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벨론의 정체와 심판Ⅰ
성경: 요한계시록17-18장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살리셔서 이제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하나님 품에 거하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하늘의 영광과 그 권세를 봉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영광과 권세를 주셨는데도 우리가 이 생명과 믿음으로 살지 못했던 모든 어두움을 주께서 이 시간도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원수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셨으니 이 크신 사랑 안에서 이제도 우리의 많은 허물들이 용서되며 정결함을 받은줄을 믿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이 시간도 주님의 크신 영광의 빛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비추셔서 주 예수의 얼굴에 비추는 사랑과 생명과 영광의 빛 가운데서 우리로 하늘에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존귀한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해주시고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고 교회에 크신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17,18장을 읽고 강론하겠습니다. 계시록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했던 학자들도 어려움을 겪었던 문제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계시록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은 뭐 우리들은 시한부 종말론, 언제 예수님이 오시는가? 그런 이단이 아니니까 우리는 완전하다. 그럴 것이 아니고, 이 성경은 때를 알아맞추는 잘못단 이단만 경고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싸움을 싸우는 교회를 위해서 기록한 서신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몇월 몇일날 예수님 오신다. 그런 교회는 열심을 내도 이단이고, 우리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으니까 정통이다. 하고 점잔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날자를 짚어서 미혹한데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지마는 그래도 그들이 예수의 재림을 사실로 믿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헌심했던 점들은 본받을만한 일입니다. 단지 우리 정통파는 날자를 말하지 안했다는 것 뿐이지 사는 삶은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아무 상관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 놓고도 날자 한 가지 짚으지 않은 사실 때문에 우리들은 괜찮으려니 그런 자만심에 빠져있습니다.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셔야 될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이나 어린이 날이 되어서 그런 설교를 하면은 우리들이 다 부모도 있고 자녀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빨리빨리 이해를 해요. 관심이 있으니까. 또 자기 자녀들을 믿음으로 기르고 싶어하니까 다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그만큼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은 자녀를 기르는 것 못지 않게 우리 믿음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어떤 투쟁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진정 어둠의 권세와 투쟁하는 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 것 때문에 여러분이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단지 제가 계시록을 강의하는 것을 상당히 주저했던 것은 우리 나라 교회는 소위 경건주의적이 이분법을 배워가지고 교회 활동은 거룩하고 교회 밖에 활동은 아주 부정하고 얼른 있다가 천국 가버릴 것인데 임시로 살고 있구나. 그런 이분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상당히 저주했습니다마는 실제로 계시록은 어두움의 권세와 싸움이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령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삶을 사셔야 될 것입니다.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어려운 점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 계시록을 통해서 장차 나타날 사건들을 연구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또 주로 계시록을 강론했던 사람들은 세대론인데 소위 우리 정통파 무천년설은 계시록을 그렇게 많이 강론하지 안했습니다. 세대론들이 많이 강론했는데 장차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될이며 또 중동 전쟁이 날 것이고 이렇게 이스라엘을 중심해서 역사를 쭉 해석하니까 관심이 대단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이천 년 만에 돌아와서 나라를 건설했고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몇분의 몇, 소련에서 온 사람만 한 백만이 된다고 하니까 많이 돌아와 있어요. 그런 것 때문에 대단히 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계시록을 푸니까 아주 실감난 듯 하면서도 또 계시록과 맞추어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그래서 상당히 혼란하기도 하고 미혹되기도 하고, 그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런 이스라엘의 흥망성쇄를 여기서 직접 설명할려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마는 계시록은 지금 로마 정권 밑에서 고생하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때 로마는 어떤 제국이냐 하면은, 항상 구약의 다니엘서, 또는 에스겔서, 또는 뒤에 보면 예레미아서 이런 서신들을 많이 참고를 해야되는데, 로마 제국은 어떤 나라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인자에게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 나라가 로마 제국이어요. 