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2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책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그분에게 감사할지 그런 찬양에 대한 곡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흑인영가 식으로 무엇을 주라는 이야기, 봉사에 대한 이야기, 소위 부흥성가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배할 때는 부를 찬송이 맻 개 되지 안해요. 더구나 요한복음에 들어가 놓으면 공관복음하고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서 진짜 찬양에 대한 곡이 없으면 요한복음 설교하고는 따라부를 곡이 별로 없을 만큼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느니, 그런 것은 한참 거리가 먼 이야기에요.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그래고 요새 청년들이 부르는 복음성가도 보면은 가사가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딴따라 곡이고, 또 어려워서 우리는 못따라 부르겠드라고요. 그런데 그 가사는 아주 좋은 것이 많습니다. 오늘 부른 곡은 가사도 좋고 곡이 아주 쉽지요. 이스라엘 찬양곡 비슷하게 반복되네요. 그 옛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부른 곡이 있어요. 우리 찬송 같으면 78장이나 79장 그 부분에 있는 데, 그런 것 비슷한데 곡도 좋고 쉽고, 가사도 좋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성경도 잘 알고 음악성도 있는 사람들이 제일로 오염된 것이 교회 찬양입니다. 그런 것이 바르게 됐으면은 우리가 예배하기가 좋을 것이어요. 이번에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이번에 돌아오신 양반, 그 양반도 모르는데 아리랑은 부르지 안해요. 그 노래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냥 외우면 잊어버리는데 노래 가사로 외운 것은 거의 안잊어버릴 만큼 노래라는 것이 특징이 있어요. 그러니까 찬양도 좋은 찬양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볼 때는 하나님이 구하는 백성들에게 더 주신 것 같아요. 누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참으로 소원을 두고 구하느냐. 그러면 아마 좋은 찬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장입니다. 22장 이하에는 여러 율례들이 썩어져서 나오기 때문에 한 장에다가 총괄할 수 있는 제목을 붙이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그래도 22장은 대충 흐름을 따르면은 기업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서로가 보호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그런 규례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규례를 지키면은 하나님이 기업의 땅에서 주신 복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그런 말이지요. 1-4절은 형제의 어려움을 도우라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강조점은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도우라. 그런 말로 반복되어 있어요. 못본채 하지말고 반드시 도우라. 그런 이야기가 되겠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형제의 것을 도우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3장을 보면 원수의 것을 도우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가? 여기 글을 보면 이미 써놓았으니까 알 것입니다마는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라로 조직하시고 통치하는 율법이어요. 거기서는 이방인이라고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어요. 하나님의 통치는 공평해야 되어요. 그런 의미에서 원수의 나귀가 넘어졌는가, 일으켜라. 그런데다 강조를 두어요. 그러나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시고 그것을 누리도록 하는 율법이어요. 실은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이지요. 그러니까 형제의 것을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찾아 주어라.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라. 왜 그렇게 하면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형제가 서로 서로 도와주면은 가나안 땅의 복을 잃지 않고 살게 될 것이어요. 원수까지 도우라는 출애굽기가 훨씬 고상하고 형제의 것을 도와주라는 신명기는 훨신 저급한 것처럼 보이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율법의 강조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건 제가 일부러 찾아낸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3장을 보면은 전부 가난한 자라고 재판을 편벽되이 하지 말아라. 하옇튼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23장에 쭉 강조가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공평한 통치를 해야 되어요. 부자라고 봐주면 안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형제 것이라고 봐주고 원수의 것이라고 안봐주면 안되거든요. 그 공평한 통치의 원리가 출애굽기의 강조점이고 신명기는 형제에게 주신 복을 서로서로 도와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하는 것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준 신명기 율법이라 그런 말입니다. 여기 보면은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면은 못본채 하지 말고 끌어다가 형제에게 돌려주어야 됩니다. 만일에 그 형제가 멀거나 모르는 사람 것이어요. 그러더라도 집으로 끌고 와서 그 사람이 찾도록까지 집에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주어라. 어떤 물건이든지 반드시 네 집에 갖다가 형제에게 돌려라. 알면은 연락해서 돌리고 모르는 그 사람이 찾으러 오도록 보관하고 있고, 그리고 나귀나 소가 넘어지면은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라. 하여튼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그런 말이 반복되어 있지요. 그러면 인제 끌어와서 닭을 누가 주웠는데 누집 닭인줄 몰라서 길렀는데 그 동안 알을 많이 낳았으면 알도 보관했다가 주인에게 줄 것인가? 인제 그런 것이 랍비들이 하겠지요. 여기서는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모이 주어서 낳았으니까 그것은 아마 내 것일 것 같아요. 내가 모이 주어서 낳았으니까 단순히 닭만 찾아가면 될 것이어요. 그래도 랍비들은 어떻게 판결할련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은 여기서는 직접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닭이 알 낳은 것은 별 것이 아니지마는 소가 새끼를 낳았으면은 그것은 이미 오기 전부터 밴 것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낳았다고, 내가 여물 주었다고 내가 먹어버리면 안되겠지요. 그러니까 아마 랍비들이 그런 것 저런 것을 조절을 할 것이어요. 그래서 여기서 강조점은 못된척 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라. 그것이 강조점입니다.
