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3장
신명기 23장입니다. 여기 여러 규례들이 있는데, 이 모든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복을 누리는 규례들입니다. 1-6절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신이 상한자, 또 사생자, 암몬과 모압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3대가 지나면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자도 있는데, 그는 에돔과 애굽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이 상한자가 회중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눈이 하나 상한 사람은 못들어온다는 말을 하지 않고 신이 상한 자를 회중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콩팥 이식 수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서 신자는 한자로 그 계열, 콩팥 계열 생식능력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식능력이 상한자, 거세를 했던지 상했든지 그런 사람은 회중에 들어오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은, 구약 때는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는 생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복이 진행되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 중에서 생산할 수 있는 힘이 상실된 사람은 그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그 복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죽은 자에요. 그래서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저주를 받았다. 하는 이야기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 때는 아들을 통해서 유업이 상속되기 때문에 만일에 그에게 아들이 없으면 고약한 일이 되지요. 나중에는 딸도 유업을 상속하도록 되어 있지마는 일단은 아들이 머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문을 잇고 제사를 지낼려고 아들을 찾지 성경과 같은 아들 선호 사상은 아닙니다. 전혀 개념이 다릅니다. 사생자가 총회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식으로 적자는 호적에 오르지마는 사생자는 호적에 못오른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정상적인 출생의 방식이 아니고는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는 그 약속에 포함될 자가 아닙니다. 그 약속을 따라 낳아주어야 되지 그 약속을 떠나서 출생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자식을 낳았어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그런 계통을 따라 났지 않으면은 그것은 회중에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맘몬과 모압이 들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광야에 있었을 때 그들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했으니 6절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 구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명기 2장9,19절에서는 이런 문맥에서 말하지 않고 이런 문맥에서 말하지 않고 가나안 밖에 이미 기업을 주었지 않냐. 가나안 밖에 기업을 주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본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시리라. 그런 문맥이니까 거기는 복을 주었다고 말해요. 내가 롯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었으니 너는 그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그들이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온다는 말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의 땅 밖에다가 복을 주었으니 괴롭게 하지 말아라. 그것은 2장에 있는 말이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오겠는가? 언약의 땅 밖에서는 자기 기업이 있어도 언약의 땅 안에서는 못들어오게 해라. 왜 그렇습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했기 때문에. 그러니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그런 말은 꼭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또 요새 식으로 하면 목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인들 복되도다. 네가 섬기는 하나님을 나도 섬기리라. 하면 복을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멸시하면 그도 멸시를 받을 것이어요. 그렇게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이지 어느 특정 사람을 저주하면 벌받고 특정 사람을 축복하면 복받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주하고 싸우면 다 죽여버렸지요. 그런 의미입니다. 3대가 지나면 회중에 들어올 자가 있는데, 에돔과 애굽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명기에서 보면은 에돔 사람이 길을 막기는 분명히 막았는데 무슨 저주했느니 싸웠느니 그런 말은 없어요. 여기서 말하는 에돔은 형제고 애굽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될 이유가 너희들이 그 땅에서 잠시 신세를 졌지 않느냐. 나중에는 그들이 요셉을 모르는 왕이 일어나 쫓아냈지마는 본래는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많은 은혜를 입었거든요. 