다니엘이 짐승을 보았는데, 네 마리 짐승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나온 짐승은 다른 짐승과 달라 이빨이 철이고 뿔이 열이고, 아주 쌥니다. 특별히 뿔이 열인 것이 다른 짐승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뿔 열 해서 대단한 권세를 그렇게 말하고 있고, 또 이 뿔 열 중에서도 마지막에 나온 뿔은 묘해요. 마지막 한 뿔이 나와서 열 뿔 중에 세 뿔을 뽑아버리고 이 마지막 뿔이 세 굉장히 커지면서 이 뿔에 눈도 붙었고, 아주 하나님을 훼방하는 고약한 말도 하고, 바로 이럴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인자의 나라,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세우리라. 이런 환상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권세에 완전히 굴복되고 하나님의 성소는 파괴되고 언약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성도의 권세는 깨어져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요. 그때부터가 성경에서는 이방인의 때입니다. 다윗 왕조가 완전히 무너지고, 성소가 불타졌으니까요. 또 언약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갔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언약이 끝난 것과 같아요. 그 뒤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까지라도 소위 독립국, 이전처럼 다윗 왕조와 같은 독립국을 이룬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방인의 때에요. 성도의 권세가 깨어진 것이어요. 바로 이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데 70년만에 바벨론에서 해방시키는데 그 해방과 함께 과연 세상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지금 70년만에 해방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완전한 해방은 무엇인가, 완전한 구원은 무엇인가? 그런 것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네 짐승과 그 짐승을 심판하는 하늘의 속한 인자의 나라, 그것이 다니엘게 보여는 상이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주어지느냐 하면 네 번째 짐승 나라에서 세워졌어요. 물론 역사적으로는 황제 아우구스 때 호적하라고 그랬지요. 그때 예수님 나셨지요. 로마 역사에서는 아우쿠스 때가 황제 정치가 정착될 때입니다. 그때부터 로마의 평화를 주창하고 또 로마의 황제는 신의 아들로 추앙되고 모든 사람에게 황제 숭배를 요구하는 때에요. 소위 팍스 로마나 해 갖고 로마의 평화는 황제 아우쿠스 때 주창한 것입니다. 마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모든 나라는 내가 세웠도다. 모든 나라는 내 나무 그늘 밑에서 먹을 것을 얻어라.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도 그런 권세를 자랑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리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은 나라를 세우셨어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로마 정권 밑에서 계속 핍박을 받고 있거든요. 그랬을 때 이 교회에 무엇을 격려하느냐 하면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으니 교회도 승리할 것이다. 싸워라. 그런데 이 싸움은 어디다 총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은 마지막 싸움에다가 초점을 맞춥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두 번 비유를 들었습니다마는 신학적인 언어로는 종말론적인 언급이라 그러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은 가령 우리들이 고등학교 1학년만 들어가도 목표는 어디입니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대학에 들어가는 점수에 맞추어서 계획들이 움직여지고 그럴 것이어요. 또 결혼 날자를 받은 사람은 그 결혼식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조절되고 움직이는 것이고, 아이를 밴 사람은 출산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조절되고 해석되는 것이어요.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 결혼 날자를 받은 사람은 결혼식을 위해서 그것이 전부 진행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처럼 지금 교회가 로마 정권 밑에서 싸움을 싸우고 있는데 앞으로도 많은 싸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했으니 교회도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 싸움에다 전부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계시록은 마지막 사건에가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세대론자들이 계시록을 마지막 사건에다 집중하고 그것을 이스라엘 역사에다 자꾸 맞출려고 하니까 우리 보수파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싸움은 항상 있는 것이다. 그쪽에다 강조를 두었지마는 여러분이 문자적으로 쉽게 읽어보아도 마지막 싸움에다 총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어요. 그런데 그 마지막 싸움이 우리하고 어떤 관계가 있느냐? 방금 비유를 들었든 것처럼 이 마지막 싸움에서 역사가 완결되겠지마는 지금 교회는 마지막 싸움을 싸우고 있는 시대에 있는 것이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왕이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마지막 승리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의 본질은 같은 것이어요. 그러나 계시록 자체는 지금 있는 싸움이 핵심이 아니라 마지막 싸움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싸움은 어떤 성격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장차 나타날 역사를 알아 맞추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싸움들을 모델로 해서 장차 나타날 싸움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든 싸움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방의 권세에 망할뻔 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 그것이 여호와의 전쟁이요 하나님의 심판과 자기 백성의 구원이어요. 그런 것들이 항상 모델이 되는 것이어요. 