질이 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전에는 사랑했는데 그렇게 안하니까 내가 살맛이 없다 그말이지요. 지금 있는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지금 사랑안한 것 보니까 그때도 가짜였다. 인제 들통났다. 진짜냐, 가짜냐? 이런 것을 판단할려는 것이 부부싸움은 아니지 안해요. 성경에서 언약적인 관계는 너는 진짜냐 가짜냐, 그런 것을 판단할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동행하자. 그전에는 너희들이 어떻게 신실하게 수고를 잘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떠나서 이렇게 되었느냐? 이쪽에서 설명을 해야 될 것이어요. 계시록은 우리들의 싸움에 대한 것이 주제이지 말하자면은 우리 인격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하는 것, 그런 쪽이 강조가 아닙니다. 항상 성경은 주제를 따라 파악해야 되는데 계시록은 싸움이 주제에요. 그러면 여기서는 싸우기는 잘 싸웠는데 사랑없는 싸움이 계속될 수 있겠지요. 제가 볼 때는 그렇게 해석해야 맞을 것이어요.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싸움 이야기에요.. 이겨내라. 신앙을 지켜내라. 많은 사랑을 베풀어라 하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이나 요한 일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몸으로 사랑해라.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셨으니 그렇게 사랑해라. 그런 이야기고, 이방인처럼 살지 말고 주님의 백성으로 살앙라. 그러면은 에베소서에요. , 우리는 공중에 권세잡은 자에게서 불러내서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되었거든요. 어린 아이처럼 살지 말고 장자처럼 살아라.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요. 구약 때는 어린 아이처럼 살았지마는 이제는 하늘에 속한 장자로 살아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문맥을 따라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여기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은 너희들이 신앙을 잘 지켜라. 결단코 무릎을 꿇지 말아라. 이겨내라. 이것을 강조하고 있지 윤리적으로 얼만큰 완전한가, 그런 쪽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무리 신앙을 잘 지켜도 말하자면 완전해야 그것 하나만 볼 수 있느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문제는 싸움은 잘하고, 지금도 그 싸움은 못한다는 말을 한하셔요. 지금도 너희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있지않느냐? 좋아요. 그런데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아요. 처음 사랑을 잃어다. 회복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여기서는 우리들이 문맥을 따라 해석하면은 사랑없는 싸움으로 이래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면은 너무 주관적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마는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실하게 싸우고 있는지, 그들의 신앙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어요. 대개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전에 있었던 재건교회가 이 싸움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어요. 왜냐하면은 일제 치하에서 온 교회가 배교했을 때도 생사를 걸고 싸워서 이긴 사람들이어요. 그러니까 이 싸운 사람들이라 전공이 싸움이어요. 조금만 이상해도 알아차려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감각이 굉장히 날카롭지요. 그러고 또 굉장히 신령한 것 같지 보여요. 조금만 이상한 징조만 보여도 아, 고것, 그냥 알아차리니까 이것 보통이 아니지요. 그러면 얼만큼 하나님을 대단히 사랑하는 교회입니까? 그런 교회들이 지금 이런 교회들을 보면 교회도 안같아요. 왜냐하면 주일날 조금만 일이 생겨도 자기 일을 다 보러 다니지요. 또 학교 같은데도 국기에 대한 맹세 다 하지요. 만든 물건 보고 절하지요.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맹세하지 안해요. 그전에 일본에게 그렇게 했거든요. 일본에게 예배드리다가도 그전에는 점심 때 되면은 싸이렝을 불어요. 요새 젋은 사람들은 모르지요. 요새 같으면은 우리가 묵념하는 것처럼 일본 죽은 귀신들에게 묵념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본 쪽보고 절하고. 신사에서 절하고 다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싸워서 이긴 교회라서 단지 일본 정권 밑에서 우리 나라 정부로 바뀌었다 뿐이지 세상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힘이거든요. 그 힘은 독재자를 통해서 힘을 규합하지못해요. 무엇인가 국가를 표상하는 원조들, 표상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는 단군 조상 찾으면은 민족 뿌리 찾기, 단군이 정치와 종교를 한 몸에 가졌으니 우리 종교가 싸우면 안된다. 종교는 정부를 위해서 협조해야 된다. 정부 없이 종교의 자유가 있냐? 월남을 보아라 망하지 안했느냐? 이것이 모든 독재 정권이 추구하는 방식이어요. 그러니까 육영수 죽으니까 세 종교가 합심해서 장례식을 하지 안해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목사가 기도하면은 육영수 여자 영혼이 이쪽 갔다가, 천주교 신부가 기도하면은 이쪽으로 갔다가, 세상 사람들도 웃어버리지 안해요. 그런데 그때 월남이 망했거든요. 왜 종교가 싸우다가 망했지 않느냐? 종교는 어떤 국가 밑에 복종을 잘 안해요.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니가 어떤 국가적인 정책에 복종하지 안해요. 아주 난처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안망할려면 합쳐야 되겠다. 6.25전쟁이 터지니까 제일로 먼저 죽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냐? 합치자. 그렇게 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항상 그런 것이 국가신, 국가 절대 권력,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정치 권력이어요. 계시록의 말대로 하면 짐승의 권세들 하나님을 대항하는 어두움의 권세들이 추구하는 실체들입니다. 