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명기 강해
성경:신명기 30장
(신30:1-20)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10)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행하게 할꼬 할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1-10절까지는 회개하면은 복을 주시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9장에서는 회개하면 그런 것보다도 하나님이 그들을 진노하신 내용이 쭉 기록되어 있거든요. 1절에 보면 이런 모든 진노가 특별히 복과 저주가 여기 말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회개하는 것이지요.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면은 포로된 것을 돌이키겠다. 그들이 하늘 가 끝까지 흩어졌을지라도 거기서 그들을 돌이키겠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너희 조상들보다 훨씬 번성케 해주겠다.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서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해주겠다. 그리고 너를 대적했던 모든 대적은 이 모든 저주가 임하게 되고 7절, 그리고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겠다. 1-10절까지는 회개하면 언약의 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쫓겨난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기억하고 행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쫓겨났는고, 여호와를 불순종해서 그렇게 됐구나. 그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그것을 노래로 32장에서 지었지요. 그들은 대대로 죄지어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노래가 있어서 그들이 애굽 땅에 가서 그렇게까지 노래를 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저 뭐 멀리간 사람 아리랑을 부르드만. 그러면은 그 노래가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들이 범죄하니까 이렇게 망한 것이 아니냐. 그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소망을 갖고 회개하겠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쫓겨난 나라에서 그들이 행할 일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이런 일이 닦쳤음을 알고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 이스라엘이 돌이키면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음 무엇이냐?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의 복으로 다시 들이겠다는 말인데, 그것을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 뿐이어요. 3절을 보니까 다시 모아서 포로에서 회복하겠고, 어느 정도 모으냐 하면, 4절을 보니까 「하늘 가에서 모아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 보니까 돌아온 땅에서 번성케 하겠다. 6절에 보니까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서 순종케 해주겠다.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모든 저주는 원수에게 돌이겠다.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언약의 복으로 다시 돌이키고 그리고 그들을 저주하는 자들에게 모든 저주를 쏟는 것은 가나안 땅 복 이야기지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쫓겨나니까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당연한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인데도 하나님이 그런 모든 저주는 너희들을 조롱했던 자들에게 쏟아버리겠다. 하나님 나라 언약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배것을 조롱했기 때문에 그런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은 한 마디로 하면 언약의 복으로 다시 들이겠다는 말인데, 이전에 새로운 일이 몇 가지 있어요. 물론 조상들보다 번성케 하겠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번성케 하는데, 어떤 일이 특별히 새롭느냐 하면, 6,7절이 새롭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겠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그렇게 해주겠다. 29장4절에서는 아직 깨닫는 마음은 안주겠다고 했지요. 가아나 땅 언약은 그런 상태에서 언약을 채결하고 있는데 그들이 범죄하고 넘어지면은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경영하시는데 깨닫는 마음을 주심으로 그 나라를 경영케 하겠다. 다시 저주와 저주가 어떻습니까? 없겠지요. 그런 말을 한다. 깨달음을 안주었는데 왜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나타난대로 책임이지 깨닫는 마음을 주었느냐 안주었느냐 과정이나 단계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고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대하든지 언약에 책임이 있다. 그것만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고 나타난 것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직 깨닫는 마음을 안주었으니 하는 것이 그들의 핑계거리가 전혀 안된다. 이것을 관계적인 언약으로 안풀고 그전처럼 기능으로 풀면은 하나님이 그런 기능을 안주었으니까 범죄가 당연하지요. 그러면 전부 하나님께 책임이 있지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그전 해석법이어요. 여기서는 아이에게 말했으면 아이가 나는 어른이 아니니까 범죄하지, 그런 말을 하면 안됩니다. 아이는 아이로서 하나님 앞에 행하면 되어요. 