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촛대 사이의 인자
성경: 요한계시록 1:9-20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온전한 사랑을 이제 나타내셔서 주의 교회를 피로 값주고 사시고, 주의 교회를 거룩한 성소 삼으셔서 우리 중에 임하셔서 우리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봉사하는 복된 수단으로 삼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크신 은혜를 주님께서 교회에 주셔서 이처럼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데도 세상의 운동 선수나 정치가들은 찬양하고 탈렌트들은 찬양해도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시고 만국을 통치하시는 죽었다가 사신 분은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깨 때문에 지도자들을 찾아도 참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우리의 영원한 양식으로 준신 주님에 대해서는 세상은 구하지도 않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런 악한 세대에 교회를 남기셔서 주의 영광을 경배할 수 있도록 이처럼 존귀한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항상 주님 앞에서는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고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더욱 교회를 온전케 해 주시옵소서. 참으로 교회가 땅에 있어도 주님께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붙드신 것처럼 교회의 실체는 하늘에 속한 줄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 품 안에 있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어서 하늘의 권세를 봉사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셨사오니 우리가 결단코 땅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분의 군병으로서 주님을 신실히 증거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복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은혜로 주의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시려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시고 또 우리를 사랑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상으로 주의 교회를 불러 모으셔서 주님의 피와 주님의 살의 교제에 참여하는 몸의 교제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복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며,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님의 품안에서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하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이 생명의 복으로 주의 백성들을 더욱 복되게 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의 교회를 불러 모으시고 우리 중에 임하셔서 경배와 참양을 받으시옵고 또 우리로 주의 얼굴을 대면하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날마다 주님의 영광을 간구하는 귀한 백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의 백성들로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뵈옴으로 주의 영광을 향해서 달음질하게 하옵시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따라 서로를 섬기는 귀한 몸된 교회를 이룰 수 있도록 주의 백성들을 더욱 복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1:9-20까지를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1:9-부터는 요한 사도가 본 여러 환상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1절에 「하나님이 속히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아마 많은 오해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기는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리라. 또 반드시 속히 될 일, 그렇게 했을 때 「속히」하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시간적으로만 이해를 해서 보통 이런 종말론에 대한 개념만 나오면은 예수님 언제 오시는가 날자를 계산하고 그런 것들이 대단히 유행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시간 개념을 갖고 말씀하지를 않고 시기 개념, 시대 개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들이 종말의 시대, 즉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다른 것은 없고 주님의 재림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주님의 재림 앞에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는 속히 오시리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무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과 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그런 것이지 다른 것이 그 안에 끼어들지 않고 또 그것으로 마지막입니다. 그런 의미로 속히 오시리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가령 우리들이 아침을 먹었으면, 이것은 비유는 잘맞지 않습니다마는 밥만 먹는 사람은 그 다음에 점심 먹을 일만 남았지요. 그러니까 그때쯤 점심 준비를 위한 시장을 보러 다닐 것이어요. 중국 사람들이 그런다고 그래요. 아침 먹으면 그 다음 점심은 무엇을 먹을꼬, 하여튼 중국 사람들은 의자 빼놓고는 전부 요리 재료라고 그러니까 그런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먹는 사람은. 그런데 가령 구약 시대는 세상 끝날 했을 때 예수님 오심을 기대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셨을 때 그들이 그의 오심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이제 교회는 예수님이 오심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예수의 나타나심 뿐입니다. 그런 의미로 속히 오시리라.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간이나 길게 계산하고 언제쯤 오시는가, 그때 쯤 오시면 내가 목욕하고 준비하리라. 그것은 속히 오시리라는 개념하고는 맞는 삶이 아닙니다. 이제 9절부터는 요한이 보았던 이런저런 환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지금 19절을 보면은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재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해서 지금 환상을 세 부분으로 말하지요. 네 본 것, 이제 있는 일, 장차 있는 일. 물론 이런 것은 한꺼번에 묶어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래서 네 본 것은 당금 오늘 강론할 9절 이하에 예수님에 대한 환상입니다. 