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15:36-16:10

찬미예수님 2025. 7. 4. 06:07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5:36-16:10

 

15장 까지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케 되었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사도의 대표자인 베드로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들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에서 파견한 선교사인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여셨는가 하는 사실을 듣고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야고보가 구약의 증거를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했던 참 다윗의 왕국이 다윗의 후손이요 그 왕권을 땅위에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설립되었다고 증거하므로 누구든지 이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신령한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후손의 가문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진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확정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점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상으로 흩어지고 있는 가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냥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베드로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그 은혜에 감사하게 하였고 나중에 대대적으로 이방인이 들어 왔을 때 거기 유대인 형제 중에 이해를 못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걸로 이해를 하는 형제들이 있었을 때에 이방인 교회가 선교했던 열매를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베드로가,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나바와 바울,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인 야고보가 이런 세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래서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예수를 믿음으로 신령한 지체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교회가 하나되었다는 말은 서로 똑같다는 말이 아니고 여러가지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하나됨은 똑같아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가 된 것이고 예수를 믿음은 곧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아래 들어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신 바 인내를 따라서 형제들도 마땅히 형제들의 연약함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그런 사랑의 공동체 정신이 형성되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유대인 중에서 아직까지 복음의 충만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물론 그들도 거짓된 형제들이 아니고 진실된 형제들입니다. 아직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런 형제들을 위해서 이방인 교회가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그리고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을 멀리 하라고 그렇게 하면 평안하고 잘 되리라고 권면 했습니다. 이제 이방인교회가 대표자를 보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자를 보내서 유다와 실라를 보내서 이 일을 이방인 교회에 증거케 하고 이제 크게 화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전에 그들이 처음 교회에서 파송받고 이방땅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제 그들이 있는 여기 안디옥 교회 뿐 아니라 이방인 교회 까지라도 예루살렘 에서 결정한 이 은혜로 교회가 든든히 서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화목할 뿐 아니라 형제와 화목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새 인류여서 교회안에 이런저런 불화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가지고 그들이 처음 전파했던 성에 다니면서 그 교회를 굳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를 원했을 때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서 선교팀이 둘로 갈라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갈라진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경우에는 갈라지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해서 선교팀을 2개로 만들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바나바도 선한 일로.바울도 선한 일로 열심을 내고 있지만 갈라졌을 때 그런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을 하고 맟출 필요는 없지요.요세는 교회가 분쟁중에 갈라져도 아 교회가 분쟁하고 싸우면 굉장히 열심을 냅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도 서로간에 죄를 발견하는데 박사가 될 뿐 아니라 혹시 쫓겨나면 예배당을 짓는데도 자기 전 재산을 바칩니다.얼마나 열심입니까? 그러다 보니 교단이 배가 운동이 되고 좋지 않느냐.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서 교회 화목을 말하고 있어요.싸우느니 갈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런 것은 소위 싸움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가를 다시 선교사로 채용할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이지 요새 교회가 말하는 그런 분쟁은 아닙니다.분쟁이 있으면 옳고 그름은 판정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하나가 되는 것이지 분쟁의 요소는 그대로 놔두고 서로 갈라져서 서로 안싸우면 화평한 것이 아니냐. 그것은 화평이 아닙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할 수 없으면 한 교단에 남아 있어도 의미는 없습니다.그런데도 서로 안싸우는 것이 화평인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정치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본문을 가지고 교회정치에 적용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디모데를 할례시킨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란의 일은 이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디모데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가. 만일 디모데의 일을 기록했으면 갈2장에 나오는 것처럼 디도의 일도 기록해야 할텐데 디도의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록한 목표들이 무엇인가하는 저자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야만 이 책을 바르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그냥 성경 여기저기를 맟추어서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도행전이 기록된 목표를 따라서 해석할 때만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메세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그래서 사도행전은 교회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승천하신 주님께서 땅위에 그의 교회를 설립해서 땅끝까지 정복해 나가시는가 하는 사실을 ,구원역사의 진행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배경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도 이해를 해야 하고 디모데를 할례주는 이야기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예비한 사람은 바울입니다.