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신명기 7
7장 1절부터 11절은 한마디로 가나안 백성과 언약하지 말라 하는 내용이 11절까지 주제입니다. 언약의 땅에 살고 있는 족속들은 1절에 보면은 뭐라고 말합니까. 여러 민족인데 헷 족속,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그 족속들의 이름은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들은 너보다 많고 힘이 있다. 그래서 언약의 땅에 살고 있는 족속들은 앞에서는 여러 족속, 뒤에서는 일곱 족속.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일곱했을 때는 물론 분명히 숫자적으로 일곱이면서도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이라는 숫자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될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렇게 일곱 족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칠 족속이 꼭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 했을 때 이 일곱 족속이 쭉 나오는가. 하면은 거의다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는 아예 일곱이란 숫자까지 넣어서 일곱 족속해서 완전한 수로 그 많은 민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되어있습니다. 다른데는 잘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숫자적으로 일곱 수가 나온 것은 여호수아 3장 10절과 24장 11절입니다. 여호수아서에는 일곱 족속이 나옵니다만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출애굽기나 그런데를 보면 주로 여섯 족속이 나옵니다. 주로 거기서 빠진 것은 기르가스 족속이 빠져요. 그럼 왜 어느 때는 여섯 족속을 기록하고 어느 때는 일곱 족속을 기록하는지 그건 우리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단 여기서는 가나안 땅을 완전히 주겠다 했을 때는 여기서는 일곱을 확실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고 있는 족속은 일곱 족속인데, 그 다음 이름은 읽어 봤자 잘 모르지요. 가나안 칠 족속을 세워볼 까요. 기르가스 족속은 빠지니까 하나 특징이 있으니까 알고, 그 다음은 가나안 본래 이 족속을 가나안 족 이렇게 부르거든요. 한 족속들이니까. 힘이 세다 했을 때는 아모리 족속이었죠. 그리고 여부스 족속, 헷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일곱 족속이면 알겠지요. 일곱족속인데 여기서는 한마디로 힘이 많고 수도 많다. 그런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취한 이스라엘의 행동은. 그럼 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2절에 보니까 너로 그 백성을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을 진멸하라. 아무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아라.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취한 행동은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혼인하지도 말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실은 한마디로 아무 언약도 하지 말고 하는데가 다 포함되어있지요. 실은. 그런데 언약도 하지 말고 했을 때는 이제 동등 당사자적인 것이면 불쌍히 여긴 것 또 혼인하는 것 조금 차이는 납니다만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가나안 족속을 남기거나 언약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4절에 보니까 그가 내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가나안 족속과 혼인해서는 안되느냐면은 또 남기거나 언약해서는 안되느냐면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해서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전도해서 싹 바꿔버리면 될 것인데. 그러면 굉장히 부흥될 것 아닙니까. 우리는 단박에 이런 글을 읽고도 거꾸로 해석을 해 버려요. 이 말을 따라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 땅 백성은 전부 다른 신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 나라로 기업으로 삼으시기 때문에 그 땅 백성은 전부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보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는데 그들을 남겨뒀을 때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취할 것이 있으니까 남겨두겠지요. 그러니까 남긴 그 자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시작되고 있는 것이어서 그런데도 그 사람들을 전도하면 될거아니냐. 그런 말은 안 맞아요. 가령 안 믿는 총각하고 한참 좋으면은 나중에 전도하면 되긴 되겠지요. 그래도 이미 시작했을 때는 안 믿는 그 상태도 좋다 그 말이거든요. 이미 좋다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안 믿는 총각이 나중에 믿게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일 뿐이고 그 사람은 이미 안 믿는 사람을 즉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을 말하자면 자기는 좋다고 교제하는 자체가 이미 범죄로 들어가 있는 것이어요. 그런데다가 다른 범죄는 순식간에 짓기 쉬운인데 남녀간의 범죄는 연구하고 연구해서 짓는 죄라고 그랬지요. 또 성경에서도 하나님과 하나된 교제를 부부 안에서 하도록 했기 때문에 남녀간에 하나되는 것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어서 범죄의 질이 달라요. 고약한 것입니다. 성질나고 누구 두드려 패는 것은 성질나니까 그랬다 처도 가령 안 믿는 처녀나 총각을 좋아하려고 하면은 생각이 같아야 되고 한참 접근도 해야 되고 더구나 그것은 어느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일치시키는 것이라 이것은 전혀 범죄의 성격이 달라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냥 교회 총각들도 적고 그러니까 어떻든 시집가서 전도하면 그 영혼을 얻은 것이지요. 