그때는 애굽 백성들이 그들을 요셉처럼 대우를 했어요. 그러니까 에돔은 형제고 애굽은 그전에 너희들이 그 땅에서 객으로 살았던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회중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3대가 지나면 들어오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를 보면 가나안 땅에 곡식을 심어도 3년까지는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그리고 4년에는 하나님 앞에 드리고 5년부터는 먹어라. 그래서 그런 3이라는 숫자도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도 보면은 개념은 무엇이겠어요. 어느 일정 세대가 지나면 들어온다. 그말은 그 기간이 지나면 정결해진다. 그말이지요. 그런 의미로 3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돌판에 새긴 율법에서는 벌을 주어도 3,4대까지 벌을 준다고 그랬지요. 그런 개념도 여기서 담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이전에 있었던 가령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대단한 분쟁이 있었지마는 본래는 너희들이 거기서 신세를 지고 있었지 않냐. 3대가 지나면은 그런 분노도 꺼질 것이고 그런 의미로 세례되리라 그런 말이지요. 에돔이 너희를 미워했는가, 본래 너희 형제가 아니냐. 3대가 지나면 그 미움도 사라지리라. 그러면 들어올 수 있지 않냐. 그런 정결 문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은 어쩝니까? 아이 못낳은다 해서 교회에서 멸시받는 자가 없지요. 바울도 아이가 없지요. 그래도 아들낳은 것보다 더 큰 소망이 있지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아들 낳는 소망은 아들 낳아도 아들이 죽어요. 그러나 좋은 아들 낳았다고 좋아해도 말을 안들으면 바벨론 땅으로 포로잡혀가니까 얼만큼 슬퍼해요. 그러나 이제 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나신 분이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 안에서 영원히 하늘에 속한 기업을 상속했고 생명의 약속이 완성되었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은 가나안 땅의 생명의 약속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을 상속했기 때문에 이제는 생육하고 번식하는 그런 소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면 여기서는 전도 못한 사람은 소위 고자와 같다. 아들 못낳으니까. 전도한 것은 아들 났는 식인데.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전도하라는 말은 그가 개인적으로 얼만큼 경건한가를 측량하는 척도가 아닙니다. 지금 다락방 같은데서는 전도를 많이 하면 복음의 능력이 많고, 전도를 못하는 사람은 초신자 이상이 되지 못하니 내놓고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 무엇이 막혔으니가. 안막혔으면 내놓고 전도를 잘 할 것인데 그쪽으로 전개를 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개인이 경건한가 아닌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는 신약 시대에 속한 열매입니다. 신약 시대에 속한 사명이고, 구약 때는 아직 이방인에게는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 제자들에게까지라도 이방인에게는 가지 말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가 그들은 능력이 부족해서 전도를 못한 것이 아니라 때가 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로는 천하만민에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전도할 수 있는 시대이고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올라가면 능력을 보내리니, 그러면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그것은 신약 시대에 속한 열매이지 전도를 많이하면 능력이 많고 전도를 적게하면 능력이 적고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특별이 바울에게 전도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땅 끝까지 전도하는 것은 전부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러면 베드로는 그런 전도를 안했느냐. 그것 하고는 상관없는 것이어요.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거든요. 그래서 바울의 행적에다가 로마까지 전도하는 사역에 총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것을 전부 개인의 경건으로 측량합니다. 가령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있으면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어떤 사람은 여덟 개는 맺었는데 하 나가 덜 맺었고, 그래서 얘기들 주일학교에서 포도나무에다가 붙이지요. 몇 개 맺었는가. 그런 점수 매기라는 아홉 가지 열매가 아니라 이것은 금지할 법이 없는 새 시대의 열매다. 구약 때는 그런 열매가 없어요. 신약 때 맺는 열매다. 구약 때는 전부 육체의 소욕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신약 시대는 그런 열매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 속한 것과 모세에게 속한 것을 대비시키지 거기서 열매 몇 개가 맺었으면은 경건이 몇점, 그런 것을 측량하고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개인이 완전하면 아홉 개, 조금 부족하면 일곱 개 쯤, 그렇게 채점해서는 안된다 그런 말이어요. 새 시대의 열매에다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생자는 전도 못하는 자다. 하고 내가 설교를 하면 여러분은 뜨끔뜨금 하겠지요. 바울도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내 아들이라고 했거든. 