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29-30

찬미예수님 2024. 11. 16. 07:22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29-30

 

29장입니다. 신명기 2930장은 언약 갱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1장에서는 언약의 후계자를 세우고 언약의 법을 기록해서 레위 제사장에게 주고 매 7년마다 그것을 읽도록 함으로 언약을 확정하는 내용이 31장입니다. 그리고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를 지어서 그들이 비록 배교해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사랑하심을 알 수 있도록 노래를 지어서 기념하도록 한것이 32장이고, 그리고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과 34장에는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 그런 이야기로 끝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29장과 30장은 언약 갱신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해야 좋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장을 구분한대로 하니까 오늘은 29장에 해당되는 부분만 강론하겠습니다. 29장1절을 보면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29장은 실은 모세가 행한 세 번째 설교인데, 이것이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이하에서는 그것을 설명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들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분명히 모압 평지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으니까. 모압 땅에서 맺은 언약이라. 이건 아주 타당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2930장만 모압 땅에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신명기 전체가 지금 모압 땅에서 모세가 한 세 편의 설교거든요. 그런데 다른 데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호렙에서 맺은 언약이 이러하다. 이런 말을 쓰고 있어요. 특별히 5장2절부터 3절과 비교해 보시면은 5장2절을 보면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지요. 그리고 나서 십계명이 무엇인가, 7절부터 쭉 설명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말입니다. 분명히 신명기 자체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한 세편의 설교에요. 그리고 인제까지 우리가 5-28장까지 강론을 했지마는 그 내용은 분명히 가나안 땅을 염두에 둔 언약의 법들이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가 그런 말씀입니다. 29장과 30장은 호렙에서 여기 있는 백성과 맺은 것이다. 또 후에 있는 백성과 맺은 그런 말을 하고, 5장에서는 우리 열조와 맺은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맺은 것이다. 호렙 산에서 맺었다. 모압 평지에서 맺었다고 하지 않고 호렙 산에서 맺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면 그 앞에 4장46절을 보시면은 요단 동편 벧브올 맞은편 골자기에서라. 분명히 규례를 선포했는데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호렙 언약이라고 5장이하에는 이야기를 하고 십계명부터 쭉 선언을 해요. 당장 모르시면은 안알면 되어요. 시험칠 때도 놔두고 쉬운 것을 풀다보면 자동으로 알게 되지요.

그 다음 2-9절인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쭉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 회상하는 일도 4장과 비교를 해보면 좀 차이가 납니다. 4장32,42절은 차이가 납니다. 왜 그러냐? 여기 28,29,30장 이런 부분들은 주로 어디가 있느냐 하면 신명기에서는 4장에가 있어요. 왜냐하면 모세의 설교가 세편으로 되어 있는데 1-4장까지 그리고 5-28장까지 그리고 29-이렇게 나눌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인제 1-4장까지는 무엇이냐?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여기까지 인도했지 않냐. 그리고 복을 주었지 않냐.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대다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 첫 번째 설교에요. 두 번째 설교는 언약의 법을 세웠다는 것이고, 세 번째 설교는 가나안 땅의 언약 갱신이 강조점이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끝내면서 4장 제일 끝에다가 가나안 땅의 복 이야기를 쭉 하고 있지요. 그래서 4장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여기 28, 29, 30장이 이런 데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거기 주로 나와 있어요. 그런데 4장32-40절은 그 복을 이야기 하는데도 이제까지 행하신 언약의 일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회상하는 데도 이러이런 복을 많이 주었다는 데다 강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실은 언약을 채결하는 데다가 강조를 더 많이 두고 있어요. 어디다 강조를 많이 둡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 백성이 누가 있느냐. 내가 너희를 불꽃 가운데 친히 말슴했지 내 말을 들으라고. 그리고 분명히 애굽에서 건져내고 가나안 적군을 쳐서 주었다. 그 말이 있는데 강조점은 내 얼굴을 보고 내 소리를 듣고 산 백성이 어디 있느냐. 너희들 밖에 없지 않느냐.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그들을 언을 채결한 그쪽에다 강조를 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회상했을 때 강조점이어요. 4장이 그렇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강조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제까지 애굽에서 인도해서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서 이제까지 쭉 인도한 총 경로들을 말하는 것이 여기서 회상하는 특징입니다. 그러니가 똑같은 일을 인용을 해도 어떤 문맥에서 인용하느냐에 따라서 푸는 방식이 달라져 있지요. 항상 근접 문맥을 보라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2-9절에서 회상하는데를 보면은, 2절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바로의 목전에서 그랬지요. 3절을 보시면 큰 이적과 기사를 했어요. 그런데 아직 깨닫는 마음을 안주셨다. 5절을 보면은 40년 동안 인도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여호와께서만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시려고. 그리고 또 어떻게 했습니까? 8절에 기업을 주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회상하시는 그 일들을 쭉 보시면은 몇 가지입니까? 첫째 애굽에서 건진 일, 두 번재 광야를 통과케 하신 일, 세 번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일, 그런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 인도하신 경로에다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런데 4장에서는 그런 말이 강조가 아니라 4장을 보면은 32절부터 보면은 내가 있기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쭉 한번 생각을 해보아라. 