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구속사

시온산에 선 구속받은 자들

찬미예수님 2026. 4. 3. 05:51

제목: 시온산에 선 구속받은 자들

성경: 요한계시록14:1-5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를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어서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고 소망던 저희들이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 아래 있어서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고 우리 마음이 원하는대로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았던 저희들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사랑하신 하늘에 속한 사랑을 나타내셔서 에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이제는 그리스도 에수와 함게 하나님 품 안에 살게 하시고 예수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권세를 봉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생명과 이 권세가 우리에게 있는데도 우리들이 이 빛을 따라 살지 못했던 모든 어두움들을 오늘도 주께서 긍휼히 여기서고 용서하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이처럼 주의 백성들을 주님의 생명과 영광의 상으로 부르셨사오니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 크신 사랑을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품 안에서 쉬게 하시며 하나님 품 안에서 깨끗함을 얻게 해주시옵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이 더욱 새롭게 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 오시도록까지 세상을 이기는 능력있는 봉사를 감당하는 귀한 교회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14장1-5절까지 잃고 강론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11:15-터는 일곱째 나팔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일곱째 나팔이 불면은 하나님의 대적들은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왕노릇이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신다는 찬양이 있은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멸망시킬 대적들의 정체를 12, 13장에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어 쫓긴 용이요, 용이 자기 때가 얼만 남지 않은 줄을 알고 자기를 봉사하도록 자기 종들을 불러내는 데 두 짐승을 불러냈습니다. 한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인데 그 머리 중 하나가 죽은 것 같다가 살아나서 큰 권능을 드러냈기 때문에 이 권능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복종시킨다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짐승이 땅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양처럼 생겼고 용처럼 말하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신적인 권능을 행해서 사람들을 미혹해서 이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 경배하도록 한다고 그렇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 경배한다는 말은 그에게 속한다는 말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 경배자들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과 그 수를 새기도록 했는데 하옇튼 굉장히 무서운 내용들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위로하는 것은 성도들의 지혜와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이냐?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이 아무리 큰 권세가 있어도 그것은 칼의 권세로 얻은 것이어서 칼로 망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칼의 권세이지 하나님의 권세는 아니기 때문에 성도들이 미혹을 받아서는 안되고 믿음을 지키라고 말했고, 또 짐승은 그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인데 너희들이 자세히 보면은 그것을 알 것인데 그것은 사람의 수이다. 그것은 아무리 죽었다가 산 모습으로 해도 사람의 수니까 그런 일에 미혹을 받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 그렇게 13장까지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뛰어서 15장에 보면은 다시 15장1절에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라. 하면서 또 다시 마지막 일곱 재앙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일곱 재앙을 말할 때는 몇 번 그것을 지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12장15절에도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면서 하늘의 하나님의 왕권을 찬양하는 찬양과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모습을 말한 뒤로 또 다시 15장에 마지막 재앙이 나팔을 불매 하면서 다시 한번 승리의 찬양을 부르고 또 멸망받을 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강론할 이 14장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짐승의 권세가 하나님의 성도들의 권세를 파괴하고 마흔 두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고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로 짐승의 이름을 받게 하고 다 복종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승리할 것이고 그들은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찬양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믿음을 지키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문제들이 14:6-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처럼 마지막 심판들, 배교자에 대한 심판을 말하기 전에 신실한 자들로서 어린 양이 끄는대로 따라갔던 자들이 어떤 축복을 받고 영광의 노래를 부르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14장1-5절까지 오늘 강론할 내용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장에서는 그 중요성 때문에 여러 모양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것만 주위하면은 복잡한 책은 아닙니다. 여기 14장1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여기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섰는 십 사만 사천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온산은 땅의 시온산이 아니라 하늘의 시온산이겠지요. 