성경도 그렇게 붙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전도도 못한 사람은 땅에 거름만 소비한다. 열매가 없으면 빨리 뽑아버려야지 땅을 허비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전도 못하면은 심은데 그대로 있으니까 본전치기여서 거름만 소비하고 안되겠다. 그래갖고 무슨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냐, 그렇게 해갖고 적용하면 안된다 그런 말이어요. 지금 생명의 능력이 완성되었다고, 그전에는 들어오지 못했는데 지금은 들어오라는데 강조를 두어야 되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것도 땅에 회중이 아니라 하늘의 회중에 들어오라는 이야기에요.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이것을 개인 경건에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모압과 암몬 정도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들어오라고 그러지요.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원수로 있는데 들어오라고 그래요. 3대 지나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자 말자 즉각 들어오라고 그래요. 아무런 장애가 없어요. 왜? 이 생명의 약속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러니가 유형론적으로 푸는 것은 성경을 푸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지금 시대 상황은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천하만민이 들어오는 새 시대에요. 그러니까 모암과 암몬이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사람이 아니라 우리처럼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라서 하나님을 저주했던 우리도 믿으면 값없이 들어오도록 하고 있어요. 3대 4대 지날 것이 없어요. 지금 모든 사람에게 그 문이 열려있어요. 그렇게 말한다. 진을 정결케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가나안 땅이 거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가나안 땅 밖으로 싸우러 나가실 때도 거룩하신 분이셔요. 왜?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싸우러 나갈 때는 가나안 땅 밖으로 싸우러 나가시지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면 거룩하신분이십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진중에 계시기 때문에 진을 거룩하게 해야 됩니다. 이런 것은 민수기하고 비교하면 더 좋겠지요. 민수기도 하나님이 진중에 계시기 때문에 진을 정결케 해야 됩니다. 거기 보면 문둥병자와 유혈이 생긴자 이런 저런 자를 다 쫓아내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도 쫓아냅니까? 의심살 만한 아내도 있으면 판단해서 쫓아내야 되겠지요. 민수기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그 진은 어떻게 합니까? 레위지파가 진치면은 남어지 지파는 가까이 오면 안되요. 그것이 민수기에서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고 이방인은 싸워야 됩니다. 레위지파는 거룩하고 나머지 지파는 하나님이 싸워야 되고, 그런 방식으로 진의 거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는 하나님을 봉사하는 자가 누구냐, 거룩의 간격을 갖고 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떤 부정함도 없게하라 하는 데다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잠자다가 잠결에 몽정을 했는가, 그런 사람도 부정하다. 여기서는 그것도 악한 일이어요. 하나님의 진을 더럽히는 모든 악한 일을 여기서 예를 든 것은 잠자다가 몽설을 한 것 하고 그리고 진 안에다가 잘못 대변 봐버리는 것이어요. 그것이 부정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악한 일도 많을 것 아니어요. 레위기 같은 문둥병이나 유출병이든지, 이런 부정한 일이 많을 것인데 여기서는 지금 별 볼일도 없는 것이어요. 사람이 밥먹으면 싸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살아도 화장실이 있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잠자다 일 벌어진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이것을. 그런데도 여기서는 이 모든 악한 일 해갖고는 그것을 제일로 고약하게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지극히 적은 것도 부정한 것은 놔두지 말라 그런 말이지요. 잠결에 일이 벌어졌을 때는 부정한 자에요. 그리고 생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배출했어도 진 안에서는 싸지 말아라. 진 밖으로 나가라. 거기서도 마음대로 싸지 말아라. 싸면 반드시 파고 묻어라. 왜 내가 진중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진중에는 냄새도 풍기면 안되어요. 요즘 환경운동하자는 것하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진중에 계시니까. 그러니까 지극히 생리적이고 지극한 작은 것까지라도 하나님이 게신 곳에는 없게 하라는 것이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민수기에서는 레위지파는 거룩하고 그보다 제사장은 더 거룩하고 그리고 일반 백성은 거룩하고 나머지는 이방 백성이고, 그렇게 간격을 따라 전부 진을 치고 있지요. 하나님을 봉사하는 자로 이스라엘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부정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적은 부정도 없애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하다. 이 강대상을 걸래로 닦으면 부정하다거나 이런 걸래로 닦으면 정결하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정결하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정결하다. 