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4장
28장으로 찬양합시다. 신명기 24장입니다. 신명기 24장에도 여러 율례들이 나와 있습니다. 1-4절은 버린 아내를 다시 취하지 말라. 그것이 주 내용입니다. 22장13-21절에 있는 말씀과 비교하면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22장에서는 약혼했는가, 전쟁에 나가갖고 죽으면은 결혼못할 것이니까 돌아거라. 해갖고는 이미 주신 복을 전쟁 때문에 잃지 아니하리라. 이미 주신 복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잃지 않고 누리리라는 것이 22장에서 강조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잘못 기록되었습니다. 22장1절은 5절로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5절에 보면은 새로 장가든 자로 아내를 즐겁게 하라. 그렇게 말합니다. 장가들었으면은 1년 동안에는 모든 의무를 면제해 주어요. 그리고 집에서 평안히 쉬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를 즐겁게 하도록. 그러니까 그가 장가를 들었으면은 어떤 국가적이 의무가 있다 할지라도 아내를 즐겁게 하는 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여기서는 신랑에게 모든 의무를 면제한 목적은 아내를 즐겁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부부질서에다가 최상의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22장13-21절은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잇느냐 하면은, 아내의 처녀성을 의심해서 그 여자를 비방했을 경우에 어떻게 그 아내를 보호할 것인가, 그런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녀성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그냥 기분이 나빠요. 그런 경우 아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22장은 이 여자 장가들어서 보니까 이 여자 처녀 아니드라. 잘못하면 그 여자가 죽어요. 그럴 경우 만일에 그 여자는 처녀가 확실한 경우 평생 버리지를 말아라. 그런 내용이고, 24장1절에서는 그런 수치스러운 일하고는 다른 종류입니다. 만일에 처녀가 아니면 이혼증거를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니라 죽여야 되지요. 그러나 여기는 그런 경우는 아니어요. 마태복음 5, 19장, 또 고린도전서 7장과 비교해 보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버린 아내를 다시 취해서는 안될 이유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4절에 보면은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아라. 이는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미 몸을 더렵혔기 때문에 다시 얻지 말라고 합니다. 그 전에는 제가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이 문맥을 잘 살피지를 못해서 미움받은 여인의 권리 보호 쪽에다 강조를 두었어요. 미웁다고 해서 버렸다가 또 이쁘다고 데려오면 쓰겠냐. 그쪽에다 두었었는데 이 문장을 다시 보니까 아내를 버렸는가, 그가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 그리고 그 남편도 죽었는가, 안그러면 쫓겨났던가. 그 여자가 자유롭게 되었어도 너도 다시 그 여자를 데려오지 말아라. 왜 몸을 더렵혔기 때문에. 그것이 강조점이어요. 물론 본래 처녀가 아니었으면은 죽지마는 데리고 살다가 좀 기분이 나빠요. 요새 아라비아 진영 같으면 당신 집에가 그렇게 말로 세 번 하면은 결론 이혼합니다. 하여튼 조금 기분이 나빠요. 해서 보냈으면은 다시 데려올 수 없는 경우는 어느 때냐, 그 여자가 다른데 시집갔으면은 데려오지 말아라. 이미 몸을 더렵혔으니가. 그것이 지금 마태복음 5장31-32절에서 강론하고 있는 핵심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아내를 버리면은 이혼증거를 써주라고 했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렸으면 남자 잘못입니까? 여자의 잘못입니까? 남자의 잘못이지요. 그러면 그 본문을 보면 마땅히 남자를 책망하는 본문으로 되어 있어야 될 것이어요.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남자를 책망하는 본문으로 되어 있어요. 만일에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렸는가, 그리고 다른데로 장가들었는가, 그러면 그 남자는 음행한 자다. 그렇게 분명히 남자를 책망해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을 보면은 이혼증거를 써서 아내를 버리는데 필히 이혼할 이유가 아니거든요. 음행한 연고가 없으면 이혼할 이유가 안되어요. 그 외에 아내를 버리면은 남자 너는 나쁜 놈이다. 그렇게 말이 진행되어야 우리 흐름에 맞겠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 여자로 간음하게 하는 자요, 버리운 여자에게 장가든 자도 간음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그러면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지 말아라. 만일에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렸는가? 그 여자를 간음시킨 것이다. 버리운 여자에게 장가들었는가? 이 여자는 음행한 연고없이 결혼했으면은 구약 식으로는 죽겠지요. 신약에서는 이혼하면 되는데, 그 버리운 여자에게 장가든 남자도 간음한 것이다. 음행한 여자를 얻었으니까.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마태복음 5장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서는 새로운 음행이 무엇인가? 