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21:15-26

찬미예수님 2025. 9. 9. 22:29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21:15-26

 

지난 시간에는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의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 개인의 경건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친히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피조물의 자리에 오셔서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몸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를 따라서 이제 참으로 한 몸으로 사는 확증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한 성령을 마시게 함으로 하나됨이 거기 나타나 있어도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은 새로운 피조물의 생활 즉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증거되고 찬양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서 성령께서 친히 그들을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셔서 하나로 인쳤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에 있어 분쟁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의 삶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난한 유대인 형제들을 구제하려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헌금을 한 것을 가지고 올라가서 그런 것이 하나님앞에 향내나는 받을 만한 재물이되고 또 성도들이 열납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증거가 나타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을 떠라 사는 것은 영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세상에 비추이기 때문에 바울은 단순히 어떤 헌금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됨을 인치려고 하고있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주 예수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롣 하기위해 주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바로 그 영이 바울안에 거하셔서 그로 그 생명을 다해서 주님께서 세우신 은혜의 일들이 그들의 삶에서 확증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때 여러번 성령의 역사로 그가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리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바울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미리 미리 깨달음을 준 것이 아니지요.이제까지 보통 신령하다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날 것이 미리 미리안 일어난 것이 하나님이 내게 굉장한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개인의 흥망을 두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으로 유대인과 한 몸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이 끝까지 거절하리라는 복음에 대한 예언이지 그것이 바울 개인에 대한 앞 날을 알아 맟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개인의 흥망성쇠를 알고자 하는 것은 우상심리이고 또 그런 것을 알아 맞추는 것은 우리들이 추론을 통해서 이렇게 되더라고 짐작할 수는 있지만 직관적으로 그렇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악령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런 것을 예언의 은사로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그런 것을 잘 못벗어요. 신앙생활은 오래했는데 이방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행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을 행하는 가운데서 그가 말하자면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소문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더럽히고 성전을 더럽히고 그런 관계에서 잡힌 것이 아니라 그가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서 유대인들의 형제와 자기를 하나로 묶어서 그들의 율법제도 아래서 자기를 묶었을때 까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한 것을 분명히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바울이 제일 처음 전도하러 갔을때도 이 자세로 갔고 돌아왔을때도 이 자세로 돌아왔습니다.바울은 지금만 유대인에게 형제로 자기를 낮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해서 행 13장을 보면 바울이 전도여행을 떠났을때 디모데를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가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해서 유대인들 사이에 출입하는데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수고했습니다.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자기 자신이 행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갈2장을 보면 헬라인 디도 그는 본래 이방인 출신이기 때문에 결단코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전혀없고 만일에 이방인이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들어온다는 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교리적인 문제가 됩니다.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할례받는 백성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할례의 제도가 하나님의 언약의 제도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분간 집행보류한 것입니다. 나중에 성전을 불태우고 제사의 제도를 끝냈을때 그들은 다시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신정국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포로잡혔을때부터 그들은 이전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는 성전 지성소가 없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회복하신다는 약속의 표로 성소의 제도를 분명히 하나님게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셨지요. 그러나 바벨론 포로로 부터 돌아온 뒤로 부터는 회당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베우므로 약속을 대망했지 이전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그들의 중심제도가 되질 못했습니다. 약속의 표는 가지고 있어도 이전과 같은 영광으로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처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했을 때까지라도 그는 친히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디모데를 데려갈 때 할례를 행했고 디도와 함께 갈때는 결단코 할례를 받지 못하게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섭리의 길에 맞추어서 이방인들은 직접 부름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에는 할례의 제도 모세제도 아래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아직 이해력을 충만히 갖지 못하고 있어도 그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제도여서 그런 의미로 그들에게 직접적인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디모데를 할례를 행했을 뿐아니라 행 18장18절을 보면 그도 고린도에 있는 겐그리아에서 그도 일찍부터 나실인의 서원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머리를 깍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민 6장대로하면 나실인 서원이 끝나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머리를 제물 밑에 놓아서 불지르고 해야되요. 그러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다면 거기에서 성소에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행했던 그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재물이심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나실인 서원을 했는가.그리고 서원의 기간이 끝났을때 그는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도 나실인 서원이 마무리될 수 있는가. 바울은 분명히 복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 안에서 참다운 헌신이 완성된 것이어요.