자는 것도 정결하고 높는 것도 정결하고 다 정결하다. 왜 하늘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거기는 부정이 없다. 이제 신약의 교회는 거룩한 진 가운데 계시는 데 하늘에 속한 거룩으로 있다. 거기서는 잠결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나가거라. 생리적인 현상인데도 나가서 싸지 진 안에서 싸지 말아라. 그런 법이 없어요. 그런데 구약 때는 부정하면은 그 단위가 하루에요. 하루가 지나면 회복됩니다. 새 날이 오기 때문에. 그러면 해가 지면 새로운 날이 시작되거든요. 이전의 날은 지나갔어요. 하루가 단위에요. 그래서 해가 지면은 정결합니다. 그래도 그냥 정결하지 않습니다. 씻어야 정결합니다. 그리고 들어와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는 하루가 지난 것이 아니라 옛 시대가 지나가겠지요. 하늘에 속한 새로운 사대가 왔지요. 이제는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었지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지요. 거기는 부정한 것이 없다. 그분이 영원히 우리와 함게 계신다. 그것이 근본적인 정결이어요. 이렇게 거룩한 나라에 부정한 자가 있으면은 그는 나가야 되겠지요. 그런데 진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나갈까요. 그리스도의 교제 밖으로 떨어져요.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찬정지가 가장 큰 벌이라는 말이 그말입니다. 주님의 교제의 상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이 신약 교회에 출교 당하기 전에 제일로 큰 벌이어요. 우리에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되지 조그만한 빵 얘기들 소꼽장난하는 것 같은 먹으나 마나 한 것 뭐, 집에 가서 실컷 먹을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집에서 먹는 것도 교회에서는 먹지 마라는 것도 집에서는 맘대로 먹지마는 실은 교회에서 주님의 상에서 제외되면은 그의 모든 삶의 영역은 주님의 교제 밖에 있는 것이어요. 그걸 조심해라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수찬정지가 제일로 큰 벌입니다. 도망친 종을 함께 거하게 하라는 말은 이방인 종이 도망치면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종간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인은 종으로 삼으면 안되지요. 형제처럼 대하라고 했고, 7년이 되면은 해방되고 그러겠지요. 그러니까 도망치면은 히브리인 종이 도망치거나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것이어요. 만일에 이방인 나라 사람이 자기 주님으로부터 도망치면은 다시 돌려보낼 것인가? 주석가들은 그쪽에다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하고는 이 본문은 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히브리인 종이냐 이방인 종이냐 거기다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만일에 종이 주인이 핍박해서 도망쳤는가, 그도 이스라엘의 피난처를 찾아서 도망쳐 왔으면 그도 그 안에 평안히 거하도록 해라. 그 말이 핵심이어요. 어떠튼 너희들과 같이 기업의 땅에 평안히 거하도록 해라. 종일지라도. 그런 말입니다. 만일 미움받은 아내까지라도 남편의 기업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핍박받는 종까지라도 이스라엘처럼 평안히 거하게 해라. 그것이 핵심이지 이 종이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이냐 그것은 이 본문에서는 강조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누가 도망쳐 오면은 그냥 우리 집에 거하십시오. 그정도면 되는 것이냐. 돌려보내면 안되는 것인가? 그런데 바울은 돌려 보냈어요. 빌레몬서를 보면 돌려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오네시몹니까. 그 사람이 자기 주인의 것을 도적질 해가지고 로마까지 도망쳤는데 모르겠어요. 로마에서도 사기치다 걸려가지고 바울이 갇힌 감옥에 들어왔는지. 옥중에서 전도받은 사람이 꾀있지요. 그런 식으로 바울을 만나서 에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가 옥중에서 바울의 뒷바라지를 잘했지요. 그래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쓰고 있지요. 내가 이 네 대신 이 종을 석방해도 된다. 실은, 네가 나에게 받은 은혜가 얼만큼 많냐? 그러니까 마땅히 내 권리로 해도 되겠지마는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한다. 너는 내가 이 부탁을 할 때 어떻게 할지를 잘 생각을 해라. 너는 내게 빚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잘 생각해라. 그말을 하고 있어요. 나는 내 자유로도 할 수 있지마는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네 선한 일이 강제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러니까 내가 네 종을 돌려보내니까 이제는 종으로 취급하지 말고 형제로 취급을 해라. 네가 마땅히 나를 봉사해야 되니까 네 종이 감옥에서 너를 대신해서 봉사하면 얼만큼 좋냐? 그래서 돌려보내니까 네가 잘 알아서 그를 해방시키고 그리고 형제 중에 존귀한 자로 네가 대접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구약하고 상황이 훨씬 달라저 있지요. 구약은 마땅히 그 법 때문에 그러지마는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어요. 만일에 히브리 종은 도망가면은 율법 때문에 돌려보내라고 바울이 혹시 그랬다면은 그럴지라도 말하자면은 빌레몬은 그를 석방시켜야 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속한 백성으로 받아버렸기 때문에. 만일에 받지 안했다 할지라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도 종이요 종도 자유하는 아들이다. 왜 주인 위에는 더 높은 주인이 있고 종이 지배자는 하나님이니까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라.