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 사도행전 7:17-43
7장에서 스데반이 증거 한 의미는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핍박해서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했을 때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 하는 면에 있어서 그들이 비판하기를 율법을 모독하고 거룩한 성소를 훼방한다고 고발했을 때 유대인들이 자랑한 모든 자랑을 끝내고 오히려 그들이 자랑했던 모든 것은 민족적인 우월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봉사하는 백성으로 곧 그런 것은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심에 모형적인 일이지 그 자체로서 특이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성전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천하 만민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혈통을 따라 구원하심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난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7장에서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스데반이 변증하고 있는 내용들은 두 가지 문제에 강조점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했던 모세 또 그들이 자랑했던 성전의 제도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그들은 그들의 조상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약속을 따라서 모세를 세우셨고 또 모세와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의 교제를 성막제도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음이요.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우월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민족적인 우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의 우월성 즉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봉사하는 백성으로 그들은 세상백성과 구별되는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들은 민족적인 우월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그들을 심판해서 보낼 때까지라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아브라함은 한 명이어도 숫자가 이렇게 많아졌는데 우리는 숫자가 몇 명인가 그런데 우리들은 안 죽는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했고, 또 이 거룩한 성전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니 마치 손안에 있는 재물을 하나님의 상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만 먹고 이방인을 참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집에 거룩한 재물이고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성전을 의뢰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창기의 집이라 해서 오히려 예레미야를 시위대의 뜰에 가두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지요. 그들도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성전이 있음과 율법을 행하면 그 자체를 행함으로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제도 아래서 저들과 함께 하심의 은혜의 길을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길로 바꾸고 그래서 그들은 제사를 지내고 이사야 1장대로 하면 성회와 함께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하겠도다. 너희들이 헛되이 마당만 밟는도다. 누가 내 문을 지키면 좋겠다. 하는 것처럼 그들이 율법 의식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러니 우리는 망하지 아니하며 우리에게는 율법과 거룩한 성소가 있으니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땅에서 떠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죄가 많아서 떠난 것이지 그 땅은 전부 복 받은 우리의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월성은 깨지지 안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멀리 옮기시고 오히려 옮김 받은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거기 성소가 되셔서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 신실한 자기 종들과 함께 하셔서 거기서 지키시고 그리고 성전을 불태워 버렸는데도 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사람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거든요. 천하 만민이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고 율법의 모든 제도는 예수 안에서 끝났으며 그런 의미로 이제는 성소가 더 이상의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따라서 주후 70년에 성전은 불태우고 이스라엘 백성을 흩으시고 제사장의 가문을 다시는 족보를 회복하지 못할 만큼 끊으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의 옛 제도를 완전히 끝내 버렸지만 그 전에도 여기 이방 땅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라난 스데반 같은 사람은 이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스데반의 증거도 세 면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7절 까지는 족장들의 역사였지요. 그들이 자랑하기를 영광의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지성소에만 계신다 하는데 아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하란에서 우리 조상이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거기서 우리 조상을 부르셨다. 그런 의미로 하자면 본래 그들 조상들도 이방인 이지요. 인류가 아담 안에 한 혈통인줄 안다면 지금 종족을 가르고 씨족을 가르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자기 집안끼리는 화목하고 씨족끼리는 화해해도 그것을 벗어나면 모르는 것이고 전라도 경상도끼리는 화목해도 그것을 벗어나면 모르는 것이고 전부 이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끼리 하는 평화라 하는 것은 사실이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자기 이익이 소망이 끊어지면 사람은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고는 참 평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갑자기 생긴 민족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거든요.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가 복잡한 것도 그것입니다.우리는 만주 땅을 빼앗긴지가 한 500년 쯤 될까요? 얼마 안 되지요.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은 빼앗긴 지가 2000년 되었거든요. 그런데 찾아와서 보니까 성경을 보니 우리 땅이라고 그러니 그 동안 살던 본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지요. 유대인들은 독특한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봉사한다는 의미로는 선택된 민족이지만 어떤 민족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닌데도 선민의식이 강하지요. 그래서 여기 스데반의 처음 설교의 1-17절 가지는 족장들에 대한 역사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조상들도 본래는 강 건너 편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우상섬기는 중에 있었고 하나님은 이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 조상들을 부르셨다. 그렇게 말하면 처음에 모든 문제가 다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랬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거룩해서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아니고 땅 한 평도 못 얻었을 뿐 아니라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백성이고 그러니 조상들의 족보를 쭉 보면 종살이가 400년이나 되니까 별 볼일 없지요. 이렇게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본래 출생이 바벨론 메소포타미아 출신이고 이 땅은 거룩한 땅이요 성전은 여기 있고 해도 본래부터 거룩한 곳이 아니요 우리 조상들도 여기서 땅 한 평도 못 얻었고 그리고 애굽에서 400년이나 종살이 했으니 조상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이방민족에 뛰어난 민족으로 스스로 자부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우리 조상들을 부르셨고 400년 종안 애굽에서 우리 조상들이 종살이 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 성소에만 계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하나님은 온 땅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자기 거처로 회복하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 은혜의 길을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을 구별하시고 특히 성소를 구별하셔서 거기 자기 보좌를 설정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표를 거기 두시고 거기 제사장들과 교제하심으로 다시 천하 만민 중에 거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을 거기에서 타나내셨지 그것은 약속의 그림자일 뿐 그들이 자랑하는 이 모세시대의 이전의 족장시대에 벌써 복음은 우주적인 복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구원역사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예수가 오셨는데 그 사이에 끼워주신 시대가 모세시대거든요. 이 모세시대는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시대에 어떻게 보면 복음의 완전한 빛이 나타나요.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셔서 아브라함과 함께 먹고 마셨던 그 분 그 분이 때가 되매 영원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땅에 오셨고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거든요. 이제 주님 재림하시면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먹고 마신다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모세시대 때는 그렇게 먹지 않아요. 휘장으로 가리고 대표자들만 들어가서 12떡 덩어리 진설병을 먹어도 그것은 안식일에 진설하고 안식일에 내어오는 것이고 그러나 아브라함시대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또 모세시대 때는 성소가 한 곳에 있지만 아브라함은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면 거기서 예배하고 온 가나안 땅이 성소였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 때 모세시대 보다 그런 의미로 복음의 요소가 더 잘 나타나 있어요. 그러나 모세시대는 사람의 범죄 때문에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는 분 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야 하는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제도 아래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죄를 해결하시는가를 거기 나타내심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는 분의 구원이 거기 더 밝히 나타내고 소망 되도록 하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조상시대를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조상시대에는 복음이 더 우주적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 시대만 봐도 아브라함과 연합했던 이방인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전쟁했던! 