여기 환상을 본 때와 또는 장소, 기록한 사람을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에서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이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고, 이 환상을 기록한 사람은 요한인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해서 밧모라는 섬에 있었다고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날」은 이제 사도시대 후기에 들어가면 통상적으로 주 예수의 날, 예수의 부활의 날, 교회가 저기적으로 예배하는 그런 날이 되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말씀을 맡기셨는데,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같을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 증거는 하나님께서 곧 자기를 세상에 왕으로 보내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께서 증거하셨다는 말이나, 예수님을 증거하다는 말이나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떠튼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그것 때문에 그는 밧모라는 섬에 귀양갔습니다. 여기 요한계시록의 내용대로 하면은 당시에는 로마 정권 밑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당시 로마 정권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는 그런 국가였습니다. 대개 고대 국가들이 다 그렇습니다마는 로마 정권도 그렇게 돼 있어서 로마의 황제 씨저 곧 주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는 그런 왕입니다. 그래서 로마 정권이 당시 그 제국을 통치했을 때 여러 민족에게 각각 종교의 자유를 주고 그렇게 다르시면서도 로마의 국가신인 황제만큼은 섬기도록 그렇게 요구했고 그 일 때문에 교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를 주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분만 왕이라고 고백하지 다른 모든 주들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로마 정권에서는 마치 반국가적인 죄를 짓는 것처럼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교회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내용으로 보았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당시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도 그렇고 이 계시록에서도 예수의 통치권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곧 그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다. 모든 만국 백성의 주가 되셨다. 하는 그런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은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은 에수님에 대한 이름 소개에서도 지난 번에 우리가 5절을 보면은 「땅에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름의 소개이기 때문에 이 예수의 증거도 예수의 주되심, 그가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다. 그런 증거 때문에 당시 로마의 평화, 로마 황제 밑에서 온 세계를 다스렸던 온 그런 정권 밑에서 핍박을 받은 것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은 당시 처해있던 상황이나 또는 계시록의 문맥을 보아서도 합당할줄로 압니다.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밧모라하는 섬에 귀양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주의 날에 교회를 인도할 수는 없었어도 그는 주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아마 거기서 경배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귀양가지 안했으면 그의 교인들과 함께 주되신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교회를 인도하지 못하고 외로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그 나라를 생각했을 때 그의 교회를 두고 당연히 근심했을 것인데 그때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다 하나님의 음성, 또는 천사들의 음성, 그런 하늘에 속한 권세들의 음성을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보통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요한은 자기를 설명하기를 나 요한은 너희들의 형제인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교회에 이 편지를 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핍박을 받고있고 요한도 핍박을 받어서 밧모라 하는 섬에 귀양가 있는데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그런다고 자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인도했던 요한이 자기도 고난받는 형제로서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 하는 말은 그것이 신약 교회의 특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셔서 세상을 권세있기 통치해도 예수님께서 폐해서 쫓겨난 사탄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바다 모레 끝에 서서 땅에 있는 그의 교회들을 핍박하기 때문에 교회에 환난이 그 본질이라고 여러번 설명을 했습니다. 세상이 애굽 교회요 그들의 주를 거역한 교회라고 그렇게 계시록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이 주님을 귀신의 대장이라고 죽였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백성들도 그렇게 핍박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은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될 것이라고 그렇게 바울 사도도 교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을 당하는가, 그런 문제로 직접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면은 환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어려운 일이 없으면은 만사형통하고 감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경 계시록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주제는 싸움이어요. 이 세상 나라가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기까지는 교회는 세상에 있으면서 고난을 받고 주님은 하늘의 권세들을 동원해서 싸우시는 것으로 그렇게 계시록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다스리기 전까지는 교회는 환난을 받고 있는 것이 그 특질이라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처럼 로마 정권 밑에서 핍박을 받는 경우들도 있고 우리 나라 초기 교회처럼 일제 밑에서 고난을 받는 그런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환난 그러면은 그런 무시무시한 장면만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이처럼 편안하지마는 그리고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어서 성경을 다 읽어 두어야 나중에 큰 핍박을 당할 때 우리가 어디 통조림 갖고 굴 속에 숨어서 못읽을 때도 이겨낼 것이 아니냐. 