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27

찬미예수님 2024. 11. 2. 23:39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7

 

들어갔다 하는 말은 정복하고 나서 이 언약식을 행한 것입니다. 언약식의 핵심 사항은 무엇이냐 하면은, 항상 처음과 끝을 보면은 더 잘 알 수 있는데 2절을 보면은 큰 돌에 석회를 바르고 율법에 모든 말씀을 기록해라. 2,3절에 그렇게 되어 있고, 8절은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에 명백히 기록해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앞과 뒤에 기록하라는 말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잘못 읽으면은 제단의 돌에다가 기록한 것처럼 그렇게 읽기 쉽습니다마는 본래 제단은 연장을 대면 안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회칠한 큰돌에다가 율법을 새긴 것이어요. 그래서 언약식의 핵심은 돌에다가 율법을 새긴 것입니다. 8절에는 명백히 새겨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언약채결식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돌에다 새긴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그것은 두고두고 불변하기 위에서 새긴다. 돌에다 새기니까. 그래서 원수는 돌에다 새기고 은혜는 물에다 새기고 그런 의미인가?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돌판에 새겨주면은 언약이 영원히 확정된 것입니다. 기록해 주면은. 이것은 언약의 확증과 더 관계가 있다. 돌에 기록해 준 것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큰 돌을 세우고 거기다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것은 언약을 확정하는 것이다. 그전에는 주로 하나님은 돌판에다 기록하시고 모세는 책에다 기록했지요. 그런데 언약의 땅에 들어가서는 돌에다 기록한다. 하나님도 그전에는 돌에다 싸인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돌에다 기록한다. 언약이 영원히 확정된 것을 말한다. 돌에 기록한 율법의 범위는 무엇이냐 하면, 3절에 보니까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한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의 범위가 어디 쯤 되겠는가? 일단은 신명기 말씀인 것을 생각할 수 있지요. 이제까지 쭉 모세가 강론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뒤에 것은 기록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잘 모를 일이어요. 그 다음에 한 가지 해석은 시내산에 율법 전체인데 거기는 역사적인 이런 저런 설명도 있지마는 그건 싹 빼버리고 하라. 하지 말라. 그런 것을 총 계산하면은 유대인들은 613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다고 그래요. 그것을 기록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한 가지이고. 그 다음에 이 문맥을 보면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율법의 말씀을 쭉 선언하거든요. 그런데 열두개 저주문을 선언해요.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석이 각각 다른데 여러분은 어떤 것이 제일로 마음에 맞아요. 여러분은 어떤 해석이 제일로 좋을 것 같습니까. 정답이 없으니까 아무 것이나 말해도 되어요. 지금 신명기 언약은 출애굽기 언약과는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을 하나님의 정언적인 명령, 하라. 하지 말라. 그런 식으로만 해석하면 613개의 계명을 기록했다. 그것이 제일로 일리가 있는데, 신명기는 그런 문제보다는 언약의 땅에 율법이 핵심이거든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면서 행하는 율법이 핵심이기 때문에 613개의 계명을 전부 기록했다 하는 것은 이 문맥에는 별로 안맞아요. 그러면 신명기는 이런 저런 설명이 다 있지마는 설명을 빼버리면 어떤 하라 하지 말라 하는 계명을 기록했을 것이다. 하는 말이 한 가지 해석은 될 것이어요. 또 큰 돌에다 기록하니까 그 많은 양을 어떻게 기록했는가 해도 큰 돌에다 기록했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또 그 돌들위에다 기록하라고 했으니까 큰 돌을 하나만 세웠는데 여러 개를 세웠는지 모르지 안해요. 그러니까 그 신명기 전체를 기록했다고 해도 그것은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 다음 27장의 문맥에서도 보면은 그 언약의 말씀을 확증하도록 기록하고 그리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언했거든요. 그랬으면은 기록한 것을 읽어서 선언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하면 열두 개의 저주문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정확하게 어떤 것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언약 책의 순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여기 보면은 큰 돌에다가 회칠하고 거기다 율법의 모든 말슴을 새기고 그리고 에발산에다가 단을 세우고, 그 회칠한 돌도 에발산 단 옆에다가 세워야됩니다. 그 단을 세우고, 그 단은 5절에 보면 돌단을 쌓되 철기를 대지 말고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거기다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24장과 비교해보면 더 잘 알 수가 있습니다마는.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율법의 말씀을 모세가 책에다 다 기록하고 그리고 나서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지요. 그것이 출애굽기의 언약채결식이었지요. 그래서 피를 양쪽에 뿌리고 언약의 모든 말씀은 책에 써서 기록하고 그리고 나서 백성들은 산에 올라가서 먹었지요.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올라가서 먹은 것이 아니라 돌단으로 싼 그 단, 그 단 앞에서 즐거워하는데 그 단에다가는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지내지요. 그리고 그 단 곁에다가는 회칠한 돌, 율법의 말씀을 새긴 회칠한 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 채결식의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출애굽기 24장을 보면은 모세가 책에다 새겼다고 했는데 이제에는 모세와 장로들이 돌판에 새겨라. 그래서 모든 율법의 말씀을 돌에다 새겼고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신내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단을 쌓고 단에 예물을 드리고 즐거워 했지요. 왜 단을 쌓냐하면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이 어디 임하셨다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20장 끝에쯤 보면은. 너희들이 단을 쌓으면은 내가 그 단에 임하겠다. 그 단에 내 이름을 두고 내가 거기 임하겠다. 어떤 단을 쌓습니까. 토단을 쌓되 돌단을 쌓라. 다듬지 않은 돌로 쌓라. 층계를 만들어서 올라오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지요. 다듬해서 올리는 것은 수치를 드러낸 것으로 출애굽기 29장은 이야기합니다. 다듬지 않은 돌로 쌓는 것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이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단에 임하실 것입니다. ?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다 그말은 땅에 임했다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출애굽기는 흙으로 쌓되 돌로 쌓아라. 언제는 흙으로 쌓아라고 했다고 돌로 쌓라고 그러는데 그 말이 그말이어요. 