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사도행전 강해 2:1-11

찬미예수님 2025. 1. 11. 07:30

제목:사도행전 강해

성경:사도행전 2:1-11

 

지난시간에는 소위 사도회의에서 결원된 유다 대신에 제비뽑아 맛디아를 택한 기사를 강론했습니다.사도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조직신학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말하면 예수 생전에 예수와 함께 했던가 도는 예수께서 친히 부르신자 부활하신 주님을 뵌자 등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겠지요.그래서 바울도 예수 살아계셨을때 예수를 모시고 먹고 마신 사람은 아니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침히 나타나셔서 바울을 부르셨고 사도는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그 존귀한 직무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사도입니다.이런 조직신학적인 관점으로 말하면 맛디아는 사도직에 잘 맞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예수가 직접 임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1장에 보면 바울이 자기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사람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방식으로 자기 사도직을 말할때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는 맛디아는 사도적인 자격에는 좀 맞지않습니다.그러나 여기 성경은 그런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지금 이 기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신학적인 관점 하나님의 구원역사 진행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지금 주보뒤에 쭉 연제하고 있습니다만 구약때는 어떤 대표적인 성격의 날을 허락하셔서 그들에게 허락할 안식을 거기 약속하셨습니다.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참다운 안식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어떤 날을 국한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간다거나 어떤 대리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거나 하는 것은 분명히 없습니다.이제는 유대인 뿐아니라 천하만민이 예수의 이름으로 어디서든지 시간에 상관없이 방향에 상관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그런 것은 말하자면 옛언약제도의 성취로서 예수그리스도의 그것은 맞습니다.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조직신학적인 관점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신학적인 관점 즉 하나님이 그의 역사안에서 그의 구원을 진행시키시는 안목을 가지고 지금 너희들이 어디에 서있는가.바로 그것을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그러기때문에 영원한 안식은 여전히 시간질서로 보았을때 미래에 있는 것이고 지금 우리들은 그 완성된 안식을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다.그런의미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실제적인 안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긍국적인 완성은 여전히 미래에 있기 때문에 그러기때문에 여전히 우리들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삽니다.그러기때문에 세상은 7일의 주기로 하나님을 에배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이제 그 안식을 현제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시기이기 때문에 날의 첫날에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라.그러기때문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라.그것이 히브리서에서 옛언약과 새언약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기록하는 내용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 사도행전을 풀때도 역사적인 안목을 먼저 가져야 하고 그리고 이 역사적인 안목 가운데서 현제적인 것이 하나님 앞에 무엇이가를 꼭 생각을 해야합니다.그래서 여기 볼 것 같으면 여기12사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로 맛디아를 얻었다.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부으시는데 하나님께서 12족장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구별하셨거든요.바로 12족장의 완성으로서 12사도를 기초로 하는 새인류로서 교회 새 이스라엘이 땅위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12족장으로 구성된 옛 이스라엘에게는 물의 뿌림과 피의 뿌림으로 자기에게로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셨는데 이제는 세례요한을 통한 물 뿌림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부으셔서 이제 하나님께로 새롭게 하는 새인류가 출생하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은 이런 큰 차이점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옛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것이어서 여기보면 유다는 제 길로 갔어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파괴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12로 구성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그의 영을 부으셔서 새로운 인류로 지으신다 하는 사실을 여기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러기때문에 여기서 소위 맛디아가 사도적인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하나님은 바울을 예비했는데 자기들끼리 멋모르고 맛디아를 뽑았는가 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해석하기를 자기들이 채워야 되는가 안채워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12은 깨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그런 방식으로 시편을 이해를 했습니다.하나님의 12은 깨어질 수 없고 그가 제자리를 떠나면 다른 사람이 그 직무를 합당하게 맡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파괴되는법이 없다.바로 12로 구성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그의 성령을 부으셔서 옛언약의 성취로서 새 이스라엘이 여기 출생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2장을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2장1-11절은 오순절 성령 부으심에 관한 기사이고 그리고 12절 이하에는 그 성령 부으심에 대해서 사람들이 비방하고 놀랐을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사실을 요엘서를 인용해서 그리고 시편을 인용해서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그 이하입니다.오늘은 성령 부으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여기 성령 부으신 날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한 곳에 다같이 모였더니이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줄을 확실하게 알았는가.