그렇게 꼭 무협지 같은 흥미진진한 사건만 환난으로 생각하고 지금은 환난으로 시대로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계시록에서는 여인이 붉은 짐승을 타고 손에는 금잔을 들었다. 그리고 거기는 취하는 포도주를 가득 담았다. 그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런 일에 속고 있는 것이어요. 세상이 주님 앞에 복종하기 전까지는 교회는 주님을 증거하도록 세상에 남긴바 되었고 세상이 주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교회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개인의 형편을 따라서 핍박이냐 감사냐 이렇게 생각하니까 자기의 일이 잘 풀리면 세상은 주님을 모독해도 나만 좋으면 우리들은 감격하고 기뻐하고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복종치 않는 세상에 대해서 주님께서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다스리도록까지 주님도 싸우시고 교회도 싸우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여기서 환난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의미로는 결단코 세상의 친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번 그런 비유를 들었지마는 아무리 남편이 나에게 잘해 주어도 우리 친정 아버지 말만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거나 잠자버리면 그 여자는 그 남편하고 안살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에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웃어버리는 데 나는 칭찬하거든요. 아, 주께 영광이구나.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칭찬하니 곳 예수 믿겠구나.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고 마음에 고통이나 슬품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큰 맹점이어요. 오늘날은 심지어 자기가 편안한 것이 지혜입니다. 형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만일에 자기에게만 그런 불똥이 안떨어지면은 그는 감사하고 저 사람은 얼만큼 어리석어서 잘못해갖고 저런 꼴을 당하는고. 그리고 만일에 환난을 당한 형제가 한 가지 헛점이 있으면은 그런 헛점이 있으니 그런 꼴을 당해도 싸, 하면서 자기가 고난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변명해 버리고 자기 양심을 위로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보다 못하다 그말이지요. 동네 조금만 꼬마들도 집에서는 형에게 이겨도 나가서 만약에 나가서 일이 벌어지면은 조그만 동생도 형을 때리는 사람하고 싸우고 그래요. 자기 형이 두들겨 맞으니까 저는 붙어 보았자 인데 그래도 못견디는 것이어요.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아, 우리가 아무리 경상도 전라도 지역감정이 있다고 해도 일본하고 권투만 해도 열나버리지요. 축구만 해도 그러고. 그래서 외국에 가면 다 애국자된다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들은 어쩐 일인지 나만 일이 없으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심지어 우리 나라 교회가 일제 신사참배 때 핍박을 받으면은 챙피한 말로 우리 목사들이 양떼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신사참배 안하는 교인들을 전부 고발했지 안해요. 그리고도 나는 양떼를 지켰다고 말할 만큼 교회들이 몹시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구약 개념을 갖고 있어서 자기만 평안하면 복이고 전부 개인 풀레이를 해요. 교회가 주님의 나라요 주님의 몸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치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렇게 한 몸이요 한 나라인데도 우리의 왕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고 거절을 받는데도 우리들이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이 자기 펑안으로 만족하면은 그런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거듭 말씀드립니다마는 만일에 요한 계시록의 장차 될 일이라는 것이 지금 요한 계시록을 받고 있는 교회와 직접 상관이 없고 한 21세기 쯤 지나서 나타날 일 같으면은 그것이 그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필요가 없지요. 당시 그들이 받고 있는 환난과 장차 나타날 환난이 같기 때문에 장차 나타날 일을 펼쳐 보이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받았을 때 초대교회가 당한 환난이나 예수님 재림 때 나타날 더 큰 환난이나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환난이 같은 환난이 아니면은 그것은 우리가 함께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들이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분별하셔야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전에는 교회에 나오면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고 그런 식으로 완전히 이원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의 종이 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거룩하지 않느냐? 심지어 자기가 번 돈도 교회에 헌금한 것은 거룩하고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은 별볼일 없고, 더구나 교회에서 먹는 성찬식은 거룩하고 집에서 먹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은 별볼일 없고, 이런 식으로 구분한데 대해서는 우리들이 극렬하게 항의를 해야 됩니다. 우리들은 주님게서 만주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만물은 거룩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릴 책임이 먼저 먼저 부름받은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이원론 구조는 맞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싸운다는 개념으로는 그들이 아직 복종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는 우리들이 적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될 것인데 우리들은 한 쪽은 잘 이해를 해서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났는데도 그것이 우리 마음의 정욕과 연합해 가지고 그저 자기 좋은 것이 주님 좋은 것이고 자기 편한 것이 주님 편한 것이어서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세상에서 조그만 일만 생기면은 먼저 주일을 빠지는 것이 자유에요. 왜, 주일은 다음에도 오니까. 우리들은 중요한 어른하고 약속만 해놓아도 다른 약속들은 다 뺄 것이어요. 그리고 앞에 있는 약속도 취소하고 뒤에 있는 약속으로 돌이킬 것이어요. 그래도 우리들은 얼만큼 신사가 되었는지 먼저 약속이 있으면은 교회는 정기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모이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 그렇게 준비가되었는데도 조금만 약속이 있으면 다 그쪽으로 빠져요. 물론 여러분의 형편이 그러면은 지금 시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구약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의 재판장이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분별력이 없이 아무런 생각없이 자기 편할대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되겠는가. 그러면에서는 계시록에서 환난이 무엇인지 우리들이 읽으면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지셔야 되겠습니다.
