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5장
25장에도 여러 규례들이 나왔습니다. 1-3절은 의로운 재판에 대한 규례인데 재판장은 의롭다하고 악인은 정죄하면은 공평한 판결이 됩니다. 그런데 악인에게까지라도 볼기를 치는 벌을 가했을 때에 그 죄대로 때려야 되겠지요. 그러나 40까지는 때리지만은 그것을 넘지 못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왜 볼기를 치는 매를 최고 40대까지로 제한을 했습니까? 3절에 답이 있는데 그것을 넘겨서 과다히 때리면은 재판장인 네가 형제로부터 천히 여김을 받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40은 고난의 극이지요. 노아 홍수 때도 40일 비가 내렸고 광양 생활도 40년이었습니다. 그래서 40은 고난에 극에 대한 수들인데 여기서 40까지는 때리지마는 40을 넘기지는 말아라.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재판장이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악하다고 공평한 판결을 해도 아무리 악한자에게라도 볼기를 때릴 때는 40을 넘겨서 때리면은 안될 이유가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가 아무리 악한 죄를 지었어도 과도하게 때리지는 말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기업을 준 이스라엘 백성이거든. 비록 죄인이라고 천히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라. 그런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은 개패듯 한다고 그러고, 이런 말은 어른들은 아는데 잘 모르는 말이고, 우리 어려서 같으면 개구리를 때리듯이 하지 말라 그말입니다. 그는 비록 악인이어요. 그가 천하게 취급을 받지 않도록 그러니가 하나님이 그를 벌하기는 해도 그를 천하게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라. 그런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기가 사도로서 얼만큼 고생을 많이 했는가 하면서 그것을 열거하면서 내가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번 맞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가 이 규례대로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섯 번이나 맞았어요.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그런데 유대인들은 40대까지는 때리라고 했는데 그중에 하나를 감해 놓았어요.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방법인데 혹시 분노 중에 잘못해서 넘어버리면 안되거든요. 그러니가 아예 완전하게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섯 번을 맞았습니다. 바울이 얼만큼 매를 많이 맞았느냐? 잘잘한 것은 다 빼버리고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하니까 매를 많이 맞은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얼만큼 고생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런 말이어요. 이런 것이 뭐 사형선고를 반대한다거나, 요새는 태장법도 없지요. 요새 싱가포르나 저쪽은 아직도 태장이 있어 가지고 잘못하면 공개석상에서 볼기를 때려버니까 미국하고도 문제가 복잡하고 그렇지요. 우리 나라도 없어요. 왜냐하면 몸에다가 형벌을 가하는 것은 아주 인격을 모독한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면 가두지 두들겨 패고 그런 것은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아랍 이스람교가 있는 곳에서는 아직도 태장으로 때려요. 도적질하면 손도 자라버리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신체적인 벌은 가하지 않지요. 고문만 해도 야단이 나버리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서른 아홉 대까지 때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나라 민주주의 법이 성경을 어긴 것인가? 성경은 직접 우리 나라 법이 어쩐지 그런 것은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자기 장자로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 백성을 네가 죽게 패버리면 쓰겠느냐. 그러니까 매를 때리더라도 40대를 넘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의 백성을 천히 여기지 말도록 해라. 그 구원론적인 의미이지 지금 사람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 법을 위해서 직접 예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태장을 안때리면 민주주의고 태장을 때리면 성경적이고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런 말이지요.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취급하는 방식을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대하시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해석해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예수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그가 천히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된다. 가령 그를 죽도록 패지 말라 그말이어요. 하나님이 그를 사랑했으면 그가 이런 저런 허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백성을 너는 죽어라. 그런 식으로 대할 수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원리들입니다. 그런 원리를 따라서 지금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하면 되겠느냐. 감옥에는 가두워도 손은 대지 말아라. 아마 이런 식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태장을 때리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때리는 것이 성경적일 것인데 그것 갖고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따질 이유는 없다 그말입니다. 곡식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는 왜 망을 씌우지 말것인지 그 말은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망을 씌워버리면 곡식 떠는 소가 곡식을 못먹지요. 