왜냐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의 식양대로 살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땅에 있는 것이 하늘에 원형이 있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시온산도 땅의 시온산이 아니라 하늘에 시온산이 될 것입니다. 거기 어린 양이 시온산에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 사만 사천 명은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으니. 13장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 그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 그런 자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고 그들은 다 짐승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7장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십 사만 사천을 인치라고 그랬는데, 그 인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인인데 여기서는 그 인을 설명하기를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이 그 이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인이 있다는 말은 누구의 소유가 되었다.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보살피시고 소유가 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으로 그렇게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 그런데 그냥 그리스도와 주 하나님의 이름이 있도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죄된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공로 때문에 그 백성을 피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 이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십 사만 사천 하는 것은 7장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것은 특별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그런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를 구약의 언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십 사만 사천 했을 때는 한 지파마다 만 이천 명씩, 그렇게 해서 열두 지파 하면은 십 사만 사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장의 족보를 보면은 단 지파가 빠져있는데 이 족보는 구약에서는 구약에서는 역대기 족보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역대기 족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망했는데 망한 뒤로 돌아온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 왕조와 그 성전에 영원히 함께 계시는지, 그 신실한 약속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역대기 족보입니다. 천지 창조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데 다윗의 왕조와 그 성전에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 역대기 족보입니다. 그러니까 역대기 족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처음 구원이 애굽에서 구원바 된 족보가 아니라 이제는 마지막 구원인 바벨론에서 구원된 족보이기 때문에 그 족보가 구약 언어 개념으로는 세상 끝날에 구원받은 족보가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족보 개념을 사용해서 27장에서도 단 지파른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 이천명씩 열두 지파, 수가 전부 똑같다 그 말은 구원이 완결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해서 십 사만 사천이 있는데 그들은 어린 양과 그 아버지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인치셨고 보호하셨기 때문에 짐승의 권세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이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은 손대지 못했고, 그들은 승리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시온산에 승리하신 어린양과 함께 서있다고 여기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이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여기서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습니다. 이것은 전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표현하는 방식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소리는 거문고 타는 소리 같은데, 이 노래를 누가 부릅니까? 새 노리를 부르는데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명 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른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들만 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새노래는 구원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노래는 왜 새 노래냐 하면은, 이전에도 이런 노래를 부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출애굽기 15장에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시내산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을 15장3절에서는 거의 똑같은 말을 15장에서 반복하는데, 15장2절을 보면은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립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그렇게 노래 부른 내용이 15장에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모세의 노래라고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나라를 조직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열방과 처음 싸우신 기사가 출애굽기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자기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자기 소유를 삼으셨습니다. 