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상태로 그대로 있어서 그는 자유자겠거늘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으니 너도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해방을 시키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교제에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셨으니 그도 받아야 됩니다. 이런 것이 말하자면 교회가 노예 해방을 하는 방법이지 사회 제도가 바꾸어져야 개인이 마음대로 자유자로 살 수 있다. 사회복음이냐 개인복음이냐 그런 논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리 때문에 자연스럽게 된 것이어요. 그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만일에 법을 따라서 종을 해방시켰어도 그 종이 굶어죽어버렸으면은 해방이라는 것은 차라리 종삼은 것보다 못해요. 그러겠지요. 지금은 머슴 제도도 없고 공무원들 계약관계에 있습니까. 계약 끝나면 그만두면 되어요. 그 다음에 그가 굶어 죽고 말고는 상관이 없어요. 얼만큼 이기적이어요. 그러나 히브리 종은 그가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 집에 말만 하면은 귀에다가 구멍을 뚫어서 평생을 그 집 식구로 살아야 되어요. 그는 늙는다 해서 거리에 나가서 굶어죽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 제도가 지금 민주주의 제도보다 훨신 더 낫지요. 내용상. 제도적으로는 자유가 있냐 없냐 차이가 있지마는 제도적으로는 오히려 세대는 복음화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은 복음화된 자유도 사람을 굶어 죽게 해요. 그러나 구약 때는 아직 그런 자유는 없어도 그 원리가 형제를 보살피도록 되어 있고 종도 보살피도록 되어 있어요. 어떻게 봐서는 훨씬 났지요. 그러니가 이것은 사회구원이냐 개인 구원이냐 그런 논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형제에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소위 복음화 된 것입니다. 이제는 종이 없지요. 그 다음에 창기와 미동은 없게 하고 또 소득도 여호와께 화목제물로 서원예물로 드릴 수 없다. 가증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동은 창녀와 같은 남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은 가증한다. 왜 가증하냐 하면은, 이것은 가나안 땅의 율법과 항상 비교되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라고 했지요. 그냥 하나님의 나라는 공창 제도가 없으니가 그런 정도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창기 제도는 우상예배와 관계된 것이어요. 그들의 신들은 생산의 신이기 때문에 생산의 신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도 남근 돌도 있고 다 있지요. 드라큐라보다 더 큰 바위들을 그려갖고 아들 낳는다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 것이 옛날 중 아들이기 쉬워요. 그런 것처럼 그런 것과 전부 관계가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가 없게 해라. 그러니가 그들의 예물은 우상의 전에서 아주 아름답게 드려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가증한 예물이다. 서원 예물은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자원하는 예물도 드리지 못하게 해요. 가증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물론 이런 것은 그 당시에는 문자적으로 적용되지요. 지금은 문자적으로 문제보다는 더 포괄적으로 넓게 해석해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말하기를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간음하는 여인 같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국가 법적으로는 죄가 안된다 할지라도 세상을 사랑해서 그가 주야로 살았으면은 그가 아무리 자원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려도 실은 옳지 않겠지요. 그런데 교회는 그런 윤리는 관계없이 돈만 많이 벌어오면, 십일조만 내면 복이 쏟아지니까 상관없지요. 실은 옳지 않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제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우리는 창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우상에 속했다고 할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남편 다섯 있는 여인은 저리 가라. 그런 법이 없어요.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향내 나는 제물을 드릴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으면은 다 부정한 창녀에요. 심지어 이스라엘처럼 살아도 그들은 귀신을 섬기는 자들이어요. 그전에는 이스라엘처럼 살면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이방인처럼 살면은 하나님 성소에 못들어오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은 모세 율법처럼 예물을 드려도 그는 가증한 자에요.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에요. 그런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 교회는 예수 없는 설교가 대부분이고 그리고 참으로 예수 안에서 그의 삶을 적용하는가, 말만 교회 조직에 속했다 뿐이지 그의 사는 것은 믿음 따로 삶 따로예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복받는다고 설교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전혀 윤리성이 없어요.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로 결정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기라도 깨끗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론이라도 부정합니다. 