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9

찬미예수님 2024. 7. 13. 16:18

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9

 

9장입니다. 신명기를 읽을 때는 신명기 문맥에 적용하는 것이고, 민수기를 읽을 때는 민수기 문맥에 적용하는 것이어요. 그러면 민수기 문맥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되느냐 하면은, 여기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민수기는 벌받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안믿으니까 전부 들으라고 했어요. 우리들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오시는 나라에 들어가지, 동행치 않으면서 들어가는 방법은 없어요. 성경은 개인의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단지 구약의 교회는 대표자가 들어갔다가 쫓겨나지요. 들랑달랑해야 되어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지요. 그런 의미로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었다 그말이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데도 이것은 따논 당상 그런 소위 칼빈주의적인 운명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이 믿음에 동행하지 않으면은 주님께서 오시는 그 영광의 나라가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각오해야 되어요. 그것은 우리를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빛 가운데서 승리하라 그런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민수기를 읽고는 민수기 문맥에서 적용하고 신명기를 읽었을 때는 신명기 문맥에 적용하며 그 글을 읽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광야 하면은 그것이 딱 의미적으로 결정된 줄로 알고 하면 안된다 그말입니다. 항상 그 문맥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맥을 떠나버리면 그것은 소위 종교 철학이지 성경의 이야기는 안됩니다.

신명기 8장에서는 배고푸냐, 배부르냐 먹고 마심을 의지하지 말고, 나다. 내가 생명의 주가 아니냐 그 이야기를 했고, 9장에서는 너희들은 잘났고 가나안 백성들은 못나서 그런줄 아냐 너희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들은 범죄자다. 단지 내가 진실해서 너희들을 복준 것 뿐이다.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 9장-10장11절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10장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두 번 굶었지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굶은 사람이 구약에 누굽니까? 모세, 엘리야, 신약에서는 무슨 산인지 몰라도 조그만 산에서 굶은 분이 있지요? 예수님. 그리고 항상 이런 숫자, 광야도 40년 예수님 부활하신 뒤로도 40일 그런 것이 있지요. 그런 것이 구약의 언약 개념과 상당히 관계가 있어요. 홍수도 40일 동안 있었지요. 관계가 있어요. 그런데 이 문맥을 보면은 모세가 두 번째 굶은 이야기를 여러번 하고 있어요. 범죄 때문에 두 번이나 굶었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는데 거듭거듭 권면해요. 여러분이 이 주보를 읽고 연구를 해보세요. 본문도 서너번 읽고 주보도 읽어서 왜 여기서 굶었던 이야기를 두 번을 반복하고 있는지. 실은 신명기는 언약 갱신이 강조거든요. 그리고 출애굽기에는 두 번 굶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 보여주셨어요. 여호와의 이름을 선언하고, 그런데 두 번 굶었을 때 하는 이야기가 야, 개짝 만들어가지고 내 법을 거기다 넣고 메라. 그리고 내 이름으로 축복하라고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언약 체결과 언약의 복을 누리는 것, 어떤 것이 강조된 것인지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어요. 그것이 신명기에서 두 번 굶은 이유들이어요. 신명기가 어려운 것은 역사적인 사건만 다루면 쉬운데 거기는 율법들을 다루니까 자세히 생각을 해야 되요. 그래서 조금 어려워요. 인자 생각하기를 어떻게들 생각하느냐 하면, 봐라. 하나님이 벌을 주니까 그 땅이 황무지가 되었지 않냐 구약 성경 이쪽 제일 끝에를 보면은 그 땅이 황무지가 되어 갖고 안식년을 주신 것이 아니냐 그들이 잘 들을 때는 젖과 꿀이 흐르다가 말을 안들으니까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아니냐 봐라. 사람이 말을 범죄하니까 땅도 가시와 엉컹퀴를 내지 않냐 니까 그렇게 이스라엘이 황무지가 되고 그런 것이다. 인제 이렇게 설명을 할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거기까지는 성경 역사의 이야기는 아니어요. 성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은 그때부터 이방인의 때지 이스라엘을 중심한 역사 기록은 아니어요. 문제가. 더구나 신약은 이스라엘이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배타적인 백성으로 기능을 안해요. 여전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언약은 있지마는. 언약을 맡아서 마치 성소적인 삶, 가나안 땅에 있으니가. 젖과 꿀이 흐르니가. 에덴처럼 그런 삶을 유지할 위치에 있지 안해요. 그들도 우리와 같이 복음으로 부름받을 입장에 있지 구약처럼 특별한 위치에 있지를 안해요. 그러니가 이미 구약 시대가 끝났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이 척박하다고 읽어 들거가는 것은 성경 문맥을 넘어서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땅이 지금도 살기 어려우면 그냥 지형이 그런 것이어요. 그런데 거기다 거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도 봐라. 복을 준다고 그랬는데 황무지여도 황무지 밑에다가 하나님이 보화를 주셨는데 사해 사막을 보아라. 사람이 못살고 그 땅이 소돔 고모라가 망했던 그런 땅이지마는 하나님이 4백 몇 천년 동안 헤르몬산의 물을 흘러 내리게 하니까 중국에서 황야 물만 흘러도 우리 나라 석유가 있니 마니 판에 그 사해가 광물질이 얼만큼 많냐 경제 하면은 세상에 모든 지역보다 많다고 선전을 하지요. 또 그런데다가 하나님이 햇빛으로 잘 구워노니까 여러분 흉년에 농사가 잘 안될 때는 그전에 보면은 부엌에다 흙 넣어서 구워갖고 그 흙으로 비료하지요. 연탄제 깨가지고 뿌리면 농사 잘 되지요. 하여튼 구운 흙은 산소 공급이 잘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햇빛으로 구워놓고 거기다 착 물을 주니까 비가와서 목화가 다 더러워지겠지마는 비는 한 방울도 안오고 물로 데니까 목화도 하얗고 진짜베기가 다 나오지 않냐 오렌지 나오고. 똑같이 틀린 이야기에요. 성경은 그들도 우리처럼 동일한 믿음으로 들어갈 약속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루어졌으니까.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누리겠다. 구약식으로. 그런 법은 끝났어요. 그때는 이스라엘만 누리는 장자적인 성소적인 삶이어요. 지금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지금 세계사를 성경으로 해석해 들어가면 안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지금 이스라엘에 천재가 많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복받는다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보라고 천재 많지 않느냐고, 틀린 이야기에요. 그들은 예수를 이단자로 죽이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혀 안맞는 말이지요. 그리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도 구약에서 장자권을 두고 하는 머리지 지금 세계 천재가 나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설명하면 전혀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이 같이 가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 밥먹을 때 예수님이 그들의 눈도 열어주고 성경을 열어주니까 알아 보았지요. 그리고 누가복음은 계속 성경을 열어주지요.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안했냐 고난을 받고 영광을 받으리라고. 알아보았다고 되어 있지요. 부활 후로는 분명히 그 몸으로 부활했는데도 잘 몰라요. 어떤 상태인지. 성경은 언급을 안해요. 그러면 부활 후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보고 놀란 적이 없지요. 오히려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때도 잘 믿지 못했는데 요한복음은 기뻐했지요. 문맥마다 약간 다르는데 특별히 누가복음은 낙심해서 내려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로 되어 있고 성경을 열면은 그 영광을 볼 수 있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을 모르면 모르고 그 문맥 이야기고 부활하신 분의 상태가 무엇인지는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단지 한 가지는 알지. 성경적인 의미로. 썩지 않을 것이다. 구약은 썩는 것이 죄아래 있는 질서고, 이제는 죄로부터 벗어나면 썩지 않음이 핵심이거든요. 그런 모세 언어적인 이야기만 알지 우리가 몇살때 부활할 것인지, 부활할때 마리아 상처럼 광채가 날것인지, 그런것은 모르는 이야기지요. 단지 몸으로 부활했으니까 그 양반인지 알것인데, 또 알아볼 때가 있지요. 만져 보아라. 또 영은 먹지 못하지만 나는 먹지 않냐 그럴때는 분명히 그전의 것을 이야기해 줘요. 우리는 그 문맥만 읽지 이 양반이 변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런것은 잘 몰라요. 문을 잠궈 놓았는데 들어온 것을 보니까 그때 부활한 뒤로는 집에도 안살고 싹싹 날아다니지 않냐? 