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14

찬미예수님 2024. 8. 3. 15:06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14

 

신명기 14장을 보면은 먹으라는 이야기가 많이 있지요. 1-2절은 우리가 잘 모르는 말처럼 되어 있는데, 3절부터 보면은 먹지 말라. 먹으라, 먹으라 먹는 이야기들이 쭉 나와 있어요. 21절 이하에서도 십일조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와 있고, 그리고 28절에도 매 3년마다 십일조를 갖고 고아나 과부나 객에게 먹이라고 해서 전부 먹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문단은 성경에 나누어진 대로 나누었습니다. 전체적인 문제는 읽어보면 먹으라는 이야기인데, 그 먹으라는 이야기가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데는 레위기 11장에 있지요. 그것과 비교해 보면은 신명기와 레위기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으라는 이야기는 가운데 끼워져 있고, 그 앞에는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라는 말이 있고, 그리고 22절이하에는 십일조 먹으라는 이야기, 3년 끝에 십일조로 가난한 자를 먹이는 이야기가 들어있지요. 14장에서 말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라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중심인데, 문제 1번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설명이 되어 있지요. 왜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아야 되는가? 1절을 보면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기 때문에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아라.“ 또 여호와의 자녀라는 말을 2절에서 설명하기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아야 될 이유는 여호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자녀라는 말은 2절에 설명하기를 만민 중에 택함받은한 여호와의 성민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로 자녀에요. 하나님의 기업의 백성으로 뽑였기 때문에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자를 위해서 몸을 상하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여기 참고구절로 레위기 19, 21장5절을 보면은 더 알 수 있지요. 여기서도 그런 비슷한 명령이 있어요. 제사장은 머리를 대머리되게 하지 말고 무엇을 깍지 말고 그런 말이 있거든요. 제사장은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말을 할 때 레위기에 있는 말이어요. 그러면 여기서는 몸을 상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그러면 여기를 읽어보면 전부 먹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이것과 관계된 의미로 말하고 있지요. 실은 몸을 상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누가 죽으면은 몸을 상하고 슬퍼하는 것이어요. 인제 레위기 같은 곳을 참고해 보면 그냥 알 수 있겠지요. 슬퍼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레위기는 한 마디로 이방인들처럼 슬퍼하지 말아라. 어디 신약 성경에서 본듯하지요. 데실로니가전서 4장에 그런 말이 있지요. 너희들은 소망없는 이방인처럼 슬퍼하지 말아라. 그런 말이 있지요. 그것과 상응하는 말이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 먹거리 생명의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죽었을 때까지라도 이방인처럼 슬퍼하면 안되어요. 그러니까 이 본문은 설명하기를 왜 이방인처럼 몸을 상해서 안되는가? 너는 내 자녀가 되었고 내 기업의 백성으로 뽑였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렇지 않는 자처럼 슬퍼할려고 그러냐?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죽음에 있어서까지라도 이방인처럼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것이어요. 그 말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부터 보면은, 머리되는 말은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는 것이고, 그 다음 4절부터는 설명을 하고 있어요. 한 마디로 가증한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먹을 만한 짐승은 무엇이냐? 또 먹을만한 물고기는 무엇이냐? 그것이 20절까지 쭉 나와 있지요. 이 문단을 시작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는 말이 시작하는 말이었어요. 레위기 11장과 여기 신명기 14장의 주제와 강조점의 차이는 무엇이냐? 레위기 11장에도 먹을 것 먹지 못할 것이 쭉 나와 있어요. 그런데 레위기 11장은 먹는데 있어서 정하고 부정한 것의 종류를 가르는 것이 핵심이어요. 그래서 먹을 것은 이것, 먹지 못할 것은 어떤 것으로 쭉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도 레위기에서 강조점은 쭉 보면 부정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어요. 죽으면은 부정하고 죽은 시체를 만져도 부정하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14장에서는 품목을 가르려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를 많이 말하는데 강조점이 있어요. 그러면 죽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레위기 같으면 죽은 시체와 접촉해도 부정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합니까? 죽은 시체는 너희들은 먹지 말고 이방인에게 팔아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확 다르지요.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레위기는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 실은 부정으로 확 둘러 싸여 있어요. 먹을 수 있는 것도 죽어버리면 부정해요. 레위기 11장 후반부를 보면 부정하다는 말이 주를 이루어버려요. 그런데 신명기 14장은 정하고 부정한 거룩을 구별할려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는 것이 가나안 땅 언약이어요. 그러니까 먹거리를 많이 나열하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고, 죽은 것을 너희들은 먹지 말라. 그들은 살아있는 백성이다. 생명의 백성이다. 죽은 것은 누가 먹어야 됩니까? 레위기 같으면 죽은 시체를 만졌어도 부정하니까 진 밖으로 나가야 돼. 그런데 여기서는 죽은 것은 너는 먹지 말고 이방인에게 주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가 이스라엘 백성은 산 것이 아니면 먹지 않습니다. 죽은 것은 이방인에게 주어라.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방인도 먹거리가 있지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것처럼 이방인도 먹거리 이야기를 해주고 있고, 그런데 레위기 11장에서는 유대인까지라도 죽은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하니까 진 밖으로 나가버려야 되어요. 그런데 신명기는 산 것은 전부 이스라엘이 먹고 죽은 것은 이방인에게 주어라. 