그것을 우리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사도들까지라도 예수께서 성령을 부으심으로 이전에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을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주님께서 그처럼 말씀하셨고 바로 성령이 오심으로 주님의 뜻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그들이 서기 때문에 여기서 사도들이 그것을 알고 기다렸느지 모르고 기다렸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고 단지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오순절날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20세 이상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성소로 나와야 됩니다.그리고 유월절 맥추절 맥추절이 오순절이지요.또 그것은 초실절이라고 같이 부르기도 합니다.물론 초실절은 유월절 안식후 첫날이 초실절인데도 신명기를 보면 바로 이 맥추절을 초실의 절기로 부르기도 합니다.수장절 즉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삼대절기는 이스라엘 20세 이상의 남자는 다 하나님의 성소로 모여야 됩니다. 칼빈은 이런 것을 주석하기를 왜 하필이면 오순절날에 이런 것을 이루셨는가.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모였을때에 그 약속성취를 보여줄 전시적인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이것은 약속의 성취의 개념으로 항상 이해해야 합니다.그래서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한 곳에 모였더니 하는 말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다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어있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곧 이단의 괴수로 죽였어도 그들은 바로 예수와 함께 떡을 떼므로 바로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렇게 모였거든요.그래서 거기 그들은 함께 모여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구약성경에 보면 특별히 레위기 23장에 보면 7대 절기가 나오는데 그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밝혀주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거기보면 안식일이 있고 유월절이 있고 무교절이 계속되고 유월절 안식 후 첫날에 거기보면 초수절이 있고 거기서 부터 7*7=49 칠 안식일을 세서 제 50일째를 맥추절로 지정을 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맥추절에는 물론 다른 제사들이 있지만 거기서 드리는 제사의 특징은 에바 10분의 이의 보리로 거기에 누룩을 섞어서 두 떡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요제로 흔들어 드리라 그리고 먹으면 7마리 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거기보면 새소제와 번제가 이처럼 강조되어 있습니다.성경에서 보면 누룩을 섞은 떡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제단에 불로 태워드리는 방식으로는 드릴 수 없습니다.그리고 누룩 섞은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것이 구약예식법의 모든 기초입니다.그런데 맥추절에는 에바 2/10로 거기에 누룩을 섞어서 떡 두 덩어리를 만들어 드리라고 되있습니다.여기서 누룩섞은 떡은 그냥 단순히 죄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맥추절은 어디서 부터 계산되느냐면 유월절 안식후 첫날 초수절 부터 계산해서 7*7=49 7안식일을 계산했느니 이것은 실은 초수절의 완성입니다.초수절의 완성이어요.그래서 처음 곡식은 하나님 앞에 단으로 드리고 그리고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데 7안식일을 세고는 그때는 하나님 앞에 누룩섞은 하나님 앞에 소제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었고 가나안 땅에서만 땅의 새곡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초수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낼 수 있는 것이고 광야에서는 못지냅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서에서 보면 요단강을 건넌 뒤로 그들이 가나안 땅의 첫곡식을 먹고 그때부터 만나는 그쳤고 그런 방식으로 나옵니다.그러기때문에 여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인도했을때 무교병을 준 것은 애굽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곧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되는 생명이 무엇인가.그것이 곧 무교병입니다.왜냐하면 그들은 무교병을 먹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누룩섰은 떡을 먹었을때는 애굽에서 종살이 할때 편안히 먹었던 그런 상태입니다.그때부터 무교병을 새로운 양식으로 묘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유월절 양의 제사로 유월절 양고기를 그들의 생명으로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두웠던 것이 그 안식후 첫날에 추수한 첫곡식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곡식을 너희들이 먹으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새양식 주시기 위함이고 그런의미로 유월절 안식 후 첫날에 첫곡식을 드리고 그것으로 칠 안식일을 세어서 50일째는 누룩섰는 떡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되있습니다.그러니까 맥추절은 초수절의 완성이지요.7이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인데 그것의 7배 7*7=49로 세고 있거든요.그래서 그것은 초수절의 완성입니다. 그러기때문에 맥추절에 누룩섞은 떡을 먹는 것은 이제 언약의 땅 안식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나 대신에 가나안 땅의 새양식을 먹었던 것처럼 이제 그들이 바로의 가마솥 곁에서 평안히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과 교제의 삶 평강의 삶 안식의 삶을 살 것을 누룩섞은 떡을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그래서 누룩섞은 떡은 하나님 앞에 안식의삶 그래서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봉헌되는 그런 양식의 완성을 7*7=49 7안식일을 세고 50일째 누룩섞은 떡을 드리도록 함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새생명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이 새생명은 초수절에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온 백성이 풍성하게 하나님 앞에 먹고 누리며 하나님 앞에 새소제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7마리 양으로 드리고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은 초수절의 완성인 맥추절에 그처럼 새기고 있습니다.그러기때문에 맥추절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뒤로 그들이 처음 곡식을 먹으면서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곧 맥추절입니다.그때가 되면 첫 곡식의 수확을 마치고 이제 풍성함을 누리는 그런 시기이거든요.