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3:4-41
여기 13장부터 교회적인 차원에서 이방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땅위에 세우신 교회의 모태요.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전반적인 문제들이 다 포함되어 있지만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 약속했던 그 약속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제 교회를 통해서 특별히 이방 땅에 설립된 교회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방식을 여기 13장의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은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에게만 전했는데 가끔 이방인에게도 전했다는 방식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빌립을 세우시고 또 베드로를 보내시고 해서 직접 인도하심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시고 그렇게 했어도 교회적인 방식으로 이방선교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 즉 이방인을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함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하셨지요. 그래도 13장에 보면 흩어져 있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부터 안디옥 교회에 소위 많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설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주신 은사도 예루살렘 교회에 주신 은사와 비슷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 주신 은사는 하나님이 친히 새 인류인 그들 중에 거하시며 그의 영을 부으셔서 그들을 새 인류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약속의 성취여서 거기 보면 시내 산 불꽃 가운데 그리고 창조의 처음에서도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고 노아 당시 때도 강한 바람이 수면에 불어서 물이 감함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지었던 것처럼 거기 하나님의 임하심의 표상이 예루살렘 교회는 주어졌고 그렇게 해서 천하 만민이 주 예수 안에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이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여러 나라에서 모아든 백성들이 함께 알고 찬양할 수 있도록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역사가 진행되어서 그 약속대로 이방인에게 까지 복음이 증거 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안디옥 교회는 그런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상과 이제는 새 인류로 그들을 하나로 지으셨다는 표상적인 방법보다도 이제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와 그 복음의 선포 가운데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그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13장의 안디옥 교회에 주신 은사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아직 그 당시는 우리처럼 복음이 기록된 방식으로 완결되기 전이기 때문에 거기 선지자들이 있었고 그리고 교사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로 사도가 있을 필요가 없지요. 왜 12사도를 기초로 한 교회가 예루살렘에 서 있기 때문에 이제는 복음이 증거 되고 가르쳐지는 방식으로 안디옥 교회가 서는 것이고 그것이 소위 말하자면 교회론적인 은사입니다. 이제 그런 은사들을 통해서 사도시대에 교회가 완성된 뒤로 이제 교회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이런 선지자들은 없고 이제는 성경이 완결된 방식으로 주어졌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와 교사들을 세워서 이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그런 것은 그 구원역사에서 그 시점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알고 그래서 먼저 관계에서 하나님이 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입히시는가. 그리고 왜 여기서는 선지자와 교사의 은사를 주시는가?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가 역사적인 상황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보고 그 다음에 우리시대에 적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여기 안디옥 교회는 선교적인 사명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 구성원들은 보거나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주셨다는 말을 보거나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으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 자기 같은 이방인을 구원한 은혜를 기억하고 바로 그 은혜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을 때 성령께서 친히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교회의 대표자를 선정함으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이방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바울이 행한 이적도 유대인으로서 거짓선지자의 눈을 멀게 함으로 이방인 총독을 빛으로 인도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이전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빛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실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 눈을 멀게 해서 다시 빛을 보게 함으로 행 2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하셨지요. 어둠에 앉은 자를 빛으로 이방인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데 여기 바울을 쓰시겠다. 약속하셨고 바로 그런 표적으로 바울을 통해서 이 이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3절부터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서 제일 처음 설교한 내용이 13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13절부터 바울의 설교의 내용을 지난 시간에 분해를 했었습니다. 16절이 서론이지요. ‘바울이~사람들아 들으라.’ 여기서부터 지금 설교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락은 26절이겠지요.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또 다시 회중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단락은 아닙니다만 또 한 단락을 볼 것 같으면 32절을 보면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들에게 전파하노니’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의미를 여기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8절이 한 단락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이제 복음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니 너희 조상들처럼 망령스럽게 거절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16절에서 41절 까지가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언약백성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 예비한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온 세상에 흩으심으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비치도록 하심으로 예비하신 경건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17절에서 25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 소위 말하면 구원역사를 처음부터 쭉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회복을 위해서 구원의 일로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요 곧 하나님이 구원의 일로 땅위에서 일하심이 이스라엘 안에서 비추도록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구원의 일을 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 이 역사의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옛 언약역사를 빼버리고 새 언약의 역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이 부족한지 합당할 때가 있습니다. 