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34장
(신34:1-12)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과 그 장사지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고 후일에 사람들이 기록해서 여기 덧붙였을 것이라고 이해들을 합니다. 인제 우리는 그것을 누가 기록했는가, 거기에 강조를 두지요. 모세가 기록했다고 하면 권위가 있지마는 모세 후의 사람들이 기록했다고 하면 권위가 없는 듯 해서 전부 다 모세가 기록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 보수파 학회의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많은 학자들은 34장은 누가 뒤에 덧붙인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죽은 사람이 자기 묘지를 아무도 몰랐느니 그런 식으로 쓸 수 없으니까. 후에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또 6절에 보면 오늘날까지 그 묘를 아는 사람이 없다에서 오늘날이 언제냐? 그러니까 어떠튼 후일이 아니냐. 이렇게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내용을 보아도 후일의 사람이 기록해서 거기다 덧붙인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면은 언제 이 모세 오경을 편집하면서 여기다 덧붙였겠느냐? 그런식으로 쭉 접근해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기존 신학은 모세가 원 저자라는 기록이 있고 모세 후에 사람이 기록했다면 권위가 없고 원저자가 누구냐. 거기다 권위의 증거를 세웠습니다마는 지금 해석은 그런 것보다도 이 책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되었느냐. 거기다 우리는 강조를 둡니다. 가령 창세기 같으면 옛날 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할려고 모세에게 알려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전에는 아담도 천지 창조 때 죄를 보았고 인제 오래 사니까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알려주었다가 나중에 모세 때 기록해서 오류없이 보관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베기다. 이것이 그전에 기존의 신학이 말했던 영감론이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건 상관이 없고 어떻게 전달되었느냐, 창세기는 어떻게 전달되었느냐 그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조직하는데서 이스라엘의 출발은 어디에 있는가? 또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세계를 성소로 지으셨는가, 자기 조상들을 가나안 땅에 불러서 성소를 이루실려고 조상을 부르시고 야곱을 통해서 열두 아들과 70인으로 번성케 했다. 너희들은 왜 구원을 받았는가? 가나안 땅에다가 하나님의 성소를 이룰려고 구원을 받아서 이것은 우주를 성소로 회복하는 대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지금 창세기의 내용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 역사에서 이 책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보고 그전 신학은 원저자가 누구냐? 그걸 따져서 권위를 수정하고 접근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른 책을 보았을 때 34장은 분명히 후일에 누가 첨가한 것인데 이것은 떼어버리고 해석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런 이론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34장이 어떻게 옛 언약의 중보자를 영화롭게 했는가? 하는 문제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은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9-12절은 모세가 죽은 뒤로 그 직무가 여호수아에게 인계된 것과 그리고 모세 같은 직무는 다시는 일어난 적이 없다는 그 탁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땅의 범위를 보면은 1절을 보면은 우리말은 좀 어렵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보이신 장소는 비스가 산 꼭데기인데 아마 느보산맥인 모양이지요. 가령 우리도 무등산에 봉우리가 여러개 있는 것처럼 느보산에 올랐는데 그 중에 비스가 산 꼭데기, 그러니까 느보산이 더 넓은 범위이면은 비스가 산은 그 중에 한 봉우리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거기서 어디 어디를 보이느냐 하면, 길르앗 온 산과 단까지 보이시고, 그 다음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자, 여기 보니까 보인 땅의 범위가 어떻습니까? 4절에 이제 한꺼번에 묶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묶으면 보이신 땅은 맹세하신 언약의 땅인데 그 경계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경계를 읽어보니까 지명이 아니고 기업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미 기업을 차지한 것처럼 납달리, 에브라함, 므낫세 땅 왕전히 기업 이름으로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이미 정복한 길르앗 저 위 단쪽 그리고 밑으로 쭉 내려오면서 납달리, 서해안가지 그 다음 밑에 남방 유다땅, 이렇게 전체적으로 기업 분배식으로 쭉 이야기를 해요. 언약의 땅은 땅인데 유업의 땅이라. 기업의 땅이다. 그렇게 말할수 있지요.
