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사도행전 강해
성경:사도행전 2:41-47
방금 읽은 구절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상을 증거했던 설교 때문에 나타난 교회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또 교회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여기 41-47절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서 그 말을 받았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보내신 사실을 믿고, 그들이 이전에 주를 알지 못하고 배반했던 죄들을 회개하고, 참으로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런 권면이지요. 그래서 사람의 죄인 됨과 하나님께서 아들을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으니 참으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빛의 나라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옮기움을 받으라고 권면했는데 바로 그 권면을 받은 사람들이 곧 교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가 교회적인 조직으로 출발했을 때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곧 그들의 믿음과 고백은 그 말을 받았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고, 그것이 공적인 고백과 증거로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자기들의 죄인 됨과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들이 이제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어둠의 종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사실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들의 구원의 주로 보내신 예수를 그들의 주와 그리스도로 받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세례를 받는 것들은 그들이 이 패역한 세대에 속한 삶이 아니라 주 예수의 것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들이 믿음을 고백한 표로서 그처럼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주로 믿었고 자신들의 죄인 됨과 예수의 구주되심을 세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이 된 사실을 증거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참으로 교회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께서 주로서 죄에서 건져낸 새로운 피조물,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새롭게 된 백성들 곧 그것이 교회인 사실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하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를 지으신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교제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처럼 그들이 자기들의 죄인됨과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들의 삶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는 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참으로 교회로서 모이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될 때 자기의 죄인 됨과 예수의 구주되심을 믿고 참으로 그에게 속한 자로서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으로 새로운 공동체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로서 특성을 갖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의 가르침은 사람으로서의 사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사도여서 곧 사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라고 합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그 개인의 의견을 말함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계시의 기관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땅위에 오셔서 행하신 일과 그 말씀을 증거함으로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도들 안에서 자기 교회와 함께 교제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 살아 계실 때 보다 더 풍성한 교제인 것은 주님께서 그이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는 사도들도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고백을 했으면서도 그가 오셔서 이루신 일에서 바른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메시야가 죽음의 고난을 겪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인가. 또 주님 초림하시는 것과 재림하시는 것 사이의 간격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그의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했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한 것은 아니라고 요한 복음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더 저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은혜가 진행되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으심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신 자로서 그 은혜의 말씀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그 은혜의 결과로서 혈육을 입은 사람 안에 그의 영으로 거하셔서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것도 12사도로 대표된 새 이스라엘의 기초를 그들로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증거케 하심으로 이제 참으로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거하셔서 그 은혜의 일을 증거하는 방식으로 교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로서 특성을 갖고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의 가르침은 이 앞에 있었던 곧 예수의 인격과 그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되겠지요.그러기때문에 지금도 교회가 교회인가 하는 특성은 그저 주 예수의 이름을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하리라 이런 식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막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예수를 예배한다는 말 예수를 예배의 주로서 우리가 부른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가 우리의 구원자로서 이루신 일들을 합당하게 고백할 때만 그것이 교회로서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사도는 없지만 사도의 교훈에 따라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거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바울의 증거를 우리가 수납하고 그 증거를 따라 교회가 바르게 서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누일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필연적인 연합을 가져야 되겠지만 교회는 이처럼 참으로 새 창조의 주로서 예수께서 사람되시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이루신 새로운 피조물로 구성되어 있고 이제는 예수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와 교제하는 새로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의 가르침을 합당하게 증거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교회로 취급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교제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물론 그런 고백 이전에도 우리들은 알 수 없는 비밀한 은혜들이 있다고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조항이 아니고 우리는 나타난 고백대로 판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우리는 겸손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장이 되어서 사람이 구원받았는가 안 받았는 가를 판정함으로 교제하는 수준에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그러기대문에 나타나는 것만 부별하는 것이 참으로 겸손한 것이고 옳은 일입니다.