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6:11-40
지난 시간에는 성령께서 친히 바울 사도를 인도하셔서 그를 유럽으로 보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계획하기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한 일,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형제를 사랑해서 형제에게 거침이 되지 않기 위해 짐을 지는 것이 옳다. 그런 복음의 도로 이전에 자기들이 전도했던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해 가기를 원했는데,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에 있어서 해어졌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명자를 쓰는 일이어서 이전의 어려운 처지에서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기를 거절하고 돌아갔던 요한을 다시 데리고 가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마가 요한이 훌륭한 신실한 종으로 섰고,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에 마가 요한도 함께 있고 또 바울이 여러 교회에 그를 추천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든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여행에 있어서 갈라서고 있는 것은 개인들이 싸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제 주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광대한 방향으로 이방인 전도가 진행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목표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 나중에 파송한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그렇게 했다고 15장4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과정에서 여기 디모데 기사가 나온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바울이 어떤 자세로 교회를 봉사하고 또 복음을 전파했는가 하는 사실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갈라디아 2장에서는 디모데와 디도를 함께 거론해서 디모데는 데려다 할례를 행했지만 디도는 행하지 않았다. 왜 디모데는 어머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또 모든 사람들이 그가 유대인인 어머니를 두고 있는 줄을 알고 또 믿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고 있는 형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교제를 위해서 유대인에게 거침이 되지 않도록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었지만 아직도 육체의 할례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고 디도는 순수한 이방인이기 때문에 만일에 그가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으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 하는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는 할례를 못 받도록 했지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디모데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문제가 아니라 여기 바울 자신이 그런 일을 먼저 시행했지 않았습니까? 목매어 죽인 것과 피, 그리고 음행과 우상의 가증한 것을 멀리해라. 그러면 잘되리라. 그랬는데 그것은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 이방인 형제들에게 짐지게 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 형제들은 대대적으로 모세 율법을 배우고 있었고 또 소아시아 지방은 그런 의미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이 구원 얻는데 아무필요가 없으면서도 유대인 형제들이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시행하도록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던 것이고 바울도 그 일을 기쁘게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도 자기 자신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한 것은 바울이 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 디모데에게 그렇게 한 것은 바울 자신이 그렇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으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우라와 같은 사람으로 죄인의 형상을 입으셔서 그가 죄 값은 사망인데 죄가 없으면서도 사망의 질서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봉사하므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얻도록 하신 영이 바울 안에 거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종의 자세로 형제를 섬기는 자세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여기 디모데를 할례 시킨 예를 통해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했던 일을 그가 전도했던 교회에 그 규례를 줌으로 참으로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또 형제의 짐을 짊어지게 함으로 기쁨으로 형제가 화합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한 사람이면서도 이처럼 유대인에게 종이 된 것처럼 이런 일을 통해서 그 일을 수행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가 복음을 전했던 소아시아 지방 그러니까 부르기아, 갈라디아 지방, 나중에 흑해 지방으로 가서 그 윗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해서 그가 남쪽으로 내려왔고 거기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것을 하나님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를 부르신 줄 믿고 건너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창세기9장25-27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노아를 통해서 인종이 갈라지고 있는데 거기 보면 세 아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세 민족이 봉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거기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함은 종이 되고 하나님은 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아벨은 샘의 장막에서 창대하리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바울이 지금 바울의 전도여행으로는 2차 전도여행입니다만 모두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 짐을 져야한다. 