그것이 레위기에서 보여주는 맥추절의 의미입니다. 이제 7월달에 보면 나팔절이 있고 대 속죄일이 있고 수장절이 있어서 또 1월달에 유월절 초수절 맥추절 을 두신 것처럼 7월달에 나팔절과 대속죄일 그리고 수장절을 둠으로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히 복을 주시는 초막절의 의미가 거기 나타나 있습니다.17에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새기고 있는 것이지요.그러기때문에 여기서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하는 사실은 바로 오순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아들의 영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들의 영을 인류의 새본성으로 주심으로 참으로 하나님 앞에 양식의 실제 아버지와 아들이 누리는 참 교제 참 생명을 참 안식을 오순절에 부으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한 것입니다.그래서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전에 여러번 예를 들었던 이유가 여기있습니다.여기 다 모였지 않느냐? 10일 동안 합심하여 기도하니까 드디어 왔지 않느냐? 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또 말하자면 여기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지 못했다.여기는 사도회가 있기때문에 바로 12사도가 신약교회의 기초여요.그 사도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거기서 기도한 사람만 받으라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그러기 때문에 여기 오순절이 이르매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약속하셨던 새생명의 완성 바로 그 의미로 성령을 부으셔서 이제 영을 따라사는 새로운 피조물을 지으시고 계신 것이고 그것이 오순절에 성령의 임하심의 내용인 것이고 그들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의 결과로 너희들만 특별히 기도했기 때문에 너희들만 이 은혜를 받아라.믿는데로 되리라.이처럼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사도들이 함께 기도했던 이유들은 주님께서 40일 동안 살아계시면서 그의 피와 살로 생명의 교제를 허락하시고 그렇게 해서 구약의 의미를 설명함으로 그들이 믿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곧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시는 일이어요. 그런 것이지 그들이 많이 기도했기 때문에 그 기도의 보상으로 드디어 주신 것은 아니라 하는 사실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되고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우리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곧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고 감사하고 반영하고 사는 것이고 인간으로 부터 출발하면 인간이 자존자라는 의미와 같습니다.만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인격적으로 생명적으로 반영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생명이어요.그러기때문에 그 방향을 우리가 그르쳐서는 안됩니다.맘사에 하나님으로 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소위 내재신앙이라고 자기느낌으로 출발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믿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오순절도 우리가 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보면 오순잘에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을 그 형상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고~임하여 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이전의 해석들은 불같이 임했다하는 것은 불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또 뭐 혀같이 임했다하는 것은 선교적인 방식등을 해석을 해왔습니다.그래서 불같은 성신이 임하셔서 우리마음이 다 태워져야 하겠고 갈라진 혀같은 것이 나타났으니 참으로 성령 받으면 혀가 변호사 혀보다 더 좋아져서 전도를 잘하는 것으로 해왔지요.그러나 이런 것이 아니라 바로 오순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임하심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어거스틴은 이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새 법으로 하나님 앞에 돌판을 받은 그 날로 해석을 합니다.그렇게 해석하면 참 해석의 의미는 우리에게 참 좋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성경적인 증거는 없습니다.19장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출발한지 세째달 그날에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그렇게 하고보면 그것은 그들이 출발한 달은 1월로 계산해서 세째달인가.그렇다보면 114일에 출발했으니까 3월 처음으로 보면 50일이 맞습니다.도착해서 3일동안 성결케 하고 합치면 50일이 맞습니다.그러나 성경본문은 꼭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이 출발한 뒤로 세째달에 그러면 90일 약 90일이 걸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그래서 그들이 이처럼 출애굽으로 부터 새 이스라엘이 출생하고 새 이스라엘의 법으로 돌판에 새긴 법을 받고 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면 옳지 않습니다.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인류가 일어난 것이고 그 분께서 새 인류의 법으로 성령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마음 판에 새기는 방식으로 거기 법을 주셨다.그것이 오순절이라는 해석은 좋은 의미를 주면서도 성경적인 증거를 살필 때는 좋은 해석이라 보기 어렸습니다.그래서 여기서 돌판에 받은 새법보다 그런 개념보다 하나님의 임하심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 되겠지요.물론 어거스틴 방식으로 해석을 하면 출애굽한 뒤로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으니 그런의미로 하면 의미는 있습니다만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는 말입니다.그런 선배들의 해석은 일리는 있습니다. 어떻든 여기 보면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예수의 12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신뒤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한 말은 이 오순절의 맛베기 선취라고 해야할까요.오순절의 표적으로 사도들에게 한 것이고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세움을 받은 것은 여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여기보면 하나님의 영의 임하심 성령이 임하셨을때 이런 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혀같이 갈라지는 불두가지 표상으로 하나님의 임하심 성령의 임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구약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항상 이해를 해야할 것인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항상 불로 묘사를 합니다.