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5:1-18
이방인이 믿음으로 깨끗케된 사실에 대해서는 행10장과 행11장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고넬료의 가정에 보낸 기사에서 확정이 되었습니다.1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가정에 보내셔서 베드로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깨끗케하신 사실을 예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설명할 때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이 거기 임하심으로 베드로로 증인으로 삼으셨지요.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했다고 비방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설명해서 그들이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이것은 대대적으로 이방인이 들어왔던 것이 아니고 한 개인에 대해서 대표자인 베드로가 그 일을 행했고 유대교회가 그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 15장에는 그런 개인적인 한 증거로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제 대대적으로 이방인이 들어왔고 그리고 이제 베드로를 보내서 이방인을 전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이방에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 이방인 교회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행한 일을 예루살렘교회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지어지고 있습니다.이것은 교회가 결의해서 된 것이 아니고 교회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러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방식이지요.그런 의미로 베드로가 사도의 대표자로서 이방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한 증거로 고넬료를 받아들였던 일이 여기 15장에서 완전히 열매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 1차 전도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을 믿음으로 구원하신 사실을 교회에 알렸을 때 교회가 굉장히 기뻐했습니다.그리고 안디옥교회에서 오랬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랬는데 예루살렘으로 몇몇 형제들이 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하는 말이 이방인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미혹했고(1절) 그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버면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한 사실을 바울과 바나바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와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천하만민을 대대적으로 구원했는가하는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가 그 일을 함께 감사하고 확증하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말은 할례를 받으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두가지 대표적인 의미가 있는데 그들은 할례받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한 것이고 할례받음으로 모든 율법의 의무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할례받는다는 말에는 이렇게 두가지 의미가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공로주의적인 개념이 있을 뿐 아니라 유대인만 할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직 유대인만 구원을 받는 것이고 이방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국수주의적인 소위 민족주의적인 개념이 여기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남자 여자 상관없이 다 주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깨끗케 했는데도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떻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시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교회에서 신실한 몇 형제를 택해서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쭉 가면서 육로로 간 것이지요. 가면서 거기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대적으로 이방인들을 부르셨는가.제1차선교여행의 성공담을 이야기했을 때 거기 형제들이 다 크게 기뻐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가 최종적으로 확증한 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마땅하니라’(4,5)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아닌데도 상당히 유력한 사람들이고 그들까지라도 아직도 유대주의 율법의 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합당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는 정확하게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베드로 같은 사도까지라도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으로 믿는 형제들과 함께 먹고 마시다가 이 유대주의 열심자들이 왔을 때 그들을 피해서 외식했고 그때 바나바까지라도 외식해서 바울 사도로 부터 되개 면책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11절 부터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굉장히 큰 장벽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셨기 때문에 그 구분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 그들에게는 넘어지는 거침돌이 되어서 그들은 그것을 잘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심지어 우리들이 사도행전 기사만 보더라도 베드로까지라도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가정으로 보냈을 때 굉장히 머뭇거리고 간 것입니다.하나님의 황상이 있어서 가기는 갔어도 굉장히 머뭇거리면서 갔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계시의 방법을 하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합당하게 그런 일을 했을까 상당히 의심스러울 만큼 그 장벽이 큽니다. 왜 하나님께서 원수되게한 그런 구분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이방인과 그런 종교적인 교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이방에 증거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셨어도 그들은 이방인과 구별되도록 그 직무를 감당한 것이지 그들과 먹고 마심의 교제를 나누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는 음식물을 통해서 낸 구원의 길을 멸시하는 것이어서 바로 예수안에 있는 구원이 아니라 먹고 마심을 구원으로 알고 있는 이방인과 같은 개념이어서 그렇게 교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일을 보았을때 여기 바리새파중에 믿는 몇명이 했을때 그들까지라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두웟을 것으로 이해를 해야할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5장을 보아도 로마도시에 많은 유대인 회당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도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자를 말했을때 믿음이 약한자는 유대주의 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양심은 진실한데 성경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해서 말하자면 자기몸의 건강도 보살피지 않고 먹지않는 신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된 신자는 아닌데 성경을 이해하는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신자들이지요 우리들도 그전에는 이해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 양심의 진실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지않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리석은 일이었는데 그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했어요 왜 종교적인 어둠은 우상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강력한 것이어서 복음을 깨달으면 아주 단순한 문제를 몰랐을 때는 그렇게 이해력 부족에서 생사를 걸고 그렇게 하게 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여기 지도층 인물들 중에서도 그런 견해를 가진자 들이 있어서 변론들을 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8절을 보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여기 많은 변론이 있은후에 하는것을 보면 사도들은 아니겠지만 장로들 교회에 세운 그 직임자들 사이에서 까지라도 그런 의견을 가진 일부 인사들이 있는것을 알 수가 있겠지요.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증거했읍니다.