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7:44-8:3

찬미예수님 2025. 4. 12. 06:05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7:44-8:3

 

이제 사도행전 7장에서 세번째 부분을 강론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됨과 모세의 율법이 그들에게 있으며 거룩한 성소가 그들 중에 있다는 이 세 가지가 그들이 항상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예수께서도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 말라.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리라.너희 아비는 마귀요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했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봉사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세상에 그 구원의 빛을 비추어서 세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 경배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심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강조점입니다.물론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지만 구원에 대한 강조점 보다도 그들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서 천하만민으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신 하나님,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그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봉사적인 직무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던 것인데 그들은 그런 의미로 생각하지 못하고 민족적인 우월감으로 바꾸고 그들의 도덕적인 우월감으로 바꾸어서 그들은 혈통상 거룩한 계통이고 그들이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키면 죄의 요소는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이고 그 결과로 메시야 하나님 나라의 왕이 임하셔서 대항하는 원수들을 발 밑에 밟고 그들이 영원한 축복을 받을 것이라 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했고 그리고 이방인들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거처여서 이방인은 결단코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고 하는 방식으로 그 곳을 거룩한 장소로 이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옮기고 이제는 주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이방인의 종으로 그들을 낮추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표로 예루살렘 성전을 불질러도 그들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지를 못했습니다.얼마나 그들의 그 의식이 굳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참 두려운 사실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 까지라도 그들의 옛 본성을 따르는 이해에 있어서는 그들의 행위의 길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 율법의 길로 되고 곧 그것이 그들의 멸망이라고 바울도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저희의 넘어짐은 하나님의 의의 길을 자기의 행위의 길로 잘 못 안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제 여기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이제 사도가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설립한 교회 그것도 그들이 자랑하는 본토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따라 이방에 흩었던 유대인들 바로 거기서 태어난 스데반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참으로 한 몸의 교제에로 이방 땅에서 난 유대인과 그리고 본토에서 난 유대인들을 한 몸의 교제로 봉사하는 중요한 직무를 맡았을 뿐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그가 세우신 교회를 바로 주님 자신이 섰던 원수 앞에 서서 바로 그들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일 이제 천하만민이 주 예수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를 거절하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그래서 78장은 주로 이방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스데반과 빌립의 증거가나타나 있고 거기까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온벽한 단위로 종말론적인 완성체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그 진행들이 나중에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이방 선교로 확장됨으로 여기 있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역사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스데반이 한 증거는 이것입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거하시거나 성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 집에서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처음 부터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 너희들은 우얼성을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본래가 혈통으로 따라도 저 이방 땅에서 나왔고 역사를 보면 종살이 했고 너희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조직된 뒤로도 한 번도 순종한 적이 없고 그결과도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은 말로는 거룩한 혈통이요 또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율법이 증거했던 의인이 오시리라는 약속에 대해 그들은 처음부터 거절했고 이제 마지막에 그 죄를 채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6절 까지는 조상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고 17-43절 까지는 모세 경륜시대를 44절 부터는 성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변증하고 있습니다.지난 시간에 두 시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조상의 시대때 메소포타미아 즉 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땅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조상을 부르셨고 그러니 그 영광의 하나님이 거기 계셨지요.또 그럴 뿐아니라 그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 라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서 인도하셨으니 하나님이 애굽에 영광을 그들의 구원을 통해서 거기 나타내신 것이지요.그러니까 처음 서론 도입부에서 벌써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요.