그러니까 전혀 사람은 핑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묘한 리은 하나님게 속하고 나타난 일만 사람에게 속한 일이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재림해야 죄를 안짓지요.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 우리에게 지금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라고 했지 재림한 뒤로나 완전하게 지켜라.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관계에서 순종하면 되어요. 그런데 그전에는 죄 아래서 그 나라를 경영했기 때문에 깨닫는 마음이 없었어요. 이제 돌이키게 했을 때는 깨닫는 마음이 없었을 때 그들이 실패했는데 돌이켰을 때는 그렇게 안하고 완전한 순종의 새 맘을 주겠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언약의 복을 신명기에서 미리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약속들이 이제 포로기에 선지서들에서 약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역사는 신명기적으로 해석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푼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여기 있는 말대로 하면 되어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를 순종해서 생명을 얻게 하겠다.」 29장4절에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 그것이 마음에 할례에요. 할례가 없으면 이방인이지요. 그러니 마음에 할례가 없다는 것은 완악하다는 말이어요. 왜냐하면 할례가 언약에 속하거든요. 그 표를 마음에 두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구약 때는 마음에 할례를 안행했고 우리만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요. 마음에는 없고 외적으로만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전에 할례방식과 새 할례 방식을 대비시키는 표현법이지 그전에는 전혀 마음에 전혀 은혜가 없다가 이제는 마음에 은혜를 주고 그런 말이 아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의 할례를 행함으로 언약 백성 삼으셨지요. 이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베풀겠다. 새로운 언약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구약 때는 마음에 은혜가 전혀 없다가, 구약 때는 완전히 예수님 -만 있고 마음에 전혀 은혜가 없다가 신약 때는 전부 마음에도 은혜를 주고 그런 기능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전의 언약과 새로운 언약의 언약채결 방식을 대조해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시 사랑하신 이유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 때문에 그렇지요. 이 본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조상들보다 더 번성케 해주겠다.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기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어요. 조상들의 약속이 구약 아래서 집행된 것은 모세 때에요. 모세 때 아브라함의 후손을 나라로 조직하고 가나안 땅을 주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신령한 후손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경영으로 개통되지요. 그것이 교회에요. 둘다 다 아브라함에게 포함된 것이어요. 그런데 모세 때는 죄 때문에 더해진 것이고 이제는 그 약속이 완결되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언약에 참예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이 진정한 성취는 우리고 구약 때는 괄호로 씌워진 것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의 설명입니다. 조상들에 대한 약속이 불변하기 때문에 모세 경영에서 이스라엘은 실패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새로운 약속이 집행될 수가 있는 것이어요. 만일에 모세 제도만 본질적인 약속이고 그 이전에 본질적인 약속이 없으면은 그 약속은 범죄해서 가나안 땅 밖으로 던져버리면 끝장이어요. 일단은 끝입니다. 왜 신명기 약속은 가나안 땅까지가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겠다는 말은 새로운 약속들을 여기다 보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서의 전면에 들어납니다.
율법은 11-14절은 지키기 쉽다고 말해요. 11절에.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쉽다. 14절에 보니까 「행할 수 있느니라」 그런 말을 하고 있지요. 이 율법을 그들이 어려워서 못지킨다거나, 이전 29장의 말대로 하면 마음에 깨닫는 마음을 안주어서 못지킨다거나, 그런 말이 없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요. 율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는 말을 설명하기를, 12-13절에 설명하고 있지요.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다. 11절이지요. 12절부터 설명은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행하게 할꼬 할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도 아니라.」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먼니가 못지키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못지킵니까? 외국 말로 하면 못지키지요.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봤냐. 하나님이 내려오셨거든요. 가르치셨어요. 먼 것이 아니어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졌고 그들의 입으로 고백했어요. 왜 언약의 말씀이니까. 그런데 이것을 복음서에서는 더 가까이 왔지요. 구약 때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가까이 왔어도 휘장으로 가리우고 가까이 오셨어요. 그렇게 됐지요. 