어떠튼 환난받고 있는 사도가 환난받고 있는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나팔 소리 같은 큰음성으로 부르셨고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까 이런저런 환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니 이런 환상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환상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문맥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은 이런 환상들은 항상 모든 성경들은 구약을 토대로 하고 있고 특별히 계약의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묵시언어들을 많이 사용해서 장차 나타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언어가 직접적으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환상은 우리들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런 일이지요. 방금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요한 사도가 처해있는 위치, 그리고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 그것을 따라 그것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이 환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문맥이어요. 다른 성경을 보았을 때도 그런 것은 사실입니다. 가령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 나타나면은 출애굽기 3장에 모세에게 나타났겠지요. 떨기나무 가운데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분은 왜 그러냐 하면 장차 시내산 불꽃 가운데 강림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셔서 경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그러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네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내가 너를 부른 증거가 무엇이냐? 내 백성이 이 산에서 나를 경배하게 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어요. 거기서는 싸우고 말고 그런 것 보다도 거룩하신 분, 자기 백성을 만나시나 자기 백성을 불사르지 않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대면하신 분, 그러기 때문에 떨기나무도 타지를 안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 형상을 보이신 방법이지요. 그리고 다른 데서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가끔 보이신 때가 있습니다마는 계시록과 더 관계가 있는 본문들은 교회가 한참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보이신 그런 방법일 것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경우가 에스겔서와 다니엘서가 될 것입니다. 가령 에스겔서 같으면 1장에 하나님의 환상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환상은 간단하게 나옵니다. 하늘에 궁창이 있고 간단하게 나오고, 하늘 밑에 다른 환상이 보이는데 네 구룹 천사들이 있어요. 사자 모양 그리고 소, 독수리 모양 사람 모양, 그런 모양으로 나오는데 한 구룹에 네 얼굴이 있고 바퀴가 두루두루 발렸고, 바퀴에는 불이 번쩍거리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리고 이 바퀴가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는 하나님의 벙거입니다. 당시는 바벨론 군대에게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서 짓밟혔기 때문에 에스겔이 받은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은 그런 천사들을 부리는 그런 왕으로서 나타나 있고 그리고 위를 보니까 거기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도 강조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보다도 하나님이 부리는 군대에요. 그것은 바벨론 군대보다 훨씬 강력한 군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에스겔에게 나타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여기 계시록에 있는 환상은 그 환상보다는 다니엘서 7장에 있는 환상과 더 맞아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은 주가 다니엘서입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바벨론 궁전에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서 돌아가면은 그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일을 두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런 환상들을보였던 것이지요. 물론 그러기 전에도 환상을 보였습니다마는 바벨론 임금이 환상을 보여주었을 때는 금신상으로 나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머리는 금, 가숨은 은, 배는 놋, 다리는 철,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돌이 하늘에서 날아오더니 그 신상을 치니까 다 무너지고 그 돌만 태산을 이루었다. 그것을 다니엘이 설명을 해주었지요. 세상 나라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보았을 때는 그런 금 신상, 인격화된 인격으로 아주 찬란한 금속들로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강력한 금속, 찬란한 금속으로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그 환상을 다시 보여주었을 때는 짐승으로 보여주었지요. 그렇게 했을 때 이 짐승의 나라와 그리고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일을 나타낸 것이 다니엘서인데 바로 그 상을 쓰고 있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보좌는 다니엘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보좌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보좌는 불입니다. 그 보좌에 바퀴가 있어요. 보좌에 앉은 분이 계시는 데 항상 옛적부터 계신분이 있는데 옷이 하얗고 머리털이 흰 눈같고 양털같고 그런 분이셔요. 거기서 눈이 어쩌니 입이 어쩌니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하여튼 옷이 하얗고 머리가 하얗고 그런 분이시고 그리고 보좌에 바퀴가 있는 바퀴는 불이고 보좌 밑에서 불이 흐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 앞에 나라를 받을려고 나타나시는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그분이 나타나서 나라를 받았는데 그 나라는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그것이 다니엘에게 보여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승리였습니다. 