그런것은 모르는 이야기여요.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직접 하나님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문장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변화된 상태에 관심이 대단해요. 우리도 어떻게 변할까, 몇살 짜리로 변할까, 늙어서 부활해버리면 평생 늙은대로 있을 것인데, 갑갑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달리 이야기해요. 예수님께서 서른 살에 죽었는데 인생 서른이 아니냐? 그러니까 부활해서 다 예수님 닮는다고 했으니까, 예수님 닮는다는 말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 그 영광의 참예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 몇 살 때로 살 것인가 그런말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을 모르고 머리되신 예수를 안붙들면은 완전히 귀신 붙는 식으로 묘하게 되어버려요. 항상 그리스도만 알면 됩니다. 남어지는 몰라도 되어요. 부활해도 예수님은 유대이었는데 인종 차별이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 나라는 예수님을 한복 입혀버리거든요. 말하자면 우리 나라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일단은 유대인의 예수님일 뿐이어요. 그러니까 유대인을 빼놓고 종교적으로 막 우리에게 붙일려고 그래요. 그건 종교 철학이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아니어요. 우리는 유대인의 일원으로 오신 그분,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알아요.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거든요. 인제 음악을 북치고 노래부를 것인가? 우리 나라 고전 가락으로. 그런 것은 잘 몰라요. 예수님이 유대인의 일원으로 오신 것은 사실이나 음악이라는 것은 변하거든요. 그러니까 옛날 식으로 부르면 경건하고 지금 식으로 부르면 경건치 않고 그런 것은 아니어요. 현대인은 현대의 음악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경건성을 담을 수 있는 특성들은 현대인들이어도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요새 누가 부른 것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부르는 것, 거기다 찬송가를 넣어서 불러보십시오. 그러면은 이건 도저히 경건성을 담을 수가 없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데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되는 것이지 한국식으로 북치고 노래 부르면 경건성이 없고 피아노를 치고하면 경건성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니어요. 그러니까 아프리카에 가서 피아노 잔주로 노래합시다 하면 박자가 잘 안맞을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까지 서양 전통에 매여서 경건성의 틀을 만들어내면 안되어요. 그건 그 시대 그때 그때 분별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보면 톱으로 켜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목사이면서 찬송가 테이프가 별로 없어요. 제가 찬송가를 불러도 몇 개 안부르지요. 성경에 있는 내용을 담기는 너무 빈약하게 되어 있어요. 가령 오늘 요한복음 서론이나 요한의 증거를 보면 너무 큰디 여기 부르는 찬송은 아주 그릇이 적어가지고 담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가 성경을 잘 알고 찬송을 잘 아는 사람이 다시 썼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떤 의미로 찬송을 제일 많이 불러야 될 사람이 몇 곡 안 불러요. 인제 내게 톱으로 켠 찬송이 있는데 들어보면요 딴따라들처럼 경박하지는 않지마는 속이 예려요. 가을철에냐 들으면 찬송이 아니라 사람 버리겠드라고요. 톱으로 켜니가 맹인들이 연주하면 눈물나고 짠하지마는 찬송은 기쁨을 담아야 되는데, 우리는 찬송을 흑인연가처럼 불러야 좋은줄 알고 있거든요. 그 곳은 기쁨은 못담겠드라고요. 속이 타더라고요. 못쓰겠데요. 그러니까 그때 그때 분별해 내야 됩니다. 어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 교회도 인제 매주 성찬식을 하기로 결정이 된 모양인데 성찬식만 하면 교인들의 얼굴이 심각해지고 눈물이 글썽글썽해 갖고 그래서 어째서 밥먹으면서 우느냐고, 예수님이 내 살고 내 피를 먹고 마시라고 축제의 잔을 들어 주었는데 어째서 울고 있느냐고, 구약 때까지라도 하나님 상에서 먹는 것은 기쁨이지 휘장 밖에서 먹어도. 지금은 주의 면전에서 먹으면서 자꾸 울려고 그러느냐고 해도 교인들은 아직도 성찬식 그러면 눈물이 글썽글썽 해야 되는 줄 알아요. 물론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의 은혜를 누리니까 눈물 흘릴 수 있지마는 그것은 기쁨의 노래를 해야 되지 그냥 마음이 찡해갖고 울고 있으면은 그건 옳은 일이 아니어요. 성경을 복음적으로 다시 분별해야 될 것입니다. 다음 과정을 잘 읽어가지고 오십시오. 왜냐하면 그 과정이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써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려운 데가 별로 없습니다. 곤고할 때나 평안할 때나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고, 9장에서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지 말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1-5절은 자기 의를 주장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그들이 성벽이 하늘에 닿는 나라들을 얻었을 때 2절에 보면 누가 아낙 자손을 당하랴. 그런 사람들을 아낙 자손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렬한 불로 앞서 가셔서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인데, 4여호와께서 이처럼 적들을 쫓아내신 후에 너희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신 이유는 4절에 보면은 이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쫓아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면 인제 문제는 왜 둘 다 악한데 가나안 백성은 쫓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땅을 기업으로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 사실을 반복하고 있지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쫓아냈지 너희들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했느냐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맹세를 이룰려고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6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 삼으셨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상들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기 위해서 하신 것이지 너희들이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실은 가나안 백성이 악했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이 가나안 백성의 죄악이 가득차면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시기로 했는데 조상들 때는 아직 그 죄들이 가득차지를 안했어요. 이제 그 죄들이 가득찼다. 그러면 악하기는 똑같은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주셨느냐 그것은 너희들이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 대한 약속 때문에 그랬다. 처음부터 다 악한데 너희들에게 주었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진실함 때문에 그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제 이것이 모든 뒤엣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되겠지요. 6-21절입니다. 실재 내용은 24절까지 한 내용으로 단위를 잡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그냥 성경이 구분한대로 먼저 21절까지를 먼저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회상시켜서 기억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22-24절은 이제 호렙산에서 출발해서 가데스까지 거역한 그 역사를 짥막하게 회상시키는 것이지요. 6-21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내용적으로 쭉 언급한 것이고, 22-24절은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완악했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은 24절까지가 완악함을 회상시켜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문단의 주제되는 말은 항상 처음과 끝을 보면은, 처음에는 서론적인 요약이 있고, 끝에는 결론적인 요약이 있고, 그 가운데는 그런 것을 증거하는 설명들이 쭉 따라있거든요. 그런데 6절을 보면은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그 말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13절에서도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그런 말이 쭉 있지마는, 24절 제일 끝에 보면은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그렇게 해서 쭉 결론을 맺고 있지요. 그러니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그 말이 여기서 반복되는 말이고 주제되는 말이어요. 