그러니 일본 정권 밑에서 그런 일을 당해본 사람들이 눈을 또록또록 뜨고 있으니 아무리 우리 나라도 바뀌어졌다고 하지마는 만받아요. ? 그들은 일본을 대항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귀신을 대항해서 싸웠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도 귀신을 끌어들이면 그 사람들은 싸워요. 그러니가 아주 눈을 똑뚝히 뜨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서 보면은 요새 교회들은 교회도 안같을 것이어요. 그런데 그런 싸움은 열심히 하는데 그러니까 거기서는 설교할 때 요 기성교회들, 막 공격하면은 아, 재건의 수사가 나왔구나, 하고 알아주어요. 가령 일제 때는 설교할 때 제일 끝에 민족에 대한 감정을 일으켜야 아, 여기 하나님이 계시도다. 청년들이 모아들지, 그것 안하면은 명설교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진짜로 일본 귀신이 들어오니까 전부 다 무릎 꿇어버렸지요. 국가를 위해서는 예수로 모이는데 진짜 예수 앞에 생명을 바치게 하니까 안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목사들은 말하기를 양떼를 지켜야 되니까. 그래서 요새 우리 나라 같으면 여기다 유엔 기도 부치고 태극기 붙이지요. 어지간하면 십자가 붙이고, 여기다가 일본 국기 봍여놓고 신사 붙여놓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안하면 예배당 폐쇄하니까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런 교회들이 보았을 때는 이런 교회는 교회로 안보이지요. 그러니까 눈이 아주 예리하지요. 싸움은 잘하는데 그러면 진짜 교회냐? 그런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하나만 틀려도 쉽게 갈라져버려요. 어떻게 보아서는 대단히 용감합니다. 자기 친족도 상관이 없어요. 부부도 상관이 없어요. 제가 알고 있는 한 분은 고신파에서 유명한 학자입니다. 자기 부인은 재건교회 권사입니다. 고신은 신사참배만 안했지 남어지 네 개는 다 했지 않느냐? 그러니 그것이 무슨 교회냐? 안나갑니다. 그러니가 얼만큼 용감해요. 그러면은 그것은 진짜 교회냐? 다른데서 보았을 때는 굉장해 보이지요. 그러면 진짜로 주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냐?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그 싸움이 전공이어요. 그러니까 설교할 때는 예수 이야기보다도 싸움,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 우리 선조들에 대한 자랑, 이런 것이 나오면은 아아 우리는 재건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가 재건 교회를 말하니까 아따 형편없는 데가 있는갑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 여기 오니까 그것도 없거든요. 말하자면 저는 지금 우리 나라 교회 중에 제일로 명분 있는 교회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이어요. 그렇게 잘 싸운 교회가 없어요. 그래도 그것이 교회냐 했을 때 안타깝다 그런 말입니다. 가령 다른 이야기 하지 말고 여러분 우리 보수파에서 나왔지요? 보수파에서 나오면 자유주의자들 공격하면 우리는 보수파에요. 그리고 순복음주의자들 공격하면 우리는 정신이 총총한 사람들이어요. 그러면 너는 누구냐? 물어보면 없어요. 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가령 교회가 분쟁을 격으면은 전부 박사가 되어요. 어떻게 그 헛점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알든지 그렇게 연구를 잘해서 열심히 떠드는데 그것이 교회냐고,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 그것은 자기 패거리를 확장할려고 명분을 교리에 두고 있는 것이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어요. 보면 알지 않겠어요. 그런 것이 허다히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아마 에베소 교회는 제가 추론하거든데 그런 상황이 아닌가? ? 여기는 주로 교리적인 싸움이었거든요. 그러면 교리적인 싸움이 주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을 잃으면 교회가 아니라 그런 말이지요. 촛대를 옮기겠다. 이렇게 큰 경고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에는 그들이 이 진리를 따라 수고를 잘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교회가 낙원입니다. 주님과 함께해서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곧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참으로 낙원의 생명과를 먹는 것처럼 복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은 내가 촛대를 옮기겠다. 내가 이 교회에서 떠나겠다. 한마디로 낙원에서 쫓아내겠다. 생명의 교제로부터 끊어지게 하겠다. 그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우리들이 대단히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시대마다 이런 저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런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맞추는 사람들이 있지마는 초대교홰만 그럽니까? 종교개혁 교회도 비슷하겠지요. 종교개혁 교회만 비슷합니까? 어느 때든지 교회가 분쟁을 겪으면은 특별히 교리적인 싸움을 겪으면은 교리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한 마디로 교회는 냉냉해지고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경우들이 너무도 허다합니다. 제가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있어서 가능하면은 저런데 비교하지 않고 오직 주님 자신을 사랑한대로 여러분의 시선을 집중하는데는 곧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대단히 조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교회에 속하지 않고 여기 있고, 다른 교회는 이 본문을 이렇게 설교하고 우리는 이렇게 설교하고 물론 옳고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 일인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동안 여기 왔다가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해요. 여러분 말대로 제가 아무 것도 아니지마는 뭐 역사상 유명한 인물을 만났다고 여러분들이 얼만큼 선전을 많이 들었어요. 그것 많이 하지요. 그리고 내가 총 대장이 되어서 싸움을 하면은 효과가 100퍼센트 나올줄 알고 있지요. 