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그런 목표로 열쇠를 가진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대를 통해서 고넬료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그가 처음 10,11장에서 체험했던 증거를 다시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교회가 함께 모여있는 이 회의에서 증거했습니다. 그런 처음 증거는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증거했고 그때는 이방인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왔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고넬료 한 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 이방인 교회지요. 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교회에서 선교사로 택한 대표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인교회가 유대인교회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구원의 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몸의 교제로 부르셨는가 하는 은혜의 일들을 고백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때도 베드로가 제일먼저 그런 발언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베드로를 그렇게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자는 이방인과 유대인 상관없이 부르시는 줄 아노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려고 유대인을 구분한 것이지 유대인만 구원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벌써 사도시대까지라도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거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함께 회당에 앉아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들어와 있지 않지만 이미 유대인 회당에 경건한 이방인들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들이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제 그 일이 주님께서 친히 그의 성령을 부으심으로 함께 깨끗게 했고 함께 믿음으로 생명을 얻도록 했다는 은혜의 일을 베드로가 증거를 했습니다. 그것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그가 주 예수께서 행한 선한 그 은혜의 일들을 증거했을때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이 거기도 임해서 그들로 함께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일을 찬양케 하므로 그때 베드로가 깨달았고 하나님은 민족에 상관없이 어디있든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부르시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렇게 베드로가 고백했고 그리고 거기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연합되도록 했던 거시지요.그 일을 여기서 다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 증거만 그럴 뿐 아니라 구약성경까지라도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11절에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왜? 10절에 보면 우리와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한 멍애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조상들도 율법을 지켜 구원받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율법은 오히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서 참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면 그들안에 단순히 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죄에 대한 능력이 잇어서 그들이 탄식하고 끊임없이 투쟁해도 온전한 의를 행하지 못하는 비참함이 있는 사실을 롬 7장에서 바울은 설명하고 있지요.자기안에 두 법이 있어 싸우는데 육체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자기를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리도다.하면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하나님이 우리 옛 본성의 약함 때문에 율법의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와 같은 본성의 질서로 보내시고 그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 옛 본성을 심판하시고 그의 영을 우리의 새 본성으로 부으셔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가 우리 마음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신다고 롬 8장에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상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믿음으로 율법을 행했던 것이지 율법을 지킨 공로로 그 의가 완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사람으로 보았을 때 율법을 지켜서 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옶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그들도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제관계에서 그 법을 마음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것이 공로가 되어서 그들이 구원이 되엇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구약때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신약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조상들도 그 멍에를 한 번 도 맨 적이 없습니다. 왜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할때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서 강림하시고 그들은 하나님과 간격이 너무 멀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의로운 하나님을 뵐 수가 없는 것이지요. 또 그 뒤로도 단번에 범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고 40년 동안에 다 죽었지 않아요. 그리고 조상들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어도 이스라엘 민족은 국가까지 없어져 버리고 다시는 옛 체계로 복귀가 안되었거든요.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우리만 특수하며 이방인들은 다 개며 우리들은 율법을 지키면 깨끗케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율법지킴이 마음을 깨끗케하는 방식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환상을 주셔서 고넬료에게 베푸셨던 은혜의 일을 증거하고 그리고 구약을 설명하므로 우리 조상들도 메지 못할 멍에를 어떻게 해서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그들이나 우리나 다 믿음으로 동일하게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이처럼 사도의 대표자로써 분명히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12절에 보면 ‘온 무리가 가만이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한 표적과~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2-13절) 그러니까 성경에 대한 토론을 하고 과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 가정에 이런 일 하셨는 데 하나님께서 그 일이 단순한 표적이고 머리로서 나타낸 일이고 이제는 그 구체적인 열매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안에서 열매로 맺었거든요. 그런 일에 대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의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 증거를 듣고 야고보가 마지막에 일어나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의견을 제시하여 어떻게 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회를 화목케 할 것인가 하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 19-21절이지요.지금 야고보가 증거한 것은 야고보는 사도가 아니지요.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어도 사도는 아니지요.그러니까 교회의 기초로 사도들과 그리고 유대인교회와 이방인교회가 모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한 몸에로 부르셨는가 하는 구원의 일들을 고백하고 바로 그 은혜 때문에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하는 것인가를 지금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야고보는 그런 의미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의 대표자라고 합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의 위치에서 수고했고 야고보는 율법을 지킨 사람으로서 유대인 중에서도 의인으로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단지 그는 구약의 율법을 지켰어도 율법주의는 아니었지요.