그렇게 먹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먹을만한 것도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가 보십시다. 먹을만한 짐승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엇이냐? 4절을 보십시다.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고 소와 양과 염소와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랴져 쭉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품목이 다양하지요? 그런데 레위기를 읽어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고 6절이 먼저 나와 있어요.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쭉발이 되고 새김질한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그리고 먹을 종류는 싹 빼버리고 그리고 먹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진 것, 굽이 갈라졌으되 새김질을 못하는 것, 이런 것은 먹지 말지니라. 먹지 말 것을 한참 더 설명합니다. 그러니가 말하는 표현법이 바구어져있지요. 신명기에서 먹을만한 것을 강조하는 방법은 먹을 품목들을 많이 나열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레위기하고 표현 방법이 한참 달라있습니다. 똑같은 사건도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는 레위기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어서 먹고 살게하는 신명기는 표현 방식이 달라져 있다. 그래서 먹을만한 짐승을 표현하는 방식은 품목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사슴도 여러 가지 사슴이 있고, 노루도 여러 가지 노루가 있어요. 비교해 보면 그냥 그 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점은 품목을 비교해 보면 똑같지마는 표현법은 실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다는 의미로 언약 갱신적인 표현법이어요. 물고기와 새 중에 먹을만한 것은 무엇이냐? 9절을 보면은 물고기는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라. 지느러미와 비눌이 있는 것은 먹을 것이요. 또 그런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 부정하다. 11절에 정한 새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이런 것은 못먹는다. 그리고 못먹을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쭉 나와요. 그 다음 20절에 보니까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부정한 것이 쭉 나열은 되어 있어도 앞과 뒤를 보면은 정한 새는 너희가 먹으라. 그렇게 돼 있지요? 레위기 11장과 비교할 때 표현법에 차이는 무엇이냐? 이 물고기와 새를 표현했을 때 실은 레위기에서는 물고기도 한 문단이 되어 있고, 새도 한 문단이 되어 있고, 그런데 레위기는 부정한 것이 많이 강조과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안하고 먹어라. 하는 말을 앞뒤에 내놓고 가운데는 쭉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설명은 잘 되어 있지 안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표현법은 레위기는 정하고 부정한 것의 차이가 있고, 신명기는 먹으라는 데가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 문단의 끝맺는 말을 보니까,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을지니라. 레위기를 보면은 부정한 것이 더 강조가 되어 있어요. 여기서는 먹으라는 문제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곤충 중 먹을만한 것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레위기 11장에 보면 곤충에 대해서 쭉 언급하고 있거든요. 날개는 있어도 부정한 것, 그러나 발이 달려가지고 팔딱팔딱 뛰면 그것은 정하고, 메뚜기 같은 것, 여치 같은 것은 먹으라. 그런데 신명기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어째서 없을 것 같습니까? 먹으라는 품목을 잘 설명한 것은 어느 조항이어요. 짐승 고기를 먹으라고 할 때는 소나 양을 먹으라고 할 때는 종류가 많해요. 노루도 흰 뿔달린 사슴 해갖고, 많고 그 다음 물고기나 새를 말할 때는 이러이러한 것은 정하니라 먹으라. 부정한 것을 쭉 말하고 제일 끝에 정한 것은 먹으라. 이렇게 되어 있고, 그 다음에 곤충은 아에 빠져있어요. 왜 그런 것 같아요? 가령 번제 같으면 비둘기도 바치는데, 화목제물은 비둘기는 못바쳐요. 번제가 제사로 아주 중요한데 비둘기도 바치는데, 화목제는 비둘기를 바치면 안되요. 속죄제 같으면 곡식이라도 내야되는데 화목제 같으면 전부 큰 것으로 내야 되지 그렇게 내면 안되어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먹거리를 쭉 이야기하는데 짐승을 말할 때는 먹거리 종류가 많해요. 여러분이 시장에 가서 이런 방에 들어가면 놀라버릴 것이어요. 그리고 그 다음 방들은 설명이 시지부지해요. 곤충에 들어가서는 아예 설명을 싹 빼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레위기는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메뚜기 같이 발로 빨딱 빨딱 뛰는 것은 먹고, 새도 날개가 있어도 날지 않고 두엄덤이나 파면 먹지 말고, 이런 이야기들이 쭉 나와 있는 것이지요. 여자 분들에게 물어보면 말귀를 훨씬 더 빨리 알아듣거든요. 눈치가 훨씬 빨라. 손님 모셔놓고 멸시잔찬만 차려놓으면 안되지요. 젖가락 갈 때가 없어요. 이 집을 보니까 뭐 노루가 어떻고 사슴이 어떻고 소가 어쩌고 하는데를 보니까 종류가 다양해요. 그렇게 돼 있지요? 신명기는 한마디로 많이 먹으라는 데가 강조란니까요. 가나안 땅의 복을 주는 것이 강조에요. 그러니까 먹을 것을 말할 때도 짐승을 말하는데 종류가 짝 깔려버렸어요. 그러나 새나 고기를 말할 때는 별로 많지 안해요. 그 다음 메뚜기를 싹 빼렸어요. 먹으라고 하면서 너 밭에 나가면 메뚜기나 여치 그런 것을 먹으라고 해보았자 그것이 뭐 먹으라는 것입니까? 간에 기별도 안가지. 그러나 정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할려면은 그렇지 않지요. 그러니까 신명기적인 특징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그 말입니다. 제 판단이 주관적입니까? 11장과 맞추어 보면 한참 차이가 나지요. 이유가 그런 것이어요. 그래서 이 14장에서 먹거리 제일로 강조는 먹을 짐승이어요. 그 다음 21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그런 말로 되어 있어요. 스스로 죽은 것을 못먹는 이유는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왜 스스로 죽은 것을 이 본문에서는 먹지 말하고 했지요?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에 먹지 말하고 그랬지요? 모든 문장이라는 것은 그 문장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문장에서 말하지 않으면 아까 메뚜기는 먹지 말라는 것도 나같이 추론해서 알 정도지, 설명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래서 먹지 말하고 했다고 싸워서는 안되어요. 추론할 수 있을 때까지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직접 언급하지 않으니까. 하여튼 언급하지 않으니까 먹거리에 포함이 안되어버리지요. 이 본문대로 하자면 포함도 안되어버린다. 그러니까 그 문장에서 말한 것만 알면 되어요. 성민이니까 먹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레위기 11장에서는 어째서 먹지 말라고 그러느냐? 죽은 것은 부정하니까 먹지 말라고 그럽니다. 