이건 성경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어요. 그건 하나님의 은혜의 일일뿐 그 행동이 옳아서 그런 것은 아니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그 신들을 멸해야 하는 이유는. 왜 그렇게 멸해야 되는가. 조금 건너 뛰어야 답이 나옵니다. 5절을 보니까 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르라. 한마디로 싹 없애버려라. 그 말이어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6절에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너는 하나님의 성민이다. 지상 만민중에서 너만 택해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너만 기뻐한 것 아니냐.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다고 쭉 강조하고 있거든요.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우상을 섬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11절까지 말하고 있어요.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한테 이런 명령을 했는가. 그런 말이어요. 다른 민족한테 가나안 족속을 쳐라. 그런 명령을 안하고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과 그 신들을 멸하라. 왜 이스라엘 백성한테 이런 명령을 하는가. 그런 말이어요. 자기 군대라 그러지요. 자기 백성이라. 하나님이 할 일을 그들이 해야돼요.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자기 백성 삼으신 목표예요. 마치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들만 하나님의 장자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자기 기업으로 삼으시면은 그 기업에 사는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니님의 일을 해야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쓰러버려야 돼요. 자 그러면은 이스라엘에게 명한 가나안족 멸절 명령과 제 6계명과는 어떻게 관계가 있는가. 6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했는데. 여기 보니까 아이들까지 하나도 봐주지 말고 싹 죽이라. 그런 명령이거든요. 멸절시켜야 되거든요. 그럼 이것은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분명히 하나님은 돌판에 새기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했는데 하나님은 살인 정도가 아니라, 아이들까지 몽땅 죽이라고 그러니 애기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런 말이어요. 그냥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까 하자고요. 그도 좋기는 좋아요. 이유없이 해도 좋은데. 이유가 있어야 맞지요. 왜 이렇게 정반대되는 명령을 하실까요. 어째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이런 것이 이해가 안가더라고요. 그냥 하나님이 하라니까 질문없어요. 본 마음에는. 그래도 또 무시무시하더라고. 애기들까지 싹 죽이라는 이야기가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냐고.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선하셔야 될것인데. 그럼 어떻게 가나안 족속하고 무슨 원수졌다고 그 족속만 싹 죽이라 그러고 뭐 비슷비슷하기는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자 제일 처음에는 에덴만 하나님 나라로 되어있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약속한 것은 가나안 땅의 소위 멜기세덱의 나라, 아브라함이 그 나라를 세웠지요. 그런 나라를 세우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아직 가나안 백성의 죄가 가득 안 찼거든요. 그래서 애굽에서 양육을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올 때 기생 라합이 죽었어요. 살았어요. 살았지요. 기브온 백성들도 살았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민족 말살전쟁은 아니어요. 그럼 왜 그러냐면은. 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 소문을 두렵도록 들었는데도 그 하나님을 대항하거든요. 더구나 이전에 역사관이라는 그 나라와 그 신들이 일치해요. 신과 군대가 일치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실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족으로 서있는 것이어요. 하나님 앞에 복종하면 사는데 대항하는 족속이고. 그래서 이제 전부 죽이도록 되어있는데. 아까 집사님 말씀처럼 아이들은 왜 죽이냐. 어른에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 개념이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적인 존재로 아이들까지 그러는데, 구약은 그런 개념이 없어요. 어느 아버지에게 속하면 그 가족이지 거기서 아이들은 따로고 그런 개념이 없어요. 어느 왕에게 속했으면 함께 세지 개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구원론을 전부 개인 구원론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성경은 그런 개념으로 접근을 안해요. 그런데도 몽땅 죽이라는 것은 조금 불공평한 것 같은데, 항상 성경에 있는 역사는 종말론적인 역사라고 그랬지요. 가령 구약같으면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역사의 최고 목표예요. 역사의 끝이고 최고 목표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가면은 중학교 책 싹 팔아버리지요. 책 좋아한다고 국민학교 책부터 다 꽂아놓고 우리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사랑하는 가족하고 있으면은 남이 와서 보고는 웃어버려요. 