새로운 결혼질서를 설명해 줄려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에게 말한다. 이혼증거를 써주면 아내를 보낼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너에게 이르노니 만일 그렇게 여자를 보내면 여자를 간음시킨 것이고 그 여자를 데려오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다른데 시집갈 수 있어요. 없어요. 그 여자를 데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누가 데려가야 되겠어요. 그 본 남편 밖에 데려갈 방법이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음행이 되어버리니까. 그것이 신약에서 가르키는 방식이어요. 그러니가 마태복음 5,6,7장에서는 특별히 5장에서는 새로운 어떤 형식, 규칙을 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옛 율법을 새로운 질서로 대치시키는 것이어요. 만일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면 되는가? 보니가 안되요. 그 여자가 갈데가 없지 안해요. 갈데라고는 자기 남편에게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요새 우리들이 그냥 합법하게 이혼했으면 그냥 끝하는 것과는 성경은 다르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관점이 옳지요. 만일에 어떤 여자가 자기 죄로 이혼을 당한 사람은 다시는 교회의 예식으로 결혼할 수 없다. 왜 하나님이 이혼을 금지했는데 자기 식으로 범죄해서 결혼에 대해서는 죽은자가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다시는 교회 안에서는 결혼할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만일에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을 했는가. 정 그렇게 이혼할려고 하는가. 별거해라. 그러나 다시 그 사람과 만나 살아라. 혼자 지내느니 다시 그 사람과 살아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음행한 연고 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인제 음행 건이 걸리면 아따 걸렸구나, 하고 그냥 일을 볼 것인가?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근본적인 문제는 용서에 대한 문제에요. 법적인 문제가 아니어요. 그러나 법적으로 말하면은 음행한 연고 외에는 못버린다. 그런데 우리 신앙고백성에는 한 가지가 더 붙어 있어요. 무엇이 더 붙어있느냐 하면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버리는가, 그러면 이혼이 가능하다. 물론 고린도전서 7장에도 그런 비슷한 말은 있어요. 그래서 국가에서 서로 동거하라고 명령을 해도 안들어요. 그러니까 합법적인 권한자가 말을 해도 안들어요. 그러면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거든요. 음행의 죄는 없다고 해도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어요. 그러면 이혼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경우에도 혼자 살든지 다시 그 사람과 합하든지 해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만일에 그런 것을 합법적인 이혼을 빙자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은 그 사람은 음행한 자에요. 법으로는 자유가 되었지마는 성경적인 의미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남녀로 지으셨고 한 몸으로 지은 것을 사람은 나눌 수가 없다. 음행한 것만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법적으로 끝났으면 자유, 그것은 일반 법 개념이지요. 그런 법 개념으로는 가령 간통죄를 그전에는 쌍벌죄로 둘다 다 감옥에 가두어버렸는데 요새는 안 가둔다. 그냥 결혼 상대자에게 벌금만 내면 돼. 둘이 산 것은 좋고 싫고 사랑인데 사랑을 강제적으로 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냐. 그것은 일반 계약법의 의미에요. 계약이 끝났으면 되지 계약을 강제적으로 맺을 수 있냐. 더구나 사랑을. 그러니까 둘이 싫어서 음행이 벌어졌으면은 그 약속을 깨뜨렸다는 의미로 많은 돈은 물어야 되겠지마는 감옥에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새 법 추세에요. 그건 일반 법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마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개념은 부부 문제는 단순히 둘 이 약속하는 그런 개념 정도가 아니어요. 그러니까 믿는 신자는 법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그것이 그 다음 결혼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는 그 다음 문제에요. 달리 생각을 해야된다. 인제 더 빠져나가는 방법은 상대가 결혼하도록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너 걸렸으니가 나는 자유다. 그때는 법적으로 가능하지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7장은 나는 너를 화목 중에 건졌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면 왜 여기서는 이혼을 허락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는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그런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 완악함이라는 것은 그들이 죄 아래 있다는 말이지요. 죄 아래 있어서 싫다고 버리는 데 어떻게 해. 그러냐. 이혼증서를 주어라. 