이러이런 한 것은 너희가 먹어라. 그러나 죽은 것은 먹지 말아라. 그것은 부정하니까. 그 죽음이 그릇에 떨어졌는가? 씨앗에 떨어졌는가? 그 죽음에 접촉한 것은 다 부정하다. ?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레위기는 죽음에 접촉한 것은 다 부정해요. 죄와 관계되기 때문에. 그래서 전부 부정해요. 레위기에서 스스로 죽은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하고 한 것이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왜 스스로 죽은 것을 먹지 말하고 그러느냐? 너희들은 여호와의 성민이 되었기 때문에 먹지 말하고 그래요. 하여튼 아들에게 특식을 제공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로 지금 여기서는 성민이지요. 너는 내 자녀요, 만민 중에 뽑은 내 백성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이 죽은 것을 먹으려고 그러냐? 아니다. 산 것을 먹어라. 그러면 22절을 보니까 산 것을 먹는데 십일조 갖고 내 집에 와라. 내 집에서 같이 먹자. 이정도 하면 할 말이 없지요.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스스로 죽은 것은 누가 먹습니까? 이방인이 먹는다. 죽은 것은 이방인에게 파는 것도 가하다. 너희는 먹지 말아라. 내 백성이니까.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삼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말이 출애굽기 23, 34, 레위기 22장 그런데 있거든요. 거기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드리는 데서 이런 말이 나와요. 이렇게 하지 말하고. 여기서는 제물 드리는 문맥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먹는 문맥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항상 먹는 것과 관계가 있겠지요. 먹는 방식과. 우리가 잘은 몰라도 이 말은 알 수 있겠지요. 하여튼, 이방인처럼은 먹지 말하는 말은 그냥 감이 잡히지요.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지마는 너희들은 먹지 말라는 것을 보니까 어떠튼 이방인과 관계된 것은 감을 잡겠지요. 여러분들이 괄호 넣기 하면은 앞 뒤 몰라도 앞뒤를 읽어보면 할 수 있지요. 또 한문를 몰라도 앞뒤를 읽어보면 그 내용은 알겠지요. 그것만 토 달라고 하면 틀리지마는, 그 내용을 말하라고 하면 그것을 모르고도 알지요. 앞 뒤 문맥을 쭉 보니까 감을 잡는 것이어요. 거기다가 그 한자를 알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니까 의미가 선명해 지겠지마는 그런 것을 몰라도 그 앞 뒤만 알면은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그냥 안다. 가령 귀가 나쁜 분들은 전화로 하면 못알아 듣는데, 앞에서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그 문맥을 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러니가 여러분들이 가나안 사람들이 어떻게 요리하는가, 어미 젖에다가 새끼를 삶는가? 이런 것을 몰라도 이 문맥을 보면은 아는 방법이 있다.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이방인처럼 먹으면 안되어요. 거기까지는 특별한 의미없이 접근하겠지요? 그리고 인제 주석들을 보면은 그 시대의 가나안 백성들의 요리법을 알 수가 있겠지요? 실은 어미의 젖이라는 것은 새끼의 양식이지 그것이 음식 요리법으로 해서는 안되겠지요. 젖은 새끼가 먹고 살 것인데 거기다 새끼를 삶을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가 여기서는 그것이 얼만큼 잔인한지, 동물 애호법 문제보다는 여기서는 아무리 맛있게 해도 하나님 앞에는 이런 식으로 드리면 안되고,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식으로 먹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에요. 그리고 더 이상 모르면 모르는대로 놔두세요. 답을 쓸 때 모르면은 포괄적인 답을 쓰고 모르는 것은 그냥 놔두면 되겠지요. 그러면 안 틀리는 것입니다. 하여튼 여기서 전체적인 제일로 좋은 것만 먹고, 산 것만 먹고, 그렇게 먹어라. 그리고 죽은 것은 이방인이 먹고 그렇게 해라.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먹을만한 것의 사체에 대해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의 언급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레위기 11장에서는 사체는 부정하다.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먹어라. 이방인들에게 팔으라고 그랬지요. 그런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22-27절은 십일조 드리라는 말인데,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두주와 기름의 심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여기까지가 명령이고, 그 다음 24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물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앞에는 먹는 음식의 종류를 말했지요. 이런 저런 것을 먹고 산 것을 먹고 큰 좋은 것을 먹어라. 죽은 것은 먹지 말고 이방인에게 팔고. 또 산 것도 어미 젖에다가 새끼를 삶아서 먹지는 말아라. 너는 내 백성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다음 여기서는 먹는 품목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면, 22절은 그런 것이 아니라, 특별 초빙하는 방식을 말해요. 품목도 최상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십일조나 초태생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성소로 가지고 와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피를 드리게 했지요? 레위기는 기름도 드리게 했지요. 그리고 고기는 네가 먹어라. 네 가족도 먹고. 거리가 머냐? 거리가 멀다고 너를 촌 사람 취급을 하겠냐? 아니다. 팔아갖고 와라. 자동차 제공하는 식이지요. 꼭 그것만 끌고 오라고 하면 참 고약한데, 팔아갖고 와서는 맞있는 것을 네 마음대로 사라. 그래갖고 여기 23절을 보면은 택하신 곳,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그렇게 해서 포도주와 기름은 최상품의 음식을 말하지요. 그 십일조만 언급을 하고 다른 십일조는 말하지 않고, 그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보다는 처음 난 초태생을 먹으라. 처음 난 것을 기력의 시작이지요. 제일 좋은 것만 지금 먹으라는 것이어요. 그리고 나서 너무 머냐? 그려면 와서 그전에 소 팔았으면 소사고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돈으로 네 먹고싶은 것을 사거라. 그래갖고 내 집에서 먹고 즐거워 하자. 여기는 하나 더 뛰어서 독주까지 마셔요. 독주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요. 먹으라.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거기서 사서 먹으라. 그 대신에 레위인을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을 것으로서 최상의 식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전부 산 것을 주었지 죽은 것을 준 것이 아니어요.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십일조는 곧 하나님의 것이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어서 자기 집에서 먹으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청와대 초대보다 더한 것이지요. 