그때 그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함으로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는 애굽 왕 바로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애굽의 군대가 다 수장된 홍해 가에서 이처럼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늘 시온산에 선 십 사만 사천 명은 이제 어린 양에게 속했고 그 아버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들은 짐승과 그 이름과 우상을 이긴자들이라고 15장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이렇게 새 노래를 부른다 그 말은 그들이 애굽의 권세에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하나님의 대적인 짐승의 권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시내산에 이르는 구원이 아니라 하늘 시온산에서는 하늘에 속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고, 이 노래는 구속받은 그들만 부르고 다른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그러면 구속받은 이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애굽의 권세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의 큰 노래를 부르도록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누가 여호와처럼 권능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며 권능이 있으셔서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장사지내신 그분,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열국을 진동시키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심으실 것이고 그곳을 영원한 처소로 삼으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출애굽기 15장에서 노래했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시내산에서 언약의 법을 받고 하나님이 인도하는대로 그들은 걸어야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는대로 가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서 사용해서 신약 교회의 승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신약의 모든 언어들이 그렇지마는 특별히 계시록의 언어들은 구약의 그런 언어들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를 토대로 하고 읽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렵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그러면 여자로 더불어 더렵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하니까 우리는 오새 세상에 적용해 가지고 요새는 한마디로 개판이거든요. 그러니까 아, 이 세상이 음행한 세상이 될줄 알고 특별히 음행을 조심하라고 그러는구나, 그렇게 우리들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도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 세상이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으니 교회도 승리한다. 이 권세에 무릎꿇지 말고 오직 예수의 주되심만 시인해라. 그런 권세에 대한 싸움이 주지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도덕적인 완전함을 따라 살 것인가, 그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들의 신분과 그들의 삶을 설명했을 때도 이 언어 개념들이 그들을 직접 도덕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야 될 것인지, 그런 것들을 보아야 될 것입니다. 첫째는 4절 자체에서 보았을 때도 여자로 [여자로 더불어 더렵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더럽히지 아니했다는 말이나 정절이 있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설명하기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읶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5절을 보십시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4절 앞 부분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고, 그 다음 5절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고, 이것은 도덕적인 언어들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말을 보면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읶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이것은 도덕적인 언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과 뒤에는 도덕적인 언어들로 되어 있지마는 가운데 있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라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가는 자들이고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린 자들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어떤 논문이 있으면은 서론과 결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일치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것을 강화시키는 설명들이 있습니다. 이 본문도 그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앞과 뒤는 분명히 도덕적인 언어들인데 가운데는 그런 도덕적인 언어들이 아니라 어린 양이 끄는 대로 가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여자로 더불어 더렵히지 않고 정절을 지킨다는 말이나, 입에는 거짓이 없고 흠이 없다는 말이나, 이 모든 것들은, 가운데 있는 의미,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가는 자들이며, 하나님 앞에 첫 열매로 드린바 된 자들이다. 그런 의미를 갖고 설명을 해야되지 여기서 직접 도덕적인 말로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들은 성경을 풀거나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어떤 절대적인 도덕법이 있고 그것을 좇아 사느냐 못사느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죄 있느냐 없느냐?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판별하는 방법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안믿는 이방인들도 믿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 많해요.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하지 행동은 형편 없는 사람람이 많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남편은 교회만 안나오지, 교회만 나오면 장로깜이다. 왜냐하며 자기보다 더 낫거든요. 그러니까 전도를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도덕적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평가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도 관계적으로 삽니다. 심지어는 지역 감정이 있는 것도 우리는 전라도고 저쪽은 경상도니까 그렇게 열을 내고 싸우는 것이어요. 관계가 그러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훨씬 우수할 수 있지요. 수가 많으니까. 그래도 이쪽을 열열히 지지하는 것은 관계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어요. 뭐 천한 예를 들었습니다. 가령 부자지간의 관계고 자식이니까 동네 지나가는 청년을 평가해서 내 자식을 삼는 법은 없어요. 부부도 아내니까 사랑하고 남편이니까 존경하는 것이지 아내 태스트나 남편 콘테스트 해갖고 그렇게 하는 것은 없어요. 