누가 천국갔다 왔냐. 보았지요. 시내산에서 말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니까. 그들은 가까이 있는 언약 백성이어요. 멀면은 안되어요. 그런데 우리는 더 가까이 있지요. 왜냐하면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예수를 올리는 것이다. 누가 음부까지 내려가겠느냐. 그렇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을 똑같이 로마서에서 인용하고 있지요. 복음의 말씀이 심히 가깝다. 구약의 율법보다 더 가까운 것이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킬 수 있지요. 구약은 지켜도 가깡이 오신 것만큼 휘장으로 가리운 것 만큼 거기까지가 그들의 삶의 질서인데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지금 범죄해 놓고, 아이고 재림이 아직 안되어서 범죄했네 하는 말은 틀린 말이고, 천국 가보야 알지 하는 말도 거짓말이지,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계셔서 그 말씀을 가르치니까 핑계할 수 없어요. 그렇게 신약에서 인용하고 있다. 어려운 것도 먼 것도 아닌 이유는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이 말씀으로 언약을 채결했다. 언약의 말씀을 그들의 입술에 주었어요. 먼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이방 백성은 율법을 못지키지요. 율법을 주지 안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 아래 두었지요. 누가 천국갔다 왔냐. 하나님이 오셨지요. 그들이 언약의 말씀을 입에 담고 있지요. 그러니까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더 가깝다. 생명과 복을 택하라는 결론적인 권고로 끝내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은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반복법이지요. 생명과 그 다음에 복은 같고 사망과 화는 같겠지요. 그러니 너는 택해라. 그 말이지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규례를 지키면 번성할 것이요 또 땅에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생명과 복은 17절에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생존하고 번성하고 가나안 따을 얻을 것이다. 언약의 복이 복이지요. 항상 주어진 관계에서 복이지 복이라고 해서 모든 좋은 것이 복이 아니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해도 해 준 것은 몇가지 안되어요. 그 관계에서만 주는 것이지 아무 것이나 끌어다 붙이면 안되어요. 우리에게는 가나안 땅의 복을 약속한 적이 없지요. 그런데 구약을 우리에게 막 끌어다 붙이면 안되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에 구약과 비교해서 저주받은 것처럼 눈물 찔끔찔끔 흘리고 있으면 안되지요. 구약 때는 그러면 낙심해버려요. 신약 때는 승리한 것이어요. 부활의 승리를.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능력의 시대에요. 그런데 여전히 교회를 어린 아이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의미는 여기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6절에 보니까 여호와를 사랑하고 모든 길로 행하면 법대로 지키면 그러면 이 언약의 복으로 주실 것이거든요. 17절을 보니까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그러니까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언약을 지킨다는 말이지 절대법을 지킨다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니까 알겠지요. 여호와를 섬긴 것과 반대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를 왕으로 누구를 남편으로 섬기느냐 이 말이지 절대 기준에 도달함 그런 개념을 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율법을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주신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것이고, 언약을 배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나안 땅에 주신 여호와를 배반하고 가나안 땅의 다른 신들을 섬기면 언약을 범한 것이다. 그러니가 지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믿으면은 언약 아래 있고, 만일에 그 믿음을 버리고 도덕쪽만 치중해 보았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우상을 안섬겨도. 항상 하나님은 언약적인 관계에서 나를 따르라는 언약의 법이지 절대적인 기준을 정해놓고 누가 내 높은 경지에 도달하겠느뇨. 그런 율법의 개념은 없다. 그쪽으로 출발하지 말라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백점이 무엇이냐?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만 안섬기면 되어요. 모세 율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것이어요. 그 대신 어린아이로 신실한 것이지요. 12절 언약의 복을 주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생명과 장수가 되시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느냐? 19절에 천지를 불러서 증거하는데 다시 15절로 돌아가 있지요. 끝이니까 앞에 것과 맞추겠지요. 복과 저주를 여기서는 다른으로 쓰고 있습니다.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순종해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언약의 복을 주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생명과 장수가 되시니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하나님은 생명이시라. 존재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생명과 장수는 그분으로터 오는 것이어요. 지금도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평강을 얻은 것은 그가 우리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이지 그가 만일 우리 하나님이 되시지 안했으면 우리에게 복이 없어요. 