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20

찬미예수님 2024. 9. 14. 07:59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20

 

20장에는 전쟁에 대한 여러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은 전쟁할 때 겁내지 말 뿐만 아니라 전쟁할 때 이러 저런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 10-18절까지는 가나안 땅 밖의 전쟁에서도 전부 멸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라고 말하고 있고, 그런 전쟁할 때도 무기도 쓸 것이 있고 쓰지 못할 것이 있어서 과실 나무는 짓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0장에는 전쟁에 대한 그런 기사가 있지요. 더 강한 적과 전쟁할 때 두려워 말 이유가 무엇이냐? 1절을 보면은 너보다 힘이 강할지라도 두려워 말라. 왜 두려워 맙니까?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와 함게하신다. 왜 두려워해서는 안됩니까? 글자 그래도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네 하나님이신데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누굽니까? 애굽에서 건져내신 힘있는 하나님이셔요. 그러면 애굽보다 힘쎈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놀라지 말아라. 그런 말입니다. 권세 있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놀라지 말라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어째서 놀라면 안될까요. 우리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놀라지 말라. 그렇게 하면 되겠지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큰 권세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놀라지 말라 그런 것입니다. 전투 전에 제사장이 백성에게 이를 말이 있습니다. 2절을 보니까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가서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 대적과 싸우려고 나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해 놀라지 말라. 여기 보니까 한 절에다가 놀라는 여러 각지 모습을 묘사했지요. 나는 그냥 질이 다르니가 전혀 놀라지 말라. 이렇게 했지마는 이 표현법은 아주 다양하게 놀라지 말라는 말이 여러개로 바꾸어서 묘사하고 있어요. 만일에 히브리어가 이것이 자음이 비슷해 갖고 반복하면은 반복 표현법이 굉장할 것이어요. 우리는 의미적으로 보니까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 해서 내용이 비슷 비슷한 것으로 강조하니가 그래도 강조가 되는데, 만일에 히브리어가 단어까지 엇비슷해 갖고 모음만 바꾸면서 이런 강조법을 쓴다면은 아마 그런 강조법은 굉장할 것이어요. 그래서 놀라지 말라고 하는데, 4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그렇게 말해라. 제사장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누굽니까? 그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는 자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라. 그러면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군대장관이 그런 이야기를 않고 제사장이 그렇게 말을 해야 되는가? 가령 비교를 좀 해보면 되겠습니다. 가령 민수기 14장을 보면 제사장이 축복하는 그런 기도들이 있어요. 지금 이스라엘 진이 떠날 때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10:35-36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이것은 하나님의 진이 진행하니까 모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이어요. 갈때는 싸우시고 머물 때는 우리 중에 함께 계시라. 이스라엘 백성의 진이 진행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면 하나님이 나가 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쉴 때는 하나님도 돌아와 쉬셔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그런 것도 아니고 제사장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 말이 반복된 말이지요. 그 하나님은 누굽니까? 앞에서는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낸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렇게 백성에게 말해라.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너희와 함게하시느니라. 그 말만 해도 되는데, 너희 하나님은 대적과 싸우시고 너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 아니냐.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 말을 해라. 그말입니다. 