거기 보면 벌써 이방인들이 그렇게 나타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랄 왕까지라도 사라의 태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증거했을 때 바로 사라의 태를 통해서 나실 그 분 때문에 그랄 왕의 모든 생명이 보존됨을 그 태를 닫음으로 나타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아직 예수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와도 벌써 거기 이방인들이 나타나 있고 혈통 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어도 아브라함의 백성은 이방인과 함께하는 아브라함의 백성이어요. 그러니까 바벨론 땅에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부름 받고 그의 후손이 400녕 동안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거기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니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이지요. 왜냐하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곳이 거룩한 땅이니 이 곳이 거룩한 성소이니 하는 말은 본래적인 의미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 그들의 조상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일로 하나님을 잘 순종하는 백성인줄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이삭에게서 성취되고 이삭에게 성취된 약속이 야곱에게 상속되어 다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12아들은 다 아브라함의 씨요 그 약속에서 하나도 제외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의 12아들이 구약의 교회요 하나님이 자기백성과 함께하심의 인류 그 중에 하나도 버린 백성이 없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친히 요셉을 택하셔서 그들의 머리로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우심은 바로 그 후손을 통해서 광대한 국가를 세우시고 그렇게 해서 열방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거든요.그래서 거기 요셉을 택하셔서 야곱의 장자로 삼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장자로 대우하셨습니다. 채색 옷을 입히고 그래서 그 형들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팔았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국가적인 방식으로 진행시키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그들은 시기하고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반이 오히려 그들의 구원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셨고 하나님은 이 요셉을 통해서 세계와 이스라엘 백성이 기근에서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세상의 구원자의 모형입니다. 그들이 버렸던 요셉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의 구언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배반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절은 51-53절이라고 했지요. 이것이 이 설교의 결론이거든요. 그러니까 처음 조상들의 역사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가나안 땅에만 거하는 분이 아니라 바벨론에 그리고 애굽 땅에 그리고 그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애굽에서 바벨론에서는 우상섬기는 백성 중에 있었고 애굽에서는 종살이요 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랬을 뿐 아니라 그들의 조상시대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거절한 그 자를 그들의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지금 말씀하고 있지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의 때가 가까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국가로 번성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씨로 광대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어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요 그들이 무슨 우월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런 때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애굽의 역사들은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야곱과 후손들이 내려갔을 때는 셈족 계열이 애굽을 통치했고 이제 요셉이 죽은 뒤로 통치했던 계열은 함족 계열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종족이 틀리니까 이전에 우대받았던 이방인들 이주민들 이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정권이 일어났을 때 그들을 반역하리라고 하는 생각은 보통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냈을 때 함족이 대대적인 심판을 받음으로 노아에게 약속했던 함은 종의 종이라고 하는 방식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든 그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그들은 대단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받은 핍박은 19절에 있는 것처럼 ‘어린아이들은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거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인구 정책상 이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20절에 보면 ‘그 때에 모세가 났는 데~길리우더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그 준수함을 보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이렇게 길렀다. 또 히브리서에 보면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길렀다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하는 말은 하나님이 뭐 미스터 코리아 뽑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요게벳이 보기에 준수한지라 하는 말은 물론 구약 때 보면 용모의 아름다움 눈이 빼어남 그런 것을 가지고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이렇게 말함으로 여기 모세를 구원하신 의미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을 다 못 낳게 했을 때 여기 성경의 기사들은 심지어 아브라함의 가정의 큰아들 작은 아들이 싸우는 것도 그것도 두 언약으로 갈라져 있음으로 분명히 해석을 하지 않습니까? 이삭과 이스마엘의 투쟁 그리고 아브라함의 두 아내인 사라와 하갈의 투쟁 그런 문제들을 두 언약으로 분명히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족장들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이 그런 일들을 통해서 계시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봉사하는 방식으로 서 있는 것이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방식으로 그들 안에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의 문제들을 예수의 사건들과 예언과 성취되는 문제들로 비교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잘 못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도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지요. 이유는 예수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어린아이들을 못 낳게 하려는 것도 여인의 후손이 끊어지게 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끊고자 하는 어둠의 역사여요. 그것이 세상권세 당시는 애굽이 세상 권세의 대표적인 격인데 세상 권세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단순히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 어른들도 아이 낳는 것을 멈추면 한국은 선교사를 보낼 수 없게 되겠지요. 지금은 교회가 너무 많으니까 목사도 줄어 들었으면 즣겠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고 우리들은 편히 살려고 돈 적당히 벌어서 한 둘 기르고 이런 식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통해서 그의 교회를 생산하고 그렇게 해서 참으로 세상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고 믿는 형제자매로 결혼케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데 만일에 신자들이 이 세상 방식을 따라 이렇게 해 버리면 자기는 어떤 의미로 하려는지 몰라도 그것은 믿음을 따라 자기 몸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인류를 생산하고 어린 핏덩어리를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봉사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쇠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강원도 철원 쯤 가면 그런다고 하데요. 주일학교가 안 된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없어서요. 자기 자식 기르기도 싫어할 정도이니 할 말이 없지요. 그럼 다른 봉사는 더 못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다른 봉사는 잘 할 줄 알고 자기 자식은 안 기르려고 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사랑에 속고 있는지 몰라요. 내 자식을 낳아서 수고하는 일은 할 수 없는데 다른 위대한 봉사는 하려고 그래요.그 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지요. 여기서도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아이를 못 낳도록 하고 남자 아기면 다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다. 그렇게 말하고 그 모세는 물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모세라 한 것이고 건져낸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삼으셨어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모세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행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적을 그 대표자로서 먼저 밟은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걸어갔던 길이 자기 백성의 구원이 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내 백성을 애굽에서 불렀다 함이라고 예수가 애굽에서 돌아 왔을 때 그렇게 구약역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대표자에게 일어난 일이 곧 자기 백성을 위해서 먼저 일어난 일이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대표자안에서 먼저 성취된 것이어요. 