온 땅에 충만이 거하시며 천하만민을 자기 백성 삼으신다는 보편적인 구원관이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부터 전개되고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쭉 이야기 해도 이 역사가 유리들이 태 정 태 세 문 단 세 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여서 그들은 이 사실을 들음으로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백성입니다.그들이 소나 양을 잡아 제사 지내도 단순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가령 안믿는 자들도 소나 양을 잡아 제사지낼 때 자기들이 왜 이 일을 행하는가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계시된 제사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주신 목적에 따라서 바르게 믿는 백성들은 예배하고 있는 것이어요.그러니 이 역사 까지라도 해석을 하는 역사이지 단순이 외우고 있는 역사가 아닙니다. 어떻든 조상의 시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모든 족장들의 머리로 세웠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 머리를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 족장들이 거절한 그 요셉을 세상과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또 모세기대때도 보면 모세를 그들을 버렸습니다.누가 너를 우리들의 재판장과 관원으로 삼았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느냐? 하고 거절했는데 바로 그들이 거절한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속량자로 삼으셨다.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처음부터 거절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지난시간에 충분한 설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모세는 자기가 왕자가 되니까 기분이 좋고 자신감이 넘쳐서 내가 왕자 쯤 되니까 내가 이 백성을 구원해 보아야 하겠다.그렇게 하고 시행했는데 구원한다는 것이 결국 살인자만 되어 버리고 쫒겨나서 나는 말도 할 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고 낮아 지도록 까지 하나님이 그를 못본채 두었다가 이제 하나님이 부르고 불러도 나는 못하겠소 할 정도로 되었다가 그때 드디어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보통 이런 해석들을 우리가 해왔습니다. 특별히 신학교에서는 보통 이런 설교는 천번쯤은 듣지요.여러분들이 낮아져야 되겠다.목사만 될려고 하지 말고 정말 목사 안되면 못 살겠다 할 때 되어라. 이런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명들을 하지요.물론 일면의 진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히브리서의 증거와 사도행전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령 히브리서를 보면 1124절 부터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보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애굽을 떠나기 전 문제들도 말하자면 모세의 신앙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는데도 그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데로 너희들을 부를 때 너희들은 내 시체를 매고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 달라고 했던 것처럼 요셉은 한번도 자기를 애굽사람으로 계산하지 아니했고 또 자기의 형제들이 내려 왔을 때 까지라도 저기 변방 고센 땅을 지적해서 애굽사람들은 본래 목축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우리들이 대대로 목축합니다. 그러면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땅을 줄 것이니 그렇게 하라 해놓고 자기가 가서 자기 아버지와 형제를 만났어도 자기 형제와 아버지를 궁전으로 부른적이 없지요.그러기때문에 그는 애굽에 있어도 한번도 애굽 백성으로 여긴 적이 없어요.그래서 죽을 때도 그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그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어서 그의 뼈를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 까지라도 가나안에서 승리했을때 소돔임금이 모든 재물을 다 취하고 자기와 동맹하도록 요구했을때도 그는 그런 것을 거절하고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 처럼 거기 한 군주로 계산되기를 거절했습니다.마찬가지로 요셉이 그러하면 모세를 해석하는 빛을 그냥 받을 수가 있어요.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이 바로 그 중보적인 직임자를 통해서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계시의 목적으로 세웠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요셉이 자기를 해석하기를 형들은 나를 파았어도 하나님은 형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하는 해석은 요셉 개인에 대한 경건한 고백 어떤 종교적인 신의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당시 구원자로 요셉을 세웠을때 바로 그 영이 그에게 증거함을 통해서 자기를 세우신 목표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고 자기 백성의 구원이 곧 때가 되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로 진행됨을 믿기 때문에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역사하기 때문에 요셉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어요. 요셉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면 우리 자신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들이 이와같이 삽니까? 왜 우리들이 세상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오히려 거절하고 이런 방식으로 삽니까? 그것은 누구 보다도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이 먹고 마심의 질서를 넘어선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안에 있는 참다운 생명의 질서를 우리안에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세상의 이런 저런 보화를 얻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어요.중보의 영은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단지 그 영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시는냐에 따라서 구원의 실제가 어떻게 땅위에 이루어지느냐의 차이점 문제이지 동일한 중보자께서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일하심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요셉을 해석할 수 있으면 모세를 해석할 수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의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그는 분명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컸습니다.