왜 제사장이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이제 신명기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판결하시고 복주시고 그러지요. , 기업의 땅에서 영원히 함게하심이 신명기에서는 제사장 제도 안에서 함께하셔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렇게 한다. 제사장이 법궤를 메지요. 그 하나님이 함게 하시지요. 누굽니까? 권세있는 하나님이다. 너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 해라. 전투 전에 관리들이 백성에게 이를 말이 있습니다. 여기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무슨 말이 있습니까? 네 가지 말이 있습니다. 네 번은 돌아가라. 그렇고 네 가지 말이 있지요. 한번 이야기 해보십시다. 이것은 한번 보고 손을 들어야 되지요. 얼른 말해 보십시오. 집에서 읽어 보고 오시고, 식사하고 준비하고 그래야 됩니다. 몇 가지 돌아가라고 했습니까? 몇 가지 돌아가라고 했습니까? 네 가지, 그것이야 세어보면 되니까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집짓고 아직 입주식 안한 사람, 맛선만 보고 손도 아직 못잡아 본 사람, 두려워한 사람 돌아가라고. . 세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은. 그 복받은 이야기지요. 집짓고 포도원 짓고 장가가고 이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어요. 시작은 했는데 하나도 누리지를 못했냐? 집에 가서 누려라. 그런 이야기지요. 나중에 다른데 보면은 장가간 사람은 일년 동안 군대 가지 말라고 그러지요. 신명기 다른데 그런 것이 나와요.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을 시작했느냐, 이건 참 복된 시작이어요. 그리고 결말을 보지 못했느냐? 돌아가서 누려라. 만일에 네가 전쟁나서 죽으면 다른 사람 차지가 될 것이 아니냐? 왜 네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잃어야. 그러지 말고 가서 누려라. 하는 것 세 가지지요. 그리고 한 가지는 두려워하는 자는 돌아가거라. 왜냐하면은 네가 두려워하면 백성들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돌아가라는 이야기는 인수분해 하면 몇 가지입니까?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기업의 복을 잃지 않도록 돌아가서 누려라. 하는 이야기고, 다른 한 가지는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했어요. 왜냐하면은 그가 두려워 떨면 백성들도 두려워 떨어서 전쟁으로 얻을 복을 못얻어요. 하나는 기업에서 이미 주신 복을 누리도록 돌아가라고 그러고, 하나는 전쟁에서 얻을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그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전쟁나서 잃습니까? 안잃습니까. 전쟁이 나면 본토의 것도 안잃고 정복할 것도 안잃을 것이어요. 왜냐하면 본토 것은 아직 맛도 못본 사람은 돌아가서 누리니까 기업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두려워 떠는 자는 전부 돌아가고 용감한 사람만 나가니까 당연히 정복하고 이길 것이어요. 그전에 정탐꾼이 두려워 떨어갖고 그냥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것을 못 얻어 버렸지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얻었지요. 그런 것처럼 두려워 떠는 자들이 돌아가면은 전부 용감한 군인들이라 정복해서 얻지 못할 사람이 없어요. 이 전쟁은 잃을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 두가지 이유로 돌아갈지라. 이유는 실은 한 가지다. 가나안 땅 것이나 적군의 것이나 다 네 것이니 누려라 하는 것과 같다. 신명기 강조점이 그것이라고 그랬지요. 실은 말은 같은 말입니다.

10-18절은 기업의 밖에 것도 정복하여 소유하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기업의 안에 것을 누리는 방법은 세 가지 돌아가는 것에서 보증되었지요. 기업 밖에 거도 누려야 되는데 용감한 사람들은 전투하면 될 것이어요. 그런데 전투하기 전에 적에게 행할 일이 있는데 덮어놓고 싸우면 안되어요. 먼저, 야 항복해라. 평화해라 하는 것은 항복해라. 그말입니다. 그래서 항복하고 평화하고 그러면은 너에게 세금 바치고 너를 섬기라고 해라. 그러니까 죽일 것이 아니라 세금 바치면 되어요. 그렇게 해서 이방의 것을 다 자기 것으로 누리는 것이지요. 평화를 받아드리는 적에게는 그렇게 하지마는 평화를 거절하는 적에게는 전투에서 쳐야 되어요. 그런데 몽땅 다 죽여버리면 안되지요. 심지어 하나님이 가나안 땅 적을 칠 때도 일년 안에는 다 안치겠다. 왜냐하면 한꺼번에 치면은 그 땅이 황무지가 되어 짐승이 들랑달랑 하면은 안되니까 천천히 치겠다. 어디서 하는 말 같아요. 신명기에서 하는 말 같지요. 가나안 땅은 하나도 안잃어버리까. 신명기에서 할 수 있는 말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몽땅 죽일 것이 무엇이냐. 그러지 말아라. 남자만 다 죽이고 얘기들하고 여자하고 소도 살리고 짐승은 다 살려라. 전부 네것이 아니냐. 왜 남자는 죽이냐 하면은 남자가 대표자지요. 남자가 죽으면 그 머리는 없어지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차지하라. 그런 말이지요. 그런데 가나안 족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전부 죽여라. 그러나 가나안 땅 밖에 것은 그렇게 하라 말하고 하고 있어요. 왜 가나안 땅은 그렇게 하면 안되냐 하면은 그 가나안 땅 백성들이 너희를 미혹해서 자기 신을 섬기게 할 것이니가 몽땅 없애버려라. 그러나 밖에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 항복해서 누려라. 