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19

찬미예수님 2024. 9. 7. 07:31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19

 

19장에는 도피성에 대한 기사가 있고 그리고 위증자를 죽이라는 그런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유업의 땅에서 생명을 상하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 것이 이 율법에서 주시는 복입니다. 이 율법대로 지키면은 생명을 잃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1-10절은 도피성을 두어 무죄자의 피흘림이 없게 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제목을 붙이라고 하면 도피성을 두라고 하면 훨씬 좋은데 도피성을 두는 의미까지 같이 붙여 놓아야 내용을 더 파악하기가 좋기 때문에 붙여둔 것입니다. 신명기 4, 19, 민수기 35, 여호수아 20자 여기에 다 도피성에 대한 율법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비교해 보면은 이 19장의 강조점이 무엇인줄을 더 알 수 있겠지요. 꺼꿀로 여호수아는 기업 분배에 대한 것이 핵심이지요. 기업의 정복과 분배, 그것이 여호수아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에서 도피성은 어디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떠어떠한 지파들이 얻은 그 기업에서 어떠어떤 성읍을 내놓아라.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혀호수아의 특징이어요. 물론 부지 중에 살인한 자가 피하고 거기서 재판을 받기까지 거해라. 그런 기본적인 말이 있지마는 다른 데는 없는 것이 특징인데 기업을 분배받은 중에서 어느 어느 성읍은 도피성으로 구별해라. 하면은 여호수아에서 강조하는 점이어요. 민수기는 무엇이 목표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일 것이어요. 그 두 가지 사실이 민수기의 핵심 아닙니까. 그러니까 도피성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면은 어떻게 범죄한 자들까지라도 도피성에 있다가 자기가 떠나버렸던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다시 기업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민수기의 강조점이어요. 그래서 민수기에서는 대제사장이 죽으면은 도피성으로 피한 자도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라. 즉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기업을 얻은 것이어요.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선언됐지마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어떠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일 것이어요. 거기서 하나님 앞에 많은 봉사를 하게 될 것이어요. 그래서 도피성을 35장에서 말씀할 때 기업의 땅에서 부지중에 살인했는가, 그런다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기업에서 쫓겨날 것인가? 아니다. 도피성에 피했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까지 자기 백성을 인도한 것처럼 그릇 범죄한 자들까지라도 그 산업을 잃지 않을 것이어요. ? 대제사장의 죽음 때문에. 그것이 민수기 35장에서 강조하는 바에요. 그러나 똑같은 신명에서 4장과 19장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신명기 4장은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 분배한 그런 기사고, 19장은 인제 요단강을 건너서 기업을 얻는데 두고 이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개념은 거의 같아야 되겠지요. 둘다 다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셔서 순종해서 복받아라. 하는 것이 신명기이니까 요단강 동편에 도피성이 이나 요단강 서편의 도피성이나 개념은 같을 것이어요. 그런데 신명기 4장을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세 지파가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는데 한 지파당 한 성읍씩이어요. 그러나 다 전용 도피성이 있는 식이지요. 19장에서는 무엇이 나옵니까? 온 땅을 세 등분해라. 요단강 동편에 세 개, 요단강 서편에 세 개에요. 그러니까 요단강 동편에 세 개를 위해서는 세 지파가 하나씩 갖는 것처럼, 요단강 서편의 도피성도 세 개인데 그 셋을 위해서 온 기업의 땅을 세 구분으로 나누면 되어요. 그러니까 한 구분마다 한 도피성이지요. 그러니까 도피성 하나에 한 지파씩 있었던 것처럼 도피성 하나에 한 구분씩 있는 것이어요. 그렇게 돼 있지요. 거기다 있제 4장에서는 고속도로 닦으라는 말이 없어요. 한 지파에 한 도피성이니까, 자기 경내에 있으니까 고속도록 닦으라는 말이 없는데, 요단강 서편에서는 세 구분으로 나누고 한 구분마다 한 도피성이거든요. 그런데 구분이 전라도처럼 크면 어떻게 하겠어요. 도로가 좋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도로를 닦아서 도중에 죽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한 마디로 하자면은 전용 도피성을 주어서 언제든지 피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 그런 말이어요. 그러니까 개념은 같지요. . 그런데 19장은 그것이 확대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기업의 땅을 세 구분하고 한 구분마다 한 도피성을 배정하고 거기다 도로를 닦아서 도망가다가 길이 나빠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은 19장이어요. 그러니까 19장은 4장의 확대지요.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 이렇게 비교해 보는 것이 제일 쉬운 것입니다. 하나을 놓고 알려고 하면 알기 어렵지마는 몇 개를 비교해 보면 그냥 알 수 있지 안해요. 그러니까 비교해 보는 것이 제일로 쉬운 것입니다. 그 강조점이 있으니까. 그 강조점은 전체 책의 주제와 맞는 것이다. 세 성읍을 구별하라고 하는 때는 어느 때냐 하면은, 구별한 때가 있지요. 여기 보니까 적군을 다 멸절시키고 너희들이 그 성읍에 살고 그 가옥에 거하게될 때, 완전히 적군을 멸하고 그 성읍을 차지하게 될 때에는 그 말입니다. 그때 도피성을 구별해라. 세 성읍을 구별하는 목적은? 무엇 때문에 구별해야 됩니까? 3절을 보면은, 무릇 살인한 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여기서는 그릇 살인한 자라고도 말하지 않고 민수기에서는 그릇 살인한 자를 주로 말하고, 그릇 살인한 경우는 어떠어떤 경우인지 쭉 말해요. 그런데 여기 신명기에서는 아예 모든 살인한 자로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그전에 살인을 제일로 고약하게 한 사람이 누군고? 