그러나 너는 다시 데려와서 몸을 더렵힌 여자를 아내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것이 구약식 정결 방식입니다. 그러면 실은 그 여자를 버린 남자가 잘못이지요. 그런데도 여자가 몸을 버렸으니 데려오지 말라고 합니다. 남자가 총각이냐 아니냐 일체 안다져요. 여자 이야기만 따져요. 그러면 아주 고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는 남자가 머리고 그러니까 남자에 대해서는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지 않는데 많은 여자를 둘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여자가 많은 남자를 둘 수 있도록은 되어 있지 안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율법이 진행되니가 이렇게 설명한 것이어요. 남존여비 사상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세 개념으로 남자가 머리고 죄 때문에 많은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손대면 안되어요. 그럴 뿐 아니라 몸을 버린 여자는 데려오면 부정하다. 이스라엘 처녀라도 시집갔는가, 의심이 생기면 조사해 보아라. 그러나 괜히 쓰잘데 없이 의심을 주었으면은 그 여자는 평생 흠잡아서 보내면 안된다. 그러나 사실로 처녀가 아닌 것이 드러났는가, 그를 죽여라. 왜, 몸을 더렵혔으니까. 구약식 방식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그러면 지금도 처녀 아닌 사람은 못데려올 것인가. 그런 결혼법을 지금 말하고 있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는 한술 더 떠요. 몸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그래갖고는 자기 맘대로 연애하고 살다가 이 남자가 진정 사랑이로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은 처음 해보고 그전 것은 전부 가짜요. 그러니가 무효여. 그러면 몸으로는 별 짓을 다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요새 현대철학적으로 해석을 해버리니가. 인제 의미가 없어져 버리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말라기서는 말하기를 많은 여인이 있을 지라도 하나씩 지었지 않냐. 그러니가 일남 일녀가 한 몸이 되도록 지었지 않냐. 그러니까 사람은 나누지를 못한다. 그러나 모세 때는 죄 아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본래라 그말은 영원법이냐. 그런 것이 아니다. 아직 아담이 범죄한 뒤로는 죄가 지배하는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죄가 지배하기 전 본래 시작점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자가 안간 것이 좋겠다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느니라. 구약 때는 생육하고 번성해서 아들 안낳으면 저주예요. 그런데 신약 때는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느니라. 바울은 나처럼 살아라.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요. 그러니까 본래 그렇지 않다는 말은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완악함과 대조되는 의미로 본래는 아직 죄가 지배하기 전에는 그런 말이지 본래 그것은 영원법 개념 그쪽으로 돌려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항상 그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 됩니다. 맷돌은 전당잡아서는 안되어요. 전당을 잡을려면은 주인이 들어가서 잡으면 안되고 주인은 문 밖에 있고 물건 주인이 그것을 가지고 나와야 되어요. 그런데 전당 잡을 것이 없다고 해서 맷돌은 윗짝이든 아래짝이든 하옇튼 맷돌은 손대면 안되어요. 자, 이런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출애굽기에서 그런 것을 강조하면은 법적인 통치에다 강조를 두는 것이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데 기업에서 순종하고 복받고 살아라. 하는 것이 주 내용이거든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데 거기서 맷돌짝을 가져가 버리면은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굶어 죽어버려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무리 빚에 빚을 저서 다 빼앗겨도 자기 밥먹을 것은 갖고 있어요. 왜, 곡식을 맷돌에다 갈면 먹을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무리 빚을 저도 안죽을 것이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셨으면은 그가 어떤 의미로 빚을 저도 형제가 그 기업에서 무엇을 빼앗아가면 안되어요. 그러니가 빚을 주면은 담보물을 주거든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자까지 취하지 말라고 그랬지요. 신명기에서도 그런 말을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담보물을 취하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묘한 말같지요. 이자는 취하지 말라고 하면서 잠보물을 가져간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 담보물을 가져가느냐. 그 사람이 옷 한벌이 있으면 그 옷을 가져가요. 그래 갖고 저녁이 되면 이 옷입고 자라고하고 그 다음 날 도 가져갑니다. 아주 고약한 일이지요. 그런데 담보물을 취할 때도 빚쟁이들이 와서 그냥 빼앗아 가지 말고 그 빚을 진 사람이 자기 것을 가지고 나오도록 해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안갖고 나오면 못빼앗아 가요. 한 마디로 하면. 빚쟁이는 들어가서 수색해서 못가져가. 