이 세상에서 어떤 국민이 불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산 백성이 있냐. 그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냈지요. 그래 36절을 보면 또 하늘에서 음성으로 너희에게 말씀했지 않냐. 그들을 건져낸 이야기와 시내산에서 언약 채결한 이야기만 반복된 것이 4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회상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건져낸 일, 광야를 통과한 일, 적군을 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준 일, 지금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면서 말하기 때문에 그쪽에다 강조를 두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얼만큼 너 때문에 고생했냐, 그런 것을 알릴 때도 가령, 자식이 돈을 푼푼히 쓰면은, 돈 많이 쓰는 것을 강조할 것이어요. 너 중학교 입학금 얼마, 고등학교 입학금 얼마, 그리고 사이 사이 고생한 이야기도 하겠지마는 내가 돈이 많해서 그 돈을 준줄 아느냐. 고생 많이 했어야 하면서도 그 돈 준 이야기를 몇 번 하겠지요. 그런데 또 철없이 돈 주라고 그러냐. 그러면 딱 맞아들어가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가만히 보니까 세상 살기가 얼만큼 어려운 줄을 모르고, 부모가 저 때문에 얼만큼 고생한 줄을 모르고, 가만히 보니까 그쪽이 틀렸거든요. 그러면은 가끔 중학교 입학금, 대학교는 훨씬 많고 이 말도 가끔 쓰겠지마는 그 돈을 내가 얼만큼 뼈빠지게 번줄 아냐. 이쪽으로 자꾸 쓰겠지요. 똑같은 알을 인용할 때도 어떤 목표에서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그 강조점이 달라지지요. 그것이 근접 문맥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4장도 한편의 설교로 맞추고 있어요. 애굽에서 건져내서 여기까지 왔지 않냐. 어디까지, 언약 채결이 인도의 핵심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설교는 너희가 언약을 채결했지 않냐. 이렇게 이렇게 법규가 쭉 나열되어 있어요. 세 번째 설교는 너희들은 이 법도 못지켜서 죽는다. 그래도 내가 너희들을 다시 살려주마. 언약 갱신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거든요. 그렇게 했을 때 마지막에는 내가 너희에게 얼만큼 큰 복을 주었는데 그래도 넘어졌느냐. 그래도 넘어졌느냐. 이 말을 하겠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애굽에서 인도하신 경로들을 쭉 이야기하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그런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제까지 하신 일 하고 여기 저기서 뽑아서 맞추어버리면 품목은 맞을련지 몰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문맥은 떠나버리기 때문에 옳지 않아요. 그것은 사복음서나 모세 오경만 조화적인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똑같은 말도 똑같은 책에서도 말하는 배경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르니까 그 차이점을 붙잡아야 소위 그 문맥, 흐름을 안다 그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아버지는 너 때문에 뻐빠지게 고생했다. 이 말을 할려고 고등학교 등록금 얼마 하는데, 아들은 돈이나 계사하고 합게 얼마, 이러고 있으면 말귀를 전혀 못알아 듣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똑같은 사실도 그 문맥에서 어떤 것을 강조할려고 그것을 사용하는지 보고 읽으라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4장과 비교해 보시라 그런 말입니다. 이제 회상하는 이유는 4장에서도 똑같은데 4장35절에서도 여호와는 신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할려고 4장35절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 6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신줄을 알게 할려고 그랬다. 하나님을 알게 할려고 그랬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나만 너희 하나님이다. 나를 따르라. 그것을 알게 할려고 그랬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하기 전에 홍해에서부터 시내산까지 많은 은혜를 베픈 것은 나다. 그걸 알게 할려고 그렇게 했지요. 그리고 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채결했지요. 그 다음,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 주지 아니하셨다. 그런 말은 무슨 말인가? 4절에 보면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 이것은 깨닫는 마음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하면은 보는 눈, 듣는 귀겠지요. 그러니가 마음은 어떻고 보는 눈은 어떻고 그런 것을 풀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같은 말을 풀어주고 있는 것 뿐이다.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 주지 안했는데 그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안했으면 범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안해요. 그런 말을 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이 처음 설명했던 말을 제일 끝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29절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영구히 속했는데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슴을 행하게 할려고 그런다. 거기서 결론을 맺어주고 있지요. 그렇게 나중에 풀면은 되겠습니다. 이것은 어려우니까 지나간 다음 나중에 합시다. 10-22절은 언약을 채결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14절에서도 문단을 구분하는 까만 글자가 있지마는 이건 인쇄업자들의 편리고 꼭 그대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10절을 보면은 언약의 대상은 누굽니까? 10-11절을 보니까 나무 패는 자까지 장로부터 그래 갖고 전부지요. 하나도 빠진 사람이 없어요.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자들입니다. 물론 여기 대표자에게만 언약을 채결해도 언약은 언약이어요. 대표자가 언약을 시행하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모든 사람의 그 삶을 누리는 것과 강조를 하기 때문에 거기 종들까지 전부 포함시켜 놓았어요. --하며 아이들은 여기 설 필요가 없지요. 어른들만 서면 되겠지요. 그런데 아이부터 여자 남자 물긷는 자, 나무패는 자 전부 너놓았어요. 왜냐하면 이 약속의 말슴이 모든 사람에게 가나안 땅에서 시행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언약과 맹세의 관계는 언약은 언약이고 맹세는 맹세인데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친히 맹세로 보증하신 언약이어서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맹세는 같은 것이어요.