그러니까 조상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을 아직 누릴 때가 아니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을 누리지요. 왜 관계가 그렇게 맺어졌으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로부터 설명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과의 약속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예수 믿고 똑같이 천국간다고 하면 예수 오실 필요도 없다.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면 똑같이 천국가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 존재론적인 구원을 말하면 오실 필요가 없어요. 역사는 발전할 필요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버려야지. 그러니까 구원 역사적인 배경을 안풀면은 그것은 만고불변한 보편 타당한 종교 철학은 될련지 몰라도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지 못해요. 그걸 깊이 붙드셔야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언약의 땅에서 뽑아 열국에 두시고 그 땅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두게 하신 것은 29장 이야기입니다. 언약을 범한 이스라엘을 언약의 복으로부터 배제한 것이다. 그들이 당장 안주어도 언약의 땅 밖으로 쫓겨나버리면은 언약의 복으로부터 배제된 것이지요. 그것이 신명기의 저주입니다. 그러나 배제된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임한 저주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범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죄 때문임을 기억하고 마음을 다해서 돌이키면은 여호와께서도 그들에게 돌이키실 것이다. 여호와는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의 언약을 맹세하신 그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언약 백성으로 삼으사 기업의 땅에 심으시고 더욱 번성케 하시며 마음에 할례를 행하사 그들로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율례를 지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모든 저주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당신들 언약의 복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사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율례를 지키게 하사 다시 저주가 없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신명기 역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율법이 어렵거나 멀리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들으시며 그들 중에 강림하사 대면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요, 누가 영어로 말하면 못알아 듣고 어렵겠지요. 그러나 우리말로 하면 쉽겠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미신적인 상황에 있으니까 모르면은 방언으로 하면 저 사람 신기하도다. 그런다 그말이지요. 욕을 해도 모르지요. 그런데 설교는 못알아 듣겠다고 싫어하거든. 그래도 왜 방언은 못알아 들어도 좋아하냐고. 알아 들어야 복이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방의 언어로 알아듣도록 가까이 오셨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못들었다거나 몰랐다는 중, 모세만 들었지 우리는 감감 무소식이라는 둥 그런 말은 있을 수 없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가 언약의 복인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생명과 장수는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순종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면은 언약의 땅에서 여호와와 함께하는 생명과 복을 주신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은 화가 있다. 항상 언약적인 문제입니다. 가나안 언약이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를 사랑하사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 언약을 이루셨다. 그 나라의 언약을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후손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시작했다. 모세 율법 아래 있는 나라는 아직 이스라엘의 후손에게 때가 되면 주시지 않은 상황 곧 그의 권세 아래서 경영하신 나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만 사랑하고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 백성의 의무요 생명이다.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말미암아 나타나신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의무였다. 언약적인 관계를 설명하면 아무런 반대 증인이 필요가 없지요.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다른 신을 섬김으로 그 나라의 언약을 범하면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하사 언약의 땅에서 뽑아내사 열국의 종으로 던지셨다. 항상 독자적인 언약입니다. 왕과 백성 간의 그런 언약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범하였다. 여호와는 그 언약에 신실하셨다. 이방 땅에 던져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사 깨닫는 마음을 주시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게 하시고 언약의 땅에서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언약에 신실한 백성으로 삼으시며 다시는 저주되지 않게 하신다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갱신된 이 언약은 깨어지지 않는다. 