그 상을 지금 계시록에서는 그대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러면 다니엘서에서 보면 그분은 하나님이셔요. 그리고 그 앞에 나라를 상속받으러 가신 분은 구름타고 나타나신 인자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하나님의 상을 인자의 상에다 그대로 붙이고 있습니다. 인자 같은 이. 물론 이 인자 같은 이는 계시록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표현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닷 가에 서셨을 때 고기잡던 제자들이 인자 같은 이를 거기서 보았거든요. 부활하신 예수를. 그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분명히 부활하신 에수님을 말하고 그리고 다니엘서와 연결했을 때는 그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 언어들을 여기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 나타난 묘사들은 구약에는 없는 묘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순히 대적과 싸우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친히 교회에 임하셔서 교회 안에 있는 죄악을 정결케 하시는 분으로 계시록은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보면은 내가 음성을 알아 보려고 몸을 돌이키니까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그랬고. 제일 마지막에 본 것은 무엇이냐?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핵심은 무엇이냐?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 그분의 손에 일곱 별이 붙들려 있어요. 이것이 핵심이어요. 그러니까 인자 같은 이는 어디에 계십니까?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에 임해 계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분명히 죄와 싸우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이방의 권세와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들어온 죄악들을 정결케 하는 분으로 싸우시는 것이지 이방의 군대와 싸우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분의 모습은 발에 바퀴가 달린 분, 옛날에는 병거가 제일로 강력한 무기 아닙니까? 철 병거가 있으면은 어지간한 사람은 그 군대를 치지를 못했습니다. 강력한 군대에요. 그러니까 이분 발 밑에는 바퀴가 달려느니 그런 말은 않치요. 가령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교회 안에 거짓된 자들을 치는 검이지 이것으로 이방을 치는 것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와 싸우는 것은 하늘에 사령부를 구성하시고 그가 천사들을 보내시고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을 쏟음으로 아주 초자연적인 심판을 하시는 분으로 계시록은 묘사하지 병거타고 싸우시는 분으로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핵심은 싸우시는 분은 분명히 싸우시는 분이신데 누구냐 하면은, 강조점은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십니다. 구약에서 일곱 촛대가 있으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입니다. 거기서는 제사장이 거느리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여기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 있는데 인지 같으신 이가 일곱 별을 붙들고 거기 다니신다. 이것이 이 환상의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러니 일곱 교회를 하나님의 성소로 묘사하고 있고 그리고 일곱 촛대를 오른 손에 붙드신 인자 같은 이가 거기를 거니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있고 일곱 별은 그가 어떻게 권세있게 붙드시는가, 어떻게 확실하게 붙드시는가, 어떤 권세도 그의 별을 빼앗을 수 없는가, 그런 확실한 보장이 강조지 싸우는 무기가 강조는 아닙니다. 여기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그리고 발은 빛난 놋쇠 같은 이, 그 죄와 싸우시는 이는 주로 그쪽에다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일곱 별을 붙들었다 하는 것은 어떻게 진리를 붙들고 진리를 사랑하는 교회를 붙드시는가, 처음 에베소 방식으로 묘사하지 싸우는 쪽에다가는 강조를 하고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왼손으로는 방패 오른손으로는 검 하는 식으로 주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싸우신다고 하는 것은 신학상은 가능한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이 문맥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어떻게 주님께서 교회 안에 거니시며 그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견고히 붙드시는가, 아무도 교회를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위로하시고 붙드시는가, 그것이 이 1장의 문맥이 되어야 더 옳을 것입니다. 여기 음성을 들었는데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거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은 여기 첫 환상에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그리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리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희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인 것을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런 해석이 보통 나뉘고 있습니다. 물론 양쪽 해석다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것을 그냥 왕의 옷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고, 한 가지는 이것을 제사장의 옷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있고, 두 방법입니다. 이것은 양쪽 다 가능한 것은 예수님은 왕이신데 제사장 왕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도 양쪽 다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강조점이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의 통치권에다 강조하기 때문에 제사장 의복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 문맥에 더 순리로울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물론 제사장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슴에 우림과 둠밈이 있고 가슴 가리게가 있지요. 그렇게 하면 이 모습과 더 맞아들어가기는 하지마는 계시록의 강조점이 예수의 통치권에다 두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의 의복보다는 관직에 취임한 사람은 긴 옷을 입고 가슴에 띠를 띱니다. 