항복하면 세금 바치게 하고, 항복 안하면 남자만 죽이고 전부 소유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가나안 땅과 가나안 땅 밖의 전쟁을 구별하느냐?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자기 기업으로 성별한 땅이어요. 거기서는 하나님만 신이시고 하나님만 섬겨야 돼. 다른 신을 섬기면 안돼.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만 거기 있어야 돼. 이런 결정은 종말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그랬지요. 아마 예수님 재림하시면 이정도 하겠지요. 거역하는 모든 자들은 불못으로.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혀진 것은 역사의 종말적인 상황에서 들어나 있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종의 형상으로 보내서 이스라엘과 만민을 구원하고 섬기는 일은 오히려 가리워져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 오셨을 때 힘있는 왕이 오실줄 알고 자꾸 기대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도 처음에는 힘있는 왕 그런 개념인데 나중에 선지서들에서는 이사야서에 종의 고난에 대해서 나오거든요. 대부분 힘있는 왕이어요. 이제 특별히 이사야서에서 종의 모양이 나오지요. 어쨌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거의 가까이 나타나면은 이전에는 밝혀질 수 없었던 것이 더 많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되고 돌아온 상황을 묘사하기 전에는 거의 힘있는 왕이지마는 돌아온 상황을 묘사하면은 말하자면은 상황이 많이 바꾸어져 있어요. 특별히 고난받는 종은 그런 문맥에서 읽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오셨을 때 지상 생애에서 이루신 일들은 구약에서는 경영에서는 더 밝일 수 없는 경영입니다. 예언이 되어 있어도 그래서 힘있는 왕에 대한 상인데 오히려 그것은 에수의 종말의 상황에 더 맞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양반이 가나안 땅에서는 아이까지 전부 죽이라고 그래요. 그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요. 그러나 종말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어요. 그를 거절하는 모든 자들은 죽게 될 것인데 가나안 땅 백성들은 어른이 이방신을 섬기면 아이들도 거기 속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가 아이들도 한꺼번에 죽이라는 것이어요. 그러나 가나안 땅 밖에 것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네 소유가 아니냐. 누려라 그말이지요. 전투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성을 포위할 때는 아무리 적군을 친다고 해도 과실나무는 찍으면 안되어요. 다른 나무는 찍어서 무기를 만들어서 전투를 해도 과실나무는 찍지 말아라. 거기 하는 말이 과실나무가 사람이냐. 죽이게. 사람을 죽일 때까지라도 남자는 죽이지마는 아이나 여자는 종으로 삼을 수 있으니가 죽이지 말고 전쟁할 때 소나무 같은 것은 찍어서 해도 좋지마는 복숭아 나무나 사과나무는 찍지 말아라. 그건 너 먹어야 될 것이 아니냐? 전쟁해서 이기기는 했는데 그 땅이 황무지 되면은 먹을 것이 없지 안해요. 그러니까 전쟁할 때도 너 먹을 것은 남겨두어라. 네 것이 아니냐. 왜 전쟁하면서 네 것을 없애버리냐. 그러니가 한 마디로 하자면 이미 전쟁에 이긴 사람들이지요.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전쟁은 전쟁이 나서 가령 혹 죽은다 할지라도 살아 생전에 기업에 복을 맛보지 못할 사람은 없고 그리고 전부 용감한 사람들만 나가니 두려워 떨어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데 그걸 믿지 않고 두려워 떠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애굽을 이기시고 적을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셔요. 그 하나님의 법궤를 제사장이 메고 있지요. 그 제사장이 함게 동행하면서 축복하고 있지 안해요.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지 않냐.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전쟁할 때 가나안 땅은 전부 죽이지마는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로 삼아야 되지마는 가나안 땅 밖에 것은 남자는 죽이고 남어지는 전부 네것 삼아라. 그리고 아무리 전쟁이 격열해도 네 먹을 것은 하나도 손대지 말아라. 전쟁 끝나면 다 네것이니까. 그리고 먹거리 아닌 것은 찍어서 전쟁을 위해서 쓸지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네 것이니까 손대지 말아라. 왜 전쟁 때 그것을 무너뜨릴려고 그러냐? 하지 말아라. 그러니가 이것은 전쟁 때도 하나님이 주신 복은 하나도 잃어버리는 법이 없을 것이어요. 가령 우리가 데모만 나도 논밭으로 지나가면 농사 망쳐버리지요. 그런데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거든요. 적은 완전히 정복되면 전부 네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기서는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부 복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래서 알기 쉽게 전투 할 때도 주신 복을 멸하지 말라. 