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9:
8장 까지에서는 헬라파 유대인 중에 빌립이 흩어져 있는 중 사마리아와 먼 땅끝에서 온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신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기 까지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구체적으로 이방인 전도로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세우시기 전에도 그 교회자체안에 이방인을 향한 구원이 함께 나타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9장 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비하고 계시는가를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 9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만 핍박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다메섹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땅 밖이지요. 수리아 지방 다메섹이니까 핍박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고 핍박에 앞장 선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 중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의 대장 그를 새롭게 하시고 그로 예수의 신실한 종이 되게 하셨고 그래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며 든든히 서가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수중의 대장을 변화시키셔서 신실한 종으로 삼으시고 바로 그런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평안하고 더 세력이 확대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하시고 땅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어도 그의 몸된 교회와 함께 계셔서 그의 백성의 고난을 자기 고난으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핍박자를 새롭게 하셔서 교회가 더 확대되도록 하셨을뿐아니라 32절 부터 보면 예수께서 땅에 계셨을때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땅위에 임한 사실을 증거했던 것처럼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인 베드로를 통해서 그 땅위에서 행했던 이적들을 하나님 나라가 땅위에 임하신 은혜의 실제를 증거했던 그 증거들을 이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땅위에서 주님이 죽으신 뒤로 단순히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그의 교회와 세상에 생명을 주신 사실을 여기 9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0장부터는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을 부르시고 바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부르심에 대한 변증이 11장에 나와 있고 바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 교회를 부르셨을때 핍박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지만 옥문을 여시고 베드로를 꺼내셨을 뿐아니라 그가 택하셨던 바울을 통해서 13장 부터 이방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부르셨는가? 바울을 부르신 목표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 이렇게 아나니아에게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심도 바울을 택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거기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을 전할 그릇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그릇으로 여기 바울 사도를 택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때문에 여기서 뭐 사울이 바울이 되었느니 눈에서 무엇이 떨어졌느니에만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극한 핍박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오히려 바로의 공주를 택하셔서 모세를 기를 수 있도록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보면 핍박자 중 하나를 택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의 증거자와 교회의 보호자가 되게 하심으로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왕이심을 여기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향에서 이것을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있는 역사적인 순서들은 우리들이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9장 23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5절에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 밖으로 내리니라’그리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제자들이 바울 만나기를 겁나했다.그리고 거기서도 핍박을 받고 가이사랴로 갔고 다소로 갔다고 역사적인 순서가 간략하게 나와 있습니다.여기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13절 부터 보면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때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3-24) 여기 있는 순서와 사도행전 9장에 있는 순서를 맞추어 보면 이제 사울이 예수믿는 자를 잡아다 감옥에 넣기 위하여 대제사장에게 그런 권세를 위탁받아 이제 유대땅을 넘어서 이방땅 다메섹에 까지 핍박하려고 가는 도중에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정오 쯤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를 은혜로 찾으셨어도 그는 예수를 거역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빛 가운데서 판단하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아니니아가 와서 기도함으로 눈을 뜨고 그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밥을 먹고 힘을 얻어서 그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그리고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갈1:17)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는 구절들을 볼때에 사도행전 9장 23절을 볼때 여러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라고 말하고 있거든요.이런 구절들을 보면 그가 다메섹으로 돌아오기 전에 3년 동안 아라비아에 있었고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와서 복음을 전할 새 바로 그때 크게 핍박을 받아서 성문을 지키고 그를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고린도 후서 11장 32-33절을 보면 광주리를 타고 밤에 성에서 내려 왔다고 말씀하고 있지요.‘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의 성을 지킬 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 났노라’ 그때 이렇게 벗어나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이해를 해야할 것입니다. 이전에 핍박했던 두목이 왔다 해서 사도들 까지라도 그를 보기를 꺼려했는데 바나바가 데리고 가서 어떻게 그가 변화를 받고 주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가 또 그를 증거했는가의 은혜의 일들을 말하고 있지요.그렇게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보름 밖에 있지 않았고 그때 야고보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아서 가이사랴로 그리고 다소로 가서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있던 사람들은 이전에 핍박을 했던 사람이 저 북쪽 지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 그런 순서지요.