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구속사

신명기 강해 8

찬미예수님 2024. 7. 6. 14:22

신명기 강해

신명기 8

 

 언약체결이 주제인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서로 비교해 볼 때 각각의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신 것은 출애굽기와 신명기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 나라로 삼으신 언약이고, 신명기는 가나안을 눈앞에 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이 얻을 땅에서 행할 언약의 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차이점입니다. 출애굽기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예 대답했지요. 그렇게 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할 집을 짓도록했어요. 그것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하나님 백성삼으신 법적인 관계들로 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것이 아니라, 이제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내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줄 것이니까 너희들 가서 내 말을 잘 듣고 살아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면서 그들이 지킬 삶의 법을 주고 있는 것이 신명기어요. 그렇게 차이가 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은 존재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여호와. 변화이 없이 여호와는 여호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그러지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관계하신 것은 자기 백성 삼으시는 때와 자기 백성에게 기업을 주신 때는 다르지요. 그러니까 그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 언약이 바꿔져야되겠지요. 그렇게 되어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이 나와도 출애굽기과 신명기는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령 그 전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가 나오면은 출애굽기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십계명 선포 다음에 바로 나와요. 그리고 거기 보면은 매정한 소리가 다 나옵니다. 혼자 종살이 왔는가. 나갈 때 혼자 나가거라. 만일에 혼자 왔는데 주인이 처,자식 얻어줬는가. 다 놔두고 나가거라. 그런 말만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법적인 신분들에 대한 이야기어요. 그런데 신명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종이 나갈 때 한 짐 지어 보내라. 배나 일했지 않냐. 풍성히 줘서 보내라. 그렇게하면 히브리 종도 결단코 종살이 안 할 것이어요. 그렇게 하면은. 그런 문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언약의 모법인 십계명을 친히 말씀하시고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있지요. 그 돌판에 기록하여 주신 후에, 이것은 둘 다 똑같습니다. 지금 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이 부분에서 출애굽기는 하나님 나라의 법적 관계와 하나님이 그들중에 거할 거처를 말씀하신 것이 출애굽기 구조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오직 여호와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순종의 규례를 11장까지 강조하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과 안식을 누리는 규례들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구조예요. 자 무슨 말이냐 하면은 출애굽기나 신명기나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것이 언약체결의 장면이거든요. 그럼 출애굽기는 어떻게 되어있느냐. 시내산에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나온 것은 이스라엘의 법적인 관계들이다. 하나님이 같이 거할 집을 지으라는 것이 제일 중요했지요. 많이 나오지요. 그리고 그 앞에 짤막하게 21장부터 23장까지 이런 저런 말이 나오는데 거기있는 규례들은 뭐냐하면은 주로 사람 함부로 죽이지 말라거나 재산 뺏지 말라거나. 이런 법적인 재산권이나 생존권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출애굽기가 말하는 항목들이어요. 그러니까 나라법에 대한 문제라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돌판에 말씀을 주셨다 해 놓고는 그 다음에 그들이 지킬 규례는 12장부터 쭉 많이 나오는데 그 앞에는 무슨 말이 들어있냐 하면은 그런 법적인 규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말좀 잘 들어라. 제발 내 말좀 잘 들어라.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복받아라. 이 순종에 대한 말이 죽 깔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냐.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특징 때문에 그런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그들중에 대사관을 세우고 거할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들도 그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함부로 살인한다거나 재산을 빼앗는다거나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되어요. 그런 문제들만 나와있어요. 나라 기본 법을 조직하고 있는 것인데,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돼요. 잘 들으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의 부요함을 누릴 것이어요. 그 부요함과 안식에 대한 규례들이 12장에 쭉 나오고 그 앞에는 내 말좀 제발 잘 들어라. 잘 듣고 복받아라. 자나 깨나 내 말만 들어라. 쉬운 말로 그런 말이 11장까지 쭉 반복해나온다 그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조항은 8, 9, 10장 이 부분을 공부할 판이지요. 그러면은 5장에서 십계명을 쭉 선언했지요. 그리고 6장에서 자 뭐라고 했습니다. 내 말좀 잘 들어라. 너희들은 내 이름으로 맹세하고 내 말을 들어라. 나다. 