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24:1-27

찬미예수님 2025. 9. 30. 20:13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24:1-27

 

바울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때는 첫번 오순절때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 열매를 가지고 올라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그 열매를 거절하고 바울을 잡아서 이처럼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바울이 재판에서 제일 처음 했던 증거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거했던 내용입니다. 거기서 그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했고 그는 아무 죄도 없었는데도 그들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이방의 권세를 통해 바울을 보호하고 이제 24장에서는 대제사장이 정식적인 재판절차를 총독에게 제시하고 이방 총독 앞에서 유대인의 고소를 받아서 바울이 변호하는 기사입니다. 마치 예수를 성전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자기를 증거했고 또 그가 잡혀서 가야바 안나스 대제사장 앞에서 자기를 증거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배교 죽여야 마땅하다는 그들의 판결에 따라서 빌라도와 헤롯 또 빌라도 이처럼 옮겨다니면서 재판을 받았지요. 이방재판관들도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의 배교를 따라서 그들에게 아부해서 그를 재판정에 내어주고 결국 십자가에 죽였지요. 바로 그런 죄의 역사가 인자를 거역한 유대인과 세상은 인자의 영을 다라 증거하는 바울에 대해서 그런 동일한 절차를 밟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를 끝까지 채워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를 거역하고는 사함을 받되 성령을 거역하고는 사함이 없다고 말했는데 성령을 따라 증거하는 주님의 증거를 그들은 거역하고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옮겨서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가노라 하는 유대인의 버림과 하나님께서 유대인은 구원역사에서 배제되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그 나라가 땅끝까지 주님오시도록 까지 진행되는 사실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24장은 유대인의 정식 고소를 따라 총독 앞에서 바울이 자기를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어떻든 이 편지의 제 1번 독자는 데오빌로여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의 관원입니다. 그 관원에게 이처럼 편지함으로 부활하신 주예수께서 친히 자기 종들을 통해서 증거하여 주님께서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바로 주님의 영을 따라서 증거하는 바울도 세상에서 정죄될 수 없지만 그들의 악수를 따라서 배척을 받았고 그의 무죄함을 알고도 세상은 하나님의 종들을 옥중에 가둠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역사를 이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24장에 보면 닷세 후에~고소하니라’(1) 여기서 변사 더둘로 하면 이방인 중에서 능숙한 변호사 한명을 채용한 것같지요.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의 공적인 고소이기 때문에 이것은 공적인 재판절차로 진행이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피고 바울을 그 앞에 두고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여기보면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3,4) 여기서는 총동의 재판에 대한 합법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보다도 아부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그가 얼마나 통치를 잘했는가 또 이민족이 민족적으로 얼마나 감사하는가 하는 말을 하면서 고소내용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역사가들의 증언들을 보면 벨릭스가 통치했을때는 한 6년쯤 통치를 했는데 대단히 폭정을 행했고 그래서 유대나라가 굉장히 뒤숭숭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4-8) 여기서 그들이 고소한 내용은 주로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첫째,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자다. 둘째,나사렜 이단의 괴수로 다른 파다.로마 정권에서 인정하고 있는 교파가 아니다.세째,유대인의 성전을 더럽게 했다. 이 세가지의 항목으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염병이라.온 세상을 소요케 하고 사망을 가져오는 자로 그는 마땅히 제거할 자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죄,나사렜파,로마정권이 인정하고 있지않는 파,성전을 더럽게 한다는 이 세가지로 고소를 했습니다. 바울의 변명을 보십시다.10절 부터 보면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3) 이제 바울의 변호는 그가 합법적인 재판을 받는데서 합당한 판결을 구하는 자세로 거기 서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통치를 잘했는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든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이처럼 합법적인 판결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합당하게 변호하는 때에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거기서 그는 괜히 유대인들을 이방인 앞에서 부끄럽게 송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가 합법한 재판정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에 대해서 판결을 받는데 대해서 양심의 꺼림을 갖지 않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 가서 로마에 있는 민족들을 불러놓고 할 때에도 내가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법한 판결을 구하는 문제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방인 앞에서 자기 민족에 대한 종교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변호하는데 대해서 그가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어떻든 그가 합법적인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은 2334절을 보면 어느 영지 사람이냐 길리기아 사람이라 해서 그래서 헤롯 궁에 지키라고 명했지요. 