그렇게 먹으라. 거리가 멀면은 돈으로 갖고 와서 맘대로 사서 먹으라. 거기다 독주까지 하나 더해서 취하도록 먹고 마셔라. 그런 말입니다. 누구와 함께 즐거워합니까? 레위인과 함께 그렇게 합니다. ? 레위인은 기업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희 중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축제에 빠지지 않도록 해라. 그런 말이지요. 그 다음에 이렇게만 먹으면 그래도 성소에 찾아간 특징은 좋기는 좋은데 구약의 핵심은 성소의 교제가 온 땅에 확산되는 것이 목표거든요. 그러니까 매 삼년 끝에, 삼년 끝은 어느 때냐 하면은 초막절이어요.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모든 수확을 갈무리하고 지키는 절기에요. 그러니가 아무 풍성한 수확이 있었을 때이지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1/10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7장30절-, 민수기 18, 신명기 12, 여기 14, 26장에 각각의 강조점, 이 본문들은 다 십일조가 나오는데에요. 십일조가 나오는데 그 십일조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그 말이어요. 본래 십일조는 레위기를 보면은 일반 백성이 먹습니까? 못먹습니까? 먹으면 죽어요. 또 레위기에서 십일조는 누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어요. 그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는 한번 정해 놓으면 못물러요. 가령 열번째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이 비루먹은 것이 오거든요. 그러면 아이구 비루먹은 것이니까 바꾸자 하면 안되어요. 비루먹은 것은 비루먹은 것대로 하나님의 것이고, 바꾸어친 것은 그것대로 하나님의 것이어요. 하여튼 한번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은 못물리는 것이 레위기에요. , 레위기는 거룩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니까 하나님께 속한 것은 절대로 못물려요. 그것이 레위기 27장에서 하고 있는 말이어요. 사람도 한번 드리면 못물리지요. 죽든지 해야지, 한 번 드린 것은 못물린다. 한 것이 레위기 27장의 문제이고, 민수기 18장에서는 십일조는 레위지파의 일하 몫으로 주고, 레위지파는 그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드리는 데 그것은 대제사장 몫으로 드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백성의 직무를 담당함으로 백성이 안죽는 것이다. 해서 그 십일조는 건드리면 안되어요. 십일조는 레위지파 것이어요. 레위지파의 십분의 일은 대제사장 것이고.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싸우는 군인으로 진 중에 계셔요.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근위병으로 진치고 있고 나머지 지파는 그 밖에 있고 이방인과는 싸워야 되어요. 마찬 가지로 하나님이 레위지파가 하나님을 진쳐서 봉사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특식을 준 것이 십일조에요. 그들만 먹어야지 나머지는 먹으면 안되어요. 그렇게 해서 싸우는 군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니까 민수기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12장은 똑같은 책인데도 여기 14장과 비교해 보면은 십일조가 나오는데 6절을 보면은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거제와 너희 낙헌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먹으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도 쭉 십일조가 나와 있어요. 12장에도 먹는 이야기지요. 14장에도 먹는 이야기지요. 비슷하지요. 그런데 달라요. 12장에서 먹으라는 이야기는 앞에 무엇과 비교해서 먹으라는 이야기냐 하면은 절대로 우상을 부려버려라.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지 말고 너희들이 내 집으로 나와라. 예물을 드려라. 그 많은 예물 중에 십일조가 들어가 있지요. 실은 대표는 번제였지요.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이런 것, 그러니가 우상에게는 제사드리지 말고 부셔버리되 나에게는 예물을 드려라. 그리고 너희들이 에물을 드리고 내 집에 와서 같이 먹어라. 예배에다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 신명기 12장이어요. 그러니까 여러 예물 중에 하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4장에서는 백성에게 먹거리 주는데가 들어있어요. 여기서는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특별한 음식을 백성에게 주는 식이어요. 그것은 십일조와 초생물이라 최고급이어요. 기력의 시작이니까. 많은 제사드리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구별한 십의 일과 초태생, 거기다만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런데 뒤에 것하고 비교해 보면 더 차이가 나는데, 15:19절을 보면은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깍지 말고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아예 15장에서는 처음 난 것 중에 숫컷이어요. 그런데 여기 14장에서는 수컷이라는 말은 안나오고 처음 난 것이어요. 또 다르지요. 처음 난 것도 하나님 앞에 특식이지마는 그 중에 수컷은 어쩔까요? 제일로 힘이 센 것이어요. 그러니까 14장에서는 거룩한 양식을 주었다. 성민된 백성에게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살아있는 양식, 생명의 양식을 주었다는 것이 14장이면은, 15장은 힘있는 양식을 주었다는 것이 15장의 강조에요. 그러니까 말이 비슷하게 강조가 되고 있어요. 한 마디로 먹거리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언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서로 배교해 보면은 똑같은 것을 여기 저기도 반복했을 때 그 차이점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2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물드리는 중에 십일조가 포함되어 있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백성으로 먹으라는 의미이고. 14장은 백성에게 먹거리를 줄 때 십일조와 초생물이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거룩한 성민,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먹이는 특식이어요. 26장1-12절은 무슨 말이 나와 있냐? 여기서는 단순히 초생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 수확한 초생물이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언약의 성취를 기뻐하라. 그런 말이지요. 한 마디로 하자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처음 농사할 것이 아닙니까? 그때 첫 곡물을 드리라고 하는 것이 26장이고, 나머지는 첫 것이 아니라 해마다 첫 것은 그런 말이어요. 26장은 언약 성취에 대한 것이 강조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26장이 한 단락이 된다고 그랬지요? 