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11:18-30
9,10,11장에서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길을 예비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이방땅에 하나님의 큰 교회가 설립되었고 또 그 교회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사랑의 봉사를 하고 그리고 이제 천하만민으로 이 구원의 도를 받을 수 있도록 어떻게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문제가 11장 끝에서 그리고 13장 처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11장 19절 부터 끝까지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깨끗케 하시는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인데 바로 그 은혜가 안디옥에서 열매맺고 있고 거기서 사울이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교회로 부터 선교사를 파송해서 그렇게 해서 로마 전역을 정복하는 그런 기사가 나타나 있는 것이지요. 어떻든 하나님께서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계시적인 것이어서 바울 개인을 위해서 그런 체험을 준 것 보다도 계시적인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 행 26장 14절 부터 보면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고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내가 본일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처럼 어둠에서 빛으로 또 주님은 자기자신을 빛이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바울의 눈을 멀게 하고 뜨게하신 것은 주님께서 요한복음에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하심으로 주님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안왔으면 세상에 죄가 없으려니와 그가 왔으니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죄가 크니라고 자기 자신을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증거했을때 거기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사가 있지요. 그러기때문에 이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체험 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 즉 바울이 보았던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에게 주님께서 더 밝히 자기의 구원의 은혜를 가르칠 것인데 그런 것을 세상에 증거함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바울을 쓰시는 것이고 바로 그런 표상적인 방식으로 바울에게 행했다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든 창세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를 움켜잡는 이리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하나님의 구언역사에 있어서 그렇게 강력한 역할을 할 것을 야곱이 예언하고 있었는데 그 약속에 대한 성취가 여기 베냐민 지파임 바울을 통해서 천하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구원역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돌이키셨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돌이켜서 뭐 이름을 바꾸었다.예수믿고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사울하는 것은 히브리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시대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이방인을 구원하는 증거의 사도로 세우셨을 때 그 이름을 헬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 뿐이고 새로 이름을 바꾸어서 이전에는 큰 자가 이제는 작은 자가 됐으니 하는 회개의 표로서 새 이름을 짓고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날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또 그는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두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제 이방의 선교사로 하나님께서 택했을때 그때부터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바울을 예비하셨을 뿐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의 머리인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의 가정에 구원의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여기보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환상 즉 일어나서 부정한 것을 잡아 먹으라는 환상을 본 것은 욥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잘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평소에 그런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다고 거절했었고 환상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종을 베드로에게 보내시고 또 베드로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셔서 그를 따라가라고 말씀하셨고 또 베드로가 따라가서 고넬료의 가정에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했을때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의 증거가 고넬료의 가정에 임해서 그들도 방언을 했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자기가 받은 환상을 이해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서 그들로 하나님의 교회로 가입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이라는 말씀이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가 구체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시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쓰신 것이고 그 일로 해서 바울을 부르셨을때 바울을 예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에게 증거하도록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임금들 앞에서 주님을 증거하도록 세운 종이라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에게 알리셨지요. 이처럼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가 그 자체로서 핍박 중에 흩어졌을때 이룬 것이 아니라 이제 교회가 그 합법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 일을 시행하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인도하신 일이 여기 10장에 있는 일입니다. 이런 것은 이전에 예언되었던 일들인데 가령 욥바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을 바르게 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지요.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앗수르 지방으로 가지 않고 소 아시아 지방인 서쪽으로 가는 배를 탔었지요.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시고 니느웨로 가서 그들로 회개토록 증거하도록 했을때 이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다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낮추시고 돌이켜서 니느웨로 보내서 증거했고 이 요나의 증거를 통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사를 여기서 대응시켜 볼 수 있지요. 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 시점에서 자기 구원으로 세상에 구원을 입히는 방식이어서 이전에 있었던 그런 일들의 방식이 신약에서 다시 그런 방식으로 진행됨으로 하나님께서 옛 언약질서안에서 한 약속들이 어떻게 예수안에서 완벽한 방식으로 성취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처음에 베드로 까지라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고 갔고 베드로의 증거를 통해서 요나 당시에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앗수르가 회개했던 것처럼 여기보면 그 당시 유대땅을 지배했던 로마군병이 회개함으로 베드로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우월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신 그 은혜의 일들을 잘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이스라엘을 부르심은 그들의 구원일 뿐아니라 곧 그들을 애굽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에 심으신 그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해서 그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고 우상섬기는 백성으로 바로 더듬어 하나님을 찾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비추는 봉사자로 세우셨는데도 그들은 민족적인 우월성 때문에 이방인은 망해도 자기들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더구나 요나가 수고했던 당시에는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인데 여름 궁 겨울 궁을 짓고 상아 침상에 눕고 여자들은 바산의 암소처럼 살찌고 발고리 귀고리를 달고 영토도 옛영토를 찾았고 성경에 기록한 것처럼 그리고 모든 의가 풍성한 그런 때 였습니다. 