그 다음에 그 땅을 표현하기를 이렇게 넓은 범위한 저것은 전라도 경상도 이런 것이 아니라, 저것은 큰아들 땅, 작은 아들 땅 이렇게 보았거든요. 보고나서 그 다음에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해요. 여리고성은 종려나무를 보았고, 그 옆에가 무슨 성이냐 하면 조금만 소알성이 있어요. 소알성은 그전에 롯이 도망칠 때 이것은 작은 성읍이니 하고 임시로 피했던 성이지요. 여리고성은 종려 성읍이고 큰 성읍이어요. 큰 성읍도 보고 조그만 성읍도 보았어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은 땅인데 큰 아들 땅, 작은 아들 땅 하는 식으로 그렇게 기업을 받은 식으로 쭉 전체의 땅을 흝어 보고 그리고 자세히 보기는 큰 성도 보고 작은 성도 소알 성도 보았어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도 보고 자세히도 보았지요. 굉장히 시력이 좋은 사나이지요. 이것은 모세가 시력이 좋아서 본 것이 아니라 뒤에 보니까 모세가 눈이 쇠한데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고 실제로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다고 해서 시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망원경도 안셨는데 산에 올라가서 저 북쪽 단까지 저 지중해 서쪽까지 볼 방법이 없지요. 어떻게 산맥이나 성이 가리워졌을 것인데 여리고성은 보았다 할지라도 소알성은 저 변두리에 묻혀 있을 것인데 다 보냐. 그런 말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보이면 이렇게 다 보이지요. 에스겔서 같으면은 강가로 끌고 가서 거기 포로 중에 있는 사람들도 보여주고 또 데리고 와서 성벽을 헐고 성전 속에서 우상 섬기는 것도 에스겔에게 보여주고, 다 보여주지요. 게시록 같으면 하늘 환상도 보여주고 왔다 갔다 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의 시력으로 본 것이 아니겠지요. 지금 옛 언약의 중보자, 이 사람이 가나안 땅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찬양을 받았는데 자기 죄 때문에 가나안 땅까지는 못들어가요. 그래도 이 대표자에게 눈으로 보도록. 어떻게? 비스가 산에 데리고 가서 전체를 보여주고, 자세히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골목까지 보여주어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이신 땅의 범위는 언약의 땅인데 이것을 묘사하기는 기업 분배의 방식으로 묘사한다. 모세 묘지의 위치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요. 보니까 알기는 알겠어요.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6절에 보니까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니까 요새 유골 발굴하는 식으로 그 골짜기를 찾으면 알겠지요. 요새는 천주교 신자들이 발견했는가 더 많은 것도 발견해요.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가다가 쉬워갔던 바위, 별 것이 다 있드라고. 그러니가 요술가들인가 봐요. 본래 고고학이 요술이어요. 그런데 그 정도 찾는 사람들이 이것 못찾겠어요.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기를 그 묘를 아는 법이 없다. 어느 때는 묘자리를 아는 듯 했다가 어느 때는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모세 묘의 위치는 유다서 9절을 보아도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여기서도 모른다고 해야 맞지요. 그러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나 건강 상태는 어쨌냐? 120살이었고 기력이 생생했다. 눈도 한나 쇠하지 않고 몸에 수분도 안말라지고 그 기력이 아주 청청했다. 그러니까 나이 많아서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이지요. 그런데 31:2절을 보니까 너의 출입이 온활치 않으니까 너도 죽어야 될 것이 아니냐. 은퇴해라.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맡기자. 거기서는 출입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인제 다 되어서 죽은 것처럼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그 전에는 직무를 넘기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모세에게 있는 직무를 여호수아에게 넘김이 강조점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 넘기는 것이 강조점이 아니라 못보게 소위 영광이 강조점이어요. 그러니까 기력이 다해서 죽어버렸다면 영광이 아닌데 기력이 팔팔한데 하나님이 대려가셨으면 이건 그냥 죽은 것이 아니지요. 마지막 산지까지는 옛 언약의 중보자를 영광스럽게함, 옛 영광의 중보자에게 그에게 약속했던 소망의 땅을 보여줌, 여기가 핵심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까지라도 전혀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아주 힘이 팔팔했다. 그렇게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가령 아담의 족보 중에서도 하나님이 대려가서 보이지 않은 사람이 누구지요. 에녹, 그 사람도 그때 나이로 하면 삼십대에요. 만일에 그 사람이 구백살 쯤되어서 어디 갔다면은 생각하기를 어디 골짜기 가다가 노인이라 죽었는갑다 그러겠는데 한 삼십살 때 갑자기 사라졌으면 동네가 수색하겠지요. 요새 개구리 소년도 몇 년을 찾지요. 왜냐하면 죽을 나이가 아니거든. 그런데 모세를 하나님이 데려가셨는데 하나도 죽을 기미가 안보여요. 그런데 데려갔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 표현방식들을 잘 비교해서 조사해 보면은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알 수 있어요. 34장은 옛 언약의 중보자를 영광스럽게 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봐라. 기업 분배 방식으로 전체를 다 보고 아주 골자기까지 완전히 다 봐버렸어요. 그리고 인제 올라가서 죽었는데 그가 건강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30일 동안 울었습니다. 옛 언약시대에서는 이처럼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은 오히려 슬픔이 더 클 것이어요. 인도자가 죽으니까. 그전에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죽으니까 70일 울었지요. 울고 나서 그 아들들이 떨었지요. 자기 아버지가 죽으면은 인제 요셉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할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유명한 사람들이 죽으면은 그 30일, 40일, 70일 이렇게 긴 애곡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30일을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새 3일장하고는 비교가 안되겠지요. 그런데 이것으로 장례식을 한 사람은 못보았어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의 죽음에서 나타난 영광은 무엇이냐? 쭉 읽어 보니가 건강한 사람이 죽었어요. 묘지도 몰라요. 죽기 전에 싹 보여주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자기 죄 때문에 인도는 못하고 죽는 것은 사실인데 죽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니까 전혀 비참한 것이 없이 완전히 영광스럽게 묘사를 해놓았다. 