이방인 교회가 증인으로서 바울과 바나바를 둘 다 안수하여 이방의 선교사로 교회의 파송을 받은 사도로 보내셨어도 예수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예비한 사람은 바울이어요. 그래서 이전에는 거의 대게가 바나바를 앞서서 기록합니다.공적인 회의는 물론 뒤에 보면 앞서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공적인 직함으로 부를 때는 바나바를 앞세워 부르고 있어요.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본래 파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전도는 분명히 예루살렘 교회가 전도했는데 나중에 전도의 핵심지는 안디옥교회로 옮겨졌고 그때 까지라도 파송받은 사람은 바나바와 바울이어서 예루살렘 교회가 거기 함께 움직있습니다.나중에 행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이방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므로 확정된 뒤로 바나바는 제2선으로 물러나고 바울이 전면에 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움직이며 그 핵심 중심지가 어떻게 점점 이방인 교회로 옮겨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그래서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핍박중에 흩어져서 전도했을 때 자기 동족들에게만 전파했는데 나중에는 헬라인에게만 전파했지요. 그리고 헬라인으로만 구성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는데 그 교회를 통해서 이방땅에 선교사를 파견했지요.처음 핍박중에 유대인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파했을때는 유대인에게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너희들은 너희들을 떠나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가노라는 직접적인 어급이 없습니다.단지 흩어져 있는 이방 유대인에게 증거 하므로 이방인의 복음이 확정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파송받은 뒤로 그들의 전파는 뒤에는 너희들이 복음에 합당치 않게 스스로 너희들이 여기므로 우리가 너희들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노라고 직접적으로 유대인의 배교와 이방인의 구원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 예루살렘 교회의 회의가 끝난 뒤로 그 다음에 여기 보면 바울은 전면에 나서고 바나바가 더 훌륭한 일을 하고 바울은 덜했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니고 다른 사도들은 일을 안해서 기록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음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천하만민을 정복하고 있는가.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그가 땅위에 오셨을때는 유대인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왔는데 그리고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준다는 방식으로 그때 이방인은 약속적인 방식으로 조금 있었지 전면적으로 구원의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뒤로 어떻게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며 복음이 천하만민에게 증거되는가 하는 방식으로 그 구원역사의 진행을 지금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경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헤어짐을 이해해야 합니다.물론 여기서 개인적임 다툼이 있지요. 이해력의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이유일뿐 하나님의 배경적 섭리는 이와같다 는 말입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졌을때도 표면적임 이유는 자기 양떼들 때문에 갈라졌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배타적으로 약속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롯은 거기 함께 움직여서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갈른 것이고 롯도 의인이라.하나님께서 롯도 구원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그가 어떻게 세상을 정복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가 하는 큰 역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여기서 개인의 경건성,누가 훌륭하고 누가 좋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개인적인 무엇을 발견해서 도덕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옳지 않아요.단지 그 큰 목표를 설명하는 방식으로만 개인들의 일이 설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배경들을 조금 설명하겠습니다.여기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 여기 마가요한은 행12:12절에도 조금 나와 있지요. 거기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때 교회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행12:12절에 보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가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더라.베드로가 옥에서 천사의 손을 통해 구원받은 뒤로 간 곳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한 자리를 이곳으로 이해를 하고 있지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곳도 이곳일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마가요한이 얼마나 어려서 부터 신앙이 투철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요.그리고 바나바와의 관계는 그의 조카라고 골로새서4장1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까지.말하자면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에 신실히 참여했던 형제들을 말했을때 여기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특별히 마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마가에 대해서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울과 그런 어려운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를 다시 신실한 종으로 추천하고 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바나바와는 더 깊은 친족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또 제사장 레위지파의 가문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아주 신앙도 신실하면서도 바나바와는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잘 알 수가 있었겠지요.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행13:13절에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요.‘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돌아가고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브로 섬에서 제1차 전도 여행을 하고 이제 배를 타고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 갈때 요한이 거기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지요.