그것이 모세와 요셉의 행적에서 쉽게 우리들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요셉이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으니 그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영광의 자리에 올라왔고 온 세계는 그 길을 통해서 그런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모세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하는 말은 모세의 인물이 단순히 좋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 모세 안에서 진행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은 그가 때가 되매 성육신 하셔서 자기 백성안에 역사하시기 전에 이 모세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40년 동안 애굽 바로의 궁정 안에서 컸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 있었어도 쇠약한 민족이 되지 않고 그 큰 핍박에도 불구하고 큰 민족으로 불러냈던 것도 어떤 특별한 사람의 지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신실하심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고 모세가 바로의 궁정에서 보살핌 받은 것도 하나님의 보살피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상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고 오히려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일들이 모세가 애굽의 궁전에서 기른바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은 그들 백성의 순종함 그들 백성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진실하심 때문에 그들 백성은 끊어질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이 40이 되매 그가 자기 백성을 돌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바로의 왕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는 바로 애굽의 왕과 같습니다. 비유컨데 이스라엘 중에 바로 그런 왕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자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줄을 이스라엘 백성이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모세 안에 임하신 영은 누구십니까? 바로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모세 안에 역사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 살면서도 그는 애굽 백성으로 계산되기를 거절했던 것이고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 자리에 세우심이 요셉이 자기를 해석했을 때 형들은 나를 팔았어도 하나님은 형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시려고 나를 이처럼 세웠으니 형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어떻게 보면 죽었습니다. 자기 부모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이처럼 지키셨고 애굽의 왕자의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요셉이 자기를 해석했던 것처럼 모세도 자기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어요.
이처럼 창세기에서는 요셉의 고백은 나와 있어도 출애굽기에는 모세의 고백은 없어요. 그러나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세우셨던 그들은 너희들은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너희들의 구원자로 삼았다는 그것이 일맥상통하고 있거든요. 요셉이 그들의 장자로 세우셨는데 그들이 버렸어도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요셉으로 구원자로 삼으셨으며 또 예수를 그들이 버렸는데 버린 그가 곧 그들의 구원자여요. 그런 방식으로 보았을 때 여기서는 단순히 모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요셉 안에 역사하셔서 요셉의 역사를 해석했던 성령께서 바로 모세의 영안에 역사하셔서 자기 구원의 길을 해석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니 모세는 단순한 자기 개인의 애국심 열정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그는 애굽의 왕자됨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처럼 세우심이 자기 백성의 구원자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고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40이 되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40은 왜 40이 되매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0절을 보면 ‘40년이 차매’라고 하는 것을 보면 40이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40년이 차매 천사가 모세를 부르셨다’ 그러니까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40이라는 숫자까지라도 노아 당시에 40일간 비가 내리므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았고 바로 그 40의 홍수 중에서 의의 후사로 노아가 구원을 받았고 노아를 통해서 새 인류가 거기 나타나고 있거든요. 애굽의 백성으로 있었습니다. 애굽의 장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거절하고 이제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모세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구원자가 애굽의 장자의 자리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서서 애굽백성을 죽임으로 자기백성을 구원했으니 그것이 전반적인 구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 되고 있는 것이어요. 가령 세상방식으로 말하자면 왕자가 우리를 구원하니 구테타 한 번 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끼리만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애굽의 장자가 자기편을 들면 또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보니까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애굽의 왕자로 삼으셨으니 그러면 마땅히 구테타를 일으킬 만 하지요. 이처럼 모세는 바로 요셉에게 임하셔서 자기 형제들에게 증거 했던 것처럼 모세는 자기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자기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고 원수를 죽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그들에게 임하신 사실을 백성이 깨달으라고 그렇게 이해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가 손해나니까 그랬지요. 그 다음날 나가 보니까 형제끼리 싸워서 왜 너희들이 이렇게 싸워서 너희들이 형제가 아닌가, 했더니 손해난 사람이 하는 말이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해서 일이 탄로 났다. 그렇게 해서 여기서 하는 말이 누가 너를 우리들의 재판장과 관원으로 삼았느냐?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그러느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심을 깨닫게 하려 했는데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거절했다. 그러나 그들이 버렸던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35절에 보니까 ‘누가 너를 재판장과 관원으로 삼았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제까지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모세가 애국심이 충천해 가지고 아직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지도 안 했는데 아 내가 한 번 해야겠구나.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그래서 실패했다. 그 때는 혈기로 그랬다. 그래서 40년 동안 자기 나라 말도 다 잊어버리고 떠듬 떠듬 할 만큼 그래서 내가 말을 잘 못하겠소. 할 만큼 죽 낮아지고 내가 누구에게 가서 사역하겠소. 여러 번 사양할 만큼 그처럼 겸손해 지니까 하나님이 억지로 가게 하였다. 그러니까 혈기로 하면 안 되고 다 자기가 죽어야 때가 되면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40년이 차매 불렀다고 했지 모세가 사람되니까 불렀다고 그런 말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대표자에게 임한 이런 사실들이 자기 백성들의 머리로서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대표자안에서 이루어지고 대표자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백성에게 선물됨으로 곧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봉사하는 자리에 서 있지 그들의 경건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입니다. 그들의 경건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심지어 우리들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불렀을 때 손을 넣어 보아라 했을 때 이 손은 옛날에 애굽 사람을 쳤던 손이 아니냐? 그 손을 들고 어떻게 축도 하겠느냐? 그 손을 넣었다 뺐다 깨끗케 해서 축도해야 복을 받을 것이고 하는 이런 말들은 옳은 말이 아니어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요셉과 모세와 그리고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가? 요셉과 모세 안에서 이루어진 그 일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그런데도 너희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그 구원자를 거절했다고 처음부터 그러니 예수를 거절했던 그들의 배교가 마지막에 완결될 것이라고 왜냐하면 요셉이나 모세나 때가 되매 혈육을 입으시고 자기백성을 구원하신 그 분의 영이 그들 안에 임하셔서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 안에 그의 구원역사를 나타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거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 말로 인하여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시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29).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버렸는데 오히려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장가들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았고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 집안이 따라 나왔지요. 그 사람들이 겐 족속이 아닙니까? 사시기를 보아도 신실한 족속들이 나와 있고 역대기를 보아도 신실한 종족들이 남아 있지요. 겐 족속들이지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하는 방식으로는 아니어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합하고 특별히 사사기 당시 드보라 시대에는 겐 족속 중 헤벨이 시스라를 죽였지요. 그때 이스라엘백성 중에 아무도 용사가 없었을 때에 이 여자가 하나님의 대적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버렸던 이 모세를 그들의 버림 때문에 나중에 그들도 구원을 받지만 바로 모세가 버림받은 그 사건 때문에 바로 미디안 이드로의 집안을 바로 모세와 연합함으로 바로 이방인의 구원역사가 그렇게 거기 나타나고 있어요. 요셉을 애굽에 버렸을 때 애굽이 구원받고 그 구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것처럼 본래 요셉은 야곱 집에 주었던 머리인데 버렸던 그는 애굽에 보냈고 애굽이 구원받음으로 이스라엘도 구원받고 이런 말들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거절했는데 그들의 거절로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이방인에게 베푸신 긍휼로 이스라엘을 권고해서 때가되면 그들도 믿음으로 돌아선다. 그것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하는 해석이거든요. 