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17:16-34

찬미예수님 2025. 7. 25. 23:08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7:16-34

 

여기 아테네에서의 설교는 사도행전 15장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 회당에서 한 설교와 비교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다 하는 사실을 증거 했고 그들의 거듭되는 배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그 아들을 보내셨는가 하는 것들을 증거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베푸신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 중에 임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하신 여러 그림자적인 약속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참으로 임하셨는가 하는 문제들을 그들에게 증거 함으로 옛 언약으로 양육하였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제는 그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17장에서는 이제 아테네에서 헬라의 공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19절에 보면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바로 여기가 헬라인들로 보면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와 같은 조직이어서 이전에 소크라테스도 참지식을 기르치다가 바로 신성모독 죄로 이 회에서 재판을 받고 독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이스 로마 신화 같은데를 보면 신들이 서로 질투하고 서로 사랑하고 전쟁하고 또 신들의 아들로 헬라인들의 영웅들이 있고 신들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들이 헬라의 영웅들이지요. 그렇게 해서 헬라인의 신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이어서 인간과 똑같습니다. 단지 인간보다 더 능력이 많다는 의미로 신 개념이지 도덕성이 없습니다. 바로 그런 신화를 가지고 있는 그리이스 안에서는 나중에 보면 도덕적으로 굉장히 부패해졌고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참된 이성을 가지고 참된 것을 아는 것이 행복이고 그러기 때문에 아는 것이 덕이요 행복이라. 그렇게 해서 그들의 어리석은 사고방식들을 질문을 통해서 다 파괴하고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했을 때 헬라인의 어리석은 것들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신성 모독 죄로 국가 신을 모독한다 해서 재판을 받고 독약을 먹고 죽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중에서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 이제 이방인 전도에로 구별함을 받은 바울이 안디옥 회당에서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15장에 예루살렘 회의가 이은 뒤로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가 출발되는 과정에서 바울이 여기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했을 뿐아니라 또 하나님께서 옥의 터를 흔들게 해서 바로 바울이 증거한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지요. 자기 종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그렇게 해서 택한 백성들을 거기서 구원하기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왕이시다. 이 세상의 임금들도 그 나라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들이기 때문에 바로 바울을 나중에 잘 대접해서 보내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16장에 보면 여기저기에서 그가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핍박한 것은 유대인들이요. 택한 백성들은 믿어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이제 모든 이방의 종교와 철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여기 아테네에서 그들의 공회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이방 종교 가운데서 설교하고 있는 것이 17장16절 이하입니다. 여기16절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사람들과 변론하니’(17). 여기보면 항상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은 먼저는 유대인 회당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셨고 그렇게 해서 천하 만민이 자기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먼저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예비하셨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흩으셨고 유대인들의 배교 때문에 흩어졌어도 그들의 흩어짐이 세상에 유대인의 하나님을 증거 하도록 하는 길이 되도록 인도하셔서 거기 보면 유대인의 회당이 있고 그리고 그 회당에서의 가르침을 따라서 귀화하지는 않았어도 유대인들의 약속을 믿고 함께 앉아 있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증거 했고 또 시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하는 말은 여기 장터에서 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또는 성문 그런 곳이 그들에게는 재판과 교육의 장소들입니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변론했는데 거기 변론의 대상들은 주로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철학자들은 알렉산더 대왕 때부터 유행한 철학자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 시대 초기까지 이어진 철학자들인데 에피쿠로스파 그리고 스토아 학파 라고 합니다만 이 두 철학자들은 다 아테네에서 일어난 철학 학파들입니다. 이 아테네는 지중해에 연해 있어서 우리 나라같이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작은 도시로 국가들을 형성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독립된 자치 공동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의 신인 올림푸스에 있는 제우스 신을 기념해서 그들이 4년마다 한 번씩 모였고 그렇게 해서 헬라 그리스 반도의 통일을 기하고 했습니다. 그처럼 해서 헬라 민족으로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어도 다 도시 공동체는 각각 독립해 있었습니다. 그랬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지중해 무역을 통해서 많은 재산을 획득했고 그래서 그들의 자유민들은 직접적인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노예들이 주로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가를 누렸고 그래서 그들은 21절에 있는 것처럼 여기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더라 한 것처럼 거기서 많은 철학과 문학이 발달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전에 도시 공동체가 강력했을 때는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들 객관적인 보편적인 이론들을 추구하는 것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가령 우리 같아도 시골 같으면 옛날에는 한 씨족이 공동체로 살면 거기서는 한 개인에 대한 생각 보다도 가문에 대한 생각이 강력하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그런 것이 무너지고 돈 많이 번 사람이 큰 사람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시골도 한 가문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또 우리 집안이 잘 사는 개념이 없어지고 자기 개인이 잘 살면 되는 것이지요. 