그것을 지금 회상시킬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역을 시작하고 끝맺는 말을 보면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7,24절 그랬는데,7절이나 6절 상관이 없습니다. 7절 끝에 보면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24절도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완악함이 어느 정도냐, 처음부터 끝까지 완악했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거역을 시작하고 끝맺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악했다. 그런 말이지요. 호렙산에서의 일을 요약한 말은 8절을 보니까 호렙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항상 첫 말이 머리되는 말인데 호렙산에서 일을 요약하는 말은 한 마디로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다. 그런 말이지요.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있었던 목적은 무엇인가? 9절을 보면은 그때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갔다11절을 보니까 곧 언약의 돌판들을 주셨다.끝나고 나니까. 그러니까 올라간 이유는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올라갔다. 모세를 속히 내려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을 보면은, 12절을 보니까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낸 내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비교를 해보라고 했는데, 출애굽기 32장7절과 비교해 보면은, 둘 다 언약체결의 말씀인데 어떻게 조금 다른지 봅시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그들이 내가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고, 여기서 한 가지 차이점은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에게 너의 백성이라고 했고, 신명기에서는 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이 차이가 나지요. 왜냐하면 출애굽기에서는 언약 체결에 있어서 모세가 대표로 있고, 이제 신명기는 언약 백성된 자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을 것인가 그점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라고 해요. 그런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호렙에서 이스라엘의 범죄의 특성은 이 문장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속히 내려가라 했는데, 내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의 범죄의 특징은 속히 범죄했는데, 어떤 상태에서 범죄했습니까? 모세가 언약의 두 돌판들을 받으러 간 현장에서 범죄했지요 그러니까 몇일 지나고난 뒤에 범죄한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속히 범죄했고, 언약체결의 현장에서 범죄했어요. 그러니까 의롭다할 것은 한 번도 기억할 것이 없습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보면은 여기 출애굽기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13절에 보니까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이 말은 출애굽기나 비슷할 것이어요. 그들을 멸하겠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강대한 나라를 만들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제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마는 출애굽기와 비교하면은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하면은, 실제적으로 이런 범죄가 있고 난 뒤로 모세가 레위지파를 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들을 3천명 정도 죽였어요. 범죄자를 심판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따라있어요. 이스라엘은 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강대한 나라를 만들겠다. 모세는 언약의 대표자로 신실했지마는 그에게 속한 백성들은 범죄했기 때문에 모세를 머리로한 새로운 백성을 만들겠다는 내용은 같은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은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칼을 들어서 범죄한 사람들을 심판한 내용이 따라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4장12절도 전염병으로 그들을 멸하고 해서 그런 구체적인 심판 사건이 따라 있어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렇게 멸하겠다는 말만 있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죽였는가는 나와있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신명기의 차이점입니다. 실재로 죽였다는 말이 안나와요. 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린 의미는 15절을 보면은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손에 있었느니라.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급속히 여호와의 명하신 도를 떠났기로 내가 내가 그 두 졸판을 내 두 손에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었노라.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모세가 두 돌판을 깨뜨린 의미는 언약이 깨뜨려진 것을 말합니다. 모세가 다시 올라가 엎드린 이유를 보면은 18절을 보면은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다. 여호와를 격노케 하여 크게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격노케 했기 때문에 올라갔다 그렇게 말하고 올라가서 한 일이 무엇이냐?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는데 그때 내가 여호와께 기도했고 내 말을 들으셨다. 또 아론을 위해서도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내 말을 들으셨다. 그리고 너희의 죄 곧 만든 금송아지를 불살라 티끌처럼 만들어 가지고 산에서 흘러 내리는 시내에 뿌렸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34장1,9절을 보면은 마치 여기 신명기 10장1절에 있는 것처럼 출애굽기에서는 이 범죄한 사실 뒤에 따라 나오는 것은 모세가 다시 올라간 것은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올라가요. 깨뜨려졌기 때문에 그 깨뜨려진 언약을 새롭게 할려고 올라가는 것이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분노했기 때문에 그 분노를 누그러뜨릴려고 올라간 것처럼 되어 있지요. 18절에 올갔다고 그랬지요. 40일 동안. 격노케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격노했느냐 백성과 아론을 다 죽일려고 했는데 내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기도하니까 들으셨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서 올라갔다기 보다도 하나님의 분노를 사그러뜨릴려고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어요. 그러나 출애굽기는 마치 신명기 10장1절처럼 언약 체결을 위해서 다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대상은 출애굽기에서는, 아론이 백성들을 방조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죄했다. 그렇게 아론의 대표권을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체결에 있어서 모세와 함께 모세가 올라가면은 그 다음에 누가 관계가 있느냐 하면 아론이 관계가 있는 것이 출애굽기에요. 왜냐하면 아론이 자기 백성의 대표로 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대표권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는 말하지 않고 19절을 보면 백성한테 분노했다. 내가 기도하니까 내 말을 들으셨다. 아론에게 분노했다. 아론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내 말씀을 들으셨다. 그렇게 개별개별 모세가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노하신 대상은 백성과 아론이고, 백성과 아론이 용서받은 까닭은 모세가 사이에 서서 기도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중보 기도의 내용을 보면은 출애굽기 32장 여기 참고구절하고 인제 이 본문하고 비교를 해보면 약간 차이점이 납니다. 여기 25절부터 보면은 어떻게 기도했느냐 하면은 그때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그러면 왜 지금 25절에 이 말을 하느냐 하면은 실은 24절까지 처음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범죄했었노라. 하는 것을 요약시켜버리고 그 범죄를 어떻게 돌이켰는가를 다시 25절에 하기 때문에 25절에서 40일 동안 다시 올라갔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말하는데 순서가 달라있다는 말이지요. 가령 출애굽기 같으면은, 호렙에서부터 가데스바네아까지 항상 범죄했다는 이 말은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호렙산데서 범죄한 현장적인 이야기만 하고 거기서 언약이 갱신된 것만 말하면 출액굽기에요. 