돌이나 흙, 다듬지 말고 그대로 쌓라. 그러면 내가 거기 임하겠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이 땅의 회복자로 임하신 것이 단이어요. 단에는 임하고 다른 데는 아직 거룩하지 않다고 휘장으로 가리워버렸지마는 단에 임하신 하나님이 실은 온 땅에 임하신 것이어요. 그러면 그 단은 무엇이냐? 다듬지 않은 돌로 쌓라. 내가 임하리라. 아마 다듬은 돌은 이방의 단과 비교될 것이어요. 그들은 바벨탑처럼 높이 쌓아서 올라갈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강림하리라. 어디에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면은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겠다. 출애굽기 20장에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출애굽기 24장에서는 책에다 말씀을 기록하고 피를 뿌리고 그리고 언약 식사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발밑에서 했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은 땅의 회복자지요.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주셨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땅위에 임하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거기다가 번제를 드리는 것은 전체를 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 몫은 번제에요. 그리고 화목제는 임자도 참여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거기다 화목제를 드리고 내 앞에서 즐거워 해라. 하나님이 거기 단에 임하시기 때문에. 그 단은 가나안 땅의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임하신 분이셔요. 그것이 지금 언약의 땅에서 언약 채결식입니다. 이제 출애굽기 24장과는 언약 채결식의 상황이 다르지요. 출애굽기는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집을 짓고 계시겠다. 그것인데 신명기 언약은 그 하나님이 단위에 임하셨다. 토단위에 임하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임하셨다. 거기다 예물을 드리고 내 앞에서 즐거워 해라. 그리고 책에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돌을 세우고 돌에다 기록해라. 그렇게 해서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 백성의 기업으로 주셨다. 이제 그 땅에서 하나님이 율법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루어야 될 것이요. 하나님이 거기 임하셨으니까.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언약식의 내용이다. 그런 말입니다. 상황이 다르지요. 그것은 여호수아 8:35절 그것은 인제 그 장면을 이해하기는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그 자세한 이해하기 좋습니다. 거기 보면은 모든 백성, 아이들까지 이방 백성까지 전부 그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사람에 대한 문제이고 여기서는 언약의 땅을 주셨다. 땅에 대한 문제가 언약의 핵심이어요. 그런데 장면은 출애굽기 24장과 비교하는 것이 이해하기 좋다. 언약식에 대한 복은 어떤 복입니까? 이 본문에서는 직접 무슨 복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니어요. 오히려 언약식에 대한 복은 여기서, 이 본문에서 복은 3절에 있는 것처럼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내가 들어가기를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언약의 나머지 땅을 얻는 것이어요. 들어가서 이 언약식을 행하면은 나머지 모든 땅을 말씀대로 얻는다 하는 것이 이 문장에서 이 문맥에서 언약식의 복이어요. 그것이 여호수아 8, 10장 그런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8장에서 언약식을 행하고 나면은 9장부터는 어쩌냐 하면은 가나안 땅의 북쪽과 남쪽을 대대적으로 정복해서 차지해요.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언약식을 행하고 나니까 그 다음 남과 북을 다 정복한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는 가나안 땅을 너에게 말씀한 그대로 다 주겠다. 들어가서 언약식을 채결하겠는가, 왜 하나님은 단위에 임하셨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돌에다 새겨야 되어요. 돌에다 새기는 것은 한 마디로 땅에다 새긴 것이어요. 그 땅 전체가 언약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은 나머지 모든 땅을 주리라 하는 것이 이 문맥에서 언약식의 복이다. 그 다음 레위 제사장으로 말미암은 언약을 9절부터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구할 때는 아까 말한 것처럼 레위 제사장들이 모세와 더불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할 이유는,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제사장들이 선언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과 저주를 개인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지파들에게 선포해요. 그래서 축복을 위해서는 이러이런 지파를 구분하고 저주를 위해서는 에발산에다가 이러이런 지파를 세워라. 그리고 14절에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뢰라. 여호수아서를 보니가 레위지파는 가운데서 그렇게 해요. 가운데 그렇게 선언합니다. 그래서 축복하기 위해서 남쪽에다가 여섯 지파, 저주하기 위해서 북쪽에다가 여섯 지파, 그렇게 세웁니다. 그러면 왜 축복하는 지파를 그렇게 남쪽에다 세웠는가? 북쪽에다 안세우고. 그런 것은 우리들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저주가 북쪽에서 온다는 것은 이방의 침공 때문에 있는 이야기지 직접은 잘 모릅니다. 실은 하나님의 성소나 지성소는 북쪽에 있지요. 동쪽이 문이면은. 그러니까 왜 저주하기 위해서 북쪽에다가 여섯 지파를 세웠는지 그런 것은 해석하기 어렵고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쪽은 좋고 북쪽은 나쁘고 이런 개념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 나누는 것을 좀 읽어보면은 야곱의 처들, 레아와 라헬, 그 소생은 축복을 위한 계통으로 서있고 저주를 위한 소생에는 여종들의 소생으로 서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예외인 것은 소위 주인들의 아들들 루우벤과 스불론은 저주에 속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하면은 루우벤은 장자권을 잃었거든요. 그 자기 가정에서 못된 짓을 해서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스불론은 아무 나쁜 일을 한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왜 그러는가 여섯씩 여섯씩 맞추다 보니까 제일로 막내를 뗄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축복부터 있기 때문에 제일 막내가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이어요. 다윗도 사울이 와서 식사하는데 다윗은 부르지도 안했지요. 그 막내둥이 저기 가서 양이나 치고 있고 그는 오든지 말든지 식사할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가 아마 뽑힌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여섯 씩 둘로 나우어야 되니가. 그정도 해석할 수 있을 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어떠튼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목적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러니가 축복이 본처의 소생에게 있는 것은 타당해요. 