길리기아는 큰 성이고 벨릭스는 길리기아와 수리아 총독으로 그렇게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출신이 자기의 권한아래 있는 길리기아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판결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바울이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먼저는 소요죄,법적인 이방인 총독도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죄목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에 본질적인 문제 그가 왜 자기 민족에게 이처럼 핍박을 받으면서 자기민족에 대항해서 산헤드린 공회가 자기를 고소한데 대항해서 자기를 변호할 수 밖에 없는가 말하자면 종교적인 문제를 그 다음에 변호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당신이~12일 밖에 못되었고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지 오순절로 부터 자기가 재판정에 설 때까지 12일 쯤 된 것이지요. 그 동안에 자기가 한 일이 그가 예루살렘 성전 회당 성중에서든지 논쟁을 벌렸다든지 또는 무리들을 소동케 했다든지 하는 것이 있으면 당신에게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라. 그러면 그가 제일 처음 올라와서 야고보를 만났지요. 그 다음에 결례를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도 서원에 참여해서 성전에 참여했지요. 그 다음날 잡혔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한 일은 무엇이 없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변호한 일도 없고 성전 성 중에서든지 공중에 서서 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야고보와 몇몇 형제들을 만나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만나면 이런저런 일이 있을 것이라 해서 그런 오해를 면하려고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에 자기를 조정해서 성전에 들어가서 유대인의 결례의 예식에 돈을 대는 방향으로 했고 자기도 유대인의 율법의식에 참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가 공석에 나서서 무엇을 한 적도 없고 시간도 짧고 해서 한 일이 없습니다. 그 당시 가장 큰 죄가 소요죄였습니다. 로마의 평화 로마의 잘 조직된 법과 군대 아래서 세계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일을 신속히 정리하기 위해서 요새같으면 고속도로를 닦아서 로마군인들이 신속히 어디든지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여기저기 총독부를 두고 그렇게 해서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요죄가 로마정권에 대해서는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에 있어서 그는 어떤 질서에도 어긋난 일이 없다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또 그다음에 이것을 당신께 고하리이다이제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그들의 곳는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성전을 더럽혔다. 성전을 더럽혀도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서 침해하면 그것도 일종의 소요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두가지 소요의 문제에 대해 증거를 들어서 자기의 무죄를 변호하고있고 그 다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하는데 있어서 자기를 본격적으로 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더욱 세심한 설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유대인 종교는 로마정권 밑에서 허락을 받고 있는데 나사렛파 이것은 새로운 파여서 국가적인 허락이 있어야 하거든요.그 일에 대해서 이것이 새로운 파가 아니라 본래적으로 유대인에게 증거했던 그 증거가 이제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서 내가 조상들이 소망했던 소망,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악인들의 부활을 약속하셨는데 바로 주 예수의 부활 안에서 그 일이 성취되었다고 그는 이처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받고 사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유대인들의 송사에 대해서 그의 무죄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그렇게 함으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데오빌로 그는 이방인이지요. 그도 이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예수께서 자기 종을 통해서 증거함이 그냥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천지창조 이래로 자기 백성중에서 친히 자기를 증거하시고 특별히 모세제도 아래서 친히 자기의 은혜를 증거했던 주님의 은혜가 바로 여기 주 예수의 부활 안에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바로 이 일 때문에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양심의 꺼리낌 없이 어떻게 사는가를 설명함으로 데오빌로도 이 복음 가운데 확실히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눅.행은 그 본래적인 성격 자체가 이방인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14절 부터입니다.‘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없기를 힘쓰노라’(16)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들을 훼방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은혜를 따라서 어떻게 한 형제로 한 형제를 구제하려 왔고 예배하러 왔는가를 더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구래서 자기가 섬기는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를 이단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새로운 파로서 이단이,아니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조상의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은혜를 계시하셨는데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믿으며,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에 기록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언약백성에게 허락하신 소망의 일입니다. 그 소망의 일은 짐승의 피나 사람의 제사장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피로 그들의 피가 온전히 정결케 되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설 수 있는 소망에 대한 문제이지요. 