이렇게 알기 쉽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야 제목만 읽어도 이 말이구나. 알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제목이나 제가 한 설명이나 같지요. 이렇게 자기 알기 쉽게 붙이면 되어요. 대한상회 해놓으면 이것이 수건를 파는지, 타이어 파는지, 자전거를 파는지, 양철집인지, 그전에 대개 양철집이 그런 이름이 많해요. 대한 무력상회 해갖고 굉장한 한데 조금만 학고방이 양철집이지요. 그런데 우리 어렸을 때는 양철집인데 요새 같으면 철공소지요. 양철 땅땅 두둘겨 갖고 양동이 만드는 것이 우리 때는 공업이었어요. 요새는 인제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옛날에는 그랬어요. 조그만 학고방에다가 대한상회라고 해 놓으면 그걸 보고 누가 아느냐고요. 모르지. 그러니까 이름 붙이기 좋다고 붙이지 말고 알기 쉽게 붙여 놓아요. 그래서 나는 내용이 통할 만큼 붙여 놓는데 한마디로 모든 복을 다 누려라 하는 이야기에요. 그 이하 설명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신약교회가 읽을 것인가? 그 말입니다. 읽는다 그 말은 이것을 의미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일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어떻게 성취되고 주셨는가, 그 역사가 완성된 빛 가운데서 우리 것을 읽으라 그 말이지 아직은 오지도 안했는데 의미를 찾아내라 그런 말이 아니어요. 성경은 그 역사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면 읽을 수가 없는 것이어요. 가령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면 우리 때나 읽지 구약 때는 못읽지요. 우리를 위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위해서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그리고 이 은혜의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복으로 보존되는가?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복으로 보아야 되겠지요. 그래도 여기서는 전쟁에 대한 것이지 평화에 대한 것은 아니지요. 이 문맥에 관계된 것을 읽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제일 끝에 문단입니다. 교회는 죽음을 이기시고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유업을 받았다. 교회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 되신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 죽음이 여전히 왕처럼 활동하지마는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았지요.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셔요. 누구십니까? 죽음을 이기신 분이 우리 머리셔요. 그분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싸우셔요. 그분의 영광에 합당하도록. 그분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자기 몸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에서 교회를 끊을 세력이 없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지금도 죽음이 왕처럼 활동하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을 쓸어버린 것 같아도 우리가 믿음으로 읽고 승리하시면 됩니다. 승리할 수 있는 내용이어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 생명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데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시다. 그의 몸된 교회를 그에게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늘을 상속받았다. 이것이 교회가 지금 죽음이 왕처럼 활동하는 이 시대를 믿음으로 봉사하는 방식이고 바로 구약의 율법이 우리에게 읽혀지는 방식이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식으로 전쟁하면은 그들은 가나안 땅 것이나 가나안 땅 밖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누려요. 이 율법대로 행하면은. 그러니가 율법이 그들의 기업이고 상급이어요. 그런데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이제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주셨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유업이어서 전쟁할 때 집으로 돌아가니 마니 할 것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것을 누리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다. 영원히 얻었기 때문에. 그것이 신약 교회가 읽을 수 있는 메시지다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는 무슨 행위를 요구할 것을 우리에게 읽을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생명이 보존되고 그런 것은 없지요. 물론 하나님이 주신 것은 소중하니까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아꺼 먹으라. 