그리고 27, 28장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소위 언약 체결에 대한 그런 축복과 저주로 언약을 확증하는 내용들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26장에서는 첫 곡식을 드린 것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은 언약의 성취를 기념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매년 토지의 소산의 십일조를 왜 드려야 되는가? 이 문맥에서는 어째서 드리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매년 십일조를 드려야 되고,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무엇하라고요?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는 왜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고요.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냈고, 그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같이 먹어요. 그렇게 함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 이것은 처음 것은 내 것이니, 하는 거룩에 대한 구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경외하기를 배우라.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말도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어요. ,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같이 먹고, 그 다음에 삼년 마다는 누구하고 같이 먹으라고요. 고아나 과부와 객하고 같이 먹고, 실은 어름 동류라 그런 식이지요.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거든요. 그 하나님을 경외해라. 그것이 여기서 십일조 내라는 이야기에요. 다음 것들을 12장과 비교해 보십시오. 성소를 뭉멋이라고 말하는지, 먹을 식물을 어떻게 언급하는지, 먹을 이유는, 함께 먹을 때는 어떻게 먹는지 한번 대조를 시켜보면은 이 14장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먹거리를 주셔서 하는 문제들이 강조가 될 것입니다. 한번 찾아서 비교해 보십시오. 비교해 보면은 그 차이점들을 알 것입니다. 성소에서 거리가 멀 경우 예물 취급법은 어떻게 해야되는가?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냥 다 팔아갖고 성소에 와서는 자기 머기 좋은 것을 맘대로 사라고 그랬지요? 그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그런데 레위기 27장은 아까도 말했지만, 십분의 일을 못팝니다. 거리가 멀면은 어떻게 할 것인가? 거리가 먼 것은 레위기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레위기는 정하고 부정한 것, 어떤 것이 하나님께 속했냐? 그것을 정한 율법이라, 거리가 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관없어요. 거리가 멀 때 조절된 언약이 무엇이냐? 신명기라 그런 말이어요. 땅이 너무 넓어서 거리가 머냐?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팔아라. 그래서 내 집에 와서 맘대로 먹어라. 그랬을 때 신명기에요. 그런데 레위기 같으면 하나님 앞에 정해졌으면 절대로 팔면 안되어요. 만일에 그것을 무를려면 1/5을 더해야 되어요. 그래도 한번 정한 것은 바꾸어지는 것은 아니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레위기하고는 문맥이 한참 다르지요. 그러나 신명기 12장을 보면은 팔아갖고 와서 맘대로 사서 먹으라고 그렇게 안하고 일반 음식물을 너희 성읍에서 맘대로 먹되 이러이러한 제물을 내 집으로 갖고 와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는 예베에다 강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맘대로 팔아갖고 네 맘대로 사먹어라. 그렇게 안하고 그 예물을 가져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문맥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되어버리는 것이어요. 그러면은 십일조를 팔 것이냐? 말 것이냐? 물어보면 몰라요. 레위로 하면 절대로 팔면 안되어요. 신명기로 하면 팔아갖고 와서 지맘대로 사먹으면 되어요. 똑같은 신명기도 12장에서는 그 예물을 갖고 오라고 되어 있어요. 팔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가 14장에서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그 거리가 멀다고 해서 네가 내 집에 못오겠냐? 서울 사람만 청와대 초청하고 하위도 사람은 초청하지 못하겠냐? 그러지 말고 편하게 팔아갖고 와라. 그래서 서울 장에와서 마음대로 사갖고 와라. 그러니까 거리 멀다고 내 집에 와서 못먹을 것이 없다. 맘대로 팔아갖고 아서 내 집에서 먹어보자. 그런 이야기지요. 그것이 14장에서 강조하는 방식이어요. 그러니까 그 문장 자체를 읽어야 됩니다. 그러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비교해 보면은 그 차이점 때문에 강조점을 잘 알 수가 있어요. 하여튼 14장대로 하면 거리가 멀다고 해서 자기 집에 숨어서 오물딱 조물딱 못먹을 것이어요. 거리가 멀다고 해서 아아고 나같은 사람이 청와대 가겠냐? 여기서 먹자. 그렇게 안먹을 것이어요. 가다가 휴게소에서 조금 먹고 배부르고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편히 와서 서울에 와서 장봐가지고 청와대 와서 마음 놓고 먹고 살 것입니다. 또 그것도 죽어버리면 이방인은 먹어도 너는 먹지 말아라. 너는 산 것만 나하고 먹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에 차려놓은 것은 보니까 뷔페식이 많기는 하지만 멸치 같은 것은 언급도 않고, 주로 소, , 노루, 사슴을 전면에다 짝 깔아놓았어요. 그리고 멸치 같은 것은 저 구석지에 조금 있어서 눈밝은 사람이나 먹을려면 몰라도 안가버려요. 되어요. 그렇게 차려놓았지요. 항상 글을 읽어야 된다니까요. 글을. 우리는 글을 직접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명을 통해서 나는 모르는데 목사님은 아신다고 묘한 것을 읽으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성경이 아니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니까 읽으면 쉽게 알 수 있어야 성경이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도 성경을 거꿀로 배워 놓아서 쉬운 것을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것 뿐이어요. 요리학원에 가서 요리를 배울 때는 복잡하게 배우겠지마는 그것으로 생일상을 차릴 때는 다 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입니다. 먹을만한 것만 차리지요. 그것이 14장이라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인제 하나님 집에서는 먹는 것이 아니라, , 너만 그렇게 먹으면 되겠냐? 기업이 없는 사람도 참석하고, , 내가 매년 청와대에서 먹는 것은 삼년마다는 온 국가에다 한번 펼쳐보겠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십일조는 삼년 마다는 이제 청와대 우리 집으로 가져오지 말고 네 성에다 저축을 해라. 그래가지고 너희 성에 거하는 나그네, 고아나 과부나 객, 12장에는 노예가 들어있는데 여기는 노예는 안들었어요. 여기는 식구가 강조가 돼, 그러니까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해라. 그러니까 매 삼년이 제일로 큰 것이 되겠지요. ? 온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고, 모든 가난한 사람이 성소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먹을 것이어요. 얼만큼 좋겠어요. 그렇게 한다. 그런데 다른데서는 십일조는 이렇게 썼다가는 벌받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이냐? 