국민학교 음악책, 미술책 딱 꽂아놓고 하면은 웃어버린다고. 그건 아무리 비싼 것도 싹 팔아버리고 고등학교 책 꽂아놓으면 되겠지요. 그러면 그전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책을 아꼈더라도 어느날 야 갖다 싹 팔아버려라. 갖다 버려버리고 그러면은 왜 그 명령이 가능하냐. 새로 고등학생이 됐기 때문에 그 전 것이 필요가 없는 것이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책을 사랑하라 그래놓고 하고 붙들고 있으면은 안되지요. 그건 팔아버려야 되요. 아무리 책 좋아해도 아직 국민학교 책 꽂아놓은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어떻든 변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어요. 그러면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역사의 마지막이어요. 만일에 그 하나님 역사를 대적하면은 그 땅에 살 가치가 없어요. 이런 일이 장차 언제 이루어질 것 같습니까. 역사의 끝에 이뤄질 것 같죠. 그 때는 말하자면 산아 언덕아 무너져라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못에 던져버릴 것이어요. 그 때는.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 사람들은 원통하겄다. 지금처럼 긴 기간을 주면은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있는데 어느 날 나타나가지고 전부 모여 하고 전부 쓸어버리면은 그 때 나타난 사람들은 벼락공부할 시간도 없잖아요. 우리는 충분한 시험기간이 있지만은. 얼만큼 불공평하겠어요. 말하자면. 그 때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어서 그 때는 대항자들을 전부 불못에 던질 것이어요. 그것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에 그 나라를 세우는데 나타난다. 그 말이어요. 왜. 구약의 최고 목표는 가나안 땅이 목표거든요. 이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역사의 종점에 완성되겠지만은 구약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라 그 말이어요. 거기까지.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모든 것이 결판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들어가는데 대적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이라. 그 말이지요. 이것은 6계명과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어요. 성경은 소위 도덕을 구현하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하고 역사를 경영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민족은 살 가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이어요. 누구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의무가 있다. 그런 말이지요. 항상 성경에는 그런 소위 종말적인 상황이 개입되면은 이전의 것으로 해석이 안되어 버립니다. 이전의 것으로는. 그것은 역사의 끝의 일이니까 이전 것으로 해석이 안되버려요. 자 그 다음에 여호와의 성민이 되었다. 하는 의미는 6절에서는 보십시오. 내 하나님 성민이라.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으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기서는 성민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기업의 백성으로 택했다는 말이 성민이라 그 말이지요. 항상 어떤 단어를 쓰면은 그 문장에서 한정된 의미가 그 문장에서 설명한 의미가 그 문장의 의미어요. 다른 데서 그 개념을 끌고 들어오면은 안 맞는 말이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성민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성소에서 자기를 봉사하도록 세우셨다. 그런 거룩의 의미가 아니라, 여기서는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밖에 없다. 그런 말로 성민이라 그런 말이어요.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삼으셨습니까. 7절에 보니까 너를 그렇게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는데, 너희를 그렇게 기뻐하시고 택하심은, 설명해주고 있죠. 왜 그렇게 택하셨는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너희는 실은 모든 민족보다 작다. 적다. 그럼 왜 택하셨는가.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고 너희들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성민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냥 살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건져내심으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지요. 성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이 힘이 쎄서 강국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어요. 민족으로서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노예민족입니다. 왜 삼으셨습니까. 너희들만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 왜 그렇게 특별히 사랑했는가. 너희 조상들과 약속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그리고 성민으로 삼으신 것이 그냥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건져내심으로 내 소유로 삼으셨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성민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만 사랑하시었고 그리고 조상들에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작다는 것을 여기서 특별히 말한 이유는 그건 너희들만 의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도 될 법한 일이지요. 