이것은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 목표를 향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전에 있었던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애굽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이 종살이 했을 때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처음 싸움이어요.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는 것은 완악한 애굽을 심판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과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에 대한 심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처음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크게 승리의 노래를 불렀지요. 모세의 노래. 모세가 선창자가 되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구원받은 노래지요. 그런 구원얻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심으시고 성소가 되신 것, 이것이 첫 싸움이고, 그 다음에 인제 마지막 싸움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쫓겨나고 바벨론에 포로잡혔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어요. 그것은 예레미야서 같으면 51장에 바벨론 심판이 나타나 있는데 오늘 읽은 17, 18장은 예레미야 51장을 보면은 많은 빛들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 싸움이어요. 그런데 그때 싸움은 어떤 싸움이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의 권세에 밝히고 망할려고 그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을 심판하신다. 그것이 마지막 싸움과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도 악의 권세는 그렇게 극도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마치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파괴될 그런 위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것처럼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하실 것이어요. 그러니까 계시록의 배경은 어떻게 됐으냐 하면은 마지막 큰 싸움들을 교회의 그 멸망과 이방 권세의 득세, 마흔 두 달 동안, 삼년 반 동안,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망하고 이방은 득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수를 계산하고 이마에 인치니까 그들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망할 것이다. 그러나 택한 백성은 결단코 멸망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은 심판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마지막 망했던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깔고 마지막 시대의 교회의 고난과 승리를 설명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앞으로 로마 제국이 다시 재현되느니 탈레스틴 땅에 이스라엘이 건설되느니 하는 것은 성경 해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로마 제국의 재건이 문제가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하기를 마지막 네 번째 짐승에 인자의 나라가 왔고, 거기서 마지막 뿔과 하나님이 싸웠고 그 싸움의 모델을 가지고 마지막 시대의 싸움을 설명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지 꼭 유럽의 구주공동시장에서 열 나라로 구성된 한 세계 제국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라 그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강력한 기독교 국가로 회복이 되겠지요. 로마서를 보면은 지금은 그들이 예수를 거절하지마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에 그들이 민족적으로 대대적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 유대인의 충만한 수, 만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완성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아마 대단한 핍박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로 대단한 전쟁이 팔레스틴에 있을 것이라. 그런 해석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직접 설명할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투쟁, 이스라엘의 멸망을 물어는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건져냈다. 이스라엘 마지막 멸망 배경을 가지고 장차 나타날 교회의 핍박과 교회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이런 큰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기실 것이니 너희들이 잘 이겨내라. 그렇게 권고할려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팔레스틴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이 성경의 의미는 아니라 그런 말입니다. 만일에 성경이 그런 어떤 사건만 알아맞추려고 하면은 지금 이 책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것을 읽으면서 어렵게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장차 무엇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거기다 초점을 맞추면은 복잡하겠지마는 그전에 이스라엘이 망했던 배경이 있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종말의 싸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만국을 통치하십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 투쟁 가운데서 교회가 승리하도록 설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약을 배웠으면은 이것은 그렇게 어렵게 해석할 조항은 아니라 그런 말씀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런데 구약 이야기만 하면 머리를 흔든다고. 