지금 여기서 하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보냈는데도 그는 미디안 땅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방 땅에 그처럼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0년이 차매~그에게 보이거늘’(30) 여기서 40년이 차매 여기 보면 처가살이 40년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 백성으로부터 떠난 광야 40년이고 나중에 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그처럼 유리합니다. 마치 모세가 유리했던 기간을 자기백성이 유리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40년이 차매 그처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유리했고 결국 나중에 그들도 온전치 못해서 바벨론 땅으로 옮기리라고 신명기에서 거듭 거듭 경고되어 있고 결국 나중에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40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역사를 본격적으로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처음 모세를 통해서 애굽 사람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찬란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는 안 했고 모세에게도 하나님께서 보이는 방식으로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40년이 차매 하나님께서 이처럼 시내 산에서 광야 불꽃 떨기나무에서 그에게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음에서 건졌을 뿐 아니라 바로의 궁전에서 그를 양육시켰고 그를 애굽의 세력에서 새롭게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종으로 40년의 고난의 기간을 차게 하시고 그 고난 끝에 그 종을 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그 고난에서 부르시는 의미를 그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도 40일 금식한 뒤로 그의 공적인 사역을 출발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어떻든 그의 종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세우신 분들이 당하는 고난과 구원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그처럼 증거 하시고 그리고 그가 받았던 그런 일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렇게 이루시고 그런 방식으로 항상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부터 40년이 차매 여기서 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내 산에서 모세의 제도 통해서 설립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요 조상들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임하셔서 그로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이적과 권능으로 행하셨고 애굽과 홍해에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그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처럼 세상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나타나서 구원했어도 그는 참 구원자가 아니어서 자기 뒤에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그는 바로 자기 뒤에 오시는 선지자의 영을 따라서 그렇게 수고하셨던 것이어서 그는 이런 구원역사로 하나님을 봉사하고 자기 뒤에 오시는 참 선지자가 오셔서 이제는 돌판에 새긴 말씀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자기가 갔던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또 시내 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는 그런 구원 방식이 아니라 참으로 자기와 같은 선지자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예언했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것은 신명기 17장의 왕의 제도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조상들과 광야에 함께 있었고 참으로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곧 하나님의 아들과 함게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의 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셉을 거절했던 것처럼 처음에 모세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자로 삼아서 큰 권능과 이적을 행했어도 그들은 끝까지 그 길을 멈추지 아니하고 시내 산에서 모세가 내려오기 전에 아론을 통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절을 계속했습니다. 다시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기지 안 했어도 그 마음은 떠나지 못해서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죄로 그들을 바벨론으로 옮기시리라.물론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죽음은 그들이 언약에 합당치 모한 사실을 말한 것이고 그것의 완성이 실은 언약의 땅에서 바벨론 땅으로 옮기심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배교하는 무리들이어요. 단지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그들을 구원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자를 세우실 때 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자를 거절해서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지금 43절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중보자안에서 자기의 구원역사를 증거하고 그들을 통해서 이적과 권능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 때마다 그들은 한 번도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도 그들은 자랑하기를 우리는 선지자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러니 우리들은 우리 조상들의 때에 났으면 선지자들을 안 죽일 것인데 하는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너희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으면서도 그 죄는 여전히 짓는다고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들이 말로는 아브라함의 씨다. 모세의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살지도 않고 모세의 율법을 처음부터 거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그리고 그 역사가 바벨론 포로로 완결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로 신전국가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항상 속국으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의 성소는 불탔고 법궤가 다시는 거기에 안치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런 의미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 그 국가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불변하시기 때문에 애굽에서 구원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고 애굽에서처럼 큰 이적과 권능으로가 아니라 바벨론의 마음에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도망 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궁중의 은과 금을 가지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소를 짓고 거기서 경배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옛 성소의 제도로 나타낸 것이고 그들이 이전처럼 신정국가로 다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있고 그런 방식으로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조상들의 나라는 그런 의미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 지성소에 들어가 봐도 거기 법궤가 없지요. 모세가 받은 두 돌판이 없지요. 하나님이 성소를 불질렀고 그들을 옮겨 버렸고 그러니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모세 율법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모세 율법을 거절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 버렸지 않아요. 그래도 그들은 다시 돌아온 이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무엇인지를 돌아온 제도 안에서 그 영화로운 구원의 약속을 나타냈고 바로 그 성소의 제도에서 나타내신 주님께서 때가 되매 그 성전에 임하시고 그렇게 해서 그 구원역사를 완결했어도 그들은 그 분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죄 밖에 없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넘친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쭉 설명하는 방식이고 이제 44-50절 까지는 성소의 제도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7장에서 세 번째 부분을 강론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됨과 모세의 율법이 그들에게 있으며 거룩한 성소가 그들 중에 있다는 이 세 가지가 그들이 항상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 말라.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리라. 너희 아비는 마귀요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하는 방식으로 말씀을 했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봉사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세상에 그 구원의 빛을 비추어서 세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고 그 앞에 경배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심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강조점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지만 구원에 대한 강조점보다도 그들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서 천하 만민으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신 하나님,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봉사적인 직무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던 것인데 그들은 그런 의미로 생각하지 못하고 민족적인 우월감으로 바꾸고 그들의 도덕적인 우월감으로 바꾸어서 그들은 혈통 상 거룩한 계통이고 그들이 율법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키면 죄의 요소는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이고 그 결과로 메시야 하나님 나라의 왕이 임하셔서 대항하는 원수들을 발밑에 밟고 그들이 영원한 축복을 받을 것이라 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했고 그리고 이방인들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거처여서 이방인은 결단코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고 하는 방식으로 그 곳을 거룩한 장소로 이해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옮기고 이제는 주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이방인의 종으로 그들을 낮추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표로 예루살렘 성전을 불질러도 그들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그 의식이 