그것이 피조물로서 우리 위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 사도의 증거를 받고 이처럼 세례를 받음으로 세상에서 구별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이처럼 그들이 성별되었을 때 그들이 나타탄 방식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방식으로 그들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사도의 가르침은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제는 한 성령을 마셨으므로 이제는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한 새 인류입니다.이제는 우리가 멀리 있는 원수가 아니요 또 제사장을 통해서 나타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고 은혜 아래 당당히 서 있는 부자지간의 관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여기보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시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서 서로 교제하며 하는 사실은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것을 그저 교제하는 것은 이것이고 떡을 떼는 것은 저것이고 하는 사실로 일일이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가르침은 이것이고 교제하는 것은 저것이고 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고 사도의 가르침이 교제하며 덕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는 것처럼 이런 것들은 통일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들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담안에 온 인류가 한 혈통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예수를 머리로 해서 교회가 새 인류로 함께 지어졌으니 그리고 이제는 예수가 우리의 대표자로 보좌 우편에 계신 것처럼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부자지간의 관계가 성립되었으니 이처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모인 교회의 특성은 그처럼 서로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는 말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왜냐하면 교회가 교회로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방식은 이 방식입니다.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합니다.서로의 교제는 그냥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제여서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함으로 한 몸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고 곧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삶으로 이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그러기때문에 서로 교제하며 떡을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는 말은 같은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떡을 떼며 하는 말은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시고로 표현되지 않고 떡을 떼며 이렇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이 당시에 먼 지방으로 부터 예루살렘에 오순절을 지키려 온 많은 무리들이 있었고 또 더군다나 그 당시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말하자면 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고 그래서 공동식사를 했을 것이다고 공동식사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구절에 봐서는 잘 일치가 되지 않습니다.특별히 46절에 보면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런 것을 보면 떡은 떡이면 음식은 만찬인가 이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있는 것처럼 떡을 떼며 하는 것은 성찬식에 대한 바른 표현법이고 또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은 소위 예찬 그들이 이처럼 주의 살과 피를 나누는 예식을 행할 뿐아니라 그들이 공동의 교제의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사도행전 20장7절을 보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유두고 사건이 있습니다.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11절에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고 떠나니라.이렇게 했을때 밤중까지 계속 강론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졌거든요.그러면 여기서 자식 밤중에 식사를 했는가! 나도 밤중에 가끔 밥을 먹습니다만 또 교제시간이 있으면 아마 이 교제도 좋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일부러 밥먹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식사할려고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고 모였더니 바울이 오순절이 되기전에 말하자면 도달하려고 급히 서두르고 있는데 식사 한번 하려고 안식 후 첫날 이래를 머물렀다고 볼 수 없거든요.6절을 보면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래를 머무니라. 무엇하려고 이래를 머물겠습니까? 안식 후 첫날 우리가 떡을 떼려고 모였더니 안식 후 첫날 그 공적인 예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식사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여기에서 떡을 떼려고 모였더니 떡을 뗀다는 말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에 있어서 대표적인 표현법으로 이해를 해야할 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여기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문제지요.