지금은 그렇다 그말입니다. 그렇게 해석해야 됩니다. 개인에게 일단은 적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게 주신 복, 그것이 어떻게 교회에 완결하신 방식으로 주셨는가를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에 적용할 때 보면은 우리에 대한 적용은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밝음이지요. 구약 때는 창기만 하나님 앞에 서원예물을 드릴 수 없고 나머지는 드릴 수 있지 안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어요. 이제는 그것이 훨씬 더 선명해진다. 그러니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복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이것이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삶에서 근본적인 질서에서 선언될 수 있는 것인지, 분벼하고 풀어야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소위 큐티하는 방법을 아시겠지요. 인제 이렇게 하면 큐티고 다른 책에 나오는 식으로 하면 큐티가 아니다 그말입니다. 큐티라고 해서 어른들에게 죄송합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눈감고 묵상한다. 그말입니다. 이 본문이 오늘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것이 소위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형제에게 이자를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을 보면은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부자에게는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그말이어요. 그것 난처하지 안해요. 그러면 신명기에 보면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으면 출애굽기만 읽으면 아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으니까 부자에게는 받겠구나. 이 생각이 드는데, 신명기를 딱 읽어보니까 부자나 가난한 자나 형제에게 이자를 못받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이자도 받지 말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꼼짝 없이 못받게 되어 있거든.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그말입니다. 랍비들은 잘 알겠는데 나는 잘 몰라요. 그러면 우리들은 문맥을 따라 해석을 해야 됩니다. 출애굽기는 왜 그렇게 말하는가?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조직하는 것이어요. 나라로 조직하니가 소위 거래 법에다 관계가 되어 있어요. 눈은 눈으로 한 것도 보상법이어요. 마땅히 보상해야 됩니다. 왜 나라를 조직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출애굽기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나라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선물하면서 세우신 율법이어서 이 율법에는 가나안 땅의 기업에 복이 다 포함되는 것이어요. 출애굽기처럼 하면은 공평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신명기처럼 하면은 가나안 땅에 부요한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점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에는 가난하냐 부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형제냐 이방인이냐를 따져요. 이방에게는 이자를 받지마는 형제에게는 받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형제는 함께 기업을 받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지요. 그 기업의 땅에서는 만나도 많이 거둔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이 거두었다는 것처럼 형제에게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자를 못받아요. 그러나 이방인은 받아도 된다. 왜 이방인은 정죄의 대상이지 한 몸의 교제로 가나안 땅의 기업을 나누는 그런 것은 아니어요. 바울도 이방인 교회에 헌금할 때 그랬지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고 평균케 할려고 그런 것이 아니냐.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이루려 함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방인의 선물을 유대인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것을 부정하다고 안받아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가나안 땅의 복에다 강조를 두니까 형제는 가나안 땅의 기업을 함께 누려라. 서로 이자치기 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가 오히려 신약하고 일치되었지요. 가나안 땅의 유업 복이니까. 출애굽기는 나라를 조직하는 법이어서 오히려 신명기보다는 법적이어요. 신명기는 생명의 약속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약의 빛과 더 가깝습니다. 신약에서도 그런다. 마땅히 형제에게 공급하면은 주님께서 형제 사랑의 의가 계속될 수 있도록 내가 주겠다. 누가? 너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내가 주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고린후서 8,9장에서 말하는 헌금의 내용입니다. 세상에 인간 아버지도 왜 큰아들에게만 그렇게 주는가? 큰 아들이 동생에게 주니까. 그래서 큰아들을 믿고 주는 것이어요. 큰 아들 하나만 잘 가르쳐 놓으면 내가 눈감아서 못된 동생들도 살 것이다. 왜 아버지를 대신하니까. 그래도 몇 푼 주는 정도가 아니라 다 다 맡겨주어 버려라. 네가 책임지라고. 