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4:32-5:11

찬미예수님 2025. 3. 1. 07:21

제목: 사도행전 강해

성경:사도행전 4:32-5:11

 

여기 432절부터 나타나는 교회의 은혜로운 삶은 2:43-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41절부터 보면 저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떼며 기도하며 교제하고, 또 유무상통하고 모이기를 힘쓰고하는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친히 성령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새 인류로 교회가 출생되었고 곧 그런 교회의 삶은 하나님 앞에 친히 말씀을 듣고 그의 몸에 참여하는 교제를 나누며 그런 의미로 한 몸의 교제로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권능으로 교회를 세우셨어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은 여전히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고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세상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를 정죄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큰 진동으로 사도들이 모인 기도회에 임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믿는 무리의 숫자가 더 불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 발전했다는 방식으로 432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에 나타났던 은혜로운 삶의 방식을 여기 4장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원수는 핍박해도 그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그렇게 될 뿐 아니라 원수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그렇게 발전하고 완성될 것임을 여기 432절부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 ’ 여기서 한 마음과 한 뜻한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으로서의 교회 또 성도들이 그 몸의 지체로 한 성령을 마시고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또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한 줄 알고 이런 면에 있어서 그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외하는 지식에 있어서는 같고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교제를 나누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앙에 대한 다 똑같은 의미로 한 마음과 한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을 보아도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하나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여기 뒤의 설명들을 보면 사랑에 있어서 하나, 사랑의 공동체. 그런 의미로 한 마음 한 뜻이라고 본문은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여기서는 부활만 증거 했는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고 부활을 증거 하려면 그의 죽으심을 증거 하게 되겠지요. 단지 부활을 말함으로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복음의 대표되는 성격으로 말함으로 부활을 증거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부활을 증거 해서 큰 은혜를 얻었다고 되어있고 2:42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 표현하며 부활을 증거 했다는 말은 없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신령한 교제를 나누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실은 같은 의미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어떤 새로운 윤리들을 말해서 그들의 조직을 갖추는 그런 문제보다도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함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의 영으로 그의 교회에 거하셔서 그의 교제를 허락하심으로 그들이 예수의 생명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의 살과 주의 피에 참여함은 주님께서 영으로 그들 중에 임하셔서 그의 몸의 교제를 허락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사도들의 복음증거 부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문제들을 말씀하고 참으로 그 분이 하늘 보좌에 오르셨을 뿐 아니라 친히 그의 영으로 그들 중에 임하심을 그러니 교회는 사람끼리 교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그의 영으로 그들 중에 거하셔서 머리로부터 생명이 머리로부터 은혜가 그들 중에 공급되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하는 삶임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 한 몸의 교통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이처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초대교회의 삶이면서도 이 삶은 특이하게도 종말론적인 삶을 나타내고 있어서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이런 삶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다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가 오시면 친히 우리와 같이 혈육을 입으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의 얼굴을 뵙고 그 분 얼굴 빛 앞에서 참으로 사랑의 공동체로 완성된 인류가 함께 설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참으로 사랑의 공동체로서 인류가 완성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한 몸의 교제로서 온 인류가 완성되고 거기에는 인간의 분리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이하게 예수가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이어도 바로 그 일의 성취로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나아가시고 바로 그 생명을 교회 가운데 부으심으로 땅위에 사는 혈육의 삶이어도 하늘의 삶이 여기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공동체로 새 인류가 완성되고 그리고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다시 반복함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그들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부자들이 자기의 재산으로 그들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여기서만 말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에 대한 문제들을 쭉 말하고 있지요. 