언약적 관계를 보면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13절에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려 하심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게 한다. 그것이 본래 언약적인 관계에요. 그러면 그전에는 아니었는데 인제 되게 한다 그말입니까? 그전에도 기었고 그전에 시내산에서도 됐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되겠지요. 그런 관계들입니다. 이것은 그전에는 아니었는데 어느 기간 쭉 순종하면은 좋다. 인제 내가 삼아주마. 하는 입회 자격으로 이해하지 말라 그말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조상들에게 약속했거든요. 그 약속을 점진적으로 시행해 나간 것 뿐이지 그러니까 아들된 자를 더욱 아들되게 하는 것이지, 아들된 자격이 없었는데 80점 맞았으니까 인제 내 아들 삼아주겠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말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것이 본래 언약적인 관계입니다. 여기 14절을 보면은 이 언약과 맹세는 너희에게만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게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 말은 여러분이 요한복음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요한복음 17장에서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할 때 그렇게 말씀했지요. 여기 이 사람들 뿐 아니라 이 사람들을 통해서 믿는 자들도 하나님이 거룩케 하시고 보호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 왜 후손에게까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대대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만일에 대대로 확증되지 안했으면 어느날 바꾸겠지요.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아직 여기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똑같이 이 법이다 했을 때는 그 법이 대대로 확증됐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어요. 첫째는 수, 대상을 확대시켰지요. 아이, 어른, 여자, 종들까지. 그 다음 한번더 반복하기를 여기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아직 여기 서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현재적으로 모든 대상에게 확대시킬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미래까지 확대시켜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구히 확정된 의미로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해놓고는 16-17절에서 괄호를 쳐놓고 무슨 말을 넣어 놓았어요. 우리가 애굽 땅에서 어떻게 거하였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지 않느냐. 또 너희가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여기 16-17절은 내용상은 오히려 18절과 더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15절과 연결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 너희들이 이전에 어떻게 이방의 권세에서 종살이했던가, 내가 그 나라를 심판했지 않느냐. 그 나라에 신들이 있지 않냐. 내가 그 신들도 심판했지 않냐. 그런데 앞으로 너희들이 그런 나라를 또 섬기고 그런 신을 섬기려느냐.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그 말을 할려고 괄호를 넣고 있어요. 그래서 그 괄호 본문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서 괄호 속의 말씀의 의미는 이전에 하나님이 애굽의 권세와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는 것을 너희가 보았지 않느냐. 또 그것을 섬기려느냐. 그 언약 채결의 전제로 이전의 일들을 괄호 속에 묶어서 정리해 주고 있는 것이어요. 언약의 내용과 경고와 저주는 무엇이냐? 18절부터 보면은 너희들 남자나 여자나 누구든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을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숙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팍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질투하시는 불로 그들을 그 위에 붓게 할 것이다. 필경은 그들이 망할 것이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들에게 화를 더하실 것이다. 그런 말을 21절까지 하고 있지요. 그 다음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기서는 나는 네 하나님이니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실은 언약의 내용이지요. 왜 다른 신들을 섬기면 안되겠어요. 그 나라와 그 신들이 어떻게 망했는가를 잘 보았지 않냐. 그런데 또 다른 나라 신들을 섬기려고 그러냐. 그러지 말아라. 그 말이지요. 경고는 무엇입니까? 멸망하리라. 저주하리라. 19절에 멸망시킬 것을 염려하라. 그런 말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어느 정도 강팍하게 그런 일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보니까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이 말은 무슨 말이겠어요. 다 타져도 나는 안타진다는 말이겠지요. 다 죽어도 나는 안죽는다고 그렇게 마음을 강팍케 해서 말을 안들어요. 저주의 말을 듣고도, 경고는 저주하리라. 그런 말이지요. 여기서 독초와 쑥의 뿌리는 무엇이겠어요. 다른 민족중에 신들을 섬기자. 하는 것이 독초고 쑥의 뿌리이겠지요. 우리는 쑥이 건강에 좋은데 쑥 뿌리는 얼만큼 나쁜지 모르겠어요. 이 쑥이 우리 나라 쑥인지 말하자면 가나안 쑥인지 잘 모르니까 약초는 잘 모를 것이어요. 하여튼 이것은 굉장히 쓴 것이어요. 임모초처럼. 그리고 한 마디로 독이지요. 독초와 쑥의 뿌리니까 독초나 쑥의 뿌리는 같은 개념이지요.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하늘에서 별이 물샘에 떨어지면은 그 별의 이름은 쑥이지요. 물이 쓰게 되어서 죽게 되더라. 그것이 구약의 표현방식들이어요. 그러니가 우리가 쑥 전문가가 안되어도 그 문장을 읽어보니까 그냥 알 수 있겠지요. 쑥보다 더 쓴 것이 임모초고 쑥도 잎빠리는 약용이고 뿌리는 써서 못먹고 그러니까 아 쑥의 뿌리가 했구나. 이렇게 한약방처럼 뿌리의 용도 이파리의 용도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것이 주석 책에 있으면 읽지 말라고요. 전혀 필요 없고 여기 있는 것만 쑥의 용도에요.항상 문장에 나타난 것만 그 의미입니다. 항상 많은 다른 많은 의미가 있을지라도 문장에 나타난 것만 그 의미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독초나 쑥의 뿌리는 같지요. 이런 것은 비유법인데 다른 신을 섬기도록 살살 미혹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항상 그 문장에서 단순하게 읽으라 그말입니다. 그것을 그 나라 식물학을 연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 같으면은 쑥의 뿌리다 해갖고 봐라 성경에 쑥이 나쁘다고 했지 않냐. 그런데 우리는 그것은 안받아. 쑥이 좋다고 먹어. 근본주의 같으면 쑥이 분명히 나쁜 것인데. 그전에 기도원에 갔는데 어떤 양반이 폐가 나빠요. 그 산에 뱀이 많거든. 몇 마리 잡아 준다고 그랬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적으로 살아야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고. 그러면 뱀집 원장은 뱃속에다 사탄도 많이 잡아 넣겠네. 그러니까 우리 나라는 성경 자체가 건강법으로 그대로 막 연결해버리니까 참 갑갑하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제일로 추천할 것은 우리 김대성 집사 꿀이어요. 꿀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니까. 사람들이 갑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여기 있는 문맥 이야기만 읽으면 된다 그런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직접 연결해서 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저주는 어떤 의미냐. 우리는 저주는 당장 지옥가는 것으로 생각해요. 항상 저주라는 것은 그 언약의 복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까지 갈 때는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저주지요. 그것이 민수기 저주에요. 신명기의 저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언약의 복으로부터 뽑혀서 던저버리는 것이 저주예요. 언약의 땅으로부터 뽑히는 것은 빨리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가난하기도 하고 다 포함되지요. 언약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장수하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방 땅에 던져버리면은 그것은 완전히 저주가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무엇이라고 저주를 말합니까? 여기 20절에 보면 이런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의 불은, 이 분노는 질투의 불이지요. 어떤 질투냐 하면 다른 남편을 보면 질투하지요. 여호와만 남편이고 아버지인데 여기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절대법의 개념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이 성경의 죄의 개념이어요. 