그러니까 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새는 소를 못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전에도 쟁기질을 할 때는 소 입에다 망을 씌워요. 왜냐하면 자꾸 무엇을 먹느라고 바르게 안끌면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쇠죽은 쭈워 먹여도 입에다 망을 씌우고 하지요. 일할 때 해찰하면 안되니까. 여러분도 기독교인들이 어디 근무하다가 해찰질하면 안되어요. 남는 시간도 근무시간인줄 알고 남는 시간에 성경을 읽고 있으면은 실은 옳은 것은 아니어요. 우리는 성경 읽으면은 제일로 건전하다고 알고 있지마는 근무 외에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안해요. 그전에 어떤 학교에 근무하시는 소사되신 분은 선생들이 무슨 심부름을 시키면 교문 앞까지만 실어다 준다고 그래요. 그 다음부터는 자기 일할 영역이 아니니까 자기가 가져갈려면 가져가지 자기는 모른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가 화분을 가져다 주더라도 교문까지만 가져다 준다. 왜 거기가 자기 근무 영역이니까. 그러니가 근무 시간에 근무해야 되지. 그런데 소가 쟁기질하다 자꾸 무엇을 먹고 그러면 이것 두둘겨 맞지 아,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으니 먹어라. 먹어. 그런 일은 없지요. 그러니가 이것은 쟁기질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소도 곡식을 떨었으면은 그도 떠는 것을 먹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말이지 여기서는 쟁기질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마땅히 소도 자기가 수고해서 떠는 것에 참여하도록 했어요.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을 주었으면은 소도 그 기업에서 수고하면 그 기업에서 누리라 그런 말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이 여러 가지로 쭉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인도 군대 갔으면은 자기 것을 가지고 군대간 사람이 없고 당연히 국가에서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누가 포도원을 갈았으면 당연히 거기서 먹을 것이고 소도 자기가 떤 곡식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우리 전라도 말로 소를 두고 한 말이냐? 바울은 사람 먹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냐?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소를 위한 것이냐,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냐. 그래도 바울은 더 적용하지요. 성소를 섬기는 사람은 성소로부터 먹고 제단을 모시는 자는 제단으로부터 먹는다. 복음을 봉사한 사람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먹으라고 했지 않냐. 그런 일반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하물며 소도 그가 수고한 것을 망을 씌워서는 안되겠거든, 하물며 사람이 수고한 것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되지요. 그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보면은 모리고개 좀 지나서 아주 가난할 때에요. 그래도 우리 집은 보리밥 먹는데 모심을 때는 쌀밥을 내놓아요. 그 쌀밥 누룽지 굉장히 맛있지요. 그것도 양푼에다 한나씩 이고가요. 왜냐하면 집에 식구들이 있으니까. 우리 어렸을 때는 이해가 안가드라고. 왜 그 맛있는 쌀밥을 가득 이고 가는지, 자기만 먹었으면 되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골 생활이 훨씬 더 성경적이어요. 왜? 와서 어른들이 일 왔으니 얘기들이 밥 못하고 있지 안해요. 그러니까 거져가요. 그렇게 아주 가난할 때도 모내기를 할 때는 쌀밥을 먹었다. 그 쌀농사를 하니까. 그것이 주인이 일꾼들에게도 예의에요. 여기서도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마땅히 수고하면은 수고에 참여해라. 내가 너희들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는데 육체의 것으로 거둔다고 과하냐.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심었지 않냐. 내가 너희들에게 생활비를 받는다고 과하냐.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는 너희 교회에서 한푼도 안받겠다. 왜 고린도 교회는 거짓된 선생들이 있어 가지고 바울을 모독해요. 바울은 다른데서 헌금 많이 받아서 돈이 많다. 그러니가 저 사람은 굉장히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고린도 교회에다 악소문을 퍼뜨려 놓았어요. 빈총도 안맞은 것만 못다고 소문을 퍼뜨려 놓았어요. 그러니 바울이 가니까 이상한 눈초리로 봐요.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할려고 내가 내 손으로 수고해서 먹는다. 그러나 마땅히 일꾼도 먹어야 되지 않느냐. 나에게 그렇게 해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죽 갑갑하면 점점점 생략하고 있지요. 그래 놓고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마땅히 받을 것도 안받는 이것이 내 상급이 아니냐. 내가 사도직을 잘해보았자 본전이다. 사도의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도직을 맡았으면 마땅히 너희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야 되는데 받을 것도 안받고 수고한 것이 나의 상급이 아니냐. 내가 복음을 위해서 달음질 한다. 운동장에 사람들이 상받을려고 달음질 한 것처럼 내가 복음에 참여하도록 달음질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린도교회를 권면하지요. 그러니까 이런 법들은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러면 이대로만 정하면 다 되는가? 가령 내가 수고했으니 돈 내놓으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법으로는 하나 틀린 것이 아니어요. 어느 교회에서 그랬다든가, 교인들도 잘못이고 교역자도 잘못입니다마는 생활비 책정을 하는데 사례비를 하나도 안올리거든, 그러니가 전도사가 성질을 내버린 모양이어요. 이렇게 이렇게 안주면 안할란다고. 그런데 그 교인들은 전도사가 돈 좋아한다고 성질난 것이어요. 