그것은 이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모여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감사함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여기 16장이 처음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는 여기 바울의 2차전도 여행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전도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즉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모여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 몸으로 하나님이 연합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난 뒤로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셨을 때 처음 전도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로 16장에 처음 나타난다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제일 처음 현장에서 바로 온 민족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노아를 통해서 노아의 세 아들에게 복음의 약속을 어떻게 민족들이 봉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예언한 약속이 여기서 처음 성취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고 그렇게 해서 야벳족속들이 샘의 장막에 거하고 또 그들이 창대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그렇게 해서 야벳 족속들을 통해서 우리들도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은 그것이 서양종교가 아니냐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본래 동양에서 일어난 종교가 유럽으로 건너가고 그렇게 해서 온 세계에 이처럼 확산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간 사실을 노아에게 약속한 그런 구원 약속. 이제 온 민족에게 천하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서 이제는 온 세계 민족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류로 이루어 나가는가 하는 문제들이 여기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역사를 따라서 우리들도 그 복음을 받았고 아직도 중국, 동남아가 열린 것을 보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온 세계에 복음이 확산될 뿐 아니라 복음의 원리가 세상 통치의 원리가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옳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세계를 여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바로 바울을 통해서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게 한 주님께서 친히 교회에 함께 하셔서 미국을 통해서는 여기까지, 우리를 통해서는 다른 영역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이제 노아를 머리로 한 세 아들이 모든 세계민족을 설립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 인류로 교회가 이처럼 완성되므로 세계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이제 11절부터는 ‘그가 빌립보에 건너가서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는가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은 바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했는가 하는 단순한 전도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루디아가 마음이 이렇게 해가지고 예수 믿으면 자기 가정을 개방해야 된다는 등 그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도자들이 옥중에 갇혔을 때도 이처럼 바울과 같이 찬미하고 노래 부르면 옥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훌륭한 사람을 기록하고 우리로 그 본을 받으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시고 어떻게 복음으로 그 곳을 정복해 나가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훌륭하지 않아서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바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는 방식으로 세계에 확장되는가 하는 그 문제. 땅위에 오신 주님이 친히 부활하시고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그 분이 그의 영으로 사도들과 함께 하셔서 어떻게 교회를 보존하시고 세우시는가 하는 문제를 기록한 것이지 여기서 훌륭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어요. 왜 우리들은 루디아처럼 부자가 아니잖아요. 예수 믿으면 루디아처럼 가난한 바울이 가서 전도했는데 제일로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방을 개방해야 하는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사람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바울과 함께하셔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셔서 이제 유럽으로 거너가셔서 그 곳을 정복하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들을 보아야겠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역사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여기에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는 것을 보니까 유대인 세력이 많지 않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10가정만 있으면 회당을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 보면 회당이 없고 그래서 혹시 기도처가 있는가 해서 강가로 나갔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거기 회당이 없습니다. 17장을 보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회당이 있는데 여기 빌립보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14절을 보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 이것이 복음전파에 있어서 제일 처음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17장에도 보면 그런 말들을 볼 수가 있지요. 17장4절에 보면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18장7절에도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는 집에 들어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가면 거기 유대인 회당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심은 곧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세상에 증거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택하심에 합당하지 않게 살았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로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 때도 그렇고 온 세계에 흩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치 못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하 만민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세상에 알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세상제국 왕인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흩어짐이 곧 세상의 구원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일 범죄 하지 않았으면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봉사함으로 구원의 빛이 세상에 비치도록 될 것인데 그들은 그 은혜를 합당하게 순종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들의 흩어짐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비치도록 허락하셨지요. 물론 그것의 완전한 일들은 예수 오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그런 의미로 유대인 중에 믿는자요. 