그러니까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성령을 마신 한 몸의 교제로 서로 교제할 뿐아니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공급함으로 서로 성숙할 뿐아니라 이것은 새인류의 교제는 사람끼리의 교제 뿐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 함께함이 새 인류이기 때문에 거기보면 떡을 떼며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할 뿐아니라 한 몸의 교제를 나누고 그리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여기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스니라 하는 문제들은 예배에 대한 문제와 더 직관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새 인류로서 참으로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여서 그 몸에 참여하고 그 몸의 지체로서 교제하는 그 교제와 예배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처음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증거로 설립된 교회가 어떤 존재로 나타났는가 하는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도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가 했을 때 말씀이 바로 증거되고 성례가 합당하게 시행되고 권징이 바르고 공정하게 집행되면 그것이 곧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제는 거룩한 교제여서 바로 사도의 증거를 받지않고 그 증거를 고백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교제에 참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여기서 합당한 교제는 합당한 권징을 수반하도록 되어 잇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합당치 못하면 성찬예식으로 단절시키면 거룩한 교제에서 단절시키고 있음을 그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바로 그것이 사도적 증거로 처음 땅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어떻든 이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부활하사 보좌우편에 취임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이적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도의 증거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여러나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일을 증거했을 때도 그들은 놀랬고 흥분했어도 바로 그들의 증거 때문에 믿고 돌아온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제 사도가 구약의 약속의 말씀을 풀어서 증거해서 예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주로 오셔서 그 구원을 성취하셨다고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우리의 주라고 증거했을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택한 백성 마음안에 역사하셔서 바로 그 말씀을 그들 안에 증거하심으로 그들로 믿게 하셨고 그러므로 그 도를 받고 그 도에 복종하도록 된 것입니다. 그러니 첫 창조도 하나님이 그의 권능의 말씀으로 이루었던 것처럼 재 창조도 그 말씀 그 구원의 말씀 죄인을 부르는 권면의 말씀을 통해서 지었던 것이고 어떤 이적이나 그런 것을 통해서 지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심이 역사인데 하나님은 그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으로 자기를 계시하시는데 그의 행하심은 말씀계시의 증거가 없어서는 이 죄악된 세계에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왜냐하면 창조세계에 나타나 일들은 아무리 그것들이 이적적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 의미를 풀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믿게 하기전에는 세상사람들의 관점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왜 옛날의 이적들이 다시 반복되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놀랄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런 것은 구원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은혜의 말씀이 진행되는 것이 그 역사가 진행되는 방법이고 옛날의 방식이 이적의 방식이 꼭 하나님의 권능을 충만하게 나타내는 방식이 아닙니다.만일에 그런 것이 더 옳은 일이라면 예수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땅에 계셔서 지금도 이적을 행함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이지 더 효과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더 진행되고 더 풍성해지는 것이지 더 줄어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지금도 사도행전적인 여러 기사와 이적이 있어야만 그것이 교회성장면에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고 그리고 이런저런 방식 병고치는 방식이 특별히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방식 또 사람이 병도 고침받고 돈도 잘 벌고 평안해야만 예수를 믿을 방식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의 본성에 있어 우리가 역사의식을 바로 갖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에서 가지라도 이적이 계속될때가지라도 교회가 처음 설립된 것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설립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43절을 보십시다.‘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덕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막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보면 사도들을 통해서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이 뒤에 보면 앉은뱅이를 고친 일,수건만 가져가도 죽은자가 산 일,죽은 자를 살리는 일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 이적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지요.사도적 증거 때문에 교회가 땅위에 나타나게 되었고 그리고 예수는 친히 당위에 오셔서 그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이시고 그가 친히 말씀하심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심으로 그 의미를 풀어서 자기 백성들의 마음 안에 증거하셨던 것처럼 사도글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곧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일하심이 사도들 안에 반복되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오히려 예수가 말씀하시길 너희들이 더 큰 일도 행하리라 했던 것처럼 예수는 이스라엘의 버린 양에게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구주로 거기 나타나셨고 그리고 그는 12사도를 중심한 소수의 무리에게 아들안에 천하만민의 구언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설교에 3,000명이 회개힐 뿐아니라 이방인 까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지요. 그래서 사도들도 예수가 행했던 이적들을 그 표적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여기 사도행전을 보면 다른 사람이 이적을 행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고 주로 베드로 바울에 대해서 그 기록을 집중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베드로는 12사도의 머리로서 유대인에게 보내신 사도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바울은 이장인의 사도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대문에 다른 사도들도 특히 유다 같은 사람도 예수 살아계셨을때 이적을 행했겠지만 다른 사도들의 이적을 말하지 않고 두 사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물론 두 사도의 행한 것도 모든 것을 다 기록한 것은 아니고 이처럼 병자를 고친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 또 안수하매 성령이 임한 이야기 그런 구원의 표적으로서 필요한 것들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그런 것은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오히려 사도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었다는 의미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마치 애굽에서 주님께서 큰 권능을 행하셔서 애굽의 신들을 다 심판했을때 바로의 마음에 큰 두려움을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대지 못하고 나가도록 했어도 그들이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막혀 죽게해서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위에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 같지만 땅위에서 연약함으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심으로 죽음의 질서에 복종했던 그 분 예수는 약하신 분으로 오셔서 강한 자로서 보좌 우편에 취임하셨습니다.