가까운데는 찾아다주고 모른 사람은 집에 두었다가 그 사람이 오도록 보관했다 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모른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그말이어요. 이런 것들이 방법이 많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 가만이 놔두었으면 내가 돌아와서 찾을 것인데 괜히 보관한다고 가져가 버리니까 어디가 있는 줄도 모르고, 유럽 같은데를 보니까 내가 전붓대 밑에서 모자를 읽어버리면 안거져가고 전붓대에다 걸어 놓고 거드라고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가 보관했다가 찾으러 오면 준다고 하지만 누가 찾으러 와요. 그랬다가 안 찾으러 오면 몇일 있다가 내것 하고 먹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요 여기서 강조점은 절대로 못본채 하지 말고 반드시 찾아 주어라. 책임이 그렇게 부과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릴 사람이 없지요. 왜? 형제가 반드시 보관했다가 돌려주니까. 그렇게 되어 있다 그말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율법이다 그말이어요. 남녀 의복을 구별하라고 했는데, 남자는 여자 옷 입지 말고, 여자는 남자 옷 입지 말고 구별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요. 이것이 그 당시 가나안 땅의 동성연애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안 그러면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남녀 질서를 유지하라. 가나안 땅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면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에서 만물을 우주적인 성소로 지으셨을 때에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지었고, 종류대로 지었지요. 각기 종류대로 짓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에요. 만일 그렇게 안되어버리면은 처음 창조했던 질서와 조화가 없어져버려요. 그러면 가나안 땅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그렇게 해서 창조 질서를 두고 하는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 땅의 동성연애를 본받지 말라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은 정확하게 선을 그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다 포함해도 아무 상관은 없습니다. 단지 여기서는 그런 구체적인 죄 보다는 제가 볼 때 22장은 가나안 땅의 유업을 잃어버리지 않고 누릴 것인가, 질서 있게 누릴 것인가, 거룩하게 누릴 것인가, 그런 것이 강조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동성연애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인 유업의 땅에서 남녀간의 통치 질서를 세우는 율법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어미 새와 그 새끼 새를 아울러 취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새의 보금자리를 찾았는데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으면은 어미는 놓아주고 새끼만 가져가거라. 어미는 놓아주고 알만 가져가거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어미와 새끼를 구별하라는 창조 질서 그런 문제보다는 모든 생명은 어미로부터 주어지거든요. 그런데 그 원조를 없애버리면은 근원을 없애버리면은 알도 생길것 없고 새끼도 생길 것이 없어요. 그렇게 돼버리면은 가나안 땅에 생명은 쉽게 없어져 버릴 것이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도 먹고 장수하지 못하겠지요. 그러니까 새끼와 알은 갖고 어미 새는 놓아주라. 그러면 네가 장수하리라. 무엇을 먹고 장수할까요? 계속 새 알 먹고 새끼 잡아먹고 장수하겠지요. 왜 어미가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내가 안잡아도 누가 잡을 것 하고 한꺼번에 잡아버리지요. 너는 어디 가도 죽을 것이니가 하고 잡아버리니까 이건 전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 어법은 큰 고기는 잡고 작은 고기는 못잡도록 했는데, 이 율법에 어긋난 것인가? 이 율법 정신에 따라 그러겠지요. 그래야 계속 자원이 성장할 것이니까. 큰 것은 다 컸으니까 잡아 먹지마는 아직 새기는 커야되거든요. 그러면은 계속 어미를 놓아둔 것이 번식은 잘하겠지요. 새끼는 잡아먹드라도. 이런 것이 아마 고기잡는 방법 때문에 그럴 것이어요. 그물이 코가 크면은 큰 것은 잡지마는 작은 것은 다 나가버린데 작은 것 잡을려고 해야 큰 것도 다 걸려버릴 것인데 아마 그 어법 때문에 그런 방법을 동원할 것이어요. 그러나 하옇튼 그 어떤 사람이 황금거위가 황금 알을 낳으니까 하루에 한 알식 낳는 것보다는 배를 따서 그냥 노다지로 캐면 좋겠구나 하고 거위를 잡아버렸다 그말이지요. 하여튼 어미는 놓아두라. 그말입니다. 이 율례에서 주시는 복은 장수하리라. 그랬지요. 아마 새알 먹고 장수할 것이어요. 이런 비슷한 말은 신명기 14장, 출애굽기 23장, 레위기 22장에 있는데 거기서는 우리가 음식물을 먹는법, 무엇 무엇을 잡아먹을 것인가 거기다 강조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법에다가 맞추어 놓았어요. 그래서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왜냐하면 새끼와 어미는 당일에 죽어서는 안되고, 또 실은 젖이라는 것은 새끼를 양육하는데 쓰는 것이기 때문에 요리 재료로 쓰지 말아라. 이런 말인데 아마 그런 것도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과 연결이 될 것입니다. 8절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고 그랬는데 만일에 새 집을 지으니까 기분이 얼만큼 좋아요. 아마 낙성식을 하고 기분이 좋겠지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고 포도원을 먹게 하고 새로운 집을 짓고 살게 하니 얼만큼 좋아요. 