그러니까 역사적인 순서들은 그렇게 다시 조정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9장에 있는 사건은 바울 사도께서도 사도행전에서도 몇 번 증언했을 뿐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증거할 때는 꼭 이러한 사실들을 말합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까지 보면 이제 자기의 충성하는 제자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착념하고 그리고 그 복음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봉사할 수 있도록 권면했을때 12절 부터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12-17) 여기 바울은 자기가 교회의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제 자기의 복음전파로 신실한 일꾼 디모데를 얻었는데 자기가 떠나 있던 에베소 지방에 교회를 그로 조직하고 치리할 수 있도록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받은 은혜의 직무가 무엇인가를 디모데에게 설명함으로 바로 디모데도 그 은혜에 따라 봉사하도록 권면하는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데 최선봉에 서 있어서 그 직무를 감당하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말씀하고 있지요.그는 사도되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11장입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의 죄를 봐서는 그는 사도되기에 합당치 않고 그는 죄인 중의 괴수요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원수된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오래 참으셨고 모태로 부터 그를 택정하시고 때가 되매 그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어떻게 원수를 신실한 종으로 세우시는가 하는 은혜의 표적이 곧 바울이어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결단코 버리지 않으셨다고 변증을 했을때 자기 자신을 소개해서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씨요 베냐민 지파요 그런 방식으로 로마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지요.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적으로 배교했던 엘리야 시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바울 자신을 두면서 구원에 합당치 않은 나 같은 자인데도 이처럼 부르심을 받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최종적으로 버린 것이 아니라고 변증할 때 자기를 예로 들고 있고 여기 디모데전서에서도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임하셨고 자기 같은 죄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을 핍박했고 그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 하나님은 그에게 오래 참으심과 은혜를 입히셔서 후에 예수를 빋는 사람들의 본이 되게 하시려고 자기를 택했다고 말씀하고 바로 그 은혜로 지금 디모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바로 여기 9장에 있었던 사건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말할 때마다 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방금 읽은 디모데전서 1장을 보면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요 예수는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서 땅위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구원입니다. 그럴 뿐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구원받은 종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삼으셔서 그 영광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한 고백이지요. 그러니 부르심은 그의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고 그의 직무에로의 부르심이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 우리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불러 세우신 것이다고 바울이 자기 생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뒤돌아 보건데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약속의 백성으로 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행위의 길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를 줄 안 것이 유대인입니다. 그는 마치 여기 그가 빛을 받고 빛 가운데 나타난 주님을 뵙고 소경이 된 것처럼 그는 그런 의미로 영적으로 어둠의 종이요 하나님의 원수로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심은 ‘자기를 모태로 부터 택정하신 하나님이’라고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자기 인생을 돌아 볼때 그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절했어도 자기 같은 원수를 택정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자기의 전 삶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지 그가 예수믿은 뒤로 부터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외하고 그와 교제하는 의미로는 믿음 뒤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물을 지은 왕이셔서 그의 손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알지 못했을때 그의 죄 까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그를 예비하셨다고 그처첨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그를 부르심은 그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생명으로 부르실 뿐아니라 바로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할 수 있도록 그를 신실한 증인으로 세우셨다 하는 것이 바울의 고백인 것을 디모데전서 1장에서도 알 수가 있지요. 이제 바로 그 문제를 여기 9장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살기등등해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멀리 이방땅까지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대제사장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 로마 제국아래 있고 그런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이 회당을 통해서 모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종교적인 관할을 받는 것이 그 당시의 종교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사형권은 없지만 종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체포영장을 가지고 사울이 가는데 정오쯤 되어 해 보다 더 밝은 빛이 저를 둘러 비치고 그때 소리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때 사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랬는데 빛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예수를 보고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22장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기록되어 있고 사울이 한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부르심에 대한 문제가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고 뜻은 알지 못하였고 그리고 빛 가운데 계신 예수를 보지도 못했지요. 그때 소리가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22장과 비교해 보는 것이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22장 6절 부터 보면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때에 오정 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하리라 하시거늘‘(6-18절) 여기 그가 잡혀서 끌려갔을때 변호했던 말입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상황들이 더 다른 면으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으니 여기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어떻든 여기에서 하고 있는 중심되는 말은 어찌해서 나를 핍박하고 있느냐? 그의 교회 주님의 교회가 핍박받고 있을때 주님께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를 핍박할 것이요 나를 귀신들린 자라고 했으니 너희도 그럴 것이라 말하면서 제자가 스승보다 종이 상전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그처럼 말씀했지요.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를 핍박할 것이라고 그처럼 말씀했습니다.