우상은 더 심하게 나타났어도 외적인 방식은 그렇게 나타나 있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도록 했던 사람이 요나이고 그리고 바로 뒤이어서 수고한 사람이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우리가 호세아는 그가 행한 일은 음행한 여자를 얻고 그가 도망쳤을때 다시 값주고 사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토록 했을 뿐아니라 아모스는 그들의 멸망을 하나님의 의를 따른 멸망을 강력하게 예언하는 그런 시대이지요. 물론 요나서의 구조를 보면 예언적인 구조는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만 요나서는 단순한 이야기여요. 요나를 보냈더니 거절하고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나와서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는 이야기이지 거기보면 선지적인 예언들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셨는가 하는 은혜의 역사를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이지요. 그랬을때 요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은 멸망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데 왜 이방인은 구원을 받는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박국 선지자를 봐사도 하박국이 하나님께 물었지요. 왜 이처럼 불의한 백성이 점점 더 강성하고 의로운 백성들이 사라지는가? 그때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 불의한 백성들이 망하리라.그런데 이 백성들을 심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앗수르 사람들이고 또 바벨론 사람들이어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범죄했다고 할지라도 이방인과는 다른데 이방의 사악한 바벨론 군대가 하나님 나라를 멸망시킬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그래서 망대에 서서 내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왜 그의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관계에 사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자기특권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의 불신자들을 다 심판하시고 그리고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사실이 여기 요나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요. 특별히 예수께서 요나를 예를 들어 말씀하실때 마지막 심판날에 니누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리라. 왜? 그들은 요나의 증거를 듣고도 회개했지만 이 사람들은 본래 회개하지 아니했노라.요나보다 더 크신 이가 여기 계시니라.그처럼 자기자신을 증거하셨지요. 그렇기때문에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예언했어도 자기 백성은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확실히 믿었습니다.왜냐하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또 숫자가 몇명입니까? 또 그들 중에 여러가지 제사제도가 있는 것이고 그들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억압하고 거절하다가 종말에 메시야가 오면 망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망하리라고 기대한 이방인 백성들은 회개하고 안 죽고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심판하시리라고 예언하고 있을때 그것은 요나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더구나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결국 얼마 있지 않으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이방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바른 이해력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요.그 일 때문에 요나가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말하자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이 너무커서 넘지 못할 것처럼 되어 있었지요.물론 그런 것이 일면은 맞는 것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나라요 이방에는 아직 어두운 통치가 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은혜로 천하만민을 구원코자 하는 뜻이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만 구원하고 나머지는 멸망시키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신 뜻이어요. 세상을 구원하는 봉사자로 그들을 세우신 것인데 그러지 못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세상에 흩으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고 그들이 버렸던 하나님을 이방인들로 찬양케함으로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방땅에 흩었는데 그들은 이방땅에서 7배나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낸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누브갓네살 임금으로 고백케 함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하나님을 이방임금은 시인하고 경배케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이방인을 그 구원에로 돌이키심으로 천하만민을 구원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구약에 근거해서 바울 사도께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멸망해도 그들이 멸망시킨 하나님이 앗수르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은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하나님은 참으로 돌이키는 자를 구원하십니다.그러니 혈육을 따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이스라엘의 멸망은 앗수르를 구원하심을 통해서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때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선지자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순종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베드로 사도도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간격을 하나님이 그렇게 구별시켰기 때문에 그것은 교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셨다고 선언하셨을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방식으로 응답했고 그래서 이방인 고넬료를 회개시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로 접붙히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옛 언약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순종과 흩어짐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증거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옛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흩으셨어도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 새 언약교회는 이제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봉사하도록 했고 바로 이 은혜를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교회에 보고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큰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은 고넬료의 집에 가서 고넬료에게 증거하는 과정이고 11장은 그가 돌아와서 하나님의 교회에 그것을 보고함으로 그의 교회가 11장 18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에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다 하니라’ 이처럼 새 언약교회가 천하만민을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르신 은혜에 대해서 다 함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바에서 배타고 갔던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을때 박넝쿨 밑에 앉아서 왜 이 백성이 안 망하는고 하나님이 분명히 이 백성이 망한다고 그랬는데. 