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5:19-35
우리는 사도행전의 성격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단지 사도들의 행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도들안에서 일하신 행적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안에서 행하신 그 구원의 일을 기록한 것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시간질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며 또 그 구원을 완전에로 인도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전에는 여러가지 모양을 통해서 여러 조상들에게 나타내셨고 때가되매 아들안에서 친히 세상에 임하셨는가 하나님이 아들안에서 친히 우리 하나님으로 임하심 그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그런 의미로 전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책입니다. 아니!히브리서 1:1절에서 처럼 ‘하나님은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시고 또 그가 세상을 보존하시고 또 그가 세상의 구속자요.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안에서 친히 우리 구원자로 오시는가 하는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어서 곧 우리들은 성경에서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 일을 하시면 곧 그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관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것도 그냥 지으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새겨져 있어서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거울이요 우리가 참다웁게 믿음을 가지면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껴야 합니다.그것이 전 성경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여서 이제 예수 재림하셔서 만물을 처음 지으셨던 그 세계의 목표에로 완성하시기까지 하나님은 구원의 일로 역사를 인도하십니다. 단지 세계가 사도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이 하나님의 계시기관으로 있는 것이고 신약시대에 뿐이 아니라 이제 사도들을 통해서 설립된 교회시대도 우리들은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증거하는 빛과 소금으로 계시적인 직무에로 서 있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일로 일하심이기 때문에 사도행전 까지라도 그 시간의 질서 안에서 그 구원의 발전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과의 발전 뿐 아니라 구약안에도 언약의 발전이 있는 것처럼 신약 안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발전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그때로 끝이 난 것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여기 발전이 있는 사실을 그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령 행15장은 이전의 발전으로 보면 행10,11장에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보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고 이전에 레위기에서 부정하다고 정했던 모든 것을 잡아 먹도록 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율법의 장벽을 폐하시고 그렇게 해서 이방인이 함께 깨끗함을 받은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오순절에 성령을 부으셔서 성령으로 세례하시고 성령으로 깨끗케 해서 새롭게 지으셨던 것처럼 고넬료를 새롭게 했음을 친히 목격했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따라 그가 믿음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교회에 그 사실을 보고함으로 이제 교회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하만민을 하나님의 아들의 몸으로 접붙이시는가 하는 사실을 교회가 감사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때는 고넬료 한 명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수 사도인 베드로가 친히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고 돌아와서 교회에 보고함으로 이제 교회의 기초가 놓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행15장은 그것의 충만한 열매로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떻든 그 이전에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방땅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또 그들이 핍박을 통해 흩어짐을통해서 흩어지면서 흩어져 있는 자기의 동족들,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 그들의 일부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그들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때부터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출발된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보면 그전에는 유대인들이 먼저 였는데 이제는 행 13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셨고 이방인에게로 복음을 향한다는 방식으로 복음의 결론이 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지요. 그냥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대되는가를 분명히 그 시간의 발전안에서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처음 사도행전에서 복음전파와 그리고 13장에서의복음전파의 특징이 다릅니다. 여기 그런 의미로 15장의 회의도 처음 사도행전 처음에서 복음전파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마지막에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의 가정에 보냄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처럼 이미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전파가 되었던 것이 행15장에서 그런 의미로 새로운 마무리를 짖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가 그들의 대표자를 택해서 예루살렘교회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을 믿음으로 깨끗케 했는가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한 회의가 이 회의입니다. 그래서 이 회의는 그때 총회가 아니지요. 왜 모든 교회가 대표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와 이방인교회로서 선교기지를 이루었던 안디옥교회가 모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을 깨끗케 하셨는가 하는 은혜의 일들을 듣도록했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사도로 택하신 베드로를 통해서 행하신 일들을 유대인교회가 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이방인의,사도로서 바나바와 바울을 택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예루살렘교회가 들으므로 바로 그 일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이제 그 은혜가 더 진행된 것을 예루살렘교회도 그 대표자를 이제 이방인교회에 두루보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한 형제로 부르셨는가하는 사실을 이방인 땅에서 시인하고 고백하고 그렇게 하게 하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을 허물으시고 천하만민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르신 사실을 여기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도 분명한 전진이 있는 것이어서 그냥 사도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단순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예루살렘을 출발해서 천하만민을 자기 교제에로 부르시는가 하는 그의 은혜의 일하심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19절 부터 앍었는데 여기서는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다시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할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조상으로 택하셨고 그 믿음을 인치실때 할례의 약속을 하셨고 할례의 약속을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왜 아브라함을 택하셨는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도를 지키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게 창17장에 말씀을 