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1장
신명기 21장입니다. 21장에는 범인을 모르는 시체에 대해서 죄를 속량하는 방법과 그 다음 전쟁에서 포로 잡은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 경우 그를 종으로 팔지 말라는 이야기, 그리고 장자면은 그가 비록 미움받은 여자에게서 낳았을지라도 기업을 꼭 그에게 주라는 이야기, 부모를 거역한 자는 죽이고 저주받은 시체로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이야기들입니다. 신명기 21장 해놓고 제목을 못붙여 놓았구먼, 기업에서 생명과 복을 해놓고 닦아졌는데 나중에 붙일려고 했다가 안붙인 모양입니다. 제목부터 붙이면 어렵고, 쭉 풀어보고 이것을 총괄할 수 있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러면 붙이고 그렇지 않으면 못붙이고 그런 것이지요. 왜냐하면 항상 멋있는 말로 해놓은 것은 아니니까 거기다 신경 쓸 것은 없습니다. 멋있게 요약하다가 중요한 것을 빼버리면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먼저 풀어보고 붙일 수 있는지 없는지 보겠습니다. 범인을 모르는 시체에 대해서도 죄를 속략하라는 내용이 1-9절까지입니다. 제일로 제목을 쉽게 붙일려면은 범인을 모르는 시체에 대한 규례, 이러면 되는데 먼 말인지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그런데 강조점은 그런 죄에 대해서도 반드시 속량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거든요. 범인을 모르는 시체가 있으면은 그 범인을 모르기 때문에 누가 책임을 저야 되는가? 그러면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나서 가지고 그 사람이 죽은 곳에서 전부 거리를 측정합니다. 그래서 제일로 가까이 있는 성읍에 있는 장로들이 책임을 져야 됩니다. 사건을 조사할 때는 장로들과 재판장들, 그러니까 관원들이지요. 피살체에 대한 책임을 질때는 여기서 보니까 시체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책임을 집니다. 여기서 판결할 자는 누구냐 하면은, 5절을 보면은 끝에 「그들의 말대로 판결이 될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판결하느냐 하면은,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제사장들이 판결합니다. 제사장들의 직무를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왜 제사장들에게 판결하라고 그러는가 어떤 직무이기에 제사장들이 올라와서 판결하라고 그러는가 그래서 직무는 무엇이냐 하면은, 5절을 보면은, (신21: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제사장들의 직무는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 그들이 판결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축복하는 자리에 있으니가 그런다 그말입니다. 또 다른데서는 제사장이 판결하면은 하나님이 판결이지요. 왜, 하나님을 섬기도 있으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판결해도 복과 저주가 선포될 것입니다.
그 가까이 있는 성읍의 장로들이 책임을 지는데, 책임있는 자가 용서를 받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여기 보면은 3절에는 (신21:3-4)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4)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그것이 한 가지이고, 두번째는 6절에 보니까 신21: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어라.」 세 번째 보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암송아지인데, 아직 부리우지 않고 멍에매지 않은 암송아지를 먼저 취하고, 그것을 가지고 항상 물이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그 소를 죽이고 그 소 위에다가 손을 씻으면서 우리 손이 죄와 무관합니다. 우리는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라. 이렇게 해서 무죄자의 피를 이스라엘에게 남기지 마소서. 그렇게 기도해라. 그런 절차를 밟으라 그런 말이지요. 멍에 매지 아니한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목을 꺾는 것은 죽이는 것인데 왜 다른 것을 죽이지 아니하고 암송아지 곧 멍에 매지 아니한 것인가? 여기서 멍에 매지 않고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반복법이기 때문에 그냥 멍에매지 아니함 그러면 되겠지요. 아직 부린 적이 없다는 말이 멍에매지 안했다는 말이기 때문에 여기서 멍에 매지 않은 암송아지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개는 숫 송아지를 죽이는데, 제물은 주로 수 송아지고 화목제물만 암컷을 죽이지요. 암송아지를 쓰는 데가 여기 말고 또 있어요. 