우리 변화 과정을 보면 헬라의 변화 과정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알렉산더 대왕이 나타나서 헬라 반도를 통일하기 전에는 다 개별적으로 지역 공동체를 가지고 있고 그 공동체가 그들의 삶의 모든 중심지요 또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일어나서 반도를 다 통일하고 그리고 헬라인들을 끌고 세계를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이전처럼 자기 지역 공동체에 애착을 가질 수 없었고 세계적인 정신으로 그들의 마음이 넓어졌습니다만 동시에 그들의 범위는 세계로 넓어지면서도 그들의 전 생을 봉사해야 할 도시 공동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개인주의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가? 개인의 평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학파 중에 대표적인 학파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익 학파입니다. 이 두 학파들은 다 범신론입니다. 모든 이방 종교들은 다 범신론이어요. 그런데 에피쿠로스 학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세상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했을 때 이 사람들은 세계를 나타난 물질적인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구분한 것이지요. 이전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철학을 해서 이렇게 물려 받았습니다만 가령 곡식으로 하면 보이는 곡식이 있고 씨앗이 있고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생명이 씨앗을 만들어 내면 이 씨앗은 나중에 다른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철학적으로는 형상과 질료라고 합니다만 가령 우리들이 진흙이 있습니다. 진흙을 가지고 다른 것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속에 무엇인가 생명력이 있어서 발전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어요.그런 개념으로 하면 이 세계는 무엇입니까? 지금 보이는 이 세계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소위 질료면 이 세계를 세계되게 하는 정신이 있는 것이지요.그 정신이 세계를 이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개념보다도 이 세계의 정신과 세계의 혼과 세계의 물체 세계의 실체 이런 방식으로 둘로 구분하는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좁혀서 인간을 말하면 인간은 무엇입니까?이것이 육체면 보이지않은 인간은 무억입니까? 인간의 이성이고 정신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계관과 세계 혼이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인간 정신은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이성을 따라 사는 것이 곧 세계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고 그러니 바른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그리고 그런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조금 저급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굉장히 아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사람이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계혼과 세계의 실체가 같은 것처럼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실체도 실은 같은 것입니다. 있는 것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반드시 질료로 나타난 것이니까 있는 것은 나타난 것이니까요. 최고로 나타난 것이 인간이어요. 다른 짐승에는 인간 같은 이성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사고력을 갖는 이성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세계혼이 최고로 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인간이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인간이고 어떤 사란이 가장 바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체와 영혼이 그런 의미로 같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나타난 것을 그렇다고 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바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고 괜히 세상에 무엇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자기 정욕으로 싫다고 해서 받아 들이지 못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어요. 있는 것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가령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보리의 생명과 나타난 보리는 그런 의미로 같은 것이어요. 그래서 세계도 있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에 실은 같은 것이어요. 그런데 만물은 이미 있는 것인데 그 세계의 실체로 나타난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이성을 잘못 발휘하니까 자기 정욕적으로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무감동하게 어떤 좋고 싫고를 느끼지 않을 만큼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세계 실체와 세계 정신이 일치하는 사람이어요. 육체와 이성이 일치하는 사람이어요.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은 무감동의 상태 그런 것이 말하자면 최고의 경지라고 이해했습니다. 스토익 철학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고행주의를 주로 했지요. 불교처럼 만사가 다 변화 되어도 사실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있는 것을 있다고 사실대로 받으라 있는 것을 가지고 없다고 하면 괴로운일 아니어요. 그래서 있는 것을 있다고 무감동하게 받아라 그렇게 해서 자기의 정욕들을 다 억누르고 있는 것을 있다고 사실대로 받아라 그렇게 해서 스토익 철학자들은 고행주의로 간 것이지요. 불교도 그렇지요. 그러면 여기에 윤리성이 있는가? 없습니다. 만사 있는 것은 다 옳은 일입니다. 나타난 모든 것은 신의 나타남이고 세계 정신의 나타남이다. 있는 것은 옳은 일이고 필연인데 그것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묘한 것이지요.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어요. 있는 것을 있다고 받아야 되요. 