안식이 이루어지지요. 그런데 마침 그날 낙성식을 하다가 누가 떨어져 죽으면 책임이 주인에게 돌아가니까 그 집안 쫄딱 망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업의 땅에서 복을 주셔서 새 집을 짓게 했는가? 마땅히 형제의 생명을 보호할 대책을 세워라. 만일에 네가 집 짓고 좋아해도 거기 누가 올라가다 죽으면은 너는 책임을 저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주신 땅에서 형제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부가시킨 것이어요. 두 종류를 섞어서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19절에도 그런 비슷한 말이 있는데 레위기 19장에서 있는 것은 거룩한 구별에 대한 것이 강조에요. 그래서 짐승을 두 종류로 교합시키지 말고, 또 씨도 두 종류를 섞어 뿌리지 말고, 옷도 두 종류를 섞어서 입지 말아라. 레위기 19장19절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종류의 구별이 거기서는 강조예요. 레위기는 거룩한 구별이 핵심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 신명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구별을 사용한데다가 강조를 두고 있어요. 구별도 똑같이 되어 있지마는 강조점은 사용에다가 더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포도원에다가 두 종류를 썩어 뿌리지 말아라. 또 소와 나귀를 같이 교접하지 말아라. 그리고 석은 옷을 입지 말아라. 사용에다 강조를 두고 있지요. 똑같이 구별을 말하고 있는데 레위기는 종자의 강조, 구별점에다 강조를 두고 있고, 신명기는 그것을 썩어서 활용하는데다 강조를 두고 있다 그말입니다. 왜,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서 유업을 누리는 율법이고 레위기는 거룩한 구별이 강조거든요. 그러니까 똑같이 구별을 말해도 신명기는 구별된 것을 섞어서 활용하는데다가 강조를 두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두 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말아라. 그러나 레위기는 두 종자를 함께 교합시키지 말아라. 종류 자체를 썩어버리는데 강조지요. 교합시키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그런 표현의 뉴앙스들이 조금 다르다 그말입니다. 썩어 뿌리면 받을 벌은 여기서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원수에게 전부 옮겨갈 것이다. 왜 가나안 땅에는 그런 경작법이 없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말이어요. 하여튼 언약에 땅에서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 세계를 그렇게 경영했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위엄의 땅을 경영할 때 그렇게 질서있고 조화있는 경영을 해야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12절에는 「겉 옷에 술을 달라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옷 이야기를 하고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지 안 그러면 일부러 여기다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튼 민수기 15장에서는 안식일날 나무하러 간 사람을 죽였지요. 그리고 나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청색 수를 옷 끝에 달라. 그렇게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앞에 살도록 해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말은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문맥입니까? 민수기를 거역 문맥이고 여기서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성취하고 누려라. 더구나 각기 종류를 섞이지 않도록 하고 누려라. 순종해 복받으라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차이점이 있지요. 그 다음 13-22절은 어느 여자에게 장가를 갔는데 잘 살다가 미운정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처음 장가갔을 때도 처녀가 아니드라 이러고 살살 누명을 씌우면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성문으로 가서 재판을 해라. 그렇게 해서 첫날밤을 지내고 나면 처녀인 흔적을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다가 이 나쁜 자식이 우리 딸을 누명을 씌운다고 고발을 해라. 그러면은 그 남자는 이스라엘 처녀를 부끄럽게 누명 씌운 사실 때문에 매를 때려라. 아마 이 매는 모르겠어요. 39대를 때리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는 몇대 때리라는 말은 없지요. 그러니까 랍비들이 정하든지 그럴 것이어요. 아마 이 사람은 내가 볼 때 서른 아홉 대를 때려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은 이 여자가 처녀의 흔적이 없으면 죽을 판이거든. 그러면 이 앞에도 거짓 증인은 그가 행하고자 한 대로 행하라고 되어 있었지요. 그렇게 해서 악을 제거해라. 그러면 이 여자는 처녀 아니면 죽을 판이니까 서른 아홉 대는 때려야 될 것입니다. 그럴 정도만 아니라 벌금을 내야되어요. 그것도 둘이 입막음 할려고 내면 안되고 재판장이 벌금을 받아다가 친정 아버지를 주어야 되어요. 백 세겔을. 그런데 처녀를 건드려 갖고 장가간 사람은 친정 아버지에게 오십 세겔을 내고 장가가라고 했으니까 아마 오십 세겔이 법정 지참금인 것 같아요. 개인이 많이 주고 적게 준 것은 상관없고 최소한도 지참금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백 세겔은 그 배나 되니가 큰 벌금이 되겠지요. 그 뿐 아니라 평생 이 여자는 못버린다. 신명기 24:1절에 보면은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은 이혼증서를 쓰고 이혼하라고 했는 데 이런 식으로 누명을 씌운 사람은 그 다음에 다른 이유로는 절대로 못버린다. 그러니가 평생 이혼 못한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이 여자는 이 남자가 굉장히 미웁겠지요. 괜히 미운께 살살 소문내다가 매까지 맞았겠다. 돈까지 물어 주었겠다. 그 다음에 인제 평생 못버리게 했으니까 두고두고 미운정이 들련지 몰라요. 그래도 남편의 분노가 아무리 커져도 절대로 못버린다. 그러면 이 여자는 평생 아내로서 특권을 가지고 겠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남편에게는 미움을 받을 지라도 그가 이스라엘 처녀로서 하나님 앞에 율법을 따라 살았으면 그는 절대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만일에 처녀의 표가 없으면은 그는 죽어야 되어요. 