나 만 섬겨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6장이면은 7장에서는 하나님이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겠어요. 가나안 족속과 그 신들을 전부 죽여라. 그 이야기가 7장에 있겠지요. 그리고 이제 8장부터 우리가 공부할 차례라 그 말입니다. 자 조금 더 읽겠습니다. 6장부터 11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종에 대한 규례들을 주로 반복하는데, 6장은 여호와만 사랑하고 섬겨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섬겨라. 소히 그것이 나오지요. 그리고 7장에서는 여호와만 섬기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건 전부 죽여야 돼지요. 그러니까 가나안 족과 그 신들을 멸해라. 그것이 중심이고, 이제 8장에서는 무엇을 말하냐. 역경중에나 풍부할 때나 복을 주신 분은 여호와니까 낙심하거나 건방지지 말아라. 그 복을 누릴 때 낙심하거나 건방지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고. 그 다음 9장부터 1011절까지는 너희들이 잘나서 이 복을 준 것이 아니니까 너희들을 자랑하지 말고 나를 의지해라. 그렇게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것을 쭉 언급하고 있는 것이 1011절까지고. 이렇게 안 나눠도 됩니다. 그냥 1012절부터 11장까지는 전체적으로 다시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6장으로 돌아온 것처럼 나만 사랑하고 내 말을 잘들어라. 너희들 복받을거냐 저주 받을거냐. 그렇게 해서 다시 언약의 법을 말하면서도 복과 저주를 말하는 언약 체결식을 말하므로 끝을 맺어요. 그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면은 그리신산과 에발산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해라. 너희들 복을 받을래 저주를 받을래. 나만 섬겨라. 다시 언약의 법을 요약하므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러면 그들이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지킬 규례들은 무엇인가. 이 규례는 전부 하나님이 주신 풍성과 안식이 전부 새겨져 있어요. 그런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8장은 고난중에나 풍부할 때나 여호와를 기억해라. 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1절부터 10절까지는 고난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법을 잘 지켜라. 하는 문제가 되어있고. 11절부터 10절까지는 풍부할 때 여호와를 잊지 말라.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자 성경을 여러 번 읽어가지고 온 사람은 내가 문제를 읽을 때 눈으로 성경을 봐야 되지요. 여호와의 법을 행하면 주실 복은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항상 이 문장에 있는 복만 이야기를 해야지 다른 복을 끌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8장과 9장의 복이 다를 수 있어요. 똑같은 복이어도. 그러니까 여기있는 복만 이야기 하면 될 것이어요. 1절을 보면은 잘 지켜라. 그러면 번성하고 또 열조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얻으리라. 한마디로 언약의 땅을 주신다는 것과 번성한다는 것, 그것이 복이지요. 그러니까 이 복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언약의 복이라 그 말이지요.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줄 것이다. 언약의 복을 줄 것이다. 또 거기서 번성할 것이다. 그 땅에서 생명의 번성함. 신명기 주제들입니다. 한마디로 복의 주제들이지요. 40년 광야 생활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민수기 1433절과 비교해보면 아는데, 민수기 14장에서는 광야 40년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뒤로 돌아가 벌받아. 한 것이 민수기어요. 가나안 땅을 얻어라 하니까 원망하니까 뒤로 돌아. 너희들이 원망한 날수로 40년 간 돌다가 죽어라. 한 이야기가 심판이 민수기 주제어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광야 40년을 그렇게 이야기를 안 해요. 내가 40년을 괜히 고생을 시켰겠느냐. 너희들 복 주려고 그렇게 안 했냐. 너희들 복주려고. 너희들이 40년 동안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랬다. 내가 40년동안 만나를 먹였지 않냐. 신명기에서는 오히려 가나안 땅을 복주신 하나님, 누구입니까. 40년을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니까 너희들이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내 말을 잘 들으면 내가 가나안 땅을 안 주겠냐. 또 그 다음 두 번째 권면에서는 너희들 내가 너희를 40년동안 복주었고 내가 그 땅을 주었지 너희들이 돈 버는 재주로 복받았냐. 자랑하지 말아라. 지금 그 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민수기와 신명기는 똑같은 광야를 이야기 했을 때 까지라도 민수기는 민수기적인 문맥에서 이야기 하고 신명기는 신명기적인 흐름에서 이야기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읽어보면은, 2절 보십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해라. 너를 낮추며 너를 시험했다. 시련했다 그 말이지요. 벌줬다 안 하지요. 지금 여기서는. 민수기와 다릅니다.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고 내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셨다. 한참 굶었는데 아무 못 먹어본 만나를 먹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하시니라. 그리고 다시 한번 반복하지요. 40년 동안에 네가 옷이나 신이 떨어진 적이 있냐. 그 복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강조법이지요. 그러니까 40년 동안 복주었다는 말을 4절에서 한 번 반복해서 한 번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랬을 때 너희들이 배고프거나 굶은 적 있냐. 신이 떨어진 적이 없지않냐. 왜 그랬습니까. 너희들을 그렇게 낮추었다. 주리게 하셨다. 여기서 낮추었다는 것은 주리게 한 것이어요. 굶주린 겁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맛보지 못한 만나를 먹었지 않냐. 왜 그렇게 했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말로 사는 것 아니냐. 그걸 깨닫게 하려고 그랬지 않냐. 그 말을 하고 있지요. 민수기 1433절을 보면은 뒤로 돌아가 죽어. 그 말이 이 내용이어요. 그렇게 하려고 40, 너희들이 정탐한 하루를 1년을 삼아서 40년 동안 돌다 죽어라. 