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21:1-14

찬미예수님 2025. 9. 9. 20:58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21:1-14

 

20장에서 바울이 소아시아 수도인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데서 어떤의미로 바울의 전도사역이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의 얼굴은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20장32절에서 말씀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있게 하시리라’‘그러므로 내가 일깨어 3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어떻게 보면 사도의 행적은 사도행전적 의미로는 끝나고 있지만 사도안에서 일하신 주님은 하늘보좌에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교회에 임하시고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결단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바울의 사역을 마무리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21장부터는 어떻게 보아서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만 이전 바울전도 사역의 결론으로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어디까지냐 하면 바울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이방에서 맺은 봉사의 열매들을 다 고하고 그리고 그들이 사랑의 선물로 보낸 헌금들을 가난한 교인들을 위해서 드리고 그래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되었다는 성령의 인치심이 거기 나타나도록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 한 영을 부으심으로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그것이 확증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을 함에 있어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그가 그리스도의 법을 떠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수고했는데도 바로 율법의 종으로 오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킨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관원으로 부터 정죄를 받았던 것처럼 바로 그의 영이 사도안에 거하셔서 그의 은혜의 일들을 다 이루시고 그 열매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해도 산헤드린 공회는 바로 주 예수를 거절한 공회는 사도바울을 거절하고 그를 이방인의 손에 넘겼습니다.그렇게 함으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결론상으로는 옳겠습니다. 사도적 사역으로 보았을때는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너희를 든든히 붙드시고 영원한 기업에 합당하도록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교회에 분명히 증거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때 이전에 예수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은 이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그 은혜의 일들을 거절하고 이방인의 손에 맡기므로 그들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하고는 용서함이 있지만 성령을 거절하고는 사함이 없으리라 한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우해서 죽으려 오셨지만 그가 죽으시고 그의 영을 부으셔서 새 창조의 일을 이루셨을때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일을 거절함으로 다시는 속량하는 제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22장에 넘어가서 그가 예루살렘에 잡혀갔을 뿐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에서 판결을 받고 그가 세상의 연병장으로 정죄를 받고 그렇게 함으로 바울의 사역은 끝나는 것이고 이제 그 다음 단계는 그가 유대인에게 증거가 됬을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증거가 되었는데 그전에 이방인들을 처음에도 바울이 전도했을때 구브로로 건너가서 그 총독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의 마지막 전도여행은 가이사 왕 앞에 상소하는 것으로 물론 법적인 절차는 상소의 절차이지만 그는 가이사 왕 앞에 서서 왜 자신이 쇠사슬에 매였는가. 그가 세상에 전하는 구주에 대한 고백을 왕 앞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의 전도사역으로 시작이 되면서도 처음 전도사역도 구브로의 총독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 황제 앞에 서는 방식으로 이방인의 사도는 사역을 마치지요. 그러니까 왕들 앞에 증거함으로 세상에 증거한 것입니다. 그의 증거를 막는 자가 없었지만 여기 뒤에 보면 어느 왕도 바울의 증거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은 없고 너는 미쳤도다.그런 방식으로 바울의 증거 때문에 양심에 찔림을 받고도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돌아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은 끝까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어도 하나님은 친히 자기 아들을 온 세상의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 천하만민에게 자기를 증거하실 것이고 그리고 택한 백성들을 부르실 뿐아니라 친히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의 교회와 함께 하셔서 그의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의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은 21장1-14절까지의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보면 바울이 이제 어떻게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 도착하고 있는가 하는 말들을 쭉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배타고 쭉 밑으로 내려가서 구브로를 지났지요. 구브로 남쪽 해안을 지나서 왼쪽으로 구브로 섬을 보고서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두로 항구에 상륙하고 거기서 배가 짐을 풀도록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그 다음에 나중에 쭉 내려와서 가이샤랴 항구에 도달하고 이제 거기서 부터는 육로로 예루살렘까지 가게된 것이지요. 그 과정들이 쭉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처음 그가 팔레스타인 땅에 도달했을때 4절에 그가 두로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보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권면이 있고 그리고 그가 팔레스타인 땅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제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 가이샤랴 항구에 도달했을때 예루살렘에 가기 전이지요. 거기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몸을 묶으면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주인을 결박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리라고 예언하고 그 예언들에 대해서 바울이 13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하였노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않으므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우리가 그쳤노라.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바울의 결심이 나타나 있지요. 이런 일은 여기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20장22-24절에도 나타나 있지요.그렇게 에베소 장로들에게도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일이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다 했는데 그런 일이 거듭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바울의 띠를 가지고 선지자가 자기 자신을 묶음으로 행동적인 증거로 바울이 당할 일을 말하고 있고 바울의 신앙고백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21장 부터는 그런 의미로 새로운 단계인데 이제 바울의 복음 사명을 마친다 함에는 그는 로마까지 보는 것을 마친다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만 여기 문맥으로 봐서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헌금을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 사도행전이 교회는 오순절에서 시작되어서 실은 사도적인 증거는 오순절도 마치고 있는데 오순절은 천하만민이 자기나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을 들음으로 유대인 뿐아니라 천하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오순절의 증거였는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제 이방인이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유대인에게 가면 유대인 형제들이 그 선물을 받음으로 한 몸된 교제가 거기 확증되는 것이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롬15장에서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복음전파와 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복음전파의 확증,복음으로 사는 확증,형제가 하나되었다는 한 상에 앉는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대문에 바울이 그런 일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순절에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오순절은 자기나라말로 구원의 복음을 들었지만 마지막 오순절에는 오순절의 열매인 이방인들이 친히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사랑의 선물을 들고 예루살렘에 찾아 올라가므로 거기 열매가 풍성하게 익은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이제 복음의 확증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을 위해서 여기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이 여러곳에서 바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올라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한 것까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띠의 임자가 결박을 당하리라한 것만 성령의 감동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구분을 해야할 것입니다. 20장22절에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것은 그저 바울의 단순한 종교적인 열정이 아니라 그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따라 이처럼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온전한 연합을 위해서 지금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아서 그냥 올라가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른 제자들은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고 그런 장면이 아닙니다. 