우리 이방인들도 유대인들도 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다는 것이 핵심이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 죄목을 가지고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항상 그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런 말이어요. 그러니가 여기서 저주를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필경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구별하여 가지고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어떤 저주? 이 신명기에 기록된 저주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뽑아서 그들을 언약의 땅 밖으로 던저버리는 것이어요. 그리고 죽이는 것이겠지요. 항상 저주라는 개념이 다 그런 말입니다. 지금 그리스도 시대에 받는 저주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밖으로 던짐이지요. 그러니까 구약 때는 이스라엘이 휘장 밖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려요. 그것이 복이어요. 그러나 그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다 저주지요. 그래도 나는 이방인은 아니고 유대인 정도는 되는데. 그런 말이 합당치 않다. 구약 때는 제사장이 아니면 레위 지파처럼 살고 레위 지파가 아니면 일반 백성처럼 살고, 남자가 아니면 여자처럼 살고 그런 간격이 있어요. 물론 그런 것도 일종의 저주는 기여요. 제사장이 나가는 곳에 레위 지파는 못나가거든요. 나가면 죽어요. 그런 의미로 일종의 저주는 되지마는 자기 위치에서 자기 복이 있지마는 지금은 모두를 그리스도 안으로 불렀고 모든 간격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저주 밖에 다른 이등급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저저예요. 약혼했다가 끝나면 약혼 파혼이고, 결혼했다가 끝나면 이혼이지요. 그리고 약혼도 아니고 결혼도 아니고 만났다가 해어지면 그냥 안만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항상 저주의 핵심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죽은 뒤로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성경이 직접 밝히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물론 죽은 뒤로 저주된 사람은 그 당시에 지옥 갔겠지마는 성경은 그들의 운명이 죽은 뒤로 영혼이 어디로 갔냐는 운명을 검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그 복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역사적인 간격을 항상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지요. 그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어요. 저주는 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저주밖에 없어요. 그 저주는 구약의 저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저주예요. 왜냐하면 더 큰 복으로부터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저주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주를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주저, 그것으로 더하겠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 그 이름을 제거해버리겠다. 28장에도 저주가 있었지요. 그런 저주를 말한다. 가나안 땅으로부터 배제하는 저주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이름을 빼앗아버리는 저주다. 22-29절을 보면은 이 저주가 어느 정도의 저주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황무지가 되어버리지요. 23절을 보십시오. 소돔 고모라처럼 되지 않습니까. , 언약의 땅과 백성의 저주의 모습을 보면은 언약의 땅은 완전히 소돔 고모라처럼 되어버렸지요. 그리고 언약 백성은 어떻게 됐습니까. 28절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진노아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종이 되게 하지요. 그래서 언약의 땅은 소돔 고모라처럼 되고 그 백성은 이방의 종이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모습이어요. 언약의 땅을 저주하신 이유를 또 설명해 주고 있는데 누가 아느냐 하면은 그들만 알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일을 다 알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25절을 보면은 24절에 왜 이처럼 하나님이 분노하셨느냐 하면은 25절에 보면은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세우신 그 언약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 그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주하신 이유는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죄는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핵심이어요. 그 죄도 관계적인 것입니다. 죄를 소위 법률적으로 연구불변한 법으로 확대시켜서 이 절대적인 기준에 도달하겠느뇨. 몇 점짜리. 그런 계산은 없고 항상 관계적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배반은 어떤 배반입니까?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율법 어긴 핵심이어요. 저주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묻는 자들은 22절에 너희 자손과 원방에서 온 객들, 그리고 24절에 열방의 사람들도 말을 들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놀라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복을 통해서 만민에게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저주를 통해서도 만만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나님이 세상에 던져버리겠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저주의 모습을 말씀하신 목적은 왜 그렇습니까? 29절 제일 끝에 있지요.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시려고,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들을 하고 있느냐. 물론 예언적인 말이니까 이렇게 되기는 될 것입니다. 하고 있는가? 제발 그러지 말고 지키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노래까지 지어 주었어요. 예라 버려먹은 백성들아. 노래까지 지어 주었어요. 나는 너희에게 잘했는데 너희는 그러느냐. 그 노래를 불러요. 노래는 안잊어버리지요. 노래는 잊지 말라고 한 것이 증거예요. 찬송가는 1절 알고 2절부터는 잘 모르는데, 그 유행가 가사 같은 것은 한 10여년이 지났어도 버스 타고 가다가 경음악이 나오면 목포에 눈물, 조금 알 듯 하지요. 노래는 그렇게 안잊어버려요. 아마 교회에서도 찬송가를 찬송가가 제일로 빨리 좋아져야 될 것인데,

그러면 우리 하나님게 속한 오묘한 일은 무엇이냐? 또 이스라엘에게 영구히 나타난 일은 무엇이냐. 여기서 여러분이 눈감고 연구할 것이 없고 그 문장에 있는 말을 말하면 되어요. 항상 문장에서는 자체 설명을 안하면 모르는 것이고 자체 설명을 아하면 물어볼 것도 없고 대답할 것도 없고. 그것은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것이니까. 그러니까 본문만 왔다갔다 읽으면 된다 그말입니다. 단지 다른 것을 비교해 보는 것은 차이점을 알려고 비교해 보는 것이지 여기에 있는 의미를 해석할려고 다른데서 끌고 올 것은 없어요. 다른데서 끌고 와야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부족한 문장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 영구히 우리에게 속하고 자손에게 속했다. 무엇이 속했다고요. 뒤에 설명하기를 이 율법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이 속했지요. 지켜라.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영구히 속한 나타난 일, 나타난 일은 영구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고 무엇입니까? 율법의 말슴을 지키야되겠지요. 나타난 일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일이 나타난 일이어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켜야 될 것이어요. 그러면 나타나지 않은 일이 오묘한 일이지요. 비교시키고 있으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그랬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일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4절에 보니까 깨닫는 마음 보는 눈, 그런 것은 오늘까지 안주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일이 오묘한 일이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일은 나타난 일이고 영구히 지켜야될 일이어요. 우리 신학적으로 은혜는 하나님께 속하고 모든 지킬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식이어요. 그것이 이 문장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한 장 넘기면 30;6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것은 어느 때입니까? 