그러나 그는 거기서 애굽백성으로 계산되기를 거절하고 고난받는 자기 백성과 자기를 동일화해서 그 백성을 구원하려고 애굽 백성을 쳐서 죽였습니다.그리고 그렇게 했을때 그는 바로 왕의 눈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을 두려워 했으면 그와같이 할 수 없지요.자 그렇게 해서 그는 애굽의 왕자로 계산되기를 거절했던 것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기뻐했다.그러기때문에 이것은 모세의 신앙이었지 그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않했는데 먼저 앞서 가지고 실패한 것이 아니냐? 등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요.애굽에 가봤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처음에는 자기 동생인줄 몰랐는데 굉장히 두려워하고 돈 주고 사왔습니다. 나중에 자기 형제가 애굽의 국무총리인 줄 알았어요.그들의 죄로 봐서는 죽을 죄이지요. 그러나 요셉이 위로했고 자기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위로해서 평안함을 주었습니다.자 그러니 그들은 누구와 누구와 한 혈통입니까? 요셉과 한 혈통이요 한 형제여서 그들은 이방인과 함께 계산될 수 없고 그들은 말하자면 요셉의 위치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그러니 세상이 요셉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은 그보다 더한 구원이어서 세상의 백성들은 요셉에게 돈 주고 값주고 사서 그 식물을 먹었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애굽의 왕궁으로 부터 모든 것이 공급되고 기업들을 얻었고 돈주고 사먹는 백성들이 아니어요.왜냐하면 요셉의 자리에 그의 형제들도 앉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왜냐하면 왕은 자기 백성들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요셉의 형제들이 봤을때 요셉이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혹시나 하는 자기 죄에 대한 공포심은 있겠지만 만일 자기들이 죄에 대한 공포심만 자기들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큰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보장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에 앉아있는 동안에 그들은 결단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나중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나와서 그들이 핍박을 받았어도 요셉의 공로가 기억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국무총리의 형제로서 혈육으로서 대우를 받았습니다.그러니 요셉의 형제들의 구원이 자기 혈육이 임금의 보좌에 앉았다는 것이어요.애굽의 모든 권세는 요셉에게 있어요. 이와같은 것이 모세시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애굽밑에서 고난을 받습니다.이제는나그네처럼 되었고 종처럼 되었습니다.어느날 보니까 자기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왕자에 앉은 왕자였습니다.그가 이제는 핍박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자기 백성의 구원자 보호자가 되었으니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봤으면 곧 그서이 그들의 구원입니다. 그들은 불안할 필요가 없습니다.모세가 왕자입니다.이제는 그전처럼 그들을 학대하는 왕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왕이 애굽의 보좌에 앉게 되었으니 곧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어요.,바로 모세는 그들이 그것을 알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요셉이 자기를 해석하기를 왜 하나님이 자기를 이 것에 세우셨는가 형제들은 팔았어도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나를 이 보좌에 앉히셨으니 이제는 애굽에 있는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가 국무총리이기 때문에 왕의 부인을 빼놓고는 다 자기의 권한에 있는 것이지요.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모세도 그와같은 위치입니다.모세의 형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그와같은 관점에서 그를 왕으로 취급하고 보았으면 그들은 왕과같은 효력이요 그들과 같은 형제가 왕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은 그전처럼 핍박받는 백성이 될 수없고 이제는 왕국의 주 시민으로서 살게 될 것이어요.그렇게 해석해야 맞는 해석일 진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왕됨 즉 국무총리됨을 보고 떨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왕됨을 알지 못하고 이제는 네가 애굽백성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그런 방식으로 그의 왕됨을 거절한 것이지요.그래서 누거 너를 참으로 왕으로 삼았으며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지금 말하자면 모세는 왕자로서 왕의 권위로서 애굽 백성을 쳐서 죽였지요.그러나 그들은 왕의 권위를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하나님이 요셉을 인도했던 것처럼 모세를 인도했는데도 그들은 그런 신앙으로 모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0년이 차매 그들의 구원자가 당하는 고난이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난의 예기적인 성취여서 바로 그들의 지도자가 당하는 고난을통해서 그 백성들의 구원이 선물되고 있는 것이지요.40일 또는 40년 하는 것은 노아홍수 당시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했을 때부터 4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는데 그때부터 그것은 고난의 숫자요 바로 고난을 통해서 고난이 끝났을때 그들이 버렸던 모세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자와 관원으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모세를 통해서 이제 요셉을 통해서는 그들이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았고 종교적인 방식으로는 애굽에서 구별되는 고센 땅에서 살았어요.바로 요셉이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요.그런데 여기 모세는 그들에게 먹고 마심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언액 체결자로서의 대표자로 서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의 법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 주었으니 단순히 먹고 마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되는 교제질서로 자기 백성을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언약의 중보자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그런데도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음 부터 아론이 범죄함으로 두 돌판은 깨뜨려 졌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으로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은 백성으로 버릴 뿐아니라 종말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조내리라고 역사를 그렇게 함축적인 방식으로 기술합니다.