그것은 이사야서 21장을 보면은 엘리야김에게 다윗왕조를 다스릴 통치권을 주겠다 했을 때 그에게 긴 옷을 입히고 그리고 띠를 띠어서 다윗의 열쇠를 주어서 그 집을 치리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긴 옷은 구약에서는 왕에 옷에 대해서는 실은 언급한 데가 별로 없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그렇게 언급하지마는 왕의 옷을 언급한 곳이 없고 방금 말한 이사야서 22장의 그 엘리야김이 다윗왕조를 치리하는 고관으로 맡기게 하였을 때 그런 옷을 입히고 띠를 띠게 하겠다고 했어도 왕에게는 그런 이야기는 없지요. 오히려 구약에서 긴옷을 입은 분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셔요. 가령 이사야 6장을 보면은 이사야가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경배하고 있지요. 거기 가득찬 옷이 있어요. 그리고 아까 보았던 다니엘서 7장에도 하나님의 옷자락이 희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왕으로 계시는 하나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 그런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좋겠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이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보좌는 거룩한 불이요 흽니다. 옷도 희고 그리고 긴 옷으로 가득차 있고, 그리고 머리 털도 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앞에 누구도 가까이 가지를 못하겠지요.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또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뒤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한 내용을 보면 불꽃 같은 분은 외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관찰하시는 그런 분으로 불꽃 같고 하는 말이지요. 「또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놋쇠 같다는 말이지요. 이 발에 밟히면은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구약에서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힘있는 그런 음성이지요. 그리고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 좌우에 날선 검이 있고, 오른 손에 일곱 별, 뒤에서 설명하기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 그렇게 해서 교회를 먹이고 있는 대표자들에 대한 칭호가 되겠습니다.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에는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처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신 그분, 그분이 좌우에 날선 검이 입에서 나옵니다. 말씀의 검이겠지요. 그것으로 모든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싸우실 것입니다. 누구십니까?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신 분, 그의 사자들을 붙드시고 그의 입의 말씀으로 모든 죄들을 정결케 하신 분으로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해보다 더 찬란한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왕, 인가 같으신 분은 거기 계시다. 이분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으실 분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인자로 그렇게 요한복음에서는 거듭거듭 말씀했습니다. 그분이 곧 교회에 계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앞에 엎들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첨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그분을 보고는 발앞에 엎드려서 죽은자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은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환상을 보았다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보고는 죽은자 같이 되었다 그래요. 이런 것은 전부 구약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은, 기도를 많이 하면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에게 주셨는데 그가 천사들을 그 종 요한에게 보냈고, 요한이 교회에 편지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그런 말이지 개인의 경건성을 묘사할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고 그가 천사들을 통해서 사도에게 주고, 사도들이 교회에 준 것처럼 말하자면 계시의 기관으로 사도들의 독특한 체험이지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에 감동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하셔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고는 죽은자 같이 그렇게 엎드려졌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면은 죽은자 처럼 엎드러지고 그것 때문에 너무 몸에 힘이 빠져 가지고 생명이 자기 속에 없는 것 같고 몇일을 시름시름 앓고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도 그처럼 죽은자처럼 쓸어져 있는 그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오루만지면서 일어나라. 그리고 그 입술을 만지면서 내가 너를 정결케 하노라. 네 본 것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로해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그런 상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떠튼 하나님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죽어요. 보면 죽습니다.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타나셔서 오른손, 오른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만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 말아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를 위로하는 그런 음성입니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그렇게 그를 만지셨다는 말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축복한 것입니다.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만지셨으니 그것은 그를 강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신 말씀을 보면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여기 만지신 것과 그리고 만지시면서 하신 말씀은 같은 내용이 될 것입니다. 만지시면서 너 죽어라. 그러면 이것은 안맞는 말이지요. 만지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만지신 것과 같은 말이 되겠지요. 하신 말씀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리 그러므로 네 본 것을 밑에처럼 일곱 교회에 보내라. 이런 말이되겠지요.