큰 암소 한 마리를 잡아 갖고 태워 가지고 뭐 한약제 같이 섞어 가지고 부정한 자 만나면 뿌릴 때가 있지요. 민수기에 있지요. 거기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그것으로 제물을 만들어 가지고 죽음으로부터 부정한 자에게 뿌리면 나섰지요. 그것과 비교해 보면 알겠지요. 그걸로 속죄의 제물을 만들었지요. 그랬을 때 암컷을 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된 것이어요. 생명의 소생,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은 항상 여자로 말미암아 되거든요. 그래서 암컷을 제물의 다양함을 말할 때 수컷 필요없이 암컷까지 말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무엇과 관계가 암컷이냐 하면은 멍에 매지 않고 부리지 안했다는 의미와 암컷이라는 의미와 서로 같아야 맞겠지요. 만일에 수소를 이렇게 했다면은 인제 이렇게 해석한 것 같아요. 여기서는 생명의 대속과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암컷을 쓰는데 만일에 그렇지 않고 수컷을 이렇게 쓰면은 그것은 힘이 많다거나 힘에다 강조를 두어요. 이것은 생명에다 강조를 두어요. 암컷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 앞에는 멍에 매지 않고 털을 깎지 아니한 것, 첫 것을 먹으라는 것은 생명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은 것을 먹으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암컷인데 멍에 매지 안했다. 암컷인데 생명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것으로 네 죄를 대신해라. 그러니까 범인을 모른다 해서 대충대충 죄를 속량하면 안되고 완전한 생명으로 그 생명을 대신해라. 그런 말입니다. 물이 항상 흐르고 경작하지 못하는 골짜기에서 죽이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보통 죽이면은 진 밖에 나가서 죽이지요. 레위기는 진 밖에 나가서 죽이라는 것이 핵심이지요. 진밖 성소 밖 하면은 레위기에요. 왜냐하면 성소는 거룩하고 성소 밖은 그런 곳보다 거룩하지 않거든요. 그래도 그런 속죄제물을 태웠으면 정결한 곳에 버려라. 그러거든요. 진밖인데 성소 밖인데 정결한 곳, 그것이 제물 태우는 제를 버리는 곳이어요. 제물 태우는 제를 버리는 곳은 진 밖인데 정결한 곳, 성소하고는 다르니가 진밖인데 그래도 정결한 곳, 거기다 버리면 거룩한 제물의 제를 버리는 곳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성소적으로 거룩하냐 그런 말이 아니라 이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유업과 관계된 문제이지요. 그러니까 만일에 부정하다고 태울려면은 저 가나안 땅 밖에다 태워야 되겠지요. 부정하다고 죽일려면은. 그런데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범죄해서 그 범죄를 해결하는 방법이은 대신 죽어야 되어요. 그 대신 암송아지를 죽이는데 멍에 매지 않은 암송아지를 죽여야 되겠다. 어디서 죽이는가? 일단은 깨끗해야 되겠는데 그래도 부정해요. 어떤 의미로 부정합니까? 아무도 갈도 심도 못하면은 거기는 복을 주어 보았자 젖과 꿀이 안나지요. 가령 우리들도 물건을 버릴려면은 쓸데 없는 땅에다 버리지 안해요. 그러니까 갈기도 심지도 못해요. 그 다음에 인제 물이 항상 흐르고 하는 말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이것이 습지라는 말인지, 안그러면 정결하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이기는 죽인데 그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죽여야 되어요. 만일에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그런 땅에다가 피를 흘려버리면은 어떠튼 무죄자의 피는 아니지마는 피를 흘리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는 피흘림이 없어야 되어요. 완전한 생명의 유업이라. 그러니까 그 피를 아무리 흘러 보았자 아무 필요 없는 땅, 갈기도 심지도 못하는 땅, 그땅에다 갔다 죽여라. 그러면 항상 물이 흐른다는 말도 그것과 연결이 될 것인지, 그 해석이 한 가지 가능하고, 한 가지는 그래도 부정한 곳이 아닌 깨끗한 곳으로, 왜냐하면 그 부정이 남아있어서는 안되거든요. 항상 물이 흐른다. 레위기 같으면은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산 새를 잡을 때 흐르는 물에서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 흐르는 물, 그런 것은 정결과 관계가 있거든요. 그냥 죽는다고 그냥 부정한 것이 아니어요. 이렇게 해서 양쪽 의미를 다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튼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거기서 죽이라는 말은 거기는 아무리 피를 흘려 보았자 생산하는 곡식을 얻을 장소는 아니어요. 