우리 때는 고재봉이었어요. 그런 사람도 드어가라는 말인가? 그런 말은 아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릇 그걸로 피할만한 사연은, 4절이하에서 그 사연을 쭉 설명하거든요. 그런데도 그 표현은 모든 살인자를 피하라. 이렇게 해놓았어요. 강조점이 생명의 보호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어요. 그러니가 이 말만 들어서는 모든 살인자가 산 것 같지요. 그래서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기 위해서 구별한다. 세 성읍을 구분하는 방법은? 3절에 보니까 땅 전체를 삼 구분해서 나눈다. 세 성읍을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6절에 보니까 가는 길이 멀면 도중에 죽을까 염려라. 여기서 그릇 그 성으로 도피할만한 교훈은 제가 그냥 빼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강조점은 모든 살인자이기 때문에 그랬어요. 이 세 성읍을 더하라고 말해요. 7절에 보니까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여기까지가 한 단락이어요. 물론 7절까지도 두 번 반복되어 있지요. 그런데 8절에도 보면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에,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 세 성읍을 더하는 때는 어느 때냐 하면은 여기서는 조상들에게 약속한 대로 온 땅을 기업의 땅을 넓혀 주실 때에, 그 다음 또 너희들이 내 말을 잘 지켜서 내 길로 행할 때에 그 두 경우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때 세 성읍을 더하라. 그럴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은, 또한번 반복하기를 네 기업에서 무죄한 자희 피흘림이 없도록 해라. 만일 그 피를 흘리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마땅히 그 도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요. 무죄한 피흘림이 없도록 해라. 11-13절입니다. 여기서는 그 도피성으로 피하지 못할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순종해서 복받으라는 것이 신명기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이런 복을 주셨어도 거기 못들어갈 자들이 있어요. 그것은 고의로 살인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11절에 보면은 엎드려 기다리다가 일어나 처서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여기 한 절에다가 미워서 짜는 작전들을 자세히 표현해 놓았어요. 성경은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하는지 모르겠어요. 11절을 보십시오.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보니까 아주 굉장하게 써놓았지요. 이런 말은 저처럼 표현하면 맞이 하나도 없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굉장해요.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미워서 살인한 사람은 여기 못들어갑니다. 그러한 자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리 피한자를 끌어내서 성읍에서 죽이라고 하지요. 12절에 보니까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복수자의 손에 죽게 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런 자의 처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거기서라고 끌어내서 죽이면 되어요. 물론 그 본성읍의 장로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그 사람을 끌어내서 그 친척에게 넘겨서 죽게하라고 자세히 했지마는 핵심은 거기서라고 죽게 하라는 말이지요. 나중에 보면 이렇게 의도적으로 살인한 자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성전의 단에 뿔을 잡고 있어도 끌어내서 죽이라고 하고 있지요. 솔로몬이 요압을 죽을 때 그렇게 했어요. 거기서 끌어내서 죽여라. 그렇게 처리할 이유는? 왜 그 사람을 거기서 끌어내서 죽여야 되는가? 13절에 보니까 무죄한 피를 흘린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유업의 땅으로부터 제거시켜버렸거든요. 그 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유업의 땅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빼앗으면 그는 하나님의 도피성으로부터 제거해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가 그런 사람은 피할 자리가 없어요. 하여튼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뿔을 잡고 있어도 죽여야 됩니다. 이러한 살인자를 죽이면 받을 복은 무엇이냐 하면은, 네게 복이 있으리라 했는데, 어떤 복이 있겠는가? 그 답이 어렵습니다. 실은 이 율법을 주신 의미가 여기 있거든요. 이 계명을 지키면 복받아요. , 도피성 규례를 지켜주어도 복을 받고, 그릇된 살인자를 죽여도 복을 받아요. 두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죄한 자의 피흘림이 없도록 하라고 그랫지요. 이계명을 지키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살인한 자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그 땅에는 그런 사람을 다 집어내버릴 것이니까 없어요. 한 마디로 그 땅은 완전한 생명의 보화가 있겠지요. 그것이 이 도피성에 대한 규례에요. 만일에 그릇 살인하는가, 그 생명을 보살펴 주어라. 그는 죽을 사람이 아니어요. 그릇 살인해 갖고 죽는 법이 없어요. 그런데 일부러 죽였는가, 그를 내 집에서 쫓아내서 제거해 버려라. 그러면 이 땅에는 살인한 자가 없지요. 이런 계명을 잘 지키면 말하자면 치안 유지가 잘 된지 어쩐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빼앗을 죄인들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이 계명을 통해서 율법을 더 주시는 복이지요. 무슨 말인가 아시겠지요. 항상 율법은 지키면은 그 율법에 해당된 복을 받는 것이어요. 가령 아버지가 숙제를 내주고 네가 숙제를 잘하면은 복을 받으리라 하면은 물론 사탕 오백원어치 사준 것도 있겠지마는 근본적으로는 공부를 잘하겠지요. 그리고 오백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큰 떼돈도 벌 수 있겠지요. 아버지 말을 잘 들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복이어요. 그런데 네가 공부를 잘하면 복받으리라. 무슨 복, 건강의 복 하면 한참 멀지요. 물론 돈을 잘 벌어서 보약을 먹으면 건강하겠지마는 실은 공부 많이하면은 몸이 약해지거든. 