이 세대 사람은 한 명도 살 사람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빼놓고. 그것이 민수기 이야기였어요. 그러니까 40년을 이야기할 때도 그 문맥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가 되어있다. 시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기 보면은 시험하사 2절에 너를 낮추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심이라. 항상 그 문장에 설명되어있지 않으면 몰라요. 설명 된 것만 그 의미고 설명 안 되면 그 책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 정도 밖에 말 못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시험하는 내용은 그 마음을 알려 하려고 그랬는지, 그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뒤에서 설명하기를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했다. 그것이 마음을 알려는 것이어요. 항상 문법적으로 그 이야기를 읽고 나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해야 돼지, 그것을 해석하기 전에 건너 뛰면 절대로 안되요. 시험의 내용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내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했다. 그것이 마음을 알려는 것이어요. 시험은 인간의 기능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언약에 대한 신빙성 문제입니까. 이것은 제가 문제를 따로 낸 것이지요. 우리는 이 문제를 풀 때 네가 진짜냐 가짜냐 한 번 알아보자. 한번 고생을 해 봐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지.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 말인지, 안 그러면 네가 내게 신실한지 아니 하는지, 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하는지 하는 말은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인지, 네가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소히 네 마음을 알아 맞추는 과정인지. 여러분 어느 것이 맞을 것 같아요. 크게 이야기 해 보십시오. 가령, 여러분이 장가를 갔는데 그 남편이 아프던지 돈을 안 줬으면은 이제 그 남편이 생각하기를, 저 마누라가 진짜 마누라냐 가짜 마누라냐. 그것을 알아보는 과정이 될까요. 이 마누라가 진짜 마누라로 활동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이 드러날 때일까요. 실은 어려움을 당할수록 후자예요. 본래 있었던 관계에 기능을 드러낼 기회지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그걸 알아 맞추는 기간은 아니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 삼아놓고 너 진짜냐 가짜냐. 하나님이 그걸 몰라서.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참으로 내 명령을 지키겠느냐 안지키겠냐. 어려울수록 지키겠느냐. 순종할수록 지키겠느냐. 언약의 신실성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그것을 알아 맞추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 말이어요. 그런 의미로 신약 시대는 시험의 시기는 끝났다고 그랬지요. 왜냐면은 우리의 대표자로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경우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언약에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는가 시험이 더 없어요. 더 이상 큰 시험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그 시험을 쳤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낼 시험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걸어가면 되어요. 우리가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테스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언약에 신실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 완전한 순종이 마무리 됐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지금. 구약때는 아직 순종이 유동적이예요. 마치 에덴에서 아담의 순종이 유동적인 것처럼. . 역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시험하신 것은 죽음에 이르도록 시험한 것이 마지막 시험이어요. 그는 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자기 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순종해 냈거든요. 거기서 이전의 모든 불순종의 역사는 마무리된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교회는 지금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하는 그런 아, 믿음에 신실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것을 테스트하게 하는 진행 과정이 아니라, 완전한 승리가운데서 그 승리를 봉사하는 시대예요. 그러니까 구약 백성이 광야 유리하는 것과 우리가 주님 오시도록 까지 세상에 남겨지는 것은 상황이 달라요. 상황이 다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적으로만 서로 연결시키면 안돼버립니다. 가령, 결혼을 예로 들면은 어떤 사람이 약혼했는데 한 두달 소식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남자가 마음이 변했다냐 말았다냐. 그 생각을 할 수 있지요. 그 생각을. 그러나 결혼 한 사람이 한 두달 외국에 나가서 소식이 없어요. 그러면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무슨 사고가 났다냐.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지. 이 남자가 가서 변해 버렸다냐. 이 생각을 하면 그건 묘한 생각이겠지요. 왜냐면 똑같은 간격이 있어도 그 간격이란 것은 전혀 의미가 달라져야 돼요. 그러니까 구약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면은 그것은 마치 에덴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해서 아담이 범죄했던 것처럼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테스트되는 과정이어요. 이제 예수 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도록 그 테스트가 완결되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높은 시련이 없어요. 