왜 구약의 찬양의 시편들을 읽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고 예배를 할 때 그것은 전부 일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은혜의 일을 이야기 해요. 그런데 우리 회중들은 그것을 잘 안 듣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부분들에만 감사하기 쉬워요. 이 역사를 떠나서 하나님이 나와 교제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그것은 이원론에 빠지는 것이고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고백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안에서 그 구원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셨는가. 그 하나님이 지금 주 예수 안에서 어떻게 우리의 생명이신가를 창조의 처음과 끝을 보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면 바른 예배가 되지 못해요.단순한 도덕적인 교훈만 받고 느낌만 받으려고 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교독할 때도 보니까 교독이란 길면 재미가 없어지는 모양이어요. 그래서 서론에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그렇게 꼭 되어야 하는데 생략해 버리고 합니다. 그런 것은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률로 우리에게 직접 준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의 처음질서에서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때 주셨던가. 또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일하실 때 구원자로 우리에게 비추시기 전에 그 약속에 따라 그 백성들을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일에 있어서 그의 구원역사가 세상에 비추이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은 다 생략해 버리고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 도덕률만 읽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서 답답합니다. 또 제가 시편 103편을 잘 읽습니다만 거기에는 여호와의 은혜가 잘 나타나 있어요. 그런데 저도 6절부터 읽고 있습니다만 그 앞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 안에 그 구원의 일을 나타내셨던가 하는 역사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절수가 대단히 길어요. 길면 길수록 감사해야 할 것인데 우리는 짧아야 좋아요. 예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설교 몇 마디 듣고 갈 것이어요. 그러니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앞에 서 있는가 생각을 할 때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조금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이 저에게 조언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루하고 십계명 읽지요. 또 긴 것을 읽지요. 그러니 지루하니까 짧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제가 고민이 됩니다.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그 말을 받아들여야할지 그런 말을 안 받아 들이니까 나에게는 말해서는 안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받아들이고 나니까 속이 안 좋아요. 받아들여야 할지. 그것은 예배정신에 맞는 것이 아니거든요. 또 성경은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해서 써 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한 시편이 있으면 그것은 전반적인 한 흐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전 경륜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전반적인 관점에서 읽어야지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 부분만 쭉 읽으면 좋은가 그 하나님이 역사의 처음부터 어떻게 인내하셨던 가를 찬양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게 읽어야 좋을 것인데 우리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은 필요가 없고 지금 교훈하시는 하나님 그 교훈만 느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큰일을 찬양하고 증거 하는 방식으로 신령한 예배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정신을 따라 예배해야 할 것인데 우리 안에 나타나는 평안한 느낌 거기까지만 예배고 우리가 피곤하기 시작하면 예배가 안 돼요. 그러면 왜 피곤한가? 그것은 해석이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보면 바울이 제일 처음 설교할 때 하나님의 구원역사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따라 어떻게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시내 산에서 국가로 조직하셨지요. 40년의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그 약속에 따라 가나안 백성을 친히 진멸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의 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서도 범죄 했어도 하나님은 기업을 점령할 때부터 왕국에 도달할 때까지 거의 450년 동안을 하나님은 사사들을 통해 친히 말씀하시고 그들을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따라서 왕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왕국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왕국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당한 다윗을 세우셔서 그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거기까지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완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국을 건설함이요 그 땅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어요. 그래서 에덴에서도 그것이 곧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곧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심이 거기 있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만물을 지으시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모세에게서 성취되었어도 모세에게 성취된 진정한 완성은 다윗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 때 하나님께서 그 땅에 평화를 주시고 온 이방인들로 다윗의 권세에 복종토록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는 움직이지 아니하는 요지부동한 자기의 집을 다윗의 도성에 세우셔서 다윗의 왕국이 곧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즉 시온 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전 그 보좌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다윗은 그 왕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 때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성취된 것이고 그 이상의 시대는 말해지지 않습니다. 다윗 때여요. 그랬는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셨을 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워서 내 뜻을 다 이루리라’(22) 하셨고 23절에 보면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씨를 주겠고 그 씨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실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당장 이루어 졌습니까? 