그것이 말하자면 신약 시대 주는 복과도 일치되는 방식이지요. 그런데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안주지요. 형님 몇 개, 동생 몇 개, 말 잘들으면 몇 개씩 더 묘하게 주지요. 그런데 크면은 큰아들에게 다 준다. 그런 식으로 주는 것이 신약 방식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방식으로 더 많이 거둘려고 주면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거두는 것이어요. 그것은 모세 때 그랬거든. 지금은 사랑의 원리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 원리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주어서 더 받으리라는 개념으로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주는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서원을 반드시 속히 말 그대로 갚으라고 말합니다. 더디 갚으면 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찾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원을 이행할 때 주의할 점은 말 그대로 갚으라 그말입니다. 깍지 말고,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에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면은 이렇게 이렇게 하겠나이다. 그것이 구약 때 서원 방식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서원을 안들어주었으면 서원을 갚을 수 없지요. 만일에 하나님이 그 서원을 이루어주셨으면 하나님도 찾겠지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서원이 이루어지는 땅이어요. 풍성하니까. 그러니까 서원한 것은 즉각 갚아야 돼. 즉각 이루어졌으니까. 갚기를 더디 말아라. 그말이어요. 풍성이 주었는데도 안내 놓으면 안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어쨌느냐 하면 소위 이런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십일조 많이 낼 수 있도록 복좀 주십시오. 그런데 살살 부자가 되거든. 그러니까 지금 많이 내버리니 십일조를 함께 모아서 공장을 지어갖고 그때 하면은 이익금만 갖고도 지금 십일조를 하는 것보다 훨씬 좋겠어요. 재벌들에게 돈 모아둔 것처럼 싹 모았다가 큰 공장을 지어갖고 그돈이 굴러가면은 인제 예배당 짓기는 일도 아니지. 하나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인제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해요. 그래갖고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처음에 월요일날에는 헌금할 돈이 많했는데 토요일이 되니까 돈이 점점 줄어들어. 그리고 옛날에 장이 있는데 장날이 가까우면 점점 줄어들어. 왜 빨리 장보아야 돈을 벌거든. 그러니까 예라 이번에 더 벌어갖고 다음 장에 내자. 그래서 점점 줄어든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기 집에 헌금만 남겨놓고 미리 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도 만믿으니까. 주머니에 두었다가는 이 돈이 자꾸 왔다 갔다 계산이 되거든. 말은 좋지요. 하나님 주머니 내 주머니 섞어 놓고 쓰자. 그래야 복받으니까. 그런데 섞어 놓고 써놓고 전부 자기 것만 빼먹으니까 문제지요. 그런 식이 되어서 예날에는 아예 헌금 자루가 그냥 그냥 넣어버리는 것이어요. 자기를 안믿으니까. 자기 마음처럼 변동이 심한 것이 없거든.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고 선배들이 가끔 이야기를 해요. 우리 종교 심리는 잘 분석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는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 못낼 것이 없지 안해요. 그러니까 서원했는가, 즉각 갚아라. 이정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너에게 주었으니 나도 내 것을 찾겠다. 하나님이 찾으니까 내 놓아라. 그리고 절대로 깍거나 변동하지 말아라. 왜? 풍성히 주었으니까.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하고 있는 이야기예요. 가나안 땅의 복을 누리기 때문에. 만일 광야에서 서원하면 이런 말을 안했을 것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아내가 서원했는가? 남편이 무효하면 안되겠다. 딸이 서원했는가? 아버지가 무효하면 안되겠다. 이 정도로 이야기하지요. 민수기의 서원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서원을 보장하고 있거든. 그런데 신명기 서원은 그런 것이 아니어요. 풍성한 가운데 서원하니까 즉각 갚아라. 그리고 말 그대로 갚아라. 그렇게 강조를 한다. 그러니가 문맥이 얼만큼 중요한가를 알겠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일에 광야을 출발하면서 너 서원하면 즉각 갚으라고 하면 갑갑해요.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 만나밖에 안주면서 더 내놓을 것이 어디 있느냐고. 내 놓을 방법이 없지 안해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그렇지 안해요. 지금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함을 받았지요. 우리들은 무엇을 성취해주면 무엇을 하겠고, 그런 어린 아이 방식으로 살고 있지를 않습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지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이 따로 있고 내 것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다. 왜 전체를 다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원의 삶, 감사의 삶,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삶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다음에 어떻게 하겠나이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는 없다. 