그러니까 양쪽 다 잘못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교역자는 마땅히 수고한대로 받을 권리가 있지요. 법적으로 하면 그 전도삭 옳은 것입니다. 받을 권리가 있으니가. 그런데 자기들은 조금 주니까 잘 살지요. 나 더 주어야 되겠다. 식구들도 이렇게 많고. 맞는 말이어요. 그러나 사역자로서 합당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교인들이 열낸 것일 것이어요. 아마 동네에서 거래했으면 꼼짝 못하고 돈을 주었을 것인데 사역자가 나 생활비가 너무 적다고 하니까 교인들이 우섭게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역자로써 지혜가 없는 것이고 교인들은 감각이 없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 일시키고는 그렇게 싸구려로 안부릴 것인데 교역자라는 핑계를 대놓고 십자가 지라는 말이거든요. 그것은 진짜 옳은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교역자도 옳은 일이 아니어요. 만일 교인들이 못내놓겠다고 하면 못내놓는 것이 교인들의 수준이어요. 그것을 더 내놓으라고 해보았자 거래적으로 맞을련지 몰라도 교인들을 기르고 있는 것은 아니어요. 받아 보았자 자기 배는 부를련지 몰라도 교인들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세우신 교회를 봉사할 때는 바울처럼 마땅한 권리까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 소위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 거래 방식은 좀 다르지요. 좀 달라요. 형제의 대를 이어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아들이 없이 형제가 죽으면은 그 죽은자의 부인은 다른데로 시집가지 말고 형제에게 시집가고 그러면 그 형제가 형제의 의무를 다해서 아들을 낳으면은 그 첫 아들은 죽은자의 호적에다 올려서 죽은 자의 이름을 잇도록 해야 됩니다. 만일에 그런 일을 하기를 싫어하면은 성문에 가서 재판을 해야 됩니다. 이 남자가 자기 형제의 기업 잇기를 싫어한다. 그렇게 확정이 되면은 여자가 쫓아가서 그 남자의 발에서 신을 벗겨가지고 몰라 신바닥으로 뺨을 안때리는가. 신을 벗기고 침을 벹어라. 그리고 대대로 그 집은 신벗긴 집이다. 이름을 붙여 버려라. 해 놓았어요. 이런 결혼법은 간음하지 말라는 법과 비교하면은 어쩔까요. 또 레위기를 보면은 누구의 하체를 범치 말며 친족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하고 있거든요. 그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또 민수기 17장이나 36장을 보면은 아들 없이 죽어도 별 일이 아니드라고. 딸이 있으면은 그 딸이 기업을 상속받고 그 딸은 다른대로 시집가지 말고 자기 지파에게로 시집가면 그 기업은 안옮겨져요.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딸이 있냐 없냐는 아무 상관 없이 아들이 없이 죽었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비교해 보아야 강조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그랬지요. 만일에 이 둘을 맞추어 보면 이해가 잘 안가요. 아들이 기업을 받고 있고 딸이 기업을 받고 있는데, 왜? 양자드리면 되겠지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왜 그러는가? 우리들은 해석이 잘 안되지요.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대를 잇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수기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그들이 배교했을 때까지라도 새로운 이스라엘을 계수하시고 그들에게 기업을 준다 하는 것이 민수기지요. 그러니까 민수기에서는 만일에 죄 때문에 아들이 없이 죽었는가, 딸만 있는가? 놀라지 말아라. 내가 딸에게 기업을 주마. 그러면 이 사람은 죄 때문에 죽어도 기 업을 잇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어요. 그리고 만일 딸만 줄줄이 낳았어도 그가 자기 지파에게 시집가면은 그 기업은 절대로 다른 데로 안옮겨갈 것이어요. 왜? 민수기는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인도해서 기업을 얻게 하시고 그리고 큰 봉사를, 많은 제사를 지내지요. 큰 봉사를 하게 하신다. 그것이 민수기 주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들 났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업 상속이 문제에요. 그래서 딸에게 기업이 상속되는 문제를 말합니다. 배교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하는 것이 민수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셨습니다. 이 복이 대대로 유지되어야 될 것이어요.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따라서 그 기업이 유지되거든요.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은 아들 났는 복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들을 났지 못하고 죽었으면은 아들을 났게 해라. 강조점 때문에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를 아시겠지요. 비교하면 제일 쉽습니다. 여러분이 동네 싸움이 났을 때도 말 난사람들 전부 모여 놓고 대조해보면 그냥 알지 안해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누구 말이 맞는지. 그러니까 성경도 이렇게 대조시켜 보면은 알기 쉽다. 그러면 형제에 대를 잇게하는 것은 결혼법으로 하면 챙피스러운 결혼법이지요. 만일에 형의 아내를 범치 말라 하면은 살아있을 때 범하면 그건 간음죄이니까 당장 죽지요.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죽었냐 살았냐 문제보다도 친족을 범하지 말라고 해서 경계를 긋고 있거든요. 죽었느냐 살았는가는 상관이 없어요. 친족을 범치 말라는 경계를 긋고 있는 거룩의 법이 레위기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과는 상충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문제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법들은 그냥 도덕법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소위 종말론적인 특징을 가장 잘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의 약속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의 약속에 대한 것이 강조점이지 단순히 어떻게 결혼할 것인가, 그런 도덕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요.