매년 내는 십일조, 매 삼년마다 내는 십일조, 또 레위지파가 먹을 수 있는 십일조, 나도 먹을 수 있는 십일조, 아마 유대인들의 문헌에는 최소한 두 가지는 나눌 것이어요. 매년 내는 십일도, 삼년마다 저축하는 십일조, 삼년에는 십일조가 두배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설명해줄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 하고는 상관이 없다. 유대인들이 몇번 십일조를 냈는가, 율법에 선생이 될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이 문맥은 하나님께서 산 것으로, 제일 좋은 것으로 먹였고, 그 중에 초생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먹도록 초대를 했고, 거리가 멀면은 맘대로 팔아갖고 내 집에서 실컷 먹도록 했고 그리고 그것을 삼년마다는 성읍에 저축해서 온 국민이 함께 먹도록 했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굶어 죽을 사람은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 백성이니까, 내 기업의 백성이니까 이렇게 먹어라.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어요. 그러니까 성민이 먹을 생명의 양식이어요. 이것이 14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교하면 여러분이 헷갈릴련지 모르겠지마는 차분히 비교해 보시면은 어느 하나를 보고 몰랐을 때 비교해 보면 그 차이 때문에 그냥 아는 것이어요. 오히려 해석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고후 8장9,15절을 해석할 때 같이 말합니다. 거기서는 노비는 빠졌는데 그것은 가족 식구에게 강조를 두기 때문에 그래요.

이 규례를 지키면은 끝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처럼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이처럼 복을 주시겠다고 그러느냐? 우리나라는 이것을 언약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돈놓고 돈먹기로 설명을 해요.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안했냐? 내야 복을 주지.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실은 구제하면 가난하게 되어요. 내 것 갖다가 주니까. 그런데 복을 주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왜 그러냐? 또 우리 보수파는 이런 말을 들으면 영 기분이 나빠요. 복을 주든지 말든지 우리는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지 뭐, 다 큰 아들이 아버지께 용돈 탈려고 효도하겠어요. 이런 말은 안해도 되는 것인디, 그러면 우리는 이런 복을 째째하고, 예수 믿고 천국가고 마음이 기쁠 것이어요. 이렇게 하지요. 그러고 그런 것을 자꾸 말하는 것은 기복 신앙으로 유치하게 알았어요. 그런데 성경은 실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일단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어요. 네가 내 땅에 들어가서 내가 주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내가 너희들은 배부르게 먹인 것처럼 네가 고아나 과부를 모아다가 삼년마다 잔치를 하겠는가? 그러면 너희들이 하면 내가 잔치해 준 것이다. 그러면 내 것으로 너희에게 주겠다. 가나안 땅의 복으로 먹이겠다 그 말이지요. 그냥 돈놓고 돈먹기가 아니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구약의 언약 개념을 빼버리고 이것을 신약의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려니까 복받는 몇 가지 케이스가 있어요. 십이조 하면 복받고, 구제하면 복받고, 이러니가 핵석이 묘하게 된다. 그말이어요. 가령 아버지가 얘기들에게 사탕을 쭉 나우어 주면은 큰 딸이 지것을 안먹고 동생들에게 나누어주면은 기특하지요. 어려서는 네 것은 너나 먹어라. 동생 것은 아빠가 주마. 하고 먹으라고 하지마는, 속으로는 아이고 그놈 속은 제 멈마를 닮았구나, 좀 났지요. 그런데 동생들은 다 먹어버리는데 저는 조금 아껴두었다가 얘기들이 없을 때 먹으면 얘기들은 손가락 빨지요. 그래도 벌줄 것은 없어요. 지것 지가 아꼈다가 먹으니까. 그래도 미웁지요. 속아지가 버렸거든. 그런데 제 것을 동생들에게 주면은 지것을 못찾아 먹는다고 성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은 쓸만하구나. 더구나 다 커서 그러면 아버지가 재산을 장남에게 맡기지요. 왜 옛날에 장남 하나를 기르면 다 된다고 그랬느냐? 그가 아버지를 대신하니까 거기다 투자하는 것이어요. 저 잘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얘에게 맡기면 내가 죽어도 저 짜잔한 동생들이 다 먹고 살겠구나. 지가 에비 마음을 아니까. 그래서 장자에게 주는 것이지요. 그때 다 큰 아들이 동생들에게 주면은 야, 너는 네 것도 못지키냐? 그러지 안해요. 어려서는 그러지만 커서는 그러지 안해요. 좋아하지요. 동네 사람들도 아따 그 집은 됐더라고 그러고. 그러니가 아버지가 더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의미로 우리가 구제하면은 하나님이 그 구제의 의가 계속 공급될 수 있도록 해요. ?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아버지가 되시거든.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신 것처럼. 그런 말이지 구제하면은 복받고, 복받을 몇 가지 항복을 말씀한 것이 아니어요. 12장에서는 안식의 땅에서 성소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에게 주실 복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을 말씀하며, 14장은 성민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양식을 말씀한다.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녀된 성민이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죽었다고 해서 머리에 상처내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말입니다. 이것은 아마 가나안 백성이 그렇게 슬퍼하니까 하는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로는 우리들이 조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장례식이라고 해서 정해 놓은 것은 없어요. 만일에 이것이 기독교 장례식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더 위험해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각 나라에서 자기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효도하는 방식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으면은 그 삶의 질서에서 섬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좋아요. 가령 우리 전라도 사람들 같으면 남도 창만 들어도 기분이 찡하고 묘하지 안해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들으면 대개 늘어빠져가지고 묘한 것입니다. 그 정서를 담는데 다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꼭 서양식으로 슬퍼해야 문화인으로 슬퍼하고 동양식으로 슬퍼하면 천하고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어떤 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우리들이 이방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그대로 닮는 것은 상당히 분별해야 될 것이어요. 