언약의 주를 범죄했기 때문에 언약을 갱신하는 문제인데 신명기는 이제까지 쭉 용서했는데 언제까지 범죄했느냐? 호렙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범죄했어요. 그러면 이 범죄는 실은 첫판부터 시작된 것인데 용서를 어디다 배열하고 있느냐 하면은 가데스바네아에 다 오고난 뒤로 그 다음 내가 40일 동안 올라갔었는데 해서 광야 여행의 전 실태를 한 단락으로 마무리지어 놓고 40일 동안 굶었든 언약 갱신을 거기다 붙어 두고 있어요. 그러니가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용서했느니라. 그 용서의 갱신을 호렙산 두 번째 금식에다가 붙이고 있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적인 특징이겠이요. 이것은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 배열된 것이 아니라 신명기적인 강조점을 따라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했지 않냐 그런데 그 용서는 실은 호렙산에 내려진 첫판부터 범죄했을 때 첫판부터 용서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호렙에서 너희들이 범죄해서 내가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성질내서 너희들을 다 죽일려고 했는데 내가 기도하니까 용서받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두 번이냐. 호렙에서부터 가데스바네아까지 쭉 그랬지 않냐 그리고 나서 내가 호렙에 40일을 올라갔었는데 언약 갱신을 광야 여행을 끝내는 지점에 다시 반복시켜서 신명기적인 특성을 두고 있다 그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말을 어디다 붙이느냐에 따라 달라버러요. 제가 그전에 그런 우수운 비유를 들었지요. 요새 돈이 하도 쓸 것이 없어요. 그러면 괜히 아내가 의심받지요. 살림을 잘못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착 계산을 합니다. 콩나물이 얼마나 올랐고, 무엇은 얼마나 올랐고, 그리고 요새는 천원이 돈이 아닙디다. 전부 2천원 이상씩 팔려고 그러고, 그 말을 반복하니까 남편이 듣고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왜냐하면은 전부 올랐다니까 이하동문이라 알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해보았자 계산을 직접할 것도 아니고 그만하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판에 옷값도 올랐데요. 하고 살짝 붙여 넣으면은 실은 그것이 제일 돈이 많이 들었거든. 콩나물은 비교가 안되지. 그런데 권투 쨉처럼 막 먹여놓고는 그 다음 인제 정신이 멍할 때 카운트 펀치를 날리는 것입니다. 옷도 비싸서 못사입겠데요. 하고 말을 안해도 말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 말을 처음에 했는가 나중에 했는가에 따라서 그 상대방이 이해하는데 분위기가 달라지지요. 계산하면 똑같은 것인데, 그러나 어디다 이 말을 넣었느냐에 따라서 어떤 의도로 이 보고를 했는가 그냥 짐작을 하지요. 그러면 조금 정신이 들면 남편이 어째서 옷값을 제일 먼저 말하지 않고 잔돈을 먼저 말했는가 그러면 아내가 할 말이 없겠지요. 자기 의도가 드러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비근한 우리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디다 그 말을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목표가 달라요. 그것을 이론적으로 풀면 똑같은 말이지마는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어디다 끼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사십일 동안 올라간 것을 언약 갱신, 처음에 언약의 법을 갖고 왔는데 내려오기 전부터 범죄하니까 다시 올라가서 받아왔어요. 그러면 깨진 언약을 갱신한 것만 강조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제까지 쭉 용서했지 않냐 거기다가 강조를 둘려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처음부터 목이 곧았다. 그리고 제일 끝에도 내가 너희들을 안 날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이 한번도 정신이 총총한 적이 없다. 결론이 쭉 그래요. 그리고 인제 설명하기를 너희들이 그렇게 범죄했지 않냐 그 범죄는 하나님을 심히 분노케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신명기적인 문맥이지요. 그래서 다 죽일려고 했는데 내가 기도하니까 살았다. 그러면 인제 글로 말을 끝내야 될 것 같은데 덜 끝냈어요. 그리고 나서 이런 일이 한 두 번 있었냐 호렙에서부터 여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들이 그런 일을 안한 적이 없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용서하신 언약갱신을 광야 40년을 끝내는 시점에다 붙여서 설명한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명기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런말입니다. 어째 우리들이 사람이 말하면 그 말의 뉴앙스를 그냥 잡으면서 성경을 읽을 때는 교리적으로만 읽으려 하고 하나님의 표현방식을 무시하려고 하느냐 그말이어요. 표현방식을 조금만 살펴 보면 그 특성을 그냥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언약 갱신은 너희들을 이제까지 용서하시는 언약갱신이어요. 거기다 강조를 두고 있어요.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내어 시내에 뿌렸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흘러 내리는 시내에 뿌렸니라. 21절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출애굽기는 시내에 뿌렸다 하고 그 물을 백성에게 마시게 했지요.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 속한 자는 칼을 들어라. 그래갖고 레위지파가 진 이편부터 저편까지 지나가면서 3천명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그 금송아지를 가루내어 시내에 뿌렸다는 말도 신명기의 것과 출애굽기의 것이 강조가 다르다. 여기 신명기에서 하고 있는 말은 그들을 정결케 했다는 것이 강조에요. 그 금송아지를 불태워서 갈아서 물에 씨는 것처럼 떠내려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정결하게 되었지요. 정결법이 그들을 용서했다고 백성도 용서하고 아론도 용서했다는 것처럼 여기서는 그들의 죄, 너희들의 죄, 너희들이 만든 송아지를 흘려 보내버렸다. 그래서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정결케 했다는 것이 신명기의 강조점이어요. 지금 용서가 강조점이지요. 너희들은 완악해도 나는 너희를 용서했다. 너희들이 완악하니까 벌받아라. 그러면 이 핵심이 안맞아들어가지요. 용서를 이야기 할 때는 매를 때려도 너 내가 그전에 잘못했을 때 매를 열대나 때렸지야 그러면 네가 죄를 짓고 혼났지야 그런 말이어요. 그러나 똑같은 말도 너 그때 범죄했을 때 열대 밖에 안때렸지야? 했을 때는 더 때를 것인데 봐주었다 그말이어요. 그러면 매때린 개수는 똑같지만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는 벌주었다는 말이고 하나는 너 혼날 것인데 내가 너를 용서했다. 분위기가 확 다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는 그들이 범죄하니까 그것을 불살라서 가루를 내어 백성들이 전부 마시게 했어요. 그 성소의 티끌을 마시는면은 민수기 5장에 음행의 의심이 있는 여자가 심판받는 방법이 티끌을 그릇에 해가지고 그 저주의 물을 빨고 그 물을 마시면은 그 물이 범죄한 자의 저주가 되어 배나 덥적다리가 썩으리라고 했지요. 마신다는 말은 자기 책임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런데 물로 씻어서 없애버렸다. 바람에 날려 없애버렸다. 등 뒤로 던져버렸다. 하는 말은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게 해서 정결케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신명기에서는 용서했다는 것이 핵심이어요. 그런 말은 열와기상하23장12절이나 또 출애굽기 32장20절을 비교해 보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23장12절을 보면은 알 수가 있지요. 그때가 요시아 임금 때인데 종교개혁을 하면서 말하자면 그 우상들을 빠아서 기드론 시내에 떠내려 보냈어요. 그것은 대단한 정결 의식이어요. 어떠튼 신명기는 용서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벌받았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그 죄를 멀리 떠나서 정결케 했다. 물로 살라서 가루를 내어 멀리 보내서 정결케 했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2장에 있는 말은 벌받았다는 말이어요. 그 죄를 그들이 책임졌다. 그러니까 금송아지를 가루낸 물을 마시고 이어서 레위지파가 칼을 들고 범죄자를 3천 명을 죽여버렸지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22-24절까지는 호렙산 이후 가데스까지의 거역을 회상합니다. 여기 6-22절은 첫 범죄를 쭉 언급하고 있지요? 첫 범죄와 첫 용서를 언급하고 있고, 22-24절은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었느냐? 호렙산에서 가데스까지 그렇게 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데스 뿐만 아니라 가데스를 지나서 여기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얻으라그런데 너희들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거역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이스라엘에 실패는 일단 가데스 바네아까지 끝났지요. 왜냐하면 거기서 옛 세대가 죽음으로 심판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순종에 역사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끝나요. 그러니까 거기서 마무리를 지은 것입니다. 실은 그 이후로서 계속 용서했지마는 마무리는 거기서 지어진 것이어요.