지금 교회도 남겨져 있고 하나님 마저 안 오신 것처럼 돼 있으니까 아 우리도 광야 백성처럼 유리하는 것 아니어요. 우리는 승리의 백성으로 남겨져 있지. 아직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과정이 덜 완결된 것처럼 그렇게 있는 백성들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시험과 타락이 있어도 신약에 그대로 연결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어요. 그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베드로가 도망쳤으니까 우리 같은 것은 몇 번이나 도망치겠냐. 연결하지 말라. 그 말이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직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리라. 그 왕이 죽음의 권세에 노출된 그런 시대에 봉사했기 때문에 도망칠 수 있지만은 부활한 뒤로는 그는 도망치면 안되어요. . 그 왕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왕이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지금은 따라오지 못하지만은 후에는 따라오리라. 그렇게 한 것이어요. 상황이 다르다 그 말입니다. 이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빼버리고 적용하면 안되는 것이어요. 그건. 그러니까 여기서 시험이란 것은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또 네가 그런 힘이 있냐 없냐. 하는 기능 테스트가 아니라, 나를 참으로 신뢰하고 순종하겠느냐.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힘이 얼만큼 돼냐. 그런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숙제를 내 주면은 어린아이가 할 만큼 내주는 것이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숙제 안해요. 그것이 어렸을 때 일이지요. 기능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죄를 짓느냐 마느냐를 자꾸 기능으로 따져요.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능을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구약때는 아무리 거룩해도 모세 제도 안의 거룩밖에 아니다. 그들은 모세제도만 따라가면 돼지. 천사처럼 돼란 것이 없어요.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금 이 복음으로 살라는 것이지, 천사처럼 돼라는 이야기가 아니어요. 기능을 따지는 이야기가 아니어요.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따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 두시고 40년동안 만나로 그들을 먹이심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신 것은 자기 신실하심을 증거하신 것이지요. 사람이 떡으로 산 것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기로 약속했거든요. 실은 광야에서 그들은 주렸어요. 먹을 것이 다 떨어져버렸거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매일 하루마다 만나를 주셨고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셨어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들의 신실함을 내가 테스트하겠다. 안식일에 걷으로 오는가 안 오는가 보겠다. 그것이 만나를 처음 준 사건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운 것이지요.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서 사람이 자기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살지 않냐. 그 말씀이 너희들이 40년 동안 먹였지 않냐. 하나님은 광야에서 자기 신실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고난 중에 이스라엘이 마음에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은 결론을 해 주고 있는데,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심을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라. 지금 40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낮췄지만은 하나님이 얼만큼 신실합니까. 앞으로도 그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겠어요. 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고 마치 아들을 훈련하는 것처럼 훈련할려고 징계하는구나. 우리가 더 믿음에 신실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깨달아야 정상이겠지요. 그래서 이제 5절에 적용은 그 말이어요. 너희들이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하는 것처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신 마음을 생각하고 앞으로 말을 잘 들으라. 그러니까 앞으로 또 어려운 일이 있을 지 모르니까 놀라지 말아라. 너희들이 40년동안 내가 너희들을 먹였지 않냐.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희에게 40년 동안 진실했지 않냐. 앞으로도 진실할 것이다.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비록 너희들을 징계할 지라도 그 언약의 땅을 주어서 누리게 하리라.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6절에 있는 문제이지요.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고 그 도를 경외하면은 7, 너를 아름다운 땅으로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에는 골짜기들, 산들, 시내와 흐르는 샘이 흘러 넘치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 석류나무, 감람나무, 꿀의 소산지라. 너희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돌은 철이요 산은 동을 캘 것이고, 그 때에 네가 먹어서 배부를 때 옥토를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리라. 그 하나님이 주신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여기까지 어려운 일을 당할때는 낙심하지 말아라. 놀래지 말아라. 나를 신뢰해라. 광야 40년을 너희들을 먹였던 것을 기억해라. 내가 가나안 땅을 줄것인데 40년동안 만나를 주었던 것처럼 가나안 땅의 복이 넘치지요. 고난 중에도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을 지키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실 복은. 