신약은 얇은께 한 두 번 읽으면 되고, 구약은 두꺼우니까 아에 안읽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구약은 읽어보니까 이야기체라 한번 읽으면 되겠고, 신약은 예수님의 교훈이 많으니까 한 다섯 번은 읽어야 되겠고. 하여튼 신문 이야기를 하면은 말하자면 구약을 배경으로 들자 말자 어렵게 생각해요. 그러나 이전에 이스라엘과 함께했던 역사를 그리스도 안에 완성하지 구약을 떠나서 설명을 출발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구약을 듣고도 구약을 모르면서 저보고만 어렵게 설명한다고 하면 안될 일이어요. 가령 여러분이 제가 비유를 들기를 이 바벨론이 무엇이냐? 가령 요새 린다 김인지, 김 린다인지, 김린다 그러면 말이 이상한데 린다 김 그러면 그럴 듯해요. 썬글라스를 쓰고 나오니까, 썬그라스가 얼마짜리냐? 그것도 주간지가 아니라 일간지에 나와요. 나는 무슨놈의 일간지가 그런 것을 기사로 삼는지 모르겠지마는 그것이 나온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계시록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그전 같으면은 그 여자가 아무리 썬그라를 멋있는 것을 써도 전부 욕해요. 그리고 썬그라스까지라도 귀신 같고 전부 우습게 생각하는데 요새는 상관이 없어요. 루인스키든 린다 김이든, 유명하면 되고, 예쁘면 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 여자가 얼만큼 나쁜 여자냐는 상관이 없고 선그라스 멋있냐? 어째서 젊어서 얼굴하고 늙어서 얼굴이 저렇게 닮은고. 성형수술을 하면 저런가? 하고 일간지가 보도를 한다 그말입니다. 왜 국민이 관심을 가지니까. 한 마디로 음행의 문화에요. 그전에 윤리가 통치했을 때 그런 사람들은 그냥 전부 욕해버리지요. 아이고 속은 더러워도 옷은 예쁘구먼 하고 욕해버리고, 그런데 요새는 그런 것이 상관이 없다니까요. 하여튼 클린턴만큼 유명한 사람들이 위치에요. 지금 시대가 그렇다 그말이어요. 그런 비유를 들면은 발음이 어려운 루윈스키든 렌다 김이든 기억이 잘되지요. 그런데 왜 성경은 모르냐 그런 이야기에요. 그 사람들은 드닷없이 나타난 이야기지마는 성경은 두고두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그것은 그렇게 여러번 듣고도 그 토대가 안잡히고 어렵게 생각되면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제 설명이 어려운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지막 날자만 안잡으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 목사님은 그래서 진짜베기, 그러면 안되고 여러분 자신이 믿음으로 설 수 있어야 되어요. 여러분 자신들이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되어요. 그냥 그 시간에만 눈감고 은혜받을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통치와 그 사랑에 대해서 성장을 해주어야 되요. 그런데 마음에 느껴지면 아멘하고 안느껴지면 우리 목사님 설교가 어렵도다 그러고, 발전이 없다면 제가 언제까지 여러부늘 가르쳐야 되겠어요. 제가 묘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마는 저도 갈 날 계산해요. 장로님들 계신데 미안합니다마는 제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50을 넘고 보니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러면은 제가 이상한 계획을 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하고 같이 있을 날도 많지 안해요. 제가 늙어 죽도록 목회를 하겠어요.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계시록을 설교하면은 제가 더 이상 설교할 기회가 없어요. 제가 보왔을 때는. 그러니까 귀담아 들어셔야 되어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도 서야 되고 다른 사람도 가르칠만큼 관심을 가지셔야 되어요. 왜 다른 일은 마음대로 해놓고는 주일날 한 시간와서 은혜 받으려고 합니까? 다른 것은 다 하고 왜 성경에 대해서는 무식하고 성장을 못합니까?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은 자기만 모르면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감염을 시켜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성경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까 여러분이 입을 다물고 연구를 하셔요. 단지 여러분이 스스로 자랑할까 보아서 모르는 것은 부그러움이 아니니까 내놓고 토론하라는 말이지 계속 모르는 것이 은혜스러운 것은 아니어요. 처음에는 몰라도 다음에는 알아 나가야 되어요.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왜? 많이 받은자에게는 많이 찾으니까. 여러분이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엉망인 교회와 비교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렇게 비교되는 것이 아니어요. 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되고 여러분 마음을 다해서 진리를 알도록 관심을 가지셔야 됩니다. 모르면 한번더 읽고 그리고 질문하셔요. 제가 항상 있는데도 연락을 않고 뒤에서 어렵느니 마니 이야기를 해서 자기도 여럽고 다른 사람도 감염을 시키면 되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그건 덕을 끼치는 말이 아니어요. 물론 길게 하는 것이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한 사상을 설명할려고 그랬을 때는 짧게 끝날 때도 있지마는 시간을 할례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청교도들은 두 시간 강론하고 두 시간 기도하고 했습니다. 청교도 후예라고 자랑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도 한 50분은 가요. 굉장히 논리적인 체계로.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한 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오늘 모르면 내일은 알아야 되고, 그렇게 해서 성경의 풍성함을 알아야 되지 그냥 그전에 알았던 것을 말하니까 감동받고 조금만 어려우면 모르겠다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해갖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경영을 분별하고 봉사는데 열의가 있는 것이겠어요. 그것은 제가 설교를 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 나름대로 각성하고 연구가 있어야 되겠지마는 그러나 항상 목사에게는 잘못이 있고 이해 못하는 성도는 괜찮다고 그렇게 오래 동안 안주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계시록은 마지막 사건을 강조하는데 이 마지막 사건도 유대인들의 마지막 멸망, 그 배경을 가지고 마지막 교회의 핍바과 원수의 힘, 그런데도 하나님이 어떻게 원수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가? 그러니까 마지막 원수는 누굽니까? 