힘이 약해지고. 그러니까 공부 잘하면 건강에 좋으리라. 하는 것은 직접 안맞겠지요. 그러면 일단 숙제를 잘하면 무엇을 잘하느냐? 공부를 잘하면 복을 받아요. 공부 잘했다고 아버지가 사탕 사주었어요. 학교에 가면 상받고 그렇게 계속하면 취직해서 돈 많이 벌 것이어요. 복은 그쪽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가 이 계명은 지키면은 그 계명 자체가 그들에게 주신 기업이어요. 율법이. 율법을 지키면은 그 율법에 해당되는 복을 받는 것이어요. 가령 노아 홍수 때는 홍수 후에 살인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누구든지 피를 흘리면은 피값을 받으라고 했지요. 짐승이 흘리냐, 짐승에게 갚고, 사람이 흘리냐, 사람의 피를 받으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노아 홍수 후로 새롭게 된 세상에는 살인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것이 새롭게 된 세상의 복이어요.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지요. 가령 그 이전에는 가인의 7대손, 라멕, 그 사람은 소년이 나에게 창상을 입히니까 나는 그를 죽였고, 그렇게 큰 힘의 권세를 갖고 사람을 죽여요. 그런데 노아 홍수 뒤로는 짐승이라도 잘못 죽이면 그 생명을 대신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땅에는 완전한 생명이 보존되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어떠튼 가나안 땅에서 이 생명의 보존을 준 것은 생명이 보존되리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14절이하에도 그런 것인데, 기업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그래요. 기업의 경계표를 옮기지 못할 이유는, 여기서는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왜 지금 우리가 가진 기업의 경계표를 옮기면 안되느냐 하면은, 그건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로 주셨고, 그것은 우리 선조 때 정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옮기지 말라고 하지요. 우리가 가진 땅이 단순한 땅이 아니라 생명의 유업으로 주셨어요. 소유로, 그리고 우리 때에 주신 것이 아니라 선조들 때에 주셨어요. 왜냐하면 후손들은 조상들의 유업을 받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옮기지 말라고 그래요. 나중에 그 유업을 옮기려했다가 죽은 사람이 있지요. 아합이 그 사람보고 땅을 팔라고 그랬지요. 당신 땅은 저 멀리 있고 내 땅은 왕궁 곁에 있으니까 그 먼 땅 할 것 있냐고, 가까운 땅을 줄 것이니까 바꾸자고. 그러니가 그 사람이 안바꾸었지요. 그래갖고 그 때문에 죽었지요. 그 사람은 부동산 장사 못한 사람이어요. 왕의 땅이 훨씬 좋은 곳에 있을 것인데. 하옇튼 율법을 보면 왕의 땅은 성읍 주변에 있거든요. 훨씬 좋을 것인데 자기 땅을 안바꾸어 가지고 죽었어요. 아합이 그런 일을 했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네가 그 사람을 죽인 그 자리에서 개가 네 피를 핥으리라. 그렇게 죽였어요.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있는가? 그들의 기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업이어요. 소유, 그러니까 이것은 희년이 되면 다시 물리지요. 종으로 팔렸다가도 희년이 되면은 그 땅을 다시 회복해. ?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니까. 자기 백성의 소유, 절대로 물르면 안되어요. 그래서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 그러면 이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하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또 아무리 힘이 없는 사람도 자기 땅을 살살 빼앗기지 않겠지요. , 경계표를 절대로 옮기면 안되니까. 만일에 빼앗겼어도 희년이 되면 복귀해버려요. 절대로 안빼앗겨요.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준 것처럼 이것을 자기 소유로 경계를 정했기 때문에 안죽는다. 한 마디로 하자면 기업이 영원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15-21절입니다. 위증자에 대한 처벌인데 어떤 위증한 사람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위증한 것 같아요. 그러면 재판장에게 묻겠는데, 이 재판은 누가 하느냐 하면은, 17절에 보니가 당시 제사장과 함께 재판장 앞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자세히 물어보아야 돼요. 그래도 그것을 판결하기는 재판장이 우림과 둠빔의 판결법으로 할 것이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판결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 제비뽑았지요. 그러면 발견되었지요. 그렇게 할 것이어요. 그렇게 해서 만일에 그 사람이 거짓말로 사람을 죽일려고 한 것이 발견되면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가 형제에게 행하고자 한 대로 행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한 증인만으로는 범죄를 확증하지 말라는 이유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하라고 그랬지요. ? 범죄자라도 증거가 확실하지 않고 죽이면 안되어요. 범죄 의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증거가 확실하지 않는데 죽이면 안되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 앞에는 무지 중에 살인한 자도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범죄 의심이 있어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살지요. 그 다음에 이처럼 범죄의 의심이 있어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삽니다. 그런데 하물며 거짓말을 해갖고 사람을 죽이려 하면 안되겠지요. 그건 더 보증해 줄 것이어요. 어떻게 하냐 하면은 위증죄에 대한 판결은 당시 하나님의 제사장 앞에 나아가서 거기 재판장 앞에 물어야 되어요.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묻는 것과 같습니다. 위증죄에 대한 벌은 죽이고자 한 그 사람의 행위대로 행해버리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은 범죄 의심이 있을 지라도 한 사람의 증거만으로는 안죽을 것이다. 하물며 거짓된 증인이 그 사람을 죽을 수 있겠는가? 없다. 거짓된 증인은 그가 상대방에게 행하고자 한 그대로 행해서 그를 제거해버려라.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확실하게 생명이 보존되리라. 그런 이야기지요. 