만일에 가난한 종이 팔렸는데 해방이 되어서 나가야 하겠는데 그가 나가서 벌어먹을 힘이 없을 때는 부자는 그를 보내서는 안 되고 그의 귀를 대문에 대고 송곳으로 뚫고 평생에 그를 그의 식구로 삼아서 주인이 자기식구처럼 그 사람을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는 율법의 강제적인 규례로 그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심을 내 생명을 공급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를 공급하므로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공동체인 사실을 그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법규를 따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성령이 부어지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신령한 삶이 여기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원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공급했던 그런 것을 형제를 향해서 손을 폄으로 바로 사랑의 공동체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서 진행되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를 제거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형제에게 반영되는 신령한 삶이 나타났을 때에 여기 초대교회의 삶에서 여기 자연스럽게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바나바가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레위족인 데도 팔레스타인 본토에 사는 것이 아니고 지중해 섬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땅이 있었던 것 같고 자기의 땅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그렇게 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지들이 다 팔았다 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기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할 때도 땅이 있을 때도 네 것이고 팔 때도 네 것이고 네 자유 아니냐 하는 것을 볼 때 다 팔았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또 초대교회 때는 아마 가난한 사람들도 믿음으로 살아서 그들의 삶이 신령한 삶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가난한 사람이 형제의 봉사를 받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형제의 봉사를 받지 않으면 그들은 가난함을 핑계대고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고 그러므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일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손으로 수고해서 벌어먹지 않으려면 차라리 굶어 죽으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게으르고 나태해서 그저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신앙적인 삶 때문에 이런 저런 핍박도 받고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우는 자로 함께 울고 웃는 자로 함께 웃고 여기 사랑의 공동체가 나타나고 부자나 가난한 자가 사랑 안에서 함께 믿음으로 연합된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여기처럼 하나님 나라 즉 형제들이 서로를 봉사하는 이런 것은 곧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어서 곧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어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교제하므로 그 생명으로 함께 사는 것이어서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신령한 삶이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5장에 보면 바로 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어둠이 있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지요. 이것은 사랑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들에 대한 문제가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여기서 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자면 거짓말 한 사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뿐이겠습니까? 칼빈 주석을 참고하니까 그 분은 좀 더 재미있게 말했데요. 거짓말한 사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뿐이겠는가. 아마 그런 사람은 자기도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편교회의 현상을 보았을때 초대교회는 이 두 사람만 가짜이고 나머지는 아니었는가? 가령 사마리아 성에 보아도 시몬이라는 사람이 성령을 돈 주고 사려고 따라 다니고 있지 않아요. 또 여기 저기 교회를 보면 서신서들에 보아도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누구누구는 나쁜 사람들이어서 이렇게 벌을 받았다 하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이들의 심판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셨을 때도 그 모든 이족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방식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런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특별히 바나바를 기록한 것을 보니까 사도들이 그 이름을 바나바라(번역하면 권위자라) 백성을 위로하고 권고하는 자라그가 백성의 아비나 된 듯이 그렇게 수고를 다 감당했습니다. 그 이름이 얼마나 존귀하고 귀한 이름입니까? 그래서 이들도 그런 이름이 욕심이 났든지 밭을 팔았습니다. 얼마큼은 감추고 그래도 자기도 먹고 살아야 되지요. 그렇게 하고는 가져다 냈습니다. 그리고 아마 소문나기는 몇일 전부터 소문났겠지요. 그도 그렇게 한다고. 그래서 아마 다 갔다 바치는 것으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사도께서 그들이 거짓말한 사실에 대해서 심판한 기사가 여기 나타나 있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고 장난질 할 수 없었고 그들이 칭송을 받았다고 13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 심판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첫째 생각할 문제는 심판을 시행한 사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겠습니다. 보통 이런 본문들은 사도행전을 보아라. 기도를 많이 하고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하니까 그리고 눈 뜨고 보니까 가짜를 알아 버렸다. 하기야 요새는 돈 봉투를 보면 무엇이 보인다고 그러는데! 투시의 은사가 어떻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여호수아도 베드로처럼 기도를 많이 했으면 딱 알아 버릴 것인데 여리고성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가지고 교만해 가지고 아이성에서 실패했다. 그때 기도를 안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진 뒤에야 회개하고 기도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누구누구가 도둑놈이라고 가르쳐준 것이 아니냐? 여기 사도행전에 보니까 오순절에 기도를 많이 하니까 성령이 충만해서 이것을 따 알아 버렸다. 이렇게 소위 투시의 은사가 있는 것처럼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 신자들은 다 선지자여서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빛으로 형제의 행동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우리들이 그 마음을 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마음은 하나님만 아시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우리들은 추론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관찰해보고 판결합니다. 하나님만 직관적인 지식이 있고 피조물에게는 없습니다. 만일에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으면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오셔서 새로운 질서로 변화받기 전에는 우리 안에 죄는 역사하는 것이고 그것처럼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을 주시지 안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하나님은 직관적으로 만물을 아시지만 사람은 추론적으로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이런 저런 의미로 무엇을 압니다. 