세상 모든 것이 관계적인 윤리지 절대적인 기준을 정해 놓고 이 기준에 도달한 사람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세상에소 없고 성경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라. 요구하는 것은 그들만 하나님께서 장자를 삼으시고, 자기 아들 삼으시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기 때문에 너희들은 바로에게 속한 자로 살지 말고, 가나안 땅과 그 신들에게 속한자로 살지 말고 내게 속한 자로, 내 아내로, 내 아들로 살아달라.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윤리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취급하고 했던 것처럼 교회를 신부로 취급하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여자는 요새 세상처럼 음행한다. 그런 말이 아니라 나중에 17장에는 직접적으로 더 많이 나옵니다마는 말하자면 바벨론을 큰 음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 하나님의 신부로 소개하고 이스라엘이 이방의 세력을 사랑하고 그러면은 간음하는 여인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소돔 고므라보다도 못하도다. 그들은 너희들보다 났도다. 그러면서 대단히 책망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범죄해서 그들을 버렸는데 동생인 유다도 언니를 따라서 음행하는가? 너희 자매가 함께 죽을려고 그러는가? 그런 방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음행하는데 왜 내 백성은 내가 준 것을 가지고 간부를 찾아다니면서 음행하는고.세상에 그런 음행은 없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합니다. 그 언어 개념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로 더불어 정절을 지킨다는 말은, 말하자면 17장을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짐승을 타고 있는데, 그 짐승 위에 한 여자가 앉아 있어요. 여자의 손에는 금잔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음행과 가증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벨론 도시로 설명하고 있어요. 거기는 모든 부요한 재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13장에서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면 매매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만일에 먹고 살려면은 짐승에게 경배해야 되어요. 그것을 여기서는 음행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끄는대로 따르면은 여자로 음행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을 떠나서 여린 양과 반대되는 것은 여기서 무엇입니까? 짐승이었습니다.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에 반대되는 것은 짐승이었어요. 짐승이 끄는대로 따라가는 것은 정조가 없는 여자 같은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그렇게 설명되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도덕적으로 얌전한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갑니다. 왜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갑니까? 그들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아서 처음 읶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무교절을 지켜야 되고, 또 초태생을 드려야 됩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누룩 없는 떡을 먹고 처음 난 것은 전부 하나님께 드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새로운 양식을 먹고 하나님 앞에 헌신된 백성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누룩없는 떡을 먹고 첫 것은 전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 삶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언어 개념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께 속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속한 자들입니까? 하나님 앞에 첫 열매로 드려진 자들입니다. 구약에서 첫 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장자는 내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은 어떤 것도 다른 용도로 써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도로 쓰지 못하면 폐기 처분을 해야되는 것이지 다른 용도로 교환하거나 쓸 수 없는 것이 구약의 개념이어요.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헌신된 자들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끄는대로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가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어린 양이 끄는 대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짐승의 권세가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려고 무릎 꿇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이 있다는 말이나 흠이 있다는 말은 같은 말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은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어린 양께서 오직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생명은 그에게 있고 권능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먹고 마심을 따라 무릎 꿇지 않으면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짐승의 권세가 두려워서 매매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만일에 이마나 오른 손에 짐승의 표를 받고 살면은 그들은 다 거짓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흠이 있고 구약에서는 흠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드리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첫 것이라도 흠이 없으면 드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신앙고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핵심은 가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가더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된 첫 백성으로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가더라. 그들은 그런 일에 있어서 정결한 신부처럼 그들은 거짓이 없이 그렇게 따르더라. 