그러나 다른데다 이 피를 흘렸다가는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어요. 그런 의미라. 그러니까 레위기의 성소 밖, 진 밖과 비교해 보면은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땅의 의미를 더 알 수가 있다. 목을 꺾은 암송아지를 위해서 손을 씻는 의미는 지금 누가 죽냐 하면은, 그 위에서 손을 씻어요. 그전에 손을 씻은 사람이 있지요. 빌라도가 나는 죄가 없도다. 하고 손을 씻었지요. 그런 의미로 손을 씻으라 그런 말이지요. 그러면 어디서? 그 죽은 소의 시체 위에서. 자기들은 어떠튼 그 죄와 무관하다는 의미입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큰 것만 알면 되겠지요. 하여튼 이 사람이 죽은 것을 우리는 본 적도 없고 손댄 적도 없다. 그런 의미로 손을 씻는다고 본문이 설명하고 있지요. 손을 씻으면서 우리 눈이 우리 손이 이 살인 것을 보지도 못했고 손대지도 못했다. 그런 의미로 손을 씻는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규례를 행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은 9절에 보니까 무죄자의 피흘린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행할 때 9절을 보면은 정직하게 행하라. 했지요. 아마 여기서 정직하게 행하라는 말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시체에 대해서 이 일을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강조할 것이어요. 이런 율례가 집행이 되면은 이 땅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으면 누가 책임을 질까요. 이스라엘 중에 반드시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되어요.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이 책임을 저야 되어요. 그래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판결을 따라서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그럴 것이어요. 그렇게 돼 있지요. 만일에 죽은 사람의 시체에 대해서 모르면 그 불똥이 제일 가까운 성읍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가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일이 없도록 서로 형제의 생명을 보호해야 될 뿐 아니라 일이 벌어지면은 책임을 저야 되어요. 그러니까 그 죄를 속량받으려면 피흘림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되는데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시체는 있을 수가 없다. 왜 이 땅은 기업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유업의 땅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매하게 죽어 없어지는 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를 대신해서 암송아지가 죽을지라도 그 땅은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지요.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도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을 방해받지 못해요. 왜냐하면 항상 물이 흐르고 그리고 심지도 갈지도 못하는 골자기에서 죽이기 때문에 그 땅은 피로 더렵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제일 끝에 말과도 연결이 되는데 22절의 말씀을 보면은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해지기 전에 묻어 버려라. 그래서 그 땅을 더렵히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저주받은 시체에 의해서도 이 땅은 더럽히니 않는다. 왜 하나님의 유업의 땅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암소가 죽었을 때까지라도 그 피가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못할 것이어요. 그런 의미로 물이 흐르는 곳, 그리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곳입니다. 내가 볼 때 물이 흐르는 곳은 정결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반복법으로 하면 갈지도 심지도 못한다는 의미와 같을 수 있는데 그러나 꼭 그런 보증은 없거든요. 제를 버리면은 진 밖에 버리는 데 정한 곳이어요. 그려면 일단 진 밖은 부정한 곳에 버리거든요. 그런데도 정한 곳에 버려요. 그러면 정한 곳이 어디냐? 모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정한 곳과 진밖은 서로 상충되는데도 타진 예물의 제를 버리는데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여기서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죄를 속량해서 암송아지가 죽는데도 그것이 그 땅을 더럽히도록 죽은 것은 아니어요. 