그들이 돌이키면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서 너는 이 작은 나무 하나를 가지고도 이 나무가 벌레가 먹어 시들어져서 그늘이 없어지므로 네가 불평하는데 하물며 이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아니와 짐승이 몇명인가? 네가 이 성을 아꼈다 해서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요나를 책망하고 있는 기사가 있지요.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의 하나님이시다는 선교적인 의미가 가장 강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세상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어요. 그런데 여기보면 여전히 옛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새롭게 지음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이방인의 가정에 갔을뿐아니라 이제 고넬료가 그리스도께서 깨끗케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을때 이제 그 보고를 받은 하나님의 교회도 함께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내용이 10장 11장입니다. 19-30절 까지의 내용은 이 내용의 결론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항상 처음에 하나님의 계시적인 은혜가 진행이 되면 그 다음에 한 단락이 끝나면 그 결론 열매들이 나타나 있는 방식으로 성경이 진행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울과 베드로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도록 인도 하셨습니다. 여기 19절 부터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을 인하여~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들이 스데반만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의 교회가 크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크게 핍박을 받은 무리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유대인들입니다. 왜 이 앞장에 볼 것같으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그 구원을 선포한 사람들은 우리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스데반이 잘 이해를 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베드로는 성령이 친히 보내셔도 머뭇거리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때 스데반은 이미 그들의 주를 재판했던 산헤드린 공회에 서서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갈대아 이방땅에 있었을때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렀다.그리고 우리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했을때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우리조상들을 보호하셨고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적으로 임재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의 구원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와 애굽에서 자기 조상들을 인도하셨을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사실들을 증거한 사람들은 흩어져 있다 돌아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본토에서 살지 않고 헬라지방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성소의 제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밝히 해석했고 이것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때 먼 이방에 사는 사람들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성전을 지었을때는 그런 것이지요.성전에 같이 임재를 나타내신 하나님은 천하만민의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온 우주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니 어느 한 장소에만 계신 분이 아니다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이방땅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더 바르게 해석을 했습니다.그러기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핍박 예수살렘에 머물러 있지 못할 만큼 흩어졌던 핍박들은 바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거함을 통해서 일어난 핍박입니다. 그때부터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지 못할 만큼 핍박이 있어서 흩어졌습니다. 이런 핍박은 대표자로 스데반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함께 받았습니다. 왜 예수의 영을 따라 살면 세상이 예수를 거절했으니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면 같은 고난을 받습니다. 핍박받는 방식도 달라서 그들이 세상에서 거역을 받는 의미로는 항상 같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맞다고 롬 8장에서 말씀하신 이유들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면 그리스도를 거절한 세상에서 우리영혼들이 평안함을 얻지 못합니다.우리들이 모른 척해도 어떤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열심히 욕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인 줄 몰라요. 아주 열심히 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모르고는 친구요 나에게는 잘해주고 아버지 욕을 하려는지 몰라도 그것은 내 안에 기쁨이 없어요.그래서 우리들은 핍박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사는 것이 핍박이라 생각하고 그런 일이 없으면 우리들은 핍박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고생을 핍박으로 알고 있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삶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면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면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에게 무릎꿇지 않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의 생각이 없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의 행위를 설명할 방식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되고 우리의 모든 언행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어서 그를 떠나서 우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를 따르는 백성은 큰 슬픔을 느끼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들이 복음으로 믿음으로 살면 세상은 동시에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뿐아니라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해주어도 우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우리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착한 것은 알겠는데 그와 교제하지 못하니까 큰 간격을 누립니다.왜? 하나는 빛이요 하나는 어둠이어서 완전한 사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복음으로 바르게 살면 세상에서 그는 나그네요 외인입니다.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일이지요.할 수 없는 일이어요. 그들이 아무리 교회에 대해서 칭찬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주 예수에 대해서 구원자로 믿지 않으면 그들은 어둠 뿐이요 세상의 생명으로서의 빛이 없기 때문에 믿는 신자의 행동원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에 핍박을 받았을때 하나님의 교회도 예루살렘에 머물지 못하고 이처럼 이방땅에 흩어졌습니다. 