그는 죽음과는 무관한 존재인데도 죽음에 종속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의 자리에 서서 혈육을 입은 존재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는 그렇게 하심으로 강한자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네게 주셨으니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권능으로 불신자들의 마음에 큰 두려움이 임하게 했고 그러므로 교회는 땅위에서 파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물론 여기에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하는 두려움은 신자들로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 이 당시 백성들을 보았을 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예루살렘 까지라도 교회를 그들의 연합된 세력으로 억압할 수 없었고 그들 안에 큰 두려움이 있어서 교회가 이처럼 땅위에서 존속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약한자로 오셨어도 그는 강하신 분이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그의 권능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교회완성을 위해서 역사를 운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를 죽였던 예루살렘 까지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고 성장하는 일에 가지라도 교회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예수안에서 땅위에 그의 나라를 증거했던 것처럼 친히 그의 영으로 사도들안에 역사하셔서 그가 행했던 이적과 그 가르침을 베풀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 이적을 통해 땅에 친히 나타나는 방식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다 서로 통용하고 이처럼 사도들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방식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예수의 대리자의 위치에 있어요.그리고 사도시대가 끝난 뒤로는 다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기사와 표적,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을 통해 설립되는 방식으로 계시기관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능력적으로 임하게 하는 방식으로 세상이 놀램,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상징적인 의미로는 표적 그런 의미로는 사도들 위에 예수를 구원자로 보내신 분으로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여기보면 함께 있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통용했다는 말은 가족제도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지요.특별히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다 나눠주고 한 것을 보면 또 우리들이 여기 4장 끝에 보면 34절 부터보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들은 다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니라’ 이것을 보면 처음 부터 그냥 공유한 것은 아니지요.왜냐하면 처음 부터 다 가졌다 했으면 또 팔 물건이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바나바라 하는 사람이 초대교회에서 참 유명한 사람인데 한 참 있다가 뒤 뜰에 서서 팔았다고는 해석을 할 수 없고 여기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이렇게 한 것을 한꺼번에 모든 재산을 다 나눠가지고 나누고 가운데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고 이런 식으로 통용했다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이것은 가족적인 분위기로 지금 나타나 있지요.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그리고 부요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부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말하자면 몸으로서 교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는 처음 교회가 설립되는 당시에 그처럼 되어 있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런 기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예루살렌 교회가 이런 저런 일을 했다는 그 우수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가 교회로서 역사 안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 나타나고 있는 때여요.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성을 그들의 삶안에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런의미로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로서의 특성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그런의미로 사도들이 목회했던 계시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권면할 때 야! 너희에게로 부터 말씀이 나왔느냐 말슴이 예루살렘으로 부터 나왔지 너희로 부터 나왔느냐 그런 방식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모 교회로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사도들을 통해서 지금 교회가 설립되고 있고 그러니 사도적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이들의 삶안에서 타나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보면 언약공동체 한 몸으로서의 언약공동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어떻게 보면 새로운 가족처럼 되어 있지요. 분명히 사유재산제도가 다 없어졌다고 이해할 필요가 없게 이 본문은 되어 있어요. 재산과 소유를 다 필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렇게 한 것을 보면 한꺼번에 다 팔고 나누고 한꺼번에 쓰고 한 개념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도 여기 표된 방식으로 보면 새로운 공동체 가족공동체가 나타난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러기때문에 교제하며 떡을 떼며 그 의미가 그들의 사람의 교제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 나눔으로 참으로 몸의 지체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출애굽기에 보면 만나를 내렸는데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오멜로 되어 보면 부족함이 없고 그것을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헌금의 원리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작게 거둔자나 많이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지 않았느냐? 