굳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참 두려운 사실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까지라도 그들의 옛 본성을 따르는 이해에 있어서는 그들의 행위의 길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길이 율법의 길로 되고 곧 그것이 그들의 멸망이라고 바울도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넘어짐은 하나님의 의의 길을 자기의 행위의 길로 잘 못 안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제 여기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제 사도가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설립한 교회 그것도 그들이 자랑하는 본토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따라 이방에 흩었던 유대인들 바로 거기서 태어난 스데반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참으로 한 몸의 교제에로 이방 땅에서 난 유대인과 그리고 본토에서 난 유대인들을 한 몸의 교제로 봉사하는 중요한 직무를 맡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그가 세우신 교회를 바로 주님 자신이 섰던 원수 앞에 서서 바로 그들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일 이제 천하 만민이 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를 거절하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7장 8장은 주로 이방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스데반과 빌립의 증거가나타나 있고 거기까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온벽한 단위로 종말론적인 완성체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그 진행들이 나중에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이방 선교로 확장됨으로 여기 있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스데반이 한 증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거하시거나 성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 집에서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 너희들은 우월성을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본래가 혈통으로 따라도 저 이방 땅에서 나왔고 역사를 보면 종살이 했고 너희들이 하나님의 교회로 조직된 뒤로도 한 번도 순종한 적이 없고 그 결과도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갔지 않느냐? 그러니 그들은 말로는 거룩한 혈통이요 또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율법이 증거 했던 의인이 오시리라는 약속에 대해 그들은 처음부터 거절했고 이제 마지막에 그 죄를 채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6절 까지는 조상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고 17-43절 까지는 모세 경륜시대를 44절부터는 성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두 시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조상의 시대 메소포타미아 즉 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 땅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조상을 부르셨고 그러니 그 영광의 하나님이 거기 계셨지요. 또 그럴 뿐 아니라 그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라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서 인도하셨으니 하나님이 애굽에 영광을 그들의 구원을 통해서 거기 나타내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처음 서론 도입부에서 벌써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요. 온 땅에 충만이 거하시며 천하 만민을 자기 백성 삼으신다는 보편적인 구원관이 아브라함의 선택에서부터 전개되고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쭉 이야기해도 이 역사가 우리들이 태 정 태 세 문 단 세, 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여서 그들은 이 사실을 들음으로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백성입니다. 그들이 소나 양을 잡아 제사 지내도 단순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가령 안 믿는 자들도 소나 양을 잡아 제사지낼 때 자기들이 왜 이 일을 행하는가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계시된 제사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주신 목적에 따라서 바르게 믿는 백성들은 예배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 이 역사까지라도 해석을 하는 역사이지 단순히 외우고 있는 역사가 아닙니다. 어떻든 조상의 시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모든 족장들의 머리로 세웠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그 머리를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 족장들이 거절한 그 요셉을 세상과 그들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또 모세 때도 보면 모세를 그들을 버렸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들의 재판장과 관원으로 삼았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느냐? 하고 거절했는데 바로 그들이 거절한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관원과 속량자로 삼으셨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처음부터 거절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지난시간에 충분한 설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기를 모세는 자기가 왕자가 되니까 기분이 좋고 자신감이 넘쳐서 내가 왕자 쯤 되니까 내가 이 백성을 구원해 보아야 하겠다. 그렇게 하고 시행했는데 구원한다는 것이 결국 살인자만 되어 버리고 쫒겨 나서 나는 말도 할 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하고 낮아지도록 하나님이 그를 못 본채 두었다가 이제 하나님이 부르고 불러도 나는 못하겠소. 할 정도로 되었다가 그때 드디어 구원자로 세우셨다고 보통 이런 해석들을 우리가 해왔습니다. 특별히 신학교에서는 보통 이런 설교는 천 번쯤은 듣지요. 여러분들이 낮아져야 되겠다. 목사만 되려고 하지 말고 정말 목사 안 되면 못 살겠다 할 때 되어라. 이런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명들을 하지요. 물론 일면의 진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증거와 사도행전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령 히브리서를 보면 11장24절부터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보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을 떠나기 전 문제들도 말하자면 모세의 신앙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는데도 그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데로 너희들을 부를 때 너희들은 내 시체를 매고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 달라고 했던 것처럼 요셉은 한번도 자기를 애굽 사람으로 계산하지 아니했고 또 자기의 형제들이 내려 왔을 때까지라도 저기 변방 고센 땅을 지적해서 애굽 사람들은 본래 목축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우리들이 대대로 목축합니다. 그러면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땅을 줄 것이니 그렇게 하라 해놓고 자기가 가서 자기 아버지와 형제를 만났어도 자기 형제와 아버지를 궁전으로 부른적이 없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는 애굽에 있어도 한번도 애굽 백성으로 여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죽을 때도 그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그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어서 그의 뼈를 조상들의 묘실에 묻어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까지라도 가나안에서 승리했을 때 소돔임금이 모든 재물을 다 취하고 자기와 동맹하도록 요구했을 때도 그는 그런 것을 거절하고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처럼 거기 한 군주로 계산되기를 거절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이 그러하면 모세를 해석하는 빛을 그냥 받을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일들이 바로 그 중보적인 직임자를 통해서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계시의 목적으로 세웠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요셉이 자기를 해석하기를 형들은 나를 팔았어도 하나님은 형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하는 해석은 요셉 개인에 대한 경건한 고백 어떤 종교적인 신의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당시 구원자로 요셉을 세웠을 때 바로 그 영이 그에게 증거 함을 통해서 자기를 세우신 목표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고 자기 백성의 구원이 곧 때가 되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로 진행됨을 믿기 때문에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역사하기 때문에 요셉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어요. 요셉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면 우리 자신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들이 이와 같이 삽니까? 왜 우리들이 세상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오히려 거절하고 이런 방식으로 삽니까? 그것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이 먹고 마심의 질서를 넘어선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 안에 있는 참다운 생명의 질서를 우리 안에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세상의 이런 저런 보화를 얻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어요. 중보의 영은 처음이나 끝이나 항상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단지 그 영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시는냐에 따라서 구원의 실제가 어떻게 땅위에 이루어지느냐의 차이점 문제이지 동일한 중보자께서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일하심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요셉을 해석할 수 있으면 모세를 해석할 수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의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컸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애굽 백성으로 계산되기를 거절하고 고난 받는 자기 백성과 자기를 동일화해서 그 백성을 구원하려고 애굽 백성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그는 바로 왕의 눈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을 두려워했으면 그와 같이 할 수 없지요. 자 그렇게 해서 그는 애굽의 왕자로 계산되기를 거절했던 것이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기뻐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모세의 신앙이었지 그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안 했는데 먼저 앞서 가지고 실패한 것이 아니냐? 