이 본문에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늘의 시온산에 승리하신 어린 양과 함께 서서 구원함을 받은 즉 어린 양과 그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그 권능에 은혜, 그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들의 노래는 하늘에 노래요 하나님의 노래여서 마치 하나님의 음성 같고, 하나님의 거문고 타는 것 같다고 그렇게 이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그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로마 정권에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만 주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다고 고백했기 때문에 로마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구약에서는 넷째번 제국이데 예수님께서 출생했을 때 당시 아우쿠스 때 호적하라는 영이 내렸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황제를 신의 아들로 추앙했고 그때부터 이 신의 아들의 통치 밑에서 로마의 평화, 로마의 속한 자만 함으로 평화롭게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권세를 극대화 시켰던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낳으셨지요.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는 신의 아들로 추앙되고 신의 제사장으로 추앙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지마는 이 로마 황제는 반드시 섬겨야 되었습니다. 거역했기 때문에 그들이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을 당하면 로마의 평화, 로마 황제 밑에서 생존권이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유리하고 암혈과 토굴에 숨어야 됩니다. 벌거벗김을 당하고 매맞아야 됩니다. 자기 산업을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상황이요, 사도 요한도 밧모라는 섬에 귀양가서 그처럼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희들이 믿음을 지켜라. 짐승의 권세는 칼의 권세로 얻은 것 뿐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모방할려고 한 머리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되어서 신적인 권세를 자랑해도 그것은 칼의 권세로 얻은 것 뿐이요 그 권세는 칼로 망할 것입니다. 거짓된 종교가 나타나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을 미혹하지마는 그런 것은 전정한 하나님이 보낸 종은 아닙니다. 그는 땅에 속한 어린 양이지 하늘에 속한 어린 양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깊이 생각하라 그말입니다. 그 정체를 잘 분별해라. 아무리 권세가 강해도 사람의 수요, 666인데 사람의 수요 하나님의 수는 아닙니다. 그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칼로 망할 것입니다. 단지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만 위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만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그는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셔서 선한 증거와 자기의 부활을 통해서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를 신실히 증거했습니다. 그는 어린 양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그는 죽음에 이르도록 아버지를 시인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실한 자기 종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첫 조상 아담도 죽을까 봐서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고 자기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시인했습니다. 자기 몸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파괴시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기꺼히 자기 몸을 헌신했고 자기 몸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부활과 권능의 나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런 구원을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만 위에서 오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만 하나님이시오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분만 권능을 가지신 그분이시오 모세는 권능이 없지마는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해서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자기 백성에게 새기신 분이십니다. 그분만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외에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만 생명이시오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능력은 세상에 속한 권세의 자리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권능이어서 이 세상이 그 나라를 꺾지를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신자들이 가져야될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의 조상들까지라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런 질서 가운데 살았습니다. 광야를 거닐다가도 하늘에서 만나가 안내릴 것 같으면은 그들은 불안에 떨것이고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아무리 풍부한 부를 주었어도 이방 나라가 더 부자가 되면은 그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 예를 들면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좋지요. ? 사탕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전부 사주지요. 아버지는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니까 누군지 잘 몰라요. 사준 것은 전부 어머니가 사주고, 그리고 외삼촌이 제일로 좋지요. 왜냐하면 어린 아이들이라 그런 것이어요. 그러니까 미혹을 받아요. 왜냐하면 구약 때는 땅의 축복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떨어지면은 미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옛 백성은 죽을까 두려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질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썩지 않고 쇠하지 않은 기업과 이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늘에 속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약의 만나를 먹은 조상들도 죽었지마는 나를 먹는 자는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교회가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하늘에 찬양으로 기뻐하는 것은 우리만 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백성이 아무리 큰 구원을 받았어도 그들은 애굽에서 건져내서 가나안 땅에 심은 하나님의 구원은 맛보아서 누래할 수 있지마는 우리처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하늘에 속한 영광과 권능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회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불러야 될 찬양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찬양을 부르고 이 신앙고백을 따라 주님을 따라가다가 세상에서 멸시와 천시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주께 있습니다. 