더구나 믿는 신자는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하는 빛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빛으로 살면 사람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특별히 아버지도 자식을 기를 때 자식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그가 어떻게 했다고 직접 보는 방식으로는 몰라도 이 아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아버지는 알아야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을 때에는 그냥 기도하면 그 사람이 무엇이가가 보이고 척보면 알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움직이는 행동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을 볼 때 그냥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신자와 교제할 때도 그 분이 왜 그러는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 교역자에게도 그런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여기 사도는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그렇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들의 권징은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권징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말씀을 봉사함으로 판결하는 것이지 직관적으로 하지 않고 우리가 판결하는 판결은 교회의 신령한 교제로부터 배제시키는 영적인 징계이지 여기 보면 그들이 사도의 말을 듣고 직접 죽었거든요. 또 바울 사도도 그가 전도했을 때 자기의 전도를 방해했었던 사람을 눈을 멀게 만들었거든요. 우리들은 그런 권능은 없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그 몸에 무엇이 가해지는 방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심은 칼의 권세로 통치해도 그의 교회는 신령한 통치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벌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이 벌이지 그를 어떻게 죽이고 말고 그런 방식으로 주일하교 학생이라도 저리 가서 손들고 서 있어 하는 방식으로도 우리들은 징계할 수 없습니다.그것은 교회가 할 기능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의 봉사로 하고 그를 신령한 교제로부터 배제시킴으로 부끄럽게 하여 징계하는 것이지 어떤 물리력을 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도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생각해 보시면 그 다음에 이런 사건이 여기만 있고 다른 데는 없는가? 그 다음에 보아야겠지요.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면 이런 거룩케 하는 정결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별되서 하나님 나라로 설립되고 거기 하나님 나라의 특이함은 거기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거기 이스라엘 대표자가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봉사하는 일에 거기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거기 신령한 하나님의 교제가 있지요. 그 사건이 성령을 오순절에 부어주심으로 여기 완성된 것이 아닙니까? 거기 보면 제일 처음 죽은 사람이 있지요. 아론의 두 아들들이 다른 불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습니다. 거기서 죽음이라는 것은 언약공동체로부터 배제여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여서 그것은 그들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거기 하나님의 장막 중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었어도 단순히 사람이 만든 집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친히 거하십니다. 그 사실을 두 제사장을 죽이심으로 즉 제사장을 죽임으로 하나님 나라를 성결케 하고 어느 누구도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성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들 대제사장의 가문을 거기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이 친히 그들 중에 임하심을 나타내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되어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약속의 땅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심으시고 곧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으로 복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단은 여호수아 사건에서 성취된 일이지요. 그렇게 했을 때 거기 보면 아간의 죽음이 있지요. 곧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성소여서 하나님께서 불로 성결케 하심으로 그 땅이 하나님이 거하는 땅이 되게 하시며 그렇게 해서 자기백성으로 그 땅을 상속케 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안식으로 그들에게 복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나안 땅의 첫 성읍인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친히 정복하셨고 그리고 불로 성결시켜서 다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회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 심으심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친 백성 참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친 백성으로 성별시킴이어서 그들이 가나안 당의 첫 성읍을 불로 성별시켜서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것으로 소유함으로 그것은 새 인류로서의 이스라엘을 더럽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성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했던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거기로부터 아간을 구별해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누룩없는 떡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정결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케 하신 것이어요. 왜 하나님의 교회가 정결케 되어야 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발전하고 새로운 언약적인 전기가 있으면 거기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이 임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거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사도행전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도 시내 산에 하나님의 임하심의 약속의 성취이지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성령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구원 곧 그들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완전한 교제가 여기 성취됨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여기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대리자가 되고 생명의 보호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 생명의 선물을 자기의 형제들에게 공급함으로 이처럼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그 나라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영이 선물로 여기 부어진 것이지요. 그렇게 했을 때 그 교제를 인간의 교제로 더럽히고 여기 외식으로 더럽히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을 훼방하는 원수의 역사가 있어서 네 마음에 사단이 가득해서 그런 일을 행하는도다. 이렇게 어둠의 역사로 사도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인간 끼리의 단체가 아닙니다. 