물론 흩어지는 과정에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증거하고 또 빌립이 어떻게 증거했는가 하는 사실들을 우리가 알겠는데 어떻든 대 다수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흩어졌을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고 다른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이해력이 어두운 것이지요. 20-21절에 ‘그 중에 구브로~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그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가 객관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베드로를 세우셨는데도 베드로가 일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일하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어요. 베드로를 통해서 고넬료를 세례함으로 교회가 그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성령을 마셨다고 이제는 이해하고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는 베드로를 보셨어도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는 꼭 사도들이 앞장 선 것은 아닙니다. 흩어져 있는 형제들이 증거했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허다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 왔었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가 들었습니다. 그 전에 사마이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했을때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지 않고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까지 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발전에 있어서는 사도들이 분명히 앞장이고 고넬료의 집에 간 사람도 베드로입니다.베드로가 머리로서 열쇠적인 역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기 예루살렘 교회가 저기 이방땅 헬라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이런 소식을 들었을때 이제 베드로를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 로마 사람 고넬료가 이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고 그 일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기 때문에 이제 사도가 그 일의 대표자로서 그 일을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출신이 구브로입니다.지중해 섬 구브로 사람입니다.그러기때문에 그도 헬라의 기원을 두고 있는 이방땅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유대인이지요. 그러기때문에 바로 이방인들에 대한 이해력을 풍부히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형제이지요.그래서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가 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보고 기버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전했던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던 교회가 증거해서 이방인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요 하나님의 새 창조가 거기 있고 천하만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기 때문에 곧 그것이 믿는 신자의 기쁨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권고해서 그들이 참으로 믿음에 굳건히 주 예수를 붙들고 서라고 권고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그들 가운데 부으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택한 백성안에 함께 계셔서 그들을 그의 몸으로 접붙힌 것이고 그의 생명으로 옮겨 심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그들의 생명이고 다른 무엇도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가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더 많은 사람이 거기 늘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제 천하만민으로 구성된 교회로 여기 서 있을 뿐아니라 그 교회가 확장됨을 통해서 뜨인돌이 태산을 이루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는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그 윗 지방에 있는 다소로 사울을 찾으러 갔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때 바나바가 사울과 처음 교제했고 그도 출신이 이방땅에 있는 사람이고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거기서 1년동안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르쳤을때 거기 크게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했고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 하면 고상한 문화인과 같은 이름인데 처음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는 예수쟁이 그런 말이 비숫하게 이해하면 됩니다. 조금 묘하고 미친 사람들입니다. 예수쟁이라 했을때는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땅에 있으면서 주 예수에게 신실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고 예수의 당이라 예수의 무리다. 예수쟁이라 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합당한 사실은 세상사람들은 이해하지 목하고 비꼬는 방식으로 예수쟁이라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이 합당한 사실은 그들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이 임했을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새 인류로 교회로 지어졌을때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를 나누고 함께 모여서 떡을 나누고 성찬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뿐아니라 부자들이 재물을 가지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서 거기 부족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복음의 은혜를 증거하고 감사했을 뿐아니라 형제끼리 그 복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거기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했고 감히 그들을 범주하지 못했다고 처음 앞장에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적인 복음의 열정과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서 누구든지 그를 보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사실을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이방땅에서도 그런 교회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바나바와 바울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했기 때문에 이처럼 교회가 강력하게 여기 나타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는 이 교회가 세계를 선교하는 선교기관으로 섰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서지를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태교회이면서도 거기는 여전히 유대 율법주의적 개념들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세계 선교기관으로는 합당치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부터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 세계적인 선교기관으로 일하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로 부터 선교사로 바울과 바나바 이 두 사람들이 파송을 받았고 특별히 바울을 통해서 로마의 전역에 복음이 증거되었던 것이지요. 여기보면 기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때에 선교사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장로들에게 보내니라’(27-30) 그처럼 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사울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가 회개했을때 사울이 바울된 것이 아니라 이제 13장에서 그가 이방인의 선교사로 세워졌을때 바로 유대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헬라인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보면 나타나 있는 교회들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그때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뒤로는 새 언약의 시대이지 옛 질서가 아닙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는 다릅니다.