그가 올라가면 이처럼 그는 메임을 당할 것이고 이방인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이처럼 자신도 여러 성에서 들었고 자신도 자기 안에 일하시는 영을 따라 그가 그처럼 올라가는 것이고 그런 것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가 되게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봉사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복음을 받았을뿐아니라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 육체의 것으로 형제에게 봉사함으로 서로 하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일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내가 올라가노라 한 것처럼 그가 여러 교회를 심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도 그런 일을 대충대충 지나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유는 그가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올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도 분명히 그가 가게되면 이렇게 이렇게 죽게 될 것입니다.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그렇게 했을때 제자들이 올라가지 말라.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을 올라가지 말라 하는데 바울이 억지로 오라가는 장면이 아닙니다.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했을때 베드로가 말리니까 사단아 내뒤로 물러가라 한 것처럼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제사장들의 손에 잡혀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면 죽게될 것입니다. 죽는 것이 그의 뜻인데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서로 반대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바울안에 역사하셔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바울이 올라가도록 역사하고 계시고 동시에 성령은 제자들을 통해서 바울이 가면 배척을 받으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랬을때 바울의 증거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은 바울이 얼마나 용감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바울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경건성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가령 성도들이 어떤 일을 한다할 경우 바울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대세력에 부딪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보통 우리들은 이해하기를 우리 형편이 잘 풀리면 주의 뜻이고 어려우면 다른 이유를 붙여서 행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자기 안에 분명한 증거가 있을 것인데 다른 이유를 들어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면 우리들은 꼭 나쁜 일을 거듭거듭 반복함으로 화인 맞은 줄로 알고 있는데 좋다 나쁘다는 의미가 그냥 도덕적인 방식으로 좋다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좋다 나쁘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면 그런 마음은 몹시 잘못된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항상 여러 반대적인 세력 가운데서 일어나도록 되어있지 그냥 형편이 좋아서 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제 역사가 완결되는 지점에서는 그렇게 되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천사와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천사도 어느 때인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천사도 시험받는 때가 있었겠지요. 그래도 천사는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어서 그런 자리를 떨어짐으로 부터 악한 천사는 영원히 악하고 선한 천사는 영원히 선합니다.그러나 아담은 처음부터 그의 위치를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서 결정되는 시험의 위치에 있었고 범좌한 뒤에도 사람은 항상 하나님 편에서 떨어지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시험받는 존재로 있었습니다. 그것이 천사와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이성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윤리성을 나타내야 하지만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질 시험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덕적인 성격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사는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항상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해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만일에 그 관계를 떠나서 선과 악을 말하면 이방인 도덕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때 나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안에서 나를 그의 몸으로 접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고 그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으심으로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고 의의 병기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모르고는 우리들을 모릅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주 예수의 몸으로 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것은 특별히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의 몸된 교회의 특성을 아는 것이고 그의 교회와의 관계 아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관계를 떠나서 우리를 해석하면 그것은 자존자요 도덕적인 성품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서 유익을 주기 위해서 행동하는 인본주의는 될지 몰라도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주 예수를 알고 주 예수께서 친히 그의 몸으로 지으신 교회를 알고 그렇게 함으로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의 위치를 알고 받은바 은사를 따라 각각 직분에 순종함으로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선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선이 아니어요. 조그만 아들이 아버지처럼 행동하면 야 이녀석 빨리 컷구나 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날 넘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옳고 그른 일 까지라도 가정 질서 안에서 있는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옳고 그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가정의 의미로서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으셨을때 그의 교회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셧고 우리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지체로서는 코와 입이 손과 다리가 다르듯이 각각 받은 은사가 다릅니다.그렇게 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어떻게 주님의 이름으로 행할 것인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인가. 왜냐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어요. 그냥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있는 죄의 속성을 정복하고 하는 것이지 가만이 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들은 도덕적인 인격적인 존재,선 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안에 무슨 선이 흘러넘쳐서 선을 행하고 그렇게 하질 못해요.