그러니까 이 사람은 빚에 밎을 저도 안굶어 죽겠지요.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니까. 이 율법을 지키면은 어떤 가난한 자도 굶어죽는 법은 없어요. 그리고 어떤 가난한 자도 자기 집에 자기 좋은 남겨두어요. 왜. 빚쟁이가 들어와서 수색해 갖고 못갖져가거든. 가지가 가지고 나와야지. 그렇게 하도록 했다. 요새 우리 법 같으면은 가령 어떤 방에 물건이 있으면은 주인이 손대야 되지 빚쟁이가 와서 마당에 내놓는다거 하면 안되지요. 안그러면 집달 리가 내어 놓아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비록 그가 방세를 못내서 물건을 놓아두고 도망쳐 버렸어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되어요. 그런 것은 이런 긍휼의 법을 반영한 것이 될 것이어요. 그것은 계약관계에서 그런 것이지 어떤 사람이 물건 갖고 와서 우리 집 마당에 놓아두고 손만대바 그러면 안되지요. 그것은 계약관계가 아니어. 계약관계에 있는 데 계약을 이행 못했다 해가지고 말하자면 물건을 내놓아버리겠는가, 그러지는 말아라. 우리 나라 법도 그런 것이겠지요. 계약관계가 아닌데 괜히 우리 마당에 놓아두고는 나보고 봐주라고 하면 안되지요. 그건 볼 책임도 없고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이어요. 맷돌은 전당잡지 말아라. 유대인들도 누가 빚을 졌으면은 우리 같은 쫓아가서 멱살을 잡고 가두어버려야 되지. 예라 빚 못받을 바에야 너 고생이나 해봐라. 하는데 유대인들 같으면 형제에게 그럴 수 없다. 형제가 이방인에게 욕을 먹게 하겠는가? 내 집에 와서 종살이 해라. 그리고 갚아라. 그러니가 그는 빚 갚도록 굶어죽는 법이 없고 왜? 빚을 준 사람 집에서 살고 있으니까. 자기 밥먹는 것은 따논 일이고 그리고 거기서 버는 것으로 빚을 갚아나가요. 그러니까 이방인에게 부끄럽게 되는 법이 없고 형제가 형제를 가두는 법이 없어요. 그것이 유대인들이 거래 방식이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조금 달라가지고 기업들이 그 짓을 해요. 돈을 많이 쓰고는 부도를 내면은 자, 부도낼려면 내봐라. 왜? 그 기업이 부도내면은 국가 망해버리니까. 은행들은 얼만큼 썼거든. 그러니까 빚을 질려면 조금 지면 안되고 일조원만 저라. 그러면 이건 절대로 부도 안난다. 요새 기아 부도사태가 늦어진 것도 총선이 다가오거든. 이것 부도냈다가는 큰일나요. 그러니까 총선이 끝나오도록까지는 유야무야 될 것이어요. 요새는 그래요. 빚을 많이 저갖고 사는 방법도 있기는 있구먼. 이런 것을 문자적으로 적용해 가지고 요새는 맷돌이 없지요. 형제를 후린자를 죽이라고 했는데 출애굽기 21장26절에는 형제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사람을 후린자는 일반적인 통치 원리에요. 출애굽기는 나라 조직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이야기로 사람을 후린자는 죽여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신명기는 이스라엘 중 한 명, 곧 네 형제, 만일에 그 형제의 생명을 노략질했는가. 그를 죽여라. 왜냐하면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는 복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데 그 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유괴를 하겠는가? 그를 죽여라. 그것이 신명기에서 표현하는 방식이어요. 그러니까 똑같이 유괴범은 죽이라고 했을 때까지라도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강조점이 다르지요. 가령 우리가 자식들을 책망한다 치십시다. 형이 동생한테 야단하고 그러면은 그 환경에 따라서 야단치지 말라는 말이 달라요. 가령 밥먹을 야단을 치면은 개도 밥먹을 때는 안건드린다고 하드라. 그러겠지요. 밥이라도 편히 먹이라고 그러겠지요. 그런데 이 동생이 마음이 약해 가지고 그냥 형님 말도 감당을 못하면은 그때는 밥먹는 이야기가 아니라 달리 말하지요. 똑같은 동생을 살살 다루라고 할 때까지라도 어떤 목표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표현법이 달라지지요. 인제 출애굽기는 나라 조직법이기 때문에 사람을 유괴한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고,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복을 주었는데 거기서 이스라엘 중 한명, 네 형제 중 한명을 유괴했는가? 가나안 땅의 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사람을 노략질한 자를 죽여라. 이렇게 표현 방식이 달라졌다. 그러니가 그런 표현법은 신명기 전체의 주제에 맞아들어가는 표현법이지요. 그러니가 항상 그 문맥을 따라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문둥병자를 철저리 격리시키라고 했는데 내가 미리암을 어떻게 격리시켰는가를 잘 기억하고 제사장 말을 따라서 힘써서 주의해서 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문둥병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것이거든요.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였어요. 그런 선지자도 하나님이 그를 진밖에 가두었어요. 글로 말했지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침을 벹어도 부끄럽거든 네가, 그래서 진밖에 가두고 7일 동안 이스라엘 진이 진행을 못했어요. 그래서 문둥병자에게 조심해서 잘 해라. 하면서 누구 예를 드냐 하면은 내가 미리암에게 어떻게 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그러니까 어떤 문둥병도 하나님의 진을 더렵혀서는 안될 것이어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약의 땅은 거룩한 땅이거든요. 빚진자의 형편을 돌아보라. 그랬는데, 22장26,27절은 출애굽기는 법적인 문제가 더 강조입니다. 26,27절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것 뿐이라. 