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지마는 성경은 가나안 백성은 몽땅 죽이고 그랬지요. 그런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과 정반대가 되어버리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건설할 나라는 단순한 도덕적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어요. 그러니가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는 몽땅 죽여라. 그런 명령이 가능한 것이어요. 예수님 재림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특징이 강하다 그런 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단순한 도덕적인 나라로 풀면은 안맞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는 나라를 세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틀린 것이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아들이 없이 죽으면은 다른 형제가 그 형제의 아내를 얻어 가지고 아들을 났고, 낳으면 죽은자의 이름을 이어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이름을 이어주면은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하면은 인제 이름도 이어주는 것이 있지마는 만일에 누가 죽으면은 그 집도 가난해지고 어렵거든요. 그러면 그가 그 집의 남편 노릇도 해주어야 되고, 가문을 일으켜 주어야 되어요. 만일 땅이 팔려버렸으면은 그것을 찾아 주어야 되어요. 그렇게 해서 형제의 이름이 대대로 이어지게 해야 되어요. 많은 수고를 해야됩니다. 만일에 기업을 안물러주면 어떻게 할까요? 가만히 놔두어버리면 그 집은 쫄딱 망해버리니까 기업 이어줄 사람이 없으면 딸이 기업을 받고, 딸이 없으면은 가까운 친족에게 주고 친족도 없으면은 이렇게 주고 이렇게 하고 있지요. 그런데 친족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지요. 그러면 가만히 놔두면 자기 것이 되는 수가 있어요. 민수기를 보면 기업 상속법이 그렇지요. 아들 없이 죽었는가, 딸에게 주어라. 딸이 없는가, 친족에게 주어라. 가까운 친족이 없으면 더 먼 친족에게 주어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안해요. 그런데 만일 아들이 없이 죽은 집에 가만히 구경만 해버리면은 그건 자기께로 떨어질 것이어요. 그런데 아내를 얻어서 남편 노릇을 해주고 그 집의 가장처럼 해가지고 아들을 낳으면은 그 이름을 이어주고 이제 물러주면은 그는 죽은자를 위해서 두 살림 차리는 식으로 소위 생고생을 죽어라고 하는 식이어요.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할려고 하냐 그말입니다. 그러니 형제의 집 세우기를 싫어하는가? 그러면 죽은자의 집 부인이 형제의 집 세우기를 싫어하는 자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꼭 내 식으로 하면 신을 벗어 한 대 때릴 것 같은데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벹으라는 말이어요. 침벹으라는 것을 보니까 한 대 때려도 될 것 같아요. 왜 형제의 집 세우기를 싫어하는 자는 대대로 신 벗기움을 받은 자라고 그렇게 조롱을 받게 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룻기 4장7절과 비교해 보면은 거기서는 문제 제일 끝번입니다. 5-7에서 4장7절에서는 신 벗기는 것을 팽피를 주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거래를 확정한 것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웃의 기업을 물러줄 자가 보아스 빼놓고도 더 가까운 친족이 있는데 자기는 안할련다. 그 다음 순서를 당신이니까 당신이 하라고 하면서 자기 발의 신을 벗어 주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거래가 확정되면은 신을 벗어주는 율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은 똑같은 신 벗긴 사실이 있어도 룻기서에서 말하는 것 하고 이 신명기에서 말하는 것은 뉴앙스가 달라요. 그렇지요. 그리고 룻기서에서는 기업을 안물러준 사람에게 신벗긴 적이 없지요. 거기서는 거래만 확정되었다는 의미로 신을 벗어주고 있는데 이 신명기에서는 그를 부끄럽게 하는 의미로 대대로 신벗기움을 당한 자라 칭하리라. 하고 얼굴에 침을 벹으라 그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침벹는다는 사실은 똑같지만은 문맥이 다르다. 그러니까 여기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벹는 것은 얼굴에 침을 벹는 것과 신을 벗기는 것은 의미가 같다. 얼굴에 침을 벹는 것은 수치스로운 챙피를 위한 것이지요. 그것은 어디에 나오냐 하면은 그전에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지요. 아비가 자식에게 침을 벹었어도 부끄럽겠거든 하물며 내가 그를 문둥병이 들게 했는데 진밖에 7일 동안 가두라 했을 때 침벹는 것은 부끄러운 수치를 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벹는 것도 신을 벗기는 것과 의미가 같다. 룻기서에서는 단지 자기 신을 가지가 벗어 주는데 그것은 거래를 확정하는 의미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일단은 그 문맥에서 설명하는 의미를 읽어야 됩니다. 문맥에서 설명하는 의미만 읽으면 되어요. 신을 벗긴다는 것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똑같다는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그 문장에서 설명하는 의미만 읽으면 됩니다. 그랬는데 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죽은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가에도 이 제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지요. 룻기서를 보면은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지요. 거기 보면은 만일에 형제의 집을 세우는 이런 수고가 없어버렸으면은 나오미에게서 나올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왜? 자기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어 버렸거든요. 이제는 그에게 아들 낳아줄 소망이 없어요. 그런데 보아스가 이 수고를 다했지요. 