아니지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시고 거기 왕으로 좌정하셨을 때 그들이 신속히 범죄함으로 40년 광야에서 그들이 유리하고 방황했던 것처럼 그래도 하나님은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이심을 날마다 만나로 그리고 많은 치료의 해택을 통해서 나타내셨어도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진실하심을 따라 새로 계수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을 차지했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그들이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요단강을 건너고 새롭게 할례를 받고 언약을 새롭게 했지요.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성취된 약속이 완성되었는데도 그 왕국은 신속히 범죄해서 다윗이 죽자마자 솔로몬 때 범죄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멸망시킴을 이미 솔로몬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위해서 한 등불을 남기고 10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맡겼습니다. 10은 그런 의미로 총수를 말한 것이고 다윗에게는 그런 의미로 한 등불만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북 10지파가 먼저 망하고 그 뒤에 남 유다도 망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을 때 북 10지파가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바알의 왕국으로 전락할 때가 아합 시대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새롭게 하심이 엘리야를 시내 산에 부르시고 마치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남은자 7000을 위한 하나님의 인내와 구원역사를 엘리야에게 거기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망합니다. 망해도 무릎 꿇지 않은 7000을 남겨놓고 그런 의미로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치 않습니다. 그때부터 선지자들의 시대로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새로운 회복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지요. 그것이 선지자들의 시대이고 그들이 잡혀 갔다가 돌아 왔습니다. 돌아 왔을 때 그런 의미로 그들은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왜 모세가 지었던 성소는 다시 지을 수가 없어요. 왜 법궤가 불타 버리고 없거든요. 그러니 법궤가 없는 성소는 성소가 아닙니다. 그러니 돌아온 뒤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의 처소는 회당이어서 말씀을 가르치고 거기서 예배했던 것이지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40년을 그 은혜로 계시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예수 오시기 전까지 그들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소의 제도를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주시고 선지자들은 400년 동안 끊어 졌어도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제도의 빛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말씀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계속 양육하고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의 중간기 400년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과 비교될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여기 다윗에게 다윗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로 세워서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다윗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은 칼을 통해서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 아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이루리라고 했는데 이제 그 나라가 망해 버렸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망했다는 말은 뺐어도 예수 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400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버린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처음에 왔을 때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물로 씻었습니다. 물로 씻음을 통해서 오시는 왕을 맞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전 이스라엘 백성이 물로 목욕을 하고 씻도록 모세가 명령하고 그렇게 하므로 시내산에 강림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로 그런 언약의 체결이지요. 그래서 이제 자기는 물로 씻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고 성령의 부으심 새 영의 부으심의 약속이 있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성령으로 세례시키는 즉 자기 백성을 그의 영으로 새롭게 지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오시기 전에 세례요한이 와서 언약체결을 했습니다. 그들을 물로 씻고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뒤에 오셔도 자기보다 앞서신 분이요 그는 예수의 신도 풀지 못할 종이라고 말함으로 자기 뒤에 오실 분을 하나님으로 소개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31절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지 않느냐?’(26절)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의 말도 모르고 모세의 율법도 모르고 모세의 율법은 예수를 증거하는 데도 모르고 예수를 정죄해서 죽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수에 대한 말은 그의 고난과 고난을 통한 부활인데 그들은 그들의 왕이 오시면 세상의 영광만 생각해서 그들의 욕구에 맞지 않았고 그들의 죄 있음을 정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연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은혜의 약속은 신실해서 그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약속이 성취되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은 허다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한다고 말함으로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증거 되었는데 바로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라. 우리의 조상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절했어도 하나님은 그 약속에 진실한 것처럼 마지막 왕을 보냈어도 그들이 거절했지만 그것이 곧 세상의 구원이 되게 하셨다고 31절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일으키심으로 약속의 성취이고 예수의 부활이지요. 예수의 고난과 부활로 약속이 성취되었는데 그러면 구약에서 어떻게 그를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여기 33절부터 구약을 몇 군데 인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인용한 곳은 시편 2편인데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 34절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이것은 이사야 55:3절을 인용하고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하시리라.’ 이것은 시편 110편을 인용한 것이 되겠지요. 