이는 그의 살이다.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은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니라. 여기 출애굽기에서도 자비를 강조합니다마는 만일에 가난한 자에게 덮고 잘 옷이 없도록 하겠는가? 내가 너를 벌주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판결하신다는 데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가 덮고 너를 위해서 복을 빌도록 해라. 그러면 내가 너를 복주고 그것이 너의 의로움이 아니냐. 말이 바꾸어져 있어요. 가난한 자가 덮고 자게 하라는 것은 같은데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은 내가 너를 벌주리라. 하면은 출애굽기고, 신명기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가 덮고 자면서 너를 위해서 복을 빌도록 해라. 그러면 내가 복을 주고 그것이 너희 의로움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가 이유가 바꾸어져 있지요. 출애굽기는 법적인 언어로 판결하는 언어를 쓰고 있고, 신명기는 네가 그를 덮어주며는 그가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은 그것이 네 복이고 네 의로움이 아니냐.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 차이점이 어디가 있는가를 아시겠지요. 주시는 복도 그가 너를 축복하면은 내가 네게 복을 주마.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옛날 말도 거지도 지나가다 우리 집 대문에 대고 침을 안벹도록 그렇게 살아야 된다. 거지하고 나는 아무 상관이 없지. 지나가는 거지도 이 집을 지나가면서 복을 빌도록 해야 되지 침벹게 해서는 안된다. 만일에 가난한 거지라도 그 집 앞을 지나가면서 침을 벹으면 그 집은 벌받는다. 말하자면 안믿는 세상에서도 옛 말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은 이번에도 제일 유명한 장례식이 테레사 수녀지요. 사람 많이 모이드먼. 옛날에도 집안은 죽으면은 거지들이 떼거리로 따라다녀요. 왜냐하면 그집에서 많이 먹었거든. 그래서 그 사람 살아서 먹고 죽어서 먹고 그래서 많이 모이는 것이어요. 그러면 그 집이 복을 많이 받는다. 그 유대인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런 의식이 있어요.
아라비야 진영 같은 데는 빈부차가 굉장히 심합니다마는 이란 사태가 났을 때 이락에서 요르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난했을 때도 사는 것이 요르단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 구제하니까 그렇고 그런데는 빈부 차이가 많은데도 서로 조화있게 사는 것은 부자인 형제가 자기 마호멭교 자기 형제를 취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빈부차이 때문에 왈력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이런 명절쯤 되면은 그의 대문에는 가령 인도 같으면 돼지가 몇 마리 걸어져 있지요. 그러면 지나가는 가난한 형제가 한 근씩 떼어갈 수 있다 그말이지요. 부자 형제가 갖다 놓았으니까. 말하자면은 기독교 밖에도 그런 사랑의 의식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내면 직접 복받으니까 거지 안통해도 되겠지요. 하옇튼 십일조는 안내면 큰 벌을 받는디 구제 안했다고는 괜찮해요. 그래서 빚진자의 형편을 돌아보라고 했는데, 출애굽기는 법적인 관계로 말씀하고, 신명기는 네가 가난한 자를 덮어주면은 그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마. 그렇게 말씀한다. 가난한 품꾼의 삯은 그날에 주어라. 그랬습니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가난하니가 품삯을 사모해요. 품삯 받기 위해서 일했거든. 그러니가 그 날에 주라는 것이어요. 그러면 요새 소위 기독교 국가는 주급이고 우리는 월급인데 그러면 이 율법을 범했는가?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것을 꼭 그 날에 월급주면은 성경대로 하고 그 날 안주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몇일 만에 월급을 줄 것인가, 그런데다 강조를 둔 것은 아니어요. 이것은 가난한 사람은 하루의 품삯을 사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하루를 수고하고 굶어서는 안되어요. 그러니까 그 날에 삯을 주어라. 만일에 그가 그 배고파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가? 내가 그 기도를 듣겠다. 그 말이지요. 가난한 사람 호소를 들을 재판장이 없지요. 하나님이 내가 그 기도를 듣겠다. 벌주겠다 그말이어요. 이런 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 제가 적용할 때는 제일 처음에 있는 1, 4절 문단하고 제일 끝에 있는 문단만 적용하고는 나머지는 그냥 놔두었어요. 종이도 좁고 그러니까 나머지는 기독론적인 해석을 않고 배놓았습니다. 앞과 뒤만 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의 품꾼의 삯을 그날에 주라는 말을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런 말이어요. 완결된 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선언을 하고 그 다음 그 역사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개인적인 적용은 이차적입니다. 그러면 일차적으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자의 품삯을 그 날에 주도록 율법을 주셔서 가난한 자의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가 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에서 주신 복이어요. 