지금 교회가 핍박을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을 따라 난 새 인류인 교회가 받는 핍박이어서 그런의미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그의 교회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말씀한다고 이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때문에 핍박받는 교회와 함게 하실 뿐아니라 바로 32절 부터 보면 교회가 병든 자가 있습니다. 죽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병들고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아니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베드로를 통해서 병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 그런 의미로 교회도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네가 일어나 성으로 돌아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사울이 빛 가운데 계신 주님을 뵙고 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시기를 성령을 부으신 교회를 통해서 사울을 새롭게 하셨고 바울이 친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뵙는 의미로 그는 사도여도 실제적인 부르심은 여기 성령을 부으심을 받은 12사도로 구성된 그의 교회를 통해서 그가 세례를 받고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이어도 그를 부르심에로 세우는 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사울을 부르신 그리스도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울을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증인으로 세례를 통해서 접붙히고 복음의 증인으로서 세우고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은 곧 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뜻을 따라 교회가 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방땅에 까지 본격적으로 이방전도가 시작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사울을 회개시킨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나니아를 보낼때 처음에 아나니아는 겁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너무도 유명한 사람이어서 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나니아에게 임했을 뿐아니라 사울에게도 임해서 어떻게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눈뜨게 함으로 눈 뜨게 하는가를 환상중에 나타내셨고 그렇게 함으로 친히 주님께서 그런 의미로 사울을 안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의 종을 보냈어도 주님께서 친히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리심으로 그저 단순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그의 교회가 이런 일을 행하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 세웠을때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의 증인으로 그리고 고난받는 종으로 세우실 사실에 대해서 알리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해석하기를 아나니아가 안 가려 했는데 왜 안 가려 했느냐면 여기보니까 임금들과 이방인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나의 택한 그릇이라 하니까 그릇이 너무 크거든요. 그래서 시기나서 안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16절에 보니까 나를 위해서 해를 얼마나 많이 보이리라 하니까 이 사람도 고생께나 하겠구나 하고 기분좋아서 갔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종교 심리적으로도 안 맞는 것이고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도 신실한 사람이라 했는데 더구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그런 시기심에 사로 잡힐리가 없지요. 그런 방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바울을 부르셨을 뿐아니라 바울에게 환상중에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할 것을 보이셨을 뿐아니라 바로 아나니아에게 왜 바울을 세우시는가를 알리심으로 이제 12사도로된 교회가 새 인류의 기초로 땅위에 섰을 뿐아니라 이제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본격적인 이방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신실한 종을 세우시는가 하는 사실을 교회로 증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나니아가 예수의 인도로 친히 바울에게 안수함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일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실을 이처럼 알리고 있는 것이어요.
이렇게 된 뒤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나서는 많은 핍박을 받았고 특별히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주의에서 귀화한 열심쟁이 신자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입었고 그래서 행15장에서는 초대교회의 처음 회의가 열리기 까지 했습니다. 왜 이방인의 구원은 유대인에게는 이해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미 사울을 본격적으로 세우시기 전에도 빌립을 통해서 구스 내시를 세례시킴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어떻게 처음부터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나타나 있고 특별히 이 일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 이방 땅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바로 우주적인 복음의 은혜를 알고 바로 그렇게 증거함으로 바로 교회의 본질이 거기 나타나 있는데도 예루살렘의 교회는 그 사실을 바르게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10장을 보아도 베드로를 보낼때도 베드로가 몇번 망설인 사실이 있지 않아요. 잡아 먹으라 해도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또 갈 때도 가서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했소 하고 물어보는 심이어요. 그리고 와서도 많은 분쟁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봐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친히 자기의 신실한 종을 부르시고 그에게 친히 입으로 말씀하시고 그에게 얼굴을 대하고 말씀하시기 까지라도 바로 주님께서는 교회의 일원인 아나니아로 바울을 세례시키고 바로 그를 통해서 바울의 사명을 알리셔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일을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이방전도가 예루살렘 교회와 관계된 것이고 교회와 분리된 다른 사역이 아닙니다.오순절에 12사도로 구성된 교회에 그의 성령을 부으심으로 새 인류로 그들을 지으셨고 바로 이 새 인유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봉사자로 봉사의 기관으로 서 있는 것이고 이제 바울도 그런 의미로 교회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 왜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가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했을때도 3일 전에 목욕하고 그렇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도록 하는 규례여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를 낮추시고 그에게 친히 임하셔서 바로 그와 생명의 교제에로 세상에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우셨을때 3일 뒤에 그의 종을 보내는 그쯤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그가 돌이킨 뒤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때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랬고 그 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더 큰 힘을 얻어서 그가 아는 성경적인 지식으로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곧 그가 오정에 빛 가운데서 보았던 주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역자로 처음부터 이방 땅에 흩어져 있던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증거했지요. 어떻든 처음부터 증거는 이처럼 유대인에게 먼저 증거됩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백성이요 그런 의미로 말씀을 맡은 백성이어서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유대인을 흩으심을 통해서 예비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회당에서 증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회개한 뒤로 그가 처음 다메섹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했고 그가 아는 성경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고 말씀하고 잇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그를 새롭게 부르셨을대 그가 부름받음을 통해서 그는 바로 주 예수를 증거했지만 그를 사도로 세우시는 일에 있어서 땅에 살아계셨을때 그의 제자들을 3년동안 훈련시켰던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바울을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동안 훈련시킨 사실을 갈라디아서 1장의 기사를 통해서 밝게 보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가 친히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하늘의 은혜의 일들을 증거하심으로 이전에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 바울에게 계시되고 그것이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자기가 아는 은혜를 증거하면서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가 열심이 다메섹에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거기서 그가 핍박을 받았습니다.