결국 가나안 땅 복인데 그 복을 풍성히 설명하고 있지요. 샘이 흘러 넘쳐요. 그렇게 모든 산물이 가득차 있어요. 그리고 산도 돌이고 전부 광물이어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한마디로 이렇게 좋은 땅을 주셨는가. 저절로 입이 벌어져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언제. 어떻게. 하나님이. 40년을 광야를 놀래키신 하나님이 지금 40년 광야 여행을 끝마치고 모압평지에 두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라. 이 말을 하시면서 이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10절부터 20절은 이제 거꾸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11절을 보면은, 내 말을 잘들어라. 잊어버리지 말아라. 신명기가 내 말을 지켜서 복받으라 하는 것이 신명기 주제니까요. 그 말을 처음과 끝에 거듭거듭 반복돼지요. 가령 같으면은 11절에 이 말할 것 없이 10절이하를 그냥 붙여서 쓰면은 양도 줄고 얼만큼 좋아요. 읽기가 좋고. 그런데 꼭 부모가 자식을 교훈한 것과 같아요. 한마디 교훈하면은 알았냐 하고는 또 순전히 사람돼란 말이다 하고는 또 알았냐. 5분이면 다 할말을 한참 말하다 사람돼라. 알았냐. 그러면 내가 너를 잘해주지. 나 먹으려고 돈 버냐. 너 주려고 돈 벌지. 그래놓고는 또 이야기하면은 참 진도가 안 나가지요. 무릎은 저려오고. 무릎꿇고 앉아있으면. 그런데 주로 부모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방식 투가 전부 그래요. 그래서 또 11절을 보니까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가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어떻게.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땅에 거할 때 집에 거할 때. 여기보니까 번성하고 번성해요. 두렵건데 14절 내 마음이 교만하여 여호와를 잊지 않도록해라. 그렇게 말하고. 자 이스라엘이 번성하고 풍부한데 조심해야 될 것은 여호와를 잊지 않도록해라. 그럼 어떤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곳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그때 그 광야에서 굳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만나를 먹이시고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아니냐. 그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풍부할 때 그들이 기억해야할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를 통과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그 하나님을 잊지 말아라. 그 말이지요. 이제까지 복을 주신 그 하나님을 잊지 말아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을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에 이 복을 주셨다고요. 18절 보면은 다시 한 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가 내게 재물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내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날같이 이루려 하심이라. 항상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진실하셔서 그렇게 하셔요. 다른 이유 없어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고 다른 신을 섬기면은 19절에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그런데 어떻게 멸망한다고요. 20절에 보니까 너희앞에서 멸망시킨 민족들처럼 너희도 멸망하리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멸망한다니가 여기서는 지옥간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 말합니까. 이전에 멸망시킨 백성처럼 멸망받으리라. 그런 이야기지요. 이것이 신명기 이야기지요. 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까. 그 땅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런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도 악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조상들에게 약속했어요. 그러니까 그 땅을 줄 것이어요. 그러니 그들은 복주신 여호와만을 섬겨야 되고 그 땅 신을 섬기면 안돼요. 만일에 그 땅 신을 섬기면은 그 땅에서 멸망받은 백성처럼 멸망하리란 이야기지요. 지금 단박 지옥간다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의 삶을 이야기하지 지옥가니 마니 하는게 주가 아니고, 지옥과 천당은 어디서 드러난다고요. 역사의 마지막인 신약에서 드디어 드러나지 구약때는 그런 이야기가 드러난 것이 아니다. 가나안 땅으로부터 쫓겨나고 죽는 것, 멸망하는 것,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럼 물론 거기서 가령 같은 사람들은 분명히 지옥갔겠지요. 왜냐면은 하나님이 특별히 입을 벌려서 이스라에 총회에서 이름이 지워져버렸기 때문에. 지옥 갔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역사의 종점에서 알 일이고, 성경은 그 사람이 지옥갔냐, 천당갔냐. 너희들도 이런 사람 본을 따면 지옥가고 저런 사람 본을 따면 천당갈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의 복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열렸지요. 지금 예수 안에서는. 우리는 순종과 불순종이 이제는 천국과 지옥과 관계되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어요. 그것은 지금 나타난 이야기어요. 구약때는 거기까지는 안 나타난다. 역사가 완결되면은 지옥 간 사람을 보고, 아담도 천당 가 있으면 보고 하겠지만은 성경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났고 그리고 에덴 밖에서 어떻게 에덴에서 처럼 영광스럽게 섬기지를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섬겼는지. 그런 역사 안에서 누리는 관계를 말하지, 천당갔냐 지옥갔냐. 그런 것을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복음이란 것은 지금 예수 믿는 이 삶을 살라. 그것이 복음이지요. 모세때는 휘장밖에서 떨었지만은 그러지 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라. 이것이 복음이지. 천당가냐 지옥가냐 그 이야기를 직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때는 사람들이 휘장밖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은 지금 너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은 하늘에 계시고 그 분과 우리는 아무런 간격이 없지 않냐. 