우리에게는 이렇게 주시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완전한 교제를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가 없지요. 교회 자체까지라도 많이 거둔자나 적게 거둔자나 부족함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교회 설립의 토대인데 이제는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가 없다. 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니까. 이것이 일단계로 풀 이유에요. 이것은 직접 우리와 관계된 문제는 아니지요. 일단은 역사적인 상황에서 선언해 주고,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교제를 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돌볼 것이냐, 가난한 자는 주님 오시도록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했을 때 단순히 그날 삯을 줌으로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케 했으니 그 몸을 주신 은혜로 형제를 돌아 보아라. 그런 것이지 월급 주는 문제로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사업하는 사람이 있으면은 그러면 이것은 직접 월급 문제를 말하지 안해도 내가 사업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인제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의 적용을 알고 있지요. 네 위에 주인이 있으니 종을 학대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마땅히 그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주인으로 가난한 형제를 보살펴 주어야 되어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일이다. 그러니가 항상 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봐야되지 직접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 각각 자기 죄 때문에만 죽으리라. 그런데 출애굽기나 신명기의 십계명에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있는데, 만일 우상을 섬기면 3,4대까지 벌을 주고 그렇지 않고 나를 사랑하면은 천대까지 복을 주리라 그런 말이 있지요. 굉장히 억울한 말이 있는데 비교해 보니까 억울하지 않지요. 천대까지 복을 주니까. 복을 주는 것이야 주니까 좋지마는 벌은 받으면 안되지. 어떠튼 불공평해. 복은 하나님이 좋아서 준 것이가 공짜로 주었지마는 벌은 안받을 것을 받으면 안되지. 그러니까 어떠튼 불공평해. 말하자면. 그런데 여기서는 보니까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으리라. 에스겔 18장이나 그런데도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으리라.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채결하는 모법이어요. 그것은 나라를 세우고 있는 모법이어요. 그러니까 다른 죄에 대해서 네 아버지가 범죄하면은 3,4대까지 벌받는다고 되어 있지 않고 우상 섬긴 죄에 대해서만 그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두고 하는 이야기예요. 우상 섬긴 죄만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두고 하는 이야기다. 그러면 왜 십계명에서 우상 섬긴 죄만 그렇게 고약하게 다루는가?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겠는가? 가나안 땅의 신을 섬기겠는가? 지금 언약식의 이야기예요. 지금 나라를 조직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개인들을 상대로 해서 언약을 맺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나라의 몸법이어요. 구약은 항ㅅ아 나라가 토대지요. 개인을 중심해서 도덕적인 모델을 삼고 지금 채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나라예요.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너희 나라신인 나를 버리고 가나안 땅의 신을 섬기겠는가, 그러면 그 나라를 어떻게 벌줄 것인지, 그쪽에다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러나 신명기에서 하고 있는 말은 개개인이 어떻게 순종해서 복받을 것인가 그런 문제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만일에 십계명 같은 그런 벌이 적용되어 버리면은 다른 죄는 몰라도 우상 섬긴 죄만큼은 조상들 죄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니가 목표는 무엇이겠어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는 법은 없지요. 가령 광야에서 40년 유리했으면 조상들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유리했거든요. 그러나 가나안 땅은 기업으로 주었기 때문에 각자 그 기업을 누리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그 기업을 잃는 법이 없으리라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이어요. 그래서 에스겔 18장 같은데서 그렇게 말하지요. 아버지가 포도를 잡수셔서 아들의 이빨이 시다고 그런 말을 못하게 하리라. 너희들은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이 범죄해서 우리들이 잡혀왔다고 그러는가? 아니다.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으리라. 그런 말을 하고 있거든요. 거기서는 한 마디로 핑계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이지요. 