생명이다. 그러지마는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전쟁났는가, 전쟁은 재앙이어요. 재앙이 네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어요. 네가 시작해 놓고 누리지 못하느냐. 아니어요. 가서 누려라. 죽어서 못누릴 것이 없다. 가서 누려라. 두려워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할 사람이 있는가? 미리미리 집에 가 있어라. 그러니까 이 군대는 하나도 광야 40년에 죽은 백성처럼 돌아갈 사람이 없어요. 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누려버릴 것이어요. 그렇게 나가서 전쟁할 때도 자, 몽땅 죽이지 말고 전부 네 것 삼아라. 왜 네 선물을 다 죽일려고 그러냐? 죽이지 말아라. 전부 네가 소유해라. 항복하냐? 그러면 세금만 받아라. 그리고 아무리 전쟁이 극심해도 너희 먹거리는 하나도 손대지 말고 남겨라. , 네 것을 전쟁할 때 쓸어버릴려고 그러냐? 그렇게 전부 누리라 그런 말이어요. 이것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신 여호와, 그분은 권세있는 분이신데 애굽을 이기시고 지금도 적군을 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냐. 이 하나님이 함게 계신다. 그것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어요. 그러니가 기독론적인 해석은 제일 끝에 문단 식으로 적용하면 될 것이어요. 읽어보면 그 말이어요. 그리고 나서 본문을 읽어보시면 이 말이구나. 아주 쉽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구절이 설교된 적은 거의 없지요. 심지어 신약 시대 때는 만일 적에게 적용시킬려면 만일 누가 내 것을 빼앗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해라.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어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빰도 돌려대라. 그래도 잃습니까.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부요케 받는다. 구약과는 전혀 상황이 바뀌었지요. 구약은 전쟁에서 이기고 소유하는 것이 자기 백성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마는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빼앗기면 더 받아요. 그것이 신약에서 준 명령이어요. 그러니가 어떤 경우에도 빼앗기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가 지금은 원수에게 다 줄 수도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주어야 하고 아둥바둥 안지켜도 만일에 사랑으로 주면은 그보다 더 부요한 하늘의 것으로 얻을 수가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도 육체로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부자라고 사역자들 봉사하라고. 거기서 육체로부터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 그 말은 세상 욕심대로 그렇게 막 적용할 것이 아니라 구약 때는 주면은 가난해요. 구약 때는 가나안 땅의 소유가 얼만큼 많냐 하는 것이 자기 복을 계산하는 방식이거든요. 그것이 육체에 속했을 때, 모세에 속했을 때, 죄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경영방식이어요. 그런데 신약 때도 아, 내가 헌금하면 내가 돈을 더 많이 받겠구나. 누구누구를 강대상을 사주면은, 교회 개척할 때 제일 먼저 강대상을 사주면은 복을 많이 받는다 하드라. 그런 식으로 심겠는가? 그러면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리라는 말과 같아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거의 구약 본문을 끌어다가 하면 복받는다고 심고 있어요. 그것은 육체 있을 때 방법이어요. 죄 아래 있을 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어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포기하면은 하늘의 것을 얻는 시대에요. 그러니가 지금 교회를 봉사하느라고 해주면 가난해지지요. 가나안 땅 가서 준다는 그런 약속이 없지 안해요. 단지 그 선한 행동이 계속되도록 더욱 주시겠다는 말이지, 너에게 더욱 많이 주마, 그런 약속은 신약 본문에 안나타나지 안해요. 그러니가 신약에서는 주면 없어지는 것이 상식이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죽을 때 하나도 안남기도 다 주어버리지요. 그건 형님은 그렇게 못하는 방식이어요. 신약 시대의 방식은 구약 식으로 섬기면 안되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전부 구약 본문을 갖고 말합니다. 심으면 거둔다. 많이 내면 더 많이 받는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런 약속을 갖고 있지 안해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육체로부터 심는가 썩어질 것을 거둔다. 성령으로 심겠는가? 영생을 거둔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거의 육체에요. 어린 아이로 가르쳐요. 그렇게 가르치면 안된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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