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할례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산될 뿐 아니라 그들은 할례받음으로 이방인처럼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법을 지켜야하는 의무아래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법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형성했을 때 그 나라의 통치의 법으로 생명의 법으로 모세에게 도덕법인 10계명을 주시고 또 그들과 함께하는 거룩한 약속으로 여러 의식법을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그들은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아래 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까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그들은 새로운 출생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로 계산되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실은 유대인만 위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중에 민족주의적인 열정까지 있어서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되어서 나중에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즐은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너희들이 할례를 받으려고 안식일도 범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할례는 모세제도의 단순한 하나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할례를 시행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할례가 모든 율법의 머리입니다.전 내용이어요. 왜 그들은 할례받으므로 언약백성으로 계산되거든요.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받으므로 하나님의 법아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외적인 할례를 받으므로 외적인 율법아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할례의 제도를 통해서 새로운 출생을 약속한 것이고 그들은 믿음안에서 마음에 할례를 받으므로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사모하는 것이 믿음이요 옳은 일이고 구약때도 경건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사모했습니다. 단지 그 죄를 이기는 성결의 생활에 있어서 신약신자처럼 능력의 삶을 살지 못한 것 뿐이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모한다고 롬7장에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례를 받으라. 그 말은 그들이 율법아래 있어야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없이 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셨다고 분명히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교회가 모여서 그런 일을 확정하게되었습니다. 그 일에 베드로가 사도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그리고 이방인 사도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닙께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일들을 설명하고 그리고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자로 있어도 그는 사도는 아닙니다.어떻게 보면 교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이제 야고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약의 약속을 성취해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수축한다는 약속을 이루셨는가 참으로 주 예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국을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이루시므로 이제는 유대인 뿐 아니라 천하만민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고백토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사도와 이방인교회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서 그 일을 고백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한 몸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엇는데 그래도 그들안에는 여러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문제를 결의한 것이 여기의 내용입니다. 왜 롬15장에서도 바울사도께서 로마교회에 그런 사실을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로마교회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5장1절 부터 보면 우리 강한자가~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6) 그렇게 쭉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셨는가 하는 사실을 쭉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따라서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부터 똑같은 위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에 똑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그들을 다 믿음으로 깨끗케 했고 다 주님의 몸의 지체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셔서 그들로 한 생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가 살아야할 삶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기19절 이하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는 그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가 이방인교회와 이일을 협의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결의한 것을 모든 교회가 다 이래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왜 시대적인 차이와 장소적인 차이가 있거든요. 이 원리는 모든교회에 보편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롬15장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결의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21)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흩으셨어도 그들의 흩어짐이 세상의 구원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흩으셨어도 이방인은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부터 그리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포로될 때부터 그리고 이어서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할 때 유대인들은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많아 흩어져 있던 지방이 애굽과 수리아 소아시아 지방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거기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어서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거기 회당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웁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뒤로는 성전 중심으로 예배적인 중심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오실 자를 대망하는 그런 시대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어떻든 10가정만 모이면 회당을 세우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대대로 교훈을 받고 잇는 것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생사를 걸고 하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노아 당시때도 처음부터 명령되었던 것처럼 피를 먹지 않고 그런 의미로 목메어 죽인 것을 피와 관계 있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그들은 우상에 대해서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로는 다시 그들은 옛날 방식처럼 우상 섬기는 방식으로는 전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런 일에 무관했습니다. 