이것은 몸을 평균케 함이니라.말하자면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로서 새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로 이스라엘을 구원함이고 이스라엘은 그런의미로 참으로 한 몸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양 뼈를 꺽지않고 먹도록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들은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한 양을 뼈를 꺽지않고 함께 먹음으로 그런 교제로 부름을 입었거든요.그래서 한 양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부족함이 없는 양식이었던 것처럼 만나도 적게 거둔자나 많이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도록 평균케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의 생명이시요 바로 어린 양되신 예수를 생명으로 주셨기 때문에 바로 그런의미로 우리들은 한 몸에 접붙혔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 물 까지라도 분배의 원리 그런 방식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이 나눠가짐이 나누어 가짐으로 공통의 원리가 아니라 서로 받은 은사로 서로를 공급함으로 하나님이 만나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의 교회에 공급하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리가 가진 것으로 서로 공급함으로 그렇게 해서 몸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은사는 다양하지 은사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책이요 성경이 우리 안에서 증거하셔도 그것을 해석하는데 여러면에 차이점이 있고 또 하나님은 이처럼 사역자를 통해서 교회에 공급함이 여러분들은 그와같은 그런 집중적인 연구를 하지 않아도 바로 그 은혜를 함께 누리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은사들은 다 그런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부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가 은사로 풍성하고 은사에 부족함이 없습니다.이 은사를 우리들은 구원역사에서 계시기관으로 역사했던 그 은사들을 바로 계시은사를 가지고만 우리들이 은사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 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구약에 도 예수 오시도록 여러 계시은사들은 바로 예수안에서 이루실 그 구원의 완성을 지시하는 계시들이었지 그것이 성숙된 것은 아닙니다.그러면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준 은사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 참으로 그의영을 심으셔서 이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사랑의 율법이 우리안에 이루어 지도록 했습니다.사랑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의 공동체로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가 우리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은사의 풍성함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함,그 윤리를 따라서 옳고 그름으로 형제를 봉사하고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이제가지 구원역사가 진행되었던 목표여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도록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풍성한 은혜를 주셨고 또 이 완전한 구원의 질서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이 구약의 율법아래서 강제로 분배하게 했던 그 분배의 정신 보다도 우리가 사랑의 수고가 적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이스라엘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이루실 사랑의 율법을 여러가지 규례를 통해서 그들에게 나타내셔서 종이 7년을 봉사하고 7년째는 해방하는데 이렇게 이렇게 해방하라고 쭉 이런 저런 말을 했지요. 아마 우리 기독교인들 까지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어요.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만 그런 제도가 구약적인 방식정도로만 집행되어도 소위 노사분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어요.그것은 한 가족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얼마나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되면 그것은 인격적인 불쾌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사회적인 연합은 잘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그러니 여기보면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니 여기 41,42절에 있었던 바로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이런 특성을 가진 교회로 나타났다.그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은 43-47절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여기보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다.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러면 온 예루살렘이 교회를 다 칭찬했는가.그런 말은 아니지요.왜냐하면 이를 가는 무리들도 있을 것이고 그래도 그들의 선한 삶 사랑의 윤리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전에 모여서든지 집에 모여서든지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는 사도들을 세우셨는데 뭐할려고 사도들을 세우셨습니까? 바로 교회를 세우시려함이요.뭐할려고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여기보면 참으로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셨는데 사도족 증거를 통해서 교회가 설립되었느데 이 교회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가 사랑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게 하시고 바로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신 분은 주님이셔도 교회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신다.이것이 땅위에 나타나 교회의 삶입니다.주님은 12사도를 세우셨는데 사도가 목표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고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교회에 계셔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하나님의 새 인류로 짓고 계시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교회에 임재하여 계시는 일입니다.그러기때문에 계시록에 보면 교회에 대한 비밀 참으로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닐고 계시는 주님 참으로 교회는 땅위에 계시는데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안에 계시고 그리고 교회는 영원히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기관으로 서 있습니다.그런 비밀을 알리셨던 것처럼 교회의 출현은 무엇때문입니까?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이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그때는 율법폐지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여 성전에 모이고 그 다음에 집에서도 따로 모이고 물론 그런 개념으로 해석도 가능합니다.