가령 여러분이 여기다가 줄 세 개 친 건을 쓰든지, 안그러면 새끼를 두 바퀴 감든지, 옛날에는 그렇게 했으니까 그런 상관할 것이 아니어요. 옛날에서는 거기 다 우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새끼를 왼쪽으로 꼬는 것은 다 우상의 의미가 있으니까 인제 문제가 심각하지마는 현대에 있어서는 그런 우상의 의미는 다 없어져버렸어요. 그냥 옛날 상복이라는 개념이지 그것이 줄이 세 개냐 두 개냐, 셋은 큰 아들이고, 둘은 작은 아들이고, 그도 없는 것은 사위인지 그런 것을 우리는 몰라요. 동전을 왼쪽으로 다냐, 오른 쪽에 다냐, 그런 것은 현대인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옛날 같으면 음양이 있어서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 하고 복잡한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옛날 의미는 닮지 않고 그냥 옛날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을 상관없이 쓰는 것이니까.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도 기독교 장례식은 부활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슬퍼하면 안된다는 말은 단순히 안 운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예복에 있어서까지라도 그런 문제로 많이 개선해 나가야 될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아주 묘합니다. 성리학 계통이라 그런지 까만 옷에다가 조그만 리본을 차지요. 그러다가 요새는 완장까지 차지요. 그 완장에다가 장남은 특무상사니까 줄이 세 개, 차남은 두 개, 막둥이는 하나이든지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복잡하게 끝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양복입고 거기다가 옛날에 상복입어버리지요. 그러니까 속에는 양복 겉에는 상복 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어서 묘합니다. 거기다가 이것이 기독교식이라고 정해놓으면 얼만큼 권위가 있겠어요. 통일한다는 의미로는 좋겠지마는 성경은 긱독교 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이 정당한 분별력을 발휘하시되 이방인처럼 슬퍼하지 말라 그 말을 그냥 재만 무릎쓰고 가다가 딩굴고 그런 말 정도가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예복에 있어서까지라도 그런 개선을 해놓아야 되겠다. 서양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옛날에는 너무 우니까, 지팡이 짚고 가다 쓰러져도 일어나야 되니까 하고, 옛날 장례식 지팡이는 약해요. 산신령이나 긴 지팡이를 짚을까 장례식 지팡이는 낮아요. 허리 펴고 울면 안되지요. 구부리고 가니까 낮고 그런데, 그것도 어디서 들으니까 뭐, 남자가 죽으면 대나무 지팡이, 여자가 죽으면 오동나무 지팡이 그런다고 하는데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울거든.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농협에다 주문하면은 시골에서는 한 셋트로 와요. 오새는 짚이 부족하니까 베로 새끼를 꼬아서 묶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자기 환경에서 경건성을 나타내면 그만이어요. 그런 것을 천주교처럼 통일하고 그냥 종들고 와서 딸랑딸랑하고 물 뿌린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어요. 오히려 그런 것이 더 위험해요. 이방 식보다 소위 기독교 식이라는 것이 더 위험해요. 그러니까 그런 예식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 청교도 선배들은 장례예식 없이 예베 의식 없이 미장할지니라. 그 정도 결정을 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목사가 죽으면 예배당에다 관놓고 장례하고 성도들이 죽으면 저 밖에다가 놓고 하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목사가 죽어도 여기 관을 놓으려고 안해요. 거룩한 성전인데. 하여튼 죽으면 저 변방에 있어야지 가까이 있으면 안되어요. 서양 같으면 예방에서 하지요. 그전에는 향을 피웠는데 요새는 신식으로 장미꽃 한 송이씩으로. 죽은 사람은 그런 것을 받는 것이 아니지요. 묘역을 추잡하지 않도록 식목하는 것은 가능하지마는 관 앞에다 꽃 하나씩 놓고 지나갈 것이 없다. 향 피우는 것도 똑같은 것이어요. 그러니가 서양 식이면 고상하고 동양식이면 미신인줄 알면 안된다 그런 말이어요. 실은 죽은자에게는 그런 예의를 안갖춘다. 장례식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죽은 사람의 운명은 끝난 것이어서 그런 예식을 안갖춘다.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또 화장을 하면은 부활의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화장을 인도식개념으로 받아오지 말라는 말이지 화장하면 부활이 안돠고 묻으면 부활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어요.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 사회에서 필요가 무엇인지, 우상식만 아니면 상관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었다고 해서 그렇게 울지 말어라. 내가 너한테는 특별한 양식을 주지 않는냐? 하면서 양식 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녀된 성민이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죽음을 슬퍼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들은 가증한 어떤 것도 먹지 말며, 먹을만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죽은 것은 성민이 아닌 이방인의 양식으로 주셨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양식으로 먹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먹어라. 이스라엘은 십일도와 초생물을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드리고 그 앞에서 먹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에게 모든 생명의 양식을 주신 분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십일조와 초생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는 것이어요. 또한 그들은 매 삼년 끝에 성읍에 저축하고 그것으로 기업이 없는 가난한 자 고아나 과부에게 주어 먹어 배부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온 땅에 이스라엘이 모두 다 여호와의 것으로 먹고 배부르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해내야 된다. 여호와께서 이 은혜의 생명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온전한 것으로 그의 교회에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예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로 서로를 돌아보아 그의 부요하심에 함께 참여케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의 일을 계속해서 봉사하도록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고후 8, 9장에 있는 말씀이지요. 이제 신약은 가나안 땅의 것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는데 가나안 땅의 성민이 아니라 이제는 하늘 성소에 속한 성민이 되었어요. 이제는 가나안 땅의 부요한 것으로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 우리는 먹이셔요. 