6장의 나실인 서원은 온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민족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 그들에게 성취되어서 그들이 다 제사장적인 헌신으로 하나님을 봉사할 것을 거기 나실인 서원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거룩케 해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오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반 여자들에게 까지라도 대제사장의 서원의 규례를 허락해서 그들의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헌신하는 대제사장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던 것이고 그것은 구약 당시 개념으로 보면 여자에게 까지 확대시킴을 통해서 온 백성이 제사장적인 삶을 살 것을 거기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자신을 온정한 재물로 드림으로 이것은 구약의 제사의 완성이고 바로 즈께서 자기자신을 드림으로 우리 신자도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의 영을 따라 사는 바울이 모세의 제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지킬 요소가 있는가? 그런의미로는 모세의 제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결단코 나쁜일이 아닙니다.말하자면 모세의 율법제도는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시대에 살고 있는 구약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손을 잡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제도에 하나님의 은혜가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 율법의 제도를 시행했을때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저들과 함께 하시는 은혜요 곧 그것이 구약의 복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성소에서 제사지내는 방식으로는 분명히 안했습니다.분명히 주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삶을 규제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가 나실인의 서원을 하면서 모든 생활에 절제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 그는 주 예수께서 완성하신 신령한 헌신을 절제하는 삶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살고 있습니다. 가령 지금 우리들이 금식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언약의 방식으로 금식은 끝났습니다.구약은 대속죄일이 구약의 모든 제도의 중심인데 그것은 금식이 핵심입니다. 다른 날은 금식하지 않지만 그날은 금식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신랑되신 주님께서 영원히 그의 영으로 함께 하시고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슬픔을 표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방식으로 가령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우리에게 큰 곤고가 있습니다. 그랬을때 우리의 죄를 슬퍼했을때 말하자면 그것은 구약에서 가르친 방식대로 우리에게 기쁨이 사라진 것 같고 우리의 소위 밥맛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이 정상적으로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하든지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하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또 아침 저녁 기도한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아침 저녁번제를 드렸으니 우리들도 그것을 본받느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간구하시고 그의 영으로 우리안에 탄식합니다. 우리 영혼이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의 은혜를 추구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입니다.그런데 왜 우리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 유익한가.우리가 율법제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그러나 율법에서 그런 정규적인 예배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햇습니다. 아침 저녁에 번제를 드림으로 전날의 삶을 지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충만하고 신령한 은혜 가운데 살 것인가를 그런 대표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셨고 그리고 완전함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아직 죄 중에 어둠가운데 있는 언약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고 인도하시는 것처럼 손에 쥐어주시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어서 만일에 주 예수를 믿는 백성들이 은혜의 빛 가운데서 그런 것을 합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 뿐이고 그런 것을 가지고 죄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들 까지라도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가지면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지 그동안 우리나라 교회가 새벽 일찍 나온 사람만 또 굶어야만 기도가 더 잘되는 것같고 다시 육체의 법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가르쳐서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심히 대항하고 정죄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한 이해력을 가지고 나타났을때 오히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의 삶에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기도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우리의 옛 본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는가를 잘 알것 같으면 우리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내는 것은 유익합니다. 또 우리들이 예배당에 자주 나온 사람이 신령한 것은 아니지만 말씀을 듣고 성도끼리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은혜를 교회에 공급하는 방식임을 이해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에게 참 생명이 있고 영원한 은혜가 와 있지만 그 은혜는 한 번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위에 은혜가 더해져서 성숙하도록 한 은혜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여러분들이 정규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옳고 참으로 그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면 참으로 교회가 무엇임을 알 것같으면 참여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여러분들이 자유를 빙자해서 오지 않고도 나는 충만하다 하는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충만한지 몰라도 사랑의 방식으로는 전혀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약율법은 새영을 위해서 준 것입니다. 바로 그 제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계시되어 있고 그들은 그 제도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 증거하고 나타낼 수 있고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하나님나라로 성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율법을 활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하는 말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온전히 형제를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는 형제를 위해서 구제헌금을 가지고 이런 용도로 썼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섰다 할지라도 법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복음으로 살기 때문에 법적으로 위배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그가 자기 자신의 헌신을 표현했을때 그는 개인적으로도 집안이 좋기 때문에 가진 것이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인 비용을 사용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지요. 바울은 이방인 교회가 헌금한 것을 관리했을때 까지라도 사람 앞에서 까지라도 그는 선한일에 조심하겠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런 공적인 것을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썼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떻든 그는 자기 자신의 많은 수고를 통해서 형제를 위해 짐을 졌습니다.이렇게 했는데도 그들은 바울을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땅에 오셨을때도 그들을 위해 악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요 또 병자를 고치는 분이어서 그는 모든 선을 다 행했어도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됨을 책망했을때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켜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바울이 수고했던 것도 그가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모독했던 것도 아니고 그는 모세 율법의 완성을 향해서 참으로 자기 자신까지라고 그런 짐을 짊어지고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되지만 않으면 그는 율법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없는 자처럼 율법있는 자에게는 율법있는 자처람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그는 모든 짐을 다 짊어졌습니다.그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나 이방인에게 거리끼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참으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자가 되었는데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서 그런 수고를 다했습니다.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에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닮았으니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10장 끝에 말한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수고했습니다. 주 예수를 거절한 유대인들은 주 예수의 영이 바울 안에서 역사했을때 그의 성령의 역사를 끝까지 거절함으로 그들의 죄를 채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님오시도록 까지 사도시대로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사도적 사역은 사도시대에 끝났지만 사도적 사역을 일으킨 이유는 사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려고 한 것이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사도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충망한 경외는 사도시대가 제일로 강력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빛의 충만한 빛은 사도시대 보다 오히려 교회시대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계시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도시대에 이루신 일을 이 교회시대에 진행시킴으로 우리에게 더 풍성한 빛을 허락하십니다. 사도시대는 유대인 땅에서 작게 일어나고 있지만 천하만민에게 열매를 거둠으로 교회시대는 더 충만한 빛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 사도시대처럼 강력한 것이 없지요. 사도를 거역하면 즉시 죽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 처럼 그러나 교회가 그런 죄인들이 섞여져 있다해서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있지만 지금도 복음은 이런 사랑의 짐을 짊어지지 않고는 증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천사가 불 같은 말을 해서 사람들이 변화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이처럼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고 사랑을 통해서 원수를 이기는 것이지 소위 경우를 따져서 입을 다물게 함으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경우를 다지면 그는 일반양심에 의해서 입을 다물 수 있어도 그것은 우리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우를 따라서 단순한 도덕률로 남보다 더 똑똑히 살라고 우리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사는 새로운 피조물 어떤 영이십니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나같은 원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면 많은 대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살아도 많은 반박이 있습니다. 우리를 칭찬해서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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