그들을 다시 돌이킬 때는, 그런 말이지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말씀을 안지키면 저주를 받을 것이어요. 그러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면은 어떻게 합니까? 만일이 이전처럼 깨닫는 마음을 안주시면 결과가 똑같겠지요. 깨닫는 마음을 주시겠다. 하니까 그것이 오묘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일은 오묘한 일이고 이스라엘이 해야될 일은 나타난 일이고 율법이어요. 하나님은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니까. 그런 말입니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그런데 과학적인 지식은 뭐 임금이 옛날에 아이스크림 먹었습니까. 그래도 유명한 사람 아니어요. 그 문화적인 차이는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일은 등한히 하면 안됩니다. 목사를 세우신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여러분은 모세처럼 아이가 아닙니다. 장성한 아들인데 그 은혜의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게 하기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여러분이 항상 목사만 의지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목사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도록 은혜의 말슴으로 봉사하도록 목사의 직무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에 세운 은사는 무엇이냐? 목사직이라고 에베소서는 말을 해요. 그렇게 중요하지마는 그것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도록 세운 것이지 항상 작은자는 큰자에게 물어보고 하는 모세 시대로 여러분을 둘려고 그런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가 여러분이 항상 목사에게 묻기만 하고 있는 것은 경건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앚주 불경건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이미 너희들은 스승이 되어야 되겠는데 복음의 초보를 닦아야 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경건인줄 알고 있어요. 물론 여러분이 나이 20살 되었다고 어른이 됐으니 인제 아버지께 묻지 말자. 아버지에게 물으면 우리 아내가 마마 보이라고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스무살 짜리가 장가 가갖고 생전 물어보지 안해요. 지가 어른된 줄 알고.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어요. 물론 법적으로는 어른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어른이 됐지마는 이전처럼 아이처럼 물으라는 것이 아니어요. 어른이니까 물어야 되지. 그런 의미로는 목사에게 물어야 되지마는 여러분이 모세 제도 식으로 여러분을 스스로 낮추지 말라 그말이어요. 목사의 직무를 알면 더욱 묻고 더욱 도움을 받아야 되겠지마는 모세 식으로는 낮추지를 말라 그런 말입니다.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 주지 안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깨닫는 마음을 안주었지요. 왜 그랬느냐.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말을 안들었거든. 신명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안들었어요. 그것이 한 마디로 깨닫는 마음을 안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양태에요.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은 하나님이 책임을 전부 져야 되어요. ? 하나님이 안주셨기 때문에 못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 말이거든요. 가령 여러분이 어린 아이를 대할 때는 어린 아이를 대하는 방식으로 해요. 그건 아버지가 할 일입니다. 어린 아이는 나는 어른이 안되었으니까. 하고 죄를 지으면 안되어요. 그는 어린 아이에게 속한 일만 잘하면 되어요.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고 아들은 아버지가 하신 일을 따라 응답해서 지키면 그만이어요. 그것이 사람이 사는 방법이지요. 모세 때는 신약으로 비추어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모세 때는 다 사람들이 죄의 권세 아래 있었지요. 그들은 모세 율법 아래서 양육을 받았지요. 그들은 모세 율법만 지키면은 되지 우리처럼 살라고 한 적이 없어요. 모세 율법에서는 모세 율법에 속한 것만 요구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묘한 일을 행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묘한 일을 행하신 방식대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하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는 나타난 대로 거기 복종하면 되어요. 그것이 구약에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신약 시대 설명 방식으로 하면 더 이해가 잘 되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넘어졌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셨으니까 넘어졌지. 다 우리 아버지 잘못이어. 그런 것은 칼빈주의는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안주신 것은 못하니까. 하나님이 해야 내가 뒷따라 가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그런 대립 구조가 아니라 언약적인 관계를 말한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은혜의 일이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오묘한 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복종하면 되어요.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 복종하면 되고 어른은 어른으로 복종하면 되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처럼 우리는 죄 아래 있었으니까 하고 핑계하면 안되고 죄 아래 있었을 때는 모세 율법만 그들에게 요구했다. 신약에서 모세 율법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죄의 사망의 법이라고 그러지요. 그들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 가운데 인도하셨거든요. 가령 간음하지 말라. 다른 사람 아내만 안빼앗으면 되어요. 그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적용이어요. 그들은 그렇게만 살면 되지 우리처럼 요구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핑계할 수 없다. 광야를 걸을 때는 그들에게 특별한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그들의 생명으로 의지하면 되어요. ? 거기서는 그것만 요구했으니까.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내일도 하나님이 양식을 주시리라. 그것만 믿으면은 의로운 자예요. 그 다음 하나님이 안식일날은 썩지 않은 만나를 주시든지, 앞으로 일주일 분을 주시든지,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만나는 끝났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어요. 그들은 거기서 나타난 일만 봉사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들은 판결을 못하는 것입니다. ? 언약적인 관계에서 죄를 규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기능론적으로 규정하면은 하나님이 안주시면 못하지요. 그렇지요. 그런까 우리는 어쩝니까. 하나님 내 힘으로 못하겠나이다. 성령에 나를 주관해 주옵소서.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신령한 몸으로 살고 있으면서 주여, 나는 못합니다. 성령이 오시옵소서. 기능론적으로 대비해요. 그건 완전히 인격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런 인격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완전히 헬라 철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 주지 않는다는 의미는 말하자면은 모세 제도를 통해서 약속하셨지요. 바로 그 제도 안에서 인도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새롭게 구원하실 때는 어떻게 합니까? 깨닫는 마음을 주신다고 했지요. 어떻게? 마음에 할례를 행해서. 나를 사랑하고 내 율법을 지키게 하겠다. 어디를 비교해 보면 안다고요. 구약 때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잡혀갈 무렾에 다시 그 말씀을 하셨지요. 에스겔 16장이나 36, 또 예레미미야 31장 그런데도 너희들을 다시 고토로 불러들이고 물을 뿌리겠다. 새 마음을 주시겠다. 새로운 영을 주시겠다. 그렇게 했지요.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새 언약이라 인용했지요. 그런 상황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29장은 30장과 같이 읽어야 해석이 잘되지 30장은 아직 나오지도 안했는데 진도가 안나갔는데 29, 연속극으로 제 29회입니다. 30회는 일주일 뒤에 올 것이어요.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완결된 책으로 주어졌지 안해요. 그런데 인쇄없자들이 알기 쉽게 장수를 구별할 것이 아, 여기까지 읽고 이것은 다음 주에 읽자 하고 덮어두니가 모든다고요. 연속해서 읽으라 그말입니다.