왜냐하면 아비 집에서 창기 같은 행위를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악을 제거해라. 그러면 유업의 땅에 가나안 백성은 죄가 없는 백성이지요. 왜? 이런 사람은 발견되는 대로 죽여버리니까. 죄가 없는 나라지요. 그 묘하게 죄를 없앴습니다. 지금은 발견되는 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바꿈으로 빛 가운데 변화시켜 버리지요. 그런데 구약 때는 죄를 발견하는 쭉쭉 재판해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나라는 거룩하게 되어요. 아주 굉장히 독재국가처럼 되어 있지요. 싱가포르 같은 데도 요새 걸렸다 하면 곤장도 때리고 그런다니까요.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주님게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제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했기 때문에 스스로 죄를 슬퍼하고 원통이 생각하고 그렇게 죄가 제거되지 재판관이 찾아내서 죽여보았자 마음 속에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은 신약하고 구약은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만일 유부녀와 간음을 했으면은 그는 죽어야 됩니다. 둘 다 죽어야 되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약혼녀를 범했으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약혼녀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아내를 건드렀으면 만일에 성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남녀를 같이 죽여야 됩니다. 왜 여자가 소리 지르면은 도움받을 길이 있는데 소리를 안질렀기 때문에 둘이 마음에 맞아서 그렇게 한 것이니까 둘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들판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여자는 절대로 손 하나 까딱하지 말고 남자만 죽여라. 여자는 소리 질러 보았자 안돼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살인자와 같아요. 돌로 사람을 쳐죽인 것과 같다. 꼼짝 못하게 사람을 했기 때문에 남자만 죽여라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처녀를 건드렀어요. 만일에 여자가 들통 안나고 여자가 시집갔으면은 남편이 처녀인 표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는 죽겠지요. 창녀같은 일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만일 처녀를 건드러 놓고 들키면은 남자는 오십 세겔을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고 장가 들어야 됩니다. 그 대신 평생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 그가 건드렀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일에서 아무리 연약한 여자여도 그가 아내가 되었으면은 그리고 그 일에 있어서 그가 정결하면은 그는 남편이 요시랑 비시랑 변덕이 많고 그를 미워해도 언약의 땅에서 아내로서 유업을 누리는데 친정 아버지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 절대 위협 못하도록 도장 찍어 놓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변동으로도 자기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어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이 연약한 여자, 더구나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여자, 또 앞으로도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런 여자들에 대해서 보장을 세워 놓았어요. 그러니가 이런 여자들이 처녀성만 잃지 않으면은 처녀성을 잃으면은 죽겠지마는 그렇지 않으면은 그는 가나안 땅의 유업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어요. 보호가 되지요. 옛날 우리 나라 같으면 어떤 여자는 못버리도록 되어 있지요. 시집 와서 아들 낳은 여자, 시집 와서 그 집이 점점 부자된 여자. 뭐 삼종지도인가 뭐 있어요. 아내 쫓아내는 칠거지악이 있고, 절대로 쫓아내지 못할 세 가지 덕인가 무엇이 있어요. 그런 경우는 못 쫓아낸다. 우리 나라 조강지처는 못쫓아낸다고 그러지요. 처음에 집안을 일으킬 때 손등이 소나무 껍질되도록 같이 수고해 놓고는 늙어지니가 자네 손 뻣뻣하니까 저리 가소, 그러면 안된다 그말입니다. 하옇튼 같이 일으켰으니까 평생 같이 먹어야 되지 못쫓아낸다. 그러니까 유교 같은데서도 그런 의리가 있지 안해요. 그런데 요새는 시대는 더 좋아졌지마는 둘이 마음만 맞으면 마음대로 하시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마음이 맞은 것입니까? 할 수 없이 합의해서 이혼한 것이지. 그렇지 않겠어요. 내가 수고 하고 자식 다 있는데 떠나냐고요. 못떠나지요. 그러면 합법하고 둘이 합의했거든요. 그 합의라는 것이 마음에 맞는 합의냐고요. 할 수 없으니까 좋다고 한 것이지. 그런데 시대는 좋아졌지마는 정신은 더 멀어졌지요. 그전에는 마음이 맞든지 합의가 되었든지 절대로 못쫓아냅니다. 유교에서도. 여기서도 그렇게 해서 연약한 여자, 미움받은 여자, 미움을 받아도 하나님이 남편에게 가나안 땅을 주었으면은 아내도 그것을 소유해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남편에게는 기업을 주었는데 아내가 미움을 받는다 해서 절대로 기업을 잃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죽이면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중에 죄가 없어집니다. 그 다음에 아비의 후실을 범치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후실 얻고 그 여자를 그대로 두었다 할지라도 절대로 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왜 이것만 따로 붙였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것들은 가나안 땅의 무엇과 직접 대비된 문맥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비의 후실을 범하지 말라는 것도 가나안 땅의 죄와 연결해서 풀어야 될지, 제가 볼 때는 그렇게 풀 수 밖에 없습니다마는 안그러면 처녀를 범하면 평생 그 아내로 삼는다 해서 아비의 후실이 처녀처럼 있다고 해서 그를 데려오면 안되거든요. 그것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은 아도니야가 <얍살롬의 동생으로 솔론몬의 이복 형임> 그런 짓을 할려고 그랬지요. 그 사람이 밧세바를 찾아가서 자기 아버지 다윗의 아내인 아비삭을 달라고 그랬지요<왕상2:13->. 왜냐하면 다윗이 늙어서 몸이 차고 그래서 옛날 온기 회복법으로 젊은 여자를 얻더 주었어요. 아마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주었지요. 