그러니 거기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어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우리의 본성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의의 개념이 거기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같은 곳에도 도통하면 죄에 대한 개념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밥 먹는 것처럼 먹으면 기분이 좋은 것처럼 여자 보면 정욕이 발동하는 것이고 그것을 나쁘다 말다 괴로움을 가질 필요가 뭐가 있어요. 도통하게 되면 죄가 없어집니다. 왜 자기와 세계는 일치하거든요. 모든 만물은 법칙대로 움직이니까 자기도 우주의 한 부분이어요. 그러니 자기 이성이 최고로 신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주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에 우주의 법칙에 자기의 마음을 맞출 수 있으면 그는 이 세상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고 세계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사람이어요. 그것을 행복 평화라 합니다. 이것이 스토익 학파들이 생각하는 것이어요. 에피쿠로스 학파가 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인데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감각을 통해서 자꾸 얻어 들인 상들이 반복되니까 그런 개념들이 성립된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결국 느끼는 것은 우리 감각이 아니냐. 그러니 감각에 좋은 것은 좋고 감각에 나쁜 것은 나쁜 것이어요. 감각을 통해서 좋고 나쁘다가 거듭거듭 머리에 새겨지거든요. 그러니 감각이 결국 모든 척도 기준이 아니냐. 그러니 감각에 좋은 것은 좋고 감각에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위 쾌락주의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감각에 좋다는 것도 처음에는 소고기를 먹으면 맛있어요. 감각에 좋으니까 소고기를 먹으면 맛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계속 먹으면 신물이 나고 구역질이 나요. 또 돈도 좋아요. 돈도 다 좋다고 일고 있어요. 그러나 돈이 많이 있는 사람은 돈이 고민이어요. 그러니 감각은 결국 체감 법칙이 있어서 좋다는 것도 점점 덜 좋아진다. 만족의 도가 점점 줄어들어요. 그러면 만족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이냐. 오히려 그 만족에 매이지 않는 방법이다. 감각에 매이지 않은 방식이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말하자면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이론으로 나타나 있어요. 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이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그리고 만물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어요. 있는 것은 다 옳아요. 그러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고 초월 자가 있다느니 심판자가 있다느니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처럼 범신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종교들이 다 그렇지만 자기의 감정을 따라 다양한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에 평화를 누리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고 그리고 많은 우상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곳이 다 신의 처소처럼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최고의 철학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나타나서 세계를 정복한 뒤로 말하자면 철학적인 민족으로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헬라 지역에서 나타난 철학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그 당시 세계적인 제국이 나타났을 때 세계적인 제국의 철학이 이 철학이어요. 그래서 이것이 세계 철학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더 역사가 진행되면서 모양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도 결론적으로는 사람들은 더구나 현대의 사람들은 초월 자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 가능한 것이고 다 원죄 화되는 것이고 초월하신 신 개념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환경을 또 인간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최고로 실용적인 철학이라 해서 말하자면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도 그것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실천적인 문제보다도 그것이 내게 유익하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익하면 좋고 유익하지 않으면 나쁘고 단지 유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조절이 필요한 것이지 목표는 자기 유익이어요. 그래서 아무리 옳은 것도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단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무엇인가 그래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의의 개념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보편적인 의의 개념이 지금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가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세계적인 제국이 되면 될수록 인간은 이제 작은 지역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외롭고 자기중심적으로 삽니다. 지금이 그것이 가장 극대화되어 있어요. 지금 우리들도 세계 시민처럼 되어 있어도 목표는 자기 입신양명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여기 바울 사도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방인에게 전도한 방식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계에 은혜를 풍성히 주셨는가 하는 사실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22절부터 보면 바울이 아레오 바고~알게 하리라여기 바울 당시 헬라 지방에는 에피쿠로스 스토익 계통의 두 철학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위 불가지론이라고 그럽니다만 말하자면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도 우리가 냄새를 맞는다는 것도 냄새의 원자가 우리 코에까지 도달하고 그것이 우리 뇌에까지 도달해서 우리가 그 냄새를 아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냄새나는 물체가 있으면 이 사회에서는 여러 장애 요소가 있어요. 또 몸에도 여러 기능이 있지 않습니까? 시력이 좋은 사람은 잘 보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희미하게 보여요. 그래서 결국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볼 수가 없어요. 이 마이크라 해도 여러분이 보는 방향과 내가 보는 방향이 틀리고 제가 말하는 순간과 여러분이 보는 순간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나요. 