여기서 설명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아마 그 환경이 대단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전도여행에 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바울의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여기보면 서로 심히 다투어~부탁함을 받고 떠나한 것을 보면 교회가 바로 선교적 사명에 축복해서 보낸 팀들을 바울과 실라의 팀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는가,진짜 신자인가? 가짜 신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신실한 종으로 그렇게 해서 어둠의 세력과 싸우야 되는 군인으로 초청하는 일에 있어서 마가요한은 처음 전도여행에서 바른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만일 마가요한이 나중에 훌륭하게 선 일 때문에 바나바가 그렇게 마가를 잘 감싸고 있으니까 그 훌륭한 일꾼 바울처럼 딱 잘라버리면 쓰지못할 잘못하면 실망했을 사람을 바나바가 용장으로 길렀으니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하냐?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목회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그의 정병들을 파송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의미로 마가요한은 그 직무에 그 이전 방식으로 보았을때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원수와 싸우러 가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그들도 함께 받는 것이고 날마다 생명을 세상에 내어 놓아야할 것인데 만일에 이런 사람이 도중에 뒤로 물러서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왕인 사실이 마가요한을 통해서는 합당하게 증거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가가 어떻게 되었느니 바나바가 마가를 잘 감쌌느니 바울은 성격이 격해서 딱 잘라 버렸으니 하는 개인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그의 군병을 어둠의 세계에 파송하고 있는가 이제 본격적인 이방인 전도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는 바나바가 같이 갔지 않습니까? 물론 바나바와 바울을 안수했어도 여기 회의가 끝난 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택한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승리하시는가 하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 가운데서 이 보문을 해석해야 옳습니다. 바나바는 배타고 다시 구브로 자기고향땅으로 갔고 그리고 바울과 실라. 실라는 유대 예루살렘교회에서 그 대표로 파견했던 신실한 선지자지요. 그 사람을 데리고 육로를 통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를 다녀가면서 교회를 굳게 하니라. 16장4절에 보면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날마다 더하니라(5)’그런 의미로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하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확정한 교회.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위해서 믿음으로 짐을 지는 것이 옳습니다.그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그 일 때문에 교회는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다시는 인간의 행위 율법주의를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신앙도 성숙하고 그렇게 해서 원수의 방해도 더 제거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방인에게 전도된 복음은 잘못하면 유대주의의 한 분파로 이해 되어서 그들끼리 싸우는 일에 대해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어서 정통성은 예루살렘 교회,유대교에 잇는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 성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강력한 반발을 받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경건한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감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음의 기초를 놓았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거침돌이 되어서 장애요소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요소들을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 믿는 숫자도 불어나고 신앙도 확고하게 군어져서 교회가 성장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디모데의 말을 기록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본문의 구조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15:41)는 말이 지금 2차 전도여행을 가는 목표입니다. 왜 안디옥교회 뿐 아니마 그가 처음 복음을 전했던 교회들도 거기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확정한 진리로 굳게서야 되거든요. 바로 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디모데 사건도 그 배경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처음과 마지막이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하니라.날마다 교회가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더하더라. 1541절과 16장5절은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여기 장으로 나뉜 것이 그런 의미로 우리를 방해 시킵니다.본래 성경은 장과 절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서 쓴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문맥을 따라 바르게 해석을 해야 하는 데 장을 따라 해석을 하면 어쩔 때 우리의 사고력에 장애를 가져옵니다.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잘 나뉘어 있지만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기 디모데는 어머니도 믿는 유대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 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는 유대인으로 계산됩니다. 또 디모데는 그 믿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가 할례받지 않는 자로 알려지면 그는 배교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고 유대인 사회에 그는 합당하게 들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할례자의 종이 되시고 그가 친히 할례를 받으셔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처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이런 은혜의 일을 전도했을 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의 종의 형상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방식으로 이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은 사49-60장의 예언의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지요. 지금 처음 이방인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49장을 보십시다. 이방을 구원하는 종을 임명하는 내용입니다. 