그러나 계시기관으로 사도들을 우리가 생각했을때는 사도들이 그런 이해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바울 사도도 안식일이 되면 자기규례를 따라서 회당에 찾아가셔서 다 말씀을 증거했던 것처럼 거기 하나님의 예비된 백성들 옛언약의 백성들이 성전에 모이고 있고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경건한 무리들이 성전 뜰에 나타나 있고 그러니 그들이 모였던 예배의 처소로 예배의 장소로 삼는 것은 합당하다고 우리들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러나 성전예배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예배의 처소는 아닙니다.예수가 주가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도록 요구했던 것이 성전의 관리자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무리가 아닙니까? 그래서 성전예배와 하나님의 교회의 예배는 처음 부터 집에서 떡을 떼며 한 것처럼 처음 부터 나뉘어져 있습니다.예수를 주라고 고백을 하면 성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어요.그래도 거기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소요 거기 언약의 백성들이 있고 또 거기 이스라엘의 언약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성전 뜰에 나타나 있고 그러기때문에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거기서 참으로 주님의 몸에 그리고 주님의 몸을 함께 나누는 성찬식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리고 서로 즐거움의 교제를 나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미의 삶 그리고 형제에게 나눠주기를 기뻐하시는 삶 이런 제사를 기뻐하시리라 한 것처럼 이런 삶을 통해서 여기보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했다고 그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3장15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 구약의 방식으로 그들은 성전제사를 지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로 구약의 모든 실체는 예수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은 구약의 제물로 말미암아 드렸던 자는 유익을 얻지 못했지만 그들은 참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말라.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외했을 때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 새 인류가 이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이제는 예수오시면 참으로 영원한 찬양이 거기 있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혈육을 입으신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친히 뵙고 그와 교제하는 새인류가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런의미로 거기는 새로운 가족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평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도 사도들은 새롭게 된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로 사도들은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거기서도 구체적인 인간의 삶이 있겠지만 지금처럼 불공평한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교제를 누리는 사랑의 공동체로. 그때에는 부부질서가 있고 가족질서가 있는 그런 폐쇄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로서 여기 있는 것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처음 나타난 이런 장면들은 종말론적인 것이어서 바로 이 시대의 끝에 나타날 것을 이처럼 특이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마치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임하심은 모세제도의 성막에 임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모세에게 시내산에 임하신 것이 성막에서 임하신 방식으로 계속 되었던 것처럼 말하자면 처음으로 나타나 장면은 그 시대의 모든 특징을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고 이 시대의 끝에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완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참으로 우리가 우리를 위해 혈육을 입으신 주님을 뵙고 지금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음으로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뵈어도 그때에는 주님의 얼굴을 뵙고 얼굴과 얼굴을 뵈옵는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뵈올 것이고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로 거기 나타날 것이고 영원한 찬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기서는 여기서 두려워한 정도가 아니라 불신자들은 모든 어둠의 불못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리고 천하만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인류가 거기 나타날 것입니다.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들은 그 일을 위해서 보좌에 취임하셔서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자기백성 구원받는 자기백성을 날마다 하나님의 교회로 불러들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을 가지면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불러들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세상이 이러하니 저러하니 우리 형편이 이러하니 저러하니를 따지지 말고 불러들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교회는 증거하는 직무로 땅위에 나타나 있습니다.단지 증거는 입술로 증거함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로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나타내면 그것은 세상에 빛이어서 소금이어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 지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보좌우편에 계셔서 그 일을 위해서 천하만민을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지키고 계시고 이처럼 보존된 질서 안에서 자기 교회를 완성하십니다. 그 역사를 바라 보시고 참으로 우리같은 죄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 그 무한하신 사란 가운데서 참으로 예수를 우리의 주로 고백하고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로 서로 하나 되었으니 공동체로서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짊어지고 서로의 허물을 고치고 또 우리가 서로의 필요를 공급함으로 우리가 어떤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증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해야 되겠고 그러면서도 사도의 증거를 통해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사도의 증거의 복음 우리의 죄인됨과 주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함으로 천하만민이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수고를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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