지금 19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생명의 보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증자를 벌할 때 긍휼이 없이 하는 이유는? 여기서는 긍휼없이 행하라는 것이 강조점이어요. 긍휼 없이 행하라고 했는데, 왜 긍휼없이 행하라고 했는가? 어째서 긍휼없이 행해야 될까요. 긍휼없이 행하라는 것은 20절에 있어요. 그리하면 남은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후부터는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 한 마디로 어느 누구도 거짓된 증거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그래야 온 이스라엘이 그 짓을 안하겠지요. 그런 이유입니다. 이것이 인제 동해 복수법입니다. 21절에 있는 법인데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동해 복수법이 출애굽기 21장22, 25절에도 있고 여기도 있어요. 그러면은 똑같은 법 조항이 있어도 어떤 문맥에서 말하는가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르지요. 똑같은 사건을 이야기해도 어떤 말을 하다가 그 말을 섞어 쓰느냐에 따라 강조하는 법이 다르겠지요. 그러면 출애굽기 21장에서는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나라로 조직하는 것이 출애굽기에요. 그러니가 출애굽기에서는 법적인 심판이 핵심이어요. 이러이런 죄를 범한 사람은 이런 벌, 강조점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법이어요. 그런데 신명기 여기서는 무엇입니까? 19장 전체적인 문제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유업으로 주었어요. 그리고 그릇 살인한 자에게까지 생명을 주도록 도피성을 주었어요. 그리고 어떤 가난한 자라도 그 땅은 안빼앗길 것이어요. 심지어 살인의 의심이 있는자까지라도 한부로 안죽을 것이어요. 하물며 의심이 없는데 거짓말로 죽이면 되겠느냐.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버려야 될까요. 살인하고 하나님의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은 가차없이 끌어내서 죽여버려야 되는 것처럼 이런 사람은 가차 없이 행해버려라. 그런 말이지요. 다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손대지 못하도록, 그런 이야기가 신명기 19장의 흐름이지요. 그러니까 출애굽기 21장처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통치하는 법 개념이 아니라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손대지 못하도록 그를 제거해버려라. 그가 행하면 그에게도 그것을 행해서 그를 끊어버려라. 하는 그런 심판이 더 강조예요. 이 신명기에서는. 그런데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행하라. 그런 말을 너희들이 들었어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전혀 사랑의 법을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그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은, 이렇게 해석을 했어요. 본래 하나님이 출애굽기를 봐라. 종이 이빨이 빠졌느냐. 이빨이 빠진 것 때문에 그를 놓아라. 만일 어떤 사람이 아이 뱃는데 처서 아이를 유산했느냐? 그러면 그것의 값을 물어라. 인제 치리법이 쭉 나와 있거든요. 출애굽기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나님은 본래 사랑이셔서 사람을 사랑한데 사람은 이빨 한 대 빠지면 두 대 뺄려고 그러고 눈이 하나 빠지면 두 눈을 멀계 할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 하나만 빠졌냐? 하나만 빼라. 그렇게 해서 악을 제재시킬려고 그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복수의 법이 있는 데 하나님은 그 악을 제재시킬려고 하나 맛았으면 한 대만 때리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그런 문맥이 아니어요. 출애굽기 문맥은 마땅히 보상해라. 정당한 보상법입니다. 종이라도 이빨을 뺏으면 종을 놓아라. 정당한 보상법들이어요. , 하나님 나라 시민은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되니가. 그것이 출애굽기에요. 그런데 신명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복수법이어요. 한마디로 그를 집어 내버려라. 내 도피성에 들어왔는가? 끄집어 내라. 그가 거짓말 했는가? 그가 행한대로 행해버려라. 이을 행할 때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절대로 불쌍히 여기지 말아라. 그러지요. 출애굽기는 긍휼히 여기지 말라는 말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절대로 불쌍히 여기지 말어라. 여기서는 한마디로 복수법입니다. 그를 제거해버리라는 말이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본래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한 대 맞으면 한 대만 때려야지 두 대를 때리면 안되니까 그런 말로 복수법을 행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모르고 한 대 때리면 빤찌가 똑같아야 되겠지요. 법은 한 대 때리면 한 대인데 빤찌는 쌔다 그말입니다. 그렇게 해갖고 막 때리니까 하나님이 야,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사랑의 정신을 들어내 가지고 마음으로 분노만 해도 살인이고, 왼빰을 때리면 오른 뺨도 돌려데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신약의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원 정신으로 밝혀주는 것이다. 인제 이런 식으로 푸는 것이 우리 개혁파에서 전통적으로 풀었던 것이어요. 그렇게 해서 이 원 정신에 따라 비춰보면 죄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구약에 실정법으로 비추어 보면 나는 죄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 원 정신에 비추어 보면 죄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것이 영원법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지키나이다. 오호라, 탄식하면 예수님게서 너희 때문에 내가 죽었다. 복을 주는 것이다. 이런 구원론적으로 풀었어요. 그런데 구약 문맥에서 그런 문맥이 없지 안해요. 출애굽기 21장은 국민으로서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치리법이어요. 백성의 통치법입니다. 거기서는 복수를 하라는 둥, 그런 말이 아니어요. 마땅한 피해를 주었는가? 피해를 보상하라는 그런 말이어요. 