그렇게 해서 다윗 가문의 토대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러니가 다윗 가문은 완전히 죽어버린 집을 하나님께서 기업을 잇게 해주는 이 수고를 통해서 그 집이 이루어진 것이어요. 그러니까 다윗 가문의 기원은 이 은혜의 제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룻기서는 보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남편이 다른 남자하고 싸우는데 맞아 죽게 생겼어요. 그러면 우리 나라 여자들도 허리끈 잡고 죽자살자 싸우지요. 그러면 그 여자의 손목을 잘라버리라고 되어 있어요. 무지무지하게 고야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은 그것을 출애굽기 21장 같은 데를 비교해 보면은 달라요. 출애굽기에서는 누가 하나 눈을 뺏냐, 너도 눈만 하나 빼라. 이를 뺐냐, 이만 하나를 빼라. 그렇게 공평한 재판 통치 원리가 출애굽기에요. 왜, 출애굽기는 나를 통치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가나안 땅에다 이스라엘 백성을 심었고 그 가나안 땅은 생명의 기업이어요. 만일에 여기서 싸움났다 해가지고 다른 사람 출생의 기관을 잡아 끊어버리면은 그 집은 망해버려요.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지 말고 손목을 잘라버려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가 아주 고약한 벌이지요. 다른데서는 손만 풀면 되는지, 네가 잡았으면 나도 잡아버려라. 이는 이로 빼니까. 그러면 될 것인데 그냥 손을 잘라서라도 남자의 음낭을 보호해라 그말이어요. 왜? 출생의 기관이거든요. 만일에 그 일이 잘못되면 출생이 끊어져버려요. 그러니까 앞 뒤 보지 말고 해버려라. 자기 남편을 구할려고 여자가 죽자살자 달려들어도 불쌍히 여기지 말아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새 우리 같으면 넥타이 맷는디 싸울 때 넥타이를 잡았다거나, 그러면 위험하다. 왜, 숨막힐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 비슷하겠지요. 다른데 위험은 다 놓아두고 왜 음낭에 대해서만 강조를 두는가? 이 나라를 굉장히 성적으로 밝은 나라인가? 그런 나라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생식의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싸움나 갖고 생명의 기관이 잘못되어버리면 큰일이지요. 그러니까 어떠튼 그것은 보호를 받아야 되어요. 자기 남편이 죽을둥 살둥 하는 것 보다도 그 가해자의 음낭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왜 이것은 생명이 보존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도 싸울 때는 허리끈은 잡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 것하고 직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 다음에 공평한 거래를 하라고 그랬는데, 똑같은 저울추를 쓰는대로 똑같은 말을 쓰면 되어요. 그러면 공평한 거래가 됩니다. 왜 이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가? 거기 보니가 복과 벌을 말을 해요. 만일에 공평한 거래를 하면 가나안 땅의 손의 수고에 복을 줄 것이고 만일에 공평한 거래를 안하면은 너는 속였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네 속인 수작을 잘 아니까 벌을 주리라. 가증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증하면 항상 언약의 땅 밖으로 쫓겨나기 쉽지요. 왜 이렇게 거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생명의 기업으로 주었다 하는 것이 이 신명기지요. 불공평한 거래를 그것을 노략질하는 것이어요. 형제의 생명을 노략질한 것과 같아요. 그는 아무리 수작을 부려서 불공평해도 하나님은 아셔요. 그러니까 그를 가증하다고 판결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심하라 그런 말입니다. 하옇튼 유대인들은 물건을 팔 때까지라도 물건의 단점을 설명하지 안했으면은 나중에 발견되면 물을 수가 있어요. 정당한 거래를 해야됩니다. 우리 같으면 장사꾼의 똥은 개도 안먹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상업을 그렇게 취급하지 안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의 기업의 선물들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공평하게 하지 말아라. 그 일에 복을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고는 못한다. 그래서 거짓말 중에 몇 개의 거짓말이 있지요. 처녀 시집 안간다는 말, 장사꾼이 손해보고 판다는 말, 노인 죽고 싶다는 말, 이런 말을 하고 있지요. 그 여러분이 손님에게 나 얼마 이익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손님은 그런 것을 알 권한이 없거든. 그전에 내가 버스를 타고 있는데 장사꾼이 착 올라오더니, 볼펜 장사 있지요. 여러분, 이 볼펜이 얼마냐 하면 백원입니다. 잘안대로 백원입니다. 그러니까 사라 그말이지요. 지가 속이겠냐. 다 남겨도 백원이니까 사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본래 얼만 남는다고 소비자에게 그런 것까지 다 말해야 공평한 장사꾼이고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괜히 물건 많이 팔려고 손해나고 파요 거짓말 할 필요는 없지요. 이익보는 것이 정상적이니까. 정상적인 이익을 보는 것은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도한 이익을 볼려고 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리고 물건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되지, 가령 말바우 시장을 가면은 수건을 착 쓰는 사람은 말하자면 수입품 가지고 온 할머니다 그말이지요. 수건을 착 쓰고 오니까 아이코 담양에서 오셨는갚다. 가까운데서. 이런 할머니가 거짓말하리 사고 보면 속는다 그말이지요. 왜 물건을 갖고 거래해야되는데 모양을 갖고 거래를 해요. 우리 신자들도 그래요. 나도 그전에는 집사요. 집사하고 물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건을 설명해 주어야 되지. 그런데 나도 예수 믿소. 아, 믿는 것 하고 상관이 있냐고, 물건을 설명해야 되지. 그렇게 해갖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전에 어떤 목사님이 그러더라고요. 6.25때 부산으로 피난하면 미군부대에서 나온 구호물자 장사하는 것이지요. 정상적인 거래를 해야 되고, 정상적인 설명을 해야 됩니다. 장점을 설명하면 단점도 설명을 해야 되고.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안팔린줄 아는데 그렇게 그냥 한번 거래하는 것으로 하니까 단골이 없어지고 국제적으도 한번 물건을 팔고는 수출을 못해버리고 그러지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왜냐하면 거래라는 것은 생명의 선물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해야 됩니다.