그 정도 이해밖에 설명을 못합니다. 레위 사람이 공포한 여호와의 말씀을 보면은 이 율법에서 반복되는 특징과 끝맺는 말, 반복되는 특징은 저주를 받으리라. 이런 말이 반복되어 있고 그걸 전부 한거뻔에 묶어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않은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이렇게 묶었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것은 저주문이지요. 실은 축복이라는 말은 없고 전부 어기면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안어기면 어쩝니까. 안어기면 그로 말미암아 살겠지요. 그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있는 방식이어요. 온갖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율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것을 행하라. 그 가운데 살리라. 그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행하면 그 가운데 살고 행치 않으면 저주에요. 그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저주문은 26절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했을 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은 앞에 있는 열 한 가지 저주문이겠지요. 여기서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10절에서는 여기 있는 열 한가지 저주문을 이 모든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라 해서 모든 율법으로 모세 오경으로 확대시켜 놓았어요. 아마 그것은 구약까지 확대시키는 개념일 것이어요. 확대시켜 놓았어요. 그렇게 해서 실은 모세 제도 전체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확대시켜 놓아서 율법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특징을 저주라 그 말은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지금 신약에서 알고 있는 방식이지요. 구약에서는 그것이 그들이 의로움이고 기업이고 상급이요 빛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그것은 전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복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저주예요. 율법 아래 갇혔다 그말은 그들은 율법을 벗어나면 저주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갇혀서 복을 받고 삽니다. 이를 행하라. 그 가운데 살리라. 그 가운데 살고 있거든요. 그것이 구약의 복이어요. 갈라디아서 문맥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범했다는 배교 문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 자체의 특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훈계 가운데 갇혀 살지요. 그 말을 잘 들으면 그 약속을 받고 어기면은 벌받고 그것이 어렸을 때 사는 방식이어요. 다 커서도 그런 방식으로 살면은 사람 취급을 안하지요. 어렸을 때는 분명히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 나타났지마는 다 큰 아들을 그렇게 대하면은 그건 사람 취급을 안해준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은 변하시는데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그렇게 해석하니가 성경 해석이 안되는 것이어요. 어려서는 아버지께 돈 많이 타면 제일로 기분이 좋지요. 큰 아들이라 좀 더 주면 기분이 좋지요. 동생하고는 급이 다르니까. 만일 동생을 더 주었다 하면 기고만장을 하고 다닐 것이어요. 그런데 커서는 그런 것으로 자랑을 안해요. 커서는 아버지게 자구 돈타는 막내가, 형님들, 나는 지금도 아버지께 돈타고 사요. 얼만큼 좋소, 하면 웃어버려요. 크서는 전혀 상황이 달라졌거든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전부 이전의 상식으로 자랑할려고 그래요. 이전에는 어렸을 때의 일이요 아직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있을 때,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았을 때의 자랑들이어요.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요. 그런데 우리는 구약 성경이 하나 성경이어요. 신약 성경은 자습서에요. 구약이 원전이고 신약은 해석서인줄 알고 있어요. 해석이라는 말은 이전에 것이 완결됐다는 해석인데 우리들은 완결된 의미가 아니라 의미 해석으로 들어가니까 구약의 의미 이정도로 들어가버려요. 어렸을 때 준 것과 커서 준 것은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해석된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해석인데 우리는 이제 의미를 드디어 알았다. 이정도 해석하니가 구약이 성경이고 신약은 자습서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구약 복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교회를 완전히 어린 아이를 만들고 있는것이지요. 그건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십자가의 복음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어요. 지금도 하나님이 불수레를 타고 위엄차게 오시면 사람이 회개하는데 지금도 오래 참으시고 약한 방식으로 일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배반하고도 태연히 있는 것입니다. 꼭 예수님 형제들의 질문하고 교회의 질문하고 같아요. 예수님이 유명해져야 지금도 교회가 될줄 알고 있어요. 주님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때를 이루고 있어요. 그걸 모른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의미를 확대시켜서 구약 전체의 의미로 확대시키고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은 저주 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 저주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가두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니가 벌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저주 가운데 가두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낳으셔서 율법을 완성함으로 이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율법 가운데 복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즉 성령의 축복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했다. 그러면 왜 이 모세 율법은 주었는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예수 오셔서 천하만민에게 성령의 복을 주도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두었고 오시도록까지 인도하도록 주었던 것이다. 이제 오셨기 때문에 이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이 만민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시적으로 주어진 것이 율법이다. 아직도 죄의 권세 아래 있을 때 임시적으로 주신 방식이 그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끝났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문맥이어요. 갈라디아서 뒷 편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두 아들을 말하지요. 하나는 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본처에게서 났으니 종의 아들은 쫓아내라. 