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은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안에서 행하시는 일의 방식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모르고는 우리 믿는 신자의 삶의 위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 했을때 추상적인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신 교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는 유형적인 교회 또 교회는 우리 교회가 교회이면서도 시간 이전과 지금과 후에 있을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주님의 신령한 몸의 지체로서 우리자신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교회가 구체적인 방식으로는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행동이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자기의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일의 목표는 모두 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하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믿음으로 하는 것이고 주 예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우리신자들이 사는 삶의 질서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것은 세상의 배교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것이 따위에서 교회가 할 일이요.주님 재림하시면 속죄적인 일은 멈춥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셔도 친히 그의 영으로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땅위에서 은혜의 일을 베푸신 주님께서 친히 그의 영으로 땅위에 있는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 가하셔서 우리를 보고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로 세상의 구원의 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바울의 고백을 보면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줄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한 것은 단순히 바울 자신의 위대성이나 열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 우편에서 취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안에 일하신 은혜의 길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고 사도바울은 믿음을 따라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바로 이 사도적 삶을 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주 예수의 이름이 자기위에 있습니다. 그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친히 그가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부으심으로 확증되어 있는데도 이제는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그것이 그들의 삶안에서 증거되도록 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입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서 예루살렘에서 잡혀 죽으시고 그의 뜻을 이루었던 것처럼 이제는 사도는 사도적 사명이 있는 것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그런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셨던 것처럼 그도 원수들에게 배반받을 것입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그는 죽을 지라도 주 예수께서 함 몸되게한 복음이 사역을 증거하는데 그는 물러설 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달려가는 방식이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서 바울의 개인의 행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친히 바울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가를 발견했을때 우리들도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사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적 사명 주님께서 땅에 교회를 세우심은 교회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그런 의미로 교회는 머리되시는 주님을 채웁니다.머리되신 주님이 하신 일이 교회안에서 진행됩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이 교회안에 있습니다.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고난을 다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는 머리요 몸이 완성됨으로 곧 몸이 완성되기 때문에 주의 고난은 그의 교회안에서 진핸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의 영으로 그의 생을 사시고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어떻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증인이요 특별히 주 예수의 영으로 사는 교회는 우리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봉사하는 영광의 증인입니다.그런 일을 위해서 우리들도 바울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우치는 다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일을 이루십니다. 만일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그의은혜의 사역들을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지 않고도 그의 은혜의 일을 이루시겠지만 우리는 그 은혜의 빛나는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영광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그의 고난에도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바울이 증거하는 롬8장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우리들도 복음의 증인으로 섰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섰습니다.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데 사도적 사명으로 섰지만 우리들은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주면에 있는 사람들 또 우리가 선교해야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주님 오시도록까지 주님은 그의 교회를 통해서 그의 은혜의 일을 진행시키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그런 은혜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반대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증거하면 사랑해서 증거하고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증거해도 우리의 복음을 받지 않습니다. 대충 육체적인 말을 하면 잘 알아들어도 복음의 진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전도할 때 그런 것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물러설 것인가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바울은 올라가면 유대인에게 잡혀서 죽게될 것입니다.고난이 그의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그러나 그 은혜의 사명을 마치는 일에 있어서는 그는 죽을 것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는 먹고 마심이 육체로 보이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보좌에 취임하신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 땅에 살고 있어도 교회는 하늘까지 그 범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는 것 같아도 주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임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주적임 교회여요.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생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닥쳤을때 우리들도 이와같은 사명으로 달음질하면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이럴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교회에 사람이 불겠는가 내 형편이 나아지겠는가 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달리는 이런 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은혜의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우리들은 모든 것은 다 뒤로 돌려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지체로 수고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생명으로 사는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는 땅위에 있어도 주님께서 그의 지체삼으심으로 우리를 통해 그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주 예수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세상의 작은 예수여요. 우리는 바울처럼 주 예수께 받음 사명 즉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으로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관계를 떠나야 되겠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떠나야 할 것이고 참으로 세상에 참 생명을 주는 이런 일에 봉사함으로 우리들은 주님의 생명으로 풍성하며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받은 증거로 우리가 하늘의 기쁨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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