그러니 어떤 것은 이렇다 하는 객관적인 개념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모든 우리가 안다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아는 것이지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초월한 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그 경험 감각에 중심 함으로 에피쿠로스 스토익 불가지론들 이런 신비주의 계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그들이 많은 우상을 섬기고도 어느 단에는 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는 방식으로까지 종교성이 많지요. 종교성이 많다는 말은 이 본문에서는 미신 성이 많다는 말이 되겠습니다만 그래서 여기 그들의 종교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어요. 물론 여기 바울이 행한 자체를 가지고 그것이 옳다 그렇게 우리에게 규범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증거 했던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영감 되어 있기 때문에 맞지만 바울의 활동 자체에 대해서 까지라도 매사에 영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령 베드로의 교훈은 영감 되었어도 베드로가 했던 행동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처럼 훌륭한 종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행한 보든 것을 다 완전하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1415절부터 보면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전도하고 그들의 전도때문에 말하자면 바울하고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거기 찾아왔지 않아요. 거기도 보면 15절부터 보면 가로되 여러분이여~만족케하셨느니라 하고여기 14-17절을 보면 여기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전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보면 하나님을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로 증거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두 시대가 있어서 지나간 시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 길들을 가도록 묵인하셨지만 자기를 전혀 증거하지 않고 캄캄함에 그들을 내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서 그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결실을 주셔서 그들에게 풍성한 양식을 주심으로 그들의 생명을 공급하심으로 자기를 증거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여기 17장에서는 바울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23절 후반절을 버면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그들은 신을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에다만 중심을 두고 있으면 보이는 것만 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신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그래도 제사를 지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증거된 내용은 그들에게 알 수 있는 언어입니다. 공통성이 없어서는 그들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셨을 때에 세상을 완전히 지옥의 어둠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각기 제 갈 길로 가도록 방치하셨어도 하나님은 인류를 버렸던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그들을 계속적으로 더 충만한 방식으로 계시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방 백성의 넘어짐도 하나님의 구원 약속 가운데서 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분리시키기 전에 온 인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가운데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의인의 후손만 아들의 영을 따라 구원받은 백성이고 나머지는 아니었어도 하나님이 그 약속을 증거 하는 영역으로는 가령 우리가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 하면 안에 들어온 사람은 다 복음을 받지 않아요. 그래도 안 믿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범세계적으로 자기를 계시한 시대가 아브라함 시대여요. 이제 아브라함 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으로 자기를 한정시키시고 세상은 각기 제길로 가도록 방치시킨 것이지요. 네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는 구주 안에서 다시 만유인류를 재통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하신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넘어짐도 그냥 완전한 저주 가운데 넘어짐보다도 그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있었던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 넘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께서 종교의식을 심으심으로 신 의식이 있었을 뿐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식에 창조자가 계시며 우리는 그 앞에 범죄자요. 그 앞에 나아가려면 그 신을 달래는 중보자와 재물이 있어야 되겠다. 그리고 그 신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뢰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가장 높으신 신과 그리고 그 분 앞에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든 이방 종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지 이방종교들은 자기에게 남겨놓은 하나님의 빛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돌이켜서 살아계신 신 만물에 비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물건 앞에 절하는 방식으로 잘못된 것이어요. 오늘이 개천절해서 단군신화가 어떻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나라 단군신화는 고상한 것입니다.신화적인 해석으로봐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또 사람이 있고 그러면서도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즉 신화 중에서는 고급신화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물건 놓고 제사할 대는 만들어 놓은 물건에 절하는 것이어요. 하늘과 땅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인간의 위치도 있습니다. 짐승도 아닙니다. 하늘로 부터 왔습니다. 신 앞에 무엇인가 빌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그 신이 누구신가를 거꾸로 만들어진 물건 앞에 무엇인가를 차려놓고 잘함으로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이방종교들도 사람들이 지금도 사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혜요 그들은 이 일반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써서 이처럼 과학 문명이 발달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없어도 살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방에 있는 것은 전부 어둠이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에 있어서 어둠이지 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가짜라고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신자가 잘된 일 신자가 질병드는 일은 이 원리의 빛에서 해석을 해야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다.