범죄해야 깨어지겠지요. 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언약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에 질서로 완성하시어 조상들에게 언약하신대로 이스라엘과 천하만민 중에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교회를 죄로부터 돌이키시고, 종인 모세로 말미암은 율법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은 사람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다.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리심을 받은 복음 아래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 곧 하나님의 신실한 그런 교회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들이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개인적인 경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관계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가령 약혼했으면 결혼하도록까지는 혹 불안할 수 있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둘이 연애만 할 때는 약속하지 않으면 더 불안하겠지요. 그래도 약혼해도 결혼까지는 딸을 둔 부모는 조마조마한 때가 있어요. 둘이 사랑을 가짜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관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관계를 말하는데 그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넘어져 놓고도 넘어진 것이 정상인 것처럼 넘어진 그것으로 읽어들어가요. 그러니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어요. 자기 범죄심리로 읽어버렸다 그말이어요. 그것은 믿음으로 서지 못한 자기 죄를 고백해야 되지 하나님이 그런 수준으로 우리를 대하니까 그러면 큰일이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어둠이 없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둠의 종으로 넘어지는 것이어요. 우리는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두움이 만지지 못한다. 한 마디로 결혼했으면 헤어질 수 없지요. 그런데 결혼했을 때 부부싸움을 해놓고는 아이고, 사람인디 별 볼일 있겠냐. 그래갖고 마치 결혼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은 전혀 거꾸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관계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 그 관계에서 믿음으로 깨어 사는 것인데 그렇지 못해 놓고도 사람치고 안싸우고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싸움을 전제로 한 부부는 없어요. 부부는 한 몸이어요. 그런데 깨어 있지 못해서 서로 싸우는 것이어요. 약혼했을 때도 싸우지요. 그건 안된다. 약혼했을 때는 조심하느라고 안싸워요. 천사처럼 대하느라고. 그런데 결혼해 놓고는 서로 막 내놓고 한다고. 그것이 결혼의 은혜지요. 막내놓고 싸워도 안깨지니까. 약혼 때 그랬다가는 아하, 미리 알기 다행이다. 하고 대비책을 세우면 큰일이지요. 그것이 결혼의 특징이어요. 왜 그것을 우리의 죄를 발동하는 방식으로 쓰겠느냐. 그말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 언약은 항상 구약에 약속이 있으면은 그 약속은 일단 그 문맥에서 해석해야 되고 그리고 이 약속이 구약 자체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해석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항상 자기 백성을 위한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이것이 신약의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계되는지, 관계되었을 때 어떤 것과 관계되는지, 관계된 그 양상을 살펴야 되겠지요. 관계된다고 전부 관계된 것이 아니니까. 어떤 점에서 관계되는지, 그러면서도 이 관계가 어떻게 이전 약속을 성취하면서도 이전 약속을 넘어서는지, 그 넘어선 차이를 말해야 신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할례를 베푼다고 해도 마음에 할례를 베푼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킨 것이 마음에 할례라고 약속을 했어요. 그래도 그들에게 주신 제도는 항상 모세제도 할례이상은 아니었지요. 단지 그들이 이방의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깨닫게는 했지요. 그래서 온전한 성취는 아니어요. 이 성취를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도록 세례시켰기 때문에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새로운 질서로 살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있다. 어떤 말씀을,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어느 정도 가깝게 있습니까? 아들의 영으로 우리 안에 같이 있어서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뜻을 알고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어요. 그렇게 가까이 오셨다. 그러니가 나는 몰라도 못했느니, 나는 목사가 아니어서 못했느니, 마치 간격이 멀어서 못한 것처럼 이해하지 말아라. 어느 누구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부정할 수 없는데 왜 그분에게 범죄했놓고 나는 몰라노라고 말하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구약 때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새롭게 지었지요. 그런데 모른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복이어요. 저주는 이방 땅에 던져진 것이어요. 