죽어서는 안되어요. 그러니까 물은 차라리 정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0-14절은 아내로 삼은 종을 다시 종이 되지 않게 해라. 전쟁 포로인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할 때 그 녀가 할 일은 무엇이냐? 또 그 의미는 무엇이냐? 읽어 보면은 손톱 발톱 다 깍고 머리 털도 다 깍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몇 달 동안 울라고요. 일 개월 동안 자기 부모를 위해서 울어라. 그러면은 아내로 삼지요. 이것은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손톱 발톱 깍고 머리를 미는 것은, 문둥병자가 제일로 그런 것이 있지요. 문둥병자는 7일 있다가 또 밀었지요. 이것은 부정을 정결케 하는 방법이지요. 그 다음 한 가지는 일 개월 동안 부모를 위해서 울라고 그러지요. 초상났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죽은자로 끝내라 그말이지요. 그러면은 아내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전쟁 때 종으로 삼아서 자기 재산으로 삼지마는 그를 특별히 사랑해서 아내로 등급을 올리고 싶으냐 그말이어요. 아내로 삼겠느냐? 그러면 이방인이 가나안 땅에 잡혀왔으면 종인데 자기 고국까지 떠났으니까. 이런 사람들까지라도 이스라엘의 복에 참여하는 복이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린 사람도 그가 억울하게 죽을 수 없는 것처럼 심지어 전쟁판에 잡혀온 여자까지라도 이스라엘의 복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정결케 하면은. 몸의 정결은 면도함으로 그리고 부부간의 관계는 부모를 위해서 애통하면서 장례식 치름으로, 정결하면은 그는 이전의 모든 질서로부터 죽지요. 그러면은 아내로 살아라.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의 종으로 잡혀와서도 정결케 되면은 이전의 자기 모든 것을 끊으면은 아내로 삼을 수 있지요. 그렇게 해라. 그러니까 유업의 복은 꼭 유대인만을 위한 복이 아닌 것을 알겠지요. 그리고 한번 아내로 삼았느냐? 그 다음에 미운 정이 들어도 절대로 종으로 팔지 못한다. 왜 한번 네가 아내로 삼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처녀를 건드렀으면 절대로 버리지 못하지요. 22장인가 보면 나와요. 처녀를 거들면은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장가가야 되어요. 그렇게 하고는 절대로 못버려요. 그런데 종이어도 절대로 못버린다. 물론 24장을 보면은 이스라엘 본토 여자는 수치스러운 일이 드러나면은 이혼증서를 주어서 보내라. 그런 말도 있지마는 이 문맥에서는 증인 없다고 원통이 죽을 사람이 없고, 그리고 어떤 죽음으로도 가나안 땅은 피로 더렵혀지지 안해요. 그럴 뿐만 아니라 종으로 잡힌 이방인이 있는가? 이스라엘의 남자가 그를 사랑해서 아내로 삼고 싶은가? 삼아라. 어떻게 그를 정결케만 하면 네 아내로 삼아라. 그래서 부모에 대해서는 죽은 것처럼 장례식 하고 자기 손발은 전부 면도로 밀어서 정결케 하고 그러면 네 아내로 삼아라. 그러나 한번 아내로 삼았으면 평생 버리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방인까지라도 언약의 땅에 들어와서는 그들도 언약의 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요. 그런데 또 그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아내가 여러명 있는데 제일 미워하는 아내의 아들이 장남이 됐어요. 그러면 요새 용의 눈물같이 저 밑에 있는 아들을 장자로 삼을 것인가? 그러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받은 여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서 기업을 갑절을 주어라. 갑절은 항상 장자의 몫이지요.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러냐 기력의 시작이니까. 이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은 여자는 미웁고 싫은가 몰라도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은 그 아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장자가 아버지의 것을 받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기력의 시작으로써 장자의 몫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장자의 몫은 두배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정도만 이야기된 것이 아니라 레아와 라헬을 야곱이 얻었는데 라헬은 눈이 반짝반짝 총기가 있어서 이쁨을 받고 레아는 그렇지 못해서 이쁨을 못받았지요. 여러분 알지요. 동생을 사랑해서 7년 동안 머슴살이 했는데 그때는 전기불이 없어서 어떻게 했는가 모르지요. 