구약에서는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고 이삭은 상속자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어디에다 적용합니까? 하늘에 어머니로부터 낳은 우리들이 진정한 아들이고 말하자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시내산 종의 아들이다. 이스라엘은 쫓아내고 교회가 들어와라. 여기다 적용하고 있지요. 거기서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켰냐 안지켰냐는 상관이 없지요. 종이냐 자유자냐, 이 두 개만 대비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지금도 사람들이 율법은 넘어지라고 준 것이다. 가두었다는 말을 넘어지라고 주었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넘어지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복으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주 가운데 갇힌 복이어서 거기서는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구약에 나타난 모든 거룩은 신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전부 어두움의 열매다. 온전한 빛의 열매가 있을 수 없어요. 어린 아이에게 주었거든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서에게 주었어요. 이제는 하늘에 속한 빛으로 장자에게 주었다. 구약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대비하는 것이 신약의 복음 선언이어요. 그런데 그 차이를 이해를 못하니까 역사에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를 못하고 지금도 율법을 지키면은 복받을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범하니까 어긴 것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지라고 준 것이다. 넘어지라고 준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 주었다고 성경은 말해요.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잘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를 만났으면은 그들은 쫓겨나지 아니하고 이 언약의 나라에서 탁월한 역할을 할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거절함으로 쫓겨난 것이지요.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은 이방의 권세 아래 있는 소위 저주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셨어요. 이방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은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거든요. 구약 개념은 이방의 권세를 이기면 안식을 누리고 이방의 권세 아래 있으면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어요. 바로 그런 백성을 위해서 오신 것이지 실은 잘 지킨 백성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저주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죄인들, 창기들, 세리들, 그런 사람들이 따랐지요. 그러니까 말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잘 지키니까 내가 왔다. 그렇게 온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가 법정적인 개념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법정적인 칭의 개념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에서 연합되었다 하는 연합 개념이 구원을 설명하는 두 선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것은 구약에서 의의 개념은 출애굽기나 신명기 개념이요. 법을 지키면 의롭고, 그 언약에 삶을 누리는 것은 레위기인데 거기서는 법을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 안에 있고 연합 개념이지요. 구약에서는 항상 두 선을 따라 설명하는데 신약에서도 그것 때문에 어느 때는 칭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어느 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해서 이쪽으로 설명하고 그런 것이어요.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 아니어요. 그러나 우리 신앙고백서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은 천국 가는데 못지키니가 예수님이 오셔서 지켜주었다.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는 개념이어요. 오늘 본문으로 하면 초막절에 가자고 하니가 요새 식으로 하면 주일날 되었는데 예배당 안가겠다는 것 하고 똑같지요. 너희들은 가거라. 나는 안갈란다. 그러면 크게 걸려버려요.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가야 돼요. 그런데 안간다고 그러거든요. 그래 놓고 양심에 찔렸던지 비밀히 가셨지요. 그러니까 만일 그 말을 구약식으로만 읽어버리면 이 사람은 그것만 갖고도 경건한 유대인은 걸려요. 초막절에 안올라가니까. 그런데 그들이 올라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올라간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올라가지 이스라엘의 개념은 아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이 아멘으로 대답하는 의미는 언약을 확증하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니가 감동받았다고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진실로 그러하겠나이다. 하는 맹세적인 말이 실은 아멘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감동받았을 때 아멘이지요. 아멘 하면 좋다는 의미지요. 좋다는 말이 무슨 말이요. 맹세적인 의미로 아멘이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멘 아멘이셔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아들 안에서 성취됐어요.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오셨기 때문에 진리시오 모든 약속은 예수 안에서 아멘이다. 그래서 그는 아멘 아멘 이렇게 자기 말을 시작하는 것이어요.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완결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가 여러분이 그냥 아무 데나 아멘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동의요 재창입니다. 하는 뜻으로 아멘할 것이 아니라 맹세적인 의미로 대답하는 것이 아멘이다. 그래서 교회가 성경을 읽었을 때 아멘하고 대답하는 것은, 구약 같으면 성경을 읽을 때 전부 일어서야 됩니다. 요새는 인제 서서 하기 힘들어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 종일 서서도 잘 들었거든요. 비가 철철 오는데, 그 사람들은 신명기는 초막절에 최소한도 한번씩 전부 읽어야 되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많은 양을 읽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설교 본문 조금 읽는 것도 잘 못참아요. 그래서 그냥 우리는 연설 듣는 식으로 차분히 앉아서 그때는 발도 꼬고 앉기도 하고 그래 갖고 살살 듣는 것이어요. 그리고 말씀듣고 감동되면 아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멘 안할 것입니다. 설교 잘하냐 못하냐 문제에요. 예배한다는 개념이. 그런데 성경은 말씀을 읽는다는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백성은 언약 백성으로 서서 아멘하고 서서 경배해야 됩니다. 