그래서 소망은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여기서 부활을 최종적인 목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활에 대한 문제는 선지서의 처음에 율법의 처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제도가 실은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말하자면 부활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말하는 것인데 음식뭉을 먹을 때까지라도 일부의 재물을 먹고 나머지는 다 먹지 못하도록 했을때 그런데도 그 일부의 재물까지라도 스스로 죽으면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것까지라도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전체를 준다는 약속아래 있고 이 먹을 것까지라도 새로운 질서로 주기 전까지는 거기에는 여전히 죽음의 심판의 독이 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 일부를 표징적으로 주시는 것은 표일 뿐아니라 약속의 언어여서 그것은 충분한 것을 이미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까지라고 이미 부활의 소망을 말하고 잇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하면 진 밖으로 쫒겨납니다. 물로 씻고 다시 들어옵니다.그것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출생을 말하는 것이고 심지어 할례까지라도 예생명의 단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계산되는 것은 거기 새로운 출생을 말하고 잇는 것입니다. 거기 부활의 소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모든 것은 새로운 새생명의 질서 부활의 소망을 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무렵들에 보면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그 부활에 대한 문제들이 더 확실히 증거되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에스겔서 같은 데보면 큰 마른 뼈의 군대가 산 군대가 되고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생 새로운 건국의 문제들을 쭉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특별히 물로 뿌리리라 물로 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주시리라 하는 사실에 대해서 구약의 물부림이 표상하고 잇는 영의 새로움 새로운 출생에 대한 문제들을 선지서에서 쭉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하나님이 친히 저들과 함께 하시면 서로 죄가 제거된 완전한 회복의 은혜를 거기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의미로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부활에 대한 소망을 자기도 갖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인의 부활 동시에 악인의 부활 바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항상 양심의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노라. 그처럼 의인과 악인의 보편적인 부활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중에 그들의 하나님으로 임하시면 악은 영원히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부터 제거될 것이고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셨던 하나님이 온 땅을 그의 거처로 완성하실때 죄는 영원히 불못으로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래서 구약때도 보면 죄인들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모든 시체들과 쓰레기가 타는 것처럼 불질러 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게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는데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지을 것이고 악인은 영원히 심판 하실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저들도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온 우주가 거룩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은 그 앞에 서질 못할 것입니다.그 일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양심을 따라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그렇게 그는 새로운 파가 아닙니다.유대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부활하신 주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이전의 증거한데로 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곧 그들의 심판자이십니다.그러기때문에 그는 조상의 하나님을 지금 봉사하고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자기를 변함으로 바로 이 기독교가 새로운 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소망이 주 예수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부활하신 주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 취임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를 두려워 하며 그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한 것과~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19) 그는 이처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따라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의 소망을 그가 바라보고 주 예수 안에서 죽음의 군세를 영원히 파괴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심판자인 사실을 그가 믿기 때문에 양심을 따라서 그가 그렇게 살았고 그는 자기 백성을 비방하고 훼방했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자기민족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그렇게 예루살렘에 왔고 성정에 들어가서 그들이 조상들에게 허락하신 율법의 제도를 파괴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따라서 그도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종교는 동등한 하나님의 은혜의 종교요 서로 반대되거나 새로운 파가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주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송사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외국에 나가서도 송사한 적이 없고 오히려 외국에서 자기민족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방인 중에서 주를 믿는 사람들의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올라왔고 그리고 자기 자신 까지라도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결례를 행했다고 그런 일을 보았을때 그는 결단코 자기 백성들을 이스라엘 밖에서나 안에서 결단코 훼방한 적이 없고 모세율법을 훼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의 진실한 성취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제 다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예루살렘에서 아무런 소동이 없었습니다.