아담이 법죄한 뒤로 하나님이 자기임재를 나타내는 방식은 에덴에서 부터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한 것처럼 불로 항상 나타내고 있고 또 시내산에서도 빽빽한 구름 가운데 그리고 불로 그리고 하나님의 지성소에 빛으로 소멸하는 불로 아무도 그곳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그런 방식으로 나타내고 있고 하나님은 제단의 불로 그가 그 제물을 사르심으로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기뻐하심을 그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불로 임하셔서 제물을 받으시고 하늘로 오르시고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그런데보면 우리가 아브라함때 보면 하나님이 불로 나타내는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그러니까 어떻게 봐서는 아브라함시대에 복음적인 요소가 더 전면에 나타나 있고 복음의 필요성과 복음의 영광을 어둠과 대비시키며 나타내고 있는 방식이 모세율법시대이기 때문에 모세율법시대는 하나님이 항상 계시면서도 거기에는 소멸하는 불로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고 그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서에서 특히 에스겔서에서는 39장에 그렇게 나타나 있습니다.40장 부터는 새 성전에 대한 구조를 말하고 38,39장은 마지막 원수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의 소생을 거기 약속하고 있고 그 앞에 36,37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물로 뿌릴 뿐아니라 새 영을 부으실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다.그런데 3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생시키실 때에 이스라엘은 마른 뼈처럼 되있는데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하도록 하고 있지요.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서 사방에서 모여서 바른 뼈에 불어서 그들로 산 군대가 되도록 거기보면 하나님의 영의 소생 마른뼈처럼 죽어있는 이스라엘을 소생시키시는 생기의 부음을 거기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도 생기를 불어서 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지요.물론 아담을 처음 지으셨을때에도 하나님께서 생기를 호흡하시고 그리고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부활하셔서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그와같은 방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이처럼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지으신다.하나님께서 침히 그의 영으로 사람과 함께 계신다 했을때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의 임하심 새 생명의 부으심을 바람으로 나타내고 있고 물론 어원적인 의미로는 바람이나 영이나 같은 단어지요.그런 방식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임했다. 그리고 불의 혀가 갈라진 것처럼 각사람에게 임했다.어떤 특정한 장소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그런 방식으로 임했다는 말이지요.여기보면 새생명의 영이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중에 임하심 것을 이런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바로 이 성령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을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고 그리고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여기보면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을때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가? 방언으로 말했다.그리고 그 방언 때문에 예루살렘이 놀랬다.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임하셨을때 형상적인 방식으로 그의 임하심을 나타냈습니다.그 다음에도 여기에 있었던 성령의 방언 그런 방언이 가끔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다음에는 이런 형상적인 방식으로 임하심이 없습니다.하나님은 다시 옛기초를 닦지 않고 하나님은 이미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심을 형상적으로 나타냈고 바로 그 임하심을 그 형상적인 방식을 도임해서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고 다시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그러기때문에 우리들이 또 기도하면 불같은 성령이 또 그런 방식으로 오고 또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시고 참으로 하나님이 그들중에 함께 거하시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참으로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이 그들 중에 임하셨습니다.그러면 그들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으로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는데 여기서보면 숫자로 세면 15나라인데 말하자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고향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11)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지요.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은 구원에 대한 약속이거든요.그 구원의 일을 각각 자기나라 말로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물론 여기해석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한가지로 말했는데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말로 듣고 놀랬다는 해석과 여기있는 사도들의 회가 여러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했다.이 본문은 분명히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하고 있지 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지 않고 또 성령의 임하심은 여기 모여서 기도했던 사도회가 함께 모였던 여기에 임했던 것이지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이제 그들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음으로 그들도 한 성령을 마시도록 된 것이고 그러기때문에 사도들이 각 나라말로 말했다.그러니까 여기있는 말은 외국어지요.여러 흩어져 있는 지방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알아 들었거든요.전혀 모르는 혀의 움직임이 아니라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 곧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들었다.그러니까 사도들이 처음 성령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을때에도 그냥 외국어 실력자랑이 아니라 각각 자기나라 외국어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선포하고 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마심으로 새 인류로서 회복됨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하나님의 영의 부이심은 우리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새인류를 지으심이어요. 