또 시편 16편에서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용한 세 구약의 약속들은 전부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을 말한다고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직접적으로 말한 분은 디윗이어도 다윗은 죽었고 그 묘가 자기 백성과 함께 있고 실은 다윗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주를 지칭한 것인데 바로 예수의 부활에서 성취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도 죄 사함과 의롭다함이 믿는 자에게 선물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경고하고 있지요. 38절에서 39절까지 복음의 약속들을 따라 권면하고 그리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인용한 세 부분을 보십시다. 처음에 시편 2편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편) 메시야 시편으로 유명한 시편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안에 이루신 은혜의 일들을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 은혜의 길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말하고 그린 시편이지요. 그래서 언약백성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이 시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시편 1,2편은 마소라텍스트에서는 둘로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되어 있고 그런 의미로 시편 2편도 시편의 서론으로 이해합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왕을 순종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온 산에 세우신 그 왕을 통해서 천하 만민을 다스린다고 말씀하셨고 그러니 그 왕은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입 맞추어야 할 왕이요 그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의 전반적인 문제도 그 왕이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시고 가르치시며 징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편 2편에서는 하나님이 그는 철창으로 만국을 심판할 자요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곧 그것이 생명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내 왕이라 하고 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내 아들이라 했을때 그 아들이라는 최종적인 의미는 문맥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의미들이 있어요. 가장 본질적인 아들의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 삼위안의 존재의 개념으로 질서의 개념이지요. 그것은 존재론적인 아들의 개념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의 자기 계시여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된 분이 아니어서 영광과 권능으로 동등하시고 아니 계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여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 안에 나타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 존재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 밖으로의 일에 있어서 아들을 말할 때 그 아들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메시야 왕을 말하는 것이고 메시야 왕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총괄적으로 내 백성이다 내 아들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아들이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시고 나셨는데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문맥에 따라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왕은 내 아들이라 했을 때 그 아들은 구약에서 약속한 왕이어요. 그래서 삼하 7장을 보십시다. 7장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고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장 강력한 적군을 이겼지요. 그러니까 참 안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기 안식을 말하고 있지요.‘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이것은 한 국가를 이루겠다는 말이지요. 요새 우리식으로 말하면 그 집안이 크다는 것과 같은 용법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2-14) 그러면 왜 다윗의 왕국이 영원합니까? 여기 13절에 보면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여기 하나님의 나라와 다윗의 집이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곧 다윗의 도성에 집을 세우도록 하심으로 다윗의 왕국이 영원히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나라 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윗은 죽고 다윗 뒤에 하나님께서 한 후손을 주셔서 그때 하나님 나라가 땅위에 구현되는 방식으로 거기 하나님의 집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 대한 계시를 받은 분은 다윗이어요. 마치 모세가 계시를 받아서 오홀리압과 브사렐이 성막을 지었던 것처럼 성전을 짓는 분은 솔로몬이어요. 성전에 대한 계시를 받은 분은 다윗이어요. 그런 의미로 다윗이 머리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모양을 드러낼 때는 솔로몬이 지은 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처하는 보좌가 거기 있고 그러므로 솔로몬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여서 칼 소리가 없습니다. 칼로 세운 나라가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나라가 영원한 것이어요. 그래서 다윗의 후손을 세우는데 그 후손이 하나님 나라 왕으로 취임한 것이고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했을 때 직접적인 씨는 이삭이었던 것처럼 다윗에게 말하는 직접적인 씨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인 인생 왕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도 만일 범죄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영원하리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제 다른 곳을 보면 여기 ‘그는 내 아들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바로 이 아들은 하나님 나라 왕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이지요. 역대상 22장8-10을 보십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였나니’ 여기 보면 더 잘 나타나 있지요. 솔로몬이 평화의 왕입니다. 여디디아 라고 삼하 12장에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 그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여서 낳은 아들이어요. 어떻든 절차는 합법적으로 밟았기 때문에 다윗의 아내여도 하나님께서 결혼하기 전에 범죄한 방식으로 난 첫 아들은 죽였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확실한 용서가 솔로몬을 왕위에 세우심으로 다윗에게 주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솔로몬 평화의 왕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 주시고 여디디아라고 하리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렇게 솔로몬 때는 적군이 쳐들어오지 못하고 모든 부가 마치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름의 약속이 솔로몬 때 완성된 것처럼 부유했고 그리고 먼 이방 땅에서도 솔로몬을 통한 하나님의 지혜를 들으려고 모아들고 그렇게 함으로 세계적인 왕국 이방에 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비추일 수 있도록 그런 왕국으로 나타나 있지요. 그래서 솔로몬 때 하나님께서 거기 그 집을 세우셨는데 그 집을 세우신 사람이 누구인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봉사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곧 솔로몬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 아비가 되어’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왕을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했을 때 곧 그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 왕이심을 거기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는 어떤 왕입니까? 