다른 사람 나라보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말은 않고 너희들이 수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그럼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겠어요. 뒤에를 더 읽어보야 되겠지요. 앞에서는 읽어봐도 안 나오고 뒤에를 쭉 읽어보면 더 나와요. 그 나라를 정복해 준 것이 하나님이지 그들 힘으로 한 것이 아니어요. 항상 이스라엘이 염두해 둘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시인해야 돼지. 자기 힘을 의지하거나 외국의 힘을 의지하면 안되지요. 그러니까 그들보다 수가 훨씬 많은 민족들을 정복하라 했을 때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 민족의 국력을 자랑하기 쉬워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형편 없는 족속들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희를 택했느냐.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내가 너만 사랑했고 그리고 조상들에게 한 약속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강한 민족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기업을 얻어야 되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9절을 보면은, 너는 알라. 아주 강조적으로 알라는 것이지요. 오직 내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왜 하나님을 다시 여기서 설명을 하는가. 6장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설명했어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그 하나님만 사랑해라. 그렇게 6장에서는 하나님 사랑을 이야기 했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이야기 않고 내 하나님은 여호와신데 즉 내 하나님 여호와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그 여호와께서 너희 신 너희 하나님이라 그 말입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여기서 보니까 하나님을 굉장히 강조하지요. 6장에서는 내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인 여호와시니 여호와를 강조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니님을 강조하고 있지요. 너희 하나님되셨다. 하나님이란 여기서 말은 어떤 말하자면은 여기서는 너희 하나님이요. 그는 내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하나님만 유일하시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은 신실하신 불변해요. 언약에 신실하셔요. 그런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왜 설명을 하는가. 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는 어떤 말입니까. 여호와 그 분만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다. 그런 말이다. 그럼 뭣 할려고 이 하나님 이름을 말하겠어요. 가령 여러분이 아들들한테 네 아버지 무섭다 할 때는 말 잘들으라고 그 말 하는 것이지요. 너 안 들었다가는 아버지한테 일러. 그 말이거든. 그 말만 들어도 아들들이 기가 죽는다 그 말이지요. 아들이 말 한 참 안듣고 있는데 네 아버지 참 좋지야. 그러면 더 장난 하겠지요. 네 아버지는 생전 매도 안 때리고 좋은 양반이어야. 그러면은 애기는 그냥 더 난리 나버릴 것이어요. 제일로 애기하고 짐승하고 아주 간사스럽다고요. 눈치를 잘 보고. 그러니까 뻔히 아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 이름을 이렇게 말했을 때는 그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계신 것이 되겠지요.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요. 우리가 일상적인 언어를 쓸때도 그냥 그렇게 쓰는 것이어요. 그건. 그런데 이 하나님을 왜 그렇게 말 하냐면은, 여기보면은 여호와를 증거하고 복과 저주를 그렇게 말씀하는데 여기서 여호와를 어떻게 증거했습니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이렇게 증거하고 그 다음에 복과 저주를 말해요. 여기 9절을 보면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 봉한다. 계명을 지키면 천대까지 언약을 이행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되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 봉하여 멸하신다. 지체치 않으시고 봉하시느니라. 이 말을 지금 굉장히 강조하고 있지요. 여기서 강조한 것은 앞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고 뒤에는 봉한다는 말을 여러 말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구만요. 그런 즉 11절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여호와는 이처럼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 분만 신이시오. 언약에 신실하신 신이시라. 이렇게 증거하고 복과 저주를 말씀하신 이유는.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그런 말이어요. 이스라엘 백성보고도 신실하라. 그 말하려고 그런 것이지요. 지금 언약체결이 핵심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언약체결이 핵심이어요. 마치 국가끼리 조약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왕으로, 내가 너희를 해방했지 않냐. 뭐 하려고 해방했냐. 내가 너희만 사랑하고 너희만 기뻐한다. 왜. 너희들이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 조상들과 한 약속이 있다. 그래서 내 언약의 땅에 너희들을 살도록 하겠다.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들어라. 자 나는 진짜 하나님이고 나는 내 언약에 신실하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잘들으면 수 천대까지 복을 주겠다. 