바벨론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 실제로 지금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가 로마지 바벨론이 아니어요. 그래도 모든 이방의 머리는 바벨론이어요. 왜 바벨론 때 이스라엘이 망했거든요. 바벨론으로 전부 설명합니다. 바벨론이 머리니까. 다윗 왕조는 다윗으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세계 제국은 바벨론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마지막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별한 문학적인 방법을 쓰고 있어요. 마지막을 여러번 반복하면 되겠지요. 권투 쩹도 같은 자리에 여러번 매기면 쓰러지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세 번의 일곱을 반복하는데 마지막 여섯 번째 인, 일곱 번 째 인, 여섯 번째 나팔, 일곱 번째 나팔, 여섯 번째 대접, 일곱 번째 대접, 이 마지막에다가 총 강조를 있어요. 그런데다가 마지막에다가 마지막 사건을 배열하기 전에 앞에다가 왜 이런 일이 와야 되는지, 마지막 시대에 그런 정체나 심판의 필요성들을 설명하는 설명들이 붙어 있어요. 오늘 강론할 17, 18장은 바벨론 심판을 다시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대접과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 무엇입니까? 아마겟돈으로 대대적으로 군인들은 불러 모읍니다. 아마겟돈은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의 큰 전쟁 무대에요. 그런데 누가 옶니까? 동방의 군대들이 옵니다. 동방의 군대하면은 구약 배경은 바벨론 군대에요. 그쪽에서 쳐들어오면 이스라엘은 끝장납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그리고 바벨론 멸망을 일곱 번째 대접에서 설명했어요. 그리고 나서 17장부터는 이 바벨론을 다시 설명하면서 마지막 심판을 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7, 18장에서는 바벨론의 정체와 바벨론의 심판, 그것이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바벨론의 심판이 주제이지요. 항상 앞에 시작하는 말이 머리말인데 큰 음녀, 바벨론의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왜 이 음녀들을 큰 음녀라고 그러는가, 해서 바벨론의 정체가 설명되고 또 그녀가 받을 심판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따라오겠이요. 그러니까 바벨론을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어요. 이제 여기까지는 큰 틀이니까 그 다음에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큰 틀만 가지고 간략히 설명하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한번 더 하더라도 간략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큰 음녀냐? 이 큰 음녀라는 사실을 이 17장 앞과 뒤에서 설명하고 그리고 이 큰 음녀의 활동의 원동력을 가운데다 배열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큰 음녀냐 하면은 땅의 임금들도 더불어 함께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다. 말하자면은 세상에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만큼 그런 큰 성이요, 큰 권세를 가진 것이 바벨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설명하고, 뒤에서도 다시 그것을 받아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어떻게 해서 다스립니까? 15절을 보면은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온 세계를 통치하고 앉아 있다. 그러기 때문에 큰 음녀라고 설명하고 큰 음녀가 왜 이렇게 큰 음녀로서 권세를 발휘하고 있는지를 가운데서 설명을 하고, 또 그런 큰 음녀가 발휘하는 권세를 다른 방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18장입니다. 17장에서는 여자와 짐승만 나오고 있고, 18장에는 많은 물건들이 나오고 있지요. 큰 성이고 많은 재물이 있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 재물 때문에 부자가 되고 있고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두 번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두 번 반복으로 이해를 해야되느냐 하면, 17장에서 여자가 말한 것을 말해요. 여자가 짐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지마는 나중에 짐승이 이 여자를 먹어버려요. 살을 찢고 먹어버립니다. 망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18장에서는 또 다시 큰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멸망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17장과 18장은 사건을 연속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정체와 멸망을 18장에서는 큰 부와 큰 도성으로 그리고 17장에서는 짐승과 여자로, 하나는 종교적으로 표현하면은 하나는 큰 성과 국가적이 방식으로 표현하는 그런 차이점이 있고 그것을 지금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바벨론을 음녀라고 묘사를 하느냐 하면은 여러분이 12장을 보면은 용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니까 광야로 여자가 도망쳤지요. 이 여자는 장차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은 여자였어요. 교회지요. 거기도 여자가 나오고 여기도 여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도성으로 예루살렘을 신부로 여자로 묘사한 것처럼 짐승의 도성으로 바벨론을 여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여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떤 모양이냐 하면은, 붉은 옷을 입고, 자주 옷을 입고 금과 보석으로 꾸몄어요. 황후지요. 여자 왕이어요. 18장에서는 나는 절대로 과부가 안된다 할정도로 이 여자는 큰 황후입니다. 그것을 18장에서는 세상에 많은 재물들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18장에서는 왕적인 영광 쪽에다가 그렇게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큰 성 바벨론, 세상 제국이지요. 