등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애굽에 가봤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처음에는 자기 동생인줄 몰랐는데 굉장히 두려워하고 돈 주고 사왔습니다. 나중에 자기 형제가 애굽의 국무총리인 줄 알았어요. 그들의 죄로 봐서는 죽을 죄었지요. 그러나 요셉이 위로했고 자기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위로해서 평안함을 주었습니다. 자 그러니 그들은 누구와 한 혈통입니까? 요셉과 한 혈통이요 한 형제여서 그들은 이방인과 함께 계산될 수 없고 그들은 말하자면 요셉의 위치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요셉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은 그보다 더한 구원이어서 세상의 백성들은 요셉에게 돈 주고 값 주고 사서 그 식물을 먹었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왕궁으로부터 모든 것이 공급되고 기업들을 얻었고 돈 주고 사먹는 백성들이 아니어요. 왜냐하면 요셉의 자리에 그의 형제들도 앉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자기 백성들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제들이 봤을 때 요셉이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혹시나 하는 자기 죄에 대한 공포심은 있겠지만 만일 자기들이 죄에 대한 공포심만 자기들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큰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보장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에 앉아있는 동안에 그들은 결단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중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임금이 나와서 그들이 핍박을 받았어도 요셉의 공로가 기억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국무총리의 형제로서 혈육으로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형제들의 구원이 자기 혈육이 임금의 보좌에 앉았다는 것이어요. 애굽의 모든 권세는 요셉에게 있어요.
이와 같은 것이 모세시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밑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는 나그네처럼 되었고 종처럼 되었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자기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왕자에 앉은 왕자였습니다. 그가 이제는 핍박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자기 백성의 구원자 보호자가 되었으니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봤으면 곧 그것이 그들의 구원입니다. 그들은 불안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가 왕자입니다. 이제는 그전처럼 그들을 학대하는 왕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왕이 애굽의 보좌에 앉게 되었으니 곧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어요. 바로 모세는 그들이 그것을 알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해석하기를 왜 하나님이 자기를 이 것에 세우셨는가. 형제들은 팔았어도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나를 이 보좌에 앉히셨으니 이제는 애굽에 있는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가 국무총리이기 때문에 왕의 부인을 빼놓고는 다 자기의 권한에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모세도 그와 같은 위치입니다. 모세의 형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그와 같은 관점에서 그를 왕으로 취급하고 보았으면 그들은 왕과 같은 효력이요 그들과 같은 형제가 왕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은 그전처럼 핍박받는 백성이 될 수 없고 이제는 왕국의 주 시민으로서 살게 될 것이어요. 그렇게 해석해야 맞는 해석일 진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왕 됨 즉 국무총리됨을 보고 떨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왕 됨을 알지 못하고 이제는 네가 애굽 백성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그런 방식으로 그의 왕 됨을 거절한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너를 참으로 왕으로 삼았으며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지금 말하자면 모세는 왕자로서 왕의 권위로서 애굽 백성을 쳐서 죽였지요.그 러나 그들은 왕의 권위를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인도했던 것처럼 모세를 인도했는데도 그들은 그런 신앙으로 모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0년이 차매 그들의 구원자가 당하는 고난이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난의 예기적인 성취여서 바로 그들의 지도자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그 백성들의 구원이 선물되고 있는 것이지요. 40일 또는 40년 하는 것은 노아홍수 당시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했을 때부터 4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는데 그때부터 그것은 고난의 숫자요 바로 고난을 통해서 고난이 끝났을 때 그들이 버렸던 모세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자와 관원으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모세를 통해서 이제 요셉을 통해서는 그들이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았고 종교적인 방식으로는 애굽에서 구별되는 고센 땅에서 살았어요. 바로 요셉이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 모세는 그들에게 먹고 마심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언약 체결자로서의 대표자로 서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법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 주었으니 단순히 먹고 마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되는 교제질서로 자기 백성을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언약의 중보자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아론이 범죄함으로 두 돌판은 깨뜨려 졌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으로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은 백성으로 버릴 뿐 아니라 종말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보내리라고 역사를 그렇게 함축적인 방식으로 기술합니다. 항상 처음 있는 일들은 종말론적인 일입니다. 논문에 있어서 서론이 결론을 직접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도 어느 시대가 도입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면 그 시대에 나타난 여러 사건보다도 처음 언약체결의 장면이 더 역사의 끝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시를 해요. 그래서 시내 산에서 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리고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종말론적 심판 곧 바벨론을 말함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신명기에서도 이렇게 되어 있지만 처음과 끝을 묶고 있는 그 사이는 그런 과정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해서 순종한 적이 없고 특별히 모세는 생명의 돌을 받아서 주었을 뿐 아니라 생명의 돌을 받은 그가 하는 말이 내 뒤에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인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는 돌판에 새긴 법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그들에게 나타냈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가져다주시는 선지자가 임할 것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그리고 모세시대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모세가 예언했던 참다운 선지자 하나님의 생명의 돌을 자기 백성에게 가져다주는 참다운 선지자가 오는 것을 선지자들이 거듭 거듭 바라보고 예언했어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제도 안에서 만족하고 회개하고 그 왕과 선지자가 오심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증거 하셔도 선지자들은 다 예루살렘에서 죽었고 말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지만 그들은 그 죄를 더 채운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순종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나타난 것은 결론이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아론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했고 하나님의 언약이 파괴되는 방식으로 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성전은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백성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그들에게 이루신 것이지 그들의 의가 구원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고 바로 언약체결 했던 시내 산의 자리에서 범죄 했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4절부터 보면 성전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에 본 식양대로 성소를 지었습니다. 그 때는 언제입니까? 광야에서였습니다. 그들이 성소를 자랑하니까 성소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가나안 땅이 거룩하고가 아니라 광야에서 성소가 있었다고 하고 있으니 모세시대에 이 성소제도가 들어왔어도, 율법적인 제도로 들어왔어도 그들이 자랑하는 이 찬란한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이 천막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거기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며 보호하시는 그 은혜의 표를 거기 두시고 그 표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의사를 나타내셨고 또 입히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금으로 입혀진 돌집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40년 동안 성막에 있었을 때 그 성막이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로서 부족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런 의미로 더구나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자랑한 것이 처음부터 무너집니다. 또 사도행전 7장의 제일 처음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 곧 그것이 성소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셨을 때 거기는 특별한 성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땅이 성소여서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아시를 가든지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구별했기 때문에 거기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뭐 성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심지어 모세제도 아래에서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고 너희들이 제단을 쌓을 때 다듬은 돌로 쌓지 말고 흙으로 그리고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라. 