항상 처음 있는 일들은 종말론적인 일입니다.논문에 있어서 서론이 결론을 직접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도 어느 시대가 도입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면 그 시대에 나타난 여러 사건 보다도 처음 언약체결의 장면이 더 역사의 끝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시를 해요.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리고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 버림받았습니다.그리고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종말론적 심판 곧 바벨론을 말함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물론 신명기에서도 이렇게 되어 있지만 처음과 끝을 묶고 있는 그 사이는 그런 과정들입니다. 그러기때문에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해서 순종한 적이 없고 특별히 모세는 생명의 돌을 받아서 주었을 뿐아니라 생명의 돌을 받은 그가 하는 말이 내 뒤에 나와같은 선지자가 올 것인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그는 돌판에 새긴 법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그들에게 나타냈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가져다 주시는 선지자가 임할 것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그리고 모세시대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모세가 예언했던 참다운 선지자 하나님의 생명의 돌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 주는 참다운 선지자가 오는 것을 선지자들이 거듭 거듭 바라보고 예언했어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제도안에서 만족하고 회개하고 그 왕과 선지자가 오심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지를 못했습니다.그래서 예수가 증거하셔도 선지자들은 다 예루살렘에서 죽었고 말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지만 그들은 그 죄를 더 채운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나타난 것은 결론이어요.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아론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했고 하나님의 언약이 파괴되는 방식으로 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성전은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백성이 아닙니다.단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그들에게 이루신 것이지 그들의 의가 구원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고 바로 언약체결 했던 시내산의 자리에서 번죄했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4절 부터보면 성전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에 본 식양대로 성소를 지었습니다.그 때는 언제입니까? 광야에서 였습니다. 그들이 성소를 자랑하니까 성소로 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가나안 땅이 거룩하고가 아니라 광야에서 성소가 있었다고 하고 있으니 모세시대에 이 성소제도가 들어왔어도 율법적인 제도로 들어왔어도 그들이 자랑하는 이 찬란한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이 천막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거기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며 보호하시는 그 은혜의 표를 거기 두시고 그 표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입니다.하나님은 그 빛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의사를 나타내셨고 또 입히셨습니다.그렇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금으로 입혀진 돌집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40년 동안 성막에 있었을때 그 성막이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로서 부족한 것이 아니었지요.그런의미로 더구나 광야에 있었습니다.그러니 그들이 자랑한 것이 처음부터 무너집니다.또 사도행전 7장의 제일 처음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때 영광의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곧 그것이 성소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을때 거기는 특별한 성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땅이 성소여서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아시를 가든지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구별했기 때문에 거기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그 때 뭐 성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심지어 모세제도 아래에서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고 너희들이 제단을 쌓을 때 다듬은 돌로 쌓지 말고 흙으로 그리고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라.그리고 층계를 만들어 올라섬으로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라.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임하셔서 사람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길을 바로 단의 제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때문에 성소의 성소의 아름다움을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입니다.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조상들이 그들보다 못하다면 혹 일리가 있는데 그들은 조상들을 자랑하고 조상들이 없으면 그들이 없어요.실은 조상의 약속이 모든 영광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어서 그들은 조상들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조상이 뿌리요 그 뿌리를 통해서 나타난 가지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조상들이 있었을 대는 그들이 모세를 자랑하고 있는데 모세는 천막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두셨을 때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셨거든요.그러니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의미를 모르고 자랑하는 어라석은 일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하늘의 식양대로 그가 본대로 만들었다 하는 말은 저 높은 하늘에 집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너무 큰 집인데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모형으로 조그마하게 집을 지었다 하는 말이 아니고 하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어요.