그러고는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아들이 그 여자를 주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정조 관념이 없는가 허락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 아들에게 가서 네 형님이 저 여자를 주라고 그런다. 그러면 내 왕좌까지 주라고 하면 허락하고 오지 그랬느냐고, 그리고 그는 못살리라고 데려다 죽였거든요. 왜냐하면 아비의 하체를 범한 것처럼 실은 아버지의 왕좌를 넘겨본 것이지요. 그 여자를 구하는 것이. 그러면 그 여자가 처녀는 처녀였지요. 그러나 주어서는 안된다.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지, 왜? 앞에가 처녀를 범했는가? 그러면 오십 세겔을 주고 신부로 삼아라. 아무리 처녀여도 아비의 후실은 범치 말아라. 그러는지 그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말입니다. 문맥을 따르면 방금하는 말들이 맞고 신명기 전체적인 말들은 이런 저런 것을 금했을 때는 가나안 땅과 애굽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금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가 양쪽 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물론 22장을 한마디로 묶을 수 있는 그런 통일성이 있으면은 묶어버리면 좋겠는데, 이런 저런 규칙들이 있으니까 그것을 일일이 다 기독론적인 적용을 하면 좋겠는데 저는 간략하게 묶었습니다. 가령 요새도 처녀를 간드리면 지참금 주고 결혼하면 괜찮은가, 매도 안맞고. 요새 같으면 진짜 그러겠지요. 둘이 그냥 동거하다가 좀 바쁘니까 결혼했어요. 그러고 한 8개월 지나고 나니가 아들도 낳았어요. 복받았도다. 만일에 장가간 뒤로 유산을 해버렸다면 아이쿠, 그러면 그러지 내가 죄를 지었으니, 할 것인데 아들까지 낳아 놓으면 복되도다. 하고 데리고 나오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만일에 이방인 처녀를 건드렸으면 제가 보았을 때는 결혼해야 될 것 같아요. 이방인 처녀를 건드려 놓고 그 여자 불신자니까 나 결혼 안할라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가 여기서도 처녀를 건드리면 장가만 가면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도의적인 율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었을 때 남편의 것을 유업으로 주었지 안해요. 그런데 형제가 형제를 보살핌으로 유업을 잃지 않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되고, 그 다음에 유업의 땅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유지함으로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되어요. 남녀 질서가 유지되고 종자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각기 종류대로 지었든 것처럼 유지가 될 것이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유업을 주었는데 비록 그 남편에게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내는 그 유업을 잃지 않을 것이어요. 그래야 그 유업을 보장되겠지요. 그런 유업 약속에 대한 이야기지 직접적으로 어떤 것이 음행인가? 음행의 율법을 여기서 직접 말하려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직접 교회 치리 모델로 가져오면 안된다. 어떠튼 둘이 결혼했드라도 결혼 전에 관계가 있으면은 교회에서는 책벌을 받아야 될 것이어요. 단지 안들어나니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는 것 뿐이지요. 안들어나 있으니까. 그러나 안들어나 있어도 하나님 앞에는 죄가 있을 것이어요. 특별히 남녀 간에 사귈 때 조심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처녀하고만 결혼하는 것은 아니지요. 단지 상대가 자기에게 있는 사실을 정당하게 고백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지요. 왜 상대방의 권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상대방이 용서하고 이해하면은 합법한 것이지, 그 다음에도 처녀인 표가 있어야 되느니 그럴 것은 지금은 없지요. 그러나 어떠튼 남녀 간의 결혼은 처녀 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에 그가 그리스도 밖에 있어서 범죄하고 그런 것을 잃었으면은 상대의 정당한 용서와 양해를 받고 하는 것이 옳지 뭐 사랑한다고 해놓고 평생 숨기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인제 우리 신앙고백서에서는 만일에 결혼했는데 상대가 자기 범죄로 이혼을 당했으면은 그 범죄한 당사자는 평생 교회 예식으로 결혼을 못한다.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왜 그는 결혼에 있어서 죽은자처럼 이해해야 되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제 그것이 전적으로 맞다고 이해를 했는데, 지금은 전적으로 이것이 맞겠는가, 조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은 쪽이 결혼하기 전에 이혼을 핑개데 놓고 자기 스스로 결혼할 수는 없을 것이어요. 왜냐하면 용서 안하고 할 수 있는 권한이 말하자면 법적인 절차를 밟았든 안밟았든 상대에게 있거든요. 그러니까 상대가 다시는 결혼할 수 없도록 확정되기 전에는 그는 항상 상대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지 법적인 절차가 끝났다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현재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한번 결혼에 있어서 자기 죄로 이혼을 당한 사람은 그는 평생에 교회 예식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 왜 결혼 예식은 영원히 죽은자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신앙고백서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느 것이 더, 구약 식으로 하면 그 말이 딱 맞아버리는데 신약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것이 더 그 정신에 맞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합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것만 찾아주고 하는 정도가 아니지요. 한 몸의 교제를 하니까. 우리는 형제의 생명에 부양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흘려서 그의 소유로 삼으신 교회는 하늘에 거룩함을 얻었으며 나눌 수가 없습니다. 뭐, 처녀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가 아니어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거룩함을 입었어요. 