세상 제국에 머리는 바벨론이니까 그것은 그들의 풍성한 부, 그들의 권세, 그런 것 때문에 결단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자부하고 바로 그런 일로 하나님의 성도들의 피에 취하고 그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도 무엇 때문에 심판하느냐 하면은 성도들의 피값을 갚는 것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그리고 계시록 앞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 때문에 옵니까? 제단 밑에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피에 응답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랬는데 그들이 그 큰 영광 때문에 그 전에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삼켰든 것처럼 지금도 세상 제국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어린 양은 승리할 것이고 세상은 망할 것이다. 세상은 아무리 찬란한 금잔을 들고 노래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요 망할 것이다. 그런 것을 여기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설명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자가 탄 짐승을 통해서 여자는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짐승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조금 풀어서 설명하고 17, 18장은 강론을 마칠 계획입니다. 여기서 어떠튼 짐승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느냐 하면은 계시록 13장에서도 짐승이 있었지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나오는데 네 짐승이 짬뽕된 식이지요. 구약의 짐승이 섞어진 식인데 거기도 일곱 머리가 있고 열 뿔이 있고, 또 머리 하나가 죽었다가 나중에 살아나고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용은 이 짐승에게 보좌와 나라를 주고 그런 짐승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모습의 짐승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비교해 보시면 조금 차이가 날 것이어요. 13장에서 강조는 짐승의 보좌와 권세가 강조에요. 그러나 여기 17장의 짐승은 짐승의 나타난 권세도 권세지마는 그 순서가 강조에요. 이 짐승은 시방은 없지만 전에는 있었다. 장차 나타날 것이다. 이 짐승 중에 한 머리가 있는데 이 머리가 하나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 같을 것인데 나중에 한번 더 나타날 것이다. 다섯은 있었고 하나는 지금 있고 아직 하나는 안나타났다. 나중에 또 하나가 오면은 이 하나는 여덟 번째가 될 것이다. 하면서 왔다갔다 묘한 이야기를 해요. 무슨 말인가 몰라도 나타난 순서에다 강조를 두고 있어요. 그러나 13장에서 짐승은 나타난 순서가 아니라 그 권세가 강조에요. 어린 양이 죽었다가 살아서 권세를 받은 것처럼 짐승도 죽었다가 산 상태 때문에 권세를 가질 것이다. 권세를 강조하고,. 여기서는 장차 어린 양이 오는 것처럼 어떻게 장차 마지막 재앙이 올 것인가, 그쪽에다가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로마 정권의 핍박을 받고 있지마는 아직 마지막 시대는 아닙니다. 데살로니까 대로 하면은 지금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지마는 장차 악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신적인 권세를 행하는 악의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평화시에 걷는 사람과도 경주하다 피곤하면은 환난 시에 달리는 말과는 어떻게 경주할려고 그러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힘을 내라. 일어서라. 지금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것이 지금 짐승에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다음에 조금만 더 설명하고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함을 입은 성도 여러분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히서 이방과 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고 이방은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아들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권세있는 나라를 세우셨고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에 이르도록 아버지를 시인하고 아버지를 증거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권세의 왕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하나님은 친히 자기 자신과 그 아들의 영광을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땅의 성소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이 아니라 계시록의 언어대로 하면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고 경배하는 그런 존귀한 백성이요 홍해 가에서 하나님을 노래부르고 그리고 땅의 사람이 만든 놋바다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아니라 이제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운데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하늘에 승리를 노래부르는 그런 능력있는 백성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큰 구원을 받았는데도 세상은 주님을 시인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팔에스틴의 작은 한 촌에서 죽은 사람으로 매도되지 세상에 빵을 주고 평화를 주는 것은 로마 정권이지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그렇게 세상은 조롱하고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조롱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는 반란군으로 로마에게 죽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던져버리고 그들은 이방의 종이 되도록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따라다녔던 그의 제자들까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실 무렵에는 베드로도 주님을 저주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왜냐하면은 십자가에 죽은 그에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도 낙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될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죽어버렸지 않냐. 