1-7절까지보면섬들아 나를 들으라~거룩한 자로 임하심이니라여기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과 그의 종을 연결시키면서도 이스라엘과 세상을 구원하는 종그러면서도 모든 권세자들에게 버림받을 종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거기 6절 보면 야곱의 12지파를 돌아오게 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고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구원을 베풀어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어떻게 합니까? 그가 세상의 관원들에게 멸시와 천시를 받음으로서 일을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세상의 전파자로 직접적으로 나가셨는가? 아니지요.바로 땅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세상의 고난과 세상의 멸시와 천시를 받으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그 분 그 분이 세상의 구원자로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십니다.그 분은 땅위에서 멸시와 천시를 받고 죽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전파자로 나가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가 보좌 우편에 취임하셔서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으시고 사도들을 통해서 바로 이스라엘에 세상에 여호와의 종으로 임하신 그 분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할례자의 종으로 오셨던 것처럼 바울도 자기 자신이 디모데를 데려다 할례를 행함을 통해서 바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여기서 주님께서 예언의 약속을 이루고 있는 방식이지요. 특별히 여기보면 6절에 보면 이방의 빛을 삼아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60:9절을 보면 이방에 대한 문제가 좀 더 자세한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여기 보면 원방이 이스라엘의 포로된 백성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그은,금을 가지고 돌아와서 예루살렘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그러니까 지중해 주변에는 그런 섬들 먼저 구브로로 복음이 전파되고 그 다음에 소아시아 지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은금이 실려온 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잘못해석하고 그들이 세상의 중심지가 되면 세상 재물은 다 자기 것이 될 줄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성취되기는 고레스 왕이 자기 왕국의 재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 보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했던 때 처음 시작되었고 바로 주 안에서 천하만민이 주 예수 앞으로 돌아온 일에 있어서 그 완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그러나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세상의 재물이 모아들 것을 문자 그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뒤로 이스라엘이 다시 신정국가로 회복된 적도 없고 다시 회복된 성소도 옛날처럼 법궤가 있는 성소가 아닙니다. 단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다 죽이리라고 명한 백성에게도 만나와 반석의 물로 길렀던 것처럼 이미 버림받은 백성에게도 옛제도의 빛 가운데서 오실 주님을 대망할 수 있도록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빛나고 있는 것 뿐이지 다시 옛제도의 영광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재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왕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모든 생을 헌신하고있지 않습니까?그렇게 하므로 참자유가,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빛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이 여기 지금 이방전도가 시작되는 처음 13장에서 출발되었을 뿐 아니라 여기 이방인의 사도로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사도를 통해서 다시 복음이 전파되었을때 여기보면 바울은 참으로 종의 종으로 예수가 할례자의 종으로 오셔서 유대인의 구주로 일하셨던 것처럼 바울과 디모데도 할례받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디모데는 유대인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할례받지 않으면 유대인 사회에서 배교자고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그들을 위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할례받은 의미와 같습니다.자신도 할례를 받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도 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끼리 화목의 조건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바로 유대인들에게 덕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으로 인도하도록 허기 위해서 그도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고 그렇게 해서 사도들의 규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가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그는 참으로 자유자여서 종이 아닙니다.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어서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그래서 예수게서 참으로 피조물의 형상으로 오시고 죄인의 형상으로 오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처럼 바울도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그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디모데와 함께 하셔서 이처럼 낮아진 위치에서 복음을 증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10절까지 보면 그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려고 했습니다. 그가 제일 처음 전도한 곳이 소아시아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터어키 지역이지요.그랬는데 성령께서 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그러니까 흑해 입구까지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고 흑해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고 위로 로라가려고 했는데 성령이 막아서 그가 아래지방으로 내려와서 드로아 지방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께서 바울을 인도했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사도는 계시기관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므로 하나님을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기도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할 일이지 성령이 가는 길에 내 발을 어떻게 해달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셨지요.그러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함께 그의 전도여행을 가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이 낮아지심으로 디모데를 할례시키셔서 할례자의 종처럼 유대인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때 마게도냐 사람 한 사람이 일어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그래서 마치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가정에 갔던 것처럼 이처럼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자기를 그리로 인도하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도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여기서 얼마나 진행되었는가 하는 방식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목사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역지로 옮기겠지만 그저 어느 교회에서 하도 일이 안되어서 옮겨놓고 다른 곳에서 잘 되니까 아 성령이 나를 인도 하셨구나. 