그랬는데 아시아로 부터 온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보았는데 아시아 사람 드로비스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보고 아마 그 사람을 데리고 함께 성전에 들어간 걸로 해서 바울을 선동해서 잡으러 했거든요.어떻든 아시아로 부터 온 성도들이 선봉장으로 이 사람이 세상의 연병장이 인데 여기서도 그런다 하고 바울을 잡도록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땅에서 그가 잘못한 일이 없으면 이제 아시아 지방에서도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거기서 부터 죽 그러더니 여기서도 한다 했으면 거기서라도 그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아갈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아시아 지역을 통치하는 벨릭스에게 자기를 먼저 송사했던 것이 옳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재판절차에서도 예루살렘에서는 그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진행되지를 못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어요.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따름이니라’(21) 만일에 그들이 공회에서 합당한 죄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했다면 거기서 무죄인가 유죄인가를 판결하고 또 그 일을 따라서 필요하면 벨릭스의 판결을 구하겠지요. 그들의 종교를 따라 판결하고 그랬는데 그들의 종교를 판결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죄를 발견한 적이 없다. 심지어는 재판절차도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훼방했다고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을 소요케 했다는 말도 전혀 근거가 없고 심지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가 한 일까지도 그런 일이 없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종교적인 판결을 받을때 까지라도 그가 죄있다고 유죄의 증거를 발견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재판하고 있는 것은 절차로 부터 잘못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그리고 재판절차도 잘못되었어요. 만일에 종교적인 문제가 있으면 그들은 공회에서 그의 유죄여부가 증거를 따라 판결되어야할 것인데 그런 절차를 밟은 적이 없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자기들의 종교적인 문제로 로마 총독 앞에 직접 고소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그랬냐고 그리고 그가 이방 당에서 만일 그런 일을 했으면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로 그를 잡아갈 것이 아니라 벨릭스 앞에 직접 송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절차에 있어서도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21절에 보니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라그가 부활에 대해서 증거했을때 그들 안에서 까지라도 분쟁이 있어서 그들은 판결하지 못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산헤드린 공회는 회의로 결정하는 것인데 그들 안에 까지 분쟁이 있어서 바울이 찢겨 죽을 뻔해서 빼왔거든요.그러니 어떤 권위로 자기를 고소하는 것입니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금지말라 하더라(23) 예수께서 재판을 받았을 때까지라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을때 그가 무죄함을 알고 놓아 주기를 원했습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의 시기로 그를 놓아주기를 거절했지요. 벨릭스도 이 예수 믿는 도에 대해서 자세히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이샤랴에서 총독으로거기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샤랴 백부장 중에 고넬료도 있고 욥바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도 있지요.유명한 사건은 비밀리에 된 것이 아니지요.그러니까 그 도에 대해서 여러 소식도 듣고 있는 것이고 또 여기서 근 6년정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했습니다.그래서 루시아가 오면 여러 치안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증거가 있는가 그런 것을 더 보강하고 해서 판결하려고 판결을 유보하고 그를 자유케 하며 구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 중에서도 자유를 가지고 친구를 만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고 그런 방식으로 그를 구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의 권세까지라도 그의 무죄함을 분명히 알고도 그가 재판절차를 더 핑계삼아서 천부장이 내려오면 자세한 것을 더 알아서 처리하리라는 방식으로 그렇게 판결을 연기하면서도 어떻든 하나님의 섭리가 비록 매인 죄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처럼 이방의 총독 앞에서도 증거하고 모든 어느 사람에게 증거하든 그가 몸으로서는 옥중에 매였어도 복음은 매이지 않고 증거될 수 있도록 그렇게 보살피는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수 일후에 벨릭스가~구류하여 두니라’(27) 어떻든 벨릭스는 앞으로도 2년 뒤에 그의 직임에서 해임되었는데 그동안에 바울은 여러번 재판은 진행시키지 않고 그의 무죄는 분명히 자기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재판은 진행시키지 않고 왜 그를 해방시켰다가는 유대인에게 반란을 받게 되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을 두려워 해서 해방시키지 못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고 바울을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유대여자 드루실라이기 때문에 아마 그런 도에 대해서 벨릭스의 지식이 많을 것입니다.