이런 우주적인 권능있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겨라. 너희들은 휘장안에 있고, 은혜의 보좌앞에 앉았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 하나님 안에 있다. 이런 역사를 말하고 있는것이지, 천당가냐 지옥가냐. 개인 운명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입니다. 신약의 교회, 새 인류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어요. 새 인류를. 교회는 전부 거기 있지, 천당 갈 사람 따로 붙이고 교회안에 섞어져 있다. 그런 문맥들이 아니어요. 지금. 그런데 우리들은 이제까지 복음을 개인 운명론으로 설명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개인들이 천당을 가는가. 그럼 천당가는 것은 어느 한 시대만 가면 안되고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지옥아니면 천당이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갔을 것이고 야곱도 갔을 것 같으면 그들은 어떻게 오직 예수 이름으로 간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통해서 간다. 이렇게 묶어버린 것이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 식으로 살고 커서는 큰 방식으로 살면 되어요. 모세때는 휘장 밖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지금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면 되어요. 하나님이 역사에서 우리와 대화하는 관계를 말하고 있지, 개인의 운명론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아니다. 그런 말이어요. 그러니까 개인의 운명론으로 풀고 있는 신앙 고백서는 역사적인 전통에서는 기독교 전통으로 되어있지만은 지금 우리가 깨달은 바대로 하면은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예요. 한마디로 하자면은.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금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이단으로 공격해도 어떻게 막을 둥 해야 할 판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 큰 아주 전통을 두고 우리 기독교가 아니라고, 지금 죽으려고 배아픈 식이지요. 그런 식인데, 그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아니라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고. 성경대로 하면은. 성경을 그렇게 풀면 안돼어요. 성경은 역사에서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와 함께 하시는가. 이제는 천하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대하지 않냐. 너희들이 모세 부하처럼 떨고있냐. 그러지 말아라. 이제는 아버지 이방인도 무조건 들어와라.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등급을 그것이 지금 우리가 선언하는 복음이어요. 그 복음에는 하늘이 열려있어요. 하늘과 땅이 간격이 없어요. .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없으니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 관계여서 빛이 어둠이 없어요. 그렇게 하려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의 대리자로 보내셨다. 모세가 아니라, 아들을. 그래서 삼위일체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어요.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은 그전 법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마치 우리가 범신론처럼 이해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이해도 잘 못할 것이어요. 그러니까 멸망시킨 것은 어떻게 멸망시킵니까.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에서 쫓아낸 백성들처럼 멸망시키겠다. 나중에 결국 그들도 가나안 땅 밖으로 쫓겨나 버렸지요. 그것이 그들의 멸망이어요. 죽었냐 안 죽었냐가 아니라, 가나안 땅 밖으로 쫓겨나면은 그것이 멸망입니다. . 구약에는 가나안 땅이 새로운 에덴, 새로운 성서거든요. 거기서 쫓겨나면 안되어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자 이제 주보를 읽겠습니다. 가운데 문단 제일 끝에 단락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역경중에서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 경건은 경외하심이라고 그랬지요. .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것은 그들을 아들처럼 징계하시기 위함이며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그들이 언약에 신실하여 여호와의 명을 지키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시험한 것이다. 야곱보서 1장에 시험이란 말은 시험과 시련을 같이 쓰니까 그러는데, 우리는 시험하면은 사람을 한 번 진짜배기냐 가짜배기냐 알아보는 과정처럼 이야기 하는데 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개념은 시련개념이어요. 연단 개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로 그들을 먹이사 친히 자기를 증거하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먹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역경중에도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신 것을 생각하면은 앞으로 몇 일 못 참겠어요. 한마디로 하자면은.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아름답고 모든 산물이 풍성한 옥토를 그들에게 주셨다면서 찬송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라고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라. 자나 깨나 지켜라. 그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아름답고 풍성한 옥토에서 배부를 때에 교만하여 여호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거꾸로 이야기지요. 어려울 때는 낙심해서는 안되고 풍성했을 때는 스스로 자랑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 모든 역경중에 그들을 연단하시고 인도하사 마침내 이 복을 주셨으며 그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애굽에서부터 건져내시고 광야를 통과시키고. 