그리고 나서 너희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하면은 25그 때에하니까 막 문장만 하면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또 40일을 금식한 것처럼 되어 있지요. 모세가 호렙에서 두 번 금식하고 기도했지 가데스 바네아에서 금식한 적은 없지요. 그런데 이 말은 그 때에 하면서 마치 그런 것처럼 붙여 놓았다 그런 말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은 신명기적인 특징을 살리느라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발했을 때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너희들이 계속 그랬지 않느냐? 거기다가 언약 갱신을 붙일려는 것이어요. 25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그런데 실은 여기서는 엎드린 적이 없다. 25절입니다. 거역한 언약 백성에 대한 언약 갱신이 25-10장11절까지 길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이렇게 장을 나누면은 이 내용이 안맞지요 그러면 이렇게 장을 나눈 것은 인쇄업자들을 통해서 성경이 기계로 인쇄될 그 무렵에 절과 장이 나누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감된 것이 아니라 그냥 참고사항으로 할 뿐입니다. 광야 거역의 역사를 일별한 후에 호렙산에서 있었던 언약갱신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범죄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봐주셨다는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신명기적인 의도 때문에 그렇다. 모세가 다시 40일 동안 여호와 앞에 엎드린 이유는? 18절에도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용서를 위해서 엎드렸다. 기도 내용을 보면은 알 수가 있지요. 25절에도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엎드렸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그런 방식으로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가령 출애굽기 32장1절을 보면은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온 것을 보고 범죄했지요? 왜냐하면 모세가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약에 신실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면은 여기에 나타난 기도를 보면은, 26-29절까지 기도의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면은,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소서. 그리고 두 번째는 조상들을 생각하사 용서하소서. 그렇게 되어 있고. 세 번째는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조롱을 생각하사 용서하소서. 그렇게 말하고 한번 더 붙이기를 29절에 이들은 주의 백성들이 아닙니까? 주의 백성되었다는 것이 앞과 뒤에 나타나 있지요. 그러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뒤로 돌아라 해놓고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14장에 나타난 기도를 보면은 이런 기도가 아니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힘이 없어 도중에 죽였다고 말할까 두려우니 용서하소서. 광야에서 인도하심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 민수기의 기도에요. 그러면 출애굽기의 기도는 이 똑같은 사실이 있으면서도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는 문제가 강조되어 있지 안해요. 우리가 한번 읽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어요. 출애굽기 32장1절을 보시면은 11절은 주의 백성이로소이다. 그런 말씀이 똑같이 나오는데, 가령 12절을 보면은 애굽 사람이 이르기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은 조상들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소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가 여기서는 어떻게 보면은 무엇을 강조하는 문제보다도 역사적인 순서에다 강조를 두어서 애굽에서 인도해서 주의 백성 삼으셨으니 용서하시고 그리고 이방인들이 조롱하니까 용서하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땅을 주시도록 용서하시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문맥이고, 신명기는 강조점이 주의 백성이 아닙니까? 제일 끝에도 주의 백성이 아닙니까. 가운데도 하고 있는 데 이방인들의 조롱과 조상들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해서 신명기는 주의 백성이로소이다. 하는데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모세의 간구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무엇이냐 하면은, 10장에 보니까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에 하나를 만들라.이것이 실은 응답이지요. 언약의 돌판을 받으러 다시 오라는 말인데 여기서 강조는 무엇이냐 하면은, 두 돌판은 출애굽기도 알겠는데, 출애굽기에 없는 말이 나와요. 문제는 출애굽기와 비교해서 신명기에서 새롭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그 돌판을 돌판을 받을 개짝을 하나 만들어 갖고 오라. 그것이 지금 신명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어요. 여기서 응답은 언약 갱신의 응답이지요. 올라오라. 두 돌판을 주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에서는 두 돌판은 모세가 올라갔을 때 만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집을 짓는 제도에서 이것이 나오지 집을 짓는 제도를 말했을 때 언약궤는 어떻게 만들고 떡상은 어떻게 만들라고 나와 있는데 신명기는 마치 그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올라올 때 궤짝 하나 만들어 갖고 와라. 그래요. 그전에는 들고 가다 손에서 던져버렸지마는 말하자면은 그 문서를 장롱에다 딱 간직하면은 인제는 완전히 보관된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여기서는 궤짝을 만들어 갖고 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어요. 그러니까 출애굽기하고 순서가 한참 바꿔져 있지요. 궤짝을 드디어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그러나 출애굽기는 이미 그런 궤짝을 하나님이 만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대사관, 거처를 만들기 때문에 그러니까 언약의 법을 쭉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거할 거처를 쭉 말씀하시고 그리고 내려오는데 이렇게 됐다. 그것이 출애굽기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두 번 째 궤짝을 만들어 갖고 올라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괄호처진 6-9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이냐? 궤짝은 무슨 용도입니까? 궤를 하나 만들어 갖고 오라. 2절에 보니까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궤에 넣으라. 그 언약의 법들을 보관하기 위한 궤짝이지요.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내가 쓴 것을 거기 넣으라.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넣었더니 5절에 지금까지 있느니라. 해서 이 궤짝의 효과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지요.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느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비하셨다는 언약갱신에다가 강조를 둘려는 것이어요. 그래서 그전에는 내려오는 판에 돌판이 깨뜨려졌지마는 하나님이 그 말씀을 다시 쓰시고 넣어 주었는데 내가 넣고 지금까지 그렇게 있었다. 해놓고는 괄호를 딱 써놓고는 그 궤짝이 얼만큼 하나님의 자바하심의 표상이냐, 하는 문제를 6-9절까지 괄호 속에서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또 거기서 발행하여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에서 발행하여 웃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었으며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하나님이 백성들을 인도했는데 아론이 죽었다. 아론이 죽고 나니까 그 아들 엘리아살이 다시 제사장의 직임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많은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구별해서 언약 궤를 메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했는데 오늘날까지 쭉 축복해 왔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셨다.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쭉 강조하고 있지요 어디다 그 자비하심을 연결시킬 수 있습니까? 올라오라. 내가 총회의 날에 처음에 했던 말을 써 줄테니까 돌판을 그 궤짝에 넣어라. 내가 그 말을 궤짝에 넣어주었는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지 않느냐 그것도 큰 은혜인데, , 그동안 누구누구 범죄했어요. 백성이 범죄하면 인도를 안해버려야 될 것이어요. 아론이 범죄하면 백성이 죽어야 되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백성을 이리저리 인도했습니다. 아론이 죽었습니다. 아론이 죽고 나니까 죽었으면 끝나버리면 안되지요. 그래서 그 아들이 대신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대대로 은혜가 내려가니까 얼만큼 자비하십니까? 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광야 40년을 인도했던 그런 이야기보다도 냇물이 많은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얼만큼 좋은 곳으로 인도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아론이 죽은 후로 엘르앗살을 제사장으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또 레위 지파를 뽑아가지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이 궤를 메라. 그리고 내 앞에서 섬겨라. 레위지팍 언약궤를 메고 여호와를 섬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이 축복했다. 