승리는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자, 정결한 아내처럼 정절을 지키는 자, 하나님 앞에 신앙을 고백을 하면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자, 그런 자들이 참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산에서 참으로 하늘에 속한 구원과 그 권능을 찬양하리하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제 문제는 지금 우리들이 그런 핍박을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은 항상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그런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했을 때의 배경을 깔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들은 아, 이것이 예수님 재림하기 직전에만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언어를 사용하느냐 하면은, 교회가 마지막 때를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계시록이 보는 관점은 예수님 재림의 때나 우리 때나 간격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교회가 받고 있는 핍박을 마지막 때의 핍박에다 담아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요. 다른 성경을 보면은 주님 오시도록까지 이 악의 비밀이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악의 비밀은 예수님 재림 직전에 극대화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 극대화된 것을 알아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는 교회, 마지막 원수에 권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세상의 권세, 그 권세와 싸우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마지막 구원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바벨론 구원 모델을 가지고 직접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그런 시대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가 에수님 재림 때나 지금 사도 요한이 살고 있는 때나 간격이 없이 로마 정권이나 마지막 나타나는 악의 비밀이나 간격이 없이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어요. 이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런 것을 분별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악의 비밀이 이미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의 사람의 마지막 나타날 것이고 자기를 신적인 권위로 높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핍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이 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우리를 향하신 말씀으로 보지 않고 미래에 누가 나타나겠는가? 그걸 연구하는 본문으로 봐버리기 때문에 계시록을 가지고 소위 종말론 이단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요. 문제는 이런 악의 활동 방식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에서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싸움이어요. 물론 예수님께서 보좌에 취임하셨기 때문에 세상 나라가 그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역한다는 의미로는 여전히 짐승적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평화,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평화가 예날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세계 제국 아래 평화, 이것이 인류가 추구하는 것이고, 특별히 유럽 공동체가 그런 것을 많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대론들은 장차 유럽에서 로마가 재현될 것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은 되겠지마는 성경 자체는 그런 그런 의미를 직접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우리들은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지요. 제가 천주교 교황에 대해서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마 세대론자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가 될 것이어요. 왜냐하면 항상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나라의 마지막 인자가 왔을 때 그것은 사대 제국 로마에서에요. 그러니까 로마 배경을 깔고 마지막 재림까지 설명을 하니까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실제적으로 유럽에서 일어날지는 그것은 사태를 보아야 되겠지요. 해석 자체는 그것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은 요새 천주교 교황이 종교 간의 화목, 이것을 위해서 노인이 왔다 갔다 해요. 지금 현대인들이 제일로 불쾌한 것이 무엇이냐? 옛날에는 지역신을 가지고, 가령 씨족 신도 있고, 지역신도 있고, 옛날 같으면은 측간에도 신이 있고, 측간이라고 하면 모르는 분들이 있겠구먼. 화장실 신이라고 하면은 요새는 수세식이라 안겁나요. 그런데 옛날에는 그 측간에 가면 캄캄하고 무시무시하고 그래요. 그래 갖고 밖에서 누가 불러요. 누구야, 누구야 하고. 그때는 전기불도 없고 하니까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름날만 되면 사방에다 밥을 차려놓고 그러지요. 신 먹으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장독 신도 있고, 다 신이 있어요. 그 판에 국가 신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국가 싸울 때는 신들의 전쟁으로 싸웠지마는 지금 이 광명한 천지에 누가 신을 보았냐? 그것은 자기들의 민족 이념을 담을려고 신화화 한것이지 그것이 무슨 사실이라고 그것 때문에 생을 거냐? 그러니까 우리 개명된 현대인들은 그렇게 종교적인 유치한 싸움을 하지 말고 세계 종교를 가져야 되겠다. 그러니까 어느 민족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민족만 자랑하면은 지역신이고, 그 민족을 초월하면은 고등종교가 되는 것이어요. 유대 종교는 지역신이면은 거기서 나온 기독교나 천주교는 말하자면 세계 종교에요. 흰두교가 지역 종교면은 불교는 세계 종교에요. 이런 식으로 해서 이제는 세계에 종교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옛날 자기 민족이념을 살릴려고 신화시켰던 것을 가지고 지금도 사실인 것처럼 싸우면 되냐? 그러니까 기독교도 무슨 예수의 피, 단지 옛날 언어를 쓴 것이지 무슨 피를 흘리고 사람이 대신 죽고 그런 법이 있냐? 잔인하게. 그런 것을 없는 법이고, 처녀가 아들을 낳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고 죽었다가 살았다. 