성령이 그 위에 머무름으로 성령으로 세상에 세례를 주는 즉 그로부터 성령이 부어지는 분으로 거기 나타나고 있지요. 그래서 누가 참된 왕입니까? 다윗이 솔로몬을 통해서 그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죽어야 될 왕이고 그리고 솔로몬도 당시에 범죄해서 그 나라는 영원한 왕국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단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국 때문에 한 등불을 남겨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하셨어도 솔로몬이 통치했던 방식으로 그 나라는 끝났습니다. 마치 이삭도 죽고 했던 것처럼 그런 의미로 솔로몬도 범죄하고 죽었지요. 그러기 때문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영원히 세우신 그런 신령한 왕은 아니고 인생 왕일뿐이고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실 그리스도의 영이 솔로몬의 영안에 거하셔서 그 영화로운 왕국을 나타내셨어도 솔로몬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낳은 왕은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낳은 왕으로 시편 2편에도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그 왕국이 영원하고 천하만국이 그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왕국으로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은 그런 그림자로 봉사했고 참은 아닙니다. 참이 아니라 해서 거짓이라는 말이 아닙니다.우리 그림자도 그림자이고 몸도 진짜지만 그림자는 몸이 없어서는 존재치 않지만 우리들이 전기 불을 꺼버려도 몸은 있지 않아요. 그림자는 없어도 그런 의미로 구약 때는 그림자란 말이지 거짓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도 은혜의 실제로는 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완전함을 나타냈을 때 그것은 여러 가지 모형적인 방식 그림자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하늘의 실제가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고 땅위에 오신 참으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 사람 중에 거하신 분으로는 임하지 않았어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보면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친히 너를 낳았다 했을 때는 하나님이 친히 낳은 왕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 나라 왕으로 세우신 그 아들 바로 그런 분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라는 말이지요. 왜 예수가 그 분인가 하는 사실은 나중에 증거가 더 되겠지요.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34절) 이것은 이사야 55장 3절을 인용한 것이지요.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돌아옴을 약속한 것이 이사야 40장 이후입니다. 특별히 밑이 터진 웅덩이 같은 우상에게 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약속들이 55장에 나타나고 있어요. 거기 3절부터 보면 ‘너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여기 ‘너’를 국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문맥은 그냥 다윗으로 해석해도 좋겠지요. 여기 보면 다윗을 천하만국이 경배하는 왕으로 세웠다고 그 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죽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이 죽은 한참 후에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오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한 약속은 다윗에게 한 약속을 너희에게 세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우신 왕은 어떤 왕입니까? 천하 만민이 돌아와서 무릎을 꿇어야 될 왕은 실은 그전에 죽은 다윗 왕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여기서도 다윗은 죽었지만 죽지 않을 왕에 대한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가 좋겠네요. 23절부터 봅시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23-24) 지금 이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약속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목자와 왕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언약언어로 계속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진작에 죽었지요. 그럼 여기 참으로 목자와 왕으로 나타난 다윗은 누구입니까? 곧 신령한 다윗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통해서 왕권을 구현했는데 신령한 왕 그렇게 해서 자기백성을 지키고 자기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순종케 하는 백성 통치하는 왕을 주시겠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입니다. 그 전에는 그런 왕들이 없었어요. 다윗도 범죄 했잖아요. 그도 참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왕이 아니어요. 그도 자기 범죄 때문에 자기 백성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로 세우실 다윗왕은 그런 왕이 아니어요. 그 다윗왕은 누구입니까? 다윗에게 나타났던 그 왕 다윗의 통치에서 비치었던 그 왕권 곧 그것은 다윗의 영 안에 거하셔서 그의 왕국의 영광을 나타냈던 그리스도의 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 미쁜 은사를 주리라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왕을 주겠는데 천하 만민이 그 왕에게로 돌아오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이 소망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돌아온다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할 왕 그 왕이 세계를 지배할 왕이면 곧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다윗의 부활일까요? 다윗의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다윗을 통해서 그런 일을 이루셨던 것이고 그런 의미로 다윗은 죽었습니다. 그러니 죽지 않는 그런 왕을 주시겠다는 말과 같지요.
그러므로 다른 표현을 빌렸을 때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35). 이것은 시편 16편의 말씀이고 또 시편 110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16편에 보면 다윗이 여러 환란 중에 자기 곁에 계신 자기 보호자를 의뢰하고 있는 시편이어요.16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권세 자 밑으로 피하지 않고 이 시편기자의 복을 주님밖에 없고 주님의 성도밖에 없습니다. 그는 결단코 세상의 권세나 세상의 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기업도 의뢰하지 않습니다. 그 기업도 하나님이셔요. 우리들이 옛날에 아브라함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와 연합해서 그 칼의 권세에 의해 보호받지 않고 그와 연합해서 가나안 백성으로 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나그네처럼 살기로 했지요.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기업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편이어요. 제가 아브라함을 예로 든것입니다. 7절에 보면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7-11절) 그의 부활을 지금 말하고 있지요.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께서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십자가를 개의치 않고 바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셨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의 영광으로 상 주셨지요. 