또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결혼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한 몸된 지체들이 결혼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되게 한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미움으로도 성경대로 하면 그가 음행하기 전에 간음하기 전에는 그를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신명기 24장은 수치스러운 일이 들어나거든 이혼을 해라. 단지 처녀 아니라고 누명을 썼는가? 그랬으면은 다시는 어떤 일도 안된다고 못박아버렸지마는 24장에 가면 그 외에 다른 사사로운 갖고도 아내가 밥을 태우니까 동네 챙피하다는 둥, 하옇튼 사사로운 일을 갖고도 아라비아 진영 같으면 남편이 세 번 당신 집에가, 하면은 이혼이 된다 그말이지요. 인제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구약 때는 그래도 되었다. 왜 하도 마음이 완악하니까 이혼을 허락했다. 단지 이혼증서를 써서 다시는 대려오지 못하도록 했다. 버렸다 대려왔다 그렇게 못한다 그말이어요. 그것은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허락한 것이다. 지금은 마음에 완악함이 영원한 사랑으로 변화됐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이고 교회는 처녀냐 아니냐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에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그가 결혼 서약을 파괴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함게 하신 자를 나눌 수가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상대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은 용서하는 것이 신약적인 권리고 특권이지요. 그러나 구약 때는 스스로 용서하면 안됩니다. 성문에 가서 보고해서 죽여야 되지 자기 식으로 용서하면 안되어요. 그러나 신약 때는 그런 여자까지라도 그가 진실로 회개하면은 용서하는 것이 신약 시대의 특권이고 권리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활의 빛 가운데서 만물을 평가한다. 가령 종류를 석지 말라는 말을 가지고 아, 유전공학 이것을 읽으라고 그런 것인가? 창세기에는 각기 종류대로 창조했어요. 그것은 처음 창조를 봉사하는 빛이어요. 이제 우리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했다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부활의 영광으로 만물을 새롭게 지으실 것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만물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어요. 우리는 부활의 빛 가운데서 만물을 통치한다, 그런 원리를 갖고 있지 뭐, 유전공학이 어쩌느니 그런 것을 직접 성경에 끌어올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실재적으로 이런 통치 질서를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그것이 인간에게 재앙이 되는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이 할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는 못할 것인가? 그런 것을 성경이 선을 그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숭아도 개 복숭아도 있고 여러 복숭아가 있지요. 요새는 사과도 여러 종류의 사과가 있고 강아지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강아지부터 송아지 만한 강아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그러면 개 안에서 변화시키면 괜찮고 개에서 고양이로 변화시키면 안되는 것인가? 하나님이 각기 종류대로 했으니까. 성경은 직접 그런 선을 그를려고 있는 모델들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어느 정도 하는 것이 인간의 기능에 합당할지, 또 어느 정도 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질서에 맞을지, 물론 성경이 근본적인 원리 같은 것은 제시해 주겠지마는 구체적인 상황들은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을 구체적인 상황을 분별하는 구절로 막 적용하지 말라 그말이지요. 아무리 지금은 각기 종류대로 통치를 해도 부활의 빛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으면은 그것은 아무리 창조의 빛 가운데 살아도 부활의 빛 가운데 살지 않으면은 그것은 신약 시대에는 여전히 죄에요. 그러면 인제 부활할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상황을 성경은 설명하지 않지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탁월한 그런 묵시적인 변화를 이야기하고, 또 그때도 각 나라가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고, 너희들이 그 나라에서 열두 지파를 통치하리라. 제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그렇게도 이야기하고 여러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어째서 알 수 없느냐 하면은 만일에 그것이 율법시대에 있으면은 옛 시대에 상태로 그대로 있으니가 문자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마는 복음의 시대에 있어서는 상황들이 바뀌어졌고, 또 주님께서 재림하시면은 그 영광이 바꾸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상황을 알 방법이 없어요.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애로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도 비디오처럼 편집하기 어렵다고 했지요. 각 본문의 특성이 있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늘 읽은 오병이어의 이적도 맞출 수가 없지요. 처음에는 마음으로 빌립을 시험하고 했다가 그런 말을 못맞추어버려요. 그러니까 종말에 대한 상황도 그 문맥에 대해서 의미를 보고 해석하고 설교해야 되지 그것을 짜맞추어서 상황들을 다시 구성할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여기서는 항상 신약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해석을 해야되지 구약적인 것을 우리와 같은 현실적으로 적용해서 구약 때 각기 종류인 것처럼 지금도 각기 종류인데 유전공학은 그것을 파괴하고 있거나 그쪽으로만 나가갖고는 신약 시대의 특성을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어요. 제가 하고 있는 말은. 성경은 일단은 그런 과학이나 법문서를 위해서 준 책은 아니거든요. 언약적인 책이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지접 적용하는 것이 아주 영안이 밝고, 그런데다 직접 적용을 못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사탄의 권세가 각기 종류를 섞으므로 사람들이 쥐를 송아지만큼 만들 것이어요. 