특별히 계시록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요. 듣는자들과 그리고 지키는 자들 복수지요. 지금 언약 채결식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예배가 그렇게 듣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설교 본문은 아멘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다른 교인들은 그것을 잘해요. 하도 그냥 쓰잘대 없이 아멘하니까 아예 우리는 안해버리지요. 쓰잘대 없이 아멘해서 유다를 저주해서 그는 마귀니라 해도 아멘 그러고, 마귀는 마귀구먼. 그런데 실은 그 약속 언약에 대해서 아멘으로 화답한 것인데 인제 우리는 아예 그런 것이 없어서 문제입니다마는, 그런데 다른 데는 신앙생활은 묘하게 하는데 묘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복음이 선언되면 어떻게 알았는지 아멘을 잘 맞추어서 하대요. 그러면 예배하기 아주 좋아요.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이 선언되었을 때 가장 좋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끝났을 때 쯤, 그것도 피리 소리가 묘해요. 그것도 나올둥 말둥 하는 소리로 하니가 조금 묘하게 하니까 묘하기는 하는데 아멘은 언약 백성은 마땅히 대답해야 될 말입니다.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마땅히 아멘으로 화답하되 그것은 맹세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하고 나서 일어나면서 잊어버리는데 뭐. 무엇을 기도했는가도 몰라요. 그러니까 갑갑한 일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아멘으로 화답한 것은 언약을 확증하는 예의 대답입니다. 열두 개의 저주문을 한번 구분해 보면은 왜 열두개인가? 십계명처럼 열 개로 해놓지. 명시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요. 한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은 열두 지파에게 지금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고 여섯씩 여섯씩 나누어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열둘을 선언한 것은 한 지파에 하나씩 적용될 만큼 의미가 좋지요. 내용상은 실은 열 한 개 밖에 안되지요. , 끝에는 전부 한거번에 묶어서 저주를 받으리라 했으니까 총 열 둘인데 아마 열두 지파를 대상으로 하니까 열둘이 아니겠는가 그쯤 해석하는 것일 뿐 확실하게 의미부여를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십계명은 왜 열인가? 그것도 해석적인 의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어요. 단지 거기 하나님의 모든 기쁘신 뜻이 완결되었기 때문에 소위 일반적인 열 하면은 차거든요. 그런 의미로 열이다. 그 다음 해석하는 것이지 그들이 수 개념을 그렇게 활용했는지 안했는지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신약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열 뿔, 일곱 머리. 보통 일곱, 열의 숫자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해석이 가능한데 여기서는 열두 지파를 위한 저주이기 때문에 열둘일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열둘을 한번 구분해 보자 그말입니다. 우리들이 십계명은 구분을 잘하지요.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 그 다음 5계명부터는 사람에 대한 계명,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전혀 틀린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신과 인간 그런 개념으로 직접 접근할 것은 아니어요. 그것 보다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대하는 일, 하나님의 왕국이니까. 지배하는 왕도 백성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구약 문맥에서 십계명의 핵심이지 존재론적으로 신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존재론적인 이분법이 아니어요. 항상 나라 언약이지요. 그래서 특별히 4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 이렇게 풀었거든요. 1계명은 예배할 대상, 2계명은 예배하는 방법, 우상 섬기면 안되거든요. 3계명은 예배하는 정신, 말로 거짓말하면 안되거든요. 4계명은 예배한 날, 그래 갖고 예배에다 맞추었는데 그런 개념보다는 구약에서는 가나안 신과는 다른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하나님을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섬겨서는 안되어요. 그리고 백성의 삶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백성의 삶의 요체에요. 그것이 4계명에 특별히 나타나 있지요.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4계명이 제일로 중요하단 말이 그런 말이어요. 그것은 예배일에 대한 개념은 돌판에 새긴 개념은 아니지요. 그 날에 예배일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내가 일하고 쉬었으니 너희들도 일하고 쉬어라. 출애굽기지요. 신명기는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지고 평안을 주었으니 너희 종들에게 그렇게 해라. 출애굽기는 엿새 동안 일하고 칠일에 쉬었으니 너희들도 그래라. 하나님을 따라 일하는데 핵심이 있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다 핵심을 둔 것을 돌판에 새긴 계명은 아니어요. 실은, 돌판의 법은 통치의 법이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개념은 실은 레위기에 있는 개념이다. 그러니가 여기서도 한번 열둘을 나누어 보라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거든요. 하나님은 만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자기 장자로 구별하는 것처럼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장자적인 삶, 언약 백성의 삶을 살게 할려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거룩은 도덕적인 절대 법을 거룩으로 적용하기 보다도 개념은 이방과는 다른 내 백성, 지금 여러분은 세상에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지요. 그런 구분이 핵심이어요. 그러니가 여기서 있는 율법들을 한번 구분해 보라는 말이어요. 말하자면 그전 식으로 구분을 하면 십계명 식으로 구분해야 되겠지요. 열둘이니가 하나씩 십계명하고 잘 맞고 제일 열두 번째는 빼도 되고, 하나가 문제구먼, 그려면 십계명과 잘 맞아 들어가겠다. 하면 우리 개념상은 좋지요. 십계명을 만고불변한 통치의 법으로 이해하니까. 그런데 실은 가나안 땅에 심었을 때는 이제는 가나안 땅 백성을 전부 정복하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주어야 되어요. 그러니까 이 계명은 십계명처럼 일반적인 통치법 개념보다는 가나안 땅의 법 개념이 더 강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인수분해를 해보라 그말입니다. 그랬을 때 여기 보니까 은밀히 우상을 섬기는 자와 그리고 아비를 조롱하는 자를 저주했지요. 왜 그렇습니까? 가나안 땅에는 여호와만 신이고 우상은 신이 아니거든. 만일에 여호와 대신 우상을 섬기면 그는 언약백성으로부터 저주될 것이어요. 그것이 죽음이 될지 안그러면 이방으로 쫓겨날지 그런 의미는 직접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언약으로부터 저주된 것입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항상 그 일을 대신하겠지요. 항상 언약의 머리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조롱하면 그렇게 해라. 저주하고 있지요. 그렇게 해서 언약의 주가 누군지, 섬기는 대상이 누군지 그쪽에다 강조를 둔 것이 여기서 두 명령이다.