아말렉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했는데, 무엇과 비교해 보느냐 하면은 신명기 20장10-14절을 비교해보면 거기서는 아말렉을 죽이는 말이 없어요.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완전히 멸절하라는 말만 있지 그리고 가나안 땅 밖에 있는 이방인은 완전히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면 세금 놔주어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느닷없이 아말렉 백성은 몽땅 죽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성경에 아말렉 백성이 그렇게 고약한 백성이냐. 가나안 칠 족속도 아니고, 왜 이 사람들을 이렇게 죽이라고 그러는가? 묘한 말 같지요. 이런 명령들도 종말론적인 특징이 강하다. 이것을 이 본문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너희들이 애굽에거 나올 때에 너희 뒤에서 피곤한 자들을 잡아냈지 않느냐. 그러니까 대대로 그들과 싸워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 싸움을 하라고 하느냐 하면은 지금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변에 있는 모든 적들을 제압시키고 너희들에게 안식을 주는가, 그때 너희들이 아말렉 백성을 꼭 찾아서 없애버리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미 안식을 주었으니까 다 항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나안 7족들도 다 죽었고. 그런데 왜 꼭 아말렉 백성은 두고두고 봐버리라고 그러는가? 출애굽기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왜 그러는가? 그말이어요. 그러면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나왔을 때 아말렉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의 갈길을 막았거든요. 시내산 전 사건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면은 여호수아가 대장으로 나가 싸웠는데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은 여호수아가 지고, 그러니가 아론과 홀이 모세의 손을 받처드니까 이겼어요. 그래서 이것을 책에다 기록해서 대대로 아려라.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이시다. 그렇게 했거든요. 대대로 알리도록 해라. 그렇게 했어요. 그 뒤로 아말렉 백성이 나쁜 일을 했다는 말은 없어요. 그런데 얼만큼 고약한 사람인지 옛날에 한 번 그렇게 당했는디 그걸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이제는 광야도 다 지나고 가나안 땅의 복도 다 얻었고 자기들에게 싸우는 군인도 없고, 안식을 얻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야, 아말렉은 찾아가서 없애버리라고 하느냐 그말입니다. 항상 처음 적은 마지막 적이지요. 그것이 성경의 표현법이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처음 적이 아말렉이어요. 하나님이 아말렉과 싸울 때는 특수하게 싸우셨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싸우신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우기는 싸웠어도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젔어요. 하나님이 싸우신 것이어요. 그리고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리라고 했어요. 그때 처음 하늘의 만나를 주시고 반석의 물을 주셨지요. 그 하나님ㅇ 40년을 함게 하시고 가나안 땅의 산물로 먹이셨지요. 처음 하신 것으로 항상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아말렉 백성을 언제 죽이느냐?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평안히 사느냐, 잊어버리지 말아라. 아말렉 백성은 몽땅 죽여라. 그렇게 해서 아말렉 백성을 몽땅 죽이면은 이제 전쟁이 완결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나안 7족속을 죽이라는 말을 여기서 안하고 그들도 다 죽이고 평안했을 때 아말렉 족속은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그래야 처음에 있었던 적이 마지막에 정복되면은 이것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요. 그래서 이 아말렉 백성을 죽이라는 말에서 큰 대미 큰 뜻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장에서는 이제 그 땅에 들어갔으니 하나님 앞에 처음 것으로 제사를 지내고 기뻐해라. 첫 것으로.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것으로 선물을 주셨으니까. 그렇게 해서 마무리를 짓고 27장에서는 언약 체결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주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면은 아멘, 아멘 화답해야 되어요.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서. 거기서 언약체결식을 가지고 그리고 인제 28장에서 체결식에 따르는 복을 말하면은 한 단락이 끝나는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나서 30장 이하부터는 새로운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여개서 아말렉에 대한 정복이 전쟁의 마지막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첫 왕인 사울에게 부과된 명령도 아말렉을 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첫 왕 사울이 이 명령에 순종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와의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한 왕이기 때문에 마치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웠던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대리 왕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아말렉을 쳐서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대적을 정복함으로 왕국적인 직무를 수행해야 되는데 그가 그 일을 시행치 않은 것이어요. 