이 복을 주신 분이지요. 재물 얻을 능력도 여호와께서 주신 것으로 기억하고 교만을 버려라. 이는 오직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키는 여호와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복을 주셨어요. 자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신실하여 그만 섬기고,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만일에 그들이 신실하지 아니하여 여호와를 청종치 아니하면은 그 까닭에 그들도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본문이. 이 보문이 어떤 관계각 있느냐.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확증하셨습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받쳤습니다. 역사의 끝에 주님께서 만유안에 거하시는 영광과 생명을 드러내시기 까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늘의 신분 때문에 범사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앞에 감사하고 그 이름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우리는 가나안 땅을 염두 해 두고 권면 안한다. 이제 실로 시험은 끝났습니다. 하나님만 신실한 것이 아니라, 그 백성도 신실하심이 완성됐습니다. 어디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에 완결되었다고 로마서 3장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약때는 아직 완전히 신실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아버지 노릇 안 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우리 아버지가 나쁜 것 같아요. 엄마는 더 좋은 것 같고. 그리고 어렸을 때는 괜히 겁나는 것이 아버지어요. 어렸을 때 효자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이 효자이지 이제 아버지 목에 타고 있는 아니는 효자인가 뭣인가도 모르는 것이고. 조금만 알면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이 어렸을 때는 효자고, 커서는 아버지처럼 가까운 사람이 없어요. 그런다고 같이 이야기가 아니고. 그 같은 인격이라 그렇게 가까워요. 아버지처럼 가까운 분이 없어요. 그래서 신약 때는 사랑이 경건의 표증이어요. 구약 때는 하나님이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지만 신약 때는 영원한 언약의 영광을 함께 보고 마시도록 하셨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말도 달리 표현하는 것이어요. .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약혼했을 때는 괜히 그 남자가 조심스럽지요. 조심스러워야 정상이어요. 그러나 결혼하면은 뭐 태초에 만났던 친구같이 느껴지겠지요. 그때는 살살 눈치봐서는 안돼어요. 그때부터는. 왜냐면 관계가 달라져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랑의 표현법도 다른 것이어요. 자 그러면 신약때는 이것을 어떻게 읽은 것인가. 여기서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40년 내가 내 신실함을 보였지 않냐. 내가 아들처럼 너를 징계하고 먹고 마심을 의지하지 말고,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나를 의지하도록 너를 가르쳤지 않냐. 나다. 나는 누구냐. 애굽에서 건져내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고 가나안 땅을 준 하나님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너희들이 이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맹세를 스스로 어길수 있느냐. 그러니 너희들은 자나깨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절대로 교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라. 그 말을 지금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광야 시험에서 하나님이 자기 신실함을 드러낸 정도가 아니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고 원수되었을 때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확증됐어요. 구약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직도 사람만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사람앞에 온전치 못한 것처럼 의심되어요. 어머니가 좋은 것 같고, 삼촌, 외삼촌은 더 좋고. 가끔 온 손님은 더 좋고. 우리 아버지가 제일 나쁜 사람. 아무튼 말 안통하고 제일 나쁜 사람은 우리 아버지. 구식. 보니까 다른 친구 집 가니까 그 아버지는 그렇게 좋아. 왔냐. 놀다 가거라. 비디오 볼려냐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공부해. 발닦아. 우리 아버지 하고 저 집 아버지는 얼만큼 좋냐. 그런데 그 집 아버지도 딸 친구 가고 나면 너 이리로 와봐. 너 어째 공부할 때 친구 데리고 왔어. 그런다고요. 그런데 뭣도 모르고 그 아버지는 신식이고 좋은 줄 알아요.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유괴를 당해요. 아버지가 나쁜 것같거든. 커지면 아버지가 돈 한 푼 안주고 동생들 짐까지 다 큰 아들에게 지워줘도 아버지가 누구인줄 알아요. 절대 의심하는 법이 없어요. 왜냐면은 사랑이 완결됬기 때문에. 구약때는 이방인이 이스라엘보다 복되게 했다. 부자도 있고. 이스라엘처럼 매 맞고 산 사람도 없고. 또 이스라엘 중에도 범죄한 자들이 부자가 있지요. 그러니 오직하면은 하박국 기자가 망대에서 하나님 대답 좀 들어보겠다고 그랬겠어요. 말하자면은. 왜 아직 역사가 진행되니까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됐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자기 아들을 주신 사랑으로 확증되어서 더 이상 시험거리가 없어요. 더구나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셔서 보좌에 앉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 노릇을 해 준겁니다. 아버지 노릇을 완결시켰다 그 말이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주니까 우리도 어린아이 수준으로 살아요. 단지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수준으로 살면 좋은데 거기서 범죄한 것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지요. 어른처럼 살라고 안 해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로 사니까 잘 되어도 어린아이로 살아요. 