그래서 이것은 창세기로 돌아가서 바벨탑의 언어의 혼잡과 대비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야합니다.하나님께서 바벨탑 심판을 통해서 온 인류를 흩으셨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머리로한 새인류를 지으심으로 아브라함의 씨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을 머리로한 새로운 종족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종족을 지으실 것을 바벨탑 사건 바로 이후에 아브라함을 분리시키심으로 가나안 땅을 약속하심으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그러기때문에 여기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믿음을 허락하시고 아브라함의 씨로 오시는 그 분 바로 그 분이 그의 성령을 부으셔서 이제는 유대인 이방인 상관없이 천하만민.여기보니까 유대인으로서 흩어진 사람들 뿐아니라 유대인으로 귀화했던 사람들 또는 경건한 이방인들 등 많은 사람들이 왔지요.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하심.그 구약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친히 임하셨는데 바로 그 영의 부으심을 그들이 친히 이렇게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그래서 천하만민이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함께 듣고 찬양하는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 뿐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항 천하만민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처럼 한 성령을 마시게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된 새 인류를 여기서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렇지 지금처럼 우리가 모르는 혀의 움직임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해를 해서는 아니됩니다.또 그것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비교해서 사도행전의 방언을 이처럼 외국어의 방언이어도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은사적인 방언이어서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통역하면 알 수 있고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사도행전에서는 통역자가 없이도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사도들이 많아서 한꺼번에 말을 했지요.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되지 않고 이제 교회가 예루살렘 성에 임하심을 통해서 천하만민에게 증거되고 있습니다.거기서는 말하자면 아직까지 확실한 신앙은 없으면서도 유대인의 유일신교로 돌아왔던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거기에 많은 외국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런 면으로 보았을때 거기서도 바로 이 사도행전적 의미로 해석을 해야합니다.여기 임하신 은혜가 예루살렘에만 임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 시대에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진행된 것이고 그것이 통역되면 바로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듣고 과연 하나님이 너희들 중에 계시고 나는 죄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처럼 랄랄랄하고 당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니어요.그것은 인격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은 인격성을 파괴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성령이 친히 임하심으로 인류를 한 인류로 아브라함을 머리로 한 새 인류로서 하나로 지으심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천하만국으로 부터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 또 경건한 유대인들로 부터 감화를 받아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관계한 모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우리들이 영어를 잘해서 아무리 미국사람과 말을 잘해도 그렇게는 하나되지 않고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인류는 세로운 피조물로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지금은 어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 당시 이처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방식으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방식으로는 초대교회도 이때만 처음에 있었던 것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아니한 것처럼 초대교회 때 이미 천하만민으로 교회는 설립된 것이고 다시 이런 은사로 하지 않습니다.지금은 그 은사가 사랑의 은사여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열심히 연구합니다.어린아이의 말을 배우는 방식보다 더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들이 그 언어를 열심이 연구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더하셔서 그들의 말을 쉽게 이해하도록 합니다.마치 어머니는 아이의 말을 쉽게 압니다.이 언어적인 은사 사랑의 은사를 통해서 인류의 장벽을 넘어서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한 마음으로 한 성령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고 다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배우지 않했는데 갑자기 마국사람에게 가서 영어로 말하고 그런 것은 사도행전 때 이미 천하만국으로 형성된 교회가 설립된 뒤로 그 은혜가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참으로 복음을 증거하길 원하면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새로운 인류로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믿으시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한 생명으로 산다고 믿으시면 우리들은 그런 의미로 사랑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그러기때문에 선교사들에게는 그런의미로 언어적인 은사를 주고 그 언어적인 은사를 사랑의 봉사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지 가만히 있고 기도하는데 어느날엔가 갑자기 임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그런의미로 우리 설교도 많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알 수 있는 언어로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언어로 그런데 우리 주일학교 교사를 보면 그런 점이 아쉽습니다.여러분에게 나도 마찬가지겠지요.성령은 그들의 언어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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