그래서 유다서 9절을 보면은 사탄이 이스라엘의 천사장이 누구지요. 미가엘, 미가엘하고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서로 싸우는데 미가엘이 사탄을 책망했는데 사탄이 급이 높은 타락한 천사여, 그래서 함부로 막말을 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라.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비록 엉터리어도 급이 대단히 높은 천사여.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안했는데 지금 이 가짜들은 자기 마음에 안맞으면 자기 마음대로 말하거든요. 권위를 무시하고, 그렇게 유다서에 이야기하면서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서로 논쟁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모세의 시체에 대한 논쟁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모세 시체를 발견하면 대대로 우상을 섬길 가능성이 한 가지 있고,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는 조상들을 섬기는 법은 없어요. 우리가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뿐이지, 그렇게 묘지를 신성화 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안맞을 것이고, 그 다음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은, 모세가 만일 죽어서 골자기에 내팽개처저 있으면은 말하자면 모세가 약속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가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저도 못들어가고 골자기에 죽어 버려져 있으면은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약속은 아주 조롱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 것이 구약에도 나오지요. 대표적으로 엘리야지요. 엘리야가 승천했는데 선지생도들이 야, 하나님이 데려가시다가 어느 골자기에 떨어뜨렸는지 찾자. 그렇게 엘리사가 찾지 말라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해도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올라가는 법이 있어요. 두루두루 찾고는 못찾고 그냥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엘리사가 부끄러웠지요. 자기 말 안들으니까. 만일에 엘리사가 불수레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하나님이 떨어뜨렸으면은 마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서 가나안 땅에 못가고 광야에서 그들이 시체가 되면 이방인들이 조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종을 영광스럽게 했던 것은 완전히 조롱되어버리지요. 엘리사의 증거는 무효가 되고. 엘리야의 시체를 못찾았지요. 아마 모세의 시체도 그런 의미로 감추인 것일 것입니다. 장례식을 했으면 묘자릴 찾는 것이 일번인데 묘하게 묫자리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장례식 비유로 하면 이 사람의 묘지는 없다. 그말입니다. 멜기세덱을 두고 성경은 그러지요. 시작과 끝이 없으니 족보 비유대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은 출생과 죽음이 있어야 사람인데 멜기세덱은 시작과 끝이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같지 않냐.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것처럼 여기 장례 비유로 하면은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이 데려갔다는 것과 같다. 무슨 말인가 알겠지요. 그렇게 묘사해 주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종은 분명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해서 직무를 따라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를 못했지마는 하나님이 옛 종에게 약속했던 것을 분명히 그로 볼 수 있도록 직무적으로는 제한이 있었지마는 그 개인적으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영광스럽게 했지요. 실은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려버린 것처럼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람이 아론도 그래요. 아론도 올라갔어요. 산 꼭데기에서 죽었고 내려올 때는 아론의 아들이 아론의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내려오고 아론의 장례식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안해요. 어디가 있는지. 단지 그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내려왔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도록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다 보았어요. 아주 조그만 소알성까지 다 보았습니다. 그 나라 전체를 여행한 식이어요. 그리고 죽었는데 힘이 정정했고 그리고 그 묘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 다음 9-에 보면은 모세 직무를 인계하는 식이 나옵니다. 만일에 모세가 죽고 후계자가 없으면은 모세가 땅을 보지 못하고 죽어도 안되겠지마는 땅만 봐갖고는 안되어요. 그 땅으로 인도할 직무자가 있어야 그것이 모세의 직무의 영광이어요. 그래서 모세가 죽었는데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모세가 자기 직무를 인계했습니다.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그런데 민수기 27장을 보면 안수하니까 지혜의 신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슴하시기를 눈의 아들 호세아는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니 네가 데려다가 안수해라. 이미 충만하니까 안수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모세가 안수하니까 지혜의 신이 충만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차이점들이 있지요. 민수기 27장의 문맥과 여기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문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문맥은 직무 인계에요. 