그런데 신명기 여기서는 하나님이 무시무시하게 절대로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를 해버려라. 그가 행할려고 한 대로 해버려 그렇게 해서 다시는 내 백성의 생명을 손대지 못하게 해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판단하는데 누가 내 앞에서 거짓말하고 내 백성을 죽일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를 제거해라. 여기서는 완전히 복수법이어요. 여기서는 불쌍히 여길까봐 염려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아까의 해석은 구약 문맥에 없는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이어요. 신약의 율법은 구약의 정신을 구현한 것이 아니라 구약은 아직 죄 아래서 경영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영인데 이제는 하늘에 영광스러운 질서 가운데서 경영하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그 숨어있는 정신을 구현한 것이 아니어요. 구약 때는 나타나는 법이나 정신이나 같은 것이지 나타난 법은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정신이 있고 그렇게 이원화되는 것이 아니어요. 지금도 이원화 안되고, 항상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어요. 물론 우리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숙제 내주면은 그보다 더 큰 계획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에게 요구되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공부 잘하라는 것이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장차 큰 기대가 있어도 지금은 공부 잘하라는 것이어요. 그런데 그것을 지금은 공부 잘하는 그보다 더 원대한 뜻이 있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크면 알고 그것은 성경 해석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그것은 아이가 컷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위대한 정신이 들었기 때문에 안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아이가 컸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그때도 본래 원대한 정신이 들어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것은 아이가 크기 전에는 절대로 아는 것이 아니어요. 원대한 뜻은 컸기 때문에 아는 것이어요. 그러니가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윤리를 규정하지 원래 숨어있던 정신이 점점 밝혀지고 그런 개념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가 19장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그 강조점을 알겠지요. 그것이 지금 인제 내용에서 설명되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자기 백성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앞서서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여호와를 섬기게 하는 언약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도피성에 대한 글을 말하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다 강조를 두었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봉사에다 강조를 두면은 싸워라. 원수와 싸우고, 불신앙과 싸우고, 많은 예물을 드리고, 그쪽에다 강조를 두겠지요. 민수기는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하나님 앞서서 인도하시는 것이 책이지요. 광야에서 다 죽었지마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인도하시지요. 그래서 도피성은 레위 성읍 중에서 구별합니다. 민수기에서 도피성은 레위 성읍 중에서 구별해요. 레위 지파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지파지요. 그래서 레위 성읍 중에서 구별하고, 요단 동서에 각각 셋 씩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죽으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가 제사장의 죽음과 자기 기업으로 돌아감, 전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신실히 인도하시고 기업을 주신다는 민수기 문맥에 맞는 이야기다. 여호수아 20장에서 도피성은 기업으로 분배받은 성물로부터 구별합니다. 기업 분배가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신명기는 유업의 땅에서 순종해서 복을 누리라는 것이 신명기의 언약입니다. 4장에서는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은 세 지파를 위하여 각 한 성읍씩 구별하라 명하십니다. 각 지파 안에 전용 도피성을 두어 살인자라도 그가 그릇 살인하였으면 여호와의 기업에서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도 성경의 표현법을 따라 살인자라도 하는 말을 앞에 썼고 그 다음 그릇 살인한다는 말을 뒤에다 붙여서 설명을 해주었지요. ? 신명기의 강조점은 살인자에요. 그래서 붙여준 것이지요. 인제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모든 열국을 멸절하고 이스라엘로 그들의 각 성읍과 각 가옥에 거할 때 멸절했다는 말은 원수의 것을 백성들이 다 차지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유업의 땅, 전체를 셋으로 구분해서 세 성읍을 구별해라. 그리고 도로를 닦아서 살인자가 길이 멀어서 죽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니가 요단간 동편의 도피성의 문제는 19장에서는 요단강 서편의 기업으로 확대 적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 성읍을 구별하여 부지 중에 살인한 자가 거기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고 거듭 반복해서 명하신다. 주제를 보면 반복 표현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7절로 보니까 마지막 한번 반복하지요?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그렇게 해서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읍을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이지요. 그 성읍을 자기 기업으로 나누게 하면 얼만큼 좋아요. 그런데 형무소가 조그만 것 하나 있으면 될 것인데 이들이 살 수 있도록 한 성읍을 주어요. 