어떻게 먹이시느냐 하면은, 부요하게 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로 그 생명의 복에 참여하도록 자기 몸을 주셨어요. 교회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헌금은 이 은혜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어요.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요하신 것으로 가난한 자에게 주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요한 것에 형제도 참여하도록 손을 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예하는 것이어요. 그렇게 하면은 하나님은 평균케 해서 하나님은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자나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다 주님의 몸의 교제에 참여토록 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이렇게 성실히 수고하면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히 주시는데, 어떤 풍성함으로 주십니까? 빌립보서를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의 충만함으로 주셔요. 그렇게 주셔서 형제를 봉사하는 은혜의 일이 그치지 않도록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신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8,9장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어요. 경제적인 원칙으로 하면 남에게 주면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과 관계에서는 먹어버리면 이익이고 준 사람은 손해에요. 그러나 친구만 해도 그렇지 않치요. 친구만 해도 주면 줄수록 친구가 더 많이 생기고 먹거리가 더 생겨버려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친구 열명 모아놓고 자기가 10만원 내면 일인당 만원이어요. 그래도 자기들이 볼 때는 자식 오늘 10만원어치 내더라. 그래도 자기들이 일대 일로 만났을 때는 안내도 오만원어치는 내요. 나누기 하면 저는 만원어치 밖에 안먹었지만. 친구끼리도 경제 원칙하고는 달라요. 더구나 가족끼리는 더 달라요. 큰 아들이 동생에게 다 주어버리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림을 맡겨버려요. 이 자식에게 맡기면은 형제가 다 먹고 살겠구나. 분명히 손해났지마는 손해난 것이 아니어요. 이건 경제 원칙하고는 다르다.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렇게 해라. 그말이어요.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분이 부활하셔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을 믿으면은 우리들이 우리 몸이 죽음에 이르도록까지 그의 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토록 한 것처럼 우리들이 생명의 것으로 그렇게 형제를 구제하고 나누어라. 그것이 주님의 은혜의 일에 참예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이지 않냐? 많이 거둔자나 적게 거둔자나 부족함이 없는 한 몸이지 않냐? 그렇게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다. 우리는 1/10만 갖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그렇게 한다.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 먹고,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그냥 죽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는 하늘에 속한 것으로 먹어요. 썩지 않은 것으로 먹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것으로 형제를 구제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형제들의 배고품이 없도록 하게 해라. 그러니가 초대교회는 반드시 교회가 모이면은 성찬식 때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고 그렇게 해서 성찬의 의미가 헌금의 의미에요.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으로 하나님 상에 있는 것을 같이 먹거든요. 그리고 그것으로 반드시 구제하는 것이 있도록 했었다. 물론 구제라는 것은 평균케 한다고 해서 일인당 오만원씩 나누어 갖자. 그런 이야기는 아니어요. 핍절함이 없도록 한다는 평균케 함이어요.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때도 어째 나는 안도와주는고, 그렇게 말하면 안되고 자기 짐을 스스로 져야되고 일단은 자기 짐을지지 않은 사람은 옳은 사람이 아니어요. 자기 짐을 질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족이 있으면은 그가 짐을 저서 교회로 짐을지지 않게 하고, 만일에 형제를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악하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교회가 짐지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성경에 말하는 방식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일이 생기면은 자기 일에 다른 사람을 갖다가 열심히 부려써요. 그것은 자기가 해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짐이어요. 그렇게 해야 인격도 성숙되고 의미를 알 것인데 내가 여러우니까 집사님 봐주십시오. 하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은 나는 무슨 일하느냐고요. 그러면 그 일이 꼭 필요하면 해주어야 되요. 그런데 자기 일을 효과있게, 눙슥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짐을 지는 것은 그건 염치없는 일이지 사랑의 교제가 아니어요. 그러니가 그런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교회가 사랑이 없니 마니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로는 사랑이 별로 없지요. 다른 사람이 도우면 옆에 사람은 안돕고 구경하니까. ? 그 사람이 도우면 나는 힘을 안써도 될 수 있어요. 단지 그 사람이 과도한 짐을 지면 나도 합심해야 되겠지마는, 누가 도우니까 나도 너도 돕자 해갖고 돕는 것은 그것은 불났다고 바켓스들고 막 달라드는 식이지, 그건 소방관에게 맡겨도 되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사에 안맡기고 총총해서 다른 사람이 보면은 별 재미가 없습니다. 구제하자고 해도 우르르 몰려드는데 별로 잘 안커든요. 그래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은 갈 것이어요. 만일에 그렇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옆에 사람이 도와야 돼.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안해서 재미가 없는 모양인데 각자 자기의 짐을 지는 것이 일단은 원칙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옆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만큼. 그런 이야기지 전부 공평하게 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또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마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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