신방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미운 언니가 있거든요. 그래 갖고 장인하고 대판 싸웠지요. 사람을 속였다고. 우리 지방에는 큰 딸을 여우기 전에 둘째 딸을 여우는 법이 없다. 둘째를 얻고 싶으면 또 7년을 일해라. 그전에는 7년 일하고 후불로 장가를 갔지마는 이번에는 장가부터 가고 후불로 7년 일했지요. 그런데 그 7년을 차도록까지 라헬은 얘기를 못낳아요. 레아는 아들을 네명이나 낳았지요. 라헬은 못났고 다 기한이 차서 낳아요. 그러니까 속일 수 없게 해놓았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은 아니고, 그래도 루우벤이 장자인데 실은 장자의 기업을 잃었어요. 그래도 족보에는 항상 장자에요. 왜냐하면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 집안에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그렇게 해갖고 그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왔어요. 그래서 요셉이 두 지파입니다. 그래도 족보에는 항상 루우벤이 장자로 기록되어 있어요. 역대기 5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장자의 기업은 요셉에게 있고 왕권은 유다에게 있어도 본래 루우벤이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에 루우벤을 장자로 올려 놓았어요. 왜냐하면 그가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기 보니까 혹시 어머니는 미움을 받더라도 그 아이는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이니까 아버지로부터 그가 몫을 받아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부모를 거역한 완악한 자식은 죽이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부모의 말을 안들어요. 내용을 보니까 술먹고 말을 안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을 해도 안듣고 두둘겨 패도 안듣고 그러면 성문의 장로들에게 가서 일러 바쳐라. 가서 이 아들이 이렇게 저렇게 형편없다고 조목조목 일러 바쳐라. 그러면은 장로들이 사실을 심문해 보고 사실이면은 성문에서 온 성내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돌로 쳐서 죽여라. 그렇게 해서 악한 일을 이스라엘 중에서 제거하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은 비교해 볼 데가 있는데 잠언 같은데는 어떻게 합니까? 말 안들으면, 그건 채찍으로 등허리를 때리라는 말은 있어도 성문에 데려다가 죽이라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잠언은 강조점이 지혜문이어요. 자녀를 가르치고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채찍질한 것처럼 채찍질해서 가르치고 그런 지혜문이어서 말 안들으면은 그렇게 때려라. 그리고 그런 아들은 골자기에서 까마귀가 쪼아먹는 것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아들을 때리라는 말이 아니라 당장 가서 죽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 구절대로 했다가는 큰일날 일이 많겠지요. 그러면 몇살 때 재판할 것인가? 세상 말로 자식은 평생을 기다려 보아야 되는데 알 수가 없지 안해요. 참 난처한 일입니다. 왜 여기서는 이런 말을 하느냐? 여기서는 교육법이 아니라 지혜문은 교육법이어요. 여기서는 교육법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유업을 누리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이 땅은 애매하게 죽은 사람도 절대로 애매하게 안죽어요. 이방인 여자가 포로로 잡혀와서도 그는 신분 상승을 않고 절대로 종으로 다시 안팔릴 것이어요. 그리고 아무리 미움을 받은 여자의 아들이라도 그가 아버지의 첫 아들이면은 아버지의 집은 그의 것이어요. 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아버지가 그 순서로 정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미움을 받는다고 기업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이어도 또 장자라도 그가 아비의 말을 거역하면은 그는 기업을 상속하지 못해요.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기업을 상속하지 못한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서는 저주받은 자를 죽이는 것처럼 돌로 쳐서 죽여라. 손을 대지 말고 죽여라. 손을 대지 않고 죽이는 것은 소위 하나님의 신적인 판결법이어요. 저주받은 자의 죽음이지요. 그러면 돌을 던지 사람은 부정 안해요. 손이 안닿았으니가. 비록 장자여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비의 말을 거역하면. 