한 기업을. 그것도 보통 성읍에다 준 것이 아니라 민수기를 보면 레위 성읍에서 뽑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면 성질나지요. 그렇게 살인하고 도망친 사람을 레위 성읍, 좋은 성읍으로 한 성읍을 줄 것이냐고. 그렇게 안하면 되지요.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어요. 너희들이 이 명령을 지키면은 너희 중에 그릇 살인한 자가 안죽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 중에 생명을 보존하라는 말이지요. 그 성읍을 구별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거기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토록 명하신다. 한 구분에 한 도피성을 한 전용으로 두시고 신속히 피하도록 도로를 닦아 그릇 살인한 자라도 여호와께서 기업의 생명을 온전한 보존토록 하신다. 4장의 확대 적용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릇 살인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읍을 구별하지 않으면은 그들은 무죄자의 피를 흘린 죄가 있다. 하나님이 그릇 살인한 자도 살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게 하면 그들도 살게 해야되어요. 만일에 그들이 살 성읍을 주지 않으면은 이스라엘이 그 생명에 책임을 저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한 자는 긍휼히 여기지 말고 도피성에서 끌어 내어 죽여서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제거해야 된다. 여호와로부터 유업을 받은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치 않고 죽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생명을 상하는 자가 그 땅에 없다. 범죄했으면 죽을까 그외는 죽는 법이 없다. 그것이 여기 율법의 핵심입니다.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라는 8,9절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도피성이 여섯임을 염두에 두면은 분명히 민수기를 보면은 분명히 여섯이어요. 도피성이 여섯임을 염두에 두면은 이 명령은 1,2절의 반복으로 이해된다. 1-2절까지를 보니까 하나님이 그 땅을 지경을 확대시키고 그 땅 원수를 다 멸절하고 원수의 모든 소유를 차지하게 했을 때는 그렇게 했거든요. 그 말과 8,9절은 열조에게 명하신대로 너희 지경을 넓게 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땅을 다 너희에게 주면은 하는 것이나 의미만 맞추어 보면 맞을 수 있지요. 원수를 정복하고 원수의 모든 소유를 너희가 얻었을 때는 그 말이나,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대로 네 영토를 확대시키고 평안히 거할 때나 실은 같은 말이지요. 그런데 9절을 보니까 문맥이 조금 달라요.

19:9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한 것을 보니까 조금 다르지요. 뉴앙스가 달라있어요. 그러니까 민수기 35장에다가 강조를 두어서 도피성을 여섯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은 1,2절이나 8,9절이나 실은 거의 같은 말이다. 원수의 모든 것을 정복해서 차지했을 때나 온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때나 실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신명기 기록의 순서와 내용과 유업의 복을 누리라는 신명기 주제에 비추어 보면 여섯 외에 셋을 더하라는 말로 이해된다. 여기 보면은 이 셋 외에 셋을 더하라는 말은 여섯 외에 셋을 더하라는 그런 말로 이해가 된다. 그런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신명기 기록 순서는 이미 요다강 동편의 도피성 문제를 4자에서 해버렸어요. 그리고 신명기 19장은 요단강 서편의 이야기지 동편의 이야기를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8,9절에서 온 지경을 다 주었을 때 하는 말을 1,2절의 반복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그 순서와 내용 거기까지고, 또 유업의 복을 누리라는 신명기 주제에 비추어 보면 신명기 5장이하에서는 4장의 복을 더 확대해요. 가령 방금도 보면은 요단강 동편 세 지파를 위해서 도피성 하나씩을 준 것이 동편의 일이면은, 여기 19장에서는 온 땅을 세 구분하고 그리고 고속도로를 닦아서 그렇게 해서 확대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8,9절은 1,2절의 반복구조보다는 1,2절의 복을 확대 해석해서 요단강 동편의 세 도피성읍, 요단강 서편의 세 도피성읍, 그때는 원수를 멸절하고 원수의 가옥과 성읍을 차지했을 때입니다. 세 구분하고 도피성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너희 땅을 넓혀가지고 조상들에게 약속한 모든 영역을 다 주는가? 그리고 그때는 어느 때입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나를 사랑하고 내 길로 행할 때인가, 그러면은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가나안 모든 땅에 여섯 도피성을 두라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 서편에서 세 구분하고 세 도피성을 두었는가? 그 다음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복을 받고 하나님의 땅을 넓혔는가? 거기다가 셋을 더해라. 하는 예언적인 명령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민수기 35장을 보면 분명히 여덟 개인데 여기는 아홉 개가 아닌가? 그것이 신명기가 가지고 있는 언약 갱신의 내용이라 그런 말입니다. 이 앞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라고 했을 때까지라도 신명기 문맥은 새로운 모세 시대, 새로운 중보자 시대, 언약 갱신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말이라고 그랬지요. ? 그전에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는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호렙산 장면에서. 그것이 신명기적인 갱신이다. 이 셋 외에 셋을 더한 시기를 보면 여호와께서 지경을 넓혀서 맹세하신 땅을 다 줄 때며, 또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복이 넘치고 넘치겠지요. ? 순종하면 복받는다고 했으니까 순종하면 복이 넘치겠지요. 그러면은 세 성을 더하라는 말은 가나안 땅의 배지요. 요단강 서편 기업의 배나 되지요. 이런 것이 예언적으로 이해가 된다. 행할 때이다. 이때에 유업의 땅에 도피성을 배가하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온전히 순종할 때에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종말론적인 언약으로 이해된다. 