그러니까 얼만큼 앞으로 안굶어 죽을 것이어요. 이렇게 해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토대를 닦고 있는 데 저 목사님은 어두워 가지고 잘 모른다고 그런다. 분명히 그건 맞는 말이어요. 인류가 자기 권세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자기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것이 유전공학은 안되고 어쩌고 항상 만물은 하나님이 처음 지었던 그런 질서대로만 있어야 된다고 하면은 그런 질서 안에 많은 변종을 가져온 것은 일종의 도전이지요. 쥐를 송아지 만들면 죄가 되고 송아지를 코끼리 같이 만들면 괜찮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가 말하자면은 그런 것이 꼭 현실성 있는 적용으로 영안이 밝은 것처럼 그런 것만 아니다. 우리들은 아무리 창조 질서를 지켜도 부활의 빛 가운데서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을 고대하고 소망하는 가운데서 경영하지 않으면은 그 자체로 죄가 된다. 그렇게 적용하라 그런 말입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한 사람은 죽어버리고 절대로 교회에 못들어옵니까? 물론 교인들은 그런 죄가 있어서는 안되겠지마는 교회 안에 간음이 발생하면은 그 사람은 영원히 끝장입니까. 다르지요. 그러니가 말하자면 역사적인 성취라는 것이 있어요. 그때는 보편적인 것은 아닌데 머리에게 나타난 은혜들이 있어요. 그때는 다 죽어야 되는데 왕인 다윗에게는 그런 일이 안벌어졌어요. 그래서 다윗은 그것을 용서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로마서 4장에서 인용하고 있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을 인용하는데 다윗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용서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니가 다윗에게서는 모세를 넘어선 새로운 언약 갱신이 있는데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마는 왕에게서는 나타나 있어요. 그러니가 율법을 넘어선 용서가 있는 것이지요. 구약에서는 유가 없는 일이어요. 인제 아마 그것 때문에 압살롬의 반란이 쉽게 일어났겠지요. 지가 살아있다는 마는 율법을 봐라. 얼마 있다가 죽을 것이다. 저건 죽는다. 선지가 뇌물을 먹어서 나단이 가서 산다고 약속했는가 몰라도 율법을 봐라. 그런 자는 죽지 않냐. 그래서 국민들 대다수가 압살롬을 따랐지요. 그러니가 순식간에 다윗 같은 용장이 도망칠 만큼 세력을 모은 것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다. 그것은 율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어요.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용서받은 것도 율법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는데 신명기이 약속은 있구먼요. 너희들이 먼 땅에서 돌이키면 용서하마,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범죄 당사자는 죽고 돌아오지 못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오고 그러지마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법적으로만 풀어갖고는 못풀 때가 있어요. 하나님이 거기서 행하신 일을 읽어버려야지 그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신 일인데 하나님은 모세를 떠나서 일을 못하실 것처럼 항상 모세의 자로 지으면은 그것이 예수님 대놓고 넘어진 것이어요.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옛날 일로 하던 일로 계속 젤려고 그래요. 절대로 못담아요. 그러니까 다윗 때만 그랬다니까요. 다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다윗을 그렇게 택했다고요. 그것이 은혜에요. 율법으로 설명이 안된다 그말입니다. 오히려 사울보다 다윗이 나쁜 짓을 더한 것 같지요. 보통 나쁜짓을 한 것도 아니어요. 특별 휴가 내갖고 죽인 것이어요. 자기 부하에게 명령을 해가지고 적전으로 가서 죽도록 했어요. 그래 놓고 죽었다고 하니까 전쟁 통에 총알이 누구에게 갈줄 알겠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겠지. 그래고는 합법적인 절차를 다 밟아서 나중에 아내를 데려왔어요. 하나님의 눈은 못속이지요. 그런데 다윗하고 사울이 다른 점이 있기는 있습니다. 사울은 항상 자기 위치를 생각해요. 다윗은 자기 잘못하면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요. 자기를 죽여달라고. 그런데 사울은 그렇지 안해요. 내가 이렇게 되면 체면이 어떻게 되겠냐. 자기를 끝까지 붙들고 그 왕국을 일으키는 힘을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다윗처럼 무릎 꿇지 안해요. 회개 방식도 다릅니다. 여러분들, 공부도 늦터진 아이들이 있지요. 국민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못했는데 어느 날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고. 그러면 저것이 그전에 나보다 점수가 나빴는데 하고 비취보았자 못읽지요. 사람도 변하면 못읽어버려요. 옛날 것으로.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그냥 연속적인 단계로 진행시킨 것이 아니라 그 연속을 뛰어 넘는 불연속, 획기적인 단계들로 올려나가는데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는 류가 없는 단계지요. 그러니가 그전 것으로는 못읽는 것이어요. 항상 완성된 것으로 그전 것을 해석해야 되지 이전 것으로 새 것을 담을 수가 없는 것이어요. 물론 사울과 다윗의 회개 방식의 차이도 있습니다마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다윗은 그렇게 사랑했고 용서한데 핵심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 법칙에 어긋나지 않느냐? 하나님은 율법에 매인 분이 아니어요. 율법 아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신 분이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서 죽었고 그렇게 됐지마는 하나님은 율법에 매인 분이 아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법칙에 안매이면 되겠느냐. 율법은 자기 법칙이 아니어요. 어린 아이를 위한 약속의 법이지, 그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언약을 새롭게 바꿀 수가 있어요. 그러니가 하나님은 만고불변하다는 방식으로 못푼다 그말입니다. 존재론적인 방식으로는 하나님은 그 존재와 뜻이 불변해야 맞아요. 그러나 언약적인 방식은 하나님은 그 존재와 뜻이 변해요. 만일에 변함이 없으면 아들은 성장이 안되어요. 우리는 지금 변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못했고 변치 않은 하나님으로 설명을 했어요. 