복은 복인 것이 아니라 복이지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안함,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평안함을 말하고 있지 안해. 가령 결혼 후에도 한 마음, 그러면 둘이 죽자살자 사랑하면 한 몸인줄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아니면 한 몸이 아니어요. 그러니가 일남일녀로 결혼하라 그러면은 세상 법밖에 안되는데 우리는 믿는 신자끼리 결혼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말하는 인류는 소위 종말론적이어요. 예수 재림하시면 신자만 남고 불신자는 전부 지옥가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신자끼리만 결혼하지 아무나 일남일녀로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어요. 그러니가 성경의 진리는 그냥 인간 윤리와는 달라요.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윤리에요. 그러니가 복이라는 것도 일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복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들도 지금 먹고 사시니까 예수 믿으면 그것이 잘되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면은 소위 존재론적으로 하면 그 말도 맞아요. 하나님이 교회도 주관하고 세상도 주관하고, 이것도 주관하고 저것도 주관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거든요. 그러면 그 말은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존재론적으로 복을 정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복을 정해주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이시지 먹고 마심을 통해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구약 때 했던 이야기에요. 그러니가 하나님이 천국도 가게 하지마는 지금도 살게 하니가 이것도 복이다. 하고 해석하면 안맞들어가버려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넘어선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되지 이것도 주었고 저것도 주었다고 그 나라는 번성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러면 주신 복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더 큰 영광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적인 말로는 이것도 하나님이 주셨지 않느냐. 그렇게 설명하면 안되고 우리가 받은 복은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이어요. 그 나머지는 일단은 그 생명의 성령이 완전히 이루어지도록까지 겹처진 복이어요. 약속적으로는 그렇게 풀어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현금으로 계산해요.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고 저것도 하나님이 주신다. 말은 맞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계하기는 먹고 마심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먹고 마심은 구약 때 관계했던 방식이어요.
그러니까 여러번 말했지마는 부자지간의 관계에서 아버지를 말한 것은 부자지간의 말이지 그것을 떠나서 보편화시켜버리면은 아버지는 굉장한 거짓말쟁이지요. 가령 내가 너만 사랑한다고 큰 아들에게 했을 때도 동생들은 다 떼버리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문맥은 큰 아들을 권고한 말이지 네 동생들은 다 떼놓고 너만 내 아들, 그 말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 말도 관계에서 해석해야 되지 아, 우리 아버지는 동생들은 상관없고 내가 일번이구나. 그전에는 그런 줄 몰랐더니. 그리고 비교적으로 하면 묘한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아가도 말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게 못해줄 것이 무엇이 있냐. 구하기만 해라. 너에게 다 해주마. 아버지가 돈이 없거든. 그러니까 거짓말한 것 같지요. 국민학생이 컴퓨터 사달라고 하면 돈이 없지. 연필 사달라고 하면 될 것을. 그 관계에서 하는 말을 우리 아버지는 능력이 많해 하고 보편화 시키자 말자 우리 아버지 돈 별로 없어요. 그런데 아들에게는 다 해주는 사나이로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마침 우리 하나님은 전능자거든. 그러니까 그걸 모르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여기 저기 손을 뻐칠려고 그래요. 아무리 전능해도 구약 때는 부활의 생명을 안주었지요.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것은 우리에게 안주셔요. 우리 먹고 마시는 것도 주의 손의 것으로 먹여요. 달라지지요. 그런 달라진 것을 모르고 해석했던 것이 그전의 신앙고백서의 방식이다. 그런 말입니다. 존재가 불변하니까. 뜻도 불변한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관계하시니까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존재도 변하고 뜻도 변하고 하나님의 성질도 변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 관계에서 하나님을 누려야 된다 그말입니다. 집사님도 아이들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공부만 잘해라. 내가 너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주마.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엄마, 하고 무엇 사달라고 하면 못사줄 것이 많지요. 그러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 필요한 것을 사주겠다는 말이지 아직 시집도 안간 것에게 자동차를 사주겠어요. 무엇을 사주겠습니까. 그건 전혀 상관없는 말이지. 그래도 네가 시험만 잘보면 무엇이든지 사주마.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상황은 다 빼버리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지 않느냐. 구하라. 구한대로 받으리라. 