그 다음에 명령은 무엇이냐 하면은, 여기 보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명령이 많이 있어요. 지게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하고, 소경의 길을 잃게 하는 자도 저주하고,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하고 그런 저주들이 있지요. 물론 가난한 자에 대한 저주는 더 많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으로 주셨거든요. 모든 형제가 누리도록 기업으로 주셨어요. 그 기업을 빼앗으면 안되어요. 아무리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를 곁길로 인도하면 안되고, 아무리 빼그라운드가 없고 남편도 없어도 그들을 억울하게 판결해서 기업의 땅의 복을 빼앗아서는 안되어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삶과 관계된 법으로 되어 있지요. 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다른 성적인 범죄들이 잡다하게 나오는데 이것은 주로 레위기에서 벌주는 범죄들이지요. 레위기 18장에 많이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성적인 범죄들이어요. 레위기의 성적인 범죄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 구분했을 때 가나안 땅과 애굽 백성은 성적인 그런 범죄 아래 있거든요. 그런 구분과 관계가 있어요. 그 당시 언약 백성을 두고 하는 계명이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읽어 보라고 미리미리 이런 계명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일단은 그러면 여기서 이런 계명을 준 것은 무엇이냐? 여기서 로이드 존스 같으면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나님은 없는 죄를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험도 안한디 경고판을 세우지는 않는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의 본성이 얼만큼 더러운가를 알 수 있지 않느냐. 물론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신학적인 접근이고 역사적인 문맥은 그런 말이 아니라 가나안 땅의 백성이 이 짓을 하고 있거든요. 너희는 그렇지 말아라.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시면서 하시는 명령이어요. 신명기는 그렇지요. 만일 너희들이 가나안 땅의 백성들이 짓는 죄를 짓겠는가? 그 땅이 그 백성을 통해낸 것처럼 너희들도 토해 내치리라. 하는 것이 신명기에서 저주방식입니다. 항상 그 문맥을 따라 읽으라 그말입니다. , 읽어 보니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는 왜 이렇게 꼭같은고, 요새도 동성연애도 있고 별놈의 죄들이 다 있는디 여기도 보니가 똑같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여기서 인간의 죄의 본성을 직접 읽어내라는 말이 아니어요. 신학적인 접근이 어쩌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에 문제다. 지금도 요구하는 것은 핵심이 무엇입니까? 도덕적인 것을 분석해서 거룩해라. 이런 문맥이 아니라 내게 속한 백성으로 거룩해라. 그것이 신약 메시지의 핵심이지요. 구약 때는 땅에 속한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속한 백성으로 모세에게 속한 백성으로 불렀지마는 이제는 하늘에 장자로 불렀지 않냐. 이것이 빛이지 도덕법을 분석하고 연구해 가지고 사람의 본성이 이러이러한 죄들이 많이 있는데 너 그 죄 있는가 봐라.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욕구가 있는가 없는가 보아라. 이걸 검증하라고 요구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게하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 죄를 분석하고 검증해서 내 속에는 욕구가 하나도 없구나. , 기분이 좋구나.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관계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같은 데서도 윤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았으니 너희들이 의로운 백성으로 너희 자신을 계산해라. 의의 병기로 그렇게 드려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리스도의 몸이 됐으니가.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로 지었다는 연합에다 강조를 두고 있지 죄를 분석함으로 접근하지를 않는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죄를 분석해서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은 철학이지 성경이 말하는 관계적인 구원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죄성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있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은 이렇게 살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면 됩니까? 모세 율법을 따라 살면 되지요.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말은 구약 때는 모세처럼 살면은 되는 것이어요. 지금은 어떻게 삽니까? 그리스도처럼 살면 되지요. 그리스도 안에 장자가 되었으니가. 거기다 강조를 두고 있다. 그니까 거룩을 빙자해서 죄성을 분석함으로 우리 마음의 심리를 분석해서 드디어 죄의 본성을 알고 이제는 싸움의 원리를 알고 그렇게 못이긴다.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라. 그것만 진정으로 죄를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그런 욕구가 없어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죄다.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라 그말이어요. 그래서 여기 있는 여러 성적인 죄들은 가나안 땅에 유행한 죄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백성처럼 살면 안된다. 하는 것이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음으로 주신 약속이어요. 그런다. 그 다음에 보면은 이웃을 암살한자, 또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은자, 이 사람들은 주로 언약의 땅에서 생명을 노략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뇌물을 받고 죽이는 자들이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언약의 땅에 통치 질서와 맞아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관원들과 더 관계가 있겠지요. 그렇게 되어 있다. 핵심은 가나안 땅의 복을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가나안 땅의 통치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부모가 대신하니까 그 권세를 모독해서는 안되고 그리고 가나안 땅의 더러움에 물들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니까. 그런 개념이 열두 저주문의 핵심이다. 그런데 왜 복은 한 마디도 없고 저주만 이렇게 말했는가? 물론 28장에 보면 복도 이야기 하지마는 여기서 아멘으로 화답하기는 전부 저주문에 예하도록 대답했거든요. 그러니까 저주가 전면에 들어나 있지요.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더 확대시키고 있지요. 구약 전체가 실은 저주 아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그런 해석이 없어요. 신약에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유일한 저주는 신명기에서 그렇게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인제 모세의 마지막 설교를 보면 이 특징이 더 들어나요. 아직 너희들에게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지 안했다. 그러면서 언약 갱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나중에 모세를 통해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범죄하리라. 그리고 먼 이방 땅에 잡혀가서 거기서 내게 기도하겠는가, 내가 돌아오게 하겠다. 너희들은 언약을 범해서, 범죄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이 이전의 백들을 토해낸 것처럼 이 백성을 토해 내쳐버릴 것이어요. 