그러니까 모세가 안수하니까 소위 모세에게 임한 영이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처럼 지혜의 영이 충만했다. 그 지혜는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지혜는 한 마디로 모세 율법이겠지요. 율법을 따라 움직이면 그건 지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어요. 이제 모세 율법을 따라 언약은 확증되었어요. 여호수아는 그 율법을 맡은 자로서 백성을 인도하면 되어요. 그러니까 지혜의 신이 충만했다. 그렇게 언급한다. 그러나 민수기 27장에서는 다 배교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다 죽으리라 그랬거든요. 인제 누가 죽습니까? 모세도 죽어요. 말하자면 반석을 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안드러냈거든요. 목자없이 죽으면 안되니까 후계자를 세워야 되겠다 하니까 누구에게 안수합니까. 여호와의 신이 충만한 여호수아에게 안수해라. 왜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니가 그는 배교할 사람이 아니어요. 그렇게 언급해주고 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권위는 모세의 권위지요. 왜냐하면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음으로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했는데 모세가 안수하니까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했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했어요. 이것은 한마디로 모세의 직무가 인계된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수아의 권위는 그가 안수했던 모세의 권위가 그에게 있는 것이어요. 물론 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여호와의 권위겠지요. 모세의 후계자에게 임한 은사를 보니까 지혜의 신이 충만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왜 지혜의 신입니까? 모세를 통해서 이제 언약은 완전히 채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언약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고 안들으면 벌받을 것이어요. 이제는 백성을 이끌고 여호수아가 들어가서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다. 그렇게 언급해 주고 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한 의미는 모세의 직무가 그에게 위탁된 것을 시인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세의 권위나 같은 말이지요. 결국은. 또 모세의 직무의 탁월성을 보면은 10-가 모세 직무의 탁월성을 말합니다. 아무리 모세의 직무가 여호수아에게 인계되었어도 여호수아는 모세 같은 사람은 아니어요. 그렇게 해서 옛 언약 채결의 권위를 전부 모세에게 두고 있어요. 어떤 권위냐 하면, 그 후에 이스라엘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는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이적과 기사,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하던 자로라. 모세 직무의 탁월성은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느냐 하면, 그가 제일 큰 선지자인데 어떤 의미에서 탁월하냐? 하나님을 대면해서 알았다는 그런 관계와 또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와 큰 권능을 바로와 이스라엘 중에 행했다. 그러니까 하나는 하나님과 교제 관계에서 탁월했고 다른 하나는 그가 구원자로 일한 능력에서 탁월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있지요. 이런 구원자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지자는 어느 때로 할까요. 이렇게 표현해버리면. 분명히 여호수아 때는 선지자가 있는 때가 아니지요. 사사기 때도 특별한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니어요. 선지자 시대는 실은 사무엘 때지요. 사무엘 때부터 선지 학교가 있고 본격적인 선지자 시대가 시작되어요. 그러면 선지자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면 마치 모세 막 죽고 여호수아 때 이 말을 하면은 무엇인가 안맞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첨가된 기록이 어느 때 기록되었겠는가? 이런 저런 추적을 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어느 때 기록되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때 언약이 채결되고 그리고 다윗의 때 가나안 땅의 왕조로 완성된 것이어요. 그러니가 어떠튼 그 말씀들은 모세 때 토대가 놓아져 있어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편집되고 조화되면은 그것은 다윗 왕조를 위해서 토대가 놓아질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기록했냐는 권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어떤 관계를 갖도록 기록해 주었는가, 가령 우리 신약 서신으로 하면은 예수님이 기록하지 않고 사도들이 기록했다고 하면 조금 권위가 떨어진 듯 하고 사도가 기록한 것보다는 누가가 기록했다고 하면 권위가 더 떨어지지요. 누가 같은 사람은 사도가 아니거든. 사도 따라다닌 사람이어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마가도 베드로의 조수니까 한참 떨어져 있지요. 그러면은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보다는 권위가 한참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요. 사도가 아니고 사도 제자급이 기록했으니까. 아마 우리보고 하라고 하면 옛날 신학으로 하면 그럴 것이어요. 단지 그것이 신약 서신하니까 학자들이 그렇게 공격하지 않은 것 뿐이지 아마 우리 보수신학으로 하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은 권위가 있고 사도들에게 들어서 기록한 것은 권위가 좀 떨어지고, 더구나 누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들었는데 하니가 얼만큼 권위가 떨어져요. 아마 우리는 그럴 것이어요. 그래도 아무런 권위 차이가 없는 것을 신약에서 시인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도 이런 저런 것이 붙어져 있을 때 그것이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전 식으로 접근하면 이것은 권위가 없어요. 