세 성읍만 있어도 온 이스라엘의 생명이 보존되는데 거기다가 셋을 더하면은 어떻게 되겠어요. 가나안 땅 동편에 셋, 그 다음 셋을 더하니까 온땅이었어요. 그 다음 요단강 동편처럼 서편에 셋을 더해버리면은 이것은 이전의 생명의 보장을 배가시키는 것이지요. 언제입니까? 내 말을 잘 듣고 내 길로 행할 때에, 그런 말이지요. 언제입니까? 온 지경을 다 넓혔는데, 그리고 내 말을 잘 지키면은 거기다 세 성읍을 더해라. 그러면 생명의 보존이 완전할 것이어요. 이것은 종말적인 언약 갱신으로 이해가 된다.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데 누구라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으로 주신 기업에 해를 끼치지 말라고 그렇게 명령하신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안빼앗겨요. 왕이라도 그 경계표를 옮기면 하나님이 그를 죽일 것이어요. 레위기 25장은 희년에 대한 이야기지요. 희년이면 팔렸던 기업도 물러주어야 되어요. 그때도 경계표를 옮기면 안되어요. ? 이스라엘의 기업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었던 기업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상속받기 때문에 옮기면 안되어요. 조상들에 대한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말이지요. 범죄의 의심이 가는 자라도 한 사람의 생명만을 -하라는 그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위증자는 하나님 앞에 세워 판결하라. 그가 형제에게 하라는 그대로 긍휼없이 행하여 이러한 악이 이스라엘 중에 없게 하라. 열왕기상 2:28에 보면 솔로몬이 요압을 그렇게 죽였어요. 요압이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단 뿔을 잡았거든요. 그래서 솔로몬이 명령했어요. 그는 그보다 의로운 자를 죽였느니라. 그러니까 거기서 끌어내라. 그렇게 해서 내 아비 집에 무죄자의 피가 묻지 않도록 해라. 그를 죽여라. 그렇게 해서 무죄자의 피흘린 죄를 제거해 버려라. 그래서 도피성으로 피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로 피해서 단 뿔을 잡았지마는 거기서 끌어내서 죽였어요. ?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무죄한 피를 흘려서는 안되어요. 요압이 사물의 군장들을 죽였어요. 그들이 만일 다윗의 군장들이 되면은 자기보다 높을 것 같으니까 입맞추고 그를 죽였지요. 그것을 다윗은 몰랐어요. 그것 때문에 솔로몬이 그를 죽이라고 한 것이어요. ?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손대면 안되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거든요. 그렇게 한 것이다. 어떤 꾀로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땅으로 누리도록 복을 주신 이스라엘을 해할 자가 없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를 죽여버려야 됩니다. 제거해야 되어요. 동해복수법은 하나님 나라를 조직하는 출애굽기에서는 손해배상의 법입니다. 정당한 배상을 해야하는 것이 출애굽기에요. 유업의 땅의 복을 누리도록 하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생명을 해하는 자의 긍휼없는 형벌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손대지 말라는 것이어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신약 교회에 적용되는가? 그런 말입니다. 물론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니가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요. 그러나 그것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끌고 들어오면 안된다. 반드시 기독론적인 해석을 통해서 와야되지 그 상황이 우리하고 비슷하다고 해서 끌고 들어오면 안된다 그말이어요. 왜냐하면 실재적인 상황은 비슷해도 구원 역사적인 상황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구원 역사적인 상황에서 적용을 햏야된다. 그러니까 요새 다락방 사람들은 모든 성경을 전도로 다 연결하지요. 그 말은 모든 것을 다른 주제로도 연결한다 그런 말이어요. 그렇게 성경을 연결하면은 그리스도 오심을 완전히 배제해버린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예수 이야기를 하니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구약은 신약의 빛 가운데 벗겨지지 구약 자체로 벗겨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구약 문맥을 읽고 그 문맥의 의미를 벗기지 거기 없는 것을 말하면 안되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잘 구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인가? 우리 보고도 부지 중에 살인한 자는 봐주고, 또 위증자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맡겨버리고, 우리는 재판관이 아니니가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니까. 이렇게 해버릴 것인가? 구약 때는 그렇게 했어요. 그러나 신약 때는 그렇게 하지 안해요. 신약 우리가 받을 기업은 어떤 기업입니까? 우리는 빼앗기지 못할 기업을 받았지요. 이제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모세 제도를 따라 범법자는 기업을 빼앗기지마는 이제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이것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릇 범죄한 자는 봐주고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그릇 범죄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떠튼 살인하면 죽어야 되지요. 그러면 사람은 모르고 살인할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도끼 앞에 있다가 도끼 날이 빠져 죽는다거나, 담 밖으로 돌을 던졌는데 지나가다 맞아 죽는다거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말이지요. 물론 집을 짓고 난간을 만들지 안해서 죽으면 집 주인이 책임이 있어요. 그렇지마는 모르고 던졌는데 맞아 죽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살인자는 다 죽어야 될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신명기에요.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런 방식으로 통치를 안받아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완전한 빛 가운데 있고 완전한 생명의 약속 가운데 있지 그릇 살인한 자는 어떻고 하는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가 이런 것을 교회의 치리법으로 끌고 들어오면 안된다. 