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너희들을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하나님이 무엇인가 필요한 것처럼 물건을 가지고 섬길 분도 아니요.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셨어도 만물 안에 계시며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신 데 어느 집에나 앉아 있는 것처럼 섬길 것이 아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선을 베푸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방인에게 증거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에서는 어느 개인의 행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기 종들을 통해서 자기를 증거 했는가. 그러니 증거는 사도의 증거여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안에 거하셔서 자기를 이방인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 회당에서는 그들의 약속을 따라 주가 오셨다고 증거하고 이방인에게는 만물을 지으신 그 분이 너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분이 참생명의 주로 오셨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전처럼 어리석은 방식으로 물건 앞에 절하고 섬기질 말라. 이전에는 너희들이 알 지 못하고 그렇게 살았고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각각 제 길로 가도록 방치하셨고 너희들은 흩어졌어도 자기 영역에서 문화를 개발함으로 거기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세계 문화는 얼마나 다양하고 생명이 풍성합니까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더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로 너희에게 오셨다. 이제는 이전처럼 더듬어서 찾게 하는 어둠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로 너희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도 세상은 죽음의 왕국입니다. 거기 무슨 생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 되심이 분명히 생명에 나타나도 그것은 생명의 그림자요 참생명이 아닙니다. 참 생명은 영원히 죽음을 정복한 생명만이 참 생명입니다. 그 분이 누군가를 3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하니라그러니 여기는 모든 구약의 약속대로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 계시에 새기셨던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 빛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비추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지옥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에 찾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중에 종말의 시기가 되면 이 질서들이 파괴되면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시험관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시험관 아기 시대에 하나님은 네 아버지 시다 그러면 이 아기가 알아들을 기초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파괴되어도 아버지의 자비하심은 잊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우리 가정의 아버지 되심에 나타납니다. 어떻든 믿는 자는 여기에 많지 않습니다. 고전1장에 있는 것처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는 능력으로 큰 권능으로 이방의 세력을 파괴하고 자기들을 구원해 주어야 해요. 그리고 헬라 사람들은 철학을 구했습니다. 만물의 원인을 스스로 연구해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능력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라고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어요. 괜히 그를 따랐다가는 로마 왕에게 죽기가 쉬어요. 그래서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하고 거절했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병을 고쳐 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하는 참으로 둘째 아담이 오셨는데도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죄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이지 사람 위에 군림하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몰랐어요.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신성이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을 세상에 계시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원수된 관계를 제거함으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오신 것인데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이 세상의 이성 인줄 모르고 인간의 어둠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나님을 배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고 막 증거 하면 울어 버립니다. 네가 하나님을 보았느냐?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느냐? 물론 모르지요. 거기까지는 맞습니다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 버립니다. ?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의 지혜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받지를 않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종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할 때 유대인이 끝까지 거절해서 그 죄를 채웠을 뿐아니라 산헤드린 공회가 그랬던 것처럼 헬라의 공회 아레오바고도 그의 복음을 듣지 않고 거기 몇몇 사람들이 친해서 믿었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은 주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은 위에서 두려움의 권능으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죄인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참 생명으로 올리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교만한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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