그 다음 5장2부터 3절과 한번 비교해 보라 그 말입니다. 한번 5장2-3절을 보면은 아까 말했지요.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웠는데 우리 조상들과 세운 것이 아니라 여기 살아있는 우리와 세운 것이다. 여기 조상들은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아니어요. 물론 그들도 포함되겠습니다마는 조상들에게 세우신 약속은 어디서 시행되었느냐 하면은 드디어 가나안 땅에서 그 나라를 세우심으로 이제 시행이 되고 있지요. 물론 시내산에서 언약 채결함으로 시작됐지마는 그 약속은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 완결되거든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이 약속은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이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 호렙산 언약은 누구에게 증거를 두고 있습니까? 야곱에게 증거를 두고 있지요. 그리고 5-28장의 법규는 가나안 땅에서 지킬 법규여도 그 법규는 호렙산에서 언약 백성으로 채결된 백성들의 삶의 법이어요. 그리고 출애굽기는 어떤 법입니까? 그 나라를 조직하는 법이 강조점이지요. 가나안 땅의 삶의 법은 무엇입니까? 신명기지요. 그러니까 실은 모압 평지에서 설교하면서도 호렙산 언약을 세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여기 29장에서는 호렙산 외에 모압 평지에서 새로 세웠다고 그러는가? 언약 갱신이 강조이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들은 들어가서 다 배교하고 죽는다. 그러면 끝장인가? 물론 끝장이다. 내가 너희들을 언약 땅에 던져버리겠다. 그려면 영원히 끝장인가? 아니다. 내가 너희를 새롭게 다시 들어오게 해주겠다. 그래서 언약 갱신이 29,30장의 강조점입니다. 출애굽기는 시내산에서 그 나라를 조직하는 조직법이 강조고, 신명기는 그 조직된 나라가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강조이기 때문에 5-28장까지를 호렙산 언약이라. 그리고 조상들에게 세운 약속이 후손들에게서 시행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열조와 세운 것이 우리와 세운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29장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얻었어요. 얻고도 또 빼앗길 것이어요. 이제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 떠날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러면 영원히 끝은 아니다. 다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해서 돌이키겠다. 마음에 할례를 행해서 깨닫는 마음을 주고 나를 사랑하고 내 율법을 지키게 하겠다. 그러면 어쩝니까? 이제부터는 저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겠지요. 깨닫는 마음을 주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데 무슨 저주가 있겠어요. 그런데 이제까지는 그런 마음을 안주셨다고 했지요. 그럴지라도 나타난 일은 그들 책임이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함께하시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율법만 주셨기 때문에 주시지도 않은 것을 하라고 하는 그런 도덕적인 기능문제를 따지지를 안해요. 언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언약의 순종을. 그러니까 핑계할수가 없는 것이어요.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빛 가운데서 그들을 돌이키면은 가나안 언약이 중심이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갔을 때 선지자들이 이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언약은 바로 이 새 언약이라고 신약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그래도 구약에서 말하는 새 언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새 언약은 차이가 있지요. 구약에서 새 언약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돌아와서 율법을 지키는 것. 율법지키지요. 어디로 돌아옵니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새 언약이어요. 그러나 새 언약이 하늘의 질서로 완성됐을 때는 이제는 가나안 땅이 아니지요. 천하만민이 그렇게 되어 있지요.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지요. 그리고 아들의 순종을 이루어냈지요. 완전한 순종을. 그것이 새 언약이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언약이라는 것까지라도 구약에서는 구약의 한계 가운데 갇힌다. 구약이 스스로 신약의 빛을 가져오면은 신약이지 구약이 아니다. 그러니가 항상 그리스도의 자기 증거로 구약을 풀어야지 구약에서 신약으로 올라오면 안된다. 구약은 스스로 휘장을 못벗어요. 모세가 오래 산다고 예수님 안되어요. 신약의 증거가 아니면은 구약의 새 언약은 영원히 가나안 언약에 한정되어 버려요. 그 이상을 넓일 수가 없는 것이어요.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그래도 어떠튼 새 언약이지요. ? 그전에는 깨닫는 마음을 안주셨는데 너희들이 배교하고 언약의 땅 밖으로 던저졌는가. 깨닫는 마음을 주어 돌아오게 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 내가 은혜를 안주었다고 너희들이 핑계할 것이 아니다. 오묘한 일은 내게 속한 일이고 요구된 율법은 너희들에게 속한 의무아니냐. 너희들은 그 율법을 지켜라. 그 율법을 못지키면은 너희들을 던저버리겠다. 항상 언약적인 관계입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지금은 어쩝니까? 완전한 은혜를 주셨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핑계합니까? 그래도 예수님 재림해야 죄가 없어지지. 내가 죽어야 죄가 없어지지 살아있으면 사람이니까 할 수 없다. 성령을 맛보기로만 주고 완불로 안주었으니가 내가 이렇게 산 것이 아니어. 그렇게 핑계하지 못한다. 그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요 여러분은 영의 시대에 살고 있지요. 부활의 시대에 살고 있지요.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되겠지요. 아직 성령이 안오셨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배운 신학이어요. 성화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되는 것이다. 왜 아직은 아니니까.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다. 아직 안주었으니가. 그것이 우리가 배웠던 성화였어요. 그러나 우리가 새로 가르친 것은 아니지요. 이미 새로운 시대가 왔다. 새로운 빛 가운데 깨어 있어라. 우리가 믿음으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 하늘의 시대가 왔으니까. 우리하고는 가리운 것이 없으니까. 그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싸울 요소지 아직은 아니라는 그런 요소가 아니다. 여러분이 처음 믿었을 때도 자유로웠다. ? 예수 믿으니까 가리움이 없거든요. 그런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정의하니까 아직은 아니니까 조금씩 좋아지고 개인은 죽을 때 거룩하게 되고 인류는 예수님 재림할 때 거룩하게 되지, 하나님이 그렇게 했으니까. 봄에는 봄, 여름은 여름 가을이면 가을 별 것 있어요. 지금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안듣는다. 그러면 안되지요. 오묘한 일은 이제 예수 안에서 나타났어요.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어요. 믿음의 말슴을 따라 살아야 되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켜야 되어요. 예수께서 재림해서 아니어요. 믿음으로 깨어 있으면 그 영광을 누려요.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싸움이 끝나겠지요. 그런 이야기예요. 믿음으로 깨어 있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그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여기 29,3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인데 29장의 결론이 그런 말입니다.