그것이 신명기에서 저주의 핵심이어요. 언약의 땅으로부터 토해 내치는 것, 그 저주인데 그래도 나는 저를 사랑하겠다. 그런 말이지요. 그것이 모세 약속에 마지막 약속들이어요. 그것은 시내산 언약과 이 신명기 언약을 범법함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약 갱신이 거기 드러나 있어요. 아마 그래서 이 마지막 언약채결식 가나안 땅에서 언약 채결식인데 저주문으로 언약을 채결하는 것이다. 저주가 강조되어 있다. 이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겠지요. 분명히 여섯 지파는 복, 여섯 지파는 저주, 하옇튼 이스라엘은 결정해야 되어요. 이 문제에 아멘해 주어야 됩니다. 들어 보니가 말은 전부 저주문만 강조되어 있고, 아에 갈라디아서는 구약 전체를 저주 아래 가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 그때는 죄의 권세 아래 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명령하는 명령들은 실은 가나안 땅의 언약 백성의 삶, 가나안 땅에서 언약의 백성의 삶과 관계있는 율법이다. 여기서 십계명과 맞추어 들어가면은 7계명만 무지하게 강조되어 있고 종류가 많해요. 20-23절까지 되니까. 그리고 죽일려는 자는 24절 살인하지 말라. 한 계명에 들어가고, , 두 개 들어가고, 그리고는 도적질 하지 말라. 고아나 과부나 객, 17,18,19절 들어가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 하는 계명은 5계명이면은 그러고 나면 거짓말 하지 말아라. 무엇 하지 말아라. 여러 개가 빠저 있지요. 그러면 짝이 안맞지요. 그런 식으로 풀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것을 범한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저주를 담당하사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시고 하늘을 기업으로부터 주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을 상속받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며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면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한다. 이 복을 이렇게 주셨다 그말입니다. 구약 때는 돌에 새기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함으로 언약의 땅을 성별하고 복을 주신 것이어요. 주셔도 가나안 땅의 복이어요. 만일에 이 법을 어기자 말자 이 언약의 복으로부터 저주될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통해낼 것입니다. 죽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렇게 되겠지요. 그것이 구약에서 복을 주신 방식이어요. 복을 주셨어도 범하면 저주하리라. 이런 빛 가운데 두셨어요. 만일에 잘 지키면은 그 가운데 살리라지요. 그 가운데 사는 것이어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백성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그 땅을 통치하시고 복을 주신 방식이어요.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으로 범했는가 안범했는가는 상관 없이 옛 언약 백성은 저주 아래 있었다. 아브라함의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만민에게 주시도록까지 성령을 주시도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두었고 오시도록까지 인도했던 것이 율법인에 그것은 저주 가운데 가둔 법이었다. 이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백성을 위해서 왜냐하면 예수님은 할례자의 약속을 이루고 무할례자의 구주로 오셨거든요. 그는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할례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모두의 구주로 오셨어요. 그런데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있거든요. 그래서 율법의 수종자로 율법 아래 나셨다. 그도 죽음의 권세 아래 갇힌 분이시지요. 그렇게 해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셨다.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가 왔는데 성령을 만민에게 주는 복이다. 이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지요. 구약 때는 모세 제도 안에 있는 복이지요. 이 성령은 율법에 갇힌 복이 아니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다. 이 복을 주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을 상복받았다. 가나안 땅의 썩을 것이 아니라 하늘을 상속받았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생명의 교제를 이룬다. 화목제물을 갖고 갈비짝이나 하나 얻어 먹고 그정도가 아니어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해서 그 교제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범하면은 저주받으리라. 그런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빛 가운데 있다. 만일에 범하면은 우리에게 속향자가 있는데 속죄제물이 있어요. 우리가 회개하면은 그의 피로 우리를 말갛게 씻으신다. 왜냐하면 행하면 살리라는 방식으로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세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행하면 살고 범하면 떨어지는 그런 규칙 아래 있지 안해요. 구약 때는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의 복을 못누려요. 지금은 그렇게 믿음 안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들은 이제 사랑의 계명 아래 살고 있다. 어느 것을 범하면은 나가고 지키면은 복받는 그런 규칙 아래 있지는 않지마는 우리들은 그것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 아래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그랬어요. 그의 계명을 떠나서 그를 누린다는 말은 어리석은 말이다. 성경 자체가 부인해요. 그래도 어느 것이 주를 떠났는지 우리가 평가할 기준을 구약처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은 생명의 원리지 그것을 떠나서 사는 방법은 실은 없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가족공동체에서도 그렇지요. 싸울 때는 네가 옳네 내가 옳네 해도 조금 정신이 들면은 내가 잘못이구나. 그러지요. 자식들이 잘못하면 성질날 때는 한참 해도 꼭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아서 후회가 막심하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하고 싸울 때는 그렇지 안해요. 더구나 이북하고 싸울 때는 글안해요. 일본하고 축구만 해도 옛날 원한이 사무처 갖고 막 죽자 살자 이길려고 그러지 안해요. 다른 나라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일본에게는 그러지 안해요. 그런데 가족끼리는그렇지를 안해요. 왜냐하면 사랑이 여전히 지배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계명 아래 있는 사람들은 너 그러니 나도 그런다. 그런 계명으로는 안하고 나는 그래도 저주 안받을 정도로 계명을 지켰구나 안심하도다. 그런 식으로 사는 백성은 없다. 그러나 이 사랑의 계명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전혀 다른 상황 아래 있다. 그렇게 이 본문을 해석하면 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은 의미를 새롭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 의미가 이 방식으로 가나안 땅에 복을 주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의미로 이것을 우리의 책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런 말이어요. 그렇게 했을 때 구약의 한계는 벗겨지는 것입니다. 구약 자체를 들어다 보아서 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신약의 빛 때문에 구약을 알 수 있다 그런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읽어야 되어요. 이것을 읽어 놓고도 구약을 문자대로 읽고는 아, 나는 이것은 했으니까 저주는 안받고 그러고 있으면은 그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어요.