그리고 층계를 만들어 올라섬으로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임하셔서 사람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길을 바로 단의 제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성소의 아름다움을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조상들이 그들보다 못하다면 혹 일리가 있는데 그들은 조상들을 자랑하고 조상들이 없으면 그들이 없어요. 실은 조상의 약속이 모든 영광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어서 그들은 조상들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조상이 뿌리요 그 뿌리를 통해서 나타난 가지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조상들이 있었을 대는 그들이 모세를 자랑하고 있는데 모세는 천막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두셨을 때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셨거든요. 그러니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의미를 모르고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하늘의 식양대로 그가 본대로 만들었다 하는 말은 저 높은 하늘에 집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너무 큰 집인데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모형으로 조그마하게 집을 지었다 하는 말이 아니고 하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어요. 이 세상 오는 세상 하는 것과 같고 나는 위에 속했고 나는 아래에 속했다 했을 때 위에 속한 말이지요. 그래서 하늘의 교제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질서를 하나님께서 땅에 그런 제도를 통해서 그렇게 계산한 것이지 하늘에 이와 같은 집이 있다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다 성육신의 은혜인데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사람이 함께 하고 만져보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친히 자기가 계시는 방식을 나타냈습니다. 어떻든 하나님께서 자기의 임재를 나타내는 모든 방식은 성육신의 은혜여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사람 되심을 통해 임하시고 우리와 같은 본성의 질서로 임하셔서 먹고 마시고 서로 교제하는 그런 질서로 옴으로 그것은 이제 충만한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 본 식양대로 만들었다 하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바로 그 제도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모든 원수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해서 언약의 백성을 그 땅에 심으시고 그들의 기업으로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인이시요 하나님은 그 땅을 자기 백성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자기 백성의 기업으로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윗 때에 이르러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 여호수아 다윗 그 다음에 솔로몬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참 왕이셔서 원수를 정복하고 이제 원수가 다 정복됨이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비유적인 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의 안식이요 온 땅은 하나님의 거처여서 하나님의 법이 시행되고 하나님을 거절한 이방 백성은 그 땅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된 전쟁의 내용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이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안식의 충만한 성취는 다윗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 곧 그런 왕적인 통치를 땅에 나타내는 그런 계시기관으로 하나님이 세우셔서 모든 이방 왕들이 그 발 앞에 복종했고 그리고 모든 재물들을 다윗 앞에 갔다 다 바쳤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다 죽이라는 명령은 원수에 대한 진멸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천하 만민에게 받게 하시는 것인데 그들이 다윗에게 복종함으로 다윗의 하나님께 그런 의미로 복종한 것이지요. 자원해서 순종하여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 왕적인 권세 때문에 복종했어도 나타난 것은 복종이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거기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집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얻음은 하나님이 안식을 얻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이 다 없어진 것은 하나님의 대적이 없어 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이 이제는 천막을 치고 여기 저기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거기 있으면 하나님의 보화가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화가 거기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단지 다윗은 그 보좌에 취임하신 참 왕 되신 하나님의 왕권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는 질서로 나타난 왕이지 진정한 왕은 지성소에 좌정하신 하나님이 왕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하나님의 집을 짓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을 통해서 지으시리라 약속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씨를 줄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역대상 22장9-10절에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일 뿐 아니라 솔로몬이어서 평화의 왕입니다. 그 이름을 여디디아라고 나단이 붙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22장에는 하나님이 솔로몬을 지칭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어서 그가 내 집을 지으리라 그런 방식으로 솔로몬을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집을 짓지 않고 솔로몬이 대신 집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 안에서는 하나님이 그 모든 영광을 다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칼의 권세로 세상을 정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의 왕국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평화는 다윗을 통해서 계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윗을 통해서는 모든 백성이 복종하고 그런 것은 쉽게 나타낼 수 있지만 모든 백성이 복종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안식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우주적인 평화여서 거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실은 솔로몬을 통해서 계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비가 되라라. 이제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바로 이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를 땅위에 구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그렇게 말씀했던 것이고 이제 그 실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셔서 그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위에서 친히 음성이 들려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평화의 왕국을 건설할 분이시지요. 그래서 솔로몬을 통해서 그 집을 지었습니다. 이 성전의 제도도 모세가 계시 받았던 그대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의 제도는 다윗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처음 중보자가 모세였으며 이제 그 왕국의 중보자는 다윗이어서 다윗이 모세가 성소의 제도를 받았던 것처럼 성전의 제도를 그렇게 다윗이 받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집으로 레위 인이 찬양하는 집으로 지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에게 시작된 그 일은 다윗 때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계시가 다윗에게 임했기 때문에 단지 그 영광은 솔로몬을 통해서 나타낼 수밖에 없어도 그 왕국의 머리는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솔로몬이 그 집을 지었을 때 솔로몬은 그 집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는 보이는 건물을 짓습니다. 왜 하나님이 보이는 집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처를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사는 방식으로 나타났거든요. 그때 솔로몬이 집을 지을 때 하는 말이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여기 스데반이 이처럼 선지자들의 말들을 증거 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먼저 집을 지을 때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요. 열왕기상 8장27절에 보면 솔로몬이 집을 지을 때 기도했던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내가 건축한 이 전 이오리이까.’ 분명히 하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이시고 내제하신 하나님이시여서 그것 때문에 세상은 존재하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초월하신 하나님이셔서 어떤 물질에 갇혀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방 신들처럼 어떤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을 7계단으로 구분하는 방식인데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니리까? 온 땅도 하나님의 거처로 합당치 않고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의 거처로 합당치 않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초월하신 하나님이신데 어떤 피조물을 거처 삼아서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분명히 솔로몬이 그 집을 짓도록 했을 때 고백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지었어도 그 하나님이 이방신처럼 거기 계신다는 의미로 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 있어서 하나님이 거기 거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소유 삼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의 대표자와 만나고 교제하십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거기 거하셔도 하나님이 임하심의 표상일 뿐 하나님이 인격 자체로 거기 갇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그 집을 지었을 때 그 집의 의미를 분명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역대하 2장을 보면 특별히 성전과 다윗 집안과의 관계를 쭉 역대기가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2장4절부터 보면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4-6절)라고 후람 왕에게 편지할 때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이신데 내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서 그 왕국을 세우시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는가? 