이 세상 오는 세상 하는 것과 같고 나는 위에 속했고 나는 아래에 속했다 했을 때 위에 속한 말이지요.그래서 하늘의 교제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질서를 하나님께서 땅에 그런 제도를 통해서 그렇게 계산한 것이지 하늘에 이와같은 집이 있다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다 성육신의 은혜인데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사람이 함께 하고 만져보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친히 자기가 계시는 방식을 나타냈습니다.어떻든 하나님께서 자기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든 방식은 성육신의 은혜여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사람되심을 통해 임하시고 우리와 같은 본성의 질서로 임하셔서 먹고 마시고 서로 교제하는 그런 질서로 옴으로 그것은 이제 충만한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기때문에 하늘에 본 식양대로 만들었다 하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바로 그 제도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모든 원수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해서 언약의 백성을 그 땅에 심으시고 그들의 기업으로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땅은 하나님이 주인이시요 하나님은 그 땅을 자기백성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자기 백성의 기업으로 주신 것과 같습니다.그리고 다윗때에 이르러서 집을 지었습니다.그러기때문에 모세 여호수아 다윗 그 다음에 솔로몬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참 왕이셔서 원수를 정복하고 이제 원수가 다 정복됨이 하나님의 안식입니다.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비유적인 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의 안식이요 온 땅은 하나님의 거처여서 하나님의 법이 시행되고 하나님을 거절한 이방 백성은 그 땅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된 전쟁의 내용이어요.그러기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이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안식의 충만한 성취는 다윗 때에 이루어졌습니다.다윗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 곧 그런 왕적인 통치를 땅에 나타내는 그런 계시기관으로 하나님이 세우셔서 모든 이방 왕들이 그 발 앞에 복종했고 그리고 모든 재물들을 다윗 앞에 갔다 다 바쳤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다 죽이라는 명령은 원수에 대한 진멸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천하만민에게 받게 하시는 것인데 그들이 다윗에게 복종함으로 다윗의 하나님께 그런의미로 복종한 것이지요.자원해서 순종하여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 왕적인 권세 때문에 복종했어도 나타난 것은 복종이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의 성취라고 말합니다.거기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볼 수 없습니다.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집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얻음은 하나님이 안식을 얻음과 같습니다.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이 다 없어진 것은 하나님의 대적이 없어 진 것과 같습니다.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이 이제는 천막을 치고 여기 저기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거기 있으면 하나님의 보화가 거기 있습니다.하나님의 보화가 거기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단지 다윗은 그 보좌에 취임하신 참 왕되신 하나님의 왕권을 이스라엘 빽성이 보이는 질서로 나타난 왕이지 진정한 왕은 지성소에 좌정하신 하나님이 왕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하나님의 집을 짓기를 원했을때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을 통해서 지으시리라 약속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씨를 줄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역대상 22:9-10절에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일 뿐아니라 솔로몬이어서 평화의 왕입니다.그 이름을 여디디아라고 나단이 붙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그리고 역대상 22장에는 하나님이 솔로몬을 지칭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서 그가 내 집을 지으리라 그런 방식으로 솔로몬을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그래서 다윗이 집을 짓지 않고 솔로몬이 대신 집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 안에서는 하나님이 그 모든 영광을 다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그는 칼의 권세로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의 왕국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평화는 다윗을 통해서 계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윗을 통해서는 모든 백성이 복종하고 그런 것은 쉽게 나타낼 수 있지만 모든 백성이 복종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안식이 이루어 지고 그것은 우주적인 평화여서 거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실은 솔로몬을 통해서 계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비가 되라라.이제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바로 이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를 땅위에 구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그렇게 말씀했던 것이고 이제 그 실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셔서 그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때 위에서 친히 음성이 들려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평화의 왕국을 건걸할 분이시지요. 그래서 솔로몬을 통해서 그 집을 지었습니다.이 성전의 제도도 모세가 계시받았던 그대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의 제도는 다윗이 계시를 받았습니다.하나님의 언약에 처음 중보자가 모세였으며 이제 그 왕국의 중보자는 다윗이어서 다윗이 모세가 성소의 제도를 받았던 것처럼 성전의 제도를 그렇게 다윗이 받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집으로 레위인이 찬양하는 집으로 지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모세에게 시작된 그 일은 다윗 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시가 다윗에게 임했기 때문에 단지 그 영광은 솔로몬을 통해서 나타낼 수 밖에 없어도 그 왕국의 머리는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솔로몬이 그 집을 지었을 때 솔로몬은 그 집의 의미를 알았습니다.