그것이 잘되고 못되고가 아니라 노회에서 만일에 합당하게 결정해서 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그곳에서 잘되니까 아따 그 교회에서 내가 괜히 고생을 했구나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되지요. 그가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노회가 결정했으면 일단 하나님의 뜻으로 받는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목회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성취요 진행입니다. 우리들이 창9장을 보면 노아가 세 아들들을 축복하는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가나안은 종의 종이되고 하나님은 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리고 야벳은 샘의 장막에 거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야벳은 창대하다는 말이지요.하나님은 샘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벳은 샘의 장막에 거해서 그 영토를 넓힐 것입니다.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은 샘의 하나님으로 임하셨습니다.그리고 야벳족속이 말하자면 동서를 가르고 있는 것이 이 흑해를 가르고 있는 해협이지요.그래서 이 복음이아시아 지방에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고 그 유럽이 곧 복음을 받고 거기서 부터 복음이 서양지방으로 돌아가고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고 있습니다.세계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양민족이지요.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자기 나라를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미국으로 그리고 동양까지 이 어둠의 영역까지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친히 하나님이 그 구원 약속을 이처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그저 우리의 선교지를 하나님이 직접 알선한다는 방식으로 해석할 조항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첫 전도여행에서 이방인의 구원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 소아시아지방에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부르신 일들을 교회가 알았던 것처럼 이제 그런 의미로 아직까지 샘지방 샘족속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부터 말하자면 본격적으로 서양지방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세계가 로마제국이기 때문에 한 나라로 있어도 종족적으로는 다른 방식이지요.이제 그 곳으로 거너감으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처음 노아를 통해서 종족적인 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부터 어떻게 전 세계가 지금 확장되고 있는가. 샘의 장막에 임하신 그 하나님께서 야벳을 그 장막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가 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할 메세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도행전 시대의 그런 단순한 역사만을 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들은 이런 역사만을 말하면 심심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심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확고히 세웁니다. 바울도 그랬으니 우리도 그런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교하면 안됩니다.사도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다고 해서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너도 사도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리라고 해서 우리에게 힘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구원 역사를 바르게 설명함므로 우리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웁니다. 그래서 바로 이 구원역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 친히 이루신 구원의 은혜의 일을 설명하면 곧 그것이 우리의 생명인 사실은 그 역사가 여기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를 통해서 이 구원역사를 진행시킨 하나님이 세상을 지금까지 정복하셨고 어둠의 종으로 있던 우리에게 까지 이 생명의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나라는 주 예수 오셔서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기 까지 땅위를 정복할 것입니다. 바로 사도를 세우셔서 사도안에 임하셔서 그 직무를 수행하던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러 우리안에 임하셔서 우리로 사도적 직무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교회를 붙드십니다.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마음 맞는 사람끼리 서로 모여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들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낳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우리가 지금은 셋방살다 죽을지 모르나 하나님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하나님이 주인이시요.그가 그 종들과 함께 하셔서 그 나라를 확장시키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뜻은 결단코 무너지는 법은 없을 것이고 재림하시도록 까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고 세상을 정복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들이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그 일을 합니다.우리들이 사도를 압니까? 칼빈을 압니까? 그들도 그 시대에 참으로 외로웠습니다.그리고 그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누가 그들을 알았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진리는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주님께서 진리요,생명이어서 그의 교회를 땅위에서 끊어지는 법이 없고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오시도록 가지 교회는 승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전에 죽었던 순교자들,개혁자들은 실패한 자들이 아니라 신실한 정으로 자기의 생명으로 생명의 주 하나님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매를 보지 못햇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는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보아야할 힘이요,비젼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닮아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울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실 것임으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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