, 인제 주보를 읽어 볼까요. 4장44-28장은 요단 동편에서 모세가 선포한 말씀인데 이것은 호렙산 언약의 연속입니다. 그 연속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의 언약적인 삶이지요. 언약적인 삶의 법이 쭉 있기 때문에 연속이어요. 출애굽기는 조직법입니다. 29, 30장은 호렙언약 외에 모압 땅에 세운 언약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이 언약은 호렙 언약의 갱신인데 호렙 언약을 범한 이스라엘을 다시 언약의 땅에 심으시고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어 순종케 하시겠다고 언약하신다.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배교했을 때 어떻게 치료하겠느냐 하는 것이 29,30장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4장과 레위기 26장과 비교해 보면은 재미가 있다. 왜냐하면 4장에서도 가나안 땅의 복이 기록되어 있고, 레위기 26장도 복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 복대로 살지 못하면 언약 갱신도 기록되어 있어요. 레위기 26장40절은 분명히 언약 갱신이어요. 또 신명기 4장29,30에도 언약 갱신이 있어요. 다시 너희들을 돌이키게 하겠다. 그 약속이 항상 들어있어요. 그들의 복, 심판 그들의 회복까지 항상 마지막 본문들에 들어있습니다. 4장도 한 단락이고 레위기도 끝이고 26장에 있는데 여기서도 그런 말이 같이 들어있는데 조금씩은 차이가 나는데 차이를 비교해 보면은 좋겠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26장과 비교를 해보십시오. 레위기 26장을 보면은 이레도 범하면 일곱배, 벌을 칠배를 가하리라 쭉 반복하면서 내가 너희들을 돌이키게 하겠다. 그런 말이 있거든요. 그러면 그 복이 어떤 복인지 한번 비교해 보면 좋습니다. 간단한 비교는 레위기는 거룩의 법이지요. 어떤 것이 하나님게 속한 거룩인가, 하는 그런 차원에서 복을 이야기 해요. 그리고 회복도 이야기해요. 그러나 신명기는 어느 것이 거룩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가, 소유하지 못하는가, 가나안 땅에 속한 것이 실은 신명기의 강조점이어요. 레위기는 거룩에 대한 법, 안식에 어느 것이 거룩하고 평강인가? 거룩과 안식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벌 같은 것도 전부 그쪽에 있어요. 그런데 신명기는 가나안 땅 기업에 강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차이점이 있으니까 비교를 해보십시오. 먼저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일들을 언약 백성에게 회상시킨다. 여호와께서 큰 기사와 이적으로 애굽에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고 곤고한 광야에서 40년을 보호하시고 친히 하늘 양식으로 먹이셨으며 대적을 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두 지파 반에게 주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만 주되심을 알게 하시어 그들로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가나안 땅에 심으신 목표지요. 그러나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 그들에게 주지 않은 가운데서 그렇게 했노라고 말슴하고 있지요. 이제는 언제냐 하면, 지금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이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어떤 이제겠습니까? 언약 갱신하는 이제지요. 29장에서 이제니까. 이제 이스라엘에게 속한 모든 자로 여호와 앞에 서게 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여호와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여호와의 언약은 여호와의 맹세입니다. 불변합니다. 언약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 언약도 그 토대는 조상들에게 있습니다.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이 모세 때는 모세 때 방식으로 집행되고 예수 때는 예수의 방식대로 집행되지요. 그래도 그 토대는 조상들에게 있지요. 그러니까 소위 모세 언약의 갱신이 가능하지요. 만일에 모세가 토대이면은 안바구어져야 되요. 모세 언약은 무엇입니까? 범하면 죽는다. 그리고 행하면 그 가운데 산다. 그것이 율법의 틀이어요. 그런데 만일에 모세 율법만 따라서 끝나버리면 조상들의 약속은 무가 되지요. 그래서 항상 조상들의 약속을 토대로 깔고 있지요. 조상들의 약속이 신실하기 때문에 너희들을 돌이키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 갱신은 항상 조상들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모세 율법은 행하면 살고 범하면 죽는다. 하는 것이 기본 틀이어요. 그런데 범했으면 완전히 끝나버려야되는데 돌이키거든요. 조상들 때문에 그렇다. 내가 조상들을 사랑하듯이 너희들을 사랑하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운 언약은 영구히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함께 여호와 앞에 서있지 않은 자에게까지다. 이스라엘은 이전에 그들을 종삼았던 애굽과 여러 나라들과 우상들을 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신 것을 보았으니 누구라도 여호와를 떠나서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는 일이 없게 하라.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강팍하여 나만은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듣지 않으면은 여호와의 분노와 이 책에 기록된 저주로 그러한 자의 이름을 멸하리라. 여호와께서 그러한 자들을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구별하시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더하시리라. 즉 언약의 교제입니다. 그렇게 저주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때 서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고 나중에 바벨론 땅에 포로잡혀갔다가 이 새 언약으로 돌아온 것은 먼 훗날 이야기인데 이것이 무슨 일이냐. 여기 보니까 이런 사람들도 산 것 같은데. 성경은 그때 누구 누구가 언약에 참여했는가, 개인의 운명을 따질려는 것이 아니라, 가령 예수님께서 갈릴리 산에서 설교하실 때 복되도다.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그랬지요.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들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그랬지요. 그러면 언제는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했고, 이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면 무슨 일이냐. 그 중에서 가짜를 골라낼려고 하면 안된다 그말이어요. 5장 문맥은 5장 문맥이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는 것은 그 문맥이지 개인들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어떤 주님으로 계시는가가 강조점이지 거기서 누구누구는 천국가냐, 그것을 뽑을려는 것이 아니다. 남은자 개면이. 그러니까 그렇게 역사적으로 맞추어서 풀면은 잘 안풀입니다. 그 상황들을 이해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배반하여 언약을 배반하고 언약을 배반했다는 말은 여호와를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여러 항목을 잘 못지킨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는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했다. 항상 하나님은 종주권 언약으로 언약의 왕으로 계시지 나는 절대자니 너희들이 내 기준에 도달하겠느뇨. 그런 도덕적인 판단자로 계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왕으로 계신다. 나만 하나님이고 다른 신은 아니다. 