자기들은 포도 맞도 안보았고 조상들이 먹었는데 이빨이 시다고 유전되는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으리라. 조상들 핑계를 못하게 하겠다. 그런 말이지요. 의도 조상들의 의를 자랑하지 못해요. 의로운 그 사람만 살지 후손들이 못살아요. 죄도 그래요. 그 사람만 죽지 후손들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완전한 판결자로서 자기 백성을 추수리고 있는 방식으로 에스겔서에서 말을 해요. 그러니까 이 율법은 무엇이냐 하면 가나안 땅에 복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무네 잃어버리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 섬긴 사람은 3,4대 벌주면은 어떤 재판관이 그렇게 벌주지 못해요. 국가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재판관들이 하고 있는 일이지요. 누가 죄지었다고 당신 3,4대 벌받아. 이것은 이조 때나 하는 이야기고 재판정에서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재판장은 당사자만 판결할 것이어요. 그러니가 지금은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서 유업의 복을 누리는 삶의 문맥에서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가난한 자의 송사를 억을케 말라고 그랬는데 신명기 23장에서 말했을 때는 공평의 원리가 핵심입니다. 부자인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재판해라. 하는 문맥이 출애굽기 23장이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맥은 아니지요. 여기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가 아니라 가난한 자를 말하는 것이 강조점이어요. 똑같은 말을 하는데도 출애굽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평하게 재판하라는 문맥에서 말씀하고, 신명기는 부자는 빼버리고 가난한 자를 억울케 재판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어요. 왜 가난한 자는 힘이 없으니까 잘못하면 빼앗기거든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었으니 그가 가난하다고 해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어요. 강조점을 가난한 자에게 두고 있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은 차이점을 아니가 그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그냥 알 수 있습니다. 관주 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그 관주를 비교해 보면 대개 나와 있지요. 이것이 신명기고 출애굽기구나, 아, 똑같은 말을 무엇할려고 두 번이나 했는고, 차이가 있지요. 출애굽기는 나라를 조직하는 통치법이고 그리고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유업의 복을 누려라. 순종해서 복을 누려라. 그래서 강조점이 다르다. 19, 20절을 보면은 수확할 때 고아와 과부의 몫을 남기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레위기 23장을 보면 수확할 때 밭 모퉁이는 베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고, 19장에서는 수확할 때 가난한 자의 몫을 남겨라. 그리고 뒷돌아서 이삭을 줍지 말아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와 이 신명기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하면은, 레위기는 거룩한 분깃,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거룩하지 않은가? 몫 그것이 레위기의 강조점이어요. 어떤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속한 몫이고, 어떤 것은 제사장의 몫이고, 어떤 것은 이스라엘의 몫이고 어떤 것은 이방인의 몫인가? 그런 거룩, 거룩의 몫을 말하면은 레위기에요. 그러니까 레위기에서는 다 수확하지 말고 1/4 밭 모퉁이는 남겨야 되고 그건 가난한 자의 몫이어요. 남기라 했을 때도 강조점은 어느 영역까지는 먹고 어느 영역까지는 남길 것인가, 그 영역 몫에 대한 것이 레위기에 표현법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고 대충 거두워 드리고 가난한 자를 먹도록 해라. 일정 양을 남기라는 데에 강조점이 아니라 대충 수확하고 남겨라. 그것이 신명기에서 표현하는 방식이어요. 그런데 우리 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보리수확만 해도 그 다음 식구들을 동원해서 다 줍고 그리고 그것을 학교로 가져가기도 하고, 요새는 그런 것을 모르지요. 그 안줏으면 안되어요. 물론 감이야 바쁘니까 까치가 먹으라고 놔두지 그것도 손에 닿으면 따먹을 것이어요. 하도 높으니까 까치 먹으라고 뇌둔 것이지요. 먹을 것인데 우리 나라는 말갛게 쓸어버리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한번 지나갔으면 다시 와서 손을 놀리면 안되어요. 그런데 레위기는 몫을 남기라는 것이 표현법인데, 몫을 남겨라. 왜? 레위기는 거룩한 분깃이 문제거든요. 어디까지는 거룩하고, 밭 모퉁이는 남기고, 이런 표현법인데, 신명기는 모퉁이를 남겨라. 이런 것보다는 말하자면 모퉁이는 수확하지 말고 대충대충 수확하고 다시 돌아와서 수확하지 말고 한번 지나가면 놔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가난한 자도 먹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도 그 밭에서 먹을 수 있도록 말하고 있다. 이 율법을 지키면 주시는 복이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리라. 범사에 복을 주리라 하면 좀 넓어지니까 네가 네 손으로 수고한 것에 가난한 자의 몫을 남겼는가? 