이제 신명기가 28장이면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끝나고, 29-34장입니까. 그러면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끝나면은 신명기도 끝납니다. 긴 율법의 강론이기 때문에 일일이 그것을 이해를 해야 되어요. 그런데 민수기 같으면 사건적이라 묶어버릴 수 있고 쉽게 설명할 수 있고 그런데 출애굽기, 특별히 모세 율법의 신명기는 많은 계명이 있기 때문에 읽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살다가 고생스러우면, 그리고 동네 얘기들을 보면 너는 행복할 때다. 부모 가슴에 있을 때가. 학생들 보면 그래도 돈타 쓸때가 제일로 쉬운 때다. 너도 돈벌고 살아보아라. 아마, 고생한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편하기는 편해요. 얘기 취급하지 어른 취급하는 삶은 아니지요. 삶의 양상이 전혀 달라진 것이어요. 그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자기 손으로 돈벌이 하니까 어렸을 때 부잣집 아들이 막내같이 살면 갑갑하지요. 옛날에 그랬겠지요. 그래도 지금은 가난해도 어른으로 양식을 먹는 것이고, 이전에는 행복했어도 어린 아이로 먹었을 때에요. 어렸을 때는 사람 취급 안받았을 때에요. 그것을 그리워 해서는 안되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이기라고 아주 최전방에 세워 놓았거든요. 군인들도 당신은 저 후방에나 근무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공중에 권세잡은 자와 싸우라고 부른 사람은 교회 밖에 없어요. 구약 때는 이방인하고 싸우라고 그랬지 하늘의 권세자와 싸우라고 이렇게 부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왕이 그 적을 이겼기 때문에 싸우라고 그런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지금도 구약을 자꾸 신약에다 문자적으로 적용할려고 그러고 그것이 복이라고 선언하고 그런 복이 많으면 부흥되는 교회라고 부러워 하고 있어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 안믿는데 아무 환난이 없고 잘되면은 나는 왜 예수 믿고도 이렇게 고생이 많은고, 살살 부러워 할려고 그래요.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렇다. 새로운 빛을 바라보나니, 그래야 죽음까지 여러분을 미혹하지 못하는 것이어요. 영광의 빛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살라 그말입니다. 구약 때는 우리처럼 살면 낙심해 버려요. 이방은 잘사는데 우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젖과 꿀이 흐르냐? 아이고 그 신을 한번 연구해 보자. 여호와 보다 훨씬 큰 신이거든. 연구하는 것이어요. 그 제단 모양도 본떠 오고. 그런 것이 지금 교회지요. 복만 전해서는 높아질 것이 없어요. 그러니가 무엇이겠어요. 다른 것을 꾸어와야 되겠지요. 그래서 적극적인 사고방식 무엇이든지 전부 끌어다가 인제 하는 것이어요. 주일학교 같으면 동기부여 해가지고 말한 달란트 시장이지 학교에서 상주는 식으로 전부 하는 것이어요. 쿠폰 나누어 주는 것이지요. 그것 받았다가 인제 백만 달란트 되면은 주일날 가서 상타갖고 오는 것이어요. 학생들이 그것 바꿀려고 많이 와요. 그건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는 의미하고는 전혀 달라요. 인제 그런 방식을 많이 도입하고, 연말이면 여전도회 상주지요. 금반지를 줍니다. 전도왕상으로. 그래야 무슨 상받은 표가 있지. 내 봉사했는데 교회에서 한번도 광고도 않고 알아주도 않고,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무엇 하나 하니가 큰 일을 한 것처럼 알아주고, 나는 내 죽어라고 했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더하라고 그러고. 이런 불공평한 일이 없다고요. 그런 식으로 자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리스도의 낮아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전혀 세상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그것이 소위 교회 부흥의 동기부여처럼 설명되고 있어요. 그런 것은 전혀 복음이 아니어요. 말만 예수 이야기지. 그런 것을 교회 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도 완전히 바꾸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옷입혀졌습니다. 그 영광은 빼앗길 것도 없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것을 누리라 그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어요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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