왜냐하면 신명기는 순종해서 복받으라는 것이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저주를 받아 죽었어도 저주 받아 죽은 사람은 그 시체를 나무에 다는 법인데 그러면 이 시체가 십자가형인지 긴 장대에다 단 것인지 몰라요. 단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는 로마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어요. 그것은 포악한 강도만 죽이는 형벌인가? 물론 로마 본 시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요. 로마 본 시민을 재판해서 두둘겨 패는 법도 없습니다. 바울이 한 번 매맞고는 내가 로마 시민인데 정식 재판도 않고 때리는 법이 있냐? 그러니까 재판장이 살살 빌었지 안해요. 그런데 그런 의미로 로마 시민에게는 그런 벌을 가하지 않겠지마는 그냥 로마에서 제일로 고약한 사람을 죽이는 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셨거든요. 그러니까 율법 아래서 난 예언은 율법 아래서 출생에는 거의 문자적으로 적용이 되어요. 왜 구원 역사의 시대가 같기 때문에. 가령 문화사적으로는 가령 옛날에 말타고 오신다고 하면 지금은 자동차나 탱크 타고 오시겠지요. 그러나 문화사적으로 비유가 비슷하면은 그전에는 나귀를 탔는데 나중에는 말을 타든지 안그러면 말에다 조금 변형된 병거를 탔든지 그래도 틀은 비슷하겠지요. 왜 문화적으로 질이 같아버리면. 에수님은 율법 아래 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거의 문자적으로 이루어져요.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십자가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나무에 달려 죽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갈라디아서는 주저받은 죽음을.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마는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은 무엇이냐?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다. 그렇게 구약을 거의 인용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저주받아 돌로 처 죽인 자들은 죽어도 시체를 매달아야 될 것이어요. 그전에 누구의 시체를 다느냐 하면은 사울의 아들을 죽여가지고 성벽에 달지요. 구약 이야기를 하면 잘 몰라버려. 사울이 괜한 열심을 내갖고 기브온 백성들을 죽였어요. 왜냐하면 기브온 백성들이 여호수아 때 항복해 갖고 안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몫을 차지했거든요. 물론 성전에서 나무 패는 종이지마는 한 몫을 차지했어요. 유럽 같은 데서도 동양인들을 많이 쫓아내지요. 이민 오라고 했다가 자기들 일자리 없으면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그러지요. 그런 것처럼 사울이 괜한 열심을 내갖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브온 백성들을 죽였어요.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된 뒤로도 삼년인가 그 땅에 비가 안내렸어요. 그래서 물었더니 그 일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네 원통함을 풀겠느냐? 이것은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기브온 백성들이 사울의 일곱 아들들을 목매달아야 되겠다. 그래서 다 데려다가 목매달았지요. 그러니가 그 땅에 비가 내렸다. 보니까 죽여 놓고 성벽에 달았지요. 그러니까 이제 누가 그랬습니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시체들을 내려다가 묻었지요. 저주를 안받게 할려고. 그런 이야기들이 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놓고도 나무에 달아요. 그러면 저주받은 죽음이어요. 그러면은 이런 시체도 이스라엘 백성은 해가 지면 새로운 날이거든요. 밤을 새우면 다음날까지 둔 것이어요. 밤새도록 둔 것은. 그러니가 그 날에 묻어라. 왜? 언약의 땅을 더렵히지 않도록. 그러니가 이 땅은 비록 저주받은 죽음이 있어도 그런 죽음은 자기만 저주받아 제거될 뿐 언약의 땅은 더럽히지 못해요. 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애매히 죽은 사람들도 절대로 그 땅을 더럽히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 그 땅에서 피를 제거할 때까지라도 그 피가 언약의 땅을 더럽히지 못해요. 그리고 이방인까지라도 전쟁에 잡혔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을 입으면은 그를 정결케만 하면은 이스라엘의 아내가 될 수 있고 모든 주권을 누릴 수가 있어요. 비록 미움받는 아내의 아들이라고 그가 장자이면은 아버지의 기업을 상복을 받아요. 그러나 거역하는 자는 그 땅에서 저주받아 죽을 것이어요. 그러나 저주받아 죽은자는 자기는 저주를 받아 죽어도 그 땅을 더렵히지 안해요. 왜? 하나님의 언약의 땅이니가. 이렇게 해서 완전한 기업주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기업에서 생명과 복을 보존하라. 