그리고 힘이 쭉 빠져가지고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은 구주가 아닙니다. 고전대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능력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애굽을 심판하시고 바벨론에서 건져내신 능력있는 하나님이셔요. 그런데 아들이 죽으셨으니 그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고 썩지 않고 쇄하지 않은 기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하신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능력있는 증인과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로마 정권 밑에서 이전에는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담대히 증거하고 그들의 피로 그들의 증거를 인쳤든 것입니다. 만은 성도들이 죽어가도 참으로 주님의 다스리심은 드러나지 않고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서 죽고 요한 사도도 반모라는 섬에 귀양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 주의 주이십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하고 영원하십니다. 단지 그가 나라를 설립하는 방식이 자기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길이기 때문에 주님 오셔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런 모든 죄인들에게 고난받는 주님으로 드러나고 그의 교회도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멸망해버렸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원했던 것처럼 세상에 권세는 교회를 극도록 핍박해서 마지막 하나님을 대항하는 그런 큰 권세가 드러나겠지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이면서도 바벨론이나 앗수르를 본받아서 음행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했고, 그리고 음행의 소골, 음행의 중심지요 가증한 것들의 중심지인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심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들, 바벨론을 머리로 했던 세상의 제국은 그 영광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리고 세상은 자기 권세 때문에 스스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계시록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확실한 구원의 보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주셔서 내가 나를 보낸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아버지와 함께 영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우리 안에 거처를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처럼 이제 주의 나라와 제사장인 우리들은 주님이 걸어갔던 길을 죽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주님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죽음과 대항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능력있는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처럼 인간이 자기 부를 자랑하는 시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간이 상품화되고 인간의 가치가 저하된 적은 없습니다. 지금은 생산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인격적인 가치를 가지고 평가하지를 않습니다. 만일에 사람이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가 열을 생산하면은 마땅히 기업주는 사람 열을 자르고 기계를 도입하지 노사쟁의가 많은 열명의 노동자를 쓸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은 전부 그렇게 되어 있어요. 더구나 지금은 인터넷 시대라고 해가지고 전부 돈을 끌어 씁니다. 지금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재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아름다운 금잔을 들었습니다. 최고의 상품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의 아름다움만 이동하고 재화의 가치를 창출하지 떨어지는 것들은 이제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최고- 필요합니까? 우리 노인들이 전자기계 사갖고 영어로 글자가 써진 것은 보면 어디 누를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켜는 것은 K.B.S. M.B.C 이것만 하면 되거든. 그런데 이것 저것 굉장히 복잡해요. 저도 구식이 되었는지 누가 휘대폰을 주면 사용할줄 몰라서 해달라고 그럽니다. 제가 안쓰거든요. 지금 우리 나락 휘대폰도 그런다고 하지 안해요. 우리 나라가 그런 것이 제일로 빨리 발달하니까, 한 해에도 많은 구형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그말이지요. 왜 경쟁력이니까. 그러면 저는 어디를 빨리빨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어요. 제가 움직인다고 해서 차에 있을 때 여러분이 저에게 연락한다고 해서 그런 일은 아니어요. 제가 어디 있는지 어디 심방가는지 여러분이 제 위치를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걸 안씁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전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새로운 생산을 잘하고 있느냐? 실은 새로운 생산을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있던 생산품을 어떻게 자리 매김을 잘하는지, 어떻게 상품 가치를 높여서 많은 이동을 시켜서 돈을 버는 것 뿐이지 새로운 생산이 제대로 잘되고 있는 것은 아니어요. 그런 것은 많은 시일이 걸리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요새 인터넷 시대에 부자되었다는 말은 옛날에 장사해서 부자된 것과 비슷합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일년 내내 해보았자 쌀 열 가마 그런데 장사꾼을 쌀을 이리저리 이동하면은 농사꾼보다 훨씬 더 버는 것입니다. 쌀장사가 잘하니까 쌀이 더 많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어요. 