그리고 이제 이방인들이 그 나라로 들어가는 교회 안에서 충만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만 예수 오시기 전의 유대인들을 흩음도 곧 세상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행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약속을 소망하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있고 또 그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다신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기 회당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아브라함의 후손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할례 받은 자들은 아니고 할례는 받지 않았어도 유대인 회당에 참여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러 가면 항상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경건한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즉 예루살렘 회의를 마치고 나서 처음 전도하는 여행에서는 여기 보면 유대인의 회당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들었는데 하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의 전도여행을 보면 반드시 유대 회당입니다. 물론 그 후로도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갑니다만 예루살렘 회의가 있고 난 뒤로 바울이 이방인 교회를 든든히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유럽으로 건너갔을 때 거기는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 있어도 유대인의 회당이 직접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진행되는가를 우리가 여기서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도록 했고 그 가장이 세례를 받고 그 가정이 전도의 근거지가 되도록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태복음 10장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이 그 집안에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냥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게 전파한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구원약속을 세우셨고 그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진행시키시고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유대인들은 그 구원에 합당치 못하게 행동했어도 그들을 통해서 증거 된 복음은 세상에 나타나서 여기 예비 된 이방인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옛 언약의 성취이지 그냥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처음 전파될 때까지라도 여기 바울이 본격적으로 전파했을 때 보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다고 말함으로 옛 언약의 구원약속이 어떻게 여기 주 예수 안에서 성취되는가 하는 말씀을 여기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이처럼 여셨지요. 그리고 기도하는 곳에 우리가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는 자라.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는데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므로 거기서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실은 앞에 있는 기사들과 비교를 해야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땅위에 오셔서 제일 처음 복음을 전파할 때도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쓴 마가복음을 보면 귀신을 쫓아낸 기사가 제일 처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안식의 해가 하나님의 희년이 이루어 졌다고 종이 자유케 되는 그 약속이 이루어 졌다고 그런 방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유대인들에게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방식으로 증거 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거기에 보면 마태복음의 기적은 귀신을 쫓아낸 것을 먼저 말하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고 그리고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고 그렇게 나옵니다. 왜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분은 곧 유대인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셔요 그래서 예수는 누구십니까? 문둥병을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즉 그렇게 해서 네가 제사장에게 보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문둥병을 깨끗케 하신분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문둥병을 깨끗게 하시는 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깨끗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문둥병을 깨끗게 하시는 분으로 기록되고 그 분이 이방인의 장막에도 찾아가셔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방식으로 바로 유대인의 구주가 곧 이방인의 구원자인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제일 처음 이적을 행한 것은 귀신을 쫓아내신 이적이 아니고 성전 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유대 땅이 아니라 사마라아 땅에 가서 이적을 행했을 때는 돈 주고 성령을 살려는 시몬을 저주하므로 그렇게 해서 이방의 권세를 심판하는 방식이지요. 또 바울 사도가 제일 처음 복음을 전파했을 때 구브로 그리고 구브로 섬에 갔을때 보면 베드로나 바울이 한 일을 보면 이방의 권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종을 통해서 심판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방식보다는 귀신들린 자 여기서는 직접 귀신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사람에게 말했지 귀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로 여기 16장은 본격적으로 이방전도에 맞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회당도 안 보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복음은 그전부터 비추고 있었지요. 그런데 거짓된 능력을 행하는 시몬이 큰 능력을 행하고 있어서 성령이 친히 권능으로 그를 저주하므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 사마리아 성에 임한 것을 나타냈습니다. 또 바울이 제일 처음 갔을 때도 유대인 거짓된 유대인을 심판함으로 거기 이방인을 어둠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격적인 이방전도가 이루어지는 여기서는 그런 말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 속에 들린 귀신 그 귀신을 책망해서 나오게 함으로 여기서는 권세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새간을 늑탈하겠는가?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권능으로 임하심을 여기 바울을 통해서 귀신들려서 점하는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을 통해서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 귀신들린 사람이 전도하는 것은 우리들은 생각하기에 그럽니다. 말하자면 점쟁이도 가끔 전도하더라. 그러는데 그런 말이 아니고 여기 귀신은 여러 신들 중에 큰 신을 말하는 것이지 천지를 지으시고 심판하신 분으로 여기 세상 사람에게 증거하지 않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자기들을 지옥의 불로 던지는 분으로 고백했지만 여기 이방인들에게 증거했을 때는 바울이 증거하는 신은 여러 신들 중의 더 높은 신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유일한 하나님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귀신의 가장 고약한 일은 성령의 역사도 자기들과 같은 수준에서 자기들 보다 조금 힘이 센 방식으로 증거 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지요. 