그들은 여호와가 기업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론과 그 계통에 얼만큼 복을 주셨는지, 법궤를 메고 법궤가 그들 중에 있으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복이 되어서 레위지파가 언약궤를 메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있는 것이어요. 만일에 레위 지파가 언약궤를 메지 못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 그들은 왜 그러는가? 여호와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 보주셨지 않느냐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는데 앞장 섰든 아론과 그 계통들에게, 그런 말이지요. 그리고 언약의 돌판을 써서 언약의 궤짝에 넣었는데 이 궤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실은 하나님이 이 언약의 말씀에 진실해서 이 언약 언약궤를 메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요. 언약궤를 메면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있어요. 언약궤가 깨뜨려지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아론은 죽었지마는 그의 아들이 그의 직무를 대신했고 또 그중에 레위 지파를 구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했지 않냐 여호와의 궤를 메고. 언제까지, 지금까지. 깨뜨려지지 않고. 무엇 때문에? 모세가 기도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했다. 지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하려는 내용이지요. 신명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신명기적인 맥락에서 강론할려니까 여려워요. 사건만 설명하면 쉬운데. 그래서 6-9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언약의 두 말씀을 궤짝에 넣도록 해서 그것이 언약궤가 되도록 했던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민수기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를 않지요. 아론이 죽었는데 어디서 죽었느냐 하나님의 백성을 이리 저리 인도하면서 죽었다고 하지 않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죽었다. 그리고 내려왔는데 엘르앗살이 그 아버지의 옷을 입고 내려왔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사장은 죽었는데 그 주검은 감추어져 있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그 영광스러운 옷을 내려왔더라. 그렇게 말하면 민수기고 신명기는 하나님이 이리 저리 인도하셨는데 도중에 아론이 죽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엘르앗살을 아론의 직무를 대신하게 했다. 그것 뿐이냐? 레위 지파를 구별해 가지고 언약궤를 메도록 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언약의 말씀을 레위 지파가 메고 있고 축복하고 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이 기업인데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 되었지 않냐? 특별 소유를 받았지 않느냐. 그렇게 해서 언약궤가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던 일을 강조할려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런 말입니다. 40일 후에 여호와께서 주신 명령 보면은 10절에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 산에 유하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백성 앞서 진행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여기서도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용서했고 인도했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지요. 괄호를 보면 계속해서 인도했다는 말을 강조했는데 여기서도 용서했고 인도했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용서했다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탁월하게 보이셨다. 여호와로, 모세를 하나님께서 바위 틈에 감추시고 자기 등을 보도록 하시고 여호와란 이름을 세 번 반복했고 그것 때문에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 언약 갱신에 대한 이야기에요. 언약의 주를 새롭게 보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했을 때까지라도 그 가나안 땅을 나라의 경계적으로 언급을 해요. 항상 법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용서했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약속하신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성취자로. 언약 성취도 가나안 땅의 지도를 그리심이 그 경계적으로 언급을 해요. 그러나 신명기는 경계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으로 이야기를 해요. 특징이 다르다 그런 말입니다. 그런 특징들을 염두에 두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비교해 보라고 했는데 비교해 보시면 시내산에서 두 번 기도했을 때 똑같은 줄 알았는데 내용은 다르구나. 우리들이 사 복음서를 r상론하면서 비교해 보았습니다 마는 모세 오경도 비교해 보면은 각 책의 특징을 따라 잘리 되어 있어요.

9장11절에서 이스라엘의 완악과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언약 갱신 사건을 통해서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1장까지에서는 언약의 땅에서 복과 저주의 말씀에 맹세하여 언약 체결식을 발휘하심으로 순종에 대한 말씀을 끝맺습니다. 11장까지는 순종이 핵심이라고 그랬지요. 그리고 12장부터는 구체적인 규례들을 인제 말씀하실 것이어요. 그래서 출애굽기는 시내산 사건 이후에다가 그들의 삶의 규칙, 누가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이 되며 재산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인자를 제거할 것인가? 그런 삶의 법적인 문제들을 시내산 이후에다가 배열을 하고 신명기는 시내산 이후에다가 무엇을 배열하고 있느냐 하면 많은 용서와 그리고 순종에 대한 문제를 쭉 언급하고 있다. 순종해라. 너희들이 그렇게 범죄해도 하나님이 용서했지 않냐. 순종해라. 너희들이 약할 때 강할 때나 순종해라. 하나님이 얼만큼 강하신 분이시냐? 너희들은 절대로 이방 신을 섬기지 말고 부셔버려라. 그리고 나만 섬겨라. 내 이름으로 맹세해라. 그런 순종에 대한 문제가 11장까지 쭉 강조된다. 구체적인 규례는 12장부터 나온 것이 신명기다 그런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조직하는 법적인 관계를, 신명기는 언약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풍성하심을 강조한다. 신명기 4, 5장에서는 언약 체결을 했었지요. 그리고 ---실은 똑같은 언약체결을 말하고 있는데도 신명기 4, 5장에서는 많은 용서를 했다는데 강조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 삼으셨다는 언약 체결식이 강조고, 여기 9,10장에서는 그 언약 체결을 똑같은 언약체결로 말하는 데도 너희들은 완약했지마는 하나님은 얼만큼 자비하셨느냐? 그 문제를 강조하는 언약 내용이다 그런 말입니다. 4, 5장에도 시내산 장면이 나오고 5장에서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 선포가 있지요. 십계명 선포가 신명기 5장에 있지 안해요. 똑같은 호렙산 사건이어요. 그래도 4, 5장에는 출애굽기 처럼 법적인 문제가 더 강조되었지요. 그것도 물론 신명기의 특징이 있지마는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제보다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그의 언약의 신실하심에다가 강조를 두었다. 두 번찌 설교에서는 그런다 그 말입니다. 두 번째 단락까지는 구조를 두고 설명했던 것이고, 이제 구체적인 분문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나안 족과 이스라엘이 한 가지로 악하다. 그러나 전자는 가나안 족은 멸하고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유는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맹세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로 여호와의 공도를 행하게 히시겠다고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의 은혜와 그 신실하심을 의뢰해야 된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출애굽 때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항상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는데 호렙 산에서 언약 체결하는 현장에서부터 그들의 대표인 아론이나 백성이 한 가지로 속히 여호와를 거역했다. 그들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고 여호와를 분노케 했다. 그러나 모세가 중보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고 그들을 죄로부터 정결케 했다. 모세는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명하지 말라고 중보기도했는데 조상들과의 언약과 애굽 백성들의 비방을 들어 호소했다. 여호와의 크신 권능의 영광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여호와를 대신한 모세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쓰신 말을 다시 써주시고 그것을 궤에 넣어 이제까지 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거역에도 불구하고 깨뜨려지지 않았다. 아론이 죽었지만 그 아들이 이어서 제사장 직임을 행하게 하시고 백성을 물이 풍성한 땅으로 인도 하셨다.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언약궤를 메게 하시고 여호와 앞에서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를 지금까지 하셨다. 레위 지파의 기업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여호와이시다. 한번도 깨뜨려지지 않고 언약궤가 그들 중에 있었다. 그렇게 축복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앞서 인도하게 하셨다. 조상들에게 맹세한 대로 이스라엘을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신 여호와는 영원히 신실하시다. 하는 사실은 증거한다 그런 말입니다. 