그러니 나만 섬겨라. 그것이 핵심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배반은 여호와를 배반한 것인데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그것은 언약을 배반한 것이어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언약의 모든 저주로 그들에게 저주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아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땅을 소돔 고므라처럼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지신다. 레위기 같으면 소돔 고므라처럼 멸한다고 말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다 쫓아내면 그 땅은 안식년을 누리라. 그러면은 레위기에서 하는 말이어요. 거룩한 땅으로 구별하겠다고 하면 레위기고, 신명기에서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 모든 생산을 중단시키겠다고 하면은 신명기 복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복에 강조를 두고 있고 레위기는 거룩한 성소 거룩한 언약의 땅 그래서 모든 죄의 종들이 해방되는 거룩한 땅, 모든 토지가 물러질 거룩한 땅, 그런 것이 레위기의 강조점이거든요. 그래서 강조점을 따라서 그 표현방법이 다르다. 그런 것을 비교해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언약의 땅 밖으로 던져버리신다. 이것이 그들의 후손과 열방에게 여호와와 그 언약을 배반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그런 진노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 그런 말입니다. 이스라엘 마음을 할례하사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나타난 모든 일은 영구히 이스라엘에 속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빛 가운데서 그들에게 명하신 언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생명이다. 그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안했을 때는 그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되고 다시 깨닫는 마음을 주셨을 때는 다시 그 상태에서 언약에 신실하면 되고,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한 백성이지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면 되고, 핑계할 수 없다. 언약 관계에 있으니까.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가? 이제까지 푼 것은 항상 구약 자체에서 그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언약이 되는가 하는 내용을 풀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겠는가? 적용은 의미를 알아서 우리에게 적용한다는 적용은 없고 성경의 적용이라는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안했는데 구약이 우리에게 해석되고 증거되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에 해석과 적용은 우리에게 이루어졌다는 의미지 의미를 파악해서 줄긋기 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그러니가 영해해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영해라는 것은 그들 안에 성취의 의미를 해야되지 모형과 원형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어요.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항상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만 적용이고 실재에요.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지요. 그러니까 반드시 기독론적인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되지 그리스도를 떠나서 어떤 본문도 우리에게 와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것도 부활을 떠나서, 부활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죄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 삼으시고 가나안에 함께하는 나라를 세우셨다. 아직도 죄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질서 아래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를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할례하사 여호와께 신실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언약의 일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의 질서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게 죽고 함께 살게하시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순종의 길을 걷게 하셨다. 누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완성하셨지요. 천하만민에게 성령을 받게 하셨지요. 그렇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실패했지마는 하나님은 그 언약에 신실하셨다. 우리는 이제 어떤 언약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을 깨끗케 했는데 어떻게 깨끗케 했습니까? 그냥 구약식의 깨끗함은 반복된 깨끗함이어요. 그것은 온전한 깨끗함이 아니고 휘장 밖의 깨끗함 밖에 안되어요. 이제 우리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깨끗해졌다. 예수의 죽으심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지요. 율법 아래서 저주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죽음이고 그렇게 해서 오히려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어요. 하나님은 아들로 말미암아 참으로 오묘한 일을 하셨는데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우리는 가나안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법, 새 계명을 지킨다. 그것이 지금 신약 교회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다. 이것은 언약의 완성이어서 다시 새로운 언약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 나타난 것이어요. 그렇게 해야 된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적용할 내용들입니다. 질문있으면 하십시오. 구약은 항상 그 자체에서 그 의미를 먼저 풀고 그 다음에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독론적인 해석을 다시 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읽어야 됩니다. 29장에서는 언약의 저주가 강조인데 이제 30장에서는 그들을 회복하신 내용들이 쭉 나옵니다. 집에서 여러번 읽어야 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쉽다고 하는 것은 희망을 줄려고 그런 것이지 쉽다고 싹 보면 알고 그렇지는 안해요. 쉽다는 말은 구약에 비해서 쉽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들여다 보아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을 못보지요.우리는 완전한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훨씬 다르지요. 어려우니까 누구에게 물어보려니 하는 것은 어린 아이에요. 완전히 쉬운 것이어요. 그런 의미로 여러분이 자신있게 읽어야 되어요. 주기도문 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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