어둠이 결코 하나님을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권능에 대하여 친히 이 귀신을 심판해서 거기서 나오게 함으로 바로 귀신들린 여종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로 귀신의 권세에서 이 여종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이 여종이 예수를 믿었는가, 않았는가 여기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바울을 통해서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그 권능을 나타냈는데 귀신을 쫓아냄으로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임했다고 주님께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서들을 잘 보십시요. 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 역사가 16장에서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는가, 그것을 잘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주인이 이제 더 점해서 이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가서 이 사람은 유대인인데 이 성을 소란케 한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고 해서 송사했기 때문에 이방인 상관들이 옷을 벗기고 매로 치고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말은 무슨 말이냐면 로마에는 종교의 자유는 주고 그러면서도 중국에 가면 선교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하자면 로마 시민에게는 다른 나라 도를 전하면 안 됩니다. 종교의 자유는 갖되 로마 시민에게는 다른 도를 가르쳐서는 안 되고, 또 모든 사람이 섬겨야 할 것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라. 이제 예수 믿는 이 사람들을 유대교의 일파로 알고 있습니다. 왜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임하셨는가를 가르치니까. 그렇겠지요. 유대인의 일파로 알고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로마 사람들이 받지 못할 유대교를 전한다는 방식으로 고발해서 말하자면 그 법에 어긋났다 해서 옷을 벗기고 매로 치라고 했습니다. 옷을 벗기고 매로 치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는 행하는 벌이 아닙니다. 태장은 이방인에게 행하는 매이고 로마시민에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인으로 취급해서 매를 많이 때려서 옥에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여기 임해서 깊음 옥에 가두었는데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때 큰 지진인 나서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런 사실들을 우리가 4:31에서도 비슷한 기사를 보지요. 그 때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옥중에 갇혔을 때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바로 그 일로 잡혀 들어가서 옥중에 갇혔었지요. 4:31을 보면 여기서는 좀 더 길게 읽어야 겠습니다. 갇힌 것이 아니고 매질해서 내어 보냈지요. 그들이 돌아와서 교회와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거기 기도한 내용을 쭉 보면 시편2편을 인용해서 기도하고 있지요. 왜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관원들이~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25~)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도 보면 그 터가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7절을 보면 이제 환경까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옥중에 잡혀갔을 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죽었고 다른 사도들은 잡혀갔을 때입니다. 그때 보면 5절부터 모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11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알겠노라 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보면 ‘밤중에 홀연히 지진이 나서 가로되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의 결박된 것을 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런 흐름을 따라 해석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천사를 직접 보냈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고 베드로에게는 천사가 나와 있지요. 그리고 그전에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를 때 그 터가 흔들렸지요. 이런 사실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하신은 터의 흔들림으로 항상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셨을 때 시내 산이 흔들리고 하늘도 찢어지고 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있지요. 또 예수 재림할 때도 그렇게 온 세상이 흔들리고 터가 무너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재림 하시면 이제는 요동치 않을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왜 그 나라는 요동치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거기 완전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거기 거처로 삼으시기 때문에 그것은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 아래 있는 세상이어서 거룩한 하나님이 그 거룩한 교제에로 나타내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이고 그런 의미로는 우리들도 이처럼 혈과 육의 몸을 입고 그 분을 뵙지 못하고 주님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를 받으면 그의 얼굴을 친히 뵙고 살 것입니다. 그때는 두려움이 없이 그를 볼 수가 있지요. 물론 우리가 피조물이므로 경외심을 갖지만 지금처럼 죄인 의식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없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임하심은 터의 움직임, 빽빽한 구름, 또 불,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고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보면 빌기를 다하매 터가 흔들리고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를 건져냈을 때 베드로가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방인의 모든 계획을 무효로 하는 구나 또 4장에서는 그전에 본디오 빌라도와 헤롯이 모여서 주 예수를 거절하더니 지금도 그들이 모여서 주의 교회를 거절하는가. 주님을 핍박했던 세상이 여전히 교회를 핍박해요.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하감하옵시고, 그들의 모든 도모를 무효케 하시고 그들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권능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 기도의 내용과 같은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이처럼 찬송에는 능력이 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그런 말이 아니고 어려운 일 당할 때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 그런 말이 아니고, 또 그전에는 베드로는 잠잤지요. 기도 안 했습니다. 