이제 예수께서 섭리를 따라 A.D.70년에 율법의 모든 근거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시고 그리고 율법을 시행하는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흩어 버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의 제도를 끝마쳤다고 증거하기까지 섭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과도기적인 상태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율법주의자가 아니고 야고보서에서 하는 것도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유케하는 율법 그 율법이 시행되는 사람이지 그 선행이 선택의 증거지 선을 행하지 않은 믿음은 마귀도 기지고 있는 믿음이라.그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습니다.참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결단코 율법주의자는 아니어요. 그래서 여기 야고보가 일어나서 말하고 있습니다. 14절‘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시므온이 고하였더니’ 왜?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입니다.‘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다. ~주의 말씀이라함과 같으니라’(18) 여기 인용 구절은 아모스9장11절 이지요.11절 부터 보면‘그 날에 내가~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절) 그러면서 뒤에 가나안 땅의 큰 축복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그리고 남 유다는 웃시야 왕 두 임금 때 남과 북이 옛 영토를 회복하고 상당히 부강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이처럼 부강했기 때문에 그들의 부강함이 그들이 의로워서 그런 줄 알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우상섬김이 더 심했고 당시의 웃시야 임금은 스스로 제사장의 자리에서 제사지내려다 문둥병자가 된 사실을 알 수 있잖아요. 국가가 강성했을 때 하나님의 속죄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처럼 그 왕이 교만해서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당시에는 너무너무 부요해서 여름 궁 겨울 궁이 있고 상아침상에 눞고 또 여인들은 바산 암소처럼 살지고 금고리 귀고리 코고리,아기죽거리며 다니며 이런 말들이 있지요.그러니까 굉장히 부요했습니다.부한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그들이 과부의 옷을 전당잡아서 성전에 눞고 한 방식으로 굉장히 타락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부요함이 이 세상에 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그 의로우심을 따라 모든 죄인들을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만 아시고 그들을 언약으로 품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지않고 깨끗케해서 그들을 돌이킬 것입니다. 거기 8절 부터 보면 ‘보라 주 여호와 내가~칼에 죽으리라(10)’하나님은 이방인 유대인이든 범죄자는 반드시 심판하시고 그러나 언약백성들은 심판하지 않고 그들을 깨끗케 해서 채질을 해도 알맹이는 버리지 않고 깨끗케하리라고 말씅하고 있고 그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됨을 자랑하고 죄 중에 평안한 사람은 다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그 날은’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것은 다윗의 왕국을 일으킨다는 말이 되겠지요.다윗의 집 하면 다윗의 왕국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옛적의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그리고‘저희도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 심판하시고 거기 남은 백성들이 다 다윗의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즉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시겠다.그처럼 말씀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나라는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1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요새말로 하면 3모작 4모작 한다는 말이겠지요. 쉬지 않고 소출한다는 말이 되겠지요.‘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이니라(15)’
이처럼 그 나라가 영원 무궁하고 복주심이 풍성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요.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항상 가나안 땅입니다. 왜 처음 언약이 아브라한에게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은 그 땅을 목표로 하고있지요.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 왔을 때는 다시 옛 성전은 지어지지 않습니다.거기 법궤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다시 건설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도 마치 광야에서 그들을 죽이겠다고 한 뒤로도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 완정히 옮긴 뒤로도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거기 예 성소의 제도들을 남기셔서 그 빛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이 소망 중에 살도록 했어요. 그러니 은혜를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어도 옛날의 제도들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다시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것은 아니지요. 그 자리에 다시 지었어도 법궤가 없어요. 법궤가 없으면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에 없는 것이어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돌아 왔다고 했을때 단순히 옛 제도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옛 제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옛제도의 빛 가운데서 비추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구약 언어의 최종 종결점이 항상 가나안 땅으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아모스서를 야고보가 바르게 해석을 했습니다. 