그것도 유관순 누나가 민족의 가슴에 사는 것이지, 그런 부활이지 죽었다가 깨어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냐? 그것은 전부 종교적인 소망을 담은 언어들이지 실제는 아니다. 그것이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관이어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가 소망하고 화합하고 이래야 세계 이념을 담을 수 있는 것이지 내것만 옳다는 것은 아주 비열하고 그것은 말하자면 세계가 함께 달라붙어서 매도해버릴 것이어요. 그래서 요새 제일로 고약한 사람들이 마호멭교도들 아닙니까? 이스람교회 진영. 우리가 보면 호메니 콧수염 가진 사람이 마귀처럼 보이지마는 그들 나라에서는 페르샤 이래로 영웅 중에 영웅이에요. 우리는 모택동하면은 찌룩찌룩 돼지 비슷하지요. 목에 짧막하게 매고 있으니까 묘하게 보이지마는 역사이래로 그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모택동이어요. 아마 세계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어요. 옛날에 알랙산더나 징기스칸에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모택동이라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배우니까 때놈들 하지마는 우리 나라만 벗어나면은 중국 말을 못해갖고는 사람 형세를 못할만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계화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돼냐? 그것도 한 독재 정권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화가 되면 사람이 저항해요. 그러니까 온 인류가 함께 사는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을 위해서 요새 천주교 교황이 종교간에 화목, 우리가 십자군 전쟁도 잘못했다. 용서해라. 그전에 히틀러가 전쟁할 때 우리가 입을 꾹 다문 것도 잘못했다. 회개한다. 이러면서 쭉 다니고 있어요. 그러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있지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아, 종교는 똑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천주교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야기해요.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얼만큼 고생을 많이 했냐? 인제는 똥차는 지나가고 새차가 지나가니까 똥차는 비껴라. 우리가 가마. 그러니 무슨 제사를 지내니 마니 싸울 것이 무엇이냐? 천주교만 부정하지 않으면 돼요. 이렇게 해갖고 종교가 아무 차이가 없어요. 물론 십자군 전쟁은 잘못된 전쟁입니다. 그것이 구약 때 전쟁이면은 옳은 전쟁이어요. 여호수아가 영웅인 것처럼 십자군 전쟁도 영웅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그런 신의 권세로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는 복음 전파가 안되어요. 그것은 반발만 일으키고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서양제국이 전부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파했을 때도 국가의 힘을 의지하고 왔기 때문에 이런 3세계에서는 복음 전파자를 제국주의의 간첩처럼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어요. 신약 시대에는 힘의 권세를 가지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나라를 꺾어서도 안되고, 다른 나라의 종교를 죽여서도 안되고, 오직 복음 전파와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불러내는 것이지 힘의 원리로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힘의 원리로 했던 것은 옛날에는 선이었는데 현대 사회가 되니까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약 교회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봉사해서는 안되어요. 그건 마땅히 사과해야 되지요. 물론 교회가 정치적인 시대는 아니지마는 히틀러처럼 그런 독재정권이 나타났을 때는 마땅히 말해야 되는데 말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지요. 그러나 모든 종교가 같은 것처럼 다녀서는 안된다 그런 이야기에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세계 권세가 서로 화합되고 세계 경제가 화합되어야 합니다. 경제 끼리 싸우면 화합이 안됩니다. 이것만 갖고는 안됩니다. 종교가 화합되어야만 세계정부가 가능합니다. 그래야 세계화되고 안싸우고 평안할 것이 아니냐? 인류의 자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냐? 지금 이 전쟁 비용을 가지고 풀어버려도 세상은 먹고 살 것인데 그렇게 될 것인데 이것이 인류가 추구하는 것이어요. 그 일에 천주교 교황이 대단히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았을 때는 거짓된 선지자가 천주교 쪽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물론 세대론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왜냐하면 그것만 세계적인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천주교처럼 그렇게 조직화되고 의식을 갖추고 그리고 정치적인 힘을 갖고 한 집단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상적으로는 전부 불교 신자여도 그 불교는 조직이 없어요. 그러나 천주교는 정치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 대통령도 거기 가니까 특사 대접을 받았지요. 그리고 거기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은 세계가 조심해야 되어요. ? 종교적인 자유가 인정받자 말자 이것은 삼류 국가거든요. 그러니까 종교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인권화된 국가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세계 평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 평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소망을 꺾을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심판을 말하고 있지 세계 평화를 말하고 있지를 안해요. 부활하신 예수께 복종하고 예수님의 통치 안애세만 참된 평화를 말하고 있지 인류가 서로 연합해서 한 질서를 가지고 한 정신을 가지고 그것으로 세상의 평화, 그런 것을 성경은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바벨탑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아니고는 인류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인류의 왕도 없습니다. 인류의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거짓이고 이 하나님을 신실히 증거하면은 세상에서 배제해 버리고 그것은 빼버리고 어떻게 인류의 공통성을 찾아가지고 종교를 하나되게 해야 되겠는가? 이것이 지금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만 주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증거하신 분만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그 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당할 핍박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한 핍박을 각오해야 됩니다. 