그리고 문맥은 싹 빼버리고 다 구할 것이 이런 거짓말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그건 문맥을 모르고 읽어버려서 그래요. 부자지간의 말은 그냥 이해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 그 한계점을 모르고 막 읽어버린 것이어요.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스스로 매이신 분이셔요. 우리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정의하니까 만사가 불변하신 분이시거든. 그렇게 읽어버리니까 미신적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입니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주리라. 구하는대로 주리라. 뭘줘요. 조상들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구했는데 못얻었지요. 아직은 때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돈벌이 하는데 그 말을 쓰고 있어요. 구하라. 입을 넓게 열라. 내가 가득 채워주리라. 네 시작은 미약하나 후에는 창대하리라. 믿사오니 확신이 생기니까 장사는 잘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그래요. 비교해 보니까 미국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고, 이병철이 보다 불교 신자가 훨씬 가난하고 구약 신자 보다 훨씬 가난해요. 그러면 알 수 있지요. 계산만 조금 해보아도. 그래 놓고도 가난한 교인들 앞에서 좋다고 웃고 있어요. 그것은 완전히 귀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그것이 아무 거룩한 말씀이어요. 다 큰 아들이 어린 아이짓을 하면 정신 나간 것이어요. 그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말입니다. 지금 우리를 대하는 큰 것, 하늘에 속한 것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이기라는 말인데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두려워 떨고 있어요. 그리고 어서 주일이 지나야 내일 돈을 벌지요. 나도 통합측 교회만 출석했어도 훨씬 크게 잘될 것인데, 내가 무엇할려고 이 교회에 왔던고. 똑같은 예수, 천국 누가 천국 가보았소. 예수님 오시고 부활하신 것 아무 상관 없어요. 내가 가보고 내가 구경해야지. 그러고는 안듣습니다. 자기 전 생명이 복음에 걸려있지을 안해요. 자기 말로 자기가 정죄를 받아도 몰라요. 여러분, 그건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말로 다할 수 없이 강조한 것이 역사적인 문맥에서 풀어라. 배경에서 풀어라. 그리고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로 교회를 권고해라. 그것이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그런 것이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불변하니까 천국가는 기준이 불변하겠지요. 오직 율법지키는 것, 이렇게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천국 외상으로 받아버렸던 것이어요. 다 천국갔다고. 그러니까 구약의 성례나 신약의 성례나 효과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만도 못하게 풀어버려요. 천주교는 어떻게 풉니까? 구약에 할례받은 사람은 천국에 못갔다. 이것이 또 잘못된 것이 운명론적으로 풀어버렸거든. 그러니까 잘못 푼 것이지요. 역사에서 풀면 천주교의 말이 맞아요. 그러나 할례받음으로 휘장 밖에까지지 하늘에 오른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식으로 그들은 천국의 예비처소에 있느니라. 풀어버리니까 묘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세대론이나 천주교나 우리 개혁파 보다는 훨씬 역사상에 있는 점에는 나서요. 단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운명론으로 푸니까 개혁파에게 밀리는 것이어요. 하늘에 운명이야 예수의 부활 빼놓고 올라갈 자가 누가 있소. 그것 빼놓고 없거든요. 그쪽으로 공격하니까 밀리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세대론도 아니다. 항상 구원은 역사적인 이야기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이런 약속을 주셨으니까 한번만 물어보면은 아하, 그전과는 이것이 다르구나. 여기가 핵심이 있구나. 그냥 강조점을 알 수가 있지요. 저는 문제 내기가 아주 쉽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렵지요. 또 어렵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은 우리는 다 큰 어른이지요. 그런 의미로는 절대로 안어렵다. 그말이지요. 컴퓨터처럼 문제만 넣으면 답이 착착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제가 지금 쉽다는 말은 구원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쉽지요. 부부끼리 제일로 쉬운데 그 말 못알아 듣겠지요. 그것처럼 어려울 때도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밝히 알수 있게 되면 아주 쉬운 것이고, 구약 백성들까지 아주 쉽도록 알려준 것이지요. 지키도록. 그런 의미에서는 쉽다. 그것도 그렇고 지금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자는 이야기인데요 우리처럼 이렇게 모세 오경만큼이라고 이렇게 이런 내용으로 푸는 것이 교회사에서 몇시에나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교회사적으로도 없는 아주 큰 은혜에요. 인제 우리보고 쉽게 합격하라고 그런 것이지요. 그건 아니겠지요. 많이 맡은 자의 책임이어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는데 모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히 밝혀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지래 짐작으로 어렵다는 생각 하지 마시고 마음을 열고 읽으면 알기 좋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이 기록된 문장은 자기 백성에게 알기 쉽게 알리는 것이지 감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읽으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