사도행전15장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주를 찾게하려함이니라(17)’ 구약때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머리적인 위치로 온 남은 백성은 하나님이 다 심판할 것인데 그 남은 백성들이 바로 다윗의 왕국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다윗 왕국이 우주적인 왕국이 되리라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당하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누구십니까?다윗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분 이전에는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팔레스틴의 그 왕국을 나타냈지만 이제는 참 아들이신 하나님 나라 왕이신 아들을 통해서는 천하만민으로 구성된 왕국을 건설하시고 그렇게 해서 천하만민 중에 예비된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이렇게 구약의 회복의 약속이 주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야고보가 합당하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교회가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합당히 말하므로 이처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모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하만민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왕국 한 몸으로 연합시키셨는가 하는 이처럼 시인하고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이 회의를 통해서 다시는 이방인들이 이런 일을 통해서 괴로움 받지 않고 복음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이 회의를 통해서 확증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회의가 없다 할지라도 그 자유는 보장된 것이어서 갈 2장을 보면 바울의 말이 아주 재미 있어요. 갈2:1절 부터 보면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아마 이 예루살렘회의를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10)’ 예루살렘교회로 바울이 많은 헌금을 해 가지고 올라가고 있지요. 그리고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복음의 자유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인 베드로가 믿음을 따라 서지 못했을 때 그들을 어떻게 면책을 했던가를 말하므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장과 함께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사도들 예루살렘교회 이방인 교회들이 함께 모여서 모두 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그리고 어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는 자유가 확증되었고 동시에 갈2장에 보면 이방인 형제들에게 유대인의 가난한 형제들을 부탁하므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구제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같이 먹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인 표가 거기 있어서 바울 사도께서 로마에 가려고 할 때도 그 일을 뒤로 미루어 두고 이방인 교회가 헌금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갈 때 그기 로마에 가려고 한 간절한 소망을 뒤로 미루어 두고 그 일을 했어요. 왜? 그 일이 한 몸된 것의 확증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 하는 것이 사도들 유대인 이방인 교회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함께모여 확증한 것입니다.여기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교인들을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이 일을 결정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서 교회가 결정한다 해도 그것이 틀리면 자기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적인 권위는 개인에게 판단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의 판단권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에서 이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다시는 분쟁이 나타나지않고 진행이 되게 했지요. 나중에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반복되었을 때 또 회의하고 그런 법이 없고 바울의 증거를 보면 ‘너희들이 스스로 너희의 죄를 채우므로 너희를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노라’하는 방식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치 못하도록 자주받은 사실을 계속 반복하고 어떻게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러 제국의 수도인 로마까지 번지고 있는가, 이제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므로 그런 의미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졋다는 의미로 끝나고 있고 그 복음은 주님 재림하시기 까지 다시 그의 나라를 완성해서 세우시도록 하는 주님 재림하시도록 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행1장 처음 서론에서 말씀드렸지요. 내가 간 것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와서 그 나라를 완성하도록 까지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교회 안에 임재하셔서 그의 나라를 건설하십니다. 특히 계시록을 보면 큰 환란 중에 있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계시며 그 별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주님은 신실하신 증인으로 승리하신 분이시니 천하만민이 그의 나라가 되리라. 염려하지 말라 그렇게 하므로 그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15장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전 부터 약속했던 하나님의 구원 약속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나라로 되리라 그렇게 해서 다윗의 왕국이 우주적인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확정되리라 하는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엇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19절 이하에 있는 것은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을 화목시킬 것인가 하는 화목의 조건이지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하는 구원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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