이제까지의 신학이.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가 이렇고 그 특성이 이렇다. 존재와 속성을 정의하고, 이런 존재가 이런 성질을 가졌으니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냐. 필연성으로, 연역적으로 풀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만고불변하고 똑같아야 되어요. 율법도 영원법으로. 그러나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은 존재와 속성을 드러내도 언약적인 관계에서 드러내지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드러낸 모든 존재와 속성은 자기 백성의 구원이고 생명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변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놀라겠지요. 철학에서도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어요. 변하면 원점이 아니라고요. 변하지 않은 원점이 없으면 거리 측정이 안되어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만 변하지 않은 절대 부동자이기 때문에 철학이 가능한 것이어요. 그것이 이제까지 신학의 핵심이어요. 만고불변한 증거가 율법은 영원하다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변한다. 어떻게 변했느냐? 아들 안에서 영원히 오셨는데 이제는 안변한다. 왜? 완전한 구원이 왔으니까. 성경은 그 이야기어요. 그런데 우리는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풀어버렸어요. 성경이 안풀리지요. 아마 내 말을 누가 들으면 야, 하나님이 변한다고 그러드라. 존재와 뜻이 변한다고 그러드라. 놀랄 일이지요. 그런데 나는 존재론적인 정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자기 검증 방식이 없어요. 하나님은 언약적이어요. 심지어 나는 이제도 계시고 저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 해도 이 영원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영원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존재론적인 영원에다 강조를 둔 것이 아니어요. 지금 우리가 신학하는 강조점이 어디 있는가를 아시겠지요. 가령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는 무섭다. 나는 세상에 좋다. 내가 너에게 못해줄 일이 무엇이 있냐. 나는 너에게 아무 것도 안해줄란다. 이렇게 여러번 말하겠지요. 그때 그때.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섞어버려요. 언제는 다 해준다고 했다가, 언제는 아무 것도 안해준다고 했다가, 언제는 좋다고 했다가, 언제는 무섭다고 했다가, 이것이 섞어지면 이건 짬뽕이지요. 이것은 풀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단순성 해갖고 풀기는 풀었어요. 하나님은 전체가 사랑이고 전체가 공의다. 풀었는데 둘은 서로 대립되니까 설명을 더 이상 못해버리지요. 그런데 언약적으로는 맞아요. 아버지는 무서울 때는 무섭기만 하지 무섭다 해놓고 좋은 점도 있는디 하면 안되어요. 나는 무섭다. 그러지, 나는 가끔 좋기도 해야, 그렇게 말하면 안되어요. 나는 무섭다. 제일로 무서운 아버지처럼 하는데 실은 매 몇대 때려 놓고 무섭다고 해요.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어요. 그것이 존재요 뜻이어요.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다해주마, 그것이 무슨 제일로 부자라는 말입니까? 학용품 몇 개 사주겠다는 말이지. 그래 놓고 너에게 모든 다 해주겠다고 그럽니다. 학용품 몇 개 사주어요. 어렸을 때는 오백원 주고, 대학교에 가면 몰라, 자전거 사줄라는가. 그래 놓고 다해준다고 그래요. 그것이 다 해준다는 의미에요. 언약적인 내용에 다 담아져 있지 아버지는 다 해준다고 했으니까 아버지 다가 무엇이요. 하고 인제 그 백화점에서 가다로구 갖다가 아버지 이것 다 해주십시오. 하면 이건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이어요. 실은 하나님은 전능하다 할 때까지라도 자기 백성을 위한 전능이지 나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내 마음대로 다 한다. 그런 말로 하나님을 구해서는 안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한다. 약속을 따라. 그건 우리가 구할 수가 있어, 또 구해야 되고. 그러니까 존재론적인 정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른다. 언약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정의하신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아버지가 나는 무섭다 해놓고, 하하 웃으니가 아버지는 이중인격자구나, 그러면 안되지요. 자기 아들에게 매 몇대 때리면 무서운 것이어요. 왜 그 무서운 것이 아들의 생명이요 지혜가 되는 것이어요. 그건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로 싸움 잘한다는 뜻이 아니어요. 형님은 매때리고 동생이 오니까 예쁘다고 뽀뽀하고, 아, 우리 아버지는 나는 미워하고 동생은 예뻐하는구나, 그런 것이 아니어요. 그렇게 한 것이 아들에게 지혜와 생명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어요. 그건 언약적인 관계에서 읽어야 되지 존재적인 정의를 해서는 못읽은 것이어요. 그런데 이제까지 신학은 그렇게 해버렸다. 조금 신학책 읽은 사람은 어려워해요. 전유적인 속성, 비 공유적인 속성, 비고유적인 속성은 숫자도 많해요. 모르겠어요. 졸업하고 잊어버리고, 읽고도 잊어버리고 몰라요. 그렇게 해갖고 어디다 쓰냐고요. 그렇게 하니까 교회가 책맹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디, 저 양반은 책망만 하는구나. 교회에서 잘못해서 돌릴려고 하면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디, 하나님은 불변하게 사랑이신 줄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 관계는 미움받게 해놓고 두둘겨 패야 될 판에 하나님은 사랑이신디, 왜? 하나님은 불변하다고 적용하니까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어요. 그때는 매 때려야 합니다. 그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예요. 그것은 만고불변한 존재론으로 정의하니까 성경 풀 때 도저히 해석이 안되고 신앙생활도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 특징이 하나님은 율법에서 분리를 하는데 영원법이다. 그러니가 사울로 다윗을 해석하면 안된다 그말입니다. 다윗에게 새로운 은혜가 나타난 것이어요. 모세의 완성이면서도 모세를 넘어서요. 그런 이야기예요. 그것을 다윗은 용서받은 행복에 대해서 그러니가 복음이다. 그렇게 로마서에서는 인용한다 그말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