구약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었을 때에 거룩한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제사장을 징계함으로 성별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시고 거기 하나님 나라를 설립했을 때 거기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정결케 하시고 거기 범죄한 무리를 제거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설립되었을 때 거짓된 사랑을 베푸는 두 사람을 징계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참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사랑의 공동체 신령한 몸으로서의 교제를 여기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문이 닫히고 그런 법은 없지만 가증한 자, 술객들, 그런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어서 참으로 주님오시면 모든 죄의 질서들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났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죄들을 제거하셨을 때 이런 모든 문제들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심판은 유대인의 사도로서 베드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 그 두 사람이 행했던 심판 외에 다른 심판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어서 하나님의 교회의 특성을 신령한 사랑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별시키고 인간적인 거짓된 사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러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중에 거하십니다. 인간의 단체가 아닙니다. 사도들은 사람이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의 영으로 그들 중에 거하셔서 이 일을 시행함으로 사람을 통해 세워졌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신령한 교제를 나누심을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고 주님 오셔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곧 이러한 나라여서 거기는 모든 거짓은 다 제거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사람에게 보이는 의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보이는 의요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증한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행하는 것이고 그런방식으로 이는 하나님을 속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방식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들어와 있습니다.

광야교회의 실패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들도 다 성령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도 그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안식의 땅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것을 지금 신약교회에 경고로 바울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이미 구원을 받아 놓고도 완성될 구원은 미래에 있고 아직도 역사는 종말에 다다르지 아니 했습니다 .이스라엘, 옛 언약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감이 하나님의 약속의 끝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교회로 그들이 다 심판받은 백성들은 광야에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그런 의미로 광야교회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종말은 미래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를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상 섬기지 말라. 그들이 그렇게 하다 죽었지 않았는가? 간음하지 말라. 그들이 그렇게 하다 죽었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신령한 몸으로 그 교회를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그들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ㅡ아들이 자기 몸을 주셔서 교회를 그의 몸의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삶 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 자기의 생명의 것으로 형제에게 공급하심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나라여서 거기 있던 모든 것,사람 앞에는 칭찬을 받아도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공급하지 아니하는 그런 모든 것은 제외된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런 의미로 우리들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참으로 교회봉사가 얼마나 외식에 차 있고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만큼 멸시하는가. 우리들이 기분이 좋든 나쁘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들 그것은 마땅히 시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어머니일지라도 자기가 싫고 자식들이 미워도 밥을 해주는 것이고 남편이 마음에 안 맞아도 밥은 해주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마땅히 그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을 기쁨으로 해야 더욱 맞지만 그가 그런 기쁨이 없을 지라도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런 일반은총의 영역의 의무만큼도 없어요. 자기 기분 나쁘면 봉사도 없어져 버립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말해야 되겠지만 봉사에 대한 문제는 우리들이 중이 오더라도 만일에 그가 배고파서 굶주리면 주어야 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로 우리들은 마땅히 교회를 봉사해야할 짐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빙자해서 어떤 선행을 수행해야할 의무를 수행치 않은 방식들은 옳지 않습니다. 특별히 있는 자가 그런 문제를 조심해야 되고 우리의 봉사가 거짓되지 않도록 참으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진실 된 봉사를 해야 되겠고 그 봉사가 참으로 하나님의 대표자로 형제를 봉사하는 의미로 균등케 하는 의미로 그런 봉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사람에게 보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여기서 그가 다른 죄를 지어서 그냥 거짓말했다는 의미보다도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더럽힘이어요. 물론 자기명예를 나타낸 것도 있지만 더럽힘이어요. 그것이 그들의 거짓된 봉사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요. 이스라엘의 거룩을 아론의 두 아들들을 죽임으로 거룩케 했던 것처럼 여기 거짓된 사랑을 베푸는 자들을 친히 성령께서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인가 하는 사실을 인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뒤에 반복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신령한 사랑의 공동체로 인쳐지고 증거되고 그 토대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오셔서 완성될 그 나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면 그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고 하나님 앞에 상 받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외식된 자로서의 판결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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