특별히 누구에게 핍박을 받았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고후 11장에 보면 다메섹 왕의 방백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말씀하고 있거든요.아마 유대인들이 그런 권세자를 로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핍박자들은 유대인들이고 언제든지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증거됐는데 이 일에 항상 앞장서서 반대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그런 방식으로 진행이 되어서 그가 거기서 도망쳤고 예루살렘에 갔을때가지라도 그가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운 것이 아니라고 갈라디아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지요.왜냐하면 보름 밖에 없었고 사도들도 겁나서 바울을 안 만나려고 했고 갈라디아서 1장에서도 말하면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러기때문에 그의 복음의 기원은 주 예수에게서 있는 것이고 사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은 것도 아마 그런 의미가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사도들을 통해서 안수받았으면 사도 밑에 있는 것처럼 되어 있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는 이 복음의 우주적인 성격이 잘못하면 훼손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베드로가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지 못했을때 내가 베드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배척했다. 그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을 보았을대 바로 자기의 권위가 다른 사도들과 같은 복음이면서도 사도들을 통해서 받은 복음이 아닌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그런 의미로 베드로를 면첵했다도 말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 하나님의 섭리는 그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을 안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보면 하고 있는 말은 무엇입니가? 바울이 자기를 해석했던 것처럼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자기 의를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줄 알고 힘써 율법을 지켜 행했고 그런의미로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빌립보서 3장에서 말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되시며 십자가에 죽으시는가 하는 구약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알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로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의 빛 가운데 살면서도 자기 의로 사는 율법주의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의미로 보았을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오히려 이방인 보다 더 큰 어둠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가 있지요. 후에 주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하려고 자기를 이렇게 세우셨다 했을때 이방인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거든요. 그는 그런의미로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사람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자기 교회와 함께 하셔서 고난받는 그의 교회를 기억하셔서 원수의 대장을 신실한 그의 종으로 꺽으셔서 이제 오히려 이전에 핍박했던 사람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은혜를 증거케 함으로 전세는 뒤 바뀌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평온했고 교회의 수가 더했고 그리고 바울은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을 이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는 핍박을 받았으나 진리의 말씀으로 유대인들을 이겼고 그 일 때문애 교회는 점점 든든히 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원수 중에 신실한 종을 예비하셔서 임금들과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주 예수의 은혜를 증거하는 신실한 종으로 삼으셔서 바로 이 사람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구원을 얻는 이방으로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주님께서는 핍박받는 그의 교회와 함께 하셔서 그리고 병들어 있는 교회 죽음에 놓여 있는 교회에 함께 하셔서 교회는 결단코 병들어서 끝나거나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참 생명 가운데 있는 것처럼 그의 교회도 그의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고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주 오시도록 까지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핍박을 받습니다. 왜 세상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을 변화시킨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도 변화시켰고 그것도 주님의 권세의 일입니다. 우리들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을때 어둠에 끌려서 생명없는 우상이 끄는대로 우리의 욕구대로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신 분도 바로 빛 가운데 나타나사 바울을 변화시킨 그 분이지요. 물론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이어서 친히 보이시고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매 그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비천함과 예수의 구주되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드셔서 모든 사람에게 증인되게 하셨던 것처럼 땅위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증거할 수 있도록 그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바울을 부르심이 구원에로 부르심 뿐아니라 그의 증인으로 부르심인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 것도 그의 생명의 구원에로 부르심일 뿐아니라 우리는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사명 그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도 그의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땅위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우리들을 땅위에서 아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영이면 우리들도 그런 의미로 세상에서 멸시와 저주 가운데 있다고 합당히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큰 고난 중에 세상의 임금들과 모든 백성에게 증인으로 세우심을 받은 사실들을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사명에로 우리들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고 그가 구원에로 직무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구원으로 그리고 증인의 직무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로 세우신 주님께서 아직도 믿지 않은 사람들 중에 서로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케 하시고 그리고 친히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택한 백성에게 역사하셔서 그들도 순종하고 이 동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그가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를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것처럼 고난받는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시고 비록 교회가 땅위에서 죽고 병들고 없어지는 것 같아도 주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와 영원히 신비적인 연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명은 교회에서 떠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가 죽어도 그의 성령과 연합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죽어 있는 것이어서 주님 재림하시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시는 이적이 필요 없지만 사도행전의 증거는 그 증거를 위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에게 병듦이 있을지라도 죽음이 있을 지라도 또 우리가 핍박을 받을 지라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확장시키시고 보호하시며 그의 교회를 영원히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사실을 믿으시고 우리들도 이 사도적 사명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이 신실히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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