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 교회에 좌정하여 계신 주님은 요한 사도를 만지면서 두려워 말아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여기서 처음이요 나중은 하나님께 속한 언어였습니다. 알파와 오매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라. 그리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것은 하나님에 그런 소개였는데 그 말을 자기에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개념에서 항상 하나님은 자기 앞에 있는 영을 그 종들에게 보내서 자기 일을 시키시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 하나님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이요 나중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처음도 그분이시오 나중도 그분이시다. 그분은 항상 계신 분이십니다. 존재론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자로서 자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십니까?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그는 전에 죽었었는데 지금 살아계신다고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는 역사를 완성하신 분이 되겠습니다. 그는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셨고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사망과 음부의 열쇠 통치하는 권세가 그에게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해서 나중을 가져오십니까?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살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음부의 열쇠가 그 손에 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해서 죄의 권세를 끝내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 그가 부활해서 얻은 그런 권세의 나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장자가 되신 그런 나라를 만드시는 그런 분으로 역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교회를 대표한 요한 사도를 만지면서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아니냐. 너는 내 오른 손의 권능으로 일어나거라. 그런 방식으로 죽은자처럼 쓰러져 있는 요한 사도를 오루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지금 자기가 보여준 것을 말하자면 교회에 말하라. 그말이지요. 이 주님은 누구십니까? 교회를 성소 삼으셔서 하나님되신 인자가 거느리십니다. 그분은 죽었다가 사신 분이시오 교회의 머리십니다. 그분이 일곱 별을 그 오른손에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사신분,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 그분의 손에서 그 사자들을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거느리십니다. 빛난 주석같은 발로 거느리십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교회는 거룩하게 되고 그분이 성소에서 거니르니 교회도 거룩해야 되고 그렇게 하라고 일곱 교회에 계속해서 교회에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보이신 그런 환상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계시고 교회는 지금도 땅에 있습니다. 아직도 만민은 주님 앞에 복종하지를 않고 지금도 죽음이 세상의 권세나 되는 것처럼 죽음이 모든 것을 위협합니다. 사람들은 한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처럼 죽을까 두려워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기 쉽습니다. 초대교회만 그런 죽음의 권세로 핍박했던 것이 아니라 많은 그런 핍박들을 받았습니다. 지금 교회는 이처럼 땅에 있어서 주님께서 오셔서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통치하도록까지 교회도 그런 핍박 아래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요한계시록을 받고 있는 교회들처럼 그런 극악한 핍박은 받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어떠튼 핍박 아래 있습니다. 그것이 칼의 권세로든지 그렇지 않으면 찬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금잔을 들고 오든지 어떠튼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우리는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신 성소입니다. 인자 같은 이,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그분, 그리고 때가 되매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니셨고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그가 계신 처소로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영원히 목자장이 되셔서 인도하신 이, 그분이 교회에 계시는 데 구약의 상으로 설명하기를 그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 들어가면은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이 정결해야 됩니다. 구약 때는 외적인 정결법을 가지고 들어갔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됩니다. 구약 같으면 천사들도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우고 두 날래로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거룩을 찬양해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교회에 좌정해 계십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촛대 사이에 계시지 않고 휘장으로 가리우고 지성소에 계셨습니다. 촛대 사이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은 있었어도 거기 하나님은 계시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표자,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신 분, 그리고 죽음의 세계로부터 일어나셔서 새 생명의 머리가 되신 그분, 그분은 만왕의 왕이신대 그분이 교회의 대표시며 그분이 교회 안에 거닐르고 계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성소입니다. 그분께서 교회을 붙들고 계시고 그런데 그분은 불꽃 같은 눈을 가지고 계시고 빛난 주석같은 발을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 그분의 눈에서 자기 부끄러운 발을 숨길 사람이 있고 누가 그분의 권세의 발에서 자기 심판을 그렇게 영원할 사람이 있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찌르는 칼 같아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거짓된 모든 종들과 싸우시리라고 그렇게 일곱 교회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됩니다. 