여기 보면 10-11절은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의 화자는 누구입니까? 다윗이어요. 그런데 어느 때에 모르게 다윗이 아니라 바로 썩음을 당하지 않는 분은 다윗이 아니라 다윗에게 임하셔서 그 나라의 왕권을 구현하시는 메시야여요. 그러니까 다윗이 분명히 이처럼 원수의 압제 밑에서 하나님만 의지로 삼고 피할 것인가 그랬는데 다윗은 단순히 자기 경건으로 말하지 않고 다윗 안에서 자기의 영원한 나라를 증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세상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어요. 그렇게 해서 다윗은 그 왕적인 신분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왕을 지금 증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이 땅위에 세우신 왕을 통해서 영원한 승리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의 손에서 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보좌입니다. 죽음까지라도 그를 꺾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보호자이셔서 그를 음부의 권세에서 일으킬 것이고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으로 그를 복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처럼 안할 수가 없지요. 가령 우리들을 보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을 당하면 아이고 내가 망하면 망했지 내가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경험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증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분을 증거 하는 방식으로 그처럼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증거여도 우리 안에서 증거하시는 분은 하늘의 왕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의지하고 사모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고백할 때도 고백케 하시는 분은 우리 안에서 영원한 승리를 증거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증거여요. 그러니 우리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고 우리는 지혜 지각에 까지 새로움을 입어서 우리는 하늘의 지혜로 살지 땅의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는 다윗은 더구나 하나님 나라 왕으로 직무로 세워져서 그는 계시기관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이방 왕들의 칼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방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준 기업으로 만족하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는 왜 그렇습니까? 그는 죽습니다. 그는 죽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그 왕을 일으키시고 그 나라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다윗은 하나님 나라 왕을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시기관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편을 해석하는 사도행전의 기자는 다윗은 죽었지 않느냐? 그러니 내 육체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 다윗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즐거움으로 들어간 자는 누구인가? 바로 다윗의 영 에 계셔서 영원한 나라를 증거 했던 그리스도의 영의 증거여요. 여기 보면 다윗의 시편은 직접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지 다윗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지금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에~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37) 이가 곧 하나님 나라 왕이다. 그의 부활로 그의 왕권이 증거되었다. 로마서 1장에서도 그랬지요.’그가 권능으로 하나님 보좌우편에 취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왕이다. 그러니 구약의 모든 약속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특별히 시편 16편에 보면 그 앞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 영원한 빛과 영원한 즐거움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그 부활의 소망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었던 것이어요. 그 약속이 성취되었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세우신 이 왕은 예수라 그때 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 다윗의 후손이 아닌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분이 하나님께서 그 분을 친히 낳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부활로 세우심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집이 그 땅에 설립된 것이어요. 솔로몬이 하나님의집을 세웠던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나라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 때는 죄 사함의 방식이 피 뿌림 물 뿌림을 통해서 종교 의식적인 방식으로의 용서이고 그것은 쉬지 않고 죄를 떠오르게 하는 용서여서 그것은 영원한 용서를 바라보게 하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용서인데도 그 용서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들이 천당 못 간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아린아이가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아들로서 특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용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직은 충만한 방식으로 누리는 방식에서는 그처럼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을 통해서 죄는 완전히 끝났고 그러니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 없는 완전한 죄의 용서의 성취가 땅위에서 주어졌습니다. 다시는 우리 양심에도 말하자면 우리의 죄를 떠올리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의롭다는 이것이라’ 죄 사함 뿐 아니라 의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구약 때는 물과 피 뿌림을 통해서 성소 안에 들어가는 특권이 주어졌어도 그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더해 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 사함 뿐 아니라 의가 선물돼 있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는 다윗처럼 그림자적으로 봉사하는 왕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사장이요 왕이요 특히 시편110편을 보면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깨끗케 하셨고 그가 얻으신 구원의 공로로 자기 백성을 선물한 분이셔서 참으로 그 앞에선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참으로 의의통치가 신령한 왕 앞에서 우리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조상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성취되었으니 이 분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고까지 해야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요. 앞으로 14장을 넘어가야 하겠는데요. 여기 40절에서 44절까지 경고는 하박국1장5절부터 있는 경고입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의 불의함 때문에 이스라엘을 바벨론 백성으로 멸망시키겠다는 경고와 함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깨끗케 하겠다는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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