그는 보이는 건물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집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처를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사는 방식으로 나타났거든요.그때 솔로몬이 집을 지을 때 하는 말이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여기 스데반이 이처럼 선지자들의 말들을 증거헤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먼저 집을 지을 때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요. 열왕기상 8장을 보면 27절에 보면 솔로몬이 집을 지을 때 기도했던 내용들입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내가 건축한 이 전 이오리이까분명히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고 내제하신 하나님이시여서 그것 때문에 세상은 존재하고 생명이 있습니다.그런데로 하나님이 초월하신 하나님이셔서 어떤 물질에 갇혀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방신들 처럼 어떤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7계단으로 구분하는 방식인데)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니리까? 온 땅도 하나님의 거처로 합당치 않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의 거처로 합당치 않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초월하신 하나님이신데 어떤 피조물을 거처 삼아서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분명히 솔로몬이 그 집을 짓도록 했을 때 고백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지었어도 그 하나님이 이방신처럼 거기 계신다는 의미로 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어서 하나님이 거기 거하십니다. 그러기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소유삼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의 대표자와 만나고 교제하십니다.그런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거기 거하셔도 하나님이 임하심의 표상일 뿐 하나님이 인격 자체로 거기 갇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그래서 솔로몬이 그 집을 지었을 때 그 집의 의미를 분명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역대하 2장을 보면 특별히 성전과 다윗 집안과의 괸계를 쭉 역대기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24절 부터 보면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4-6)라고 후람왕에게 편지할 때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참으로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이신데 내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서 그 왕국을 세우시지 다웃이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는가? 아니지요.단지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제도를 따라서 주신 규례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의 처소로 그런믜미로 예배의 처소로 내가 짓고자 하는 것 뿐이라 그렇게 솔로몬이 말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고 기도한 내용들을 보면 열왕기상 841절이지요.‘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알게 하옵소서’(41-43) 이방인을 위한 전으로도 분명히 고백하고 있지요.그러니 이 전은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본 백성이어도 바로 그 하나님이 천하만민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증거되도록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봉사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된 것이어요. 단지 아직 본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죄가 완전히 제거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온전히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과 대제사장 그리고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처럼 아직까지 그런의미로 보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성전 밖에 있었어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든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교제하는 백성 기도하는 백성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시고 거기서 자기백성과 교제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여기 솔로몬의 기사를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집을 지었을때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지 어느 거처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성전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죽일 때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인 것처럼 스데반을 죽일때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어냈습니다.율법을 보면 하나님의 진은 다 거룩해서 죄인들은 다 진 밖으로 쫓아 내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대 속죄일에 재물도 진 밖에서 불태우도록 했습니다.그들은 거룩을 빙자해서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성 밖으로 쫒아내서 죽였지요.성 밖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식이지요.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라 해서 우상섭리로 더욱 굳어져 있었어요.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모세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도를 그들은 들은 적이 없고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계시했던 것처럼 참 생명이 세상에 주어질 것인데도 바로 그 의인이 오시리라는 모든 약속들을 증거했던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리고 그 의인이 오기를 기대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지를 아니했습니다.