이미 생산된 것을 이동을 잘해가지고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 실은 모든 사람이 다 배불러진 것은 아니어요. 쌀이 많이 생산된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도 그런 상황이어요. 그러니까 속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시대 정신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것을 위해서 전력 질주하고 자기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무엇인가 최신형, 무엇인가 안스러져야 되고 그리고 아무 필요도 없는데 새 것으로 바꾸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재화를 낭비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부가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람을 지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이 시대 정신이어요. 참으로 위험한 시대입니다. 정신없이 살고 있거든요. 우리들이 당장 로마 교회가 받고 있는 것과 같은 핍박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번 설명했습니다마는 지금은 종교 평화의 시대여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핍박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사람은 그에게 복종해야 되는데도 그런 것을 말하면은 그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입니다. 아주 고약한 사람이어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것만 진정한 종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지금이 그런 시대 아니어요. 그러니까 더욱 위험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줄을 알고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삶을 부활의 질서에 맞추셔야 합니다.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물건을 파는 자는 다 팔지 못한 것처럼,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한 것처럼 이 세상의 행적은 지나가니까.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가 되셔서 우리가 첫 창조 세계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늘에 속한 구원을 봉사할 수 있도록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기 때문에 장차 나타날 영원한 것을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의 삶을 조절하고 세상을 이겨내셔야만 그런 것이 믿음의 싸움이요 참으로 승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만 통해서 교회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광명한 천사고 오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서도 교회는 금잔에 취할 수가 있는 것이어요. 우리는 그런 점에 깊이 유념하셔서 먹고 마심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 참으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주님의 나라와 그 권세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거기다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부활하신 주님께 속한 권세있는 백성으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긍훌과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시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이제는 하나님 품안에 거하게 하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하셔서 영광과 생명과 권능을 누리며 봉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죽을까 두려워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지 아니하고 죽음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증인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따라서 우리들도 우리의 생명을 따라서 우리의 생명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이처럼 영원한 권세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이 생명의 복으로 주의 백성들을 더욱 새롭게 하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실려고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의 상으로 교회를 불러 모으셔서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과 한 몸 한 영을 이루는 교제를 나누게 하시고 이제는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처럼 말씀하고 주님의 손으로 봉사한 것처럼 봉사할 수 있는 그런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오셔서 참으로 사망의 권세를 온전히 정복하시고 우리로 주님의 영광을 뵙게 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도록까지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따라서 주님의 교회와 세상을 힘있게 봉사하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신 주님께서 주의 백성의 손의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허락하셔서 주님 오시도록까지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풍성함으로 교회와 세상을 봉사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주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어린 자녀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언약 안에서 이 귀한 어린 생명들을 주님께서 부르셨사오니 저들이 비록 어릴지라도 주님게 속한 존귀한 백성으로 세상에 속한 자로 살지 않고 주님의 백성으로 항상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귀한 자녀들이 되도록 우리 어린 자녀들도 주의 권세로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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