그래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제일 오른쪽 문단을 보십시오. 거기 보며 가운데 한줄 문단이 비어 있지요. 싸우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여자가 다른 사람의 음낭을 잡으면 그 손을 잘라서라도 음낭을 보호하라. 음낭은 생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한번 적용해 보라고 괄호를 쳐보았습니다. 이것은 원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싸우는 이야기에요. 우리도 싸울 때 안경낀 사람 뺨 때리지 말고 넥타이 맨 사람 멱살잡지 말고,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지요. 구약 때는 이처럼 여자의 손목을 잘라서라도 생식의 복을 보호하는 것이 신명기에서 주신 복이지요. 손목을 잘라서. 그러면 다른 사람의 생식의 보존을 위해서 손이 잘렸지 안해요. 그렇게 해서라도 말하자면은 하나님이 기업의 땅에 심으신 생명의 복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요. 다른 사람의 손목을 잘라서라도. 생명의 약속이 이렇게 보존되는 것이어요.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직접 누구하고 싸울 때 어떻게 싸울것인가, 적용해도 될 것인가? 그쪽으로 적용하지 말아라.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에서 먼저 적용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실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봐야 된다. 그런데 구약 때는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이 생식의 복이고 가나안 땅의 복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나 오늘 아침에서 설교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했어도 다 죽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복을 주셨는데 이제는 소위 고자된 자도 잃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주셨다. 왜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주었으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음낭을 잡아서 위협을 받는 정도가 아니어요. 그렇게 할 수 없는 복을 주신 것이어요. 하늘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니가 땅의 가나안과 하늘의 복을 대비시키면은 이처럼 그전에는 음낭을 보호하도록 해서 주신 복이 이제는 음낭의 보호가 아니라 음낭과는 상관이 없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주신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이쪽에서 먼저 설명해야 된다. 그리고 인제 싸울 때 어디는 잡아도 되고 어디는 잡으면 안되는가? 일단은 그렇게 적용되지 않겠지요. 왜 어떤 사움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복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멱살잡지 말라는 것과 상관이 없다. 한 마디로. 그러면 지금은 아무데나 발치기 해도 좋은가? 그것은 지금 정상적인 상식으로 분별한 것이지 성경을 적용해서 성경에서 어디는 잡지 말하고 했으니까 지금도 싸울 때는 어디는 잡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말입니다. 지금은 정상적인 분별력과 상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제부터는. 그러니까 태권도할 때는 가리우는 데가 정해져 있지요. 어디어디 가리우고. 나머지는 맞아도 뼈는 부러져도 괜찮은 모양이어요. 다른데는 위험하니까 안되고. 그리고 권투할 때도 허리끈 밑에는 때리지 말고. 인제 그런 것은 급소라 해서 그런 것이지 생식과 관계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생식과 관계있지 급소와 관계된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목적이 달라있지요. 그러니까 이 본문을 착 읽어 놓고 오늘 내가 남편과 싸울 때도 조심해야 되겠구나. 우리 남편이 몇대 독자인디, 그것을 알았다고 큐티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유형적으로 적용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서 주신 복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는 상관없는 완전한 복이 주어졌는가를 선언해 버리면은 이제는 우리가 감옥에 가드라도 그렇게 해서 맞아서 생식력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생식과는 상관없는 더 좋은 소망이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어요. 그렇게 설명해야 된다. 이것은 직접 적용하는 것은 성경 적용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 말입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것도 아말렉이 첫 적인 것처럼 이제 마지막 적을 이기면은 그 전쟁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어요. 그래서 아말렉을 이기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인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정복하신 적은 아말렉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요. 이런 싸움이 구약에서는 없어요. 구약은 이방인과 싸움이지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들, 그런 것과 직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모든 권세를 다 이기셨거든요. 그러니까 신약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공중 권세잡은 자를 이겨라.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그 왕권을 드러내도록까지. 왜? 그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싸울 수 있는 것이어요. 그렇게 말한다. 그가 여전히 지금도 싸우고 계시면은 우리보고 싸우라고 안합니다. 가나안 땅에 평화를 주었지 않냐, 다 제거해 버렸지 않냐. 이제 너희들이 처음 만났던 적을 제거해 버려라. 다 이겼습니다. 이긴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에요. 우리들은 인제 아말렉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잡은 자와 싸우라고 그럽니다. 그가 이기셨기 때문에 교회도 이기는 것이어요. 싸움을 주제로 하는 것이 인제 계시록이지요.