찬송 안했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건져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전에는 천사가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천사가 안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천사를 통해서 그의 계시를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주 예수가 친히 구주로 임하셨고 바로 그런 일을 천사들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알리셨는데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되었고 그 성취된 약속으로 이방인에게 나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천사가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고 온 세계를 흔드시는 주님께서 여기 보니까 땅의 터를 흔들어 거기 자기 종들을 해방시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땅은 또 한번 흔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백성의 구원을 위하심이요. 자기백성의 구원은 세상의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심판의 권능을 통해서 자기 종들을 여기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 보면 이방인에게 권능을 행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임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는 않고 옥중에 가두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을 가둠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도록 주 예수께서 세상의 왕이 아니 것처럼 했어도 부활하신 주님은 온 세상을 지으시고 지금도 온 세상을 보존하실 뿐 아니라 세상을 흔들고 불로 정결케 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자기 나라를 세우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친히 임하셔서 여기 땅을 흔들리게 하고 죄수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났다는 의미와는 이처럼 안 되었지만 흔들리는 방향을 보면 이전에 베드로에게 한 것 보다도 여기서는 큰 권능의 방식으로 나타나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더 진행되는 방식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그러면 자기가 다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래서 자살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하는 말이 그를 말렸지요.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권능으로 임하셔서 자기 종들을 해방시키므로 그 권능으로 귀신에게 시행했을 뿐 아니라 바로 땅의 터를 흔들리게 한 분이고 그처럼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친히 세상에 임했다는 것을 귀신을 제어함으로서 그리고 땅의 터를 흔들리게 함으로 온 세상에 자기를 증거 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이방인 간수가 바울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그 집에 기쁨이 충만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친히 자기를 증거 하심은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심이고 그렇게 해서 날이 샜는데 관원들이 바울을 석방시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로마 사람인데 왜 재판도 하지 않고 공중 앞에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때렸는가. 그러니까 우리를 슬그머니 보내지 말고 관원이 와서 정당한 예의를 갖추어서 우리를 석방시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법이 특징이지 않습니까. 법 없이 로마 백성을 재판함은 옳지 않아요. 그래서 두려워서 그들을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세상에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활용하고 있는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하겠습니다.그가 세상에 어떤 권세를 이용하려는 것보다도 바울이 그저 세상이 받지 못할 이상한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정당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떠난 뒤로도 이 빌립보 교회는 로마 사람이 전혀 받지 못하는 이상한 도를 받는 것처럼 핍박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물론 이런 것이 실용적인 첫째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왜 바울이 단순히 세상의 권세를 이용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이방의 귀신을 쫓아내고 그리고 터를 흔들어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그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 나라를 봉사하는 방식으로 봉사하는 것이 곧 합당한 일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렇게 함으로 땅위에 평화가 유지되고 유지된 평화 가운데서 교회가 번성하고 그리고 모든 고요와 단정함 중에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의 권세들도 합당한 자기 권리를 따라 사회질서를 유지함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처럼 예비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모태로부터 택하신 하나님이라고 갈2장에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이 그동안 배웠던 학문이나 종교적인 훈련 뿐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시민권까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합당한 방식으로 예비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겠고 이 세상의 권세는 비록 그들이 주 예수를 영접해서 하나님을 봉사하지는 않을지라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함으로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요. 바로 그런 의미를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이제 주님 오시도록 까지 세상은 이런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지옥처럼 되지 않고 세상은 질서를 유지하고 유지된 질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된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권세가 바울을 메이려고 해도 바울은 메이지 않습니다. 혹 바울은 매일지 몰라도 바울은 나중에 죽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결단코 매이지 않습니다. 왜 바로 사도와 함께 계신 주님은 온 땅을 지으신 분이요. 세상을 보존하시고 계신 분이어요. 그 분의 손 안에 온 세상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건드릴 세상의 세력이 없습니다. 석방시키기는 마치 관원들이 석방했어도 마치 베드로를 석방해서 이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셨도다. 하고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석방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서 바울이 누군가를 이방인 왕들이 합당하게 바울을 대접함을 통해서 바울이 평안히 갔고 그런 의미로 빌립보 교회고 평강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바울이 핍박을 받으면 거기 빌립보 교회도 함께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해방을 받았으니 빌립보 교회도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이 사도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고난 받음을 우리의 기업으로 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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