단지 여기는 기록된 성경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완결되기 전이기 때문에 즉 땅위에서 죽으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일이 그의 영을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는데 아직 그 일이 완결되기 전이기 때문에 선지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아직 있어서 그때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시대 사도시대의 선지자들이지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러서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천하가 다 흉년들리라 했는데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그때 로마 정권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국가를 소란케 하는 자로 핍박을 받아서 이제 예루살렘에서 못할 만큼 흩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으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아류로 함께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평안할 때도 그들의 위치가 나그네와 같은 위치겠거든 세상이 흉년이 들면 그들의 위치는 참으로 안타까운 위치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세상에 흉년이 들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요셉에게 말씀했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자로 요셉을 세우심을 통해서 세상에 흉년들게 하신 그 분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세상에 흉년들리라 했을때 교회는 더욱 타락한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모았고 그렇게 해서 가난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부조하게 함으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가 아니라 한 형제인 사실이 여기 바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 예루살렘에 있었을때는 유대인 과부와 헬라인 과부 사이에서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불공평했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이 원망했습니다. 우리들이 저기 이방땅에서 왔다 해서 우리들을 차별대우 하는가? 그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어떻든 그들이 한 아브라함의 혈통인데도 그 일이 잘 원만하게 수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여기 일곱을 택해서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아브라함의 씨로서 이방땅에서 태어난 사람과 유대땅에 태어난 사람들이 한 사랑의 보편적인 교제를 나누게 함으로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완벽한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이제 그 일이 더 확대되고 진행되어서 이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형제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이 봉사한 것을 받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요 그리고 이방인이 그들을 그렇게 멸시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가난했을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으로 주신 것 더군다나 온 로마 천지가 흉년이 들었을때 그들도 가난이 극심할 것인데 그들의 극심한 가난 때문에 풍성하게 구제했다고 고린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헌금을 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보냈습니다. 로마서 15장을 보면 바울이 이런 일에 대해서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가난한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가 헌금해서 이제 그가 예루살렘 교회로 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갈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보낸 헌금이 향기로운 예물로 열납될 수 있도록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지음을 입었다는 증거가 형제의 사랑의 증거를 통해서 확증되고 이 일이 마무리되면 그는 로마로 가서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구제금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의 공동체로 한 몸으로 지으심을 입었다 하는 사실이 증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을 통해서 원칙적으로 이방인의 교회가 완성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바울이 이방인의 선교사로 나가고 있지는 않해도 이미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에 거기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보낼 분아니라 거기서 예수믿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들었습니다. 그 증거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처럼 복음으로 강력하게 서 있을 뿐아니라 그들이 사랑의 공동체로 확고하게 뭉쳐서 이방인 끼리만 뭉친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지 못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가난할 때 흉년이 들었을때 사랑의 선물을 보냄으로 이제는 사랑의 공동체로 새 인류가 지어졌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증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제 이 은혜의 구체적인 발전들이 12장 부터 계속 진행되는 것이지요. 성경의 기록방식들이 구체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세우신 은혜의 일도 항상 이와같은 사실들을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옛날에 사고행전에서 종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요 또 구약에도 자기 백성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계시의 빛들은 여러가지로 달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은혜의 일들은 같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이 친히 임하셔서 주 예수의 은혜의 일들을 우리로 깨닫게 함으로 우리로 믿어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로 접붙히셨습니다. 우리를 이처럼 부르신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일 뿐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부르신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우리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아직도 믿지 않은 사람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적인 정신이 아니고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교를 한다는 것은 그저 우리들이 숫자를 불리우기 위해서 교회의 자립을 위해서 숫자를 불리고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천하만민이 주 예수의 앞에 무릎을 꿇기 전에는 우리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바로 우리가 호흡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셔서 우리가 그 은혜를 감사하면 우리들은 모두 죄인에게 이 은혜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월등해서 누구보고 구원얻으라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증거하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 복음의 은혜로 사랑의 공동체로 교회안에서 제일로 먼저 확실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주님께서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의 영을 보내신 것은 다른 목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신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그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잘 명심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복음을 복음데로 배우고 이 복음으로 모든 인생을 설계하고 이 복음을 믿는 믿음안에서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로 섬을 통해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지체로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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