항상 가나안 땅과 하늘에 속한 가나안, 하늘에 속한 가나안 그걸 대비시켜야 되지 직접 우리에 대한 행위의 법으로 끌고 오지 말아라. 구약은 행위 법으로 은혜가 보존됐지마는 신약에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완결되었다. 그것이 먼저 해석할 근본적인 문제에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인지 본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그러면 적용할 수 있는 원리들이지요. 여전히 우리들도 거래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적용까지라도 공정한 거리만 적용해 갖고는 안맞는다. 왜? 바울은 공정한 거래를 못받았어도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했다. 왜? 이것은 복음 안에 거래이기 때문에 손해가 손해가 아니어요. 그것이 복음 안에서 거래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단순히 상황만 두고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당한 장사꾼 되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가나안 땅의 복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가나안 땅의 복을 잃지 않을 것인지, 그것이 신명기 문맥이어요. 거기서 일단은 적용을 해야 된다. 성숙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관계가 드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성숙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숙은 어디서 이루어지냐 하면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관계 때문에 성숙하지, 하나님이 항상 아이로 취급하면은 그는 영원한 아이일 뿐이어요. 그러나 어른 취급하면은 그는 어른 행세를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이 때는 말을 잘 들어도 아이로써 말을 잘 들은 것이지 어른이 되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성숙이라는 개념을 그렇게만 잡으면 오해는 없지요. 우리들은 다 성속한 장자라고 그랬지요. 모세는 아이라고 그랬지요. 우리는 장자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대하시니까. 그런데 이제 구약과 신약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약 자체 안에서 발전이 있다. 모세 안에서 발전이 있다. 출애굽기에서 처음 나라를 조직했을 때와 그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줄때는 말씀이 달라져 있다. 왜 상황이 달라져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 성경 해석법은 율법은 영원히 불변하다. 이렇게 해석할려고 그랬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적으로도 불변하시겠지마는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는 변하신다.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면은 구원이 안된다. 그런데 지금은 왜 변함이 없다고 그러는가? 하나님이 구원을 완결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불변하시다. 그것이 우리가 설명하는 성경해석법이고, 하나님은 만고불변하시다. 그쪽으로 설명하는 것이 우리 신앙고백서의 설명 방식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변하십니다. 비교해 보면 여간 성경을 쉽게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했던 큐티한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어요. 오늘 내가 괜히 재주없이 삼대 독자 만나 싸울 일이 생길란가. 조심해야 되어요. 그걸 건드렀다가는 큰일나지요. 아마 그렇게 읽으면 조금 잘 읽은 것이 될 것이어요. 이걸 읽고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일단 생식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해한다고 해가지고 어떤 사람이 전도할려고 했는데 전도 못하도록 무엇을 잡어버렸어요. 아, 그러면 저주받겠구나. 그러면 영해는 되겠지요. 전도하는 것이 생식하고 번식하는 것인데 전도를 못하게 막아버렸으면은 그 사람의 음낭 잡은 것 하고 비슷하거든요. 이쪽으로 적용하면은 신령하구나 하고 기분이 좋을 듯 한데 성경은 일단은 그 문맥에서 읽어야 되어요. 그것은 생식이지 생식 아닌 것은 상관이 없어요. 일단은. 그러면 일단 신약에서 생식과 관계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식과는 관계가 없는 하늘에 속한 복을 주었다. 그리스도가 그러지요. 이제는 고자도 하나님께 소망이 있지요.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도 소망이 있지요. 왜? 생육하고 번식하는 복을 넘어선 복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맞추어야 된다. 구약 때는 가나안 땅의 복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손을 잘라버리라고 한 것이어요. 그러나 이제는 손을 자를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도 만질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을 주어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가 바울은 즐거이 죽을려고 그런 것이어요. 장가도 못간 사람이어요. 즐겨 죽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보다 더 좋은 소망입니다. 그쪽이 진짜 적용입니다. 항상 역사적인 발전에서 먼저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 역사 안에서 우리 개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봐야 됩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