그러나 말만 안들어봐라. 혼날줄 알아라. 그러니까 내 말을 잘들어라. 누구한테 하고 있는 말이지요. 이 문맥에서는. 너희들은 내 성민이라 그랬지요. 언약백성에게 하고 있는 말이지요. 그들의 신실함을 촉구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어요. 나는 얼만큼 신실하냐. 너희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너희 조상들하고 한 약속 때문에 너희를 건져냈지 않냐. 너희들이 힘이 세냐. 아니지 않냐.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려고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은 나를 대신해서 그 땅을 경영해야 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나는 네 언약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에게 영원히 신실하게 해 주겠다. 안 들어만 봐라. 복 준가 안 준가. 영원히 신실하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나한테 신실해서 내 말을 잘들어라. 지금 언약을 체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말입니다. 성민의 신실함을 요구하기 위해서 복과 저주를 가지고 그들에게 경고하고 약속해 주고 있는 것이어요. 어떻게 하면서 나는 신실하지 않냐. 너도 신실해라. 그 말이지요. 우리들이 이 문장을 읽지 않고 그냥 교리적으로 무엇을 알려고 하니까 성경을 읽어도 그냥 딴 말이 나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문장을 순리적으로 읽고 그 문장에서 말한 자체만 알면 되어요. 그 문장에 없는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문장에 없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에요. 한마디로. 있는 것만 알면 되어요. 자 12절부터 16절에서는 이런 말이 다른 방법으로 조금 강조되겠는데. 이제 명을 지키면은 주실 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깔리겠지요. 지금 언약백성에 대한 언약의 신실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명을 지키면 주실 복을 뭣이라고 말하냐면은 12절에 모든 법들을 지켜 행하면은 복을 주는데,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주는 복은 뭐라고 말합니까.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겠다. 그런 말이지요. 자 그러면 그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 13절에 설명해 주고 있지요. 그냥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언약을 지키겠다. 그렇게 너희에게 긍휼히 베풀어 주겠다. 그럼 이 복이 무엇인가. 13절에 설명을 해 주고 있지요. 논문도 그렇고 모든 좋은 글이 먼저 주제적인 선언을 하면은 그 다음 그것을 풀어서 설명을 하고, 더구나 이것은 언약체결의 책이기 때문에 뒤에 복과 저주로 경고하고 마무리 지으면 될 것이어요. 언약의 복은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은. 13절 이하에 설명이 되어있는데,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겠는데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내 소와 양을 번성케 하시리니 내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중에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일 없을 것이며. 여기 읽어보니까 무슨 말인지는 감이 안 잡혀도 복이 사방 있지요. 그건 알겠지요. 그리고 한마디로 14절에 결론하기를 만민보다 높게하겠다.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반복하시를 남녀, 짐승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또 모든 질병을 멀리할 것인데 애굽의 악질을 임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이 복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복이지요. 이 복은 한마디로 하면은 가나안 땅의 번성함이지요. 번성 안 한 것이 없어요. 가나안 땅에 번성한 것이. 그래서 너만 사랑하고 가나안 땅에 풍성하게 복을 주고 거기서는 번성할 뿐만 아니라, 그 번성을 빼앗을 수 있는 질병도 없어요. 그 질병은 누구 몫이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그 질병을 임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했지요. 그럼 이것이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인가. 부흥사들이 주로 이런 본문을 갖다 그대로 적용하고 있지요. 그것도 미안한 말로 교인을 미워해갖고는 이 벌을 안 받아. 특별한 기름 부은 사람을 미워하면 벌을 받지, 교인을 미워해가지고는 벌을 안 받는 것처럼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묘하게만 적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보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인데 우리는 거기서 좁아져 있어요. 그렇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이때는 이스라엘과 이방이 싸우는 관계로 하나님이 그 경영을 집행 하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어요. 하나님은 원수와 싸우고 가나안 백성을 멸절시킬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어요. 애굽에서도 애굽민족을 멸망시키고 나왔어요.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하나님이 그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신 것은 싸우고 합니까. 오히려 자기 몸을 주심으로 그 나라를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걸 이해할 수 없어던 것이어요. 이방인은 쫓아내고 부정한 자들은 쫓아내야 할 것인데 죄인들을 친구로 받고 하니까, 죄인의 친구로다. 