물론 그릇 살인한 자의 정상 참작이 있겠지마는 실은 이 신명기 법은 우리들이 그릇 살인한 자도 감옥에 가지요. 조금 있다 와도. 그러나 신명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도 도피성을 유업으로 받아요. 민수기를 보면 레위 성읍 중에 하나가 자기 것이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읍은 오히려 위험한데 레위 성읍은 얼만큼 보장이 되어요. 민수기에서. 레위 지파는더 가까이 있지요. 거기로 피해서 살아요. 그러니까 자기 기업보다 훨씬 생명의 보존이 잘 된 곳이어요. 그러니까 극립호텔에 가면은 공짜로 밥을 먹으니까 좋다고 할란가 모르지마는 우리는 자유가 제한되니까 훨씬 나쁜 곳으로 간 것이지요. 그러나 구약 문맥에서는 그들이 나쁜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더 안전한 처소에서 보호를 받고 제사장이 죽으면은 그가 대신 죽을 죄가 갚아져요. 제사장의 죽음에서 자기 죄가 끝나요. 그러면 돌아올 수 있거든요. 그러니가 지금 잘못 범죄한 사람은 정상 참작을 해서 10년 언도할 것을 3년만 받고 그런 것하고는 비교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국가 형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누리는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교회 제도에다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은 교회, 교회는 그렇게 받았습니다. 그 복을 빼앗을 권세가 없다. 여기서 인제 강조가 되어야 되어요. ? 부지중에 살인자도 안빼앗기지요. 거짓 증인이 빼앗을 수 없지요.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을 누리고 살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그로 말미암아 살고 그리고 우리는 완전한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두움이 없다. 이 세상에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빼앗을 수 없고, 위증자든지 하늘에 있는 사탄이든지 무엇이든지 어떤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신명기 19장의 완성이어요.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도피성 하나를 남겨두고 그런 이야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에요.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알겠지요. 구약 때는 이런 모세의 제도의 기업, 가나안 땅의 기업 주는 방식으로 부지 중에 살인한 자의 생명도 보존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하늘 기업을 얻었고 그 기업은 이제는 예수께서 썩지 않고 쇠하지 않은 것으로 주셨기 때문에 어떤 권세도 교회를 빼앗을 권세가 없다. 구약 때는 도피성의 규례로 자기 백성의 생명이 보존되었지마는 신약 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백성이 영원한 기업을 보존받는다. 그런 의미로 그는 우리의 참다운 도피성이요 참다운 기업이다. 그렇게 적요을 해야된다. 그런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을 설명할 방식이 없어요. 그러니까 소위 유형론으로 모형론으로 푸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직접적인 그리스도의 증거로 푸는 것이 소위 모형론적인 해석 성경적인 해석이다. 그런 말입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가령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이 제사장이 죽어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오면은 민수기라고 그랬지요. 여기서는 돌아간다는 말은 없지요. 그런 말은 없어요. 그 사람이 제사장이 죽을려면은 얼마나 걸릴련지 몰라요. 그래도 돌아오면은 가기 기업은 어느 누구도 경계표를 안옮기도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준 약속은 취소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늘의 기업으로 완성되었다. 그것이 신약 때 적용하는 메시지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시면 되어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빼앗기면 상급이 크다고 그랬지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빼앗기면은 상급이 크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달달 떨어요. 주면 얻으리라. 했는데 손해 본다고 다음 부터는 안주어야 되겠구나. 나도 나 먹을 것부터 챙기자 하고 고개를 짜웃 짜웃 해요. 내가 그동안에는 어리석어서 다 주어버렸지마는 인제 정신이 들었다. 인제는 나 먹을 것 챙겨놓고 조금 주어야 되겠다. 그런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신약의 빛 가운데 살지 않고 인간 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 그 말입니다. 자식들이 말 안들어면 부모들이 그래요. 아이고 요새 자식 믿고 산 부모가 있겠냐? 그래도 늙으면 언제 그 말 했냐 식으로 또 자식 때문에 만사를 -해요. 왜냐하면 항상 부모이기 때문에. 그러니가 그냥 자식들 하는 꼴을 보면 예라, 나도 양농원에 갖다 놓으면 나도 편히 살아야. 너 믿고 안살아야. 그래도 부자지간의 관계는 그런 해석으로 안사니까 또 늙어지면 다 주어버리고 없어요. 그건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신자들도 항상 믿음의 빛 가운데 사셔야 되지 예라, 나만 사랑해 보았자 나중에 손해나더라. 그러니까 나도 내것 챙겨 놓고 살자. 물론 지혜가 있지요. 그러나 자기 호주머니 안없어지는 것만 복으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 식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케 했으니까 그 생명의 일로 봉사해라. 그래서 마게도니아 사람들은 그들의 가난 때문에 극한 가난 때문에 더욱 사랑이 풍성해서 넘치도록 드렸다.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만 알지 몰라요. 부모가 자식에게 봉사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투자법이어서 부모는 알아도 형님도 몰라요. 그런 것이 기독교인들의 윤리예요. 인제 새 빛 가운데서 살아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질문 없으면 주께서 가르친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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