말로는 우리들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시인해도 실재로 교회가 선포되는 복음은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하지를 않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하늘의 새 질서가 왔는가? 이런 구속사적인 설교를 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 믿어 복받을 것인가? 이것만 설교할 것 같으면은 그것은 말로는 예수를 믿어도 구약의 복들을 그대로 끌고 오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를 힘입어서 권세를 누리겠다는 것이지 사랑의 종으로 고난의 종으로 예수께서 버린바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모든 욕을 내 몸에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겠다는 그런 것은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말로는 예수를 믿어도 실은 모세의 종이요, 말로는 예수를 믿어도 그들은 탐심의 종으로 살고 있지 진정 사랑의 종으로 고난의 종으로 세상에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에 참예하는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 사는 그런 신앙고백은 가르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에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다 잘되어야 증거가 되지 예수 믿고 고난을 받으면 증거를 못해요. 이런 비참한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천주교보다도 더 나쁜 것은 말하자면 교회 자체에요. 천주교는 특징을 교회 개혁교회가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세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특성을 버리지 않고 교황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매자로 삼아서 신적인 권세를 노래하고 있는 것은 진정 비인간적인 집단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다 부인하고 있는데도 우리 개혁교회만큼은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우리들이 예수를 시인해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하늘의 새로운 질서, 먹고 마심을 이긴 새로운 생명의 질서,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사랑의 질서, 이런 것을 배우지 않고 예수 믿어서 만사형통하리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으로 거짓 신앙이요 진정 거짓 선지자입니다. 생기기는 어린 양처럼 생겼지마는 입에는 탐심이 가득해서 세상의 모든 미혹이 가득해서 이것으로 사람을 미혹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잘 구분하셔야 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새 것, 옛 것이 아니라 새 것,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서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것도 만국 중에 장자가 되고 높아지고 이런 복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땅의 장자가 아니라 하늘의 장자여서 우리가 장자는 장자이지마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장자가된 것이지 우리들이 세상에서 높아져서 장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각오하셔야 되어요. 주님 오시도록까지 어린 양이 끄는대로 가십시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목자장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으로 주셔서 우리와 한 몸 한 지체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았으니 교회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들에게도 그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 오시도록까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에서 고난을 우리의 기업으로 알고 하늘의 속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찬양하며 정결한 신부처럼 주님이 끄는대로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삶을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하나님 품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피와 주님의 살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먹고 마심에 매이지 않고 죽음에 매이지 않고 이제는 온전한 하늘에 속한 순종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그런 권세있는 백성으로 우리를 삼으셨으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만민이 믿을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는데도 세상은 주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히려 주님을 멸시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으로 내래하고 이것으로 세상의 구원을 찬양하고 오직 주 예수만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세상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셔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주님의 권세와 그 영광을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주셨사오니 주님의 버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멸시와 천시를 받을지라도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의 생명과 기업으로 받은 우리들이 주님의 몸과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처럼 말씀하고 주님의 손으로 수고한 것처럼 봉사하는 믿음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교회를 온전히 복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생명의 교제로 주의 백성들을 더욱 새롭게 하실려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보좌 우편에 취임하셔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우리 앞서 가신 목자장이신 예수님, 주님의 상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이처럼 주님의 생명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생명이 죽은자 가운데 부활하신 주께 있사오니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님의 권세를 기억하고 주님 오시도록까지 우리의 생명을 다해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봉사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의 백성을 인도해 주시옵고 더욱 넘치도록 복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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