먹기를 탐하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어요. 율법에 안 맞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자꾸 읽고 반복하면은 아 성경은 이렇게 읽구나. 국어책을 읽듯이 읽는 것이어요. 일단은. 알기 좋도록 되어있는 것만 찾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록된 성경에서 알려고 하지 않고 눈감고 우리식으로 하니까 성경을 못 읽어버려요. 그러니까 신약 때 우상은 무엇이겠어요. 부활하신 예수를 떠나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우상이어요. 말하자면 예수 없는 설교, 예수 없는 성경해석은 전부 우상이어요. 심지어 구약을 그대로 우리한테 가져와도 그것은 말하자면 신약의 말대로 하면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이어요. 마치 다 큰 아들한테 어린아이의 교훈을 갖다 그대로 지키라 하면은 그것은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과 같아요.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 교회나 역사적으로 교회가 안된 이유예요. 구원역사적으로 그 역사적인 배경에서 그 문장이 말하고 있는것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를 어떻게 새 시대 백성으로 오는가. 예수없이 그들은 문자적으로 적용하니까 도덕적으로 적용해서 복주는 방식으로 적용해가지고 그것은 오히려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이어요. 이방 종교 우상보다 더 고약한 그것이어요. 예수없이 읽으면 더 고약한 것이어요. 신약시대 때도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수 있는 것은 모세였어요. 이방 종교는 들어올 여지가 없고. 실은 그것이 고약한 것이어요.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것처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항상 마지막에는 기독론적인 해석을 해서 이것이 우리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 읽어야 된다. 그런 말입니다. 마치 천사를 보낸 것 처럼 두 여자를 달음질 해서 보냈지요. 빨리가라 했던 것 처럼.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내지요. 땅끝까지. 구약때는 이스라엘을 세상에 보냈던 것처럼 이제는 갈릴리 산에서 보낸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왕국의 증인으로 보낸 것이어요. 그렇게 하려고 그는 부활하셨다고 마태복음은 이야기해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의미로 교회입니다. 거기 다시 파송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찾아간 여자들도 마태복음의 두 여인이어요. 모세 율법에 두 명이면 증거가 확실해요. 그러나 누가복음은 선교 복음이라 많은 여자들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마태복음은 둘이면 되어요. 두 명 여자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의 왕국의 증인으로 교회를 세우시려고 부활하셨고, 그 증인으로 교회를 보내신 것이어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그 부분을 설교할 때 제사장이십니다. 뭐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셔가지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그런 말은 아무 필요없는 이야기어요. 이제는 아들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의 왕좌를 주셨고 이제는 그에게 속한 열 두 제자와 교회를 주셔서 주님 오시도록 세상 끝날까지 증거하도록 세상에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마지막 강조점이어요. 그 문맥만 읽으면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구약때는 가나안 땅이 최고 목표라 그랬고신약때는 부활과 또 재림까지 목표인데 신약때도 부활은 부활인데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주님이 재림해 세우실 새로운 나라지요. 단지 우리가 부활 그러니까 죄로부터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는데 가나안 땅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되어있고 그럼 구약 백성은 구원에 대한 감이 전혀 없이 그렇게 살았겠는가. 그런 이야기어요. 오직 예수 믿어 구원받는다고 그러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은. 국민학교 1학년 짜리 아들한테 너는 크면 아빠같이 돼. 그 말만 하면 돼지. 더 이상 설명을 않지요. 그냥. 또 너는 크면 형님같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되겠지요. 그러면 어렸을 때는 큰 형님 닮아가면 되어요. 그런데 대학교 쯤 다니면은 인생이 무엇인지, 장가는 어떻게 가는지. 이제 쭉 설명을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그런 것이 밝히 안 드러나요. 구약 때는 최고로 열린 것이 어디까지냐 하면은 휘장 밖에 까지어요. 아직 휘장 안에도 못 들어가요. 그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약속이 있지. 못 들어가요. 그것이 구약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최고 빛입니다. 구약때는. 그런데 신약때는 이제 예수님께서 죄를 온전히 제거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런 가리움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면하시는 관계가 달라있는 겁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그들은 부활을 못 봤겠는가 하면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 조상들의 묘실에 뭍힘이 최고 경지로 되어있고. 그 다음 다니엘서나 후기에 오면은 먼지 가운데서 일어난 자도 있으리라. 부활이 약간 언급되고 있지요 구약에 본 목표는 가나안 땅의 다윗왕조어요. 교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이 그렇다. 그 말입니다. 가령 이제 아버지란 설명을 할 때도 아버지는 누구시냐. 