아니지요. 단지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제도를 따라서 주신 규례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예배의 처소로 그런의미로 예배의 처소로 내가 짓고자 하는 것 뿐이라 그렇게 솔로몬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고 기도한 내용들을 보면 열왕기상 8장41절이지요.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알게 하옵소서’(41-43). 이방인을 위한 전으로도 분명히 고백하고 있지요. 그러니 이 전은 유대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본 백성이어도 바로 그 하나님이 천하 만민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증거 되도록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봉사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된 것이어요. 단지 아직 본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죄가 완전히 제거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온전히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과 대제사장 그리고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처럼 아직까지 그런 의미로 보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성전 밖에 있었어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든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교제하는 백성 기도하는 백성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시고 거기서 자기백성과 교제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여기 솔로몬의 기사를 설명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집을 지었을 때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지 어느 거처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성전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죽일 때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인 것처럼 스데반을 죽일 때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율법을 보면 하나님의 진은 다 거룩해서 죄인들은 다 진 밖으로 쫓아내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대 속죄일에 재물도 진 밖에서 불태우도록 했습니다. 왜? 그들은 거룩을 빙자해서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성 밖으로 쫒아내서 죽였지요. 성 밖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식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라 해서 우상섭리로 더욱 굳어져 있었어요. 그러니 그들은 처음부터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모세를 통해서 주신 생명의 도를 그들은 들은 적이 없고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계시했던 것처럼 참 생명이 세상에 주어질 것인데도 바로 그 의인이 오시리라는 모든 약속들을 증거 했던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리고 그 의인이 오기를 기대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지를 아니했습니다. 쉬지 않고 성전에서 제물을 드렸어도 성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다는 방식으로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예식에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적인 제도를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으로 행위의 방식으로 했던 것이고 그것이 돼지 피를 드리는 것과 같다고 이사야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로는 율법을 외워도 율법이 지시하는 의인이 오심을 바라보고 바로 그 의인이 오셔서 온전하게 이루시는 구원을 바라보고 탄식함으로 그들의 죄를 끊고 그런 방식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율법이 있음으로 만족했고 율법의 제도를 따라서 제사지냄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를 갖는 것처럼 이해를 해서 오히려 우주적인 하나님의 의미를 더욱 줄여서 그들은 단지 집에 갇힌 우상 신의 방식으로 바꾸었고 그런 방식으로 해서 더욱 그들은 하나님 앞에 원수로 섰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의인이 왔는데 죽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하늘의 실제를 땅위에 옮긴 분이어서 바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은 육체로 거하셔서 곧 하나님이 땅위에 임하는 하나님으로 오심이어요.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분으로 오셨는데도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에 다시 일으키리라. 예수는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참으로 신령한 성소 이제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제는 구약적인 모형적인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배하는 하늘의 예배로 예배할 것을 한 말씀이어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인 앞에서 그들의 의를 자랑하다가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여요. 이것을 지금 누가 말합니까? 이방 땅에서 태어난 유대인 스데반이 말하고 있지요.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 이스라엘 의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증거 했던 것처럼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 중에 경건한 무리들이 돌아와서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 이제 유대인들이 이방 땅에서 돌아 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방인의 구원이 약속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 백성이 아니라한 그 것에서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 그것은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인데 그것은 그들은 바벨론으로 심판해서 보내실 것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다시 자기 백성을 회복한 그 기사를 바울은 해석하기를 이방인의 구원으로 해석합니다. 왜 바벨론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거기 이방의 종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이 이방인의 구원이라.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온 우중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참으로 모든 피조물에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의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도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어도 그 생명의 도를 가져오신 분은 하나님이 사람 되심을 통해서 참 하늘의 실제가 땅위에 임해지고 그러므로 하늘의 삶을 살 수 있는 새 인류가 땅위에 주어지는 것이지요. 옛 백성은 그 은혜의 역사에 합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원수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성소의 제도 아래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바로 성소에 나타나셔서 그 성소의 제도를 장사꾼의 집으로 그리고 강도의 굴혈로 징계하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징계하셨던 주님 그들이 바로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그를 죽였는데도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셔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시고 그리고 그를 증거 하는 증인인 스데반과 함께하시고 그리고 자기 종들을 통해서 세상에 그의 나라를 확증하시는 분으로 54절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5,5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의 길이 열렸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정죄한 그 자리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자기 교회와 함께 하시며 바로 성전의 제도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버려도 버림받은 그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법이 없습니다. 원수 앞에서 스데반이 주 예수를 증거 했던 것처럼 주 예수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증거하리라. 했던 것처럼 그가 일어서셔서 자기 종의 증거에 친히 동참한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바로 스데반이 이처럼 버림을 당했어도 주 예수의 영을 따라 그들을 위해서 간구함으로 이 사명을 마쳤습니다. 교회도 그 영을 따라 죽기까지 이 사명의 길을 걸을 것이고 세상에선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버림을 당했어도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아들 안에서 교회는 파괴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주를 증거 하신 증인들을 주님께서 천사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의기양양해서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핍박했을 때 사도들을 빼놓고는 다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쳤습니다. 교회는 파괴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문이 열렸고 교회는 땅위에서 죽임을 당해도 그들을 위해서 죽임 받은 예수는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이시고 그 분이 하늘에 계셔서 땅위에 신령한 나라 그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땅위에서 가르치시고 권능으로 역사하셨던 그 분이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손가락이 천하를 지배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권세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핍박했던 사울을 꺾으셔서 바로 그가 핍박했던 주 예수를 증거 할 수 있는 신실한 종으로 삼으셔서 이제 이방 땅에서 태어나서 돌아온 스데반이 증거했던 그 증거로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우주적인 복음을 그렇게 증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아들이십니다. 그것을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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