가난한 자를 생각하고 대충대충 수확했는가? 네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 율법을 명령하신 근거를 무엇이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22절에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18절에도 가난한 자의 송사를 억울케 말라고 했을 때 애굽에서 종되었던 너를 속량했지 않느냐. 종살이를 말하고 있지요. 네가 종이 되었는데 내가 너를 속량해서 내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모든 복으로 주었다. 그런데 너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빼앗으려 하느냐? 그런데 너는 가난한 자를 굶게 하고 말갛게 수확할려고 그러느냐. 그러지 말아라. 그들을 종에서 건져내서 아들 삼고 그렇게 속량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고 가나한 땅을 기업으로 주었으니 가난한 자를 억울케 하지 말고 그리고 수확할 때 가난한 자도 함께 수확하도록 너는 앞서 가고 가난한 자는 뒷따라가면서 나머지 것을 수확하도록 해라. 너는 대충 수확해라. 그런 말이지요. 룻기에도 보아스가 그렇게 했지요. 자기 종에게 말하기를 그 여자 얘를 위해서 이삭을 버려두어라. 그래서 줍도록 해라. 그리고 줍고 나서도 더 주었지요. 네가 시모에게 얼만큼 잘했으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먹으라. 더 주었지요. 그 사람은 그렇게 준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했습니까? 그 망한 집의 기업을 물러주었지요. 그 집안은 완전히 망해서 돌아왔어요. 망해서 돌아온 집을 이삭만 가나안 땅의 수확을 함께 걷도록 기업을 잃어버리고 이방 땅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자기 기업으로부터 흘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까지 물려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그 가문에서 다윗이 났지요. 다윗 가문은 완전히 망해버린 가문을 기업 무르는 제도, 형제가 형제의 기업을 물러 주어요. 그 은혜의 제도를 따라서 다윗 왕조가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들이 쭉 쓰여져 있어요. 이제 마지막 것을 기독론적인 적용을 했는데, 거룩을 지키는 레위기에서는 가난한 자의 몫을 남기라고 하시며, 기업에 복을 주시는 신명기에서는 대충 수확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남기는데 어떻게? 가난한 자가 뒷 따라 오면서 수확하도록, 그러니까 가난한 자도 수확을 톡톡히 하는 것이어요. 그것이 신명기 이야기지요. 그리하면 네 손의 모든 일에 복을 주리라. 종되었던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을 기억하고 이 명을 지키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로 그 부요에 참여케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이삭만 살살 흘려주면 안된다고 그랬지요. 이제 주님게서 몸을 주셔서 우리를 섬겼으니 그 사랑의 은혜로 가난한 자를 돌보아라. 형제의 부양자로 살아라. 그런데 우리는 어쩝니까? 성탄절 때 라면 한 상자 내면은 일년 내내 양심이 괜찮하다. 가난한 자가 구체적으로 산자 안산가는 상관이 없어요. 내가 내 양심을 설정해서 어느 정도 선행을 하면 끝나지 그 다음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완전히 행사 위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형제는 위급한 경우까지 항상 같이 있는 것이어요.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케 하셨느니라. 그러니 그가 우리에게 생명의 것을 주셨으니 그것으로 형제에게 공급해서 그 은혜의 일에 동참하도록 해라. 그것이 헌금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적용하면 된다. 여기서 수확법은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지금은 수확해서 아무도 줏으러 안가. 깨끗이 수확해야 되지요. 기계로 하니까 떨어질 것이 없다고. 진짜 말갛게 쓸어버지요. 가보았자 먹을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구제사업은 국가보다는 교회가 하는 것이 더욱 좋아요. 국민 세금으로 하는 것보다는 이런 교회같은 단체가 힘을 합해서 하는 것이 좋다.
우리 나라에서는 농사할 때 이삭 안버립니다. 손이 몇 개라고 그걸 버린답니까. 나락이나 보리나 흩고 나서도 집단에 남아있는 것도 다 수확합니다. 그렇게 하나도 안나가고 수확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남을 줄 때 아까냐. 그런 것이 아니어요. 그렇게 해서 남에게 주어요. 더구나 이런 추석 때, 다른 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제일로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어려운 것이어요. 물론 어른들에게도 조심해야 합니다마는 항상 먹을만 할 때 미리미리 준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명절 음식이라도 명절 시작 무렵에 돌리는 것이 좋지 명절 다 끝나고 나서 남았다고 가져가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더구나 어른에게는 아닙니다. 가난한 자에게도 그런 것은 안맞다. 음식 남아서 비빔밥해서 먹는 것이야 제일 끝판에 상관없지마는 줄만한 음식은 초기에 주는 것이 좋지 다 끝나고 나서 주는 것은 사람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조심해라. 아겨서 자기가 먹더라도 그건 자기가 아끼는 것이지 남도 그러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말이어요.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