그럼 자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요. 자식과의 관계는. 이것은 어렸을 때나 컸을 때나 불변해요. 그런데 실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식한테 아버지를 말했을 때는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안 가르쳐요. 또 그렇게 가르쳐도 오백원 주면서 그 말을 해요. 째째하게. 좀 크면 오천원 주던지. 그런데 다 커서는 오히려 아들보고 돈 갖고 오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있느니라. 그 말하거든요. 그러면 성경은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있다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윤리적인 교훈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금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하는가. 그 관계를 누리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어요. 그것은. 그러면 부자지간의 관계는 원리적으론 똑같겠지만은 실제로 대하는 관계는 전혀 거꾸로 될 수있지 않아요. 어려서는 아버지가 종처럼 다 갖다 줘버리지 않아요. 커서는 그렇게 안하는데. 그러면 어렸을 때 다 투자해 놓고 커서 손 딱 떼어버리면 얼만큼 손해나는 일이어요. 실은 커서 마지막 마무리 해줘야 하는데. 커서는 아버지가 전혀 그 전 아버지 아닌 것처럼 바꿔지면은. 바꿔져야 정상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교리적이란 말은 그런 비유를 들면은 성경은 가령 부자지간의 관계를 도덕적으로 말하면 불변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것이 말하자면은 교리적이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어요. 종교 이론적으로 하면 그런 이야기고 역사에서 하는 그 말은 무슨 이야기냐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관계하시냐 했을 때는 그런것과 상관없이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아들 종처럼 되어있고, 커지면은 아들이 아버지 종이어요. 아버지 신분처럼 되어버리지요. 말하자면은. 성경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냐 역사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이어요. 성경은. 지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그 하나님을 누려라. 하는 이야기어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게 안 하고 하나님은 누구고, 인간은 누구냐. 이런 이론화를 하고 아버지는 누구고 아들은 누구냐. 하고 도덕적으로만 자꾸 배우려고 그래요. 그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누리라는 것이어요. 그것이 성경이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서는 그런 윤리책처럼 종교적인 이론으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누리라는 이야기가 복음이거든요. 그 전에는 모세제도 안에서 휘장밖에 있으신 하나님이 이제는 아들안에서 너희들을 하나님 보좌에 앉혔지 않냐. 이 하나님을 섬겨라. 그 말이어요. 그것이 복음이어요. 항상 역사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지금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알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제는 하늘의 영광을 함께 하지 않냐. 이 분을 누려라. 이것이 지금 선언된 복음이어요. 저는 또 더 쉽게 한다고 성경을 풀어서 하니까 더 어렵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다고 그냥 옛날에 정치 연설하듯이 감동적으로 해가지고 표를 얻으면 안되고요. 성경을 여러분이 냉정하게 모르면 속아버려요. 또 성경을 성경대로 할 때 제일 큰 감동이 있는 것이어요. 실은 가령 누가 연설 안해도 여러분이 성경을 성경대로만 읽으면은 여러분이 큰 감동을 누려요. 저는 이제 여러분이 어떤 종교적인 영향을 목사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거하는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여러분이 살기를 원해요. 그런데 그런 것이 훈련이 안된 분들은 이것이 신학교 강의냐 설교냐 하기가 쉽기도 하고. 그런 점도 있어요. 그러니까 맞추기 어렵긴 어렵습니다만은 하는데까지 해봐야죠. 가령 오늘 설교할 때 누가 우리 주보 보면은 웃을 겁니다. 설교냐 성경을 요약해 놨냐. 그런데 저도 그걸 모르는게 아니어요. 이제 설교로 꾸미자면은 갈릴리 산으로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 해 놓고 부활을 설명해 버릴 것이어요. 제목을 아예 그렇게 붙여 놓고. 강조점이 그 쪽이니까. 그러면은 설교의 박자가 딱딱 맞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면은 아주 쉽고 좋기도 하고 굉장히 지루하지 않고 좋을 것이어요. 그래도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힘을 주려고 하니까 성경을 요약하듯 해 놨거든요. 그래도 제가 요약하고 비교하니까 제가 설교하기 전에 아 감을 갑겠지요. 이걸 말하고 있구나. 그럼 여러분이 성경 읽을 때 스스로 힘이 생기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 긴 시간 보내고 나서 다시 메시지로 요약했거든요. 마태복음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냐. 그리고 기도 할 때도 우리를 땅끝까지 보내신 그 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되겠지요 .새롭게 불러 파송했으니까. 그렇게 하면 전체로 맞아 들어가요. 우리가 하도 성경을 못 읽어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이 이야기로 우리가 못 읽어서요. 성경을 그냥 감동적으로만 읽었지 본문 자체를 읽는 훈련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교회가 어려운 것이어요. 우리 주께서 가르친 기도로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