주석들을 보면 드루실라가 세번째 아내라고 말하고 그 당시 지도자의 도덕적인 부패는 상당한 모양입니다. 드루실라도 18세에 세번째로 시집왔다고 그러니까.도덕적인 상태도 알 만하지요. 그래서 여러번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의 통치자 앞에서 공적인 재판장 앞에서 이 도가 새로운 도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고 바로 그 성취를 따라서 이방인 통치자 앞에서 예수믿는 도를 증거했는데 그것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이것이 바울이 증거허는 도지요.또 모든 천하만민에게 증거했던 도입니다.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입니다. 여기 의라하면 구원얻을 의로 해석해야될 것이고 이 구원얻는 의 안에서 사는 것은 자기절제 사랑의 절제로 해석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온전한 의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의의 열매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을 설명하고 그리고 주님 장차 오시면 온 우주로 부터 죄를 제거하고 영원한 의가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왕이나 종이나 상관없이 그의 의의 보좌 앞에서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이방의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의를 그림자적인 방식으로 봉사해서 통치적인 질서를 나타내도 그 의의 자리에 앉아있는 벨렉스 가지라도 그는 아주 불의한 사람입니다.바로 이 불의한 세상 임금 앞에서 의의 왕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 의의 왕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인 왕 앞에서 증거한 내용이고 나중에 가이사 앞에 가서는 이것을 증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총독 앞에서 처음 증거한 이것은 그런의미로 모든 이방 왕앞에서 증거하는 증거의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처음은 항상 머리적인 성격으로 대표적인 성격이 있거든요. 그래서 의 ,절제,심판에 대해서 주 예수를 증거했습니다.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성취하신 분은 주 예수 뿐이고 그리고 그 의를 따라사는 것이 참으로 세상에서 생명으로 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셔서 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의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불의한 이들 앞에서 분명히 증거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의 증거를 듣고 그의 부인의 꿈의 내용을 듣고 두려워 하며 양심의 두려움을 느끼고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또 나중에 헤롯같은 사람도 그랬지요.세례요한에 대해 다시 한 번 만나보기를 원했습니다.세례요한을 자기가 죽였는데도 그 뒤로 예수의 소식을 듣고 불안해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증거했을 때도 그는 그의 마음이 괴로워서 세례요한을 가두워 놓고도 그의 마음에 번민이,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의는 결과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한 의이기 때문에 자기가 부정된 의에는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면서도 바울에게 조금 내물이나 받을까 해서 바울을 여러번 불러놓고도 바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의 왕은 영원한 판결을 받은 것이지요. 이 세상의 임금들이 주 예수의 복음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복음을 증거하기 전에도 이미 노아 당시에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복음 안에서 온 세상은 넘어진 것입니다.우리들은 유대인들만 그 은혜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대인 이전에도 온 세상은 바로 그 빛 가운데서 살았습니다.그러기때문에 이방 종교에 있어서 까지라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며 두려운 분이며 그 앞에 나갈 때는 내가 직접 못나가고 나갈때는 목욕을 하든지 새옷을 입어야 하고 그리고 나갈때는 빈 손으로 나가면 안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인가 분노한 것이 있으니 다른 대리자를 통해서 살살 빌어야 되겠다는 개념들을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가? 그 내용이 잘 못되어서 그러지 그 의식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모든 세상사람들은 복음의 빛 가운데서 넘어진 것이지 그냥 이방인들은 전혀 복음을 받지 못하고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주님의 복음을 몰랐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사사람들이 주 예수앞으로 돌아옺 않는 것은 주 예수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양심까지라도 자기가 죄있음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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