그럴까. 기업에서 주신 생명과 복의 온전함, 어떻게 표현이 조금 이상합니다. 여러 규례를 갖다가 맞추어 놓으니까. 핵심적인 사실은 기업으로 주신 유업으로 주신 기업은 어떤 의미로도 더럽히지 않을 것이어요. 거기는 완전한 생명과 축복이 있을 것이어요. 단지 범죄한 자만 그 땅에서 제외될 것이어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그러면 우리에게 적용이 될 것인가? 즉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는 어떤 말씀으로 올 것인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항상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 그렇게 읽어야 되지 유형적으로 비슷한 것을 자꾸 끌어들인다고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교회에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기업으로 주셨으며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생명으로 형제의 생명의 보호자로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는 결코 그 영광을 잃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저주된 자를 제거함으로 기업을 거룩하게 했지마는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사 저주가 제거되어 영원한 기업을 주셨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이만큼 대비되어요. 구약 때는 악한 자를 제거함으로 가나안 땅을 거룩하게 했지마는 신약 때는 예수께서 그 악한 자의 죄짐을 짊어지심으로 영원히 거룩한 땅을 지으셨다. 그만큼 달아요. 그러니가 유형적으로 풀 수 없는 것을 알겠지요. 얼만큼 다른지.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니까 명절날을 더렵히지 않을려고 빨리 시체를 묻어야 되겠다고 달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가서 보니까 죽었지요. 그래서 창으로 찌르니까 물과 피가 나왔다. 다른 사람은 아직도 안죽었어요. 그래서 다리를 꺾었다. 그 문맥은 물론 어린 양의 뼈가 하나도 꺾어지 아니하리라. 주의 교회가 온전한도록 그렇게 죽으신 분으로 묘사하사 되어 있어요. 그래도 어떠튼 명절날 더럽히지 않을려고 시체를 빨리 매장할려고 했어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느냐 마느냐 그런 것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썩지 않고 쇠하지 않은 기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이방인이었지요. 그러나 손톱 발톱 깍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죽으심 때문에 완전하게 정결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키시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안에 두었기 때문에 애매히 그 기업을 잃을 사람도 없어요. 단지 우리는 주의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할 책임은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렇게 거짓말 못한다. 이런 율법이 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이어요. 이런 율법이 없으면은 그들은 가나안 땅을 이렇게 못누려요. 그러니까 율법이 그들의 기업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생명이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높은 기준을 정해놓고 도달하면 천국, 너는 백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은 율법 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시기 때문에 이 규례를 떠나서는 이 복을 누릴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그럽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살 방법이 없지요. 만일에 이런 방식으로 살고자 하면은 예수 안의 영광은 추구하지 못해버려요. 인제는 신명기를 읽을 때 이렇게 비슷하게 보입니까? 다음에는 22장인데요 더 잡다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하옇튼 신명기의 핵심은 가나안 땅의 유업을 누려라. 어느 누구도 그 유업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순종해서 누려라. 불순종하면 안된다. 그것이 신명기의 강조점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완전한 순종 가운데서 우리는 하늘이 것을 누리지요. 그 기업에서 제외는 자가 없어요. 주께서 가르친 기도로 마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