세상과의 싸움, 지금도 세상에 악한 대적이 있다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고 세상과 친구가 되어서 금잔을 들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런데 아부한든지 그렇지 않으면 생존권을 가질려고 666 계시록 13장에 표현한 것처럼 짐승의 표를 받아서 그 종이 되어서 살려고 하든지 그런 것 때문에 교회는 멸망하기 쉽습니다. 교회가 직접적으로 세상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안해도 세상에 아름다운 모습을 들고 교회를 유혹해서 그런 것이 마치 죄가 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당연한 지혜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교회의 흰옷을 더럽히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옷이 희고 하나님의 머리가 흰 양털처럼 된 것처럼 교회도 그 옷을 빨아서 그 옷을 희게 해야만 그분 앞에 설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분 앞에 숨김이 없이 마음을 정결케 하면 불꽃 같은 분앞에서 그와 함께 서며 그와 함께 거니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계시록 강론을 통해서 그 점에 항상 초점을 맞추어야 되겠습니다. 악한 세상을 분별하는 것도 우리의 거룩을 지키고 우리 중에 임해 계신분, 우리를 권능의 손으로 붙들고 계신분,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 세상과 구별하는 것이지 우리들은 이미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다, 그런 것을 가르칠려고 계시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파는 자유주의를 공격하느라고 자기 죄를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경계하느라고 자기의 죄를 모릅니다. 부끄러운 말로 우리 목사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느라고 자기의 죄를 모르고 먼저 믿는 사람은 새로 믿는 사람을 전도하느라고 자기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문제는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새 시대의 문제는 교회가 어떻게 거룩하게 세상을 대처하겠는가, 그 일을 위해서 세상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냥 우리는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니까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가 알아보자, 그런 식으로 세상을 분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일곱 교회에 대해서 칭찬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시고 이기는 자들은 끝까지 복음을 붙들은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영원한 권세를 얻으리라고 그렇게 거듭거듭 먼저 교회를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세처럼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권세처럼 힘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의 힘은 부활하신 예수 뿐입니다. 세상은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지마는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이시오 죽었다가 사신 분이셔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그분이 교회 안에 거닐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를 이길 수 없으며 교회도 그들의 죄를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오셔서 그 영광의 얼굴을 보도록까지 주님 오셔서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고 교회로 그 영광을 상속받오록 하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도리를 끝까지 붙드십시다. 요한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귀양갔고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싸움이 있습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도리,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만 세상의 구주십니다. 그분 외에는 참 하나님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복종하지 아니하고 굴복하지 아니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신령한 분별력을 가지고 악한 세대를 분별하고 우리 믿음의 정결함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신실한 군병으로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세상을 사랑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이제나타내셔서 주의 교회를 필고 값주고 사시고, 주의 교회를 거룩한 성소 삼으셔서 우리 중에 임하셔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봉사할 수 있는 복된 나라로 삼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크신 은혜를 교회에 주셔서 이처럼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데도 세상은 운동선수나 정치가들은 사랑해도 그리고 이런저런 탈렌트들은 사랑해도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시고 만국을 통치하시는 죽었다가 사신 분은 찬양하지를 않습니다. 지금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 때문에 지도자들을 찾아도 참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주님에 대해서는 세상은 구하지도 않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런 악한 세대에 교회를 남기셔서 주의 영광을 봉사할 수 있도록 이처럼 존귀한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항상 주님 앞에서는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 자신들을 헌신하는 백성들이 되게 해주시옵고,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더욱 교회를 온전케 해주시옵소서. 참으로 교회가 땅에 있어도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오른 손에 붙드신 것처럼 교회의 실체는 하늘에 속한 줄을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 품안에 있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어서 하늘의 권세를 봉사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셨사오니 우리가 결단코 땅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의 군병으로서 주님을 신실히 증거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복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은혜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실려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시고 또 우리를 사랑해서 부활하신 주님의 상으로 우리 교회를 불러 모으셔서 주님의 살과 필의 교제에 참여하는 몸의 교제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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