여기서는 모세의 탁월성을 말해서 이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을 대행하는 자는 모세 뿐이다. 그러니까 나머지 모든 선지자는 누굽니까? 모세에게 매이게 되었지요. 모세만한 선지자가 없으니까. 그리고 분명히 모세가 말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리라. 했으니까 그와 같은 선지자는 이 선지 시대에는 안타났지요. 이제까지 이런 선지자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면 그때까지 없지요. 후로 그런 선지자가 와야 되겠지요. 그래서 모든 선지자들을 모세에게 종속되도록하고 그리고 모세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을 소망함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전부 읽어보면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모세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통해서 그에게 속한 자는 선지자들은 이제는 아무리 탁월해도 모세에게 속한자들입니다. 모세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슴하셨으나, 여기서 하나님의 중보사역자들을 말슴하셨다고 한 것은 항상 구약의 언약채결 방식을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셨다. 이렇게 합니다. 말씀하셨으나 이제 세상 끝날에는 아들로 말미암아 교회에 말슴하시며 행하십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하신 아들에게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영광을 주셨다. 모세는 종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마지막 말씀이신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대면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 구원을 위해서 보내사 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대면해서 듣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얻게 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의 구주로 세우신 아들을 믿으면 그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상속한다. 오늘 강론한 요한복음을 읽는 것 같지요. 구약 때 중보자는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못돌렸어요. 그도 중보자입니다. 탁월하게 하나님을 대면했거든요. 대면했다는 말은 같은데 모세는 종으로 대면했고 예수님은 아들로 대면했어요. 다르지요. 그러니까 단어풀이하면 안되겠지요. 구약에 대면한 상황이 있는 것이어요. 아무리 모세가 하나님을 탁월하게 대면했어도 종으로 대면했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대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품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다. 아들로서 대면했어요. 대면했다는 단어는 같아도 대면한 상황이 다르지요. 전혀 다르지요. 그러니까 단어 풀이가 그만큼 해로워요. 그래서 구약의 중보자의 탁월성은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과 구원의 능력을 행한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일을 아들 안에서 완성하셨는데 새 언약의 중보자는 종으로서 대면한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 대면한 분이시오 그리고 애굽과 자기 백성 안에서 이적과 권세를 행하신 분이 아니라 그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권세로 친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영하신 분이셔요. 우리는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리고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얻은 것입니다. 구약 때는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지마는 그는 자기 백성의 대표로 본 것입니다. 직무는 한계가 있지마는 그가 그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에게는 가나안 땅을 보인 정도가 아니라 하늘 영광의 처소로 불러들이셨고 모세는 보기는 했어도 들어가지는 못했지마는 예수님은 거기 계시고 그리고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인도했지마는 예수님은 영원히 자기 백성을 그쪽으로 인도하신 분이셔요. 그분 안에서 완전한 하늘의 구원을 본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모세의 영광도 단순히 그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이전에 언약의 중보자로 충성했던 종에게 영광을 보여준 것이고 다시는 그런 중보자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 개인적인 잘못 때문에 그 직무를 완결하지는 못했지마는 그는 분명히 자기에게 허락한 땅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됐어요. 그러나 마지막에 세우신 중보자는 그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했지마는 그 약속은 예수 안에서 탁월하게 하늘의 질서로 완성된 것이다. 모세 이후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둔 적이 없어요. 모세 안에 모든 모세 제도의 토대가 놓아져 있어요.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라도 모세에게 속해요. 그러니까 모세 이후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난 적이 없어요. 누구만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만 모세보다 더 높은 선지자예요. 저 높은 제사장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게 영원히 하늘을 상속하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산다. 그것이 34장에서 옛 중보자의 영광을 통해서 이제는 새 언약의 중보자를 통해서 교회가 누리는 영광을 증거하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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