그들은 그전에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참 생명이시요 완전한 생명으로 그들을 복 주실 것을 하나님께서 만물을 부정하다고 판결하시고 그 중에 일부를 거룩하다고 구별하셔서 하나님과 함께사는 생명으로 그들을 복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을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그것까지라도 죽어버리면 부정해서 왜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먹으면 진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완전한 생명은 아니고 또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어서 아직은 그들이 사망가운데 같혀 있었어도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정죄한 세계 가운데서도 일부를 거룩하다고 구별해서 자기 거룩에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먹도록 생명으로 먹도록 선물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참 생명이심을 거기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대대로 그런 일에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사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그들은 먹고 마심을 생명으로 알고 마음데로 먹고 편히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돌아 왔을 때 고린도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들이 직접적인 우상숭배에서는 돌아왔다고 살전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우상의 재물을 먹는 그들은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더러운 것 그런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우상과 관계있이 먹으면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런 일에 대단히 무관심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음행,아마 헬라풍속인지 로마풍속인지 아마 근친 결혼이 있는 모양입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레위기 18장을 보면 음행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해요.이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계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등 쭉 그런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이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 25장입니까? 아그립바왕과 버니개가 이 두사람이 바울을 만나려고 나왔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에서 헤롯임금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진실한 하나님의 종 롬14장에서 하는 말이 그런 말이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닮아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종으로 이방인의 종으로 보내셔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부르셨지 않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이 하나님을 닮아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신 참으로 형제를 위해서 선을 이루고 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일을 본받으므로 우리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 보좌에 있는 분이 낮아지셔서 친히 할례의 종으로 율법의 종으로 임하셨습니까? 거룩한 창조자가 친히 죄인의 형상을 입으시고 오셔서 그들을 품에 안으셨을 때 그러면 그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알것 같으면 겸비하심을 알것같으면 우리들은 어떻게 형제들을 아는 것이라고 롬 14장에 설명하고 있지요. 바로 그것을 이방인교회에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양심의 진실함에 따라 하는데도 아직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이 일을 위해서 자기 믿음의 형제들이 싫어하는 그런 문제를 하지 않도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결의하고 있습니다. 한 몸된 증거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사랑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교회는 분명히 자유합니다. 그 자유는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요 그러므로 그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요. 형제를 섬기는 자유여서 결단코 무거운짐이 아닙니다. 왜 자기들의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양보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결단코 자기들을 수고롭게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니고 오히려 사랑으로 형제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표자를 보냈습니다. 이방인교회가 예루살렘의 모교회에 대표자를 보낸 것처럼 이제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교회에 대표자를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고 그렇게 해서 참으로 교회가 주 예수 안에서 평강을얻고 바로 이 대표자들이 이방인교회에 참여해서 함께 먹고 마시고 신령한 교제를 나누므로 참다운 평강을 그들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방선교가 일단락을 짓습니다.그리고 이다음부터 바울이 본격적으로 더 넓은 범위로 헬라화 도시로 건너가고 특별히 유럽으로 건너가는 기사가 여기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어요. 유럽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까지라도 그 역사의 발전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냥 똑같은 사건만 교훈만 발견해 가지고는 그전에도 이런 화목이 잇었고 지금도 화목이 있고 해서는 안되고 그 화목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그의 교제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각각은 차이가 있습니다.구원섭리를 따라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 뿐 아니라 사람은 각양 다릅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법 즉 우리를 통치하는 신령한 도덕법이 아니고 직접적인 율법에 대하여 관계가 없으면 그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은 사랑의 짐을 짊어지심으로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고 우리들은 똑 같아서 하나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나중된자를 위해서 먼저된 자가 사랑의 수고의 짐을 짊어지고 그도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거침이 되지 않도록 그런 의미에서 선을 세우고 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나라 사람이 생각하는 덕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하나님을 닮도록 하느데 있어서 우리가 서로 형제에게 거침이 되지 않도록 형제의 짐을 져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술 담배를 금지한 것은 처음에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인데 지금은 어떻게 보면 이방인에게 덕이 되게 한다는 의미로서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판단을 잘 못하겠어요. 온 교회가 한 잔씩 먹어버려야 할 것인지 그렇게 해서 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런데 이방인들은 술 안먹는 것을 굉장히 좋게 생각하거든요. 교회가 안 먹는 것을 그럼 얼마나 덕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로 먹지 않도록 결의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먹는 자체를 죄로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 자체를 한 번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피곤해서 한 잔 먹고 잤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 일로 회개하고 울 것은 없고 마음이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술마시는 것을 이방인이 알고 또는 목사가 한 잔 먹더라고 해서 그 교회는 가짜 교회라고 그러면 그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닙니까? 자기에게 꼭 생명적인 조항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술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요. 술 없어서 피곤을 푸는 것이 없어요. 그럴 조항 같으면 우리가 그것들을 절제하므로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전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그런 것이 교회적인 문제로 일어나면 교회가 결의해야할 것이고 그런 일이 아니면 각자가 자기 양심을 따라 절제해야 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보편적으로 신약에 있으니까 지금도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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