국민학교 공부 잘한다고 아버지가 한 숨 놓았다고 안해요. 고등학교 공부 잘해도 아직도 아버지가 한 숨 안 놔요. 대학교 공부 잘 해서 장가 가봐야 알아요. 못된 여자 만나서 묘하게 되버리거든. 잘 몰라요. 그래서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면은 아버지가 더 이상 교육과정이 없지요. 이제 이건 내 아들이로다. 해석할 수 있어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교회도 장자가 됐어요. 그래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에 하나님도 의롭고 믿는 우리도 의롭다. 로마서 3장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어요. 의롭다함은 완전한 신실하심이 드러났다. 그 말입니다. 지금 신약 교회는 그런 빛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해요. 광야 40년으로 자기 신실하심을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심은 광야에서 40년 먹이고, 가나안 땅에서 먹인 정도는 그것은 먹어 봤자 썩어요. 만나도 하루가 지나면 썩어버리고. 가나안 땅의 것을 아무리 먹어도 뒤로 나오고 썩어버릴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몸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에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셨고. 하나님이 그 언약에 신실하심을 그렇게 완성했어요. 우리에게는 썩음이 없어요. 이런 빛 가운데서 사는데 우리들이 조금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아이고 천당 가봐야 알지. 대충 살아도 복은 받더라. 벌도 안 받고.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 안된다 그 말입니다. 이제는 하여튼 예수님 지상 생애의 제자들을 본 따라도 안된다고 그랬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을 그 당시의 제자들이고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도망친 것처럼 살면 안되어요. 우리는 승리하신 그 분의 군병으로 이겨야 되니까 우리는 그렇게 낙심해서는 안된다. 또 우리가 먹는것도 우리의 복입니까. 아니지요. 누가 준 것입니까.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분이 자신의 피와 자신의 살의 교제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것이어요. 우리 재능이 아니어요. 우리 재능이. 그 분만 생명의 주님이셔요. 오늘 요한복음대로 하면은 세례를 성령으로 주신 분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성령에 머무르고 성령을 주신 분이셔요. 그렇게 언급하고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뻐하고. 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부를 수 있지요. 항상 그 분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형제고 우리 하나님이니까. 모든 일에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약 백성은 배고픔으로 울고 원망할 수 있어요. 광야 40년의 원망이 자자했어요. 우리는 그래서는 안되지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는 감사를 어떻게 합니까. 벙어리가 억울해서 자살하려고 그랬더니 소경이 가다가 웅덩이에 빠졌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눈이라도 뜨게 해 주셔서 감사하구나.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어째서 입은 막혔냐고. 입도 열어줘야 돼지. 어떤 사람이 걸어가다가 떨어졌는데 왼 다리는 부러지고 오른 다리는 안 부러졌는데 아이고 양다리 안 부러져서 감사하구나. 안 떨어졌으면 더 좋지. 그리고 다른 사람 괴로운 것과 비교해서 더 좋을 것이 무엇이어. 그것도 교육은 돼요. 나는 이렇게 요새 콩나물 깍대기 같이 생긴 아프리카 애기들. 아마 그것 집에다 붙여 놓고 밥먹으면 감사할 거라고. 그것은 비교적인 감사는 될 란가 몰라도 신약은 이방인과 비교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어요. 우리에게 죽음이 엄습해도 감사해야돼요.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확증돼버렸거든요. 죽음도 그 사랑을 끊지 못해요. 조롱을 못해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어요. 우리는 휘장 밖에 떨고 있는 백성이 아니거든. 그가 우리의 기도의 중보자거든요.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우리의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다. 신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 상황하고 연결시키면 안되고 구원 역사적인 상황과 연결시켜야 돼지. 여러분은 구체적인 실생활과 연결시켜서 아 해결책이 있구나. 읽어들어가면은 여러분은 구약의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고 거짓말 뿐이어요. 신약때는 예수의 떡상에 앉게 하지 가나안 땅의 젓과 꿀은 먹이지도 안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 실은. 주님을 모르는 세상이 교회를 조롱한다. 이스라엘 같으면은 그들을 죽여버려야 돼요.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그를 거역한 세상을 위해서 몸을 준 것처럼 사랑으로 봉사해야 된다. 죽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가진 능력이어요. 상황이 전혀 달라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복들을 부흥사들이 ? 믿음만 잘 지키면 복준다고 안 했냐고. 보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하는 말은 틀린 이야기다. 단지 우리는 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것도 주님의 피와 주님의 살에 참여하는 복이지만은 그런 것은 썩어질 것이고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먹는 자는 먹지 못한것 같이 살아라.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지만은 거기에 매이지를 말아라. 그렇게 그 경건을 말하고 가난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요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지고 형제의 종됨을 자랑하라. 이 세상의 것은 다 지나가지 않냐. 그것이 너희가 구하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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