이 신실하심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언약을 갱신하시고 교회를 하늘에 속한 기업으로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온전케 나타내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그 무엇으로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도 조상들로부터 택하심이나 입었지마는 우리는 그 밖에 있었고 우리는 이스라엘 밖에 있어서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었다고 에베소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구약 문맥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자랑할 것이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도 자랑할 것이 있어요.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은 그것이 그들의 의로움이니까 자랑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 자랑하지 말라는 그 말은 너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니지마는 내가 너희들을 복주었지 않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할려고 그런 것이지 너희들은 율법을 지켜도 이방이나 똑같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들이 이처럼 가나안 땅의 복을 받은 것은 너희들의 공로가 아니다. 내가 신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신실해서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죄인이다. 너희들은 받을 공로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자랑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은 약속하신 모든 복을 주시거든요. 그들은 율법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이방인과는 달라요. 장자에요. 그런 의미로는 율법이 그들의 자랑이어요. 공로적인 자랑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약 성경을 풀 때 인간이 자기 공로로 천국갈 것이냐, 하나님 공로로 천국갈 것이냐?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말라고 그런 말로 풀고 있어요. 소위 율법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성경에서 율법으로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로 안에서 자랑하고 이전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 이전 것의 자랑은 다 휘장 밖의 자랑이고 죽음 안에 자랑이 아니냐? 이제는 예수 안에 새로움으로 자랑해라. 이것으로 기뻐해라. 어렸을 때로 살지 말고 큰 아들로 살아라. 그것을 대비하는 것이지 인간의 공로냐 하나님의 공로냐, 그런 대비구조가 아니어요. 구약 자체에서부터 처음부터 그 말은 너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은 죽어 싼데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한 그 신실함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너희들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안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인간 철학으로 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고 자랑이어요. 그들은 이 율법을 지키면 가나안 땅의 이 모든 복을 누리고 그들은 장자에요.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특권이어요. 우리들은 그 밖에 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아들 안에서 교회를 불렀을 때는 어렸을 때는 자랑해서는 안된다. 인제는. 다 큰 아들로 자랑해라. 모세를 자랑하면은 어렸을 때로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면은 이제는 하늘의 것으로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모세 안에서 거뻐하지 말아라. 이것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로마서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또 갈라디아서의 말도 그런 것이고. 그런데 우리들은 구약 문맥을 빼버리고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존재론적인 능력을 대비시켜서 푸니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마는 하나님은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풀어버려서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은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었으니 너희들이 내게 속한 백성으로 거룩하라고 했을 때 그들은 모세의 법을 따라 살면은 거룩이어요. 어린 아이 앞에 내가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네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라. 사람 좀 되어라까 이 사람되라는 말도 공자 맹사 읽을 필요가 없어요. 숙제 잘 하고 발 잘 닦고 세수 잘하고 그리고 형제들과 싸우지 말고 그것이 내가 네 아버지가 되었으니 너는 내 아들답게 살아라 했을 때 어린 아이에게 그 말을 했을 때는 유명한 공자나 맹자처럼 되라는 말이 아니라 너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대로 살아라. 그 말이 그말이어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이유가 이제는 하나님이 모세 제도 안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빛 가운데 임하시거든요. 얼굴을 대면하며 살게 임하셨어요. 그래놓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했을 때는 사정이 전혀 달라요. 내가 자꾸 약혼과 결혼의 비유를 들지마는 내가 당신의 약혼자가 되었으니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도 나를 사랑해라. 했을 때는 약혼자로 사랑하면 돼요. 그 선을 넘으면 범죄에요.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내가 당신의 남편이 됐고 당신도 내 아내가 되었으니 당신이 나를 사랑해라. 했을 때는 이제는 부부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이어요. 윤리의 상태가 달라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처럼 되라는 절대적인 윤리를 성경은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시면서 역사를 경영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인데 누가 내 기준에 도달하겠느뇨 너희들은 사람이라 틀렸다. 더구나 죄인이라 상관이 있냐 감옥에 간 사람이 얌전해 보았자 감옥에 있는 사람으로 얌전함이지 그것은 무슨 공로될 것이 있냐 그것을 깨닫게 할려고 하나님이 2천년 동안 율법을 주어 가지고 너희들은 법을 범하면 죽어, 죽는다고 겁을 주었다가 그래도 이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거든요. 법이 별로 쎄지 안해요. 왜냐하면은 솔로몬처럼 아내를 천명이나 얻고도 하나님 내가 왔나이다. 기도하면은 지혜를 주시고, 더구나 요즘 부흥사들의 말대로 일천 번제를 드리면 세상에 부자가 되어버리지요. 돈 놓고 돈 먹기지요. 이런 식으로 꺼꿀로 풀어버리거든요. 말하자면은. 그런데 지금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하니까 아이고 나는 죽었구나. 그러고 주여, 두 손 들고 나옵니다. 그러면 복되도다. 천국을 주마. 이렇게 푼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풀지 말라 그말이어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창조의 처음부터 함께 하셨어요.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지 않은 적이 없어요. 비록 이방이 하나님을 대항해도 모든 지혜와 권능으로 함께 계셔서 선한 결실로 그들이 생명을 보호하셨어요. 단지 그들이 우상으로 산 것 뿐이지요. 안 계신 적이 없었어요. 이스라엘 백성과는 특별히 함께 계서서 집을 짓고 초대해서 거기 함께 계셨어요. 그런 특권을 가진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도 휘장 밖에 두고 있었지 않냐 그리고 땅에 백성으로 있었지 않냐 그런데 이제는 아니어요. 하늘 보좌로 함께 하마. 함께하신다 그말이지요.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나타난 복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복음이어요. 그래서 둘 다 악한데 왜 가나안 백성은 멸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복을 주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맹세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고 하나님이 의로운 도를 행하게 할려고 그런 것입니다. 나라를 세울려고 그런 것이어요.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말고 여호와의 은혜와 그 신실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음을 잊지 말고 출애굽에서 모압 평지까지 거역했던 것을 항상 잊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이 신실하심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언약을 갱신하고 교회를 하늘의에 속한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그 언약관계가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언약 밖에 있었는데 우리들은 용서를 받고 이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실하신 그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그 신실하심을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가령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면은 어린 아들에게 필요한 만큼 아버지 노릇을 합니다. 아버지 노릇을 완전하게 한 것이 아니어요. 가짜로 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만큼 하는 것이 어린 아이였을 때 아버지 노릇이어요. 그러나 컸으면은 이제는 아버지와 같은 인격으로 아들이 컸기 때문에 이제는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아버지 노릇을 해주면은 이 아버지 노릇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 노릇을 해줄 길이 없어요. 그러나 중학교 때 아버지 노릇했던 것과 고등학교 때 아버지 노릇했던과 대학교 때 아버지 노릇을 했던 것은 달라요. 거기서는 완전한 아버지 노릇에 부족함이 없지마는 말하자면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 만큼 완전이지 아버지 자신으로서 완전은 아직은 아니어요. 