왜 주어진 환경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그 자리에서 순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아직은 안주었으니까 다음에 할렵니다. 그런 개념으로 우리가 서원하고 그렇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 다음에 네가 지나가다 배고푸느냐? 아무데나 들어가서 네 마음대로 먹어라. 자기 밭이 아니어요. 그러나 낫을 가지고 가서 싹싹 베어가지 말아라. 그것은 수확하는 도적이지요. 그러나 형제의 기업에서는 배불리 먹어라. 옛날 우리 농촌에서도 그랬지요. 지나가다 무뽑아 먹는다고 안쫓아와요. 뽑아갖고 바구리에 담아 가지고 가면 그 사람은 김장할려고 가지고 간 사람이니까 쫓아와서 잡겠지마는 거기서 먹는 것은 옛날 우리 사람들은 많이 잡수고 가시라고 그러지 그렇지 안해요. 그리고 점심 먹으러 가면서 고추 하나 따갖다고 수확했다고 안해요. 그 잘에서 안먹었다고. 그런 것은 상관이 없지요. 중국 사람들도 그런다고 그러데요. 봉철에 장가를 가서 가을철에 처가에 가면 옥수수 때문에 집을 못찾는다고 그러지요. 그래도 지나가다가 연기난데 보고 주인이 와서 많이 잡수시라고 그런다고. 그런데 만일에 주머니에 담고가면은 도적놈이어요. 일반 세계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농촌에서도 모내기를 하면 지나가는 사람도 부르지요. 왜 풍성한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도 그런 개념입니다. 이웃의 밭에 가서 아무 것이나 풍성이 먹어라. 그러나 수확하지는 말아라. 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 것은 다른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너도 네 형제의 기업에 풍성히 함께 참여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에 참여하고 있지요. 그냥 개인의 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에 부요함에 참여하고 있어요. 그가 몸을 주셔서 비천한 우리를 하늘의 부요로 배부르게 했거든, 내가 너에게 준 것을 가지고 형제가 배고파하면 쓰겠느냐. 그것이 바울이 고린후서 8,9장에서 헌금하라는 이야기예요. 내가 몸을 주어서 너를 부요케 했는데 내가 너에게 준 것으로 형제를 배고푸게 할려고 그러느냐. 너도 마땅히 그리스도의 은혜일에 참여해서 손을 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헌금의 원리들이어요. 형제가 배고푸지 않게 해라. 형제의 부양자로 산다. 그냥 지나가다 잡수고 가시라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의 부양자로 산다. 그렇게 신약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이점들이 무엇인가를 알겠지요. 상황이 어떻게 바꾸어지는가?
그런데 인제 지나가다가 점심 때 되었으니까 아따 집사님 계시오, 하고 밥먹고 가고, 옛날 시골에 살면 그런 것이 가능해요. 시골에 살면 대문도 없고 한 공동체에요. 지방 단위라서. 그렇게도 하고 하지마는 지금은 전부 아파트에다 문잠그고 살거든. 삶의 구조가 달라요. 그리고 지금은 전기밥솥에다가 일인분씩 밥을 하지요. 그렇게 밥먹고 사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계시오 하고 밥먹고, 한참 지나서 저녁 때가 되니가 아주 저녁까지 먹고 갈까. 집에가서 먹으나 여기서 먹으나 형제 집인데. 그런 것은 대단한 실례에요. 여기서는 그 부요함에 참여하라는 말이지 아무 집에서나 먹어라. 지금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대답 크게 한 사람은 집에 손님이 많이 오는가 보구먼. 인제 오지 말라고 대답을 크게 하는구면. 깨달아갖고 큰 대답을 안했을 것이고. 그러니까 성경의 강조점은 좀 확대 해석해 갖고 아무데서나 먹으라고 했구나. 하고 먹으면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질서를 분별하고 어떻게 형제의 사랑을 봉사할 것인지, 그때 그때 분별하면서 사랑의 원리를 나타내라. 그런 말입니다. 마땅히 때가 되면 자기 집으로 가서 잡수십시오. 인제 우리 집은 식구가 많으니까 가끔 지나가도 되어요. 우리 집은 다른 집의 식구 두 배는 넘어요. 그전에 우리 학생 때도 가면은 어떤 집은 나 한끼 밥을 가지고 하루 종일 식구들이 먹는 집도 있더라고요. 우리는 많이 먹거든요. 그런데 그집에서 맛있다고 많이 먹어버리면 그 집은 갑갑할 것이어요. 꼭 반드시 때되면 자기 집에 가라는 말이 아니어요. 잡술 때는 잡수십시오. 꼭 자기 집에서 먹을려고 탈탈 터는 사람도 묘한 사람이어요. 나는 먹으라 말라 그런 말을 안했습니다. 잡수고 싶으면 잡수시고 아니면 가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나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것이 형제의 덕을 세우는지, 자기가 자기 삶에 규모있고 생활에 질서가 있는 것인지, 안그러면 무질서해서 그런 것인지 분별하라 그런 말입니다. 실은 제일로 친한 집에 때되면 가고 그런 것이니가 자기 집에 밥 때되면 오는 사람은 제일로 친해서 온줄 알고 좋게 해석하십시오. 목사님이 그렇게 가지 말라고 그러드먼 왔다고 하지 말고. 그러니가 신약 교회는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은 어떤 목사가 옛날에 그랬답디다. 꼭 때되면 제일로 가난한 집에 찾아갔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복빌어 줄려고. 그것도 좀 안맞는 말이지요. 자기 집에서 복빌면 어쩐다고 가거 먹고 그러냐고요. 그런데 옛날에는 무엇을 주어야 복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그 집에가서 빌미 축복처럼 먹고 복을 빌겠다는 말이지요. 에서가 빌미 갖고 오면 복준다고 했는데, 가난한 할수록 많이 받으려면 잘 차리라 그말이어요. 있는대로 차려 놓으면 조금 받으니까 별미를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잘못 읽은 것이지요. 그 마음은 우리가 좋게 이해할 수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런 사람도 있어요. 여기 있는 내용은 전부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러 율법이기 때문에 각 항목마다 각각 기독론적인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제 끝난 것이지요.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