얼만큼 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나중에 들어온 분은 잘 모르실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전 제가 이 교단에서 쫓겨날 때 청년들이 굉장히 많했습니다. 교역자들도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리고도 다 떠나지 안해요. 저는 그들에게 싸움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 때문에 싸웠던 것이지 너희들은 틀렸으니까 형편없어. 당신들은 구식이라 물러나야 돼. 저는 그런 일로 싸운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왜 안싸우는가? 이미 따로따로 있기 때문에 제가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는 한 몸으로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되면 이야기를 해주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뭐라합니까? 너희들은 지나서 우리 세대가 되면 조금만 기다려라. 저 양반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가 없이 떠들고 해서 우리까지 난처하게 하는가?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때가 오는데. 그리고는 어른들 먼저 돌아가시라고 말도 안해주어요. 그러고도 자기들은 지혜가 많고 온유하고 나에게는 과격하다고 그래요. 그러니 얼만큼 위험하냐? 그말이어요. 특별히 우리 교역자들이 위험해요.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이 주님을 높이고 그의 백성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활동으로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대단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분쟁을 격은 초기에는 몇마디 했지마는 그 뒤로는 가능하면 다른 교회와 비교하지 않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점을 여러분들이 깊이 잘 생각을 하셔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단 밖으로 싸우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까지라도 우리들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형제 유익을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다해야 되고 주님을 위해서 싸울지라도 주님 자신을 위해서 수고를 해야되는 것이지 우리가 믿는 한 신념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대단히 그런 점들을 조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거듭거듭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교단에 속한 것으로 여기 속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라. 우리 아버지가 교장이니까 내가 서울 대학교에 드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형제를 권면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촛대로 삼으시고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드시고 교회에 거니십니다. 물론 그가 모든 죄와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해서 이 수고를 잘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히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교회를 그렇게 존귀하게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능력이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능력이 있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것이지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깨달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몸을 주셔서 우리를 세우신 그런 권세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가 진리를 붙드셔야 됩니다. 사도적 복음을 사수해야 됩니다. 지금은 사도적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이야기 해서는 안됩니다. 사도적인 복음을 사수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라도 오직 그리스도. 성경을 어떻게 풀던지 우리은 항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듣는 방식이 아니고는 우리는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나 자신이 옳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말씀에서 주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인지,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봉사할 수 있는 것인지, 그가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인지, 그런 것이 우리들이 싸워야 될 총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상에 앉게 하셔서 먹고 마시게 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진리를 보존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진리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교리는 말하면서도 우리 사는 형편을 따라서 이러저런 방식으로 살살 조절해서 자기를 더렵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의 상에 앉고 동시에 귀신의 상에 앉고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순수한 사도적 복음을 우리가 사수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헌신하십시다. 이 사랑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를 더 럽히지 않도록 진리를 지켜내십시다. 주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을 따라서 항상 사랑의 교제로 한 몸을 이루고 주님의 몸과 지체로서 서로를 봉사하는 그런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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