그것은 다 컸을 때 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구약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갱신한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신실하심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신실하심이고 이제 우리의 신실하심은 모세가 엎드려 기도하고 언약의 법궤를 메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제 우리를 위한 중보자는 모세가 아니라 언약의 체결자이신 아들, 그분이 우리의 대표자에요. 모세는 언약의 종으로서 언약 중보자이지마는 우리는 아들이 그 중보자에요. 그는 제자들과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언약의 머리세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계신 분이 그분이시지요. 그분이 우리 언약을 갱신했고 모세는 40일을 굶어서 언약을 갱신했지마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심으로 언약을 갱신했어요. 그런 큰 용서가 없어요. 우리가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에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대표를 하늘 보좌에 앉게하심으로 우리를 그 영광으로 인도하셨어요. 그러니까 구약 때 인도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어요. 그 신실하심은 영원히 보존되는데 어떻게 보존되는가? 원수를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안해요. 의인을 위해서 죽은 자가 많지 않고. 선을 위해서 죽는 자가 혹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 그렇게 로마서 5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비하심이어요. 그리고 그분이 보좌에 오르심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우리에게 선물하셨고 지금도 그분은 그런 권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 교회가 하늘에 속한 기업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출애굽부터 광야까지 범죄한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가 아니라 창조의 처음부터 그렇게 해서 아담이 범죄해서 온 인류가 죄 아래 있었던 이런 모든 죄를 그 이후로도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지마는 아들의 부활을 통해서 끝내버리셨어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에 대한 문제를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끝내버리셨어요. 그것이 아들에게 나타난 언약의 신실하심이어요. 그리고 구약 때는 레위지파가 언약의 법궤를 메고 축복했지마는 여러분들은 다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복의 근원이 되어서 예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거든요. 가나안 땅이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영원한 우리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 유업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축복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예배석상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는 소위 사도적인 본문으로 삼위 하나님이로 축복하는데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도록 교회로부터 위탁받은 사람은 목사에요. 그러나 여러분 개인이 예수 이름으로 축복을 못한 것은 아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목사님만 하지 누가 하겠느냐 해갖고는 절대로 그 말을 안써요. 우리는 사도가 아니지마는 사도적 복음을 따라 살면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이름올 모든 사람을 축복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축복하지 못하면은 교회가 세상에 있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어요. 그런데 성경적인 것을 교회정치적인 의미로 변질시켜가지고 목사만 그 일을 할 수 있지 누가 할 수 있냐 그리고 인제 전도사가 할 때는 손을 내리고 말로는 삼위 이름을 불러요. 손을 들으면 걸리니까 안들어요. 손을 안들어도 좋아요. 손을 든 것은 구약 때 기도하고 축복하는 방식이어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면은 기도하는 방식이고, 누가에게 손을 들고 축복하는 것은 복주는 방식이어요. 그건 구약의 표상일 뿐 신약에서는 신을 들고 기도하든 손을 내리고 기도하든지 예수님처럼 무릎을 굻고 기도하든지 엘리야처럼 얼굴을 무릎에 넣고 기도하든지 그런 기도 모양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단지 경건의 모양은 갖추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성경의 언어를 천주교처럼 예배 의식으로 바꾸어 놓으니까 축도는 목사만 하는 것, 손들고 하는 것은 목사만 하니까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는 안간다. 복도 없는 교회를 누가 가냐? 여러분이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전도하고 기도하면 여러분이 하늘의 복을 직접 선물하고 있는 것이어요. 단지 교회가 모였을 때는 목사가 해요. 목사가 위탁을 받았으니까. 그러니가 여러분이 편지할 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들 그것이 이단이 될 것도 없고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묘하게 전도사가 목사를 대신하면 설교도 잘 하거든요. 아예 유럽 같은 데를 가면 목사가 적어논 설교를 읽지 전도사가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것도 천주교 비슷해서 그래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고 설교하지요. 단지 교회를 가르치도록 위탁한 것은 목사일 뿐이지 그 외에는 아무도 못한다는 그런 천주교적인 이야기가 아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누구에게 위임을 받았으면은 그 자리에서는 여러분이 깨달은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큰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을 아는 시대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언어를 교회 의식적인 언어로 변질시키지 말라 그런 말이어요.

가령 어머니가 어디를 가면서 큰 딸에서 네가 밥해서 동생들에게 먹이라고 하면은 그때는 미원을 치든 말든 제 마음이어요. 말하자면은. 물론 어린 아이에게 그런 것을 맡기지 않겠지요. 할만 한 딸에게 맡기고 가겠지요. 그래도 이 딸이 밥은 엄마 밖에 못하는데, 그전에 어머니가 다 했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오시도록 가만히 앉아서 굶자. 누가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하겠느뇨 하고 있으면은 그건 정신나간 것이어요. 그러나 구약 때는 그렇게 하면 안되어요. 하나님이 직무를 주신자가 있어서 그 사람이 없으면 못하니까. 그러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모든 장벽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 여러분이 신령한 제사장이 되었다. 신령한 선지자고. 신령하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제사장, 그리스도 안에 선지자,. 그리스도 안에 왕이고. 여러분이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언어로 변질시키지 말아라. 그말이어요. 지금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결된 것입니다. 구약의 신실하심과는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어요. 여러분이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이 택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래도 잘했다는 장자적인 특권이 있지마는 우리는 그도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자랑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더 자랑할 것이 없어요. 한 마디로 하자면. 그러니까 자랑하는 자는 예수로 자랑하고 그 무엇으로도 자랑하지를 말아라. 이것이 고린도서에서 하는 말이어요. 우리가 부자가 되었던 문벌이 좋든 그 무엇으로도 자랑하지를 말아라.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지 다른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늘의 구원을 주셨는데 너희들은 무엇이길래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 자랑할려고 그러는가 그것은 예수의 낮아짐과 죽으심과는 정 반대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냐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9장부터 10장11절까지가 그 배열하는 구조 때문에 조금 어려웠습니다. 9장14절이요, 하나님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모세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어요. 오히려 말 안듣는 백성은 없어지고 바꾸어버리면 모세는 좋아요. 또 그렇게함으로 하나님이 신실히 성취하심도 불변해요. 대표자가 안바뀌니까. 그 밑에 회원이 바뀐다고 해도 하나님이 신실치 않은 것은 아니어요. 단지 문제는 중보다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있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된다 할지라도 모세는 안낮아져요. 단지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 삼으셨는데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기업이니까 멸망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멸망시키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세 자신하고는 별 상관이 없어요. 더구나 하나님이 네가 인도해낸 내 백성, 그랬거든요. 그래서 모세가 기도한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여러번 한꺼번에 읽어두어야 되어요. 그래야 그 장면들을 비교해보면 차이점들을 알 수가 있고 그 차이점들이 강조점이어요. 사복음서도 그렇게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구약 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강해 12,13  (0) 2024.07.27
신명기 강해 10:12-11:  (0) 2024.07.21
신명기 강해 8  (0) 2024.07.06
신명기 강해 7  (0) 2024.06.29
신명기 강해 5  (0) 2024.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