쉬지 않고 성전에서 제물을 드렸어도 성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다는 방식으로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예식에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인 제도를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으로 행위의 방식으로 했던 것이고 그것이 돼지 피를 드리는 것과 같다고 이사야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로는 율법을 외워도 율법이 지시하는 의인이 오심을 바라보고 바로 그 의인이 오셔서 온전하게 이루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탄식함으로 그들의 죄를 끊고 그런 방식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율법이 있음으로 만족했고 율법의 제도를 따라서 제사지냄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를 갖는 것처럼 이해를 해서 오히려 우주적인 하나님의 의미를 더욱 줄여서 그들은 단지 집에 갇힌 우상신의 방식으로 바꾸었고 그런 방식으로 해서 더욱 그들은 하나님 앞에 원수로 섰습니다.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지요.그리고 그 의인이 왔는데 죽였습니다.바로 그 분이 하늘의 실제를 땅위에 옮긴 분이어서 바로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은 육체로 거하셔서 곧 하나님이 땅위에 임하는 하나님으로 오심이어요.자기백성과 함께하는 분으로 오셨는데도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내가 삼일에 다시 일으키리라.예수는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참으로 신령한 성소 이제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제는 구약적인 모형적인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하는 하늘의 예배로 예배할 것을 한 말씀이어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인 앞에서 그들의 의를 자랑하다가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못박아 죽였습니다.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여요. 이것을 지금 누가 말합니까? 이방땅에서 태어난 유대인 스데반이 말하고 있지요.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 이스라엘 의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했던 것처럼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 중에 경건한 무리들이 돌아와서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이제 유대인들이 이방땅에서 돌아 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방인의 구원이 약속된 것입니다.바울은 말하기를 내 백성이 아니라한 그 것에서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그것은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인데 그것은 그들은 바벨론으로 심판해서 보내실 것이어요.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자기 백성을 회복한 그 기사를 바울은 해석하기를 이방인의 구원으로 해석합니다.? 바벨론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거기 이방의 종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이 이방인의 구원이라.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어요.하나님은 처음부터 온 우중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참으로 모든 피조물에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의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도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어도 그 생명의 도를 가져오신 분은 하나님이 사람되심을 통해서 참 하늘의 실제가 땅위에 임해지고 그러므로 하늘의 삶을 살 수 있는 새 인류가 땅위에 주어지는 것이지요. 옛 백성은 그 은혜의 역사에 합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원수의 자리에 섰습니다.그들은 지금도 성소의 제도 아래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바로 성소에 나타나셔서 그 성소의 제도를 장사꾼의 집으로 그리고 강도의 굴혈로 징계하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징계하셨던 주님 그들이 바로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그를 죽였는데도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셔서보좌우편에 취임하시고 그리고 그를 증거하는 증인인 스데반과 함께하시고 그리고 자기 종들을 통해서 세상에 그의 나라를 확증하시는 분으로 54절 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5,5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의 길이 열렸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정죄한 그 자리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자기 교회와 함께 하시며 바로 성전의 제도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버려도 버림받은 그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법이 없습니다.원수 앞에서 스데반이 주 예수를 증거했던 것처럼 주 예수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증거하리라 했던 것처럼 그가 일어서서셔 자기 종의 증거에 친히 동참한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바로 스데반이 이처럼 버림을 당했어도 주 예수의 영을 따라 그들을 위해서 간구함으로 이 사명을 마쳤습니다. 교회도 그 영을 따라 죽기까지 이 사명의 길을 걸을 것이고 세상에선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버림을 당했어도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안에서 교회는 파괴되는 법이 없습니다.그리고 세상에서 주를 증거하신 증인들을 주님께서 천사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의기양양해서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핍박했을때 사도들을 빼놓고는 다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쳤습니다.교회는 파괴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고 교회는 땅위에서 죽임을 당해도 그들을 위해서 죽임받은 예수는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이시고 그 분이 하늘에 계셔서 땅위에 신령한 나라 그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땅위에서 가르치시고 권